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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왕은 성군이셨다. 나라를 다스림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으셨다. 선왕께서 맨 처음 즉위하셨을 때, 젊은 왕께서는 한결같이 굳건하셨어도, 세상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나라는 왕과 세상의 가운데쯤에서 허물어지고 바로 세워지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왕께서 나라를 굳건하게 다스리시자 세상은 그분의 다스림에 길들여져 갔다. 나라의 힘이 닿지 않는 변방에서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나라는 그 혼란에 흔들리지 않았다. 선왕께서는 옥좌에 똑바로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하나도 남기지 말라.”
  그 말에 관리들이 영(令)을 떠받드느라 머리를 조아릴 때, 석기창(石器倉)에서는 돌판을 쪼기 시작했다. 돌판에는 왕의 영이 원래의 그 말씀보다 더 굳건하게 새겨졌다. 왕의 영은 결코 닳아 없어지지 않을 단단한 돌에 새겨져 소리보다 멀리 변방으로 전해졌다. 선대왕들께서 닦아 놓으신 길을 타고 왕의 돌을 실은 마차가 달렸다. 그 뒤에는 2만이나 3만 혹은 4만 3천의 군사가 뒤따랐다. 그러면 곧 폭도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왕의 뜻대로 돌에 새겨졌으나 곧 왕의 돌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누구나 선왕을 두려워했다. 선왕이 승하하시고 뒤를 이어 현왕이 즉위하셨다. 왕은 두려워서 따르는 것은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왕이 흔들리자 원래 혼란스러웠던 세상이 따라서 흔들렸다. 나라는 왕과 세상 사이에서 선왕의 질서를 굳건하게 지켰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것이 아직도 왕의 돌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왕께서도 역시 세상의 돌대로 이루어지셨다. 무지한 폭도들이 던지는 돌이 여리고 여린 왕의 어진 마음에 가서 닿았다. 변방에 난이 일어나자 급기야 왕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라의 관리를 보내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백성의 뜻을 살피라. 백성이 무엇을 듣고 무엇을 먹는지를 소상히 밝혀 백성의 마음을 짐에게 전하라.”
  그리고는 성품이 너그러운 자를 가려 관찰사를 명하시고, 그에게 왕의 전권을 위임하여 변방의 세가들이 그의 명에 따르도록 말씀하셨다. 또한 관찰사가 특별히 살펴야 할 스무 가지 일들을 친히 명하셨다. 이에 대소 신료들이 감동하여 읊조릴 때, 석기창 총관은 곧 식은땀을 흘렸다. 다음날 해가 뜨고 왕의 돌이 변방으로 떠나기 전까지, 석기창은 도저히 왕의 영을 모두 다 돌에 담아 낼 수가 없었다.
  왕이 어지셨으나 나라가 돌같이 지엄하여 왕의 돌이 떠나야 하는 시간을 어길 수가 없었다. 총관은 도성 근처에 있는 모든 돌 다루는 사람을 끌어 모아 왕의 말을 새겼다. 날이 밝았을 때 그는 왕의 말이 새겨진 돌을 무사히 수레에 실을 수 있었으나, 그것은 역사상 가장 조악한 돌이었다. 왕께서 그 돌판을 보시고 흡족해 하셨으나 총관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변했다. 왕께서 자신의 돌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아름답다 하실 때 총관은 왕의 돌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추악하다 했다.
  나라에 석기창이 처음 선지 3천년이었다. 나라가 이미 부강하여 철기로 변방을 치고, 남은 철기로 밭을 일구었어도 또 남은 철기가 있었다. 그러나 왕실은 석기를 버리지 않았다. 전란에 임하는 첫 화살에는 반드시 돌화살촉을 메어 썼다. 장수는 어전에 들 때 허리춤에 돌칼을 찼다. 그리고 왕명은 언제나 돌에 새겨졌다. 그것은 나라가 그 전통을 3천년 전 선조들의 나라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3천년 된 나라는 이미 간 데가 없고, 왕실이 이어받았다는 3천년 된 핏줄은 아무도 따질 수가 없었다. 그래도 3천년 된 돌은 사라 없어진 왕들이 나라와 세상에 내린 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총관은 그 3천년 이래, 그날 자신이 파낸 돌만큼 조악한 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곧 고개를 들지 못하고 왕께 사죄하며 관직을 떠났다. 어지신 왕께서는 사죄할 이유가 없다며 웃으셨으나, 나이든 총관이 편히 살 때가 되었다며 큰 상을 내리시고 사직을 허락하셨다.
  아! 선왕은 성군이셨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무인이셨으므로, 한 칼에 한 획을 베어낸 듯한 호방한 필체를 좋아하셨다. 현왕이 위에 오르시고 3년이 지났을 때, 왕께서는 남방의 관찰사가 올린 돌판을 보시고 글씨가 유려하여 도성에서도 오히려 본받을 만하구나 하셨다. 이에 새 총관이 돌판을 보고는 퇴궐하여 돌아가는 길에 한숨을 내쉬었다.
  “선왕께서 호방한 성품으로 쭉 뻗은 글씨를 사랑하시더니, 지금 임금께서는 곡선이 날렵한 변방의 글씨를 사랑스럽다 하셨소.”
  이를 듣고 있던 총관의 아내가 되물었다.
  “어찌 그리 한숨을 지으시오? 변방의 글씨가 속되다 여기시니이까?”
  그러자 총관이 탄식하며 대답하기를,
  “어찌 남방의 글이라서 속되겠소. 그 유려한 맵시가 어진 임금의 마음에 쏙 드시겠지요. 하지만 우리 석기공들이 이제까지 그 어진 임금의 말씀을 저 단단한 돌판에 직선으로 죽죽 그어내는 데만도 여러 밤을 훤하게 지새웠거늘, 이제 그 복잡하고 유려한 곡선을 언제 다 파낸단 말이오.”
