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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k.com난 항상 페이나 숲을 지나곤 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는 금지된 구역이 되었지만, 아주 오래 전엔 사냥감을 구하기 위해 자주 페이나 숲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페이나 숲은 지금과 달리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었다. 그 넓고 울창한 숲은 태고적 비밀을 간직한 것 같은 신비로운 광경의 연속이었고, 온갖 비밀스런 생물들이 살던 곳이었다. 난 그 날도 어김없이 사냥감을 찾으러 페이나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페이나 숲에서의 사냥은 언제나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 했다. 어느 것이 나오지 못하는 이 신비로운 숲에서 도에 넘는 사냥을 하는 것은 숲의 분노를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이나 숲을 알고 있는 사냥꾼들은 항상 잡는 것만 잡는다고 하였다. 어차피 사냥의 목적은 고기와 가죽이었다. 난 멧돼지를 주로 잡았는데, 그 날도 멧돼지의 발자국을 발견하여 추적하고 있었다.

웰치의 팔 나무를 지나 태양빛 호수가 있는 곳으로 도달했다. 그리고 호숫가에서 한가로이 물을 마시고 있는 사슴무리를 보게 되었다. 사슴무리 속에서는 인생에서 한 번 볼까 말까한 흰사슴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의 말로는 사슴무리에 흰사슴이 있으면, 주로 흰사슴이 사슴무리의 우두머리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난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꺼내어 들고 흰사슴을 겨냥했다.

그것은 나의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의한 행동이었다.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나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흰사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난 가만히 흰사슴을 응시하였다. 흰사슴은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사슴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호숫물을 먹는 사슴을 살펴보기도 하고,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마치 어머니와 아이들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평화롭고 아늑한 분위기에 휩싸여 당겨진 활 시위를 그만 놓치게 되었다.

난 풀 숲에 놀라서 뒤로 넘어졌고, 날아간 화살은 깨끗한 곡선을 그리며 흰사슴 왼쪽에 있는 암사슴을 맞추었다. 사슴무리는 놀라서 여기저기 도망치고, 난 어떤 적의를 느끼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흰사슴이 나를 찾아내고 노려보았던 것이다. 난 움직일 수 없었다. 흰사슴의 까만 눈은 점점 붉게 물들어 나를 노려본 채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흰사슴은 날 책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 섞인 눈으로 나의 눈에 맞대었다. 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게 되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렸다. 흰사슴은 콧김을 내뿜으며, 나의 눈물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 손에 들려 있던 활을 물어 가져가 호수에 던져버리고, 죽은 사슴의 시체를 끌고 사라졌다.

그 후, 나는 페이나 숲에서 사냥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아니 사냥 자체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나의 손이 생명을 죽이는 죄책감에 빠져, 제대로 된 사냥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난 평범한 농사일을 하기로 하였다. 내 성격에는 맞지 않았지만, 아는 것이 사냥 말고는 농사 밖에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2.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페이나 숲의 내가 살고 있는 도란 마을은 베르베도스 백작의 영지에 속해있는 농노마을이었다. 그때 나는 농사일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재미를 붙이고 있던 때였다. 베르베도스 백작은 앙숙인 다도란도 백작과 전쟁을 선포하여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베르베도스 백작은 군수물자를 준비하기 위하여 농노들에게 많은 양의 수확물을 원했다. 농노들은 속으로 백작을 욕했지만, 어느 누구도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베르베도스 백작은 천성이 다혈질이고 자존심이 셌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였다. 어느 정도 하찮은 농노들을 배려해 주기도 했으며, 이상한 습관 같은 것도 없어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었다. -적어도 쪼잔하고 변태적인 행동을 하는 다도란도 백작보단 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번은 베르베도스 백작의 아들인 바젠도스가 도란 마을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바젠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으로 영지의 일을 조금씩 늘려 처리하곤 했다. 바젠도스는 아버지와 많이 비슷한 성격이었다. 그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외모도 출중하고, 검술도 뛰어난데다, 아는 것도 많으며, 결단력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점은 다혈질에다 자존심이 강하며, 사냥을 그렇게 좋아했다는 것이다. 업무 중에도 사냥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갈 정도로 좋아했다고 전해졌다.

