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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2007.03.30 22:3303.30

시간  3.별


1.

전화를 받고 내일 들르겠다고 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나는 걷고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뀐 다음에 그 일이 일어났다.
일들은 늘 천천히 일어난다. 일은 결코 네게 일어난 그 순간에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생각해보려고 하지만, 이미 슬픔에 잠식당해서, 발목에 쇠가 달린 것처럼 걷게 된다. 무시무시한 슬픔이 내 목덜미를 쥐어잡고 질질 끌어 내 얼굴이 바닥에 닿게끔 누르고 지익지익 끌어간다. 집으로 돌아올 때 즈음 내 얼굴은 거의 갈아엎어져 있었다. 잠을 자다가 깨었다를 반복한다. 걷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어느 새 나는 초침 소리를 듣고 있고 소리의 틈새를 타고 돌이킨다. 눈을 깜박이듯이.


2.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사실 거의 읽지는 못했다. 읽는 흉내라도 내 보려고 한 것 뿐이다.
앉아 있다가 누군가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무가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보았다. 주워서 짐칸에 올려놓으려고 했는데, 전철이 덜컹거리는 순간 손을 놓쳤고, 다른 손 하나가 올라와서 무가지를 채어 갔다.
묘하게 공격적인 태도라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전철 문에 기대어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무가지를 펼쳐 보고 있었지만, 문득 너머로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 먼 곳에서 쳐다보기나 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우리는 둘 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가 귀찮았다. 나는 선 채로 책을 읽어보려다가 어깨 한 쪽이 아파서 그만두었다. 가방에 도로 책을 넣어버렸다. 전철이 한강 다리 위로 나왔다. 문득 차창에서 내 얼굴이 사라졌다.
예전에 내 몸은 가벼웠다. 때문에 남의 등에 몸을 얹기가 보다 자유로웠다. 아직 사람을 짓밟을 수 있는 무게가 되지 못했다. 여기나 거기를 타넘어 다녔는데, 떨어지면 다칠 수 있는 것은 나 뿐이었다. 나는 살금살금 기어내려왔다. 어느날 그 칸에 발을 얹으니 내 몸이 나를 짓눌러서 나는 내가 원하던 것을 함께 무너뜨릴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전철 안에서도 책을 읽으며 기말 시험을 준비한다. 나는 책을 읽기 위해 잠시 시간을 낸다. 시간과 책을 교환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기처럼 보호하면서,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할 것처럼 느낀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던 기억이라는 것도 지금 막 조작해낸 것처럼 느낀다.
나는 어릴 때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디로든 기어다녔을 뿐이다. 이야기라도 좋고 나무로 된 다섯 칸 일곱 단짜리 책장이라도 좋다. 어디서든 밤색 나무 냄새는 났고 금방이라도 우그러질 것처럼 단단했고 안개는 산소로 가득차 있었고 그 누구도 무한한 여기에 남겨지지 않았다. 어디든 갈 수 있었으므로.
전철이 한강을 건너서 어둠 속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이어폰을 꽂았다. 이제는 팝을 들으면 가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있다. 모르겠으면 몇 번 반복해서 들으면 귀에 들어온다. 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서른 번쯤 듣고 있는 곡이 있는데, 이쯤 되자 이 곡을 좋아하는 건지 익숙해진 건지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이미 미쳐버렸다는 식의 안도감이 든다.
무언가를 좋아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다. 여전히 왜 좋아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예 분간할 수가 없어지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여기 있으니 됐다. 전철이 덜컹거렸다.
너는 네가 듣고 맘에 드는 곡을 내게 보내주었다. 나는 플레이어에 담아 매일같이 들었다. 대부분 가사가 없거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을 듣게 되었다. 음악이 음악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다. 말과 동떨어진 사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말과 분간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외국어도 말과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 말들은 다시 말할 수 없는 하나로 전해지고,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다.