  하고 말했다.
  총관이 탄식할 때 석기창 서기들은 눈물을 머금었다. 현왕 즉위 3년 만에 석기공들을 다섯 배로 늘렸으나 서기들은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궁에 머무르는 날이 더 많았다. 석기창 서기 이자합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자합은 원래 석기창에서 돌 다루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그는 도성 근처의 돌기둥에 용 발톱을 돋을새김하던 자였다. 비록 발톱만 도맡아서 쪼아대는 처지였지만 그 재주만큼은 비상했던지, 도성 안에 용이 감고 올라가는 기둥이란 기둥은 모조리 이자합의 수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그러다 현왕 즉위 직후에 석기창에서 사람을 불러 모을 때 함께 징발되어 서기들의 수발을 들기 시작했지만, 본래 근본이 무식했던 까닭에 글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종이에 적어주는 대로 받아 쪼는 재주는 비상했기 때문에 3년이 지난 뒤에는 스스로 글도 익히고 견문도 넓혀서 제법 어엿한 서기 행세를 했다.
  이자합은 곡선으로 된 필체를 새로 연마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져서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 유려한 남방 관찰사의 돌판을 새긴 변방의 서기를 불러들여 신발로 뺨을 후려쳤다. 이자합이 이렇게 질러대는 소리가 온 석기창 안에 가득 찼다.
  “그대는 내 이 욕을 그 유려한 남방의 필치로 이 화강암에 모조리 돋을새김 하라. 내일 아침까지 다 해 놓지 못하면 내 욕이 반나절씩 더해질 것이고, 그 다음날에도 다 끝내지 못하면 또 반나절씩 욕이 더해질 것이다.”
  이자합이 그렇게 화를 내는 데에는 곡절이 있었다. 그는 서기로 부임한 후에 그 권세로 도성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집에 들어가는 일이 날로 뜸해지자 그의 처가 도성의 무장(武將)과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석기창 서기들은 물론 철기창 관원들까지 그를 집안 단속도 못하는 고자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타고난 성질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오늘은 꼭 병을 칭하고 조퇴하여 제 처를 단속하겠노라 벼르고 있었으나 동이 트자마자 왕의 돌을 실은 수레가 왕의 돌길을 따라 달려가는 것을 배웅하고 돌아오노라면 어지신 임금이 나라 구석구석을 굽어 살피시는 소리가 또다시 반나절씩이나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라의 가장 큰 근심은 간주 관찰사 진막의 보고에 관한 일이었다. 그해 초부터 천문이 흐려 왕께서 나날이 근심이 깊으셨는데, 가을에 나라의 서쪽 끝 간주 관찰사 진막이 불길한 소식을 알려 왔다.
  “하늘에 괴이한 것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흉흉합니다.”
  왕께서 곧 되물으셨다.
  “길조가 아니고 흉조이더냐?”
  한참 후에야 진막의 보고가 또 당도하였다.
  “날개도 없고 팔다리도 없는 것이 이따금 허공에 나타나 소리도 없이 떠 있다 이내 사라지니 길조일 수 없습니다.”
  이에 왕께서 하문하셨다.
  “그것의 외양과 떠 있는 모양을 더 자세히 말하라.”
  “외양은 남방에서 제기로 쓰는 그릇과 같으나 위와 아래가 다 막혀 있어 그릇으로 쓸 수 없고 크기는 집채만한 것이 쉽게 사람의 손에 닿지 않을 높이에 미동도 않고 떠 있다 합니다.”
  간주가 변방에 있어 도성까지는 왕의 길로도 열흘길이었다. 그러나 임금께서 진막의 답이 도성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매일 새로운 것을 물으시는 바람에 왕의 돌은 이틀이 멀다하고 변방으로 갔다.
  그러면 석기창은 단 한 구를 싣더라도 ‘천손 비리기 태자의 장자, 태양과 별의 운행을 주관하는’으로 시작하는 초두(初頭) 188자와 ‘이 모든 것이 왕의 돌대로 이루어지라.’로 끝나는 종구(終句) 142자를 아래위에 새겼다. 선왕 치세에는 초두와 종구를 미리 새겨둔 돌판이 소진되는 일이 없었으나 어진 임금께서 나날이 나라를 소상히 돌보시니 미리 준비해 둔 돌판이 곧 남아나지 않았다.
  “관찰사 진막은 직접 가서 살핀 연후에 다시 보고하라. 가까이 다가가서 철기로 표면을 두드려 본 연후에 질감을 말하라. 사방에서 관찰한 모양을 각 방향에서 서술한 연후에 그 물체에 대해 다시 판단하여 말하라.”
  왕께서 다시 하문하셨다. 이에 석기창 총관이 따로 간주 석기창에 명하기를,
  “아둔한 변방의 서기를 도성의 돌로 짓이겨 죽이리라. 목숨이 아깝거든 한 번에 정확히 묘사하라.”
  하였다. 간주 관찰사와 서기가 심히 고심하였는지 한동안 보고가 끊겼다가 스무 날이 지난 뒤에야 다시 장계가 이어졌다.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신(臣)이 닷새를 나가 있어도 괴물체가 출몰하지 않아 민(民)의 말을 자세히 물어 하문하신 바대로 올리나이다.”
  진막의 보고를 듣고 왕께서는 여전히 의아해하시어 다시 하문하시려고 석기창 총관을 돌아보며 물으셨다.
  “그대는 간주 관찰사가 석판에 새겨서 같이 보낸 이 그림을 알아보겠던가?”
