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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바늘 자국

2009.06.26 22:5706.26

1.
    마을 뒷산을 넘어가면 깊은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는 요물이 살고 있어 마을에서는 이십 년마다 마을 사람들 중 가장 지체가 높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결한 처녀를 공물로 바쳤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이 몰살당하는 대재앙이 내린다고들 하였다.
    마을에서 가장 지체가 높은 것은 물론 지주 가문이었다. 그러므로 제물은 언제나 지주 가문의 처녀였고, 그리하여 이십 년에 한 번 지주의 가장 어린 딸을 공물로 바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지주 가문에서는 거지나 부랑자의 아이, 혹은 마을에서 오갈 데 없는 고아를 사서 수양딸로 기르다가 때가 되면 공물로 바쳤다. 마을 사람들은 요마가 노하지 않는 한 지주 가문에서 자기 핏줄을 공물로 바치지 않는 것을 모두들 알면서도 쉬쉬하였고, 공물을 바치는 해가 되면 마을을 위하여 희생하는 지주님의 은덕을 한껏 소리 높여 칭송했다.
    소녀도 그렇게 해서 지주 가문에 수양딸로 들어갔다. 소녀는 어미도 아비도 알지 못했다. 다만 아직 아기였던 소녀를 먼 곳에서 데려온 사람이 어느 날 지주님 댁 문 앞에 놓아두고 갔을 뿐이었다.
   
    2.
    자신이 죽기 위해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소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지주의 가족들은 소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갖고 싶다는 것은 돈을 아끼지 않고 구해다 주었고, 먹고 싶다는 것도 언제든 먹게 해 주었다. 지주의 딸로서 모자람이 없도록 최고의 선생을 구하여 책을 읽고 수를 놓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법을 가르쳤고, 병이라도 들면 근방에 소문난 의원을 데려다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소녀의 곁에는 아무도 함부로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지주의 아내와 후실들은 소녀를 보면 멀리서부터 피했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소녀 가까이에는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시종과 하녀들도 소녀를 보면 멀리서부터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했다. 비싼 돈을 주고 데려온 선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황급히 짐을 싸서 도망치듯 별채를 나갔다. 그렇게 혼자 남은 소녀의 곁에 거리낌없이 다가오는 것은 소녀의 몸종 뿐이었다.
    그래서 소녀와, 소녀의 몸종인 또 다른 소녀는, 언제나 별채에서 둘이 함께 있었다.
    차갑고 슬픈 세상에서, 두 소녀는 서로가 유일한 위안이고 안식처였다.
   
    3.
    소녀는 자라나 처녀가 되었다. 삼단 같은 머리, 백옥 같은 피부와 날렵하고 우아한 자태를 볼 때면 지주는 푸우, 한숨을 내쉬고 혀를 끌끌 찼다.
    공물로 바쳐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계곡에서 요마를 위한 제사가 행해지는 것은 팔월 보름날이었다. 그 열흘 전부터 처녀는 매일 목욕을 하여 몸을 깨끗이 했다. 공물로 바쳐지는 처녀는 몸에 상처도, 흉터도, 한 점의 더러움이나 흠결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를 돌보는 것이 몸종의 할 일이었다. 평소에도 별채를 꺼려 하던 지주 집안 사람들은 죽음의 날짜가 정해진 후로 모두 말없이 발을 끊었다.
    목욕 재계 의식의 첫 날 밤, 처녀의 몸종은 큰 통에 목욕물을 데우고, 그 옆에 각종 약재를 달여 만든 향기로운 약물을 준비하였다. 처녀는 몸종이 돌보아주는 대로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몸종이 처녀의 길고 숱 많은 머리카락을 감기고 처녀의 희고 매끄러운 어깨에 향기로운 약물을 붓고 문질렀다.
    “손이 거칠구나.”
    처녀가 말했다.
    몸종이 얼굴을 붉혔다.
    “… 비단을 준비하겠습니다.”
    몸종이 욕조 곁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처녀가 그 손을 잡았다.
    “나 때문에, 혼자 애쓰는구나.”
    처녀는 몸종의 거칠어진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오랫동안, 혼자서…. 힘들었지? 나 때문에.”
    몸종은 일어서려다가 도로 욕조 옆에 앉았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이제 떠날 날이 멀지 않았다.”
    처녀가 몸종의 손을 감싸 잡은 채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말해 다오.”
    처녀가 몸종의 손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 아래 댔다.
    “네 마음도, 이러하냐?”
    몸종의 손이 처녀의 왼쪽 유방 아래 닿았다. 부드럽고 폭신한 젖가슴 아래로,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처녀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맥박치는 것이 느껴졌다.
    몸종은 다른 한 손으로 처녀의 얼굴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물에 젖어 미끄럽게 반짝이는 처녀의 뺨에 다른 한 손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두 처녀는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4.
    물이 식어갈 무렵 처녀가 목욕을 마치고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연인이 흰 비단으로 만든 수건으로 처녀의 몸에서 물기를 닦아내고 역시 흰 비단으로 만든 치마와 저고리를 입혔다. 그리고 두 처녀는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서 함께 침실로 갔다.
    침실에서 처녀는 연인을 보료 위에 앉히고 조심스럽게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었다. 치마의 매듭을 풀었다. 연인을 보료 위에 눕혔다.
    그리고 처녀는 연인 위로 몸을 굽히고,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섬세한 세공품을 다루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맞추었다.
   
