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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수이

2008.09.26 23:2909.26

   1.

   주술사가 쓰러졌다. 세상의 중심에 서서 세상과 세상을, 세상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온전하게 잇겠다던, 내 사랑하는 여인 수이가 갑자기 서술을 멈췄다. 그 순간 나뭇가지를 흔들던 바람이 갑자기 멎어 버리더니 서쪽으로 떨어지던 해도, 꽥꽥거리며 날아가던 새도, 물가에 호젓하게 머물던 빛도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도 그 순간을 서술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나를 둘러싼 모든 번뇌가 정지되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마저 잠시 주춤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이 곧 열반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수이가 다시 한 번 정신을 잃고 비틀거린 순간의 징후일 뿐이었다.
   주술사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서술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서술해 주지 않으면 세상은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오로지 주술사들이 서술해 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감각도, 인식도, 존재도, 나도. 그 사실을 깨달은 날, 나는 허무와 비탄에 잠겨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바르무사 사원의 그 높은 첨탑을 향해 하염없이 올라갔다. 수이가 울면서 뒤따랐다.
   “모위. 그만 가.”
   “따라오지 마.”
   “가지 마. 그럼 나도 너 따라갈 거야.”
   “죽으러 갈 건데. 어디까지 따라간다는 거야?”
   “나도 죽을 거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것 좀 봐. 나를 보라고. 내가 걸음을 멈춘 게 아니야. 나는 그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고 서술된 것뿐이야. 그러니까 바르무사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도 내가 아니라고. 그냥 그렇게 서술되고 있을 뿐이야.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그냥 나를 따라오면서 울고 있다고 서술되고 있는 것뿐이잖아.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뭐라 그러지 마. 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니가 없으면 안 돼. 그럼 숨도 못 쉬게 될 거야. 나는 니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거짓말 하지 마. 그런 건 이제 없어. 처음부터 없었어. 니가 나를 목숨처럼 아낀다고? 아니야. 그건 거짓말이야.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 너는 나를 몰라. 너는 진짜 나를 몰라. 나도 너를 몰라. 너는 내 외로움을 몰라. 존재하니까 외로워야한다는 걸 너는 몰라. 그런데 그 존재조차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어. 나는 그냥 존재한다고 서술되었을 뿐이야. 겨우 그런 게 이 모든 외로움의 원인이라고? 나는, 수이, 나는 없어. 존재하지도 않아. 너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가슴 아파하니?”
   “하지만.”
   하지만.
   수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다시 바르무사를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스무 걸음, 서른 걸음. 그리고 그때 수이가 말했다. 사랑한다고. 수이가 그렇게 서술했다. 주술사 수이의 첫 서술이었다. 나는 수이가 서술한 그 문장을 읽었다. 들은 게 아니다. 직접 읽었다. 그 순간, 나는 수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의미를 온전한 상태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빠짐없이 전해졌다. 존재가. 마음이. 수이의 숨 막히는 사랑이. 수이가. 수이가.
   수이가 온전하게 나에게 전해졌다. 아니 수이가 온전하게 나에게 전해졌다고 서술되었다. 물론 나는 늘 서술되고 있었다. 서술되고 있다고 서술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전과는 달랐다. 그것은 세상 저 편에 있는 어떤 낯선 주술사가 서술한 생경한 문장이 아니라 수이 본인이 내 눈앞에서 직접 서술한 문장이었다.
   나는 온 몸으로 전해지는 그 생생한 서술의 희열과 무게에 눌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나는 수이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그러니까 가지 마. 모위.”
   수이가 말했다. 그대로 이루어졌다. 나는 가지 않았다.
   “수이도 주술사였구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수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니 열반이 불가능할 수밖에. 버리지 못하는 기억이라니.
   2년 후에 수이는 세상의 중심으로 떠났다. 주술사였으니까. 서술자였으니까. 나는 수이를 잡아 둘 수가 없었다. 서술자를 잡아 가둘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이도 그렇게 서술했다. 눈물지으며 마을을 떠나던 날, 수이가 말했다.
   “모위. 너는 평생 내가 서술할 거야.”
   “그래, 수이.”
   다시는 수이를 볼 수 없다는 슬픔에 나는 세상의 가장 변두리, 수이가 있는 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와 산속에 파묻혔다. 모든 인연과 번뇌를 끊고 진짜 나를 찾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수이의 맹세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석 달이 지나자 나는 수이가 나를 서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수이는 내 시점에서 세상을 서술하고 있었다. 수이는 서술자인 자신과 나를 분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늘 함께였다. 그 이상이었다. 번뇌가 끊이지 않았다. 사랑이 멈추지 않았다. 도저히 열반에 들 수가 없었다. 수이가 그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던 수이가 어느날 쓰러진 것이다. 창백하고 병약하던 아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수이를 찾아 나설 수는 없었다. 수이는 주술사다. 서술자다.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다행히 수행자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시간.