  어진 임금께서는 진실로 의아하여 물으셨으나 총관은 엎드려 조아리며 망극하다 하였다. 총관은 서기가 문자를 포기하고 그림에 기댄 것을 왕께서 책망하시는 것으로 듣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으나, 왕께서는 영문을 몰라 허허 웃으실 뿐이었다.
  총관이 물러나 석기창에 당도하여 간주 서기를 당장에 불러들이라 명하면서 이자합에게 말하기를,
  “일전에 그대가 변방 서기의 기강을 잡는 모습이 믿음이 갔으니 이번에도 그대가 맡아서 간주 서기를 지도하라.”
  하였다. 이자합이 간주 서기를 맞아 물고를 낸 연후에 상세히 묘사하는 법을 일러주기 위해 괴물체의 정황을 소상히 들었으나, 그 자신이 원래 도화원(圖畵院)에 속해 있던 자라 들으면 들을수록 그림이 더 먼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그 정황을 문자로 묘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혹시나 다른 서기들이 그 사실을 알고 그를 변변치 고자라 부르며 희롱할 것이 두려워 다짜고짜 간주 서기를 바닥에 매다치고는 석굴로 달려갔다. 석굴에는 3천년된 것부터 바로 어제의 것까지 변방에서 보내 온 장계와 궁에서 파 낸 온갖 사서(史書)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자합은 그 중 적당한 것을 찾아 베껴 낼 심산이었다.
  석굴 관리가 아닌 자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석굴 안에서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자합은 냄새를 따라 석굴 한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석실 하나에 연기가 자욱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자합이 석실로 들어서자 석굴 관리 다섯 사람이 돌판에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가 흠칫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보고 이자합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돌로 쳐 죽일 자들이로다! 내 선왕들의 기록을 참조하려고 자주 들러 석굴 안을 살펴도 단 한 번도 석굴 관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자들이 공무에 시달린 연유라 짐작하고 있었더니, 내가 오늘 이 역적의 무리들이 선대왕들의 거룩한 돌판을 달구어 그 위에 돼지를 익혀 먹는 망극함을 보았도다!”
  석굴 관리들은 이자합을 그 자리에서 쳐 죽여 버릴 생각이었으나 그 소리가 워낙 쩌렁쩌렁하게 석굴 안에 울려 퍼지는 통에 그만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말았다. 이자합은 그들이 돼지기름을 묻혀 놓은 돌판이 태간 대왕의 북방 점령비인 것을 알고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그리고 말했다.
  “내 지금 당장 그대들을 저 돌판에 올려 익혀 먹어도 시원치 않겠으나 지금은 산채로 회를 떠먹어도 시원찮을 아둔한 변방 서기 놈을 잡아다 놓았으니 이 일은 뒤로 미루겠다.”
  비록 다섯 학사의 행동이 도에 어긋나나 그 기풍만큼은 호탕한 데가 있었던지, 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골라 낸 돌들 하나하나가 평범한 것이 없었다. 석기창에서도 진귀한 기록일수록 더 귀한 돌을 구해다 썼기 때문인지, 그런 돌판에 구워야 고기 맛이 더 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방 안에 있는 것들만 해도 나라 안에서 가장 기괴한 기록들로 가득했다. 객성(客星)이 공중에서 깨어진 일이나 꼬리가 셋 달린 늑대가 나타난 일이 모두 그 방 안에 쌓여 있는 돌판에 새겨져 있었다.
  학사들은 기억을 더듬어 이자합이 찾고자 하는 기록들을 찾아왔다. 이자합은 그 돌판들을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그 중 1천 4백 년 전 어느 왕조의 남방 태수가 올린 보고가 먼저 그의 눈에 띠었다.
  “폭은 관청 마당보다 약간 넓고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으며 위와 아래로는 사람 세 명 키만 하옵니다. 바깥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햇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 상서롭지 않으며, 가장 단단한 돌로 빚은 화살촉도 그 표면에 이르면 박히지를 못하고 그만 부러지고 맙니다. 어느 나이 많은 백성이 이르기를 날아다니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고 하나 신(臣)의 눈에는 떠 있는 모습만 보이옵고, 갑자기 나타나고 갑자기 사라지는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나이다.”
  이자합이 다른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는 돌판들을 살피니 위의 기록을 합하여 모두 네 건이었다. 그 중에는 녹인(綠人)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녹인은 직주 인근 하늘 위에 떠 있던 요물로부터 왔다고 한다. 그는 살갗이 녹색을 띠고 있었고 나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썼으며 의복을 갖추어 입지 않아 처음에 민간에서는 희귀한 짐승이 난 것으로 알고 이를 잡아다 도성에 진상했다. 그러나 어전에서 즐겨 찾지 않으시니 녹인이 곧 버림받아 도로 민간에 돌아가 살았는데, 머무는 내내 농군으로 근근이 살면서 비로소 사람의 말을 배웠다 한다. 녹인이 수십 년 만에 하늘에 나타난 요물을 찾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서 반드시 돌아오겠노라 말하였다. 촌장이 가만히 생각하니 그동안 진 원한을 갚으러 돌아오겠다는 말인지 마을을 그리워하여 잊지 못해 돌아오겠다는 말인지 알 길이 없다 하였다. 후일 직주에 요물이 다시 나타나 민가에 해를 가하니 왕께서 토벌을 명하셨다. 요물은 곧 스스로 사라졌으나 대장군 조만이 말하기를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나라 안에 있는 무력으로써는 도무지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세 번째 기록은 모년 모월에 모 선대왕이 남쪽 변방 자사에게 하문하신 말씀이었다.
  “흉조인가 길조인가?”
  그 돌판의 뒷면에는 남방 자사의 보고가 새겨져 있었다.
