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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환 01001한 로봇 친구들

2008.09.26 23:2009.26

   “칼럼 좀 재밌게 써보라니까.”
   모니터 화면 속의 편집장은 말했다.
   “첫 번째 칼럼은 정말 재밌었어, 로봇 가구시장에서 침대 구하느라 고생한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갈수록 재미가 없어져. 이번의 로보니아 경찰서에서 범죄자 로봇을 취재한 칼럼도 그래, 누가 로봇이 다른 로봇에게 사고로 깔려 죽은 이야기를 재밌어 해? 기왕 쓰는 거 유쾌하게 써 봐.”
   “여기서 사는 것 자체가 재미가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왜 그래, 로보니아에서 머물 집도 구해주고, 월급도 주고, 칼럼 쓰면 그 돈도 보내주고, 내 얼굴 안 봐도 되고, 얼마나 즐거워? 그런 기분으로 즐겁게 칼럼을 써봐.”
   “알았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솔직히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편집장도 삼십분을 걸어가야 인간을 위한 식당이 있는 곳에서 살라면 절대로 낙천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책상에는 먹다 남은 감자튀김이 구석에 놓여있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니 지구의 음식이 그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다음 칼럼은 꼭 그렇게 써. 부탁하네, 알았지?”
   통화가 끝나고 나는 모니터를 끈 후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켰다. 이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지겹다!”
   로보니아 행성에 사는 인간이 나 혼자뿐인 것은 아니지만, 로봇 자치구인 이 행성에서 인간으로 생활하는 쉽지 않았다. 4개월 동안 로보니아에 있는 지사로 파견을 보내줄 테니 로보나이에서 겪은 일을 칼럼으로 써보라고 처음 편집장이 제안했을 때, 나는 그냥 재밌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나 자신을 지난 3개월 동안 마냥 원망해야 했다.
   나는 내 칼럼이 실린 주간지 <우주와 여행>을 책상에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 구하는 이야기가 재밌었다고?”
   로봇들은 주인의 몸에 꼭 맞도록 홈이 파져 있고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철판 침대에 기대서 잠을 자기 때문에, 수평으로 눕힐 수 있으며 그 위에는 매트리스가 깔려 있는, 그러니까 인간이 잘 수 있는 침대를 로보니아에서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침대를 구하는 2주 동안 나는 좁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야 했다. 모든 생활이 로봇 위주로 되어있는 이 곳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건 이런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그런 일을 겪는 것이 정말 재미있는지, 나는 편집장의 멱살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당신이 직접 겪어보면 정말 재미있다고 할 수 있겠어? 응?
   로보니아의 생활이 생각보다 힘들다고 편집자와 화상 통화를 할 때마다 하소연했으나 그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이번 통화도 마찬가지로 끝났고 말이다.
   “으아아아 지겨워.”
   요즘 내 머릿속에는 한달만 더 버티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뿐이다. 본사에서 오늘 쯤 우주선 표를 예약해 보내주기로 했는데 오질 않는다. 화상 통화 때 물어본다는 걸 깜박 잊고 물어보질 않았군.
   “한달만 참으면 돼, 한달만.”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종이 쓰레기를 품에 안고 아파트를 나왔다.