   2.

   밥이나 짓고 청소나 하던
   제자가 속세로 달아났다 인연
   하나가 더 끊어졌다 면벽한 벽에
   가득 번뇌로 벽화를 그렸다
   도(道)로 나물하고 이치(理致)로 밥 짓던
   반 신선 아이를

   쫓아 발자국 지워진 눈길을 가는데
   사흘째 범 한 마리 존재가 따라 붙었다 걸음
   무뎌지고 지치면 달려들어 내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을

   나흘이었다. 수이가 쓰러지고 서술이 축약된 지 무려 나흘이 지난 뒤에야 수이는 서술을 회복했다.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온 세상이 운율로 요동치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산을 뛰쳐나온 범이 침착하게 내 뒤를 밟았다. 나는 마음을 수련하기 훨씬 이전부터 육신을 수련했다. 범이 이길지 내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두려워 달아난 아이는 찾을 길이 없었다. 아이는 산 속 길을 잘 몰랐다. 산에는 길이 따로 없었지만, 아이의 머릿속에 산은 외길이었다. 따라가면 금방 따라잡을 것 같았는데 하루를 걸어도 아이가 없었다. 이제는 아이에게도 외길이 아닌, 끝없이 갈래를 뻗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뒤에서
   언뜻 들려오는 발소리가 다 섬뜩한
   이빨 같았다 서술이
   또 흔들렸다.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은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수이가 걱정스러워졌지만 수이 말고도 걱정해야 할 사람이 둘이나 더 있었다. 아이와 나. 수이는 내가 자기 일을 너무 걱정하지는 않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이의 건강이 곧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믿음 가질 수가 없었다. 수이 자신도 그렇게까지는 서술하지 못했으니까.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주술사가 흔들려서 세상이 완전히 엉망으로 서술되었을 때에도 깨달은 자는 그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있다. 만약 절망하거나 균형을 잃은 주술사가 세상이 온통 불바다라고 서술해 버린다고 해도, 깨달은 자는,
   “아닌데. 불바다가 아닌 것 같아.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하고 서술자에게 직접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서술의 권한은 주술사에게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하지만 깨달은 자는 우주 건너편, 서술되지 않고도 존재하는 자들에게 직접 닿도록 말을 하는 방법이 있다. 직접 인용되는 방법이다.  
   아이는 깨달은 자였다. 이미 반은 신선이었다. 하지만 말을 못했다. 세상이 무너진다고 서술되면 그대로 무너져야 했다. 나면서부터 말 못하는 아이를 아이 아버지가 데리고 왔다. 데리고 왔다가 버리고 갔다.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채 같이 살았다. 자기 입으로 한 번 불러 보지도 못할 이름 아예 얻지를 말아라, 그대로 신선이 되거라.
   아이는 산길을 무서워했다. 혼자 산을 내려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산. 아이는 아버지를 따라 산을 올라올 때 걸었던 길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길옆에는 온통 호랑이나 산짐승이 우글거린다고 믿었다.
   “누가 그러디?”
   누가 너한테 그렇게 서술하디? 아이 아버지가 그랬을 거다. 아이 아버지가 아이에게 그 한 길만을 서술해 주었을 거다. 그 먼 산길을 혼자 내려가 아무도 서술해 주지 않은 새 길을 얻었으니 그거야 말로 득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스승이랍시고 비로소 득도한 아이의 행방을 걱정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그것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겠다. 수이가 아이의 행방을 서술해 주면 좋으련만. 당장에라도 수이는 내 눈앞에 어린아이의 발자국이 나타났다고 서술해 줄 수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수이는 내가 보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서술해 주지 않았다.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위대한 서술자를 얽어맸기 때문이다. 서술자도 나도 아닌 제3자의 시점을 택했더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제3자의 눈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수이가 아이를 서술하지 못했을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하지만 수이는 내 눈을 택했다. 나와 똑같은 것을 보는 시점을 택했다. 나는 수이의 선택을 허락한 다른 주술사들이 존경스러웠다. 불완전한 주술사. 평생 우리가 하나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걸음이 무뎌졌다 언
   발이 눈길 위에 긴 발자국을
   남겼다 지워졌다 눈이
   덮여 포근한 열 발자국 뒤에

   녹으면 사라질 열 발자국 뒤에 눈
   녹으면 곧 사라질 선혈이
   아직 땅에 닿지도 않은 눈 위에 내린다 곧
   바닥에 그 붉은 새 눈이

   깔리면 내가 그 위로
   한 발 한 발 다가가
   참극을 맞으러

   간다 범이 열 발자국 뒤에서 다가와 이빨을



   3.

