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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햇혈

2008.10.31 23:5010.31

햇혈

 


 “저어…… 햇혈 파신다는 분 맞죠?”
 대낮에 선글라스, 마스크, 거기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까지 쓰고 체크무늬 숄에 형광 초록 점퍼에 아주 그냥 중무장을 하셨다. 상가 건물 현관 쪽 그늘지고 음습해 보이는 데에 쭈그리고 앉아 있더니 나를 발견하자마자 쭈르르 달려와 쭈뼛거리며 묻는 게, 과연 뱀파이어답다. 이 족속들은 도대체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쉽게 죽지도 않을뿐더러 솔직한 말로 죽이려고 해도 잘 안 죽는 주제에 뭐 그렇게 세상 천지에 무서운 게 많은 건지. 달도 뜨지 않은 그믐날 새벽에 거래를 할 때도 많은데 등 뒤로 스쳐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에도 소스라치는 20대 한국 여성인 나보다도, 어둠 사이로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뱀파이어 고객 여러분이 훨씬 더 겁에 질려 있기 때문에 난 좀 한심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도대체가 그쪽이 포식자 아닌가 말이다. 뭐, 남의 목을 허가 없이 물지 않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햇혈 같은 걸 구입하는 입장이겠지만. 여튼간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지하주차장 기둥 뒤에 숨어 모기만한 목소리를 내어 나를 불러대는 걸 볼 때면 등짝을 냅다 후려치면서 ‘어깨 좀 쭉 펴! 살 날이 구만리잖아, 당신!’ 하고 고함이라도 쳐 주고 싶다.
 “저어……?”
 거두절미하고.
 “네, 맞습니다. 고객님. 시간에 잘 맞춰 오셨네요.”
 나는 길거리에서 캔커피를 나눠주며 설문지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하는 나레이션 걸처럼 방긋 웃었다. 그리고 반색하는—아니 사실 마스크 때문에 반색을 했는지 실색을 했는지 알게 뭐냐만 시커먼 선글라스 너머로 ‘이제 살았다’ 하는 환희의 빛이 완연한—뱀파이어 고객을 향해 베스킨라빈스 상자를 활짝 열어 보였다.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아무렇게나’ 담긴 ‘가족의 정성이 듬뿍! 햇혈’이 가지런하게 드러누워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난 알 수 있다. 그야 담은 게 나니까. 도대체 피에 가족의 정성이 들어가면 그게 뭐가 된다는 건지 난 이따금 대단히 궁금하지만 상품이란 건 아무튼간에 잘 팔리고 문제 안 생기면 그걸로 만사 오케이. 내 알 바가 아니다.
 “전자레인지에 2분 30초 돌려 드세요. 3분 돌리면 안 되니까 주의하시구요, 돌릴 때는 봉투 뜯지 말고 전자레인지 전용 그릇에 담아서 돌리셔야 해요. 그럼 안녕히 가시고 또 이용해 주세요.”
 “감, 감사합니다!”
 몸을 하도 열렬하게 굽실거린 덕분에 콧잔등으로 약간 미끄러져 내린 짙은 색 선글라스 너머로 드러난 초록색 눈동자가 감격에 차서 웃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또 한 마리의 가엾은 뱀파이어를 살렸다. 아, 뿌듯하다. 멸종생물을 돌보는 것 같은 이 넘치는 충족감. 이것 때문에 그 거지 같은 사장님을 모시고 달랑 세 명이 운영하는 ‘햇혈닷컴’에서 일년 칠 개월 째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오, 미스 진. 잘 다녀 왔나?”
 “잘 다녀 왔는데요. 사장님, 저거 뭐예요?”
 “뭐?”
 바로 그 '거지 같은 사장님'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방글방글 웃길래 모가지를 그대로 180도 비틀어 버리려다가 참고 그의 등 뒤쪽을 가리켜 주었다.
 “저거요, 저거. 왜 냉장고 코드가 뽑혔죠?”
 “아아, 저거? 하하하하하.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전기를 아껴 써야지. 안 그런가, 미스 진?”
 “무슨 헛소리예요? 이 망할 사장님아! 피 다 굳는 꼴 보려고 그러세요?”

 철썩!

 “하하하하하. 아니 그게, 지난 달 운영비도 적자길래 한 푼이라도 아껴 보려고 그랬지. 하하하하하. 미스 진, 월급도 얼른 올려 줘야 할텐데. 하하하하. 아이고, 이거 우리 미스 진은 손도 맵지.”
 뺨을 얻어 맞고도 사장님의 사람 좋은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거야말로 내가 이 회사를 관둘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다. 내가 빨리빨리 발견해서 코드를 꽂아 주고 관리해 줘야지 신선한 혈액을 지켜서 오늘도 내일도 배 고픈 뱀파이어의 복지에 일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거, 그냥 코 꿴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닥쳐 줄래? 신입?”
 일주일 전에 사장님께 우격다짐으로 채용 당해 영업 및 배달용 차량(21년 된 티코. 빨간색) 운전을 맡은, 전직 철가방 이철현 군(만 18세. 고교 중퇴. 아이돌 지망생)도 이런 나의 넘치는 휴머니즘을 조만간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힘내자, 햇혈닷컴! 아자아자 파이팅! 다음달부터 G마켓과 옥션에도 진출하려면 얼른 서버도 증설하고 냉장고도 늘려야지.
 아, 비밀 한 가지.
 사실은 햇혈을 전자레인지에 돌릴 때 1분만 돌려 섭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좀 지나치게 차갑고 날 것 느낌이 생생해서 맛은 별로라는 모양이지만. 아무튼 이건 현역 뱀파이어이자 지상 최강의 게으름뱅이인 우리 사장님의 임상실험으로 알아낸 결과이므로 전국 햇혈 소비자 여러분께서는 모쪼록 참고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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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배명훈 08.11.02 11:01 댓글 수정 삭제
    엇,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돌아오셨군요. 이제 어디 가지 마세요. 저 감칠맛 나는 첫 문장이 반갑기 그지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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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T 08.11.02 23:49 댓글 수정 삭제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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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쾌한 단편이네요.^^
  • No Profile
    임태운 08.11.22 19:43 댓글 수정 삭제
    서사가 좀 더 있었다면 아이디어가 활개칠 공간도 더 넓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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