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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나의 우주

2008.06.27 20:3106.27

   큰 전시실을 여러 구획으로 나누기 위해 세워둔 간이 벽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린다. 건너편에 걸려있을 그림의 주인은 적어도 그 부모와 친구들 사이에서는 인정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동문회 선배들의 지원으로 열리는 이 행사는 미대생들 중 희망자를 받아 동문회관에서 며칠간 전시회를 열어주는 것이었다. 실력 있는 후배들을 지원하고 발탁하는 행사라는 설명이 팜플렛에 적혀 있다. 하지만 동문회관 게시판을 가득 메운 공지와 행사 포스터 속에서 미대 재학생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는 거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지키고 있는 전시실에도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미술 전공은 했지만 졸업하고 나면 영원히 미술과 작별할 학생들에게 마지막 추억 하나 만들어 준다는 행사니까.
   전시회를 준비하던 기간에, 승주 선배는 동아리 방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여자아이들은 금세 그를 둘러싸고 웃으며 격려를 퍼부었었다.
   재즈 감상 동아리에 유일한 미대생인 그는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유화를 그리고 재즈를 듣고 니힐한 분위기를 풍기고 얼굴도 괜찮고 키도 큰데다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있는 남자. 여자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만큼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지만 요령 좋고 사람을 부리는 데에 능숙하다. 그런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승주 선배의 전시회장을 대신 지키고 있는 거지만……. 친척이 입원했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데이트라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동아리 애들은 어제 왔다 갔다고 하니 오늘은 종일 사람 하나 없는 전시실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는 처지인가. 생각하니 더 우울했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것도 잠시. 가져온 신문을 뒤적이는 것도 잠시. 서영이가 한국에 있으면 이럴 때 불러서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한숨 한 번 깊게 쉬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기척도 없었는데. 뒷모습이 낯익다.
   "……서영아?"
   그림을 향해 서 있던 여자가 돌아보았다. 서영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 어학연수로 영국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서영이는 나만큼이나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그녀는 곧 미소를 띄웠다.
   "준호 선배.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을 앞질러 던진 그녀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나에게 다가왔다.
   "승주 오빠는 어디 갔어요? 금방 돌아와요?"
   "친척이 입원하셨다고 거기……"
   말이 목에 걸렸다. 서영이가 승주 선배를 부르는 호칭은 나와 마찬가지로 선배였다. 그보다, 오빠라는 호칭은 나를 위한 거였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굳어버린 내 얼굴을 살피던 서영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사라졌다.
   "서영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팔을 들어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그림을 가리켰다.
   "저기, 원래부터 저 그림이 걸려있었어요?"
   나로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가로수 길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잠시 그림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거의 똑같은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다시 서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 이 앞에 서 있었는데. 하나뿐인 출입구를 통해 전시실 밖의 복도로, 복도를 지나 동문회관 전시실 입구까지 달려나갔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 기척도 내지 않고 나타났던 것처럼 아무 기척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제 동문회관 전시실에서 본 건 꿈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승주 선배의 전시실을 지키다가 깜빡 졸았던 거다. 서영이가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어서 나쁜 꿈을 꾼 거다.
   동문회관 앞에서 길디 긴 국제전화 번호를 눌러 서영이가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집에 전화를 걸었고, 어눌한 영어로 서영이를 부탁했다. 막 레슨에 나가려던 참이라던 서영이는 밝고 즐겁게 웃었다.
   오빠 목소리 들으니 너무 좋다. 울 오빠야, 나 없어서 쓸쓸하겠네. 오빠 너무 보고 싶다.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그녀가 보고 싶어 가슴이 답답해졌었다. 그 감정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대학을 휴학하고 영국으로 간 서영이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려면 아직 두 달이나 남았다. 어떻게든 나는 그 기간을 혼자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조카 지현이가 내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휴, 막내 삼촌. 쟤 좀 봐. 계속 괴롭혀."