   깨어진 서술이 지나간 다음 이틀간 서술이 없었다. 수이가 쓰러졌는지 내가 쓰러졌는지 둘 다 쓰러졌는지. 이런 식이라면, 죽을 때까지 함께 하자던 수이의 맹세는 아무튼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이틀인 줄은 어떻게 알았나 싶었다. 수이가 그렇게 서술했으니 수이가 먼저 깨어났나 보다. 나도 수이가 위독한
   건 알겠다. 서술이 깨어졌다. 숲이
   엉망이었다. 호흡이 가빴다 수이는.
   나는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선혈 낭자한 눈밭은 없었다. 범이 쓰러진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고 누가 말했다 누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누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물이란다 범은
   아무나 물어 죽이지 않는단다 지나던
   마을 사람들을 보고 내 곁을 세 바퀴 더 맴돌다가 가 버렸다 사람들이
   고이고이 쓰러진
   차가운 육신을 들쳐 업고 민가로
   내달려

   수이. 호흡이 가쁘다 수이는. 나는 편안하게 누워서 가빠지는 수이의 서술을 읽는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다음 말을 따닥따닥 붙여 놓은 수이의 서술을 읽다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벽이 보였다. 면벽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 보려고 면벽하는 줄 알았는데, 실은 내가 제일 보고 싶었던 게 벽이었던 모양이다. 사실은 보고 싶은 것만 하루 종일 보고 앉아 있었던 셈이다. 구도자랍시고 끼니도 걸러 가며 사랑해 마지않는 벽을 부여잡고 번뇌니 열반이니 웅얼거리는 꼴이 수이를 통해 모조리 서술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남았을까. 수이의 숨은.
   “세상의 중심이 어느 쪽인가요?”
   내가 물었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어물어물 직접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말을 수이가 간접 인용해 주었다.
   “어느 쪽?”
   다시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서술되었다. 그 쪽으로는 오지 말라고, 수이가 그렇게 서술하는 셈이다. 오면 안 된다고.
   아이는. 아이는 어쩌지. 수이가 서술했다. 그러자 나도 ‘아이는, 아이는 어쩌지.’ 하고 근심이 일어났다. 그깟 인연 따위 내가 일일이 챙기고 다닐 필요는 없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이도 알고 보면 이 세상에서 맺은 인연 중 하나가 아니던가. 다른 사사로운 인연을 챙기자고 아이와의 인연을 버리겠다는 게 아닌가.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어차피 흔적도 놓쳐버린 마당에, 아이를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었다.
   범이 어슬렁거리고 있는데요. 이틀 밤 내내.
   마을 사람이 말했다.
   요 며칠 새 천지가 뒤집어져서요. 세상이 흉흉해져서, 이빨 가진 온갖 짐승이 산에서 자주 내려왔지요. 범이 영물인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거든요. 영물이구나 하고 마을 어귀에 들여는 놨는데, 그런데 무서워서요. 산짐승한테 물려 죽는 사람이 동네마다 한 둘이 아니잖아요. 요 놈이 있어서 이 동네는 잡짐승이 얼씬을 안 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틀이나 저러고 굶고 있는 걸 보면, 저 놈도 슬슬 배가 고플 거 아니겠어요. 기근 나면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일도 흔한데 영물이 사람 안 잡아먹는다는 법이 어디 있어야 말이죠.
   없었다 그런 법은. 나는 산 속에 틀어박혀 있다가 또 산 속만 헤매고 다녀서 사람 사는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몰랐다. 산만 뒤집어진 게 아니라 세상도 뒤집어졌나 보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이 하는 말은 나더러 저 산짐승을 데리고 산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소리였다. 어질어질한 상태로 밖으로 나가 산 어귀를 어슬렁거리는 범을 올려다보았다. 살기에 소름이 돋았다. 마음이 육신을 움직여만 준다면 내가 먼저 저 살기를 잠재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숨이 끊어지도록 마음은 침묵할 것이다. 몸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단련한대로 죽어갈 것이다. 그것도 열반은 열반이지.
   “범이 나를 물어 죽이지도 않고 그냥 주위만 맴돌았다고요?”
   내 말에 마을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다섯이나 됐지만, 범이 노려보고 있으면 아무도 가까이 가지를 못해요. 일단 눈에 들었으니 달아날 길도 없어요. 영물이니 해치지는 않겠거니 했지만, 스님 등 뒤에서 이빨을 드러냈다 숨겼다 했으니까, 우리도 몰라요. 영물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왜 그랬을까요? 왜 산을 내려왔을까요?”
   영물이니까요. 마을 사람이 말했다.
   산에 살던 영물이 내려온다고 했어요. 악귀가 살아나서 세상이 조각나게 생기는 날에 영물이 나타나서 악귀를 물어 죽인다고.
   “누가 그래요?”
   나는 누가 그렇게 서술했느냐고 물었다.
   몰라요. 전해 내려 온 이야기라. 근데 다들 알고 있어요. 그 이야기.
   내가 다시 물었다.
   “악귀가 살아났다고요?”
   그럼요. 온 천지가 발칵 뒤집힌 거 보세요. 악귀가 온 천지를 어떻게 만들어 놨는지 보세요.
   “악귀가 그랬다고요? 이게 악귀가 한 짓이라고 누가 그래요?”
   모르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긴데.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요. 옛날에도 하늘에서 시뻘건 불이 떨어지고 대낮에 해가 세 개가 뜨면 영락없이 악귀가 나타났대요. 그러면 또 영물이 나타나고.
   악귀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서술자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악귀? 누구? 수이가 악귀라고?”
   그러자 마을 사람이 말했다.
   그래요! 그 이름. 수이! 스님도 아시잖아요. 세상 가운데 쪽은 벌써 사라진 거나 다름없대요. 그 수이 때문에.  
   “설마.”
   나는 조금 더 시간을 지체한 다음 범을 따라 도로 숲으로 들어갔다. 범이 발걸음을 내 쪽으로 옮겼다. 다시 존재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서술이 깨졌다.