  “지난해에 괴물체가 경작을 앞둔 밭에 내려앉아 밭 한가운데 둥그런 모양으로 곡식이 누웠다 하더니 그 뒤로 줄곧 가뭄이 들었다 합니다. 흉조입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선왕 치세에 간주에서 올라온 보고였다. 지난 기록을 알지 못하는 간주 태수가 괴물체에 대해 보고하자 선왕께서 초두와 종구도 없이 시원시원한 직선 획으로 된 필체로 간결하게 하교하셨다.
  “요물을 잡아들이라.”
  이자합은 곧 큰 상을 얻을 것을 바라며 이 내용을 석기창 총관을 통해 왕께 보고하였다. 바로 그 무렵에 간주 관찰사가 상소하여 괴물체가 민가에 앉아 사람과 재물이 상한 사정을 보고하자 임금께서 이자합이 찾아낸 것이 참으로 신통하다 하시며 장수들에게 명하여 철기창 병장고를 열고 병 2만 1천 4백을 변방으로 보내셨다.
  대장군 니금은 키가 6척 장신에 다리가 뭉툭하고 배가 불룩하여 완전히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수염이 가지런하여 장부다운 용모로 온 도성의 귀족이 흠모했다. 니금의 좌장(左將)과 우장(右將) 역시 젊은 나이에 팔다리가 뭉툭하고 배가 아래로 늘어져 대장부의 기상이 넘쳐났다. 그러나 지나치게 수려한 외모로 온갖 구설수에 오를 때가 많았다. 철기창 총관이 이를 걱정하여 금번 대병 기동의 위엄이 선왕 치세에 비해 못하지나 않을까 탄식하였으나 이자합의 탄식보다 더 비통할 수는 없었다. 좌장 삭장의 구설수 중에는 이자합의 처에 관한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병이 변방과 도성의 가운데에서 중개하자 임금의 하문과 변방의 보고가 더욱 잦아졌다. 그리하여 이자합은 가솔조차 단속할 겨를이 없었다. 니금이 보고하여 말하기를, 간주 관찰사 진막이 어명대로 사다리에 올라 괴물체의 표면을 철창으로 두드렸으나 곧 낙상하여 다리가 부러진 데다 변방의 가뭄이 점점 심해진다 하니 정예를 뽑아 진군을 재촉하는 것이 어떠한지 물었다. 왕께서 대소신료에게 뜻을 물어 마침내 그 뜻을 정하시니 석기창 서기들이 일제히 돌 붓을 수직으로 들었다.
  “진막의 낙상이 괴물체가 고의로 그를 상하게 하려 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또한 간주의 가뭄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며 대병을 나누지 말고 진중하고 견고하게 진을 유지하여 서서히 전진하라.”
  그 영에 날카롭게 서 있던 돌 붓 날들이 일제히 무디어졌다. 이자합은 일전에 본 선왕의 하교를 떠올렸다.
  “잡아들이라.”
  현왕이 선왕보다 못하다는 말을 입 밖에 꺼냈다가는 곧 구족을 멸할 것이나, 그는 현왕이 군왕다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어지신 임금께서 녹인의 기록을 읽으시고는 혹여 녹인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궁금해 하시고 조심스러워 하셨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의 엄중함이 어찌 녹인에 가서 무디어질 일인가 하고 이자합은 생각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그의 이런 생각을 더욱 부추겼다. 그 무렵 이자합은 일전의 공으로 크게 승진하였다. 그리고 마침 그가 그날 밤의 번을 서고 있었다. 새로운 영을 새기느라 온 석기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을 무렵, 가솔 하나가 이자합을 찾아와 황급히 아뢰었다.
  “마님께서 급히 출타하셨나이다.”
  이에 이자합이 발끈하여 맨주먹으로 돌판을 내리쳤으나 깨지지 않았다. 늦은 시각이었다. 아녀자가 출타할 시각이 아니었다.
  “내 오늘에야 말로 이것들을 요절을 내리라.”
  하고 장담하였으나 바로 눈앞에 아직 왕의 말씀이 얹어지지 않은 왕의 돌이 놓여있는 데에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한데 철기창 관원들이 고자 운운하며 비웃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곧이어 다른 가솔 하나가 석기창에 당도하여,
  “마님께서 옷 시중드는 계집아이를 바깥 모처로 부르셨나이다.”
  하자 이자합은 드디어 그 분노가 도를 넘고 말았다. 그는 갓 초두 188자를 새기기를 끝낸 돌판으로 달려가서 이렇게 썼다.
  “격파하라!”
  그리고는 그 다음에 바로 종구를 새길 것을 지시했다. 서기들이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무단으로 퇴청하여 본가로 향했다. 철기창 번이 그에게 철퇴 한 자루를 무단으로 내 주었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몇몇 관원들은 드디어 그가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노라고 수군거렸다.
  가솔을 앞세워 말을 타고 달려갔으나 정작 이자합의 처는 이미 도성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독한 술을 마시고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여 곯아 떨어졌다. 새벽에 석기창에서 사람이 찾아와 이대로 왕명을 내려도 괜찮을지 재차 확인하였으나 그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밤에 명한대로 행하라고만 하였으므로 왕의 돌은 그가 새긴 대로 수레에 올랐다.
  아침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왕의 돌을 실은 수레와 이자합의 처가 각각 대장군 니금의 대군을 향해 더디게 나아갔다. 이자합은 비가 갑자기 들이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일어나 앉자마자 지난밤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방 안을 빙빙 돌면서 전전긍긍하는 것이었다. 왕의 돌을 위조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무거운 죄였다.
  그는 곧 도망을 쳐야 할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뛰쳐나가야 할지 머뭇거렸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에 조반이 들어오자 그는 아침을 먹고 나서 자리에 누워 멍한 얼굴로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점심때가 거의 다 되어서야 벌떡 일어나서 시중드는 아이를 불러 다급하게 말했다.
