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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30 22:5306.30

readingfantasy.pe.kr신촌역 화장실은 그닥 좋지 않다. 시설이 후져먹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새로 정비한 화장실의 시설은 꽤 번쩍거리는 편이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밥말아먹은 것이 분명한 연대생과 서강대생의 학벌을 주제로 한 파벌싸움, 작성자의 여성에 대한 극도로 왜곡된 시선을 반영하는 음담패설과 춘화, 그리고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식의 찌질한 글들과 각각의 글들에 달리는 인터넷 게시판 댓글식 낙서는 지워도 지워도 끝이 없었으니까. 분명한 것은, 성별이라는 장벽 덕에 이대생들은 그런 추태를 직접 목도할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대생 말이다. 지금 남자 화장실에 숨어서 칸막이 안에서 방금 슬쩍한 지갑을 열어 돈을 세고 있는 이 여자 말고.

'아 씨발, 신촌까지 납시면서 꼴랑 팔천원이 뭐야... 완전 거지 새끼 아냐. 재수 털렸네.'

노획물을 확인하기에 남자 화장실은 여러 모로 편리했다. 우선 소변기가 따로 있기에 좌변기 이용객이 절반 이하로 적었고 또 그래서 혼잡할 경우 줄 설 일이 없어 금방 지갑 내용물을 확인하고 카드와 현금과 기타 쓰레기들을 선별해내러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 화장실에 버려진 지갑은 일단 남자 소매치기의 소행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기에 자주 마주쳐 이제는 낯까지 익어버린 사복경찰 아저씨들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는 데는 좀더 용이했다. 물론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매너에 반한다고 지적할 수는 있을 테지만, 어차피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갈 때만큼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올 경우의 반응은 심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닥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당황하는 건 남자들이었지 그녀는 아니었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그러듯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척 보기에 소매치기 같은 밑바닥 직업을 가졌다기보다는 날라리 여대생 같은 낭창낭창한 몸매와 패션잡지 저가브랜드 소개란에 실릴 만한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남자들은 '오늘 죽이는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오더라'는 이야기거리를 만드는 선에서 그치기로 결심하고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누가 그녀를 전리품 확인하러 들른 소매치기라 생각하겠는가. 좀 싸이코 같은 여자라고야 생각하든지 말든지. 대범한 여인이다.

그녀는 나름대로의 프로였고 신용카드를 긁어 한탕 한다거나 하는 아주 나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것이 비윤리적이라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듯 꼬리를 밟힐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게다가 카드 도용은 제대로 잡혀들어갈 건수다. 아마도 교통카드 대용으로 쓰는 듯한 누런 카드 한 장이 지갑 안섶 속에 집혔지만 그녀는 꺼내보지도 않고 미련없이 내다버렸다. 오늘의 총 수입 이만 구천원. 밥값 제하면 이만 천원. 신촌은 밥값도 비싸단 말야. 이따 밤에 한 탕 더 떠야겠네.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그녀는 돈을 털어낸 지갑을 휴지 올려 두는 선반에 대충 던져놓고 막 일어나려 했다.

쾅.

흠칫 놀랐다. 뭔가 아주 묵직하고 커다란... 그러니까 사람만한 무게의 것이 저어기 어딘가에서부터 그녀가 있는 맨 왼쪽 칸 바로 문 앞까지 내던져지는 느낌이 문고리를 잡은 손과 다른 손으로 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귀에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절도 전문가의 예민한 감각은 뭔가 심상찮음을 감지하자 곧바로 문을 열던 손을 단속했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려 했지만 이곳의 화장실 문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중요 가치로 내세워 설계했는지 내다볼 틈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소리에 귀기울이기로 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씨벌네미야, 존나 처맞고 싶냐?"

굵직했다.

"자, 잘못했어요... 쿨럭, 봐주세요, 네? 제발..."

여자 아닌가 싶을 만치 가늘었다.

"시끄럽고, 넌 새꺄, 일단 좀 처맞고 나서 얘기해야겠다. 씨바...!"

