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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일어섰다. 적진을 쳐다보는 왕의 눈은 무심했다. 자신의 군대가 승리한 적도, 패배한 적도 있는 전장이었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장의 공기를 마셨다, 그리고 죽을 때도 이 전장의 공기를 마실 거라 생각했다. 전열을 갖춘 상태에서 이전까지의 전투는 중요하지 않다. 지난 전투에서 적의 칼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적이 사용한 전략이 치명적인지는 다가올 전투 앞에서 모두 무효가 되어 버린다. 지금 왕을 기다리는 전투, 이 전투만이 왕에게 유효했다. 생명의 전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전장이 왕에게 손짓했다. 자신에게 달려오라고, 서로 부딪히라고, 그리고 죽어가라고. 왕은 그 말에 저항하고 싶지 않았다. 거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바라고 있었다. 도열한 보병들, 웅장한 성벽, 용맹한 기사, 지혜로운 주교 그리고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여왕까지. 모두가 적군의 파멸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러했다. 수많은 보병의 학살을, 적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기를, 기사를 말에서 끌어내려 그의 명예를 부수기를, 주교를 무릎 꿇려 조롱하기를, 여왕을 사로잡아 능욕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적과 자신의 군대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있었다. 왕의 목. 자신의 시체를 밟고 가는 전우를 보는 병사도, 죽음을 알고 돌격하는 기사도 자신의 생명보다 적 왕의 목을 더 원했다. 그렇게 그들은 수백 번 수천 번씩 전장 위에서 뒤엉켰다.

"시작이군요."

보병들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양쪽에서 걸어 나온 보병들 뒤에서 기다리던 기사가 말을 달려 나왔다. 적의 주교가 움직였다. 보병들의 걸음은 신중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으로 향하는 보병들의 발걸음은 느렸다. 그리고 확고했다. 여기저기서 보병들의 대치상태가 나타났다. 그 사이로 말에 탄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기사의 창에 찔려 죽어가는, 혹은 말발굽에 밟혀 죽어가는 병사들의 비명이 전장을 감도는 듯 했다.

"대단하시군요. 아르세이드."

주교가 움직였다. 고대의 비의를 전수받은 주교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아군은 승리의 함성을, 적군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손에 묻어난 피를 닦아낸 주교는 저 멀리서 아군을 학살하는 적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주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저 기사가 태양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흥미로운데요?"

기사를 보며 미소 짓던 주교의 입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주교가 쓰러지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여왕이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아름답기에 더 잔혹한 미소였다. 주교의 죽음에 흥분한 기사가 뛰어나갔지만 적의 여왕은 이미 본진으로 돌아가 있었다. 흰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기사는 오열했다. 자신의 왕 앞에 저 계집의 목을 잘라 피를 뿌리고 싶었다. 뜨거운 분노가 기사의 갑옷을 덥혔다. 분노로 달궈진 기사의 질주는 매복해 있던 적의 창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창은 기사를 보았다. 적병의 창이 기사를 낙마시켰다. 기사의 분노는 허공을 맴돌고 갑옷은 식어갔다.

"당신의 충직한 기사가 죽었군요. 아스모데리아."

또 다른 주교가 기사의 머리를 부쉈다. 비명도 없이 기사는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주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노리는 적병은 없었다. 아까 쓰러진 주교의 시체에 눈길이 갔다.

"당신의 기사도 죽었네요.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아르세이드씨."

두 제왕의 전장은 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했다. 내뻗어진 기사들의 창은 적병을 도륙했고 여왕의 철퇴는 주교의 머리를 박살냈다. 성벽을 오르던 병사가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광분해 날뛰는 전장에서 오직 왕만이 침묵했다. 왕만은 그 모든 학살을, 참극을 지켜보면서도 침묵했다. 충성을 맹세한 기사의 죽음에도, 자신에게 조언하던 주교의 부상에도, 자신의 옆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여왕의 시체를 보면서도 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묵시하는 왕에게 적의 여왕이 뛰어들었다. 매복해 있던 기사가 뛰쳐나갔다. 여왕의 목이 기사의 칼날에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잘린 목에서 밀려나오는 피를 보고 왕은 알지 못할 쾌감을 느꼈다. 적의 멸망이. 자신의 멸망도 다가왔다. 병사들은 신음했고 성벽은 무너졌으며 기사들은 죽었다. 서로의 목을  물어뜯으며 진흙탕에서 뒹구는 발정난 개들처럼 비참하고 추악한 싸움이었다. 자신의 팔을 끊고 적의 다리를 잘라내는 식의 싸움이었다. 상대를 도륙하는 쾌감에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목을 꿰뚫었다. 왕은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갑옷의 기사가 적 왕의 목에 검을 들이대는 것을 보았다. 왕의 뒤는 성벽이 막고 있었다. 주교는 피를 흘리면서도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적의 왕이 쓰러졌다. 그가 이긴 것이다. 상대의 성벽이 건재해도, 수백의 병사가 살아남았어도 상관없다. 왕의 목을 가지면 전쟁은 끝난다.