  “행장을 꾸려라. 행장을 꾸려라. 어서 말을 가져 오거라. 아직 멀었느냐. 행장을 꾸려 오래도.”
  그는 힘 잘 쓰는 가솔 열둘을 대동하여 말을 타고 따르게 하고 자신은 말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올라 왕의 길을 따라 달렸다. 가는 길에 석기창에 들러 중병을 핑계로 얼마간 요양을 청하고는 돌판 하나를 가져다 수레에 실었다. 수레가 왕의 돌을 쫓아가는 동안 혼자 수레 위에서 왕의 영을 다시 새기면서 갈 생각이었다. 수레가 더딘데다 심하게 흔들려서 세심하게 돌을 다룰 수가 없었다. 왕의 길 위로 내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나라의 법이 지엄하여 왕의 길 위에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만으로 대역죄인이 될 수 있었으므로 그는 오로지 왕의 길 옆을 따라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지치고 수레가 이내 지쳤으므로 그는 금화를 풀어 새 말과 새 수레를 타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길을 재촉해도 왕의 돌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이자합은 심지어 그의 처가 탄 수레와 마주쳤을 때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돌판에 글씨를 새기면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내 손에 죽기를 조용히 기다리거나, 멸문을 맞이하여 역도의 처로 비참하게 죽거나. 당신에게 눈이 멀어 이 모든 것을 시작했으나, 그대 비석을 내 손으로 직접 새기지 못해 미안하오.”
  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하늘이 개이고 별이 보였다. 이자합은 천문을 전혀 읽을 줄 몰랐으나 간주에 변고가 일어난 무렵부터는 천문이 불길하다는 글자를 너무나 자주 새기고 있었으므로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우주의 모든 것이 불길해 보일 뿐이었다. 새기고 있던 돌판을 그 우주가 비추는 희미한 별빛에 비추어 보니 글씨 하나하나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제때에 가져가도 대장군 니금이 믿어줄까 염려되었다.
  그의 수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렸다. 왕의 수레도 마찬가지였다. 대장군 니금의 돌판을 싣고 도성으로 가는 수레를 만나 물으니 왕의 수레는 이미 한나절이나 앞서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잘 닦인 길을 따라가는 왕의 돌을 따라잡을 길이 없었다. 이에 이자합은 대동한 가솔을 모아 발 빠른 말로 먼저 내달려 인적 없는 곳에 매복했다가 왕의 수레가 지나거든 호위병을 모두 쳐 죽이고 수레를 빼 돌리라 명하였다. 그의 말이, 갑자기 대병을 움직이는 통에 호위병이 줄어든 데다 왕의 돌이 도성과 간주를 자주 왕래하니 그나마 호위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어 힘쓰는 자 열 둘이면 관군도 능히 제압하리라 하였다.
  이틀이 지나 이자합의 수레가 가솔들이 매복한 곳에 다다르자 그 중 우두머리 되는 자가 숲에서 나타나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지난밤에 당도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관군을 제압하고 수레를 빼앗았나이다.”
  이 말에 이자합이 크게 안도하며 한시름을 놓고 있는데 우두머리 되는 자가 이렇게 덧붙였다.
  “하온데 새벽에 수레 한 대가 더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였으나 후환이 되겠다 싶어 곧 추격하여 마저 제압하였나이다.”
  이자합이 알아보니 가솔들이 두 번째로 빼앗은 돌판이 원래 빼앗고자 하던 돌판이었다. 가솔들이 너무 서둘러 수레를 두 대나 앞질러 매복하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된 것을 알고 이자합은 그만 맥이 풀리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호위 병졸이 두 패나 죽었으니 다음 수레가 역참에 이르러 교대해 줄 병졸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곧 역모를 알아차리겠구나. 한 패는 너희들로 어찌어찌 메울 수 있을 것 같았건만 두 패를 어찌한단 말인가. 내가 하룻밤에 실수로 대역의 죄를 범하였더니 오늘 역당의 괴수가 되어 하루아침에 두 번이나 역모를 행하여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구나.”
  그가 한참 만에 정신을 가다듬고 가솔들을 관군으로 가장하게 하여 역참에 매복하게 하였다. 이제는 도성에서 간주로 가는 수레도, 간주에서 도성으로 가는 수레도 살려서 보낼 수가 없었다. 이자합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사정이 너무도 딱하고 기구하여 스스로 눈물이 났다. 대궐 안에서도 가장 큰 돌기둥에 용의 발톱을 새기던 대장부가 수레 위에 모로 누워 눈물을 흘리게 된 일이 다 어질고 어지신 임금의 성은인가 하였다.
  당장의 위기는 모면하고 있었으나 나라의 관병 전부를 왕의 길 위에서 죽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도성보다 오히려 대병에 가까워 니금이 알아채면 곧 토벌군이 들이닥칠 것이 틀림없었다. 이자합이 마침내 달아나리라 마음먹고 도성에서부터 실어 온 돌판을 깨부수려 하는데 마침 수레 하나가 니금에게서 도성으로 향하다 이자합의 가솔에게 돌판을 빼앗겼다. 이자합은 그 돌판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판에 니금이 새겨 말하길,
  “신(臣)이 하명을 기다리며 신중을 기하여 진군하고 있사오나 관찰사 진막이 경거망동하여 괴물체를 철궁(鐵弓)으로 도발하였다 하나이다. 이에 괴물체가 불을 뿜어 민가를 불태우고 관병 일곱이 크게 다쳤다 하니, 어명이 닿을 때까지 신중을 기하다가 괴물체가 도발할 때에는 소장의 소임대로 병(兵)을 움직이겠나이다.”