   어디로 가나 쫓아갈
   아이도 이제 없는데
   사람들이 문을 걸어 닫고
   산으로 나를 몰아
   죽으라고
   죽으라고

   면벽할 벽마저 뺏기고
   차가운 밤길 홀로 걸어
   가는데
   존재가
   범이 또 따라붙어

   서술이 깨어지자 산길이 굽이쳤다. 수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구나 짐작하는 사이 서술이 다시 회복되었다. 수이의 서술이 가빠질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음을 푹 놓을 수는 없었지만 서술이 돌아오면 일단은 안심이 됐다. 나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영물이 왜 나를 쫓는 거지? 그 살기는 뭐지? 죽이려던 게 아니었나? 왜 따라잡지 않지? 죽이지 않으려는 건가?’
   돌아서서 나는 범을 향해 걸어갔다. 열 발자국. 이빨 앞에 섰다. 생각에 잠겼다. 수이가 악마라고? 그냥 죽어가고 있을 뿐이야. 연약하고, 모질지 못해서 세상을 다 서술해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뿐이야. 수이만이 나를 서술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수이가 아니면 아무도 내 시점에서 내가 보는 세상을 온전하게 서술하지 못하니까, 수이가 죽어 가도 아무도 그 일을 대신할 수가 없어서, 죽어가는 동안에도 서술을 멈출 수가 없어서 고통 받고 있는 것뿐이야. 고통이 서술을 쥐어짜고 서술이 세상을 비틀어서, 산산이 깨져 버린 산길을 따라 겁에 질린 아이가 달아나고 나도 겁에 질려 아이를 쫓아가고 범이 겁에 질려 나를 쫓아.
   그러니까 악마가 있다면 그건 수이가 아니라 나!
   “그래서 내 뒤를 따라 온 건가?”
   나는 범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영물이 조용히 나를 노려보았다. 수이가 애처로운 마음으로 나를 서술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밤하늘 같은 범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우주 저편인 듯 한없이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서서히 무언가가 떠올랐다.
살기였다. 나도 살기를 끌어 모았다.



   4.