씨바 끝에 이어지는 묵직한 둔음.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주먹을 행사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웬 여자가 문을 열고 나오는 것만큼 당혹스런 개그 상황도 드물 터였기에 그녀는 일단 좀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기로 했다. 웬 놈들이 대낮부터 쌈질이야, 남 영업 구역에서.

퍽, 툭, 푹, 하악 하악 하는 숨소리, 간간히 이어지는 씨바 씨바. 패는 쪽이나 맞는 쪽이나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좀 지나자 잠잠해지고, 굵직한 목소리가 약간 숨가쁜 듯이 말을 뱉았다.

"니미럴 놈, 조또 아닌 새끼가... 함만 더 걸렸담 봐라. 에이 씨벌, 힘만 뺐네."

저벅 저벅 저벅, 문 열리는 소린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 조용하길래 맞던 놈도 그새 어딜 갔나 하고 그녀가 막 문을 열려던 찰나,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흐흐윽... 분해... 분해! 저딴 새끼 때문에 이런 꼴로... 내가 남자야, 흑, 내가 남자냐고? 확 찔러죽여 버릴까? 흐, 흐윽... 저 새끼를... 찔러..."

귀찮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판단이다. 그녀는 일단 더 기다리기로 했다. 바깥 상황에 신경쓰느라 앉지도 않고 서서 문고리를 잡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터라 부자연스런 자세였고 그래서 몸은 점점 뻐근해져 왔다. 아 씨발. 병신 둘이 육갑떠는 통에 내가 뭔 죄야. 울먹 울먹 하던 목소리는 잠시 후 세면대에서 수도꼭지를 틀더니, 졸졸졸 흐르는 물에 세수를 하며 코를 풀다가 또 울다가 하다가, 수도꼭지를 잠그고, 덜 풀린 코를 흥흥 하는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굵은 목소리가 여린 목소리를 두들겨패는 동안 잠시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듯,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자 왠지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면서 그들이 반가워졌다. 다시금 시간이 흐르면서 굵은 목소리와 여린 목소리를 그 사람들이 쫓아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문을 열고, 놀란 남자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태연하게 걸어나갔다. 남겨진 지갑은 줍든지 말든지. 이 장사 오래 하다 보니 별 개떡 같은 시츄에이션에 다 처한다고 생각하며 스물아홉, 절도 전과 3범의 그녀는 시간 때우러 잠시 피시방으로 향했다. 이 동네는 피시방까지 비싸단 말야. 썅.

화장실에 남겨진 채 별 미친년 다 있다며 중얼거리던 남자들 중 하나가 손을 씻으려다 투덜거렸다.

"아, 씨발, 수도꼭지가 고장났음 고장났다고 써놓든가! 왜 둘 다 물이 안 나오고 지랄이야? 손에 비누 짜놨는데..."



* * *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사복경찰들은 어슬렁거렸고, 연대생과 서강대생은 불꽃 튀는 찌질접전을 벌였으며, 이대생들은 새초롬했고, 홍대생들은 제 멋에 취했고, 취객들은 바닥 재질이 대리석이건 타일이건 가리지 않는 공평한 자세로 파전거리를 만들어댔고, 노숙자와 새내기와 노점상과 복학생과 머리 하러 술 마시러 영화 보러 온 사람들은 우글거렸고, 개중 노숙자를 제외하면 각 부류의 인간들 중 한 명씩은 모두 그녀의 희생양이 되었다.

툭, 슬쩍, 아이쿠 죄송합니다. 어수룩한 절도 피해자에게 받는 사과는 새침떼기의 흥 하는 눈초리 혹은 마주 죄송합니다 하는 착한 아가씨의 고개숙임으로 맞받아친다. 번화가 대로변을 누비는 유달리 예쁜 아가씨라고 하면 무조건 눈요기 대상이 되지만 그런 시선의 부담스러움만 떨쳐낼 수 있다면 그럴싸한 외모는 과업수행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목표물의 눈을 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패셔너블한 옷가지들은 대체로 보안에 취약하다. 헐렁한 주머니, 뒷주머니에 꽂은 지갑, 일부러 연 채 걸치고 다니는 백, 너무 여러 가지를 걸친 나머지 각각의 치렁치렁한 감촉에 정신없어지는 패션 등은 좋은 목표물이었다. 심한 경우엔 장난삼아 귀걸이를 하나 떼가도 모르던걸.