  하였다. 이자합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도성 석굴에서 본 기록 중에 괴물체가 민가에 해를 가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시절이 이미 2천 년도 더 된 일이었으나, 그 난리를 당하여 정벌을 명받은 옛 나라의 장수는 “저들이 마음을 먹으면 나라 안에 있는 무력으로써는 도무지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새겨 두었다.
  이자합이 자신이 도성에서 홧김에 새겨버린 “격파하라”가 적힌 돌판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깨뜨려버리자 가솔들은 허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니금을 괴물체와 싸움 붙여 괴물체로 하여금 나라의 대병을 없애버리게 할 심산이었다. 철기창의 최신 병장기로 무장한 니금이었으나, 공중에 떠 있는 적을 벨 도리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이자합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자합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돌판을 수레에 싣고 어서 니금에게로 가자고 말하자 모두가 그 말을 따르기를 주저했다. 가솔들 중 우두머리인 자가 주인의 눈빛을 보고 다른 가솔들에게 말하기를,
  “더는 궁금해 하지 말라. 복안은 나도 알 수 없으나, 이미 목숨을 걸기로 정하신 듯하다.”
  하니 그제야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자합이 가솔을 이끌고 니금의 대병을 향하여 주야로 나아가니, 도중에 니금이 도성을 향해 보낸 수레를 셋이나 마주쳤다. 호위병을 몰살하고 돌판을 읽으니 간주의 그 요물이 양가의 여식을 여럿 납치하는 등 사정이 갈수록 급박하여 대장군 니금이 곧 병을 움직일 기세였다. 이자합이 헤아려 보니 도성에서 왕의 돌을 싣고 오는 수레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수레가 사정을 파악하고 추적해 오기 전에 그가 지니고 있는 왕의 돌이 먼저 니금에게 닿아야 했다.
  마침내 니금의 대병에 이르렀을 때 이자합은 거의 기진맥진해 있었다. 대장군 니금은 병을 움직일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었던 터라 마음이 조급하여 예법을 모두 어기고 직접 왕의 돌을 맞이하러 나왔다. 이에 니금의 좌장 삭장이 따라 나왔다가 이자합을 알아보고는 크게 의심하여 심문하려 하였으나 이자합이 대뜸,
  “어명이오!”
  하고 소리치자 대장군 니금을 비롯하여 주위에 있던 모든 군사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자 이자합은 초두와 종구를 생략하고 자기가 직접 쓴 본 내용만을 간명하게 읽었다.
  “격파하라!”
  이 말에 대장군 니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좌중이 평소 임금의 어진 성품대로 다음 글귀가 이어지기를 기다렸으나 이자합이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이으려 하지 않자 쭈뼛쭈뼛 고개를 드는 자가 하나 둘 나타났다. 그때 이자합은 대장군 니금이 부르르 떠는 것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선왕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맹장 니금의 두터운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이자합이 짐작하기를, 니금은 그 짧은 어명을 듣고 곧 선왕의 치세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짐작대로 니금이 감동하여 선왕께서 직접 하사하신 철검을 두 손으로 짚고 육중한 몸을 일으키자 철검이 한쪽으로 크게 휘는가 싶더니 간신히 부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것이었다. 과연 명검이었다. 니금은 몸을 일으키더니 곧 말에 올랐다. 그의 말 역시 선왕께서 내리신 희대의 명마였다. 선왕께서 니금에게 그 말을 하사하시고 말씀하시길,
  “나라 안에 그대와 같은 대장부를 태우고도 달릴 수 있는 말은 이 한 필뿐이라.”
  하셨다. 사실이었다. 그의 장부다운 육중한 기골에 허리가 부러진 말이 한둘이 아니었다. 너무 빼어난 나머지 수레에 매달려 전장에서 대병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신세가 될 뻔한 것을 구제해 준 것도 다 선왕의 성은이다 싶었다. 니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 전군에게 진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받아서 따르고 있는 것은 사실 어질고 어지신 현왕의 영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승하하신 선대왕의 영이었다.
  이자합은 밤낮을 달려오느라 기진(氣盡)하여, 그 말을 마치고 곧 그 자리에 쓰러졌다가 한참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곧 말을 얻어 타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뒤에서는 왕의 길 위에서 벌어진 역모를 눈치 챈 호위병들이 그의 뒤를 바싹 따라오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그는 언덕 위에 자리한 대장군 니금의 본영 근처에 숙영지를 하나 얻어 그날 밤을 보냈다. 그가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어차피 하늘은 컴컴하기만 하여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이자합이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몇 년간 도성에서 서기로 봉직한 그로서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는 간주 관찰사 진막이 올린 돌판에 새겨진 글자로만 보아 오던 괴물체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돌 바퀴를 뉘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표면에 옥돌이나 잘 다듬은 철기처럼 광택이 어려 있어 사뭇 이채로웠다. 니금의 병졸 하나가 말했다.
  “처음에는 때때로 나타났다가 내내 모습을 감추더니 근래에는 밤낮없이 저 모양으로 떠 있나이다.”