   수이는 바르무사 사원의 흰 담벼락을 닮은 여자였다. 티 없는 순백의 벽이라는 뜻은 아니다. 수이가 세상의 중심으로 떠나기 전 어느날, 나는 수수한 흰 옷을 입고 햇살 찬란한 언덕 위 바위 곁에 서 있는 수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환하게 빛나던 모습이 꼭 바르무사 사원 남쪽의 흰 담벼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수이가 ‘다섯’이라고 서술한 시간 아래, 나는 범과 열 발작 거리에서 마주섰다. 육신을 오래오래 보전할 생각은 끊은 지가 이미 오래였다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사실이라면, 나에게 먼저 살기를 내비친 자에게 되돌려 줄 살기 따위가 내 안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됐다. 하지만 내 안에서 살기가 그만큼이나 끓어오른 것을 보면 해탈할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나 보다 심장을
   내 놓고 저쪽 먼저 달려들기를 기다렸다 달려들
   것 같지 않았다 자리에 가만히 버티고 서 있는데
   구도자의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서술이 깨지자 하늘이
   갈라졌으나 꼼짝도 않고
   서서
   노려보았다 서로
   땅이 꺼지다가
   걱정이 밀려왔다 수이 서술이 망가지는데 존재가 이빨을 드러내고
   범은 이빨보다 발톱이 먼저라는데
   끌어올린 살기가 범을 잡아 묶었다 숲이 이상했다. 숲길이 갈라져 길 잃은 범이 떠나간 아이를 찾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갈 곳 없는 산길로
   숲이 깨지고
   세상 가운데에 악귀가 서서
   사랑한다고 읽었다
   영원히 같이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데
   서술자가 그렇게 썼다. 영원하다고. 영원만큼 오래 범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흰 담벼락을 닮은 수이가,
   오래 전에 흰
   담벼락에 돌로 새겨둔 글자에 수이라고
   썼다가 지웠지만
   번뇌가 끊이지 않아
   열반은 면벽한 벽에 벽화처럼 바보 같은 일과
   서술이 다 깨져서 미안
   천지가 다 찢어져서
   모위 미안
   아이도 미안
   “안돼. 아직 조금만. 마지막으로 나를 만날 때까지만. 아직은 떠나지 마. 아직 조금만 더 서술해.”
   모위 안 돼 여기는
   서술되었다
   오지 마
   깨어졌다
   범이
   “그만해. 그만해. 아무것도 서술하지 마. 잠깐 쉬어. 쉬다가 조금만 기다려. 쉬다가 다시 조금만 더 서술해. 내가 너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쉬어.”
   범이
   이빨이 내 목에
   선혈
   눈 위
   붉은
   흰
   폭신하게
   나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누구 심장이지? 내 건가? 영물인가? 온 몸을 가득 채운 살기가 어디론가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살기를 타고 손이 뻗어 나갔다 운명을 움켜쥐듯 콱 움켜쥐었다 태어날 때부터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 다짐하고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은 생각해 보면 운명이었다. 빈 주먹이었다. 빈 주먹이었지만 펼쳐보면 손금이 가 있었다. 운명을 쥐었던 흔적이 아로새겨져, 나는 운명처럼 움켜쥐었다. 심장이 쥐어졌다. 멎었다. 멎어버린 심장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니다. 내 심장은 아직도 뒤고 있었다. 뛰고 있다고 서술되는 한 뛰고 있겠지 수이가 서술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피가 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살기가 남아 있으면 안 되는데, 수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고 싶었다. 그런데 범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살기가 일어났다. 그래서였다. 나는 날아오르는 범의 아래쪽을 파고들어 손을 뻗었다. 살기가 창보다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만나야 한다. 서술자일지라도. 세상 중심에서 세상과 세상, 사람과 사람, 세상과 사람을 온전하게 이을 서술자, 결코 닿아서는 안 될 사람일지라도 나는 꼭 만나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만 해! 아무것도 서술하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주술사가 정신을 잃었다. 내가 한 손에 산짐승의 심장을 움켜쥐었을 때 마침내 서술이 끊어졌다.



   6.

   아이는 눈이 맑았다. 말 못하는 아이였지만 눈은 남보다 두 배의 일을 더 했다. 말 대신 말보다 많은 것을 쏟아냈다. 눈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별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늘 진리보다 모자랐지만 아이의 눈은 모자라는 법이 없었다. 눈을 굴릴 때마다 아이는 넘치고 넘치는 이야기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다. 수이가 서술하고 있는데도 세상이 그 눈을 따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다.
   서술이 다시 시작되자마자 나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 손에 든 심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커다란 산짐승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심장이 아니었다. 아이의 눈은 멎어 있었다. 밤하늘만큼 깊고 거대한 아이의 눈 속에서 피어나던 이야기들이 모두 하나같이 멎어 있었다.
   “나를 따라 온 게 너였니? 내가 이빨이라고 생각했던 게 너였니? 산 속을 헤매던 내내 내 뒤에 졸졸 따라 붙은 게, 너였니? 영물이 아니라.”
   오른손이 온통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부터 내내 나를 따라 나선 거야? 왜 이렇게 서술됐지? 누가 이렇게 서술한 거지?”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뒤로 물러섰다고 서술되었다. 악귀가 그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악귀가 서술하다니. 무슨 말이지?”
   악귀가 그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수이가 그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수이가, 악귀가 그렇게 서술하다니.”
   수이는 완전히 각성해 있었다. 이제 내 서술자는 완전히 각성한 악귀였다. 내가 아는 수이는 없었다. 마왕 술라이가 영원히 깨질 것 같지 않던 봉인을 풀고 세상 한가운데에서 온전하게 깨어났다.
   “무슨 소리야. 수이. 무슨 소리야. 봉인이라니.”
   깨달음을 얻은 아이의 심장이 제물로 바쳐졌다. 또한 그 모든 일이 깨달음을 얻은 자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의 손을 통해, 흰 담벼락처럼 환하게 빛나던 주술사가 온전히 마왕에게 바쳐졌다.
   “뭐? 주술사가?”
   세상 하나가 통째로 제물로 바쳐졌다는 뜻이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던 봉인이 깨달은 자의 손으로 해제되었다. 내 손으로. 내 모든 육신과 마음을 통해.
   “내가 아니야. 내 손이 아니야.”
   그렇게 서술되었다. 서술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주술사 수이의 마지막 서술이 시작되었다.  
   산길로 내몰렸다. 이따금씩 하늘이 열리고 불기둥이 내려와 숲을 벌겋게 태웠다. 열린 하늘 너머로 검붉은 하늘이 보였다. 이 세상의 하늘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하늘이 아니라고 서술되었다. 어디에도 길은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다. 저지르고 말고 한 게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다. 수이가 나를 사랑하던 날부터, 수이가 나를 서술하던 날부터 모든 것이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 그렇게 서술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이따금 하늘이 갈라지면서 다른 세계의 악귀들이 쏟아져 내렸다. 술라이는 서른여덟 개의 세계를 지옥으로 만든 악마였다. 먼저 지옥이 된 다른 세계가 하늘을 뚫고 내 세계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절망에 빠져 정처 없이 걸었다. 아무도 뒤를 쫓지 않았다. 목적지도 없었다. 걸음이 차차 느려졌다. 나는 문득 세상의 중심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 수이가 완전히 서술을 멈추었다.
   미안.
   악마가 서술을 시작했다.