    5.
    처녀의 몸은 부드럽게 달아올랐고, 연인의 몸은 따뜻하게 처녀를 품어 주었다. 그리고 처녀와 그녀의 연인인 또 다른 처녀는 보료 위에 나란히 누워서 벽 위쪽에 조그맣게 뚫린 들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아직은 다 여물지 않은 달빛을 함께 바라보았다.
    “아씨.”
    처녀의 연인이 말했다.
    “제가, 대신 갈까요?”
    처녀는 연인의 손을 잡고 입으로 가져가서 살짝 깨물었다.
    “아야.”
    처녀의 연인이 울상을 지었다.
    처녀는 옆으로 돌아 누웠다. 연인의 품에 파고 들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연인의 젖가슴에 뺨을 대고 누워 처녀가 말했다.
    “너 없는 세상에서, 나 혼자 무얼 바라고 산단 말이냐….”
    “그럼 아씨 없는 세상에서, 저는 혼자 무얼 바라고 삽니까?”
    연인이 처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처녀는 몸을 일으켰다. 연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죽어도 네 사람이다.”
    처녀가 속삭였다.
    “네가 그걸 기억해 다오.”
    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말없이 처녀의 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처녀가 다시 물었다.
    “기억해줄 수 있지?”
    연인은 부드럽게 두 눈을 감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녀는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세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사람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6.
    제사가 행해지는 팔월 보름이 다가왔다. 자정에 있을 제사를 위해 처녀는 저녁부터 몸을 씻고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었다. 처녀의 머리에 화관 족두리를 씌워주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준 후 처녀의 연인이 내키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말했다.
    “… 밖에서 가마가 기다립니다.”
    처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대 앞에 그린 듯이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녀의 연인이 다시 불렀다.
    “… 아씨….”
    그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애련(愛戀)아.”
    처녀가 속삭였다.
    “반짇고리를 가져다 주련?”
    처녀의 연인은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처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고분고분 일어나서 곧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처녀는 연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인은 조금 어리둥절한 채로 처녀에게 자신의 손을 내주었다. 처녀는 반짇고리에서 바늘을 꺼냈다.
    “몸에 상처를 내시면 안 됩니다.”
    처녀의 연인이 황급히 말했다.
    처녀는 웃었다. 그리고 연인의 손을 잡은 자기 손의 엄지 손가락 손톱 밑을 바늘로 찔렀다. 곧 붉은 핏방울이 부풀어 올랐다.
    처녀는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녀는 연인의 엄지 손가락 가운데를 바늘로 찔렀다. 역시 붉은 핏방울이 봉긋이 피어올랐다.
    처녀는 자신의 엄지 손가락과 연인의 엄지 손가락을 마주 대고 비볐다.
    “기억해 다오.”
    처녀가 속삭였다.
    “나는 요물의 것도, 저 자들의 것도 아닌, 네 사람이다….”
    그리고 처녀는 일어서서, 죽음과 혼례를 올리기 위해 가마를 타러 나갔다.
   