바젠도스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도란 마을에 왔을 때, 페이나 숲에서 사냥할 생각으로 사냥복을 따로 가지고 왔었다. 난 그를 보면서 '사냥을 그렇게 좋아하나'하고 옆집 아저씨와 함께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었다. 바젠도스는 장원관리인과 징세관 그리고 촌장과 함께 수확물을 계산하며,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가 지나서 촌장이 바젠도스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나는 바젠도스의 등장에 의아해 했다. 촌장은 나에게 말했다.
"자네에게 부탁 좀 함세. 바젠도스님께서 페이나 숲의 사냥을 원하신다네. 자네가 사냥일을 그만 둔 것은 알지만, 그 숲에서 가장 많이 사냥한 것은 자네가 아닌가. 부탁 좀 하네. 오늘 한 번만 바젠도스님과 함께 다니면서 페이나 숲을 안내해 주게나."

바젠도스는 나를 보며 목례를 하곤, '부탁하오'라고 얘기했다. 난 속으로 '어지간히 사냥을 하고 싶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페이나 숲을 안내를 허락했다. 흰사슴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일이 많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거절을 하면 마을은 큰 불이익을 받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난 오랫동안 묶혀 두었던 먼지 쌓인 사냥복과 근처 사냥꾼 동료에게서 빌린 여분의 활과 화살을 들고 바젠도스를 페이나 숲으로 안내할 준비를 마쳤다.

바젠도스에게는 그를 호위하는 기사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늙은 노인이었는데 얼굴에는 여기저기 흉터가 나있었으며, 오히려 보통 젊은이 보다 몸이 더 좋았다. 그는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올리돈이요'라고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나머지 기사를 보았다. 그는 바젠도스와 비슷한 나이로 짧은 머리를 가졌으며, 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의 눈이 흔하지 않는 에메랄드 색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바젠도스는 그 모습을 보고, 기분 좋다는 듯이 웃고는 '그는 달라스요. 나의 호위를 맡고 있지. 올리돈은 기사단 출신으로 나와 사냥을 자주 다니는 사람이지. 그의 화살은 과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네. 기대해도 좋네.'라고 얘기했다. 올리돈은 바젠도스의 칭찬에 '과찬의 말씀을'이라 말하며, 목례를 했다.

"자, 준비를 마쳤으면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이렇게 하여 나와 바젠도스 그리고 그를 호위하는 두 명의 기사인 올리돈과 달라스와 함께 페이나 숲으로 사냥을 떠났다.


3.

난 바젠도스들을 페이나 숲 근처에서 사냥하게 했다. 왜냐하면 깊숙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페이나 숲 근처에는 토끼나 여우 같은 작은 동물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바젠도스는 슬슬 사냥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봐. 페이나 숲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숲인데. 이런 작은 동물 밖에 없나? 왜 숲 안으로 들어가지 않지? 혹시 날 무시하는 건가?"

바젠도스는 나에게 따져 물었다. 난 숲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전에 보았던 흰사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바젠도스는 '모든 것이 느낌으로 설명해주지 않아. 그렇게 좋은 사냥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왜 말해주지 않았는가? 당장 자네가 흰사슴을 보았다는 태양빛 호수로 가세.'라고 말했다.

난 일전에 보았던 태양빛 호수에 다시 오게 되었다. 나와 바젠도스 그리고 두 기사는 관목류 나무 뒤에 숨어서 사슴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흰사슴은 없고, 전에 보았던 사슴무리보다 작은 수가 모여 호수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다. 바젠도스는 '음. 흰사슴이 없군. 그렇다면, 흰사슴을 불러오는 게 어떻겠나? 좋은 생각이지 않나?'라고 날 보며, 말했다. 바젠도스는 내가 아무 말도 없자, 뒤의 두 기사에게 동의하냐는 식의 제스쳐를 취했다. 올리돈은 '동의합니다. 바젠도스님.'이라 했고, 달라스는 '예'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바젠도스는 일어나 화살을 메겨 장전한 채로 사슴무리를 겨냥했다.