   -.

   나. 절망. 걸음. 걸음. 걸음. 걸음.
   세상. 중심.

   악귀. 수이.
   생각. 절망. 눈물.

   수이. 절망.

   파멸. 세상.
   세상. 파멸.
   걸음. 걸음.
   눈물. 눈물. 눈물. 수이.
   면벽. 면벽. 눈물. 눈물.
   걸음.

   마을. 불기둥. 악귀. 하늘. 불. 악귀. 파멸.
   절망. 중심. 세상. 걸음.
   걸음. 걸음. 걸음. 서술. 악귀. 걸음. 걸음. 걸음. 걸음. 걸음. 걸음. 걸음. 서술.

   눈물. 수이.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눈물.
   수이. 미안.



   =.

   시간. 시간. 망각. 시간. 기억. 수이. 눈물.
   걸음. 걸음. 걸음. 시간. 걸음. 망각. 걸음.
   걸음. 걸음. 시간. 시간. 망각. 망각. 걸음.

   도착. 중심. 세상. 중심.
   마왕. 서술. 술라이.
   수이. 수이. 망각. 망각. 망각. 수이. 망각.
   망각.
   수이. 망각. 절망. 망각. 망각. 수이. 망각. 서술.
   망각. 망각. 수이. 망각. 망각. 망각.
   망각. 망각. 망각. 망각. 망각.
   망각.
   악귀. 서술.

   방랑. 걸음. 걸음.
   걸음. 걸음. 걸음.

   벽.
   기억.
   망각. 기억. 망각. 망각.
   기억. 벽. 벽. 망각.
   기억. 벽.

   악귀. 망각. 망각. 망각. 서술.
   벽. 기억.
   악귀. 망각. 망각. 서술. 서술.
   기억.

   바르무사. 탑.
   벽. 담벼락. 기억.

   기억. 수이. 서술. 주술.
   이별. 이별.
   눈물. 기억. 눈물. 기억. 망각. 눈물. 기억.

   서술.
   수이.
   나.

   기억. 기억. 기억. 수이. 기억. 수이. 주술. 수이. 세상. 중심. 이별. 눈물. 이별. 수이. 세상. 중심. 수이. 기억. 기억. 눈물. 눈물.
   사랑. 사랑. 미안. 수이. 기억. 눈물. 눈물.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 인용. 직접. 깨달음. 깨달음.