손놀림이 워낙 정교해 안마사를 했어도 잘 했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사실 그녀의 어릴 적 꿈은 마술사였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재주가 좋아봤자 마술까페 동호회 시삽 이상은 될 수 없으며, 직업적 마술은 돈과 사교성이 제법 필요한 직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대충 포기한 그녀의 적성은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들렀던 신촌역의 화장실에 그날도 들어갔다. 일전에 있었던 괴상한 일 같은 것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날 낚은 예쁘장한 여자용 지갑 3개를 한꺼번에 꺼내들고 만원짜리와 천원짜리, 동전 나부랭이를 분류하고 있던 중이었다.

"오빠, 여긴 싫어..."

여자다.

"가만 있어 봐. 잠깐만..."

남자다.

"아아..."

"흡..."

이런 젠장. 초짜 연인들이 그들만의 삼류 에로라도 찍는 모양이었다. 공공장소에서 뭐하는 짓이야? 공공장소에서 절도영업을 하는 인생 주제에 그녀는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연애라고 해봤자 이 바닥에서 비슷한 밑바닥 인생끼리 하게 될 것이 진저리나도록 싫어 생각도 않고 살았기에 흔히 말하듯 염장이 질린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쪽쪽 후르륵, 하아, 하아. 웬 쩝쩝 소리야. 무슨 가쓰오 우동 먹냐. 잡것들.

확 문 열고 나가버릴까 하던 찰나에 갑자기 화장실 문 쪽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하는 후다닥 하는 소리. 병신들, 쌤통이다. 빠르게 걸어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들어온 발걸음은 허흠 하는 헛기침을 하곤 소변기에 가래를 뱉는다. 그녀는 그쯤 해서 더이상 바깥 일에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지갑 내용물 분류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칠만원도 넘을 듯하다. 나이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운운하며 그녀는 속으로 낄낄거렸다.

그리고 그리고 돈 계산을 다 끝낸 그녀가 화장실 문을 열어젖히며 걸어나오자 밖에서 소변을 보던 아저씨는 기겁을 해 누던 소변이 뚝 멈출 지경이었다. 그녀가 아저씨에겐 눈도 안 돌리고 사라지고 나서 아저씨는 중얼거렸다.

"허 참. 난 아까 나간 그 자식이 여자 목소리 낸 건 줄 알았더니 저 여자 목소리였나 보네. 세상에 별 놈 별 년 다 있지. 쩝. 놀래라."



* * *



성실한 소매치기는 월요일에 쉰다는 철칙을 그녀는 늘 고수하고 있다. 늘 대목인 휴일에 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렇게 주말 특수를 누리고 나면 심신이 피곤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늘 이 바닥이 싫었고 그래서 남자친구조차 만들지 않았던 고고한 그녀는 비슷비슷한 인간들과 놀아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친구는 몇 없었다. 그 몇 없는 친구들 중 하나와 마주앉아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휘저어 액화시키면서 그녀는 혀를 찼다.

"자식아, 아무리 폐인 오타쿠 찌질이 캥거루족이라지만 옷은 좀 챙겨입고 다녀라. 무슨 도 닦냐?"

폐인 오타쿠 찌질이 캥거루족인 친구는 발끈한다.

"이 옷이 뭐 어때서? 오늘 세탁한 거구만."

하나하나 지적해주자.

"반바지 밑단 튿어지고, 티는 물 빠졌고, 신발도 두 달 안에 앞에 구멍 나겠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된 게 지난달에 만났을 때랑 바뀐 게 양말 하나뿐이냐? 으유, 인생아. 누가 니 배필 될지."

"니가 해라?"

말이라도 고맙다. 졸부 2세, 고등학교 동창, 만성적 구직포기자, 천하의 프라모델 오타쿠인 내 십여년지기 친구녀석은 '삶을 풍요하게 만드는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소매치기 동창을 배제하지 않을 만큼 열린 사고방식과 양아치적 가치관을 가진 녀석이다. 웬만한 남자놈들이라면 농담으로라도 하지 않을 말이지만, 농담은 농담이니까.