    7.
    가마꾼들은 곱게 단장한 처녀를 계곡 한가운데 내려놓고 부랴부랴 마을로 돌아갔다. 처녀는 달빛 아래 계곡에 혼자 서서 밤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귀뚜라미조차 울지 않았다.
    처녀는 기다렸다.
    갑자기 한 줄기 찬바람이 불었다. 처녀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바로 나의 신부가 될 처자인가?”
    처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괴괴한 계곡 한가운데의 적막 속에, 달빛 아래 갈색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리 오라.”
    처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허허, 하고 웃었다. 그리고 처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움직임은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과 같아서 풀밭 한가운데임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남자는 순식간에 처녀의 바로 눈 앞까지 다가왔다. 처녀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처녀의 턱을 한 손으로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남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처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의 신부가 될 여인은 몸과 마음에 아무런 상처도 흠결도 없어야 한다.”
    처녀가 대답했다.
    “그렇게 들었소.”
    남자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한 손으로 처녀의 턱을 잡은 채 물었다.
    “그대도 그러한가?”
    “그렇소.”
    처녀가 대답했다.
    남자는 다시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엄지 손가락의 손톱 밑을 바늘로 찔린 처녀의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과연 그러한가?”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처녀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턱을 잡았던 손으로 처녀의 목을 잡았다. 숨통을 조이며 처녀를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처녀는 숨을 쉬려고 애쓰며 발버둥쳤다. 그러나 곧 눈 앞에서 변하기 시작하는 남자의 모습에 숨이 막히고 목이 조여오는 고통조차 잊고 말았다.
    처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달빛을 받아 등껍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대한 지네가 자신을 덮쳐오던 모습이었다.
   
    8.
    처녀가 깨어났을 때는 한낮이었다. 하늘 높이 떠오른 팔월의 태양이 죽은 계곡에 무심한 햇볕을 인정사정 없이 내려쪼이고 있었다.
    처녀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목을 졸렸던 자리가 아직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잡혔던 손목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어 올랐다. 머리가 흐트러지고 옷도 군데 군데 찢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살아 있었다.
    머리 바로 위에 떠오른 해를 지표 삼아, 처녀는 마을 쪽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9.
    처녀는 한나절을 꼬박 걸어서 마을에 도착했다. 동구 밖에서 우물을 보았을 때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을로 걸어 들어가면서 기쁨의 환호성은 곧 공포에 짓눌려 사그라들어 버렸다.
    집이란 집은 모두 무너지고 부서져,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너진 집들의 잔해 아래로 그 집에서 살던 사람들의 시체가 보였다. 그 중 몇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더러는 피투성이가 되거나 잔혹하게 으깨져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주검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마을에 산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집들의 잔해 사이를 헤매며 혹시라도 산 사람이 없는지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처녀는 지주의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처음에는 망설이며 천천히 걷다가,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서 나중에는 뛰었다.
    지주의 집 대문은 문설주가 부서지고 문짝이 날아가 담장에 박혀 있었다. 처녀는 부서져서 쓰러진 문설주 위로 기어 올라가 간신히 안으로 들어섰다. 안채 역시 지붕이 무너지고 기둥은 넘어져 마당에 구르고 있었다. 처녀는 안채를 돌아 별채 쪽으로 향했다.
    별채는 문짝이 모두 부서지고 지붕이 마당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 지붕 밑에서 처녀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처녀의 연인은 무너진 지붕에 허리부터 깔린 채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죽어 있었다.
    매끄럽게 분홍빛이 돌던 얼굴은 하얗게 혈색이 사라졌고, 탁해진 두 눈은 초점 없이 크게 떴으며, 이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게 된 푸르스름한 입술은 그래도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약간 벌어져 있었다.
    처녀는 연인의 시체 옆에 앉았다. 연인의 머리를 안아 들어 무릎에 뉘이고 차가워진 뺨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10.
    연인의 시체를 지붕 아래에서 끄집어 내는 데 사흘 밤낮이 걸렸다.
    그 사흘 밤낮을 처녀는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 깨진 기왓장을 치우고 서까래를 밀어 옮겼다. 손톱이 모두 뭉그러져 손끝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한 번도 거친 일을 해 보지 않은 부드러운 손바닥과 팔에 나무 거스러미가 박혔지만, 처녀는 개의치 않고 죽을 힘을 다해 일했다.
    마침내 연인의 시체를 꺼내어, 처녀는 팔월의 뙤약볕 아래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주검을 업고 뒷산에 올랐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 않은 양지바른 자리를 골라 땅을 팠다. 이미 모지라진 손톱이 갈라지고 양 손이 완전히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처녀는 쉬지 않고 흙을 파헤쳤다.
    그렇게 판 무덤 속에 연인의 시체를 눕히고 처녀는 옆에 함께 누웠다. 그리고 허리가 으깨지고 차갑게 식어 썩어가는 연인의 몸을 가슴에 안았다.
    “나는, 네 사람이다….”
    처녀는 죽은 연인에게 속삭였다.
    “그 곳에서도, 기억해 주겠니?”
    연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죽은 연인과 함께 누워 있다가 처녀는 몸을 일으켰다. 연인의 시체 위에 흙을 덮었다. 할 수 있는 한 흙을 모아 봉분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꺾어 비석 대신 세웠다.
    매장을 마치고 처녀는 무덤 주위의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을에도 내려가서 부서진 집들의 잔해 중에서 자기 힘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들어서 날랐다. 이렇게 모은 것들로 처녀는 연인의 무덤 앞에 얼기설기 움막을 지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11.
    움막에서 지낸 지 석 달이 되었을 때 처녀는 자신이 요물의 씨를 잉태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일곱 달이 더 지나 처녀는 연인의 무덤 앞에서 요물의 아이를 낳았다.
   