"내가 또 이겼군요. 아스모데리아씨."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하지만 제가 이름을 줄여 부르는 건 어린애들뿐인데요?"
"그럼 귀엽게 '아즈 양' 이라고 불러줘요"

나는 체스 판을 치우며 아스모데리아를 쳐다봤다. 아직 어른이라고 하기엔 어린 나이, 그러나 그녀 역시 신을 모시는 사제. 맥주잔을 들이키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맥주빛깔과 비슷한 머리카락이 카우보이모자 아래로 흘러내렸다. 세상에 저런 모자를 쓰고 다니는 성직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물론 복장도 사제라기보다는 또래 여자애들에 더 가깝지만.

"쳇. 사람 이름도 마음대로 못 부르게 하는 신이 어디 있어요?"
"아아, 글쎄 그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니까요? 이름을 부른다는 건 존재를 인정한다는 거랑 같은 소리에요. 티아마트의 사제가 애칭을 부르는 상대는 어린애랑 자기 배우자뿐이에요"
"풉! 배우자?"

맥주를 들이키던 아스모데리아는 아마 식도를 타고 넘어가던 중이었음에 틀림없을 맥주를 허공으로 뿜어냈다. 마치 한 마리 고래의 절규처럼. 으샷!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아. 우리 교단의 사제는 결혼할 수 있어요. 여사제는 안되지만."
"그건 차별이잖아요?"
"음. 말하자면 복잡해요. 얼른 맥주나 사요. 진 주제에 말이 많군요."

티아마트의 사제들 중 여자만 결혼에 제한이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모든 것들의 어머니는 오직 티아마트 하나, 교단 내에서 '어머니' 라는 존재는 티아마트 단 하나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남자는 관련 없고 여자의 경우 정말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는 교단을 떠나기도 한다. 뭐, 그래도 경력은 인정 해 주니까.

"어디 보는 겁니까. 아스모…."

'뭔가' 가 있었다. 그 '뭔가' 가 내 등 뒤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내 감각에 안 걸리고 뒤로 다가와? 숨소리가 들렸다. 후우. 후우. 후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니, 빨리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고양이 앞의 쥐를 말하는데. 이건 그보다 더하다. 전신을 얇은 실로 묶어두고 있는 듯 했다. 돌아본 그곳에는 정장을 빼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맥주를 뒤집어쓴 채로.

"으음. 아가씨. 이건 좀 심하오만?"

설마 아까 아스모데리아가 뿜어낸 맥주인가? 맥주를 뒤집어쓰고도 노인은 웃고 있었다. 아니, 입은 웃고 있었다. 외알 안경 속에서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아. 변상하겠습니다. 세탁 비는 얼마나?"
"귀여운 아가씨로고. 돈은 되었네. 늑대 조심하시오 아가씨"
"늑대요?"
"아가씨 앞에도 하나 있는 듯해서"

싱긋 웃은 노인은 맥주를 툭툭 털어내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순간 내 몸을 묶어두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 뭐지? 마치 결박당했던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아스모데리아는 여전히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느꼈어요?"
"뭘요?"
"됐어요."

개 냄새였다. 장마철, 비에 흠뻑 젖어 그르렁대는 개 냄새. 노인은 이미 가게를 나간 상태였지만 노인의 체취가 내 후각을 어지럽혔다.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 나는 아스모데리아를 놔두고 몸을 일으켰다.

"어? 아르세이드씨 어디가요?"
"알아볼 게 있어요. 맥주 한잔 달아놔요"

몸을 돌려 나가는 내 뒤로 아스모데리아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치사해요오!"

-        -        -        -        -

희고 깡마른 손이 소녀의 옷을 찢었다. 힘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몰라도 소녀의 옷가지는 너무나도 쉽게 찢겨져 나갔다. 소녀는 깨어 있었다. 깨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자신의 옷을 찢어버려도, 알몸을 바라보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눈물이라도 흐른다면 좋으련만, 무심한 바람만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바람이 차군."

노인은 창문을 닫았다. 소녀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뒹굴던 바람은 아쉬움이 남는지 창문에 몸을 기대며 소녀를 바라보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의 성벽을 불태우는 석양의 뜨거움을 눈으로 음미하던 노인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나신의 소녀를 바라보는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란히 앉아서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부모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노인은 소녀의 부모에게로 다가갔다.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춘 노인이 손가락을 들었다.