너와 이야기할 수 없게 된 게 몇 주는 지났다. 나는 시간이 빨리 가는 것에 놀란다. 일들은 늘 천천히 일어난다. 일은 결코 네게 일어난 그 순간에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생각해보려고 하지만, 이미 슬픔에 잠식당해서, 발목에 쇠가 달린 것처럼 걷게 되는데, 그 무시무시한 슬픔이 내 어깨를 짓눌러 질질 끌고 내 얼굴이 바닥에 닿게끔 밀어붙인 다음 지익지익 끌어가는 것이다. 지쳐서 걷지 못하게 될 때 즈음이 되면 내 얼굴은 거의 갈아엎어져 있다.
<책은 살 수가 없다> 네가 적었다. <종이들은 살 수 있다. 잉크도 살 수 있어. 책은 살 수 없다. 종이는 태울 수 있다. 잉크에는 기름이 들어 있어서 종이는 늘 잘 탔다. 하지만 편지는 태울 수 없다. 유령은 한낮에 나타난다. 태양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글자를 읽을 수 있지, 잉크를 읽을 수 없어. 편지를 읽을 수 있지, 종이를 만질 수 없어. 책장을 기어다니고 싶다. 다시 한번> 하고 너는 자음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이응을 점찍듯이 했다. 네 갈색 노트였다. 그렇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다.
<저녁이면 하늘이 낯설게 된다> 너는 적었다. <지하철의 사람들,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멀리 있다. 신문 하나만 펼쳐들면 서로 안전해질 수 있는 공간이니까. 지하철에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정상적인 인간이다. 소설을 쓸 때 지하철의 신문은 화장실의 변기처럼 써먹을 수 있다> <한강이 전철 밖에만 있는 걸 보게 된다. 우리 얼굴은 차창에 비쳤다가 다시 여기에도 있다. 갓 받은 몸처럼 매 순간이 날이 선 기계같다. 전철이 덜컹거릴 때마다> <실크 스크린으로 똑같이 찍어내든, 같은 바퀴를 매달든, 몸을 복제하든 그건 거기에 있다. 도덕적으로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존재하는 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말을 한다고 믿지 않는다. 음악이 음악이라고 믿지 않는다. 문자로 된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들을 수 없다> 네가 적었다.
천천히 어둠 속에서 나는 아까 보았던 하늘을 떠올렸다. 한강 위로 지고 있던 하늘이었다. 붉고 밀도가 낮은 분홍빛이 구름 가장자리를 덮고 있었다. 일들은 늘 천천히 일어난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생각해보려고 하지만, 이미 슬픔에 잠식당해서, 발목에 쇠가 달린 것처럼 걷게 되는데, 그 무시무시한 슬픔이 내 어깨를 짓눌러 질질 끌고 내 얼굴이 바닥에 닿게끔 밀어붙인 다음 지익지익 끌어가는 것이다. 지쳐서 걷지 못하게 될 때 즈음이 되면 내 얼굴은 거의 갈아엎어져 있다. 무척 캄캄하다. 내 얼굴이. 나는 뒤돌아 볼 수도 없이 앞으로만 걸어왔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들 언제든 돌아보았더라면,
<네가 있었을 것이다> 네가 적었다.


3.

고맙다고 말해.” “고마워.” “잘 했어.”
그가 말했다. “별걸 다 가르쳐야 해.”
“기쁜 표정인데.” “재미있거든.” 그는 돌아서서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잘 배우잖아. 보통 가르쳐주면 반항하는데. 투덜거린다든지,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야, 하는 둥... 넌 요즘 말이 더 적어졌어. 하지만 아직은 내가 가르치면 따라하려고 애쓴다구.” <아직은> 말해놓고도 그는 깨닫지 못한 것 같다. 내 표정이 좋지 않자 그는 탁자 앞에 앉아서 가만히 내 눈을 보았다. “왜 그래?”
나는 턱짓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바닥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하고 그는 약을 뿌리고 종이컵으로 덮어두었다. 내가 재떨이로 쓸 수 있도록 그는 다른 종이컵 하나를 더 꺼냈다. 그는 종이컵을 들고 탁자를 건너 다가와서 내 뺨에 손을 댔다. 입술을 스치자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적었어.” 나는 그의 손바닥에 대고 속삭였다.