   “술라이!”
   놀람. 악귀. 놀람. 누구.
   “술라이라고 했지? 내가 부르는 거야.”
   놀람. 놀람. 악귀. 놀람. 정지. 시간.  
   “술라이라고 했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세상이 온통 폐허가 된지 얼마나 됐지?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걷고 걷고 또 걸었는데,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울고 울고 또 울었는데 내가 얼마나 울었지?”
   악귀. 놀람. 침착. 침착. 물음. 물음. 인용. 직접. 물음.
   “깨달은 자는 서술자를 넘어서 직접 인용될 수 있어. 아무도 서술해 주지 않아도 세상 저 너머에 있는 존재에게 직접 말을 전할 수 있어.”
   누구. 세상. 너머. 누구.
   “세상 너머에 누가 있는지는 나도 몰라. 너도 모르나? 네가 서술할 때, 그 서술을 읽는 존재. 그 존재가 있다는 걸 모르나? 있어야 하잖아. 없다면, 너는 누구에게 서술하고 있는 거지? 절대적이지 않아. 서술자는. 절대적이지 않아. 내가 직접 인용되면 그 존재가 직접 읽어. 너의 서술을 읽는 존재와 같은 존재가.”
   술라이. 부정. 불기둥. 불기둥. 화염. 부정. 화염. 고통. 고통. 고통.
   “그래. 고통스러워. 온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고 서술되고 있으니까. 고통스러워.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계속 그렇게 해도 좋아. 나는 충분히 고통스러우니까. 네가 원한다면 계속해.”
   화염. 불길. 불길. 고통. 고통. 고통. 고통. 고통. 파멸. 절망. 파멸. 나. 절망. 절망.
   “그래. 나는 절망했어. 네가 나라고 서술한 건 네가 아니고 나겠지. 나는 절망했어. 파멸했고, 고통스러워. 술라이. 계속 해도 돼. 계속 그래 왔으니까. 네 서술 앞에서 나는 너무나 작아.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이야.”
   침묵. 침묵. 고통. 침묵. 침묵. 고통. 절망. 파멸. 침묵.
   “그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서 침묵하고 있어. 네가 서술하는 나는 내내 침묵했어. 하지만 지금 이 말은 그 침묵하고는 다른 거니까. 아마 멈출 방법은 없을 거야.”
   술라이.
   “그래. 술라이. 그게 너야. 술라이. 너를 만나려고 걸어 왔어. 세상의 중심으로 걸어왔어. 절대 너를 만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너는 서술자니까, 너를 만나러 가면 안 된다고 수이가 늘 서술했는데.”
   수이.
   “그래. 수이는 늘 그렇게 서술했어. 우리는, 그렇게 헤어져서. 그래도 늘 함께 있었는데.”
   술라이.
   “알아. 수이는 술라이가 됐다고 서술됐어. 수이가 그렇게 서술했어. 알아. 거역하려는 건 아니야. 너는 마왕이고, 나는 그냥 나고. 나는 수이에게도 거역하지 못했어. 서술자였으니까.”
   그럼 왜?
   “왜 찾아왔느냐고? 수이를 만나려고.”
   수이. 술라이.
   “알아. 그래. 수이는 이제 없다는 거. 그래서 절망해야 한다는 거.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서. 발걸음이 자꾸만 너에게로 와서.”
   왜?
   “몰라.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수이는 만날 수 없고. 어쩌면 나는 너를 만나러 왔는지도 몰라.”
   놀람. 왜?
   “몰라.”
   나. 착각. 낭만. 착각. 술라이. 마왕. 수이. 부재. 서술. 술라이. 마왕. 나. 착각.
   “그러게.”
   고통. 절망. 절망. 고통. 고통. 불길.
   “아프다니까 그래. 아파. 절망하고 있고. 너무 아프고 너무 절망해서 더 절망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더 깊이 절망했어. 아팠어.”
   부정. 부정. 부정. 술라이. 부정. 부정.
   “그러게. 부정하고 싶은데. 나도.”
   왜?
   “몰라. 나도. 수이. 생각에. 눈물에. 절망이. 눈물. 수이는. 눈물.”
왜? 왜 술라이를 만나러 왔니? 술라이는 수이가 아니야. 마왕이야. 술라이라고. 못 알아듣는 거니?
   “아니. 알아. 알아. 나도. 너. 서술. 없음. 그리움. 서술. 수이. 없음.”
   뭐라고?
   “너. 없음. 서술도. 그리움도. 수이도. 없음.”
   술라이가. 내가 서술해 주지 않으면 네가 수이를 그리워했다고 서술될 수도 없다는 말을 하는 거니?
   “응.”
   모위.
   “응.”
   그렇게나 그리웠니?
   술라이가 물었다. 영원처럼 긴 시간이 흘렀다. 아니면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서술자가 서술하기 나름이다. 내가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오래오래 기다렸다.
   “응.”
   나는 고통 속에서 마침내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그리워?
   서술자가 서술자를 그렇게 간접 인용했다.
   “응.”
   그러자 마왕 술라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소리였을까. 소리를 들어본 것이 얼마만인가.
   무언가 깨지는 소리였다. 깨질 게 더 남아 있었나.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 서술이 깨졌다. 마왕의 서술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7.