    처녀는 아기를 돌보며 계속 움막에서 지냈다. 아기는 자라나 걸음마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처녀는 연인의 무덤 앞에 절한 후 아기를 데리고 떠났다.
   
    12.
    아기를 데리고 처녀는 도읍으로 갔다. 그리고 가장 이름난 무도관을 찾아갔다. 관장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는 자신이 남쪽 마을 지주의 막내딸이며 요물로 인해 마을이 몰살당했다는 사정을 고했다.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보고 관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그녀가 꿇어 엎드려 사정하자 마침내 응낙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무도관에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면서 지내기 시작했다.
    아기는 성장하여 소년이 되었다.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머리가 영특하여 글을 깨우침에 막힘이 없었고, 몸이 날래고 기운이 세어 무술을 익힘에 있어서도 재주가 남달랐다.
    그런 소년에게, 이제 여인이 된 처녀는 밤마다 되풀이해 말했다.
    “네 어머니를 죽인 요물에게 복수해야 한다. 그게 네가 사는 이유다.”
    소년은 간절하게 말하는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이모님.”
   
    13.
    소년은 자라나 청년이 되었다. 청년이 열 여덟 살 되던 해의 여름에 여인은 청년과 함께 도읍을 떠나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은 이제 부서진 집들의 잔해 사이로 잡초가 우거지고 그 잔해 아래 깔린 시체는 백골이 되어, 완연하게 폐농으로 변해 있었다. 한낮의 햇볕이 아낌없이 내리쬐는데도 마을에는 어딘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고, 새도 벌레도 울지 않았다.
    여인은 청년을 데리고 그런 마을을 가로질러 뒷산으로 갔다. 움막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지고 없었고, 연인의 무덤 또한 잡초로 뒤덮여 간신히 그 자리를 짐작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여인은 맨손으로 무덤의 풀을 뽑았다. 청년이 서둘러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여인을 도와서 풀을 베었다. 무덤을 정리하고 나서 여인은 말했다.
    “여기가 네 어머니의 무덤이다.”
    여인은 청년과 함께 무덤 앞에서 절했다. 그리고 그대로 앉아서 무덤을 어루만졌다.
    “내가 돌아왔다.”
    청년이 듣지 못하도록, 여인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아직도 나는 네 사람이다.”
   
    14.
    팔월 보름을 기다려 여인은 한밤중에 청년과 함께 계곡으로 갔다.
    십 팔 년 전 그 날처럼, 보름달은 차갑고 희미한 빛을 뿌리고, 사방은 괴괴하였다. 귀뚜라미조차 울지 않았다.
    여인은 기다렸다.
    보름달이 바로 머리 위에 떠올랐을 때, 돌연히 한 줄기 찬바람이 불었다.
    “사람의 몸으로 한밤중에 이 곳에 들어오다니, 보통 배짱은 아니로구나.”
    남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네놈들은 목숨이 두 개씩이라도 된다더냐?”
    달빛 아래에서 갈색 옷을 입은 남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청년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여인 앞으로 나서며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았다. 스릉, 하는 칼울음 소리를 내며 뽑혀 나온 검날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가 다시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여인과 청년이 보는 앞에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겁먹지 말아라.”
    여인이 청년에게 말했다.
    “저 놈은 그저 벌레에 불과하다.”
    그 사이에 갈색 옷을 입은 사내는 여인이 십 팔 년 전에 보았던 그 거대한 지네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지네는 청년에게 덤벼들었다.
    청년이 아무리 몸이 날래고 기운이 세어도, 열 길이나 되는 커다란 지네와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년이 휘두르는 칼은 지네의 다리나 등껍질에 맞아 튕겨나오기 일쑤였고, 지네가 내뿜는 독기를 품은 입김에 청년은 숨이 막히고 점점 기운이 빠졌다.
    녹초가 되어 간신히 검을 짚고 몸을 지탱하는 청년을 내려다보던 지네가 마지막으로 청년을 물어 죽이기 위해 입 대신 달린 집게를 크게 벌리고 고개를 숙여 맹렬하게 다가왔다. 집게가 막 청년의 허리를 두 동강으로 가르려는 순간, 청년은 남은 힘을 다 하여 칼을 들어올려서 지네의 더듬이 사이에 꽂았다.
    지네는 몸을 뒤틀고 독기 가득한 입김을 내뿜으며 하늘과 땅이 울리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쓰러졌다.
   