   지현이의 손은 세 살 어린 동생 태현이를 가리키고 있다. 여덟 살짜리 태현이는 제 누나의 목에 걸려있는 음성안내기를 탐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엄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태현이는 웃으면서 도망치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토요일의 박물관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다. 박물관 관람을 하고 기행문을 써야 한다는 지현이는 열심히 메모를 하는 한편, 음성안내기에서 나오는 설명으로는 부족한지 나에게 불쑥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어린 태현이는 나와 누나 주위를 뱅글뱅글 돌거나 누나의 목에 걸린 음성안내기 끈을 잡아당기거나, 지나가는 또래 꼬마와 눈싸움을 하느라 바빴다. 초등학생 조카 둘과 함께 있으면 다른 생각에 빠질 여유 같은 건 없다.
   주말 동안에 두 조카를 박물관에 데려가 달라는 큰형수의 부탁은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 말썽쟁이 둘에게서 해방시켜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큰 형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대학생 막내인 내 처지는 물론이고, 지방에 계신 엄마를 대신해서 2년째 막내 시동생을 챙기고 돌봐주는 큰형수를 생각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좀 더 자주 조카들과 놀아줘야 형수가 덜 힘들 텐데. 물론 매번 생각만 할 뿐 실천은 하지 않는 게 문제지만.
   지현이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컸다. 기어코 누나의 목에서 음성안내기를 빼앗은 태현이가 후다닥 도망을 치고 있었다.
   "야 임마. 태현아!"
   나는 급히 어린 조카의 뒤를 쫓았다. 붙잡으면 박물관에서는 뛰거나 큰 소리를 내선 안 된다는 설교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겨우 태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싶은 순간에 균형을 잃고 누군가의 어깨에 부딪치고 말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태현이의 어깨를 단단히 쥐고 나와 부딪친 남자에게 사과를 했다. 남자의 품에 안겨있던 아기가 잠이 깨었는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 아빠 치고 상당히 젊어 보이는 남자는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아기를 어르기 시작했다.
   태현의 머리에 알밤을 먹이며 몇 걸음 걷다 보니 남자의 얼굴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하고 돌아보자 남자가 아기를 감싼 이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금속제의 무딘 광택.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것은 망치였다.
   남자는 눈 앞에 위치한 유리상자를 망치로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에 무수한 금이 갔다. 신경을 자극하는 경고음이 박물관 내를 진동시켰다. 남자는 몇 번이고 유리를 내리친 후 망치를 집어 던졌다. 유리 틈으로 들어갔다 나온 손에는 손바닥만한 청자 접시가 잡혀 나왔다.
   그가 뒤로 돌아섰을 때는 이미 경비원들이 달려와 있었다. 경비원들은 무전기로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남자의 퇴로를 막으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는 경비원들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청자 접시를 자켓 주머니에 넣고, 양 손으로 아기를 치켜들었다. 비상벨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서 아기 울음소리는 특별히 크게 울리고 있었다.
   남자는 가장 멀리 서 있는 젊은 경비원을 향해 서더니 아기를 던졌다. 깜짝 놀란 경비원이 아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여자들의 비명. 남자들의 숨 들이키는 소리. 아기는 남자의 손에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비상벨보다 더 날카롭고 커다란 아기의 울음소리는 단 한 번 터지고는 잠잠해지고 말았다.
   아기에게 쏠렸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남자가 서 있던 자리로 향했다. 남자는 없었다. 경비원과 관람객들로 포위된 상태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깨져버린 전시용 유리상자와 젊은 경비병이 새파란 얼굴로 안고 있는 축 늘어진 아기만 아니라면 모두 다 꿈이었던 것처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박물관에서 고려시대의 청자 완(碗) 하나를 훔쳐 달아났다. 남자가 버리고 간 4개월 가량으로 보이는 남자 아기는 병원으로 옮기는 중에 숨졌다. 경찰은 전력을 다해 남자의 신원을 수배 중이다. TV와 신문, 인터넷에서 사건은 아주 모호하고 완화된 이야기로만 발표되었다.