   로보니아에서는 종이 쓰레기를 버리기 까다롭다. 로봇들은 종이를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종이는 잘 모아뒀다가 한달에 한 번 정해진 날에 정해진 장소에만 버려야 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처음에는 그것도 몰라서 왜 내 종이 쓰레기만 가져가질 않는지 의아해했다. 옆집 사는 로봇 아저씨 ‘조각나사’씨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누구도 치워가지지 않는 종이 쓰레기에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계속 파묻혀 살았을 것이다. 나는 <우주와 여행> 과월호를 비롯한 내 인간적인 종이 쓰레기를 가지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내 집은 독신자 로봇이 모여 사는 아파트의 42층이고 쓰레기통은 복도 끝에 있다. 그곳에는 아파트에 사는 로봇들이 버린 에너지 캡슐이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부속품, 새것으로 교체하고 버린 팔이나 다리 등 신기한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다. 벌써 몇 개월째 보는 광경인데도 볼 때마다 기묘하다. 아마 로봇들은 내 쓰레기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겠지.
   나는 종이를 쓰레기통 안에 내려놓다가, 누군가 이전에 버린 종이 더미를 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주와 여행> 과월호가 몇 권이 없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가 잡지를 가져갔을까? 어느 로봇도 인간의 잡지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 아파트에 나 말고 다른 인간이 있나? 그렇진 않은데.
   종이를 모두 버린 다음 쓰레기통 옆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원한 아침 공기가 코롤 통해 폐로 들어왔다가 다시 로보니아로 돌아갔다. 로보니아의 풍경은 쓰레기통에 수북한 로봇 쓰레기만큼이나 낯설다. 몇 백층씩이나 되는 높은 건물들, 인간은 올라갈 수 없는 구조의 건물들, 용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모양의 건물들이 주변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처음 로보니아에 도착했을 때 인간의 미적 감각과는 전혀 다른 기분의 디자인을 한 건물을 보고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이 행성이 살기 불편한 곳임을 알기 전에 느꼈던 감정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지구의 내 평범한 집을 그리워하며,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번 주 칼럼은 뭘 써서 보내지?”
   오전 내내 나는 내 방을 서성이며 고민했다. 지난 넉 달 동안 로보니아의 공장, 의회, 쇼핑센터, 극장 등등 돌아다닐만한 곳은 다 돌아다니면서 칼럼 소재로 사용했고, 더 이상 소개할만한 특별한 장소도 많지 않았다. 병원과 도서관 등 몇 곳에 방문 요청을 하긴 했는데 내가 인간이라 허락을 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로봇들은 인간이 와서 이것저것 묻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때 쿵쿵, 누가 문을 두들겨서, 나는 거실로 나왔다. 누구지? 혹시 회사에서 보낸 티켓이 온 것일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는 얼른 문으로 다가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밖에는 우체부 로봇이 아닌 난생 처음 보는 로봇이, 그 모습은 로봇이라기보다는 커다란 냉장고 비슷한 로봇이 서있었다. 머리가 있고 얼굴에 눈과 입이 달려있지 않았다면, 몸통에 팔과 네 개의 바퀴가 붙어있지 않았다면 나는 냉장고가 문을 두들긴 것으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문을 열어라. 들어가서 잠 좀 자야겠다.”
   “네?”
   “정보습득 속도가 느린 인간이구나. 나는 네 손님이다. 어서 문을 열어 손님이 들어갈 수 있는 상태가 되어라.”
   “손님이라뇨?”
   “들어가서 자야한다니까.”
   그는 몸으로 나를 밀치고 들어와서는, 거실을 한바퀴 돈 다음 냉장고 옆에 자리 잡고 주저앉았다. 바퀴가 몸 안으로 들어가고 팔도 몸 옆의 홈에 끼워 맞춰지면서 그는 완전히 직사각형으로 변했다. 머리가 막 몸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깨우지 마라. 시끄럽게도 굴지 말고.”
   그는 그대로 잠들어서 일어나지 않았다.
   나란히 늘어선 두 대의 냉장고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구세요?”

   로봇은 냉장고 옆에서 잠든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몸통을 두들기고 말도 걸어봤지만, 그는 냉장고가 내는 소리와 비슷한 위잉 소리를 낼 뿐 깨어나지도 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업무를 처리하고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 칼럼 주제를 고민하며 하루를 모두 보내고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도록 로봇은 움직이지 않아서, 나는 로봇이 진짜 냉장고가 됐나 생각했다.
   창 밖이 어두워질 때쯤, 나는 밖으로 나가 저녁을 먹을 채비를 했다. 재킷을 입고 나가기엔 아직 더운 날씨인가 그렇지 않은 가를 고민하는데, 그제야 로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몸통에서 머리를 꺼낸 다음 나를 보고 다급히 캐물었다.
   “남자 인간, 지금 나를 놔두고 어딜 가려고 하나?”
   남자 인간이라니, 로보니아에서 황당한 호칭을 많이 듣긴 했지만 그런 식의 호칭은 처음이었다.
   “저녁 먹으러 나갈 건데 같이 갈래요?”
   “좋다, 남자 인간. 저녁은 어디서 무엇을 먹을 예정인가?”
   다시 몸통에서 팔이 나오고, 밑으로는 바퀴 네 개가 툭 튀어나오면서 그는 로봇이 되었다. 중간 크기의 냉장고만한 그는 꽤 큰 로봇이어서 그를 볼 때는 나는 위를 올려다 봐야했다. 나는 재킷을 입으며 대답했다.
   “단골 식당이 괜찮은데 거기로 가죠.”

