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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환 소년

2008.08.29 20:3208.29

  한 밤중, 숲 속을 걷는 소년이 있다. 몇 시간 전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는 소년이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이 세차게 불었다. 바짝 치켜 올린 외투로도 바람이 가려지지 않아 뺨은 빨갛게 얼었다. 한 시간을 더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으나 그는 이미 지쳐있었다. 소년은 안 주머니에 잠시 손을 넣었다가, 다시 빼고 걸음을 서둘렀다.



  소년에게는 어머니가 없었다. 몇 년 전 비가 많이 오던 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병을 앓는 아버지의 병세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년이 걷고 있는 지금도 아버지의 가벼운 영혼은 무거운 몸을 버리고 하늘로 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때문에 소년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오늘, 병이 깊어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아버지를 위해서 두 시간 반을 걸어야 도착하는 시내까지 나갔다가 한밤중이 된 지금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전 소식이 끊긴 자신의 동생이 살아 있는지, 살아있다면 잘 지내고 있는지를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기 전에 알고 싶어 했다. 아버지의 집안은 가난했다. 다섯 형제들은 일찌감치 흩어져 살았고 넷째였던 아버지는 위의 세 형들의 소식은 틈틈이 접했지만 동생의 소식은 받지 못했다. 소식이 끊긴지 이십년 만에야 무슨 마술처럼 동생의 안부 편지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병석에 누워서 일어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했다.
  ‘몇 월 며칠에 시내에 가게 될 테니 만나고 싶습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소년도 읽었다. 아버지는 시내에 갈 수 없었다. 높은 열에 갈라진 입술과 병에 찌들어 검게 변한 얼굴, 마른 숨소리까지, 그는 추운 산길을 걸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갈 수 없을 테니까 내가 가야겠구나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출발하는 전날 저녁부터 눈과 바람이 심했다. 눈보라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밤이 깊어져도 별 변화가 없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소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잠들어 있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인사한 후 집을 나왔다. 조용히 누워있던 아버지는 그 순간부터 뜬눈으로 소년을 기다렸다.



  시내에 도착하자 눈발이 약해졌다. 삼촌도 눈보라를 무릅쓰고 도시를 찾아왔을까. 도착했다면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는 편지에 ‘시내에 오겠다.’ 라고만 써놓았다. 소년은 시내 길가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여관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저곳들 중 하나에 삼촌이 머물고 있다면, 이름을 대면서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 많은 여관을 다 돌아다니면서 물어봐야 하나.
  소년은 가장 큰 여관으로 다가갔지만 선뜻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이에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소년은 그를 피해 문 옆에서 비켜섰다가, 문이 열리면서 여관 안쪽의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와 얼굴에 닿는 것을 느꼈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들어갔다.
  계산대 뒤편에 여관 주인이 있었다. 소년은 모기만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말하며 그런 사람이 묵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런 사람 없어."
  소년은 빠른 걸음으로 그곳에서 나왔다. 그 옆의 여관은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그냥 나와야 했다. 그 다음 여관은 주인이 다른 사람과의 수다에 빠져서 소년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여관에는 그가 없었고, 그 다음, 다음, 다음의 여관 주인은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언제 찾을 수 있겠냐."
  도시의 저녁이 건물과 길을 둘러쌌고, 어둠을 타고 다시 눈발이 거세어졌다. 어두워진 탓에 길이 낯설어진 소년은 어떤 여관이 들어갔던 여관인지 안 들어갔던 여관인지 알 수도 없게 되었다. 괜히 겁이 났다. 다리도 아팠고,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쐰 탓에 머리에서 열이 나고 콧물이 흘렀다. 그리고 배도 고팠다.
  도시로 들어오는 길 근처에 음식점이 많이 있을 테니 거기서 꼭 식사를 하라며 지폐를 손에 쥐어 주시던 아버지의 어젯밤 말을 떠올렸다. 창밖으로 흘낏흘낏 둘러보다가 음식값이 싼 가게 하나에 들어가 앉았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아주머니를 불러 더듬더듬 음식을 주문한 그는 아주머니에게 이 추운 날 어린애가 왜 혼자 다니냐는 질문을 들었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혹시 이런 이름의 사람 아세요? 이런 지방에서 왔을 거예요. 본 적 있으세요?
  "얘가 아까 그 아저씨를 찾네."
  아주머니의 말에 소년은 시장기와 피로를 모두 잊었다. 아주머니의 동생이 옆집 음식점에서 다른 아주머니를 데려왔고, 세 명은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세세한 것까지 설명했다. 어떤 남자가 소년의 집 주소를 물으면서 어떻게 가야하는지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말했다.
  "벌써 만난 줄 알았는데. 역 옆에 있는 우체국에 가서 집을 물어보겠다고 하고 나간 지 꽤 됐어. 길이 엇갈린 건 아닐까?"