"당신들도 즐거운가 보구려? 그래요. 웃는 게 건강에도 좋다는구려, 시체한테도 좋을지는 모르지만."

부부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가슴과 미간에 뚫린 구멍만 아니었다면 더 아름다웠을 테지만. 노인은 남자의 가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돌리더니 아예 손목까지 집어넣어 버렸다. 빠져나오는 노인의 손에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뛰고 있었을 심장이 들려 있었다. 비커에 대고 손에 힘을 주자 심장 안에 담겨있던 피가 흘러나와 비커를 채웠다. 노인의 앙상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 근육이 파열되면서 으스러지는 조직 사이에 담겨있던 피까지 모두 뽑아낸 노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지?"

노인의 손이 여자의 가슴에 난 구멍으로 향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자의 심장에서 나온 피가 비커를 채웠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피가 비커 속에서 찰랑거렸다. 노인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생명을 담은 붉은 액체가 싸늘하게 식고  굳어 가면 노인의 계획에는 약간의 차질이 생긴다. 노인은 이 도시가 나쁘지 않았다. 아까 들렸던 주점에서 맥주 세례를 뒤집어쓰고 빨간 머리 청년의 의심스런 시선을 받기는 했어도 이 도시는 좋은 도시였다. 그런 도시의 시민을 자기 손으로 줄이기는 싫었다. 심장이 빠져나간 가슴의 구멍으로 사신이 얼굴을 내미는 걸 보며 노인은 혼자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려. 죽은 자의 역병도 드리고는 싶지만 난 뱀파이어가 아니라서. 게다가 따님이 살아있는 자의 역병에 걸리실 텐데 골육상쟁이 벌어지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가족이기도 하군요."

노인은 소녀에게로 향했다. 발걸음을 따라 비커에 담긴 피가 찰랑거렸다. 소녀의 머리맡에 비커를 내려놓은 노인이 소녀의 왼쪽 가슴을 움켜잡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손가락을 따라 느껴졌다. 소녀의 생명이. 심방이 확장하고 심실이 피를 밀어내는 소리가. 혈관을 따라 달리는 피가 부르는 노래가. 땅 속에 누운 자들은 부를 수 없는 삶의 노래. 소녀의 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조그만 소녀의 몸에서 울려 퍼지는 생의 찬가에 노인은 전율했다. 이 작은 가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면? 연약한 육체는 뜯겨나가고 생명의 액체가 분수처럼 피어날 것이다. 노인의 눈동자가 광기로 물들었다. 푸르스름한 안광. 정상적인 인간이 내뿜기엔 무리가 있는 눈빛이 노인의 눈에서 폭사되었다. 그러나 노인의 눈동자가 다시 안광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이성이 노인의 들끓는 피를 내리눌렀다.

"하아…. 나이 헛 먹은 건 아니군. 그나저나 가슴이 예쁘군? 애인한테 사랑받겠어. 애인이 아가씨 손에서 살아난다면 말이지만"

노인의 손가락이 비커에 담겼다. 끈적이는 피가 노인의 손가락에 묻어났다. 손가락은 그대로 소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정확히 심장 위에서 멈춘 손가락이 소녀의 피부 위에서 춤을 췄다. 부모의 혈관 속을 돌던 피가 소녀의 몸 위를 돌고 있었다. 노인의 손가락이 소녀의 가슴에 기괴한 그림을 그려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킨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에서 목으로, 목에서 이마로, 다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로, 배에서 치부로, 허벅지로, 발목으로. 피로 소녀의 전신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밀림 깊은 곳에 사는 부족의 문신처럼. 소녀의 온 몸은 피로 덮여갔다. 작품을 완성시킨 노인은 긴 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섬세하고 침착한 작업은 이미 끝났다. 이제 노인에게 남은 건 광기와 폭력뿐이었다. 노인의 손이 넥타이를 풀었다. 와이셔츠의 단추가 하나하나 풀려 내려갔다. 깡마른 노인의 상체가 드러났다.

"바지도 벗어야 되려나? …나이가 있는데 이정도만 해도 괜찮겠지?"

상의를 단정하게 개어놓은 노인이 숨을 들이쉬었다. 굳어있는 어깨 근육을 문지른 노인의 눈에서 아까의 안광이 다시 폭사되었다.

"흐아아아아!"