"됐다. 니 옷 빨다 늙어 죽을 일 있냐? 치우고, 여튼 좀 사입고 댕겨. 만원짜리로 신발 깔창을 해도 무방할 집 자식이 그게 뭐하는 짓이야."

"그런 부는 허세니까."

얼라리요. 됐다, 이놈아. 피식 웃으면서 숟가락을 뜬다. 하지만 숟가락에 담긴 내용물은 그닥 식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한 시간 정도 수저질을 해댄 끝에 남녀의 침범벅이 뒤섞인 녹은 요구르트 찌꺼기라는 것은 술자리의 지저분한 벌칙으로 원샷을 시키는 데나 쓸 법한 물질이었다. 수저를 던지듯 화채그릇에 놓는다. 퐁.

"허세 안 부리는 실세라 좋겠다. 그나저나 사람이 옷 좀 예쁘게 입고 왔으면 좀 아는 척이라도 해 주면 안 되냐?"

"시집 오긴 싫다더니 여자친구 행세는 하려고 드네. 어차피 짝퉁인 거 뭐 그리 티내고 싶어서."

뜨끔. 하지만 허세는 부려 본다. 부는 없어도 허세는 남은 터라서.

"야, 짝퉁은 무슨? 패션에도 관심 없는 녀석이 넘겨짚기는. 나라고 늘 싸구려만 걸치는 줄 아니..."

"그렇게 당황할 거 없어. 꼬리표 보고 안 거니까."

헉, 하고 놀랐다. 꼬리표? 그제사 둘러보니 블라우스 한쪽에 미처 떼지 못한, 플라스틱 줄에 매달린 후줄근하고 대충 만들어진 길바닥 아울렛식 가격표가 붙어 있다. 어머 젠장. 녀석은 낄낄거린다.

"것봐. 허세라니까 자식아. 그러니 피차 피곤하게 그런 걸로 신경쓰지 말자."

녀석은 몇 마디를 더 했지만 그녀에게까지 와닿지는 않았다. 꼬리표를 끊어내려 애쓰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꼬리표. 값어치를 생소리로 외쳐대는 이놈의 자릿수 몇 안 되는 동그라미들. 사자마자 진저리치며 떼내려 들어도 끈덕지게 붙어서 나를 망신주고 무릎꿇리고 어깨에서 힘을 빼 버리는 꼬리표. 나일론도 아닌 플라스틱으로 된 줄은 질겨서 잘 끊어지지도 않는다.

그 꼬리표에,
소매치기 도둑년.
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다.

"어... 야, 왜 울어? 자식이 미안하게... 허세니 그거 농담이야, 농담이었다구."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짙은 마스카라가 조금씩 번져나가다 뺨의 파운데이션을 가르며 검은 선을 내리긋는 모습은 너무 티가 났다. 친구는 당황한다. 자기가 놀려댄 것 때문에 그러는 줄 아는 것이다. 오타쿠답게, 여자의 이런 반응에는 익숙치 않다.

"짝퉁이면 어떠냐. 그래, 너 옷 이뻐, 이뻐. 응?"

민망해서 고개도 들지 못하지만, 숙인 얼굴 밑에서 나오는 말은 표독스럽다.

"닥쳐. 혀 뽑아버리기 전에..."

갖은 추태 다 보이는구나. 허둥대는 녀석을 두고 그녀는 콤팩트를 챙겨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눈물 흘린 적 없는 그녀로 다시 변신하기 위해서.



* * *



치마보다는 바지가, 힐보다는 가벼운 스니커즈가 좋았다. 만일의 경우 재빠르게 도망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면도칼 한 장쯤 앞섶에 숨길 수 있는 블라우스의 장식용 주머니 정도는 좋지만, 가방을 둘러메는 데 방해가 되는 레이스 따위가 지나치게 많아선 안 된다. 노획물을 재빠르게 옮겨담아 보관할 가방은 여닫기 편해야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끔 나들이를 해 준다. 신촌역 한 곳에서만 활동해선 안 되었으니까. 경찰들은 바보가 아니다.
남색 블라우스에 흰 면바지를 입고 번화가를 돌아다니는 철부지 여대생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삶은 늘 기능적이었다.
철저하게 합리적이기도 했다.
그래,
합리적이었다.