또 시작이야, 하는 얼굴로 그가 물러난다. 그래도 내 머리카락을 깊게 쓰다듬은 후다. 그는 양 팔을 뒤로 짚고 기대어 앉는다. 그의 지겨운 표정에서 나는 가볍게 읽어낸다. 벌써 얼마나 지난 일인지 알아? 네가 아직까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하필 내 앞에서... 내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의 얼굴에서 느낄 수 있다. 나는 잠시 그의 질투섞인 반응을 즐긴다. 그가 곧 표정을 감추고 물어준다.
“뭘?” “그 사람은 늘 적기만 했어. 너처럼 말하지는 않았지.” “어디다가?” “여러 곳에.” 나는 천장을 가리키며 연기를 뱉어냈다. “노트에도. 우린 글을 나눠보곤 했거든. 처음에 그가 하늘에 대해서 무어라고 적어둔 걸 읽었어. 그의 묘사가 좋다고 생각했어. 하늘을 행성에 비유해서 묘사한 부분이 있었거든. 행성의 표면을 그대로 하늘에 은유한 거야.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그가 하늘이라는 걸 깨달은 거야. 지지 않는 별 말이야. 어느날 그가 사라져버렸어. 져 버린 거지. 그는 사라지기 전에 자기가 쓴 것들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지만. 노트를 태워버렸지만. 편지를 태워버렸지만. 편지는 태울 수가 없지. 그것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었던 거야.”
“왜 우리라고 말해?” 그가 말했다. 그가 스웨터를 입고 비스듬이 몸을 기대온다. 나는 컵에 재를 털고 담배를 뭉개놓았다. 그의 스웨터 섬유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기를 좋아한다.
“편지만 남아있어. 이 편지가 나를 미치게 만들어. 그래, 어쩌면 그는 하늘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 편지는 어쩌면 좋지? 이건 내게 온 거야. 내가 다 읽었거나 말거나 관계없어. 내게 온 거니까. 내게는 다른 자유가 없어.”
“너는 그를 좋아했고, 그가 했던 말에 영향받고 있는 것 뿐이야. 그가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하면 너는 방향에 대해서도 헷갈리기 시작했겠지. 그 뿐이야.” “해가 서쪽에서 뜨면 안 돼?” “맙소사!” 그가 내게 기댄 채 웃느라 내 어깨까지 흔들렸다. “너는 그 사람을 정말 좋아했군.”
내가 속삭였다. 나는 조금 화가 났다. “너는 몰라. 너희들은 모른단 말이야. 너희들은 '너를 사랑하니까' 따위로 말하잖아. 그래서 '너를'과 '사랑하기' 사이에서 헤매곤 하잖아. 따로따로 갈라져 있는 것처럼. 너라고 말하는 걸로 족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네가 헷갈리는 거야. 분간하는 건 필요해. 네가 그 사람에게서 독재를 받을 생각이 아니라면... 한 몸처럼 독재를... 그거야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끔찍한 거야.” “나는 너라고 했어, 나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점점 기울어가는 그의 몸을 내 어깨 곁으로 일으켜세우며 말했다. “그냥 너라고 하는 거란 말이야. 정말이지 해는 서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뜰 수 있다는 얘기야. 네가 독재라고 하니까 말인데, 그 사람이 해가 그저 동쪽에서 뜬다고 말했다고 쳐.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나는  동쪽이 어디인지 몰라. 무엇인지도 몰라. 그건 그 사람의 것이니까. 온전히 그 사람의 것이니까. 자유가 없단 말이야. 알겠어? 그놈의 태양이 불덩어리인지 차가운 심장인지도 몰라. 하늘은 별이었는데 어쩌란 말이야? 우리가 바다 밑에 사는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편지만 남는다는 거야.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내게 말했다는 것. 태양은 그러니까 방향을 잃어버리는 거야. 하지만 계속 떠오르는 거지... 거기에. 끊임없이 존재하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군.” “모든 것이 거기 있다는 것만 알아.” “너는 어디에 있는데, 응?” “아, 너는 정말로 그런 말을 했지-” “그러니까 다 잊어버리면 안 돼?”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는 어느새 내 뺨 곁에 와서 숨을 불어넣었다. 나는 그가 이런 식으로 키스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단단하고 표범같은 존재를 떠올렸다. 그는 내 뺨에 키스하고, 내가 그의 곁에 있도록 만들었다. <너는 여기에 있어>그는 말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그의 팔을 베고 잠들었다.