    지네의 독기 어린 입김과 귀청이 울리는 비명에 한동안 멍해졌던 여인과 청년은 곧 정신을 수습하고 지네가 쓰러진 곳으로 갔다. 그 곳에는 갈색 옷을 입은 사내가 목에 칼이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시오들….”
    사내가 목에 꽂힌 칼 때문에 캑캑거리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
    “나는 댁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친 적이 없지 않소….”
    청년이 뭔가 말하려 했으나, 여인이 제지했다. 그리고 땅에 쓰러진 사내의 얼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무런 해도 끼친 적이 없다고?”
    죽어가는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여인이 미소 지었다.
    “나는 저 산 너머 마을에서 왔다.”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여인이 다시 웃었다. 그리고 사내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너를 죽인 자는 네 아들이다.”
    사내가 마지막으로 본모습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인은 사내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완전히 절명한 후에 사내는 서서히 사람 크기 정도의 지네로 변했다. 청년은 지네의 목을 벤 뒤, 배를 가르고 허연 심장을 끄집어냈다. 땅을 파고 지네의 머리를 묻고 나서 청년은 윗옷을 벗어 지네의 심장을 쌌다.
    청년과 여인은 다시 한 번 도읍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네의 심장을 조정에 바치고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아뢰었다. 여인이 몰살당했던 남쪽 마을 지주의 막내딸이며, 여인의 조카가 마침내 요물을 처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정에서는 관직과 봉토 그리고 재물과 함께 여러 명의 노비를 하사하였다. 청년은 관직을 애써 사양하고, 대신 봉토로 폐허가 된 남쪽 마을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청을 받아들였고, 청년은 하사받은 노비들을 이끌고 여인과 함께 남쪽 마을로 향하였다.
   
    15.
    남쪽 마을에 이르러 청년은 하사받은 노비들을 모두 자유민의 신분으로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상민이 된 노비들을 모아놓고 청년은 말했다.
    “나는 이 마을을 재건할 것이다. 나와 함께 할 사람은 남고, 원치 않는 자는 떠나라.”
    달리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라 대부분이 청년과 함께 남았다. 청년은 이들과 함께 무너진 집들을 치우고 백골이 되어버린 시체를 정중하게 장사 지냈다. 그리고 새 집을 짓고 새 논과 밭을 일구었다. 마을은 서서히, 힘들게, 그러나 눈에 띄게 되살아났고, 그 곳에서 청년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며 마을의 지도자로 일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청년은 한 아리따운 처녀를 알게 되었다. 곧 서로 연모하는 사이가 된 청년과 처녀는 그리하여 혼례를 올렸다. 청년의 아내가 아들과 딸을 낳으면서 가세는 번창하였고, 논밭에서 열매 맺은 작물을 거둬들이고 새로 논과 밭을 개간하면서 마을 또한 번창하였다.
   