"그럼 동의하는 것을 알고, 사냥을 시작하겠네." 바젠도스는 활시위를 놓았다.

두 기사도 바젠도스가 활시위를 당기는 것에 맞춰, 활시위를 당기고 사슴무리를 공격했다. 사냥에 능숙한 세 사람은 놀라서 도망가는 사슴들을 죽였다. 많은 사슴들이 활에 맞아 죽고, 그들이 흘린 피는 호숫물에 잠겨 태양빛 호수를 붉게 물들게 했다. 얼만큼 사냥을 했을까. 난 갑자기 호수에서 걸어 나오는 흰사슴을 보게 되었다. 아니 흰사슴은 활에 맞아 죽은 사슴들의 피로 붉게 얼룩진 채, 나와 바젠도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젠도스는 사냥에 흥분된 상태로 화살을 흰사슴의 정면에서 쏘았다. 하지만 그가 흥분한 탓인지, 아니면 흰사슴의 능력인지 몰라도 그가 정면에서 쏜 화살들은 모두 옆으로 빗겨나갔다. 올리돈은 바젠도스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뒤쪽에서 화살을 쏴 맞췄다. 그러자 흰사슴은 죽지 않고, 오히려 올리돈 쪽으로 뒤돌아 보았다. 올리돈은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흰사슴을 향해 계속 활시위를 당겨 쏘았다. 난 그가 쏜 화살이 처음하고는 달리 빗나가는 것을 보았다.

올리돈은 더 이상의 사냥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흰사슴을 향해 계속 활을 쏘면서 바젠도르에게 말했다.

"바젠도스님, 이제 더 이상 사냥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 사냥꾼과 달라스와 함께 마을로 먼저 가십시오. 제가 나중에 뒤따라 가겠습니다."라며, 흰사슴을 도발하고 숲 안으로 사라졌다. 바젠도스는 멍하니 올리돈의 행동을 지켜보더니, 떠나자고 명령을 하였다. 나는 바젠도스 그리고 달라스와 함께 페이나 숲을 정신 없이 빠져 나왔다.

우리가 페이나 숲을 빠져 나왔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바젠도스는 끝까지 올리돈을 기다렸지만 올리돈은 오지 않았다. 나는 페이나 숲을 잘 알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그를 찾아본다고 말했다. 바젠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나의 행동을 허락했다.

난 페이나 숲을 빠르게 달려가 태양빛 호수에 도달했다. 피로 물든 태양빛 호수는 밤이 되어 그 빛을 잃지 않았다. 난 페이나 숲에서 올리돈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찾아낸 것은 태양빛 호수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피로 물든 칼을 찾아낸 것뿐이었다. 바젠도스는 내가 찾아낸 칼을 보고,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숲을 바라보고 얼마 뒤,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없이 사람들을 이끌고 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몇 일이 흘러 백작의 수색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나에게 페이나 숲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었다. 촌장에게도 물어본 것이 틀림없는지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나에게 온 것이었다. 도란 마을은 한 동안 백작의 분노에 희생양이 될 것 같아 두려웠지만, 다행이 그런 일은 없었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는 바젠도스는 몇 년간 사냥을 금지 당했다고 한다. 페이나 숲은 백작의 명령에 의해 출입과 사냥이 금지되고, 개간지로 쓸 것을 명령했다.

4.

사람들은 페이나 숲의 많은 나무를 베고 불태워 개간지로 만들었다. 물론 바젠도스의 사냥에 대한 소문이 퍼져 태양빛 호수 근처에는 개간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페이나 숲은 넓기에 개간으로 인해 사람들이 늘어나고, 수확물이 늘어나면서 도란 마을은 많이 발전했다. 나도 촌장의 딸인 엘린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 얻었다.