   하지만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게 있어 이 사건은 백주대낮에 박물관에서 유물이 도난 당한 사건 정도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수십 명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그 남자는 어린 아기를 돌 바닥에 내던진 것이다. 그것도 웃으면서.
   경찰서에서 목격자 진술을 하면서도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은 돌 바닥에 던져지던 아기뿐이었다. 허공을 날아가면서도 울고 있던 아기. 이불이 풀려 드러난 아기의 머리. 우느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그 조그만 머리. 그 머리가 바닥에 닿았고 아기는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토할 것 같은데도 그 영상은 몇 번이나 생생하게 반복되었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큰 조카 지현이가 경찰에서 본 것들을 설명했다. 그 남자와 내가 무언가 대화하는 것 같았다는 누군가의 증언에 대해서 해명한 것도 지현이었다.
   "막내 삼촌은요. 그 아저씨랑 말한 게 아니라 부딪친 거에요. 태현이가요. 제 동생인데요. 쟤가 장난치고 도망쳐서 잡으려고 갔다가요. 그 아저씨랑 부딪쳐서 사과했어요. 그치, 태현아?"
   또랑또랑한 큰 조카의 설명과, 울면서도 누나가 확인의 질문을 던질 때마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 작은 조카의 덕택에 경찰은 일단 나에 대해 공범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낸 것 같았다.  큰 형과 형수가 경찰서로 달려오고, 나와 두 조카는 언제든 경찰에서 참고인 진술이 필요할 때면 도와달라는 요청 아닌 명령을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카들은 밤새 악몽에 시달렸고, 특히 어린 태현이가 심했다. 형수는 두 아이를 번갈아 끌어안고 달래느라 바빴다. 큰 형도 몇 번이나 담배 갑을 들고 베란다를 들락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두운 내 방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서 안방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베란다 유리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 태현이와 지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웠다.
   그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웃으며 나를 향해 아기를 던졌다. 아기가 다치기 전에,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야 해! 아기는 슬로우 모션 영화처럼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데도 내 몸은 물에 잠긴 것처럼 무거웠다. 죽을 힘을 다 해 버둥거리는데도 아기에게 팔이 닿질 않았다. 남자는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새끼, 죽여버린다!
   크게 외치고 싶은데 말은 목 안에서만 돌았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아기에게도, 남자에게도 닿지 않는다. 남자의 모습이 변했다. 서연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을 하고 내 눈치를 보다가,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없이.
   땀 범벅이 된 채 깨어나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1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새벽에야 겨우 잠들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오래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월요일 오전 강의를 모두 날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강의 따위, 아무려면 어때.
   집은 조용했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보니 식탁 위에 메모지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도련님. 태현이가 열이 심해서 병원에 가요. 가스렌지에 있는 냄비에 국이 있으니까 식사 차려 드세요. 나가실 때는 문단속 꼭 확인해주세요.
   형수가 남긴 메모였다. 간밤에 계속 악몽을 꾸고 울며 일어나기를 반복했던 태현이가 결국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 애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인데. 그 어린 조카의 눈 앞에서 갓난아기가 차가운 돌 바닥에 내던져져 죽었다.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증오가 가슴을 꽉 채워 숨이 턱턱 막혔다. 그 개새끼. 내 손에 잡히면 가만 두지 않겠어!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눈매가 가늘고, 웃는 얼굴은 제법 인상이 좋다. 그런데 어디서 봤었지? 게다가 사람들에 둥글게 포위한 상태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대체 그건 뭘까? 문득, 서영이가 생각났다. 영국에 있는 서영이가 아니라 그제, 금요일에 동문회관에서 꾸었던 꿈에 나온 서영이. 그건 꿈이었을까?