  이자합은 그 물체가 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날개도 없고 공중에 매달려 있지도 않은 것이 스스로 허공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상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순간 그는 어지신 임금의 말씀이 옳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저렇게 놀라운 것이 나라에 나타났다면 그것은 길조인가 흉조인가? 왕은 그것부터 물으셨다. 녹인을 애처로워하시는 마음이 특히 각별하시어 녹인이 왜 하필 지금 돌아와 저렇게 말없이 머무르고만 있겠는가 하고 하문하실지언정, 낯선 것이니 일단 깨부수라 혹은 일단 잡아들이라 하고 간명하게 하명하는 법이 없으셨다. 이자합은 그가 저지른 일이 길한 일인지 흉한 일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열심히 철기창을 드나들었어도 그는 그런 무지막지한 무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자합이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다 발견한 그 무기는 말하자면 거대한 활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활이었다. 니금의 병사들이 그것을 조립하는 광경을 보고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물론 병장기에 대해서는 석기창 병장고가 철기창 병장고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된 지가 이미 천 년도 더 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철기창이 좋은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석기창에는 투석기가 있었다. 누구나 철기창 병기는 절대로 투석기의 규모를 따라올 수 없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자합의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신무기는 투석기를 월등히 능가할 만큼 거대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거대한 활 위에 놓인 화살이었다. 그 화살의 강건함이 투석기의 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도록 월등해 보였다. 투석기의 돌이라면 깨져 버릴 수도 있지만, 화살촉이 거의 사람 키만큼 큰 저 철노(鐵弩)는 절대 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철노가 서른 채나 진을 치고 있었다.
  이자합은 도성 쪽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어느 임금의 성은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라가 그만큼 강대한 것이야말로 곧 성군의 은덕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자합은 니금의 대병이 깨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병은 쉽게 깨질 것 같지 않았다. 이자합은 나라의 대병이 왕의 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 와서 보니 대병은 곧 쇠와 같은 것이었다. 쇠는 쉽게 깨지지 않는 법이었다.
  이자합은 내심으로 달아날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니금이 이자합을 잡아 두며 말하길,
  “내 따로 석판에 새겨 보고할 것이나, 그대도 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 도성으로 돌아가 어전에 그대로 전하라.”
  하니 이자합이 곧 오도 가도 못할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니금이 바람의 방향을 살피더니 오후가 되어야 철노를 겨누기가 좋겠다 하였다. 그는 괴물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번에 모든 화살을 다 쏠 생각이었다. 어쩐지 이 일 역시 왕의 돌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이 곧 이자합의 돌대로 이루어지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바람이 제 방향으로 불기 시작하자 니금이 좌장 삭장을 시켜 마지막 준비를 하게 하였다. 이자합은 괴물체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그것을 깨뜨려도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니금에게로 가서 혹시 왕께서 내리신 다음 영이 도달해 있을지도 모르니 하루쯤 더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니금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니금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좌장 삭장이,
  “변변치 못한 고자 놈이 장부가 하는 일에 나서서 제 놈과 같이 겁을 집어먹자고 하는구나.”
  하고 말하는 통에 이자합이 다시금 좌중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자합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오냐, 네가 오늘 큰 화를 당하더라도 나는 잘못이 없다.’ 하고 니금과 삭장의 대병이 이 자리에서 절멸하기를 응원하였으나, 내심 자신은 없었다.
  니금이 삭장에게 발사를 명하자 삭장이 칼을 뽑아 들고 발사 신호를 내렸다. 그러자 철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갈랐다. 서른 개의 화살 중에 스물일곱은 엉터리로 조준되어 있었다. 잘못 날아간 화살이 내려와 박히자 민가가 우습게 망가졌다. 그러나 제대로 날아간 나머지 세 개의 화살은 괴물체의 시커먼 표면을 정확하게 때렸다. 곧이어 화살 두 개가 튕겨져 나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지만 한 개의 화살은 화살촉이 다 들어갈 만큼 깊이 박혔는지 괴물체가 곧 연기를 내면서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다.
  이를 보고 이자합이 두려워하여 몰래 빠져나와 말에 올랐으나 곧 니금이 사람을 시켜 그를 다시 곁으로 불러들였다. 니금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기를,
  “요물이 시커먼 연기로 화하여 빠져나가는구나. 필시 넓적한 그릇이거나 둥그런 바둑알 같은 것이 한때 요물이 씌어 얄팍한 재주로 어지신 임금을 현혹한 것이렷다.”
  하였다. 괴물체가 비틀거리며 땅에 내려와 부딪치자 그 소리가 요란했다. 니금이 병졸을 시켜 잔해를 조사하게 하니 녹인의 사체가 즐비하게 나왔다. 이자합이 달려가 녹인의 주검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전에 읽은 녹인의 이야기가 석기창 서기를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녹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표류한 끝에 하찮은 농민과 똑같은 삶을 살다 돌아갔으나 그 삶을 원한으로 기억하고 먼 훗날 반드시 돌아와 갚아 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진 임금과 어진 신하가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위조한 왕의 돌이 마침내 녹인을 해한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그가 저지른 짓이 마침내 거대한 철기로 변하여 민가를 덮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그것은 철기창의 무시무시한 신병기로 나라가 나라 스스로를 겨누게 한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니금이 죽은 녹인을 보고 흉흉하다 이르며 명하기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불살라 버려라.”
  하니, 이자합이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때마침 왕의 길로부터 호위 병졸이 당도하여 그간 일어난 변고를 발견했다고 전하니 삭장이 곧 이자합을 의심하여 포박하였다. 괴물체로써 나라의 대병을 없애지 못하여 이제 그의 역모가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으니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오라를 받았다. 이어 호위가 왕의 돌을 대장군 니금에게 전하니 왕께서 새겨 말씀하시길,
  “괴물체라 하여 기이하게만 여기지 말고 귀한 손님이니 조심해서 대하라. 백성에게 해가 되거든 백성을 먼 곳으로 이주하게 하고 이미 해를 입은 백성은 관찰사가 직접 구제하라.”