도란 마을은 늘 평화로웠다. 시간이 흘렀고, 페이나 숲의 아름다움은 예전 같지는 않지만 변하지 않았다. 베르베도스 백작이 죽고, 바젠도스가 백작에 올라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 앙숙관계이던 다도란도 백작도 죽어서 그의 아들인 델두란도가 백작의 자리에 올랐다. 다행히도 베르베도스 백작과 다도란도 백작과의 전쟁은 페빌리즈 후작의 개입으로 쉽게 해결이 되었고, 그의 아들들은 두 백작보다 심각한 앙숙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냥을 좋아해서 자주 시간을 마련했으며, 그것을 통한 경쟁으로 자존심 대결을 펼친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언젠가 엘린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태양빛 호수에 대한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엘린이 무슨 생각 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난 내가 페이나 숲의 태양빛 호수에 대한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엘린은 나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고 말했다.

"옛날에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난 엘린에게 그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엘린은 날 가만히 보고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페이나 숲을 바라보곤 했었어. 그리고 내가 뭐하시냐고 물어보면, 할아버지께서는 페이나 숲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지. 언제나 할아버지께서는 숲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셔. '이 숲은 크기가 큰 만큼 신비로운 것들이 많단다. 이 숲은 언제나 태고적 신비와 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단다. 그 무엇도 신이 머문 자리를 파괴할 수 없단다. 신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빛의 여운이 남고, 빛의 여운이 남는 곳에는 요정들이 살게 된단다. 요정들은 신의 빛을 먹고 살거든. 빛의 여운이 남은 자리를 침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란다. 엘린. 너는 빛의 여운이 머무는 페이나 숲에 들어가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어. 아~ 나 페이나 숲에 대한 이야기 많이 아는데, 지금 이야기 해줄까?"

그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난 빛의 여운이 남은 태양빛 호수를 생각하고 있었고, 더 이상 페이나 숲을 생각하기 싫었다. 난 엘린에게 나중에 딸이 이야기를 들을 만한 나이가 되면, 그때 실컷 해주라 말했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다.

다음 날, 백작을 실은 마차 두 대가 도란 마을에 도착했다. 그때 난 장작을 패고 있었다. 멀리서 촌장의 아들인 데올린이 날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난 무슨 일인가 싶어, 장작패기를 멈추고 데올린에게 다가갔다.

"형, 우리 아버지께서 부르셔."

'촌장님께서?' 난 의아한 생각에 데올린과 함께 촌장 댁으로 갔다. 그곳에는 바젠도스와 그의 호위기사인 달라스가 있었다. 달라스는 변함없는 에메랄드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바젠도스 백작도 성격은 여전했다.

촌장님은 여전히 미안하다는 말로 나에게 사냥을 안내하라 부탁했다. 난 어쩔 수 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바젠도스 백작은 델두란도 백작과 흰사슴을 사냥하는 내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잡을 것인지 벌써부터 의기충전 해있었다. 바젠도스 백작은 생각났다는 듯이 날 불렀다.

"델두란도 백작, 페이잔 숲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네. 내가 많이 이야기 했었지? 그때 있었던 녀석이라네."

델두란도 백작은 날 보고는 반갑게 말했다.

"자네 얘기는 바젠도스 백작에게서 많이 들었네. 전직이 사냥꾼이었다지? 오늘 기대하겠네."

난 '예'라고 공손히 대답하고 페이나 숲으로 안내했다.
페이나 숲은 전과는 달리 많이 줄어들고 황폐해졌다. 개간지를 만들기 위해 불을 태우고 나무를 깎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태양빛 호수는 나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 파괴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이 사슴무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델두란도는 두 파로 나뉘어서 찾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난 개간한 숲이라 적어지긴 했어도 매우 커서 길을 잃기 쉽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두 백작은 내가 찾아주면 되지 않느냐 하면서 서로 갈라져 숲으로 들어갔다. 바젠도스 백작은 '올린도의 복수를 하고, 델두란도 백작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겠다'고 큰소리 쳤고, 델두란도 백작은 '흥'하는 비웃음을 내면서 반대편 숲으로 사라졌다. 난 어쩌질 못하고 있다가 베잔도르 백작을 쫓아 숲으로 들어갔다.


