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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수학의 요정

2006.09.30 01:1709.30

readingfantasy.pe.kr그러니까- 첫 장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다.
첫 장 4문제는 거저 주는 문제라는 불길한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 앞의 4문제까지는 협조적이었다―3번은 약간 미심쩍지만- 미지항은 어렵잖게 동류항을 만나 소거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나는 길 잃은 미지항들에게 짝을 찾아주며 소박한 기쁨을 느꼈다. 펜은 확신에, 답은 합리성에, 그리고 수험생은 행복에 가득차서.
하지만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름대로 합리성을 구축해가던 내 식은 이차항의 급습을 받고 √ ̄의 감옥의 수인이 되어버렸고, 분명 대입할 때는 답이 되리라 믿고 있었던 숫자를 무리수의 감옥에 방치해놓고 나는 다음을 기약 할 수 밖에 없었다.
방정식은 너무나 단단했고 그 앞에서 고작 교과서 수준의 곱셈공식을 연마한 내 인수분해는 아무것도 자신 할 수 없었다. 함수와 함수사이, 광활한 좌표평면위에서 12Cm도 되지 않는 내 펜은, 너무나 무력했다.
분명 나를 구원하리라 믿은 숫자는 잔혹한 등호의 강을 건너 마이너스의 세례를 받아버렸고 이미 음수가 되어버린 그를, 나는 눈물을 삼키며 소거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연립방정식은 담백한 식이다. 12=12라는 등 선문답을 내놓을 때도 잦지만 화려한 식에 싸인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제멋대로 펼쳐지는 좌표평면보다 깔끔한 식의 그를 더 믿었다. 착실히 미지항을 소거해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1교시 언어시간에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가졌던 그 멋진 삼단논법을 꼭 닮아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믿음과 시험지는 서로소 관계였다. 오지선다의 답 중에 내 충실한 연립방정식이 내놓은 답은 없을 때가 더 많았고 당당히 '답 없음'에 표기할 만큼 연립방정식에 대한 내 사랑은 굳건하지 못했다. 하나하나 문제를 풀어 갈 때마다 나는 내 사랑과 잔혹한 시험지 사이에서 갈등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금까지 모든 문제들에게 그?하였듯이 답을 맺지 못한 식에게, 기다려 달라고 반드시 다시 풀어주겠다고, 스스로도 못 믿을 약속을 하고 다음 문제를 푸는 것이다.
다음 문제로 넘어 갈 때마다 두고 온 숫자의 애처로운 비명이 머릿속을 울려댔다. 내가 답을 만들어주지 못한 내가 전개한 바로 그 식은 -4점의 위기 앞에서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선들이 시퍼런 날을 세우고 가차 없이 공간을 분할하는 살벌한 좌표평면에서 a도 b도 아닌 a²+b의 값을 구하라며 대입이라는 희망마저도 꺾어버리는 잔인한 교육부의 문제를 상대하는 내게 선택은 남아있지 않았다.
끝없는 평면좌표에서 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을 근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무력했고 내 무력함 앞에서 끝없이 좌절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보이지 않는 해를 찾아 네 개의 사분면을 미친 듯이 휘젓고 다니는 내게 그는 x축을 따라 천천히 걸어왔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4사분면으로 건너가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서버렸다.

"거기는 무리수야. 반올림이라도 하는 게 어때?"

그는 날 보더니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물론.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그는 사실 표정이라 부를게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수학의 요정이었다.

"여기에, 당신이, 왜?"

"정말 얼빠진 질문이야. 당연히 D>0라서 그런 거잖아."

나는 납득했다. 납득했지만 내가 왜 납득했는지는 납득할 수 없었다. 하여간 그는 수학의 요정이었고 다른 설명은 불필요했다. 그는 가볍게 괄호를 까딱이며 내게 다가왔다.

"너는 여기서 뭘 하는 중이지?"

"해를 찾고 있는데요." 나는 최대한 멍청하게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걸 왜 아직까지 찾아?" 실패했다.

그리고 동시에 성공했다. 일단 요정의 멱살을 잡아 Y축 저편으로 던지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겨우 이차방정식이잖아. 넌 한참 전부터 헤매고 다녔고."

"이보세요. '겨우' 이차방정식이라니.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찾는 중인지 알아요?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면 좀 도와주지 그랬어요?"

"하지만 내가 나서도 못찾았을껄." 수학의 요정은 근의 공식을 오른손-어디까지 수사적 표현이다-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예?"

"그거 허근이야."

맥이 팍 빠졌다. 난 엉뚱한 평면에서 삽질하고 있었다.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 자체가 빗나갔어. 괜히 복잡하게 만들어 놨지만 그거 풀어도 답은 안나와. 그게 식이냐?"

"퍽이나 일찍 말해주시는군요. 근데 댁이 여기서 내가 수학 못하는 걸 갈궈서 뭐하시게?...요"

오우.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확실하다. 수학의 요정은 단 한번의 곱셈으로 날 당장 좌표평면에서 쫓아버릴 수 있는 i를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실수에서 쫓겨나 복소수와 순허수 사이를 헤매게 될까? 아니면 그럴 필요도 없이 인수분해? 맙소사. 분해할꺼면 완전제곱식으로 해줘! 다행히 인테그랄을 꺼내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파하하하!"