   그러자 서술자가 다시 서술을 시작했다.
   조각조각 깨어져 나갔던 세상이 주술사 수이의 기억을 더듬어 한 조각씩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불길이 하늘의 문을 열고 다시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하늘은 온통 커다란 구멍이 흉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구멍을 통해 검붉은 불길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문이 닫히고 실로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그러자 그 아래에 땅이 솟아났다. 땅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자 그 위에 숲이 돋아났다. 숲이 일어서자 산길이 생겨났다. 산길이 갈래갈래 뻗어 나가자 그 길을 더듬어 기억이 뻗어 나갔다. 길 하나가 다다른 곳에 흰 담벼락이 서고, 담벼락을 중심으로 사원이 세워졌다. 바르무사. 바르무사 사원의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가리키자, 하늘로부터 숲을 거쳐 다시 하늘에 이르는 서술 한 편이 완성되었다.
   나도 다시 존재했다. 나는 지쳐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을 절망과 고통과 눈물 속에서 걷고 또 걸어온 뒤였다. 나는 바르무사 사원의 흰 담벼락 앞에 간신히 기대고 서 있었다. 수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술라이라면 어디선가 갑자기 수이가 환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서술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수이의 기억을 더듬어 서술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술라이는 이미 수이가 아니다. 수이는 없다.
   나는 담벼락을 향해 뒤돌아서서 두 팔을 벌렸다. 눈이 부셨다. 안아 주고 싶었는데, 담벼락은 그저 평평하기만 해서 내 두 팔로는 안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두 팔로 담벼락을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사사삭 소리가 났다.
   환한 담벼락에 눈이 적응이 되고 나자 눈앞에 낙서가 보였다. 낯익은 글씨였다. 수이였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수이가 직접 새겨 둔 글이었다. 그날 나는 그 담벼락을 다시 한 번 둘러보지도 못하고 수이가 떠나자마자 마을을 떠났다. 달아나듯 멀리 떠나갔다. 그래서 그런 게 남아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벅찬 마음으로, 나는 수이가 나를 위해 남긴 마지막 서술을 큰 소리로 읽었다.
   “모위. 꼭 해탈해! 안녕!”
   그렇게 씌어 있었다. 그러자 그 일이 그대로 내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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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5
  • No Profile
    라르크 08.09.29 12:26 댓글 수정 삭제
    머... 멋지군요.... ㅠㅠ
  • No Profile
    배명훈 08.09.29 15:56 댓글 수정 삭제
    가... 감사하군요....
  • No Profile
    임태운 08.09.29 22:12 댓글 수정 삭제
    명훈님의 오래전 작품 '다이어트'처럼 실험적인 소설이네요. 텍스트를 나열, 해체, 재정비 시키는 솜씨도 솜씨지만 그 의도가 참 멋집니다. 서사의 비중은 줄었지만 대신 생각할 거리를 얻어갑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8.09.30 13:27 댓글 수정 삭제
    과찬의 말씀을.. "연애편지"나 "스윙바이"나 "고양이플롯"류의 실험인데요, 순수하게 실험 단계라기보다는 응용단계정도 되는 것 같아요. 여기저기 적용하는 단계.
  • No Profile
    자하 08.11.17 19:35 댓글 수정 삭제
    서술과 아이디어가 실험적인데, 그려내는 세계는 굉장히 고색창연하고 신화적이어서 아름다워요.
  • No Profile
    자하 08.11.17 19:36 댓글 수정 삭제
    그 둘의 조화가요. (추가)
  • No Profile
    애독자 09.01.02 16:10 댓글 수정 삭제
    댓글에 쓸 내용은 아니지만 명훈님 다음 글은 언제쯤 나오나요? 수이 이후 꽤 오랫동안 차기작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 궁금해서 여쭤봐요.
  • No Profile
    배명훈 09.01.02 17:14 댓글 수정 삭제
    그러게요. 그 뒤로도 쭉 쓰기는 했는데 다른 데 실릴 글이라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거울에는 못 실었네요. 하나 골라봐야겠어요.
  • No Profile
    며칠전에야 고양이플롯을 다 읽고 이걸 바로 읽으니...음...아니, 별로 상관없을 지도요. 그냥 전 이쪽이 더 좋네요.

    신화적이고 아름다워요...라고 써놓고 보니, 자하님 말씀이랑 똑같네요.

    이번엔 세상이 어찌어찌 멸망을 피했군요 :)
  • No Profile
    배명훈 09.04.17 04:01 댓글 수정 삭제
    합평회에서 이야기한 적도 있지만, "고양이 플롯"을 쓸 때는 아직 단편까지만 끌고 갈 수 있는 서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글 쓸 때는 이대로 장편까지 끌고 갈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거든요. 그런 차이가 아닐까 싶네요.
  • No Profile
    대래 09.05.05 18:58 댓글 수정 삭제
    글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이나 모니터 앞에서 가만히 멎어있답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9.05.06 09:42 댓글 수정 삭제
    저는 이 글을 알아봐 주시면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 No Profile
    js 09.12.18 15:33 댓글 수정 삭제
    모위. 꼭 해탈해..안녕
  • No Profile
    쑤우 10.01.22 00:27 댓글 수정 삭제
    순서가 뒤죽박죽이긴하지만 수이를 마지막으로
    거울에 있는 배명훈님의 글을 다 읽어보게 됐네요.
    (그럴리는 없지만) 배명훈님께서 저에게 주신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루종일 틈틈히 즐거웠습니다.

    주술사와 서술자를 보고 영어의 주어와 서술어가 떠오르더군요.
    (물론 한글에도 같은 말이 있지만
    주어와 서술어 목적어 보어 따위는 영어의 세계에 닿아있는 듯)
    형식적인 실험을 즐기시는 이기호님과 더불어
    지나온 발걸음에 감탄을 하게 되고 앞으로의 행보에 주목 할수 밖에 없는
    배명훈 작가님의 작품들이 간절하게 기대 되네요.
  • No Profile
    배명훈 10.01.22 21:41 댓글 수정 삭제
    좋은 선물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이 이 글이라니, 의미가 있네요.
    흥행과 관계없이 제가 좋아하는 글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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