  하셨다. 이자합이 왕의 돌을 읽고 감읍하여 눈물을 흘렸으나, 대장군 니금은 낯빛이 변하였다. 망극하고 망극한 그 모든 일이 한때 용의 발톱이나 그리던 변변치 않은 고자의 소행이라 욕하니, 그 말이 철제 병장기가 되어 이자합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다음날 아침에 이자합이 왕의 길을 따라 도성으로 끌려가는 동안, 어지신 임금이 보내신 왕의 돌과 거듭 마주쳤다. 호위 병졸들이 전하기를 니금이 곧 병을 움직이겠노라고 새긴 돌판을 임금께서 보시고 친히 간주로 거동하실 때까지 대병은 움직이지 말라고 쓰셨다고 했다. 이에 이자합이 크게 후회하고 낙담하여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데, 간주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이자합을 끌고 가던 행렬이 언덕 위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보니 니금의 대병이 퇴각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공중에는 녹인의 쟁반 셋이 도로 떠 있었다. 각각의 괴물체에서 불기둥을 아래로 뿜어내니 그 모양이 마치 괴물체들이 각각의 매끈한 불기둥 위에 얹어져 있는 것과 같았다. 세 개의 불기둥이 대병의 좌군을 덮치자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비명과 재로 변하였다. 오직 니금의 좌장 삭장만이 명마에 앉아 도주하고 있었으나 세 불기둥이 다투어 그를 추격하여 곧 재로 만들어버렸다.
  우군이 불기둥을 유인하여 스스로 유린당하는 동안 대장군 니금의 중군이 철노를 겨누었으나 괴물체들도 이번에는 철노를 가볍게 피해 버렸다. 이어서 불기둥 셋이 우군과 중군을 둘러싸고 크게 원을 그리자 나라의 대병이 그 안에 모두 포위되었다. 세 불기둥이 점점 좁은 원을 그리며 폭을 좁혀 오자 대병이 곧 아비규환에 빠졌다. 니금의 대병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재로 화하는 동안 병사들이 내지르는 광포한 비명이 온 천지를 뒤흔들었다. 불길 속에서 병졸들의 사지가 미쳐 날뛰는 모습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녹인의 불기둥은 너무나도 고요하여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모든 것을 파멸시켰다.
  마침내 대병이 내지르는 모든 소리를 잠재우고 나자 녹인의 불기둥이 곧 왕의 길을 따라 이자합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자합은 그 눈부신 광경을 똑바로 쳐다보고도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언뜻 용이 기둥을 감고 올라가는 모양으로 보일 때가 있었으나 불기둥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도 되는 듯 굵고 겉이 매끈한 편이었다. 그 뜨거운 것이 눈앞에 다가오자 이자합도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실로 아름다운 기둥이었으나 또한 실로 고요하고 참혹한 불길이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기둥은 그가 포박되어 있는 수레를 비켜서 지나갔다. 그 대신 달아나고 있던 호위병들이 모두 추격을 따돌리지 못하고 불기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왕의 길을 따라 도성으로 향해 가는 불기둥들을 뒤에서 보면서 이자합은 자신이 원래 꾀하던 바가 결국 이루어지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나라의 대병은 모두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불기둥들은 그 옛날 표류한 녹인이 도성으로 끌려가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끌려가고 있던 그를 일부러 모른 척 지나친 것이 틀림없었다.
  이자합이 수레를 깨고 마침내 밖으로 나와 보니 그의 죄상을 적은 니금의 돌판이 옆에 놓여 있었다. 그 돌판을 깨뜨려 자기 이름이 적힌 조각을 먼 곳에다 파묻고 나서 생각하니 이제 돌아갈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산으로 달아나니 도성과 어진 임금의 안위가 궁금하기도 하였으나 다시는 부끄러워 세상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이십년이 지나 민가에 나와 나라와 임금이 아직 무사하심을 듣고 엎드려 절한 후에 그때의 일을 돌에다 새기니, 어지신 임금께서 보시고 보기 좋다 하신 그 글씨대로 석기창 서기 이자합이 피눈물로 한 자 한 자 비석을 새겨, 녹인이 이 변변치 못한 고자 놈을 모른 척 지나쳐 간 그 자리에 조용히 눕혀 두고 달아나다.
mirror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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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07.01.25 16:25 댓글 수정 삭제
    멋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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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뭉그리 07.01.25 18:03 댓글 수정 삭제
    ^^ 매번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이 번 역식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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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e M.H 07.01.29 19:32 댓글 수정 삭제
    Thank you, thank you.
    And I'm still alive, at south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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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1.31 05:03 댓글 수정 삭제
    ... 헉. 인도에서 답글을 남기시다니... 두둥. (어쨌든 살아계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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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8.06 14:32 댓글 수정 삭제
    이걸 쓰기 직전에 영어로 뭔가 두 장짜리 글을 쓰고 있었어요. 미국 살다 온 애들이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먹겠다던 그 글... 아무튼, 그 글은 성격이, 군더더기없이 간결하게 써야 하는 글이었거든요. 단순한 문장구조로 간결하게. 거기에 한참을 몰입한 상태에서 그대로 뽑아 낸 문장으로 썼어요.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돌에 새겨야 된다면 문장을 간결하게 쓸 수밖에 없겠구나. "영어 알파벳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라틴어 대문자와 소문자의 차이는 대문자는 돌에 새겨야 하기 때문에 직선으로 되어 있고, 소문자는 양피지에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곡선이 많다는 것. 이런 뼈대에다가, 머릿속에 들어 있던 이런저런 장면들이 모여서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팔다리가 뭉툭하고 배가 튀어나온 대장부들 장면은 꼭 쓰고 싶었어요.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 그림이 다 그렇게 생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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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티 08.03.14 19:11 댓글 수정 삭제
    돌판에 고기 구워 먹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그래도 한 척은 잡았으니 고대인들에게 건배!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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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8.03.19 16:03 댓글 수정 삭제
    '내리쳤으나 깨지지 않았다'......배명훈 님 글 중 가장 웃겼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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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3.20 08:47 댓글 수정 삭제
    후훗. 그랬나요? 이걸 쓸 당시의 주변 상황은 무지하게 괴로웠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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