요정은 박장대소를 하더니 y=2x-4에 걸터앉았다. (그 충격으로 y절편 -4는 잠시 소수점을 가져야했다.)

"요정이라는 건 말이야. 사람들의 꿈과 희망의 투영이고 실현이란 말이다. 요정들에게는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역할이 있지."

소원을 들어주는 것. 수학의 요정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참 놀라운데.

"너 왜 수학을 못하는 거냐?"

"좋은 질문입니다." 전통에는 전통으로.

"모르는 것 같으니 말해주지. 너는 수학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아."

"요정이라더니 정말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요. 그럼 내가 왜 수학책을 씹어 먹고 싶어 하는데요?"

"그건 네 식습관의 문제지 내가 알바가 아니잖아?"

대화를 포기했다.

"네가 노력하는 것은 네가 수학을 못한다는 상황이 선행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네가 수학을 못한다는 상황에 선행되는 것은 '수학을 싫어한다.'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지."

아아. 그게 그 뜻이었군.

"그건 당연하잖아요. 수학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겁니까. 난 계산에 소질 없어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군. 계산과 별개로, 너는 수학을 싫어하고, 하고 싶어 하지 않고, 그래서 못해." 요정은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수학을 싫어하는데 있는 거지. 그럼 모든 개별적인 상황에서 그것에 어울리는 단 하나뿐인 개별적인 답들, 찾고자 하면 반드시 있는 (너의 허근 문제는 여기서 잠시 접어두자.) 이의 없는 보편 진리를 말하는, 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을 왜 싫어하냐고 묻겠어."

[수학]의 요정에게 카운셀링이라니.

"헷. 그러니까 내가 왜 수학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거죠? 그리고나서 당신은 내가 수학을 좋아하게 만들고 내 수학성적을 팍팍 올려줄거고. 흐음.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원의 방정식 때문에 싫....알았어요. 그렇게 멍청이 보듯 하지 말라구요. 내 개인적 자질 문제를 빼고 내가 수학 그 친구에게 호감이 안 가는 이유를 말해주죠. 당신은 수학이 하나의 답만 내놓는 게 아름답다고 했죠? 하지만 그건 내 미적 취항에 맞지 않아요. 낭만이 없다는 거죠. 하나의 식에 하나의 답. 정말 웃기는 일 아닙니까? 그런 경우가 얼마나 있다고. 모든 일은 하나의 결과를? 길을 가면 반드시 도착합니까?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거나, 목적지가 미친 드래곤의 급습을 받고 지구상에 사라졌다든지 하는 변수.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결과. 낭만이 없잖아!"

요정은 꽤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당황에 나 또한 일부 동의했다. 구구단 노래를 BGM로 깔고 수학이 싫어요를 외처야 했기에 말은 상당히 두서없었다. 그러나 곧 수학의 요정은 내 말에서 중복단어를 지우고 동류항을 소거하더니 반문했다.

"그래서? 하나의 답이 싫은 거야?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게 좋단 말이야?"

생각 이전에, 말이 나왔다.

"그런건 있을 수 없으니까!"

"명확한 것. 식처럼 딱딱 떨어지는 것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건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에요. 정상적으로 자아와 외부세계의 관계를 확립 할 수 있는 아이라면 '하나뿐인 정답은 없다'는걸 쉽게 깨닫지요. 철석같이 믿고 있는 엄마마저 화날 때와 기분이 좋을 때의 반응이 다르잖아? 수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달팽이와 헬리혜성 만큼이나 현실과 관계가 없어요.
명제를 배울 때 나오는 전통적인 예문이 있지요.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온다.' 봄=>따뜻하다. 따뜻하다=>제비 온다. 하지만 따뜻하지 않은 봄도 있고 유전자 조작된 제비라면 추운 지방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수학의 요정은 이제 전격적으로 황당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멍청한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멍청한 표정을 유지하기 보다는 내가 채찍삼아 휘두르는 싸인곡선을 피해야 했으니까. 숫자와 숫자가 고장난 세탁기마냥 회전하는 가운데서 함수와 좌표를 뒤흔들며, 나는 소리쳤다.

"수학은 불필요하다!"

변하고 변하는 세상에서, 하나의 답만 나오는 수학은 필요 없다. 아무리 많은 변수를 추가해 넣어도 현실의 함수를 그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현실의 답을 추구하지 못하는 수학을 싫어하는 것이다. 복소평면으로 도망치려는 요정을 잡아채며 다시 한번 외쳤다.

"수학 따윈 필요 없어!"


순간. 좌표가 흐려지더니 나는 현실로 귀환했다.
현실에는 잠든 오른손이 갈겨놓은 구불구불한 연필의 궤적과 10분 남았다는 감독 선생의 목소리.

그리고 파푸스의 정리 끄트머리에서 헤죽거리는 수학의 요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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