   서영이, 아니 서영이와 똑 같은 용모를 가진 그 여자는 승주 선배에 대해 물었었다. 친밀한 듯한 말투였다. 어쩌면 모든 것이 승주 선배의 장난이 아니었을까? 승주 선배의 전시회는 화요일까지다. 나를 불러냈던 것처럼 또 누군가를 불러들여 전시회장을 지키게 한 것이 아니라면 그 곳에 있을 거다.
   급히 샤워를 하고 끼니도 거른 채 집을 뛰쳐나왔지만 버스는 꽉 막힌 길을 거북이처럼 기어갔다. 해마다 기름값이 오르는데 왜 다들 그렇게 차를 몰고 나오는 걸까? 더구나 월요일 오후인데. 어째서 이렇게 도로에 차가 가득한 걸까.
   동문회관 부근에 도착한 것은 4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전시회 종료 시간은 6시. 시간은 넉넉했지만 나는 뛰듯이 걷고 있었다. 발걸음만큼 머리속도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엇을 물어야 하나. 장난은 이제 그만하세요, 라고 웃어넘겨야 하나? 그게 장난이라고 한다면 박물관에서 본 남자는 뭐지?
   전시실 입구가 눈에 들어와 걸음을 멈추었다. 내 앞에서 누군가 전시실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또 다시 낯익은 뒷모습.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또 낯익은 미소.
   "준호 선배. 아니, 여기서의 나는 선배를 뭐라고 불렀죠?"
   "누구야, 너."
   "윤서영이에요. 날 몰라요?"
   웃고 있는 얼굴인데 그녀의 눈빛에서는 무언가 필사적인 기색이 있었다.
   "날 알죠? 나는 여기에 있었던 거죠?"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녀가 무서웠다. 군대에서 배운, 공포를 이기기 위한 반사적 행동으로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숨을 두어 번 내뱉고서야 주먹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넌 누구야? 서영이랑은 무슨 관계야?"
   "내가 서영이에요! 윤서영!"
   "서영이는 여기 없어! 영국에 가 있잖아! 돌아오려면 두 달이나 남았어!"
   그녀의 목소리에 맞서 내 목소리도 커졌다. 분노가 실린 내 목소리에 서영이, 아니 서영이와 같은 모습을 한 여자가 멈칫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놀랍게 확 밝아졌다. 제대하고 복학한 후 참가했던 첫 MT에서 내가 사귀자고 말했을 때, 서영이의 얼굴이 그랬다. 평소에도 귀엽지만 정말 예쁜 얼굴이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그 얼굴이 있는데도 기분이 나빴다.
   내 반응이 어떻건 간에 눈 앞의 여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밝은 얼굴에 잘 어울리는 밝은 웃음을 가득 띄웠다.
   "고마워요. 준호 선배. 나 선배에 대해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이제 승주 오빠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왜 내 그림을 전시회에 내지 않았는지 물어볼 거에요."
   춤추듯 돌아서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가 돌아보았지만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 말해야 하지? 넌 서영이가 아니야? 오빠라고 부를 사람은 승주 선배가 아니라 나야? 아니면, 서영아 너 대체 왜 그래? 그렇게 말해야 하나?
   "그러는 거, 좋지 않아요."
   내 고민을 딱 잘라내듯 누군가 말했다. 기척도 없이, 우리 옆에 누군가 나타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잡고 있던 서영의 모습을 한 여자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가 비명을 지른 후에야 놀라서 손을 뗄 수 있었다.
   그 놈이다. 박물관에서 본 그 놈. 그 놈이 주먹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었다. 둥근 얼굴에 인상 좋은 웃음을 띄운 채. 놈은 내 존재를 무시한 채, 서영의 모습을 한 여자에게 말을 이었다.
   "내가 알아보고 왔어요. 여기의 윤서영은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윤서영의 그림은 그려진 적이 없어요.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해요. 최준호라는 사람."