남 눈에 띄기 전에 떼놓지 못한 꼬리표가 어른거려 자취방에서 그 날 밤은 혼자 소주를 마셨다. 친구놈 앞에서는 주책없이 튀어나오던 눈물이 혼자 궁상을 떨 때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눈시울만 간신히 적셨다. 시쳇말로 '안습'이었다.

숙취에 조금 지끈거리는 머리를 수습해 며칠만에 신촌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왠지 영업이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지트인 남자 화장실 맨 왼쪽 칸으로 들어갔다. 버려둔 지갑들은 누군가가 수거해 간다. 그 누군가가 지하철 공익이든, 화장실 청소부든, 땡잡았다며 좋아할 행인이든 어쨌든 그녀가 버려둔 지갑들은 없었다.
왜 없는 거야.
누군가 다녀갔다는 증거가 그녀가 남겨둔 무엇인가의 부재 뿐이라는 것이 그날 따라 그녀를 한없이 짜증나게 만들었다. 썅, 그날도 아닌데 왜 이러지.
그리고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 *



"... 필요없어."

깔끔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전화 통화를 하는 듯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는 상대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째 익숙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화장실 칸막이 안에 있으면 간혹 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은 남자 화장실이고 여자 화장실이고 마찬가지였지만, 대충 대엿새 간격으로 같은 칸에서 같은 식으로 바깥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은.

"됐어. 괜찮으니까 끊어... 우는 거냐? 누가 보면 네가 피해자인 줄 알겠다. 같잖으니까 그만 입 닫아."

실연의 현장인가 보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평일 낮의 신촌역 화장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밖도 조용한 편이었다. 그런데 크지도 빠르지도 않은 남자 목소리에 대답하는 상대방의 수화음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예민한 편인 그녀에게는 그것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이상해. 이상해.

"나... 화나게 하지 말고 닥치라고. 못 알아듣겠어? ... 불쌍해 보이지도 않아."

말하는 간격도 이상했다. 너무 짧았다. 상대가 뭐라고 말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마치 드라마에서 배우가 전화 받는 연기를 하듯이, 상대방이 말하느라 기다려 주는 시간이 그리 길게 할애되지 않았다. 어색했다.

며칠 전 상황까지 오버랩되면서 그녀의 어색함은 점점 더 심해졌다. 싸움박질, 연애질, 실연, 신촌역 화장실이라는 한 장소에서 며칠의 간격을 두고 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날 일 같지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확 밀었다.

작달막한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신입 노숙자 혹은 장기 고시생 같은, 어제 만난 친구녀석이 단정해 보일 만치 볼품없는 차림새의, 엉망인 얼굴에 입을 반쯤 벌리고 이목구비가 좀 일그러진, 누가 봐도 호감을 갖기 힘든 모습의 20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남자. 좀전까지 말하고 있던 단정한 말투의 주인공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게다가 흐리멍덩한 눈 한쪽은 백내장인지 의안인지 뿌옇게 흐렸다. 하지만 구걸인구가 넘쳐나는 서울 지하철이 활동무대인 그녀에게 그런 모습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녀는 다른 곳에 주목했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있지 않았다.

아연실색한 그녀의 입이 열렸다.

"당신... 뭐야?"

어안이벙벙한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한 채 그녀와 마주보고 있더니, 갑자기 힉 하는 소리를 내며 냅다 화장실 문 밖으로 도망쳤다. 걸음까지 절름거렸기에 빠른 도망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따라나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엉겁결에 도망쳤지만, 그리고 얼떨결에 붙잡았지만, 사실 도망칠 상황도, 쫓아가 붙잡을 상황도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그렇게 했다. 왜 도망치는지, 왜 붙잡는지도 모른 채. 어안이벙벙한 채.

연기하듯이.



* * *



그 자신의 견해를 따르자면, 그는 노숙자가 아니었다. 그는 삶의 위대한 연기자였다.