전신의 모공이 확대되고 있었다. 가느다란 체모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뼈와 가죽밖에 없던 팔에 근육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길어진 털이 온몸을 덮기 시작했다. 영장류의 것이었던 골격이 피를 탐하는 야수의 그것으로 변해갔다. 노인과 소녀가 서 있던 방 안에는 야수와 제물만이 놓여 있었다. 회백색의 웨어 울프. 밤의 두 지배자들 중 하나인 라이칸스로프였다. 달빛 아래 무법자의 입이 열렸다.

"강해질 거요 아가씨. 광기는 우리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는 라이칸스로프란 건 낮을 걸어 다니는 뱀파이어와 같다오. 아가씨는 내 첫 번째 자식. 환영하오. 달을 보고 울부짖는 자들의 땅에 들어선 것을. 야수의 땅에 들어선 차가운 피가 흐르는 야수여."

이제는 굵어진 노인이 팔이 침대에 누워있던 소녀를 들어올렸다. 멍해진 소녀의 눈이 노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나저나 어딜 물어야 되나? 내가 뱀파이어도 아니고 목을 물 수도 없고."

고민하던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장난기 어린 눈으로 노인이 입을 열었다.

"늑대답게. 크하하하하하핫!"

늑대가 소녀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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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값 계산을 아스모데리아에게 맡겨버린 나는 가게에서 뛰쳐나와 곧장 노인의 체취를 찾아 대로로 뛰쳐나왔다. 쓰레기 더미를 뛰어넘고 연인들이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벤치를 짓밟는다. 드넓은 도시를 배회하며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노인의 냄새를 쫓던 내게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북서쪽. 광장을 가로질러 뛰어간 나는 골목 사이를 누비며 노인의 냄새와 강한 기운을 추적했다. 한발자국 더 뛰어갈수록 냄새가 짙어졌다. 밤이 다가온다. 해가 지는 도시는 점점 어둠에 싸여가며 노인의 자취를 베일 사이로 숨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개 냄새가 아니었어!"

늑대 냄새였다. 길들여지지 않는 긍지와 달을 바라보는 광기를 가진 뜨거운 포식자. 늑대 냄새가 진해졌다. 그리고 어느 2층 건물 앞에서 냄새가 정점에 달했다.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숨통을 죄어왔다. 젠장. 들어가 봐야 되나? 허리에 걸려있는 메이스를 꺼내든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2층 건물의 현관문을 두들겼다.

탕. 탕. 탕.

"계십니까?"

대답은 2층에서 들려왔다.

"늑대답게. 크하하하하하핫!"
"빌어먹을!"

콰드득! 안에서 잠겨 덜거덕거리는 문짝을 걷어차자 경첩에 박힌 못이 나무를 물어뜯으며 뜯겨 나왔다. 가정이 만들어내는 따스한 분위기 속에 깊게 스며든 피내음이 폐부 깊숙이 번진다. 나는 박살난 문짝을 박차고 혈향의 장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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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하하핫. 아하하하핫"

굵고 투박한 손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 구석구석 굳은살이 박여 있는 손이었다. 가느다란 갈색의 실 사이로 들어갔던 손가락이 빠져나오기 무섭게 소녀의 머리를 헤집는다. 애정이 아닌 집착이 담겨 있는 손에 소녀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소녀는 웃고 있었다. 이 느낌이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온 소녀의 아버지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 느낌. 소녀는 기분이 좋았다. 언제까지라도 웃고 싶었다. 그러나 소녀를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은 착잡했다.

"끄응…. 이걸 생각 못했었네."

노인의 계획은 완벽했다. 가장 저항반응이 없는 친족의 피를 이용해 그린 흑마법진으로 영혼을 동결시켜 라이칸스로프의 수화에 따른 광폭화 현상을 막는다는 이론에는 문제가 없었다. 단지 자신의 부모가 눈앞에서 살해당하고 그 피로 몸에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을 지켜보기엔 소녀의 정신이 너무도 연약했다는 것 뿐. 노인은 미쳐버린 소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소녀는 분명 감염되었다. 소녀를 물은 후 노인이 일으킨 강제 수화에 반응한 소녀가 적갈색 털의 웨어 울프로 변한 것은 당연했다. 노인 자신이 라이칸스로프니까. 문제는 노인이 힘들게 그려 넣은 영혼 동결진의 가동 여부였다. 원래대로라면 수화된 순간 가동 여부를 알 수 있었을 테지만 미쳐버린 소녀는 헤실헤실 웃더니 수화에 따른 극한의 허기를 이기지 못했다.

"성공 한 건가? 나한테 안 달려든 걸 보면?"