   의식적으로 단단히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빠졌다. 서영의 모습을 한 여자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그녀의 멍한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동문회관 부근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발길이 적게 닿는 곳에 있는 벤치. 이런 곳에 벤치가 있는 줄도 몰랐다. 서영의 얼굴을 한 여자는 벤치 가장자리에 앉은 채 서영이처럼 울고 있었다. 여자의 눈물에는 남자들의 기운을 빼놓는 힘이 있다. 눈 앞에 때려 죽이고 싶은 놈이 있는데도 나는 벤치에 앉아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경찰에 넘겨도 소용 없습니다."
   둥근 얼굴의 남자는 내 앞에 서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말이 느릿하고 발음이 어눌하다. 이 목소리도 들어본 기억이 있다. 언제였지? 어디서였지? 나는 어떻게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물었다.
   "왜 아기를 죽였어?"
   남자는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가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가 꺼낸 손에는 박물관에서 사라진 청자 술잔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양 손으로 청자 술잔을 소중한 듯이 들고는 들여다보았다.
   "아, 그 아기. 공원 화장실 앞에 버려져 있는걸 주웠지요. 버림 받은데다 어차피 곧 사라질 아기였으니까. 이 세계는 소멸해요. 이제 5일 정도 남았을 거에요."
   "뭐?"
   "아직 눈치채지 못했나요? 우리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거."
   머리가 어지러워서인지, 길에서 기나 도를 믿으십니까 운운 하는 자들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법에 대한 농담 따위가 몇 개나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미친 새끼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의 윤서영은 영국에 갔지요? 전화, 해보세요. 옆에 있으면서 영국에서 전화를 받을 수는 없지 않나요?"
   내가 왜 네 놈의 말을 들어야 해? 생각하면서도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이미 외워버린 긴 국제전화번호를 눌렀다.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나자 언제나 부끄럽게 생각하는 영어 발음으로 인사말을 하고, 한국에서 온 학생을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반가운 외침이 들렸다.
   [ 오빠? 나야 나. 서영이! 에헤헤. 다들 바빠서 내가 받았지. ]
   진짜 서영이가 웃고 있다. 진짜 서영이가 기쁜 말투로 안부를 묻고 있다. 하지만 나는 벤치 끝에 앉아 계속 훌쩍이고 있는 또 다른 서영에 신경이 쏠려 제대로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서영이가 할 말이 있다는데도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로 끊고 통화를 마쳤다.
   서영이는 지금 영국에, 그리고 또 내가 앉은 벤치 끝에 있다. 나는 여전히 내 앞에 서서 훔친 청자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럼 넌 뭐야?"
   "그거 알고 있어요? 가능성만큼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거."
   책에서 읽은 적은 있다. SF, 판타지, 추리소설 같은 걸 열심히 읽어댔던 고등학생 시절에. 그런데 그게 뭐?
   "그 이야기는 진짜에요. 아주 사소한 가능성과 선택의 기로에서도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죠. 원래의 우주와 아주 비슷하지만 어느 선택에서의 다른 결과를 갖게 된 우주가 생겨나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우주 중 수많은 수가 계속해서 사라져요. 나는 그 사라진 우주 중 하나에서 소멸되지 않고 남은 찌꺼기에요. 저기 저 아가씨도."
   남자는 벤치 끝에 앉아 울고 있는 또 하나의 서영을 가리켰다. 울고 있던 그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남자를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 아가씨는 나와는 의견이 달라요. 우리가 선택된 사람이라고 믿고 있지요. 어느 쪽이 진실일지는 몰라요. 나는 뭐냐고 물었죠? 이쪽 우주에 내가 태어나 무사히 자랐다면 지금은 중국에 있겠지요."
   중국. 떠올랐다. 언젠가 술집에서 과 동기 복학생 녀석을 만났고, 그 녀석의 테이블에 불려가 잠시 그쪽 일행들과 술을 마셨었다. 그 동기 녀석의 룸메이트라던 녀석이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가느다란 눈. 웃는 얼굴이 아주 인상 좋았던 녀석. 나는 술에 많이 취해있었고, 놈에게 몇 번인가 짱개라고 부르고는 사과했었다. 놈은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웃었고 괜찮다, 그게 좋은 호칭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제 익숙해졌다고 아주 능숙한 한국어로 대답했었다.