5.

난 바젠도스 백작을 따라 깊은 숲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젠도스는 달라스와 함께 사슴무리를 사냥하며, 흰사슴을 불렀다. 바젠도스는 올리돈의 복수라 말하며, 사슴 피를 뿌리며, 흰사슴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델두란도 백작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왔다! 희사슴이다! 라우프! 어서 몰아붙여!"

바젠도스의 입에서 나즈막한 목소리로 욕을 했다. 달라스는 '제가 상황을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바젠도스는 날 불러서 같이 델두란도 백작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명령했다. 난 백작의 명령에 의해 델두란도 백작이 있는 숲으로 안내했다.

그때 한 사슴이 바젠도스 백작을 향해 뛰어들며, 길을 막았다. 바젠도스 백작은 자신이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젖어, 흥분한 상태였다. 바젠도스 백작은 단칼에 자신에게 뛰어든 사슴을 베어버렸다. 난 쓰러져 피를 흘리는 사슴을 쳐다보았다. 그 사슴의 눈은 마치 감정이 살아있는 인간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어떤 말을 전하는 듯,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사슴의 얼굴에 난 흉터들을 본 순간 난 올리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젠도스 백작을 불렀지만, 흥분한 상태의 백작은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델두란도 백작이 있는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델두란도 백작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 안돼... 잘 못했습니다. 아... 아악!"

나와 바젠도스 백작은 다급해진 마음에 델두란도 백작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가보았다.
바젠도스 백작과 내가 달라스에게 갔을 때, 둘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달라스를 구하기 위해 흰사슴에게 활을 겨누려는 순간, 바젠도스 백작이 막았다. 흰사슴은 달라스를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모르게 달랐다. 분노가 서린 눈보다 그리움의 눈을 하고 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도 어떤 살벌함보다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둘은 말없이 긴 시간을 보냈다. 바젠도스 백작과 나는 이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몸을 숨긴 상태에서 말없이 흰사슴과 달라스를 보게 되었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흰사슴이었다.


6.

"지금은...... 인간인 건가. 이름이...... 달라스라고 했던가?"

흰사슴의 물음에 달라스는 '예'라고 대답했다.

"그래...... 인간이 되어보니 어떤가?"

달라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흰사슴은 방향을 바꿔 바젠도스 백작과 내가 숨어있는 곳을 노려 보았다.

"그래...... 인간은 알 수 없지?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 그런 것들을 주체할 수 없을 거야. 너의 눈을 보니 그런 것이 느껴져. 인간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감추려고 하지. 자신의 욕망에 따르면서도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이야. 맘 속에 있는 것을 느끼려고 하면서도 정확한 것을 느끼지 못하지. 인간은 불확실해. 안 그런가?"

달라스는 입을 열고,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흰사슴은 그런 달라스에게 다시 몸을 돌리고, 말했다.

"달라스. 이제 인간의 무기를 버리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건가?"

"아직 선택의 때가 온 것 같지 않습니다."

흰사슴은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난 그것에서 어떤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흰사슴은 연기로 변하여 다시 여자로 변하였다. 그 여자는 태양빛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바젠도스 백작과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여자는 오른손을 하늘 높이 치켜 올리고, 왼손은 달라스의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소리 높여 말했다.

"나 감정과 욕망의 여신, 디사이어는 그대에게 명한다. 조금 더 시간을 얻으라."

하늘에서 여자의 오른손으로 빛이 들어갔다. 오른손의 빛은 그녀의 어깨를 타고 왼손으로 넘어갔다. 왼손에 닿아있는 달라스의 이마에 빛이 도달했을 때, 여자는 나지막이 말했다.