노인은 상의에서 압생트를 꺼내 한 모금을 넘겼다. 진한 송진 향이 노인의 코를 간질였다. 확인해 보는 방법은 한가지였다. 노인은 먹어버린 부모의 마지막 남은 손을 가지고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데 열중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노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        -

건물은 복잡하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자잘한 꽃무늬 벽지는 슬프도록 화사했다. 아릿한 안개처럼 은은하게 사방을 감싸던 피 냄새는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그 짙어진 피 냄새의 정점. 화사하게 웃고 있는 천사가 양각된 나무 문 안에서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분명 방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진한 혈향이었다, 노릿한 늑대 냄새와 함께. 도시를 헤매고 다니며 지표로 삼을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던 노인의 기운은 집 안에 들어오는 순간 사라져 있었다. 마치 그 끝을 찾을 수 없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이. 문 저편에서 나지막하게 노인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라이칸스로프로 추정되는 노인이 저 소녀를 맛있게 드시고 있는 중이라면 들어가서 적절한 제재와 함께 사람고기 대신 소고기나 양고기를 권해야겠지만, 만약 저 둘이 종족과 나이를 초월한 로맨스 중이라면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니, 잠깐, 원조교제니까 막아야 되는 건가? 자라나는 새싹을 유린하는 노인을 제지하려 문을 두들기려 한 내게 문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빠각.

뭔가 부서지는 소리. 강력한 힘에 의해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문틈 새로 비릿한 혈향이 흘러나왔다. 아까의 미약한 냄새가 아닌 방금까지 몸속을 돌던 신선한 피 냄새였다. 빌어먹을! 넌 최소한 아동 성 학대범이다! 문에서 떨어진 나는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파괴의 권능이 실린 발길질에 문이 박살났다. 허공에서 흩날리는 나무 파편들과 광포하게 터져 나오는 먼지들 사이로 보인 것은 앉아 있는 소녀와 늑대 냄새의 노인이었다. 웨어 울프인가? 노인의 옆에 앉아있는 소녀를 본 내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듯 했다.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리 사디스트라도 머리를 날려버리진 않아요."

상의를 벗고 있는 노인의 손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인의 손에 묻은 피의 주인인 듯 한 소녀의 목 위로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머리가 터져나간 소녀의 목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피가 소녀의 상체를 적시고 있었다.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낸 노인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거 열려있는 문을 박살내고 들어온 자네만큼 심하겠나?"

노인의 말에 반박하려던 나는 시야에 들어온 소녀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머리가 비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젠장. 이러다가 머리 나빠지겠군. 분명 아까 내가 본 소녀는 목 위로는 피분수만 올라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 소녀의 목 위에는 턱뼈가 재생되고 있었다. 붉은 살 속에서 올라오는 흰 뼈를 따라 덩굴이 번지듯이 신경이 뻗어나가고 그 뒤를 따라 근육이 붙어나간다. 광대뼈가 만들어지고 텅 빈 눈구멍에 재생된 시신경에서부터 안구가 만들어졌다. 거, 눈이 참 맑구만. 두개골에 뇌수가 차오르는 것까지 보다가 정신이 아득해진 나는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치익

노인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에 불이 붙었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린 달빛. 타오르는 담배.

"물었습니까?"
"그럼 내가 이 나이에 팔뚝만한 계집애 데리고 뭐 하겠나? 거 성직자란 친구가 음흉하긴."

아니, 이 양반아. 여자애 벗긴 채로 몸에 그림 그리고 놀다가 물고 머리 박살낸 건 당신이야. 이 달밤에 그런 짓 하는 건 사이코랑 변태밖에 더 있어?

"그럼 머리는 왜 날려버린 겁니까? 맛이 이상했나요?"
"에잉. 라이칸스로프 포맷하는 것도 못 봤나? 실험 결과를 알아보려고"

그때 머리를 재생하던 소녀가 옆으로 쓰러졌다. 이미 재생은 끝나 있는 상태였다.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른 소녀였다. 머리에만 피가 안 묻어있으니 이상한데?

"잠깐, 라이칸스로프라도 머리를 부수면 죽을 텐데?"

노인이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독한 담배 냄새가 내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그 담배 냄새보다 더 독한 노인의 눈빛이 나를 꿰뚫었다.