   그 놈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내 앞에 있는 녀석의 얼굴은 매끈하고, 술자리에서 만났던 중국 유학생은 왼쪽 볼에 손가락 두 마디 만한 붉은 얼룩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기억났어. 너…… 네 말이 다 진실이라고 가정하고 하는 얘긴데. 이 세계에서의 너는 한국에 와 있어. 유학생으로…… 우리 과 동기의 룸메이트로……."
   "그래요? 이 우주의 나는 살아남고, 꿈을 이루었군요."
   놈은 여전히 청자 술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중국에 있었을 때, 외국 잡지에 실린 사진에서 저 비슷한 술잔을 본 적이 있어요. 품위가 있는 연한 녹색에 학이 그려진 술잔. 언젠가 꼭 한국에 가서 저 맑은 색을 직접 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국에 유학생으로 가게 되었어요. 한국의 공항에 도착한 순간에, 내가 살고 있던 우주가 끝나버렸죠. 사라졌어요. 모두."
   남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손바닥만한 청자 술잔을 향해 있었다.
   "내 우주가 사라졌는데도 나는 왠지 남아있었죠. 그리고 정말 많은 비슷비슷한 우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소멸이 예정된 우주에 대해서는 그 세계에 들러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도.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도 자유. 그리고 그 우주가 사라져도 나는 계속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도."
   남자는 나와 또 하나의 서영이 사이의 벤치에 청자 술잔을 내려놓았다.
   "소멸되기 직전의 우주에 수없이 들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수많은 가능성과 선택 사이에서, 신이든 무엇이든 어떠한 의지가 우주들을 솎아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들렀던 많은 우주에서 아주 많은 나를 멀리서 살폈지요. 어느 우주에서 나는 10살 때,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전신화상을 입은 채 죽었지요. 또 어느 우주에서의 나는 그 뜨거운 물을 일부만 맞아 양 다리를 못쓰게 되었어요. 내가 태어나 자랐던 그 우주에서는 어머니께서 대신 뜨거운 물을 뒤집어썼지요. 어머니는 화상으로 흉측한 꼴이 되었지만 나는 무사했어요."
   "그러니까…… 네 말은 이 세계, 그러니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소멸할 거라는 뜻이야?"
   별로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일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도 겁이 난다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말했잖아요. 이제 이 세계의 시간으로 5일 정도 남았어요."
   "어떤 식으로 끝나는 거야?"
   대답은 벤치 끝에 앉아있는 다른 세계의 서영에게서 나왔다.
    "아무 것도. 혜성이 부딪치는 것도 아니고, 우주가 새로운 빅뱅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에요. 사라지는 거에요. 죽는다는 것과도 달라요. 그냥 완전히 사라지는 것뿐이에요."
   울어서 잠긴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쓸쓸해졌다. 쓸쓸하지만 그래도 아직 남의 이야기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난 서영이가 둘이나 있다는 걸 알고 별 생각을 다 했는데. 서영이는 혹시 쌍둥이였나 생각도 하고, 내 앞에 있는 게 도플갱어라는 건가 생각도 하고."
   중국 유학생과 같은 얼굴을 한, 사라진 우주에서 온 남자가 따라 웃었다.
   "도플갱어라는 건 만나면 죽게 된다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말하는 거지요?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같은 자를 만나면 그 세계는 소멸을 앞두고 있다는 거니까. 그에 대한 공포가 모든 우주에 퍼져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역시 제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에요."