"너의 시간은 연장되었다. 앞으로 인간으로서 충실하게 살아라."

달라스는 쓰러져 정신을 잃게 되었다. 그러자 여신 디사이어는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녀는 숨어있는 나를 찾아내고 내려다 보았다. 난 여신의 눈길에 따라 저절로 일어났다. 난 나도 모르는 목소리로 여신에게 인사했다.

"그래. 넌 그녀와 잘 지내고 있느냐."

난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내 마음이 말하는 대로 입이 움직여줄 뿐이었다. 난 그렇다 말했다. 여신은 희미하게 웃으며, 나의 이마를 짚었다.

"넌 그래도 인간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 있구나. 그땐 나도 화가 났었지만, 그건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이지. 넌 그저 페이나 숲을 사랑해주기만 하면 된단다."

그 말을 듣던 난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전 페이나 숲에서 있던 일의 꺼림직함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여신은 내 옆에 있는 바젠도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화난 듯한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여신, 디사이어는 내 이마에 대던 손을 내리고 바젠도스를 향해 손가락질 했다.

"그러는 넌 인간이면서 오만함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넌 너의 욕망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기만 할 것이냐. 네가 맡은 일은 많은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 아니더냐."

바젠도스 백작은 새 하얀 얼굴을 한 채 아무 말도 못했다. 디사이어 여신은 쓰러져 있는 델두란도 백작과 그 수행원 그리고 달라스를 가리켰다. 여신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쓰러져 있는 세 사람은 특별히 살려두겠다. 하지만 너의 욕망 덕에 과거 너와 함께 왔던 남자 인간은 죽게 되었다."

바젠도스 백작은 '올리돈'이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여신은 '그래'라고 말하며, 한 마리 사슴을 데리고 왔다. 아니 가져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았다. 난 죽어있는 사슴을 보았다. 아까 바젠도스 백작이 단칼에 벤 사슴이었다. 난 사슴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는 놀랐다. 사슴의 얼굴에 있는 흉터 자국과 올리돈의 흉터 자국이 일치했던 것이다. 난 바짝 얼어붙었다.


7.

여신, 디사이어는 바젠도스를 보며, 물어보았다.

"그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바젠도스는 여신의 의도를 생각하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여신은 슬픈 눈으로 흉터 난 얼굴의 사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죽은 사슴의 시체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했다.

"그의 이름은 스카였네. 본래 이름은 올리돈이었지."

난 쏠려오는 어지럼증을 참지 못하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바젠도스는 털썩 주저앉으며,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올리돈을 죽였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기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신은 그런 바젠도스 백작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 네가 죽인 이 사슴은 죽기 이전엔 올리돈이라는 사내였다네. 그는 나에게 대항하였고, 죽게 되었지. 난 그를 사슴으로 변하여 자연을 이해시키려 했네. 너희가 사냥한 사슴을 경험하게 하려고 했지."

여신은 사슴을 쓰다듬는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 그리고 바젠도스 백작을 가리켜 말했다.

"난 자네가 과거의 행동으로 올리돈을 잃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그 행동을 뉘우치지 못하고, 지나친 사냥을 했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목적 없는 사냥만을 했어. 난 너의 그런 무분별한 사냥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질 못했어."

난 다시 정신을 차려 여신을 바라보았다. 디사이어 여신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나에 대하여 말을 했다.

"그래. 넌 사냥을 했지만, 살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너의 사냥은 적절한 계획에 의한 사냥이지. 하지만 너의 무분별한 사냥은 다르다. 그래 난 너에게 깨달음을 주어야겠다. 너에게 남아있는 마음 속, 어두운 부분을 제거해주겠다."

디사이어 여신은 바젠도스의 이마를 짚어 주문을 외웠다. 바젠도스 백작은 연기가 되어, 사슴으로 변했다. 사슴으로 변한 바젠도스 백작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희생된 올리돈의 시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디사이어 여신은 그런 바젠도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주었다. 그리곤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넌 가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나도 이제 가봐야 한단다. 쓰러진 세 명을 깨워서 돌아가도록 해라. 너에게도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구나.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디사이어 여신은 나의 이마에 축복의 입맞춤을 했다. 난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눈은 검은 안개로 뒤덮여 볼 수 없었으며, 머리 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8.