꿈에서 깨자 그런 입맞춤의 기억이 났다. 희미하고, 스웨터 냄새가 나는 기억. 스웨터는 늘 갓 만들어진 것처럼 진한 녹색이었지만 늘 그리운 냄새가 났다. 시간이 흩어져버린다.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게.
“그런데 저건 어쩔거야?” 내가 가리켰다. 그는 쳐다보더니 으쓱해보였다. “놔 둬. 알아서 죽겠지.” “벌레 무서워하는구나?” “벌레... 벌레가 아니잖아?” 종이컵은 불룩해져 있었다. 바닥면에 뭉개진 얼굴같은 얼룩이 나타났다. 그것이 뚫고 나올 듯이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하면서 내 팔을 꽉 잡았다. “벌레가 아니잖아.”
“놔 둬. 내 환상일 수도 있어.” “아니야. 내게도 보인다고.” “내버려 둬.” “가만히 있어봐.” 하고 그가 속삭이더니 슬리퍼를 벗어서 한 손에 들었다. 그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나는 그의 종아리를 덮은 실내복 바짓자락을 보는 걸 좋아한다. 저따위 바지를 입고도 늘씬해보이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다. “내버려 둬.” 내가 말했다. “죽이지 마. 죽일 수도 없으니까.”
그가 고개를 내젓고는 나를 돌아다보았다. “날 좀 믿을 수 없어?” “편지에는 뭐든지 적혀있어.” “그래서 상관없다는 거야? 내게도 보여. 내가 무섭다니까?” 그가 슬리퍼를 허리에 탁탁 부딪치며 쏘아붙였다. “날 좀 믿을 수 없어?” “내겐 자유가 없어.”
그가 여전히 슬리퍼를 허리에 댄 채 쳐다보았다. 그의 몸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의 살짝 찌푸린 눈도. 그 표현이 그리운 장면으로 접혔다.
편지에는 무엇이든 적혀 있다. 나는 종이컵을 치웠다. 갈색 벌레가 다리를 오그리고 있었다. 나는 벌레를 재와 함께 종이 한 장에 받쳐다가 창문 밖으로 털어냈다.


4.

나는 거울을 보고 갈색 줄무늬 셔츠를 바라본다. 그는 녹색 윗옷을 즐겨 입었고, 나무같은 배색을 좋아했다. 내게 갈색 셔츠를 주어서 기뻤다. 그게 고맙다고 말 할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보고 싶다고 말 한 적도 없다. 고마움이라는 감정은 따로 없다. 그저 그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약속하는 듯한 말들이 있다. 지켜가겠다고, 혹은 갚겠다고. 아니면 말하는 것만으로도 갚고 있는 것처럼.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나는 내가 누구에게도 약속할 수 있다고 믿은 적이 없다. 사실 남의 약속도 믿은 적이 없다. 딱히 남들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나는 분명히,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걸 솔직한 거라고 생각하는 족속들을 불편하게 여긴다. 단지 그에게 말하기를 망설였을 뿐이다.
사랑하는 순간에 사랑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음악처럼. 그러나 우리가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아닌 말을 믿고 싶어하게 된다.
내가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애쓰다가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할 수 없이 사랑한다면. 가장 치명적인 고독과, 갈라진 문장이 남는다.