   다른 우주에서 온 남자와 여자는 이제껏 그들이 떠날 때 계속 그랬듯이 기척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라지기 전, 여자는 이제껏 자신이 들렀던 여러 우주 중에서 늘 자신의 연인은 승주 선배였다고 했다. 몹시 분한 듯한 어조여서 너 같은 것 따위가, 라는 말이 들린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들이 사라진 뒤 벤치에 남아있는 것은 나와 손바닥만한 청자 술잔뿐이었다. 술잔을 들었다. 다른 우주에서 온 남자의 주머니와 손으로 덥혀진 온기가 남아있었다. 나는 술잔을 양 손으로 꼭 쥐었다. 술잔이 점점 식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경찰은 박물관의 CC-TV 분석과 버려진 망치의 지문 감식, 죽은 아기의 DNA감정 등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고 했지만 별 성과는 없는 모양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새로운 화제가 한창 떠오르고 있었다. 도플갱어 신드롬. 호주의 한 남자가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났으며 함께 사진촬영을 했다는 이야기가 해외토픽에 실린 이후, 인터넷에는 자신도 도플갱어를 만났다는 글이 연일 올라오고 있었다. 상당수가 시류에 편승한 가짜라고 해도 누군가는 정말 내가 만난 자들과 같은 존재를 만났을 것이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자신과 관련이 있는 장소를 떠돌 거다. 그러면 다른 우주의 자기 자신과 만날 가능성이 높겠지.
   나는 평소처럼 수업에 들어가고, 아르바이트로 주 2회 중학생을 가르치는 과외를 계속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은 그만두었다. 대신 조카들의 숙제를 봐주거나 놀아주었다. 저금을 털어 큰 형수가 전부터 갖고 싶어했던 자전거를 사드렸다. 큰형과 한 번 술을 마셨다. 형에게 그 동안 같이 살게 해주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어 고맙다고 했다. 큰 형은 쑥스러운 표정이 되어 웃었다.
   임마, 너 군대 가기 전에도 그런 말 했었잖아. 뭘 또 하고 그러냐? 술 취했냐?
   고향에 계시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직접 뵈러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엄마를 보는 순간 울어버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내가 결혼하게 될 때나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말을 했다. 엄마, 사랑해. 엄마는 한참 조용하더니 웃음 반 걱정 반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우리 막내가 별 소리를 다 하네. 낯뜨거워도 듣기는 참 좋구나. 그런데 무슨 일 있니?
   그런 일들이 있던 동안 푸른 청자 술잔은 계속 내 방 책상 구석에 놓여있었다.
   다른 우주에서 왔다는 사람들을 만난 다음날 저녁, 영국에서 전화가 왔다. 서영이는 내가 전날 전화를 끊어버렸던 일에 화를 내고는, 토요일에 한국에 도착할 테니 공항에 마중을 나와달라고 했다. 비행기 표 값이 비싸긴 하지만 아버지 생신이라 한국에 꼭 가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다른 우주에서 온 자들이 말한 이 우주의 소멸일자는 토요일이다. 그녀가 한국에 온다고 생각하니 덜컥 무서워졌다. 하지만 내가 괴로워하건 말건, 시간은 흘렀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나 빠르게.
   알아듣기 힘들게 웅웅 울리는 방송 소리에 눈을 뜨고 공항의 안내판을 보았다. 몇 번이나 생각하고 생각해서 외워버린 항공편. 홍콩을 경유해서 오는 항공기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안내판 위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가 믿는 부처님. 큰형수가 믿는 하나님. 누구든 좋으니까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제가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부탁 드린 적이 없잖아요. 제발 한 번만 들어주세요. 이 우주가 소멸되는 거라면 서영이가 무사히 도착하고 저와 만난 이후로 해주세요. 서영이를 직접 만나서 그 손을 꼭 잡고 사랑한다고, 나를 선택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까지만 연기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문득, 생각이 났다. 다른 우주에서 승주 선배와 사귀었던 그 서영이가 했던 말. 고마워요. 준호 선배. 나 선배에 대해서 절대 잊지 않을게요. 방금 한 번만이라고 소원을 빌었으니 신들에게 다시 빌거나 할 염치는 없었지만, 나는 부디 그 다른 우주의 서영이가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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