얼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눈꺼풀 뒤로 비치는 강한 빛에 눈을 뜨게 되었다. 델두란도 백작과 그의 수행원 그리고 달라스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내 앞에 있던 올리돈의 시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난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했고, 서둘러 세 사람을 깨우게 되었다. 쓰러진 세 사람은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모두들 악몽을 꾼 듯, 말없이 멍한 상태였다. 특히 델두란도 백작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달라스는 달랐다. 편안한 긴 잠을 자고 난 후, 몸이 풀린 듯 상쾌하게 일어났다. 난 그들이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고보니......."

델두란도 백작은 마치 잊고 있던 것이나,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찾으려고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바젠도스 백작이 여신의 벌을 받아 사슴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쓰러진 사이에 사라졌다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말없이 페이나 숲을 나왔다. 델두란도 백작과 달라스는 각기 다른 의미의 눈빛으로 페이나 숲을 바라보았다. 그때 난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분명, 흰사슴이 디사이어 여신이었던 것과 바젠도스 백작이 사슴으로 변했다는 것 그리고 올리돈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병사들을 보내어 페이나 숲을 뒤져봐야 하나."

델두란도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난 그 말을 듣고, 내가 찾아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숲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델두란도 백작 그리고 달라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찾지 않아도 되오. 내가 지금 왔으니까......."

바젠도스 백작이 돌아왔다. 난 안도와 함께 어떻게 하룻밤 만에 여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델두란도 백작은 반갑게 다가와 바젠도스 백작의 안부한지 물었다. 바젠도스 백작은 괜찮다면서 사람들에게 마을로 돌아가자 말했다.

난 사람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그 동안 델두란도 백작은 바젠도스 백작에게 어제 사냥을 어땠는지, 흰사슴은 잡았냐는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그때마다 바젠도스 백작은 '좋았소', '그만 놓쳐버렸소'라는 짧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바젠도스 백작은 가끔씩 델두란도 백작의 입에서 나온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난 어제와 다른 모습의 바젠도스 백작의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눈이었다. 바젠도스 백작의 눈이 에메랄드 색이었다. 사람들에게 흔하지 않는 연녹색의 눈동자였다. 그것은 달라스와 같은 눈이었다.

그날 바젠도스 백작 일행은 사냥복을 갈아입고, 각자 자신의 영지로 되돌아갔다. 난 촌장과 함께 그들을 배웅하며, 공손히 인사를 나눴다. 바젠도스 백작과 델두란도 백작은 나에게 수고했다며, 몇 가지 재물을 주었다. 그리고 촌장에게도 몇 가지 혜택을 주었다. 촌장은 좋아서 연신 고맙다고 했다.

난 달라스를 보았다. 그는 페이나 숲을 잊지 못하는 지, 계속 그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델두란도 백작이 먼저 출발했다. 바젠도스 백작은 달라스처럼 페이나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그도 도란 마을을 떠났다.


9.

그날 저녁, 난 집에 돌아와 평안히 쉴 수 있었다. 아내, 엘린은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아기를 재우고 있었다. 난 페이나 숲에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난 넋이 나간 듯, 천장을 바라보며 아내에게 페이나 숲을 사냥하면서 일어난 어제의 일에 대하여 얘기했다. 아내는 가만히 듣고 만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거야."

엘린은 입을 열었다. 난 엘린의 목소리에서 들리는 편안한 음색에 눈을 감았다. 엘린은 나의 눈을 감는 행위가 귀를 막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어. 글자를 읽고 쓰실 줄 알았고, 또 책도 많이 가지고 있었잖아. 알지? 가끔 당신이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말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엘린의 기억에 동의했다.

"당신이 그들의 에메랄드 눈동자에 관심이 가는 것은 아마도...... 같은 눈을 가졌기 때문일 거야."