그는 연극배우 지망생이었다. 주위에서는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들 했다. 국립극단에 들어갈 꿈을 꾸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정과 그 충격로 인해 폐인이 되어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유약했던 그는 그 과정에 아무 것도 손댈 수 없었다.

파탄이 난 가정의 틈새에서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배우 지망생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자 자기 손에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연극 일을 맨주먹에서부터 시작하려는, 끝없이 어려워 보였던 시도 대신 그가 택한 일은 교통사고 보험금 사기단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사람을 속이는 것이 꿈이었던 그가 무대 아래에서 사람을 속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자 그의 인생은 날로 풍성해졌고 영업 방식도 다종다양해졌다. 길거리에서, 도로 위에서, 피서지에서, 노인정에서, 공항에서... 마지막 고객이 하필 폭력조직 간부급이었다는 것이 그의 연기 경력의 유일한 오점이라면 오점일 것이다.

"흔히 영화에 나오듯이 야산에 끌려가긴 했지만, 파묻진 않았어요. 그냥 던져 버리더군요. 10미터 좀 안 되는 되는 높이에서." 그는 검지로 눈구멍 안쪽의 의안을 누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죽었어도 할 말 없었겠지만, 나무에 걸리는 통에 이거랑 한 쪽 다리가 목숨이랑 교환됐지요. 해적 같죠?"

그녀는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아까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그럼 여지껏 화장실에서는 뭐 하고 있었던 거에요?"

"인생을 연기했습죠. 내가 살아 보지 못할, '저것들'의 인생을."

그는 '저것들'이라고 말하면서 지하철 플랫폼 벤치에 앉은 그들 둘의 앞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켰다.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 비웃음이 묻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곧이어 이 비참한 몰골의 인간이 저 많은 '정상적인' 이들을 비웃는 모습을 보며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곧이어 그녀는 그의 찌그러진 얼굴에 자부심과 미소와 활력이 확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비스듬한 어깨를 최대한 반듯하게 폈다.

"내가 내 목소리만 가지고 수도꼭지 물 내려가는 소리를 내는 걸 들었어요? 두들겨맞는 소리는요? 남자가 여자를 애무할 때 여자 입에서 터져나오는 거친 신음소리, 젊은 양아치에게 얻어맞고 비틀거리는 늙은 노숙자의 훌쩍거림, 나는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목소리로 옮겨내고 재구성하고 펼쳐낼 수 있어요. 못하는 게 없지요!"

성대모사가 배우의 자질이라면 옥동자는 연극계의 거물이 됐을 터였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신촌역 정거장에 울린다. 그는 계속했다.

"나는 진흙에 묻힌 진주, 부장품으로 묻힌 보물, 세상이 멍청하게 흘려버린 귀중한 재능의 소유자에요. 엿 같은 세상 따위, 뼈저리게 후회하라지! 브라운관과 스크린, 은막들을 메우는 한심하고 얼간이 같은 지금의 배우놈들 따위, 사람의 마음을 울릴 줄을 몰라요.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세상이라는 놈은 그 값어치도 모른 채 나를 이렇게 내팽개쳤어요! 보라죠. 나는 이 구질구질한 2호선 화장실에서 이 재능을 살리지 못한 어리석은 시대를 비웃고 있어요. 장소가 화장실인 것도 하나의 비틀린 냉소였지요. 그런데 남자 화장실에 앉아 있던 당신은 내 관객이었단 말이죠!"

그는 열에 들떠 한물 간 프랑스 흑백영화 배우처럼 떠들어대고 낄낄거리고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듣고 있는 그녀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다지 연기 잘 하는 것 같진 않은데. 당신이 하는 건 그냥 성대모사야. 허접하고 어색했어. 내가 그때 뛰쳐나온 건 어색함을 느껴서야. 과장되고 공감가지 않는 1인 상황극.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보여진 길거리 공연이라면 나름대로 시도야 좋았다지만, 거기서 끝이었어.

하지만 나는 당신의 공연을 어색하다고, 조잡하다고, 허접하다고 말하지 않겠어.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진입하면서 느려지는 열차의 카당카당 하는 소리에 그녀는 대답을 실었다.