"지금 블랙 울프 가르시안 란즈의 자식이 보름달 밑에서 머리 하나 터졌다고 죽는다고 말하는 건가? 이봐, 빨간 머리 친구. 난 말일세. 사지가 찢어져도, 배가 터져 내장이 몽땅 흘러나와도, 허리 밑이 잘라져 버려도 죽어본 적 없어. 산채로 목이 뒤틀려 끊어져 척추가 빠져나와도 재생해 봤지. 그 기분 아나? 척추가 빠져나갈 때 기분말이야. 아마 자네는 모를걸? 미친 듯이 괴로워하며 이틀 동안 몸을 재생시켰지. 척추가 뽑히면 말이야. 몸의 중심의 되는 뼈가 사라지는 거라 재생시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허리 밑이 잘라졌을 때도 고생했지. 골수의 조혈세포가 부족해서 재생시키기 힘들었거든. 머리 하나쯤이야. 뭐, 약간의 기억 상실만 감수하면 충분히 재생시킬 수 있어. 나와 내 자식들을 우습게보지 말게."
"말씀하시는데 죄송하지만 보름날 죽을 수는 있나요?"

노인의 눈이 빛났다. 푸르스름한 광기가 노인의 눈을 지배했다. 폭사되는 안광에 눈이 시릴 정도였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광기와 이성의 대립. 노인의 냄새가 내 몸을 내리눌렀다. 빌어먹을. 먹히는 건가? 신성력을 끌어올린 나는 마비의 권능을 펼쳤다. 노인이 몸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호오? 재밌는 걸 쓰는군? 암룡의 새끼인가?"
"거. 남의 어머님을 험하게 부르시는군요?"

노인의 몸이 꿈틀거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깡마른 몸에서 근육이 불거진다. 체모가 길어지며 전신을 덮는다. 우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신의 골격의 야수의 형상을 띄어갔다. 이익! 마비의 권능을 이겨내? 신성력을 더 끌어올리자 노인의 수화가 멈칫했다. 노인의 눈빛이 흉포해졌다. 노인의 이빨이 갈렸다.

빠드드득

"거. 이따위로 치사하게 놀 텐가?"
"어르신께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만?"  

광포하게 불타오르는 야성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후려갈기고 그 모습조차 알 수 없는 태초의 혼돈이 울부짖는 공포가 근육을 억누른다. 서로 맞부딪히는 두 개의 힘이 만들어내는 역장이 일그러지며 사이에 끼인 대기를 으스러뜨린다.

"싸우는 거야?"

노래하는 듯 한 목소리, 걱정스러운 음색. 소녀가 일어서 있었다. 전신에 피칠갑을 한 소녀. 손가락을 하나 물고 있는 모습이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노인의 시선 역시 소녀를 향해 있었다.

"싸우는 거지?"

소녀가 나와 노인 사이로 걸어왔다. 어? 잠깐. 어떻게 걸어오는 거야? 지금 내 주위는 신성력으로 충만한 공간. 티아마트의 마비의 권능이 펼쳐진 공간이다. 노인의 수화마저 멈출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의 공간. 그 공간 속을 소녀는 아무 문제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를 본 노인의 눈 역시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와 노인 사이를 가로막은 소녀는 손을 들어 나와 노인의 가슴에 대었다.

"싸우지 마!"

응? 밀렸다. 난 그냥 가볍게 밀렸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날아가는 걸까?

"끄아아아아악!"

1층 바닥이 내게로 다가왔다.

-        -        -        -        -

"그으~네, 그으~네, 그으~네"

거 남의 갈빗대를 분질러 놓고도 그네~그네~ 타령이 나오냐? 볼썽사납게 1층으로 떨어진 나와 달리 노인은 우아하고 고상하게 벽으로 날아가 라이칸스로프와 판시웨인 건축 공법 중 무엇이 더 우수한지 몸소 실험해 보았고 어깨뼈 탈골과 2층 외벽 완파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폭력적인 비 폭력주의자인 소녀의 의견에 따라 집 밖으로 나온 나와 노인은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식당을 찾는 중이었다.

"에구. 어깨야. 거 나이 들면 보험처리도 어려운데. 쩝."

라이칸스로프가 상해 보험 들면 뱀파이어는 정기 수혈이라도 받아야 되는 건가?

"그나저나 어르신, 얘 왜 아까부터 자꾸 배고프다고만 합니까?"
"음? 아아. 당연하잖나? 라이칸스로프가 수화할 때나 신체 재생할 때는 열량 소모가 심한데 그 열랑 보충은 대부분 적의 시체로 처리하지. 방금 같은 경우는 머리를 재생시켰는데 주위에 먹을게 없었잖나."
"저도 있고 노인도 있었습니다만?"
"나야. 같은 라이칸스로프니까 본능적으로 느꼈을 테고. 자네는… 불량식품은 안 먹나보지"

뭐요?