난 눈을 뜨고 엘린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할아버지는 그 눈을 '숲의 눈'이라 말씀하셨어. 그 눈은 여신의 요정이며, 그녀의 의지로 인간을 경험하는 자들이래. 숲을 바로 보고, 숲을 지키는 요정들...... 할아버지께서는 여신의 요정이 지니는 연녹색 눈동자는 여러 경험을 하기 위해 세상에 내보내는 '여신의 증표'라고 말하셨어. 그래서 할아버지가 당신을 좋아했던 것도 여신의 증표와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거야. 왜냐면, 우리 할아버지도 에메랄드색 눈동자였거든."

엘린은 나에게 다가와 내 눈에 손을 쓰다듬으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눈에 가까이 닿으려 하자 내 눈꺼풀은 저절로 감겼고, 그녀는 개의치 않고 엄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만졌다. 그녀는 내 눈을 바로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께서 얘기해주신 이야기가 하나 생각났는데……. 들어볼래?"

난 듣겠다고 했다. 평소에는 농담을 하며 넘어갔지만, 오늘은 왠지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엘린은 내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옛날에 페이나 숲은 지금보다 더 울창하고 신비로운 숲이었대. 신은 세상을 만들고 나서 여러 개의 분신으로 변하여 대지 아래에서 잠을 청했는데, 페이나 숲의 여신도 그런 존재였어. '세상에는 신비한 것들이 많단다. 그 중에서 신비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곳은 페이나 숲이야'라고 할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어.  이 작은 개미 하나에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할아버지한테서였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신들은 그렇게 태어났대. 여신들은 신이 가진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만을 위하여 살고, 그것을 대지에 발을 디딘 존재에게 깨닫게 한다고 하였어.
할아버지는 페이나 숲에 사는 여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어. 이름이……. 디사이어라고 했었지 아마?"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린은 내가 동의하는 제스쳐를 보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디사이어 여신은 페이나 숲에서 존재하는 여신이라고 했어. 생물들의 온갖 감정과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고도 말하셨고. 신은 인간을 만들 때,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여러 감정을 느끼도록 만들었대. 그래서 디사이어 여신은 인간에게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했어.
디사이어 여신은 페이나 숲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신의 요정으로 만들고, 인간이 가져야 할 감정과 욕망을 깨닫게 해준데. 그 요정들은 사슴의 모습을 하고 있고, 여신 또한 흰색의 사슴으로 변신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어.
요정으로 변하는 사람들은 깨닫는 정도에 따라 몇 시간이 될 수 있고, 몇 일이 될 수 있고, 몇 백 년 동안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페이나 숲을 잘 아는 사람들은 사슴을 사냥하지 말라고 말하지.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은 것은 할아버지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당신이 흰사슴을 보았다고 했을 때, 그 이야기가 떠올랐거든."

난 가만히 창문 밖에 보이는 페이나 숲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양빛 호수의 빛이 반사되어 보이는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얘기 중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었어. 당신 같은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한 사람들은 인간을 경험하고, 다른 존재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여신이 숲 밖으로 보내는 요정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럼, 난 여신의 요정인가?'라고 농담식으로 얘기했다. 엘린은 나의 이마에 키스하며, '글쎄'라고 말했다.

아내와 아이는 이미 잠이 들었고, 난 깊은 저녁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난 가끔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페이나 숲에 자리 잡은 태양빛 호숫가에서 다른 사슴들과 한가로이 놀고 있는 꿈을……. 그런 나를 태양빛 호수에 있는 흰사슴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mirror
댓글 1
  • No Profile
    배명훈 06.04.13 16:17 댓글 수정 삭제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네요. 이걸 읽으면서 저는 초록색 피부의 거인족들이 사는 숲이 나오는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어요.
    초청한 글에 이런 말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좀 더 비비꼬아서 하나씩 하나씩 비밀이 풀리는 맛을 살렸으면 아주아주 좋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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