우리는 냉정한 연민이 섞인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멀리서, 멀리서. 나는 거울 속에서 내 목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셔츠의 갈색 줄무늬는 소매까지 넓게 퍼져 있지만, 덧댄 라운드 부분은 그저 엷은 황갈색 단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셔츠 안에 겹쳐 입은 검은 남방의 칼라를 정리하고, 머리에 적당히 스프레이를 뿌린 다음 화장실에서 나왔다.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그와 어떻게 만났던지를 떠올리곤 한다. 그가 먼저 나에게 털어놓았다. 입맞추는 것은 쉬웠다. 사실상 저지르면 그 뿐인 일이었으니까. 가슴이 아팠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떨고 있다고 말했지만. 어차피 예정되어 있었던 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을 변명할 수도 없다. 나는 너와 어떻게 어울렸던지를 기억한다. 네 얼굴을 거의 직접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 때도 알았더라면. 너와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너와도 달랐을지 모르지.
이야기는 어디에서부터든 쓸 수 있다. 두 개의 이야기는 손을 잡을 수도 있다. 그에게 입맞추었던 나는 네게도 입맞추러 갈 수도 있다. 그러면 어쩌면 너는 응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른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상담사와 함께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다. 상담사를 변수로 집어넣자 나는 세 번째 이야기를 쓰게 된다. 이야기가 부모로부터 시작되는지 상담사로부터 시작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다. 내가 상처입었다고 말하는 순간 예전 언젠가는 온전한 모습이 있었던 양 되는 것처럼, 그를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말놀음. 중요한 것은 네 손을 잡으러 간다는 것이다. 다시는 슬픔에 잠기지 않고. 걷지 않고. 방치된-아이처럼-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더라면. 너도 내 눈을 마주 보았을 텐데.
이야기 속에서 잠들어 있다 보면 초침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너는 한밤에 온다. 너는 한낮에 온다. 잠을 자다가 깨었다를 반복한다. 걷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어느 새 나는 초침 소리를 듣고 있고 소리의 틈새를 타고 돌이킨다. 눈을 깜박이듯이. 눈을 뜨는 순간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해. 무척 캄캄하다. 내 얼굴이. 꿈 속에서 나는 책장을 기어다녔다. 미로같고 무한한 밤색 나무 냄새나는 다섯 칸 열 단짜리 책장을.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들 언제든 돌아보았더라면,
<네가 있었다> 네가 적었다.


5.

너는 팔을 괴고 앉아있다. 창가 자리다. 왠지 추운 자리를 자청했다. 아직 지나지 않은 붉은 빛이 창에 맺혀 네 팔로 흘러내린다. 너는 손가락으로 간혹 탁자를 딱딱 두드리다가, 다시 턱으로 손을 올려 입술을 누르곤 한다. “정리해보자,” 하고 네가 먼저 말한다.
짧은 침묵이 지나간다. <정리해보자> 하고 네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너희들은 죽은 사람 때문에 만났다. 너희들과 함께 해 온 사람이다. 언제나 함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도 마음에 남아있는 친구같은 사람이었다. 너희들은 자리에 앉아서 서로 정보를 나눈다. 말은 간간히 나올 뿐이지만, 생각은 훨씬 빠르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 너희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사람 때문이야.” 한 명이 결론내린다.
죽은 친구가 아주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죽은 친구와 그 사람과는 친구였다고 하기도 어렵고 알고 지냈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서로의 글을 접할 기회는 있었지만 얼굴을 직접 본 것은 몇 번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죽은 친구에게 딱히 흥미가 없어 보였다. 일방적인 감정이었던 것 같다.
죽은 친구는 매일같이 노트에 글을 쓰곤 했다. 너희들은 그와 같은 동아리에 있었다. 그의 노트를 참고하면 그의 감정 상태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의 생전에도 노트들을 돌려보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가 노트들을 가지고 잠적해버렸기 때문에, 너희들은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소식을 들은 후로도 노트들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아마 죽기 전에 스스로 어떻게 처리해버렸지 싶다.
한 권만 남아있었다. 갈색 가죽 장정이 된 노트. 그는 마지막 순간을 어딘가에는 적어야 했기 때문에 그 노트만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너희들은 노트를 탁자 위로 돌려본다.