    여인은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할 일을 찾아서 할 뿐이었다. 청년이 마을 뒷산의 무덤 앞에 제대로 된 비석을 깎아 세웠을 때에도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비석 앞에 오랫동안 앉아서 하염없이 쳐다보며 어루만졌다. 여인이 뭐라고 속삭이는지는 아무도 듣지 못했고, 아무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16.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났다. 여인은 병들어 누웠다. 죽음을 예감한 여인은 이제 더 이상 청년이 아니게 된 남자를 불러다 옆에 앉히고 힘겹게 속삭였다.
    “내가 죽거든, 따로 예를 갖추지 말고…, 입은 옷 그대로 태워서, 마을 뒷산에 뿌려다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유명하다는 의원을 청해 왔다.
    맥을 짚어본 후 의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했다.
    “진이 빠져 기운이 다했으니 쉽게 보하지는 못할 터….”
    “진이 빠지다니요? 그 연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남자가 놀라서 되물었다. 여인은 나이 먹고 쇠약해졌으나 아직 환갑을 채 넘기지 않았고, 마을 지도자의 이모님으로 존경받는 터라 힘들게 일할 필요도 없었다.
    “이모님께서 기운이 다하도록 애쓰실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남자의 질문에 의원은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 몇 가지 처방을 내려주고 떠났다.
    남자는 여인의 병상 옆에 앉아서 물었다.
    “도대체 진이 빠지고 기운이 다하도록 이모님께서 애쓰시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제가 대신 해 드릴 테니 말씀해 주십시오.”
    여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모님.”
    남자가 다시 애원했다. 그러나 여인은 대답 대신 말했다.
    “마지막 부탁이니 제발 들어다오. 내가 죽거든, 이 몸은 씻기지도 말고, 따로 염습도 하지 말고, 입은 옷 그대로 태워서 마을 뒷산, 네 어머니의 무덤가에 뿌려 주련.”
    그리고 여인은 죽었다.
   
    17.
    남자는 여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부모를 모르는 자신에게 오랫동안 단 하나뿐인 혈육이었고 평생 따랐던 어른인데, 마치 연고도 없는 행려병자처럼 아무렇게나 태워서 뿌려버리기가 차마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격식을 갖추어 수의를 구해 오고 장의사를 불렀다.
    염습과 입관을 하는 동안 남자는 망자의 신위를 모시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염습하는 도중에 장의사가 남자를 불렀다.
    “긴히 보여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의사가 청하는 대로 남자는 별채로 따라갔다.
    여인의 시체는 칠성판 위에 누웠고, 예를 갖추어 시신을 씻는 동안에도 가슴과 국부는 흰 천으로 가려 두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벌거벗다시피 한 여인의 시신을 보고 남자는 당황했다.
    “이 무슨…. 대체 뭘 보여준단 말이오?”
    “좀 더 가까이 가서 보시지요.”
    “아니, 그런 망측한….”
    남자는 망설였다. 그러나 장의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계속 바라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남자는 여인의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남자는 보았다. 여인의 양쪽 허벅지, 그리고 배에서 명치 부근까지, 거무스름한 무늬처럼 보이는 것이 가득 퍼져 있었다.
    남자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검은 무늬는 글자였다.
    오른쪽 무릎 바로 위에서 시작된 첫 문장은 이러하였다.
   
    바늘 자국으로 너를 죽였다 바늘 자국으로 죄를 갚겠다
   
    이미 오래 된 문신인 듯, 먹은 이제 검은 색이 아닌 옅은 남빛으로 색이 바래고, 그나마 흐려져서 군데군데 살빛이 드러나 보였다.
    … 그리고 그 뒤로 지네에게 겁간당하여 사내아기를 낳은 일, 그 사내아기를 무도관에 맡겨 무술을 배우도록 한 일과, 청년으로 성장한 아기가 지네를 죽인 일까지, 모든 사정이 거칠고 조잡하게 바늘과 먹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여인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내가 낳은 아이는 너와 나의 아이다
   
    여인의 왼쪽 허벅지에 새겨진 첫 문장은 이러하였다.
    여인의 배 위쪽, 명치 부근에 새겨진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났다.
   
    너를 위해 살았고 너를 향해 죽겠다
   
    그리고 왼쪽 젖가슴 바로 아래에,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미처 다 스며들지 못한 먹이 여전히 조금씩 배어나오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애 련 아
   
    18.
    남자는 멍하니 서서 여인이 스스로 몸에 새겨놓은 이야기를 읽었다. 그 사이에 장의사는 눈치 빠르게 조수들을 데리고 별채를 나갔다.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별채에는 여인의 시신과 남자 단 둘 뿐이었다.
    남자는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 반라의 시신을 덮었다. 그리고 여인의 시체가 누운 칠성판 옆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차갑게 식은 여인의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어머니.”
    남자가 속삭였다.
    “어머니….”
    남자가 흐느꼈다.
   
    19.
    여인의 시신은 간소하지만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연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남자는 봉분에 새로 씌운 뗏장이 자리를 잡고 무덤 옆에 새로 심은 어린 나무가 뿌리를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어머니의 무덤에 잔디가 푸르게 자라고 어린 나무에 물이 오른 초여름 어느 날에 남자는 이미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한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만 남기고 홀연히 마을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남자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바람결에조차 이후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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