"그래요, 멋졌어요."

당신의 삶에서 이제 당신 자신을 유지하게 해 주는 건 그것뿐이니까.

혼자서 1인 2역을 맡으며 화려한 조명을 받는 무대 위가 아닌 그 아래에서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사람들의 삶을 연기, 아니 흉내내면서, 당신은 누군가 제발 봐주기를 무의식중에 애타게 바랐을 거야. 제발 누구라도, 이 구석진 화장실 안에서 당신들을 따라하고 닮아가고 흉내내는 원숭이 같은 내가 있음을 좀 알아 달라고, 나는 이 흉측한 몰골과 가혹한 팔자 덕에 너희들에게 다가갈 수 없으니 너희들이라도 제발 이곳에 찾아와 달라고, 자신을 부장품에 비교했다면 누가 제발 능을 파헤치고 들어와 도굴이라도 해 달라고 말이야. 당신의 무대가 골방이나 지하실이 아닌 공공 화장실이었던 것도 그래서였겠지. 자조와 비웃음 역시 당신 자신을 향한 거고.

당신도 끝끝내 당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이 구역질나는 곳에서 맴돌고 있었구나.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그녀의 칭찬 한 마디에 그는 외눈에 앞니가 빠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열차가 멈췄다.



* * *



그들은 그녀의 자취방에서, 추세를 따라 도수는 점점 내려갔지만 결국 취하면 엉망이 되는 것은 20년 전이나 마찬가지인 소주를 마시고 관계를 가졌다.

행위의 도중, 문득 그녀는 그 예전의 화장실에서 그가 흉내내던 여자의 신음소리를 떠올렸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괴하고 눈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지만, 그는 어쩌면 갖지 못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며 환상을 그려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환상이 아닌 실체인 여자의 몸, 남자의 몸은 땀과 살과 질퍽거림과 차게 식어감과 새벽의 고양이 울음 소리 사이에서 미끈거렸다. 그는 실체를 붙잡으려는 듯 자꾸만 허우적거렸고 그녀는 그 허덕임에 호응했다. 게걸스러웠고 안쓰러웠다.

아니, 연기였다.
그녀는 그의 관객을 그는 그녀의 배우를.
어쩌면 그들이 연기하고 있었던 것은 외로움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 * *



노숙자인 그에게 그녀가 훔쳐갈 지갑이 없었듯, 그 즈음의 신촌 바닥에는 그들 둘에게 열광할 관객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연대생과 서강대생은 여전히 불꽃 튀는 찌질접전을 벌였고 이대생들은 더더욱 새초롬했으며 사복경찰은 하릴없이 어슬렁거렸고 취객들은 바닥이 대리석이건 타일이건 보도블럭이건 아스팔트건 가리지 않고 사해평등하게 빈대떡 재공품을 만들어냈지만,

그들 중에 관객은 없었다.


===

the Beast 님은 환타지 읽기 Reading Fantasy에서 장편 [지웅이 이야기]를 연중 상태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많은 중/단/엽편들을 생산해서 환타지 읽기 중단편선에 다수 수록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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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No Profile
    배명훈 06.07.03 13:03 댓글 수정 삭제
    Reading Fantasy, "감상 비평 중심"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거기 보니까 이 글에 대한 평도 있던데. 거울은 그에 비해 좀 덜 살벌하달까. 단편의 맛은 뭘까 생각하게 만드는 대화가 실려 있더군요.
    한마디 끼어 보자면 단편은, 일격필살이랄까요. 사방에서 날아드는 자잘한 공격을 다 막으려고 하면 안 되고 피가 좀 나더라도 결정적인 곳을 노리고 딱 한 번만 휘둘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 휘둘러도 좀 그렇고, 그 결정적 한 번을 안 휘둘러도 안 되는.. 그렇기 때문에 장편과는 다른 장르의 글인 것 같아요.
    이 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와서, 굉장히 좋은 위치에서 굉장히 결정적인 위치를 노려보고 있는 글입니다. 결정적인 일격이 스스로에게로 휙 되돌아와서 자기 자신을 찌르고 말았습니다만, 매복 지점은 제대로 섬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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