몇 가지 너희들이 보지 못했던 내용이 있다. 그 사람을 잃어버린 후로 그는 무척 괴로워했던 것 같다. 전철을 타든 음악을 듣든 무슨 일을 해도 그 사람이 떠올랐다고 그는 적는다.   그는 애인을 사귀기도 했다. 애인은 무척 좋은 사람이었고 그의 나쁜 습관도 참아주었으며, 좋아하는 색깔로 서로 옷을 맞추어 입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곧 헤어졌다. 결국 그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인은 그 점에 대해 말은 안 해도 늘상 질투하곤 했다. 그는 그 사람에게 좀 더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 점을 여러 번 후회했다. 연애를 경험한 후로는 자신이 그 사람을 에로스를 더해 사랑했던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자신의 모든 일상을 잡아먹는 것처럼 느꼈다. 과거의 경험도, 현재의 경험도, 앞으로 경험할 수많은 의미있을 일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자살한 거야.” 네가 말하며 담배를 한모금 빨아올렸다.
“덫에 걸린 거지. 꼬리를 자르고 도망갔어.” 네가 말하자 네 옆에 앉아있던 네 애인이 네 손등을 탁 쳤다. “그만 좀 피우라니까.” “마지막이야.” 하고 네가 쑥스럽게 웃었다. 네 애인이 한숨을 쉬면서도 종이컵을 내어 주었다. 너는 거기다가 재를 털어낸다. 네 애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본다. “가르쳐 준 대로 안 해?” “고마워.” 하고 네가 얼른 답한다.
네 애인이 빙긋 웃는다. 너는 네 애인이 창에서 들어오는 빛에 뺨과 이마를 기대고 앉아있는 걸 본다. 그러느라 머리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너는 네 애인이 네 어깨에 어깨를 살짝 기대도록 돕는다. 그래야 새로 산 스웨터에서 나는 냄새를 즐길 수 있다. 네 애인의 체취와도 약간 섞이기 시작한. 너는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필터 부분을 입에 문다. 너는 연기와 함께 조그맣게 말한다. “그런 기분은 알 것 같아.”
“그래?” 네 애인이 갸웃한다. “그래.” 하고 너는 고개를 약간 숙인다. “새로 사랑을 할 수도 있지.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있지. 하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거야.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응?” “아니, 그대로 읽은 거야.” 너는 노트를 네 옆 사람에게 넘겨준다.
“누구나 하는 고민이야.” 노트를 넘겨받아 열어보지도 않고, 갈색 줄무늬 셔츠를 입은 네가 말한다. 목 주변으로 황갈색 단색으로 처리된 라운드 부분이 도드라져 보인다. 네가 셔츠 소매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말을 잇는다.“내 생각에 문제는 그가 예전에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 좋아했는가가 아니야. 그건 옛날 얘기일 뿐이지. 그 친구가 당시 연애에 실패했던 게 문제지. 애인과 헤어지면 별 생각이 다 드는 게 인지상정이야. 내가 뭘 잘못해서 헤어졌나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핑계도 찾게 되고. 남 원망하면서 억울한 생각도 들지. 자꾸 옛날만 돌이켜보게 돼.” “너도 그랬어?” “비슷했지.” 너는 어깨를 살짝 움츠린다.
“춥군. 다음에는 안에 뭔가 하나 더 입어야겠어.” “남방을 받쳐 입어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그래. 나도 셔츠 안에 남방 입는 거 좋아해. 그런데 이거 선물 준 사람이 배색을 망친다면서 투덜거렸거든.” 하고 너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그래, 이번에 애인과 헤어진 다음에 나도 그랬지. 나는 더했어. 예전에 그 녀석은 어땠을까, 난 그 녀석도 이런 식으로 좋아했던 거 아닐까... 나는 이 사람 사귀면서야 내 성적인 취향을 안 거니까. 내가 그 따위로 굴었던 건 오히려 그 녀석을 좋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 점을 인정하기 무서웠던 거 아닐까. 그 녀석을 애인삼을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더라면 오히려 우리 둘은 잘 되지 않았을까, 등등... 갑자기 옛 생각이 밀려오는 거야.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부모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머리가 어지러워서 상담사까지 찾아갔어. 하지만 문제는 예전의 일이 아니야. 지금 실연당한 게 문제지.”