"오. 저기로 하지. 원래 시끄러운 데가 얘기 나누긴 더 좋거든"


대부분 주말의 펍(Pub)이 그렇듯 가게 안은 한 주의 고된 생활을 잊어버리려는 사람들로 혼잡스러웠다. 그리고 그 혼잡을 가중시키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휘~익, 멋진데! 아가씨!"
"꺄하하핫~"

테이블 위에서 한 여자가 춤추고 있었다. 소녀와 처녀의 경계에 서서 어쩔 줄 모르는 듯 한 외모. 구두는 벗어 손에 든 채 맨발로 테이블 위에 올라서서 빙글빙글 도는 여자를 보고 주위 사람 모두 환호하고 있었다. 댄서인가? 탓, 타닷, 타닷. 펍 안을 휘도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든다. 구름에서 뽑아낸 듯 한 순백의 원피스가 나풀거린다. 북극의 극광처럼, 나비의 날개처럼, 흩날리는 깃털처럼. 춤추는 치맛자락에 취객들의 목청이 커진다. 춤추던 여자가 입구 쪽을 바라봤다. 어라?

"어? 아르씨다! 아르씨이이!"

취기가 올라 얼굴이 벌게진 채로 춤추고 있는 여자는 페이벡이었다. 최근 어딘가로 의뢰를 해결하러 집을 비운 상태였는데. 의뢰는 해결 한 건가? 페이벡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보편 상식과 지성의 이름으로 정중하게 무시했다. 노인이 웃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아는 아가씨인가?"
"아, 제 위층에 사는 모르는 분입니다. 아렐레카 페이벡이라는 분인데. 전 절대 모르는 분이에요."
"대충 알겠네."

외면하는 날 본 페이벡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이봐요, 이 상황에서 문제는 내가 아니라 댁입니다만? 씩 웃어주자 마주 웃은 페이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새하얀 치맛자락 사이로 미끈하게 빠진 종아리가 춤춘다. 페이벡이 춤추는 테이블의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뭐, 저 위치에서 고개를 들면 볼 거 다 보이겠지.

"페,페이씨. 보,보입니다."
"꺄하핫~ 뭐가요오오? 저어지이일~"

뭐. 그 상황에서 저질은 댁이라고 생각하오만?

"한잔 받게나."

노인의 술잔을 내밀었다. 부딪히는 술잔. 튀어오르는 맥주. 램프불 밑에서 사그라지는 거품. 노인의 눈길이 춤추는 페이벡에게 향했다.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재미있는 아가씨구만."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니 재미있군요. 동거인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좀 다른 의견입니다만."
"내 딸도 저렇게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구먼."

술집 테이블 위에서 춤추면서? 노인의 눈이 스튜를 떠먹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든 소녀는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다시 스푼을 열심히 움직였다.

"내가 세상을 살아온 게 몇 년인 줄 아나?"
"글쎄요. 예순? 일흔?"

노인의 잔이 흔들렸다. 잔속에 담긴 맥주가 뒤섞이며 기포가 솟아올랐다. 잔에 이마를 댄 노인이 잔속의 기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여든넷일세. 열 셋에 물렸지. 칠십 년 동안을 라이칸스로프로 살아왔어. 헌터들한테 쫓기면서, 헌터들을 쫓으면서 살았지. 빙설이 휘몰아치는 설원에도, 폭염이 이글거리는 열대림에도 내 발자국이 있다네. 눈을 뜨면 피와 살을 탐했고 눈을 감으면 원혼들의 울부짖음을 들었지."

맥주가 노인의 입으로 흘러들어간다. 노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잔을 비운 노인이 스튜를 떠먹는 소녀를 바라봤다.

"젊을 때는 그게 좋았어. 달에 미치고 피에 취해서 세상을 부르짖던 시간이. 그런데 말일세, 영원히 흉폭할거라 믿었던 야수도 결국은 늙더군. 내 뒤를 쫓는 헌터들의 시체를 깔고 앉아서 생각했네. 3월의 돋아나는 새싹을,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7월의 짙푸른 숲을, 10월의 새파란 하늘을. 자네 혹시 마지막으로 꽃향기를 맡아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하나?"

눈앞의 야수는 늙었다. 늙은 야수는 야수가 아니다. 노인의 눈가에 맺힌 주름이 내 시선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자기 죽을 날이 언제인줄 안다는 말이 있지. 정말인 것 같으이.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가. 평생 안 만들던 자식까지 만들었잖나. 나는 오랜 세월동안 세상을 혼자 걸어왔네. 평생 걸어 다닌 세상에 자취 하나쯤은 남겨둬도 괜찮을 듯 하더군."