  길은 눈이 얼어붙어 빙판이 되었다. 날은 어두웠다. 한참을 헤맨 끝에 찾은 우체국은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삼촌은 어디 있단 말인가? 더 찾아봐야 할까? 시간이 너무 늦었고 더 이상 도시에서 헤매다가는 밤을 길거리에서 보내고 다음날 집에 가야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삼촌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집에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더 걱정하지 않을까.
  혹시 길이 엇갈렸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소년은 우체국 옆의 역 주변을 서성였다. 역에 있진 않을까, 삼촌이 집을 찾지 못했다면 도시를 떠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역에서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삼촌이 열차를 타고 떠났다면, 역무원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역에도 없다면 길이 엇갈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은 그 외의 다른 경우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역에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자, 소년은 결론 내렸다.
  대합실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사내에게 다가가 물어보았지만 그는 너무 술에 취해 소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두 번째로 물어본 사람은 걸인이었다. 그는  넋이 나간 눈동자로 소년을 보면서 돈을 달라고 되풀이 말했다. 소년은 그에게서 도망쳤다. 소년은 대합실 표 판매원에게 물었으나,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그는 모르겠다는 말만 했다. 더 이상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소년은 허무한 마음에 천천히 역을 걸어 나왔다. 그때, 화장실에서 남자가 나왔다. 소년은 화장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소년은 달려갔다.
  "아저씨, 아저씨 혹시..."
  그는 소년의 말을 듣고 소리쳤다.
  "이런, 기차 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그는 삼촌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삼촌과 잘 아는 사람이긴 했지만, 삼촌은 아니었다. 그가 삼촌과 만나 아버지의 소식을 전했고, 삼촌이 그에게서 들은 주소로 보낸 편지가 집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는 도시에 일을 볼 겸, 삼촌의 부탁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해서 왔고, 삼촌은 다른 도시를 여행 다닐 정도의 처지가 못돼서 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내일 일 때문에 지금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했다. 소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에게 편지라도 쓰게 하실 걸 그랬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그 말을 듣더니 삼촌에게서 전해달라고 부탁받은 편지가 있다며 꺼내 주었다. 주소도 있으니까 답장을 하면 서로 연락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버지가 아프다고 소년이 말하자 어린애가 추운 날 늦게까지 고생이 많았다면서 삼촌에게 꼭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소년에게 얼마간의 돈까지 쥐어주었다. 소년은 그가 걸음을 재촉하여 열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년은 편지가 주머니에 잘 들어있는지를 신경 쓰며 걸었다. 잘못해서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발은 얼어서 감각이 없고 이젠 허벅지까지 뻣뻣했다. 땀이 식으면서 얼어붙은 등에서 싸늘한 경련이 목으로 타고 올라갔다. 귓바퀴가 따끔거리며 아팠다.
  도대체 몇 시일지 모를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분만 더 가면 된다. 집은 따뜻할 것이다. 아버지가 몸을 가눌 수 있다면, 집안에 불을 지펴 놓았을 것이고, 불 옆에서 몸을 쉬면되는 것이다. 소년은 생각했다.
  언덕을 넘자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혹시 아버지가 무리해서 몸을 일으킨 건 아닌지 소년은 걱정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소년은 드디어 집에 당도했다.
  문이 열렸다. 온기가 얼굴에 확 닿았다. 침대에 누워있던 아버지가 문 쪽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퀭한 눈과 소년의 지친 시선이 마주쳤다.
  아버지가 말했다.
  "못 만났니?"
  소년은 외투의 안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아버지, 여기 편지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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