담배를 피우던 네가 으쓱해보인다. “그렇게 생각해?”
“무슨 뜻이야?” “아니야.” 연기를 내쉬면서 네가 먼저 고개를 돌린다. 갈색 줄무늬 셔츠만 걸친 너는 급한대로 팔짱을 끼고 자기 몸을 껴안은 채, 노트 표지를 한참동안 내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만지작거린다.
탁자 건너 맞은편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너희 둘 중 묻는 쪽은 다급한 투고, 답하는 쪽은 그냥 느릿느릿하다. “언제? 언제였냐니까? 왜 바로 연락하지 않았어?” “전에 말했잖아. 너도 알았다고 했고...” “그 때는 밖에 있었어. 거리를 걷고 있다가 핸드폰으로 연락을 받은 거라구.” “담담하게 들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아.” 하고 어딘가 짓눌린 소리로 너는 답한다. “나는 느려. 알잖아.”
너는 끄덕거려 그 말에 대충 응해준다. 누군가 너에게 노트를 넘겨준다. 노트를 받으면서도 너는 시계로 눈이 갈 수 밖에 없다. 너는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온 것이다. 책이라도 읽으려고 했는데, 노인에게 자리를 비켜주느라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그것도 그만두어야 했다. 지루한 나머지 이어폰을 꽂고 이미 몇십번이나 들은 노래들을 또 돌려 들었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도 비슷할 것이다.“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가고 싶은데.” 너는 조심스럽게 입 밖에 내어 봤다가 시선을 받고는 고개를 젓는다.
“아예 늦어버리면 되잖아. 아니, 이것 봐,” 하고 종이컵에 담배를 털던 네가 다가와서 손짓한다. 외마디 소리같다. “뭐라고?” “써 있는 대로 읽은거야.” 담배를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네가 페이지 모서리를 오른손 검지로 딱딱 친다. 너희들은 함께 들여다본다.
네 애인이 물잔을 기울여 종이컵에 조금 붓는다. 담배 냄새 때문에 다들 불평을 해 댄다. 너는 담배를 종이컵에 던져넣어 꺼 버린다. 노트를 치워버리고 너희들은 이제 그저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그는 빠져나갔을까?”
“빠져나가지 못했어.” “빠져나가려고 한 게 아니야.” 너희들은 각자 반론한다. 그리고는 서로에게서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다.
침묵이 흐른다. 너는 한강을 건너는 동안 앉아있고 싶은 생각에 시계를 보며 안달한다. 너는 괜히 셔츠의 황갈색 라운드 부분을 만지작거린다. 각자 할 일도 많고 남은 질문도 많다. 너희들은 혼자 있고 싶어진다. 너희들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적당한 인사도 없다. 인사가 필요한 사이가 아니다. “노트는 어쩌지?” 네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태워버려.” “꼭 그래야 할까?” “그렇게 하라고 써 있었잖아.” “이리 줘.” 담배를 피우는 네가 말한다.
라이터가 쓸모가 있었다. 너는 전철역으로 급하게 걸어간다. 너는 추위에 떨며 갈색 줄무늬 투성이 뒷모습을 남기고 간다. 걷다가 핸드폰으로나 연락을 받았다는 너는 이번에는 잠시 머물러있다. 담배 냄새가 남은 손으로 너는 네 애인의 손을 잡고 걷는다. 네 애인의 눈두덩에서 어깨로, 손으로,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의 빈 공간으로 마지막 빛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곧 어두워진다.
행성의 표면은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검게 반짝거렸다. 차갑고 밀도가 높은 가스층이 내려앉았고 새파란 먼지가 피어올랐다. 어둠처럼 보이는 움푹 파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가스띠가 돌고 있었다.
너희들은 헤어져 돌아간다.
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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