자기 앞에 놓인 스튜 그릇을 비운 소녀가 내 접시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냐 그건, 스튜를 포기하지 않으면 내 얼굴을 뜯어먹겠다는 의사 표현이냐? 접시를 소녀에게 밀어준 나는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내 딸이 나와 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지는 않네. 승리와 피로 닦은 길은 영예로울지는 몰라도 고단하고 외로운 길이거든. 비정상적인 부녀 관계지만 내 딸은 좀 밝은 길을 걸었으면 좋겠어. 가끔 날씨 좋은 날에는 가족들과 같이 도시락 싸서 소풍도 가고. 기나긴 겨울밤을 좋아하는 사내 생각으로 잠들지 못하기도 하고. 내가 못 걸어본 길을 걸어봤으면 해."
"따님은 라이칸스로프입니다만? 야수의 발톱을 뽑아달라는 겁니까?"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시선 끝에는 페이벡이 있었다. 여전히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는. 꽃을 향해 날아드는 나비처럼. 암컷 앞에서 춤추는 산새처럼. 늘씬한 허리가 허공을 유린한다. 램프 불에 드러난 허벅지가 수줍어하며 치마 밑으로 도망친다. 거기 밑에 계신 분, 좋으시겠습니다?

"발톱을 뽑아 달라는 게 아니라 발톱이 단단해질 때까지 좀 덮어 달란 말일세. 여자애가 철이 들기도 전에 달콤한 사랑 노래 대신 짭짤한 피와 비명에 맛 들려서야 되겠나?"

지쳤는지 페이벡이 테이블 밑으로 내려와서 일행과 잔을 부딪쳤다. 오호? 세실리온이었군? 펍 안을 가득채운 음악소리가 더 커졌다. 잔을 비워버린 페이벡은 다시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세실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황하는 세실리온의 표정이 내게까지 보였다. 수고하시구려.

"사내들의 인생과는 좀 다르지. 사내란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의 등을 바라보고, 그 등을 밟고 지나가기 위해 살아가거든. 부모일수도, 스승일수도 있는 자의 등을 넘어서서야 자신들의 세상을 보게 되지. 세상을 보기 위해 싸우고 세상과 마주쳐 싸우는 게 사내들의 인생이야. 그런 팍팍한 인생을 소녀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안 될 일이지."

결국 테이블 위로 올라선 세실리온도 페이벡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가 높아진다. 여기저기 다른 테이블도 연인들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취기로 붉어진 페이벡의 얼굴과 원인모를 안면 혈액순환 과다증에 시달리는 세실리온. 어째 남녀가 뒤바뀐 것 같은데? 어쨌거나 정상적인 여성의 치마 아래쪽의 의복 양식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 한 세실리온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래서 말인데. 내 딸의 양육권을 일임하고 싶구먼."

소녀는 내 스튜에 이어 노인의 스튜까지 먹어치우고 배가 불렀는지 잠들어 있었다. 이 시끄러운 와중에서 자다니 대단한걸? 노인도, 나도 잠자는 소녀를 바라봤다. 세상 바람을 받을 준비가 아직 안 된 꽃.

"그나저나 얘 머리 정상으로 돌아오긴 합니까?"
"머리? 아. 걱정 말게. 한 두어 달 정도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 올 거야. 뭐, 기억은 말소되겠지만. 사실 자기 부모 뜯어먹은 것 같은 유쾌한 기억은 없어지는 게 성장기 청소년의 정신 발달에 더 좋을 듯싶은데? 그냥 백치미 넘치는 소녀라고 생각하게나."

백치미가 넘치는 게 아니라 백치미로 이루어진 거겠죠. 그나저나 대체 어떤 자식이 부모를 뜯어먹고 어떤 부모가 자식 뇌를 날려버리는 겁니까?

"키워서 잡아먹지나 말게. 이 털 안 난 늑대 양반아."

푸읍. 식도로 들어가 위장으로 맹렬히 달리던 맥주가 다시 올라왔다. 늑대가 울부짖고 소녀가 미소를 밤바람에 띄우는 밤. 펍의 테이블이 부서져라 춤추는 남녀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노인은 펍의 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며 상쾌한 어둠을 펍 안으로 집어넣었다. 열린 문 사이로 비춰지는 노인의 뒷모습이 판시웨인의 밤하늘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아르세이드는 엘도로에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공학도임에도 공학보다 환상문학을 사랑한다.
mirror
댓글 2
  • No Profile
    엘도로에의 설정까지 다 훑어본 건 아닙니다만... 이 이야기는 조금 불편하네요.
  • No Profile
    잠수아 08.04.26 11:25 댓글 수정 삭제
    퇴폐의 아르세이드입니다.
    엘도로에에선 폭력성과 선정성의 대명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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