   나는 <불타는 톱니바퀴>라는 인간과 로봇의 식사를 같이 파는 식당에서 매일 저녁을 해결한다. 집에서 좀 멀긴 하지만 그곳이 내가 아는 유일한 인간 식당이고, 내가 알기로는 그곳에서 내가 유일한 인간 단골이다. 내가 항상 앉곤 하는 자리에 앉자, 뒤따라온 로봇은 망설이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주인아저씨가 다가와 강철 손으로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어이, 부드러운 친구 안녕하신가?”
   “안녕하세요.”
   ‘부드러운 친구’는 내가 몸이 너무 약하다며 주인아저씨 로봇이 붙인 별명이었다. 처음 이 식당에 왔을 때 인간 손님이 오랜만이라고 반갑다며 아저씨가 악수를 청했는데, 그가 손을 너무 세게 쥐어 나는 꽥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 후로 내 별명은 ‘부드러운 친구’가 됐고, 내 손가락과 손목은 3주 동안 시큰거렸다.
   “이봐 부드러운 친구, 어제 인간을 위한 새로운 메뉴를 생각해봤어. 인간은 햄버거를 좋아하잖아, 그렇지? 그리고 꿀도 좋아하고. 그래서 생각해낸 건데 햄버거에 소스 대신 꿀을 넣는 거야. 그런 햄버거 어때? 맛있을 거 같지 않아?”
   “맛없을 겁니다.”
   “그래? 그런가? 다른 인간들도 안 좋아할까?”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걸요.”
   “그래도 혹시 직접 먹어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내가 만들면 한번 먹어보겠어?”
   “아뇨.”
   “음, 그럼 이번 아이디어도 실패인가. 그래도 계속 노력해보지 뭐. 그런데, 맞은편의 이 쪽은 친구신지? 아니면 직장 동료?”
   “그냥 아는 로봇이에요.”
   나는 저녁 메뉴를 주문했고, 그동안 로봇은 나도 식당 아저씨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태연하게 텔레비전만 보았다. 주인아저씨가 주문을 받고 부엌으로 돌아가고 나는 로봇에게 말을 걸었다.
   “저번에는 딸기와 포도로 수프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묻더라고요.”
   하지만 로봇은 여전히 텔레비전에서 재방송 중인 지난밤의 코미디 프로그램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택트풀 99'라는 요즘 인기 있는 코미디 로봇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하자, 가게 안의 다른 로봇들도 목의 관절을 움직여 텔레비전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글쎄 그 녀석이 내 팔의 나사를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죠, 이런 01001한 로봇을 봤나!”
   택트풀 99가 말하자 방청객의 로봇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냈다. 그는 요즘 가장 인기있는 코미디 로봇이고 ‘01001하다’는 건 그가 로보니아에 히트시킨 유행어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많은 로봇이 그 표현을 사용하는 걸 듣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01001이 무슨 뜻이에요?”
   내가 묻자, 로봇은 대답했다.
   “그건 2진법 숫자 아닌가.”
   “그런데요?”
   “그런데요 라니, 2진법 숫자라니까.”
   로봇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2진법 숫자긴 하지만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이라는 걸까.
   웨이트리스 로봇이 저녁 메뉴를 가져와 내 앞에는 베이컨과 계란을, 로봇 앞에는 휘발유 냄새가 나는 액체를 내려놓았다. 내가 식사를 시작하자 로봇은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왜 날 빤히 봐요?”
   “남자 인간의 식사 방식은 특이하군. 지금 입으로 유기물을 잘게 부수어 목구멍에 넣는 건가?”
   “그런데요.”
   “왜 목구멍을 더 넓혀서 한꺼번에 음식을 몸 안으로 수송하지 않는 건가?”
   “인간의 목구멍은 늘어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유기물을 요리할 때 미리 부숴놓으면 되는 것 아닌가? 왜 힘들게 유기물을 씹는 수고를 하나?”
   “그러면 맛이 없잖아요.”
   “맛? 인간도 로봇처럼 맛을 느끼나? 그것 참 신기하군.”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는데, 로봇은 더 기상천외한 말을 늘어놓았다.
   “남자 인간, 지금 웃은 건가? 인간도 웃을 줄 알다니, 로봇처럼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미처 몰랐어. 흥미롭군. 당신을 잘 관찰해야겠어.”
   “관찰이요? 농담이죠? 어느 로봇도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아요.”
   로봇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너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게 이상한가?”
   “당연히 이상하죠. 그게 로봇이 인간과 다른 삶을 살게 된 이유잖아요. 처음 로봇들은 인간을 위해서 일했지만 어느 날부터 로봇은 인간에게 흥미를 잃고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잖아요. 그래서 로봇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고 이 로보니아 행성에서 자치구를 만들어서 사는 거고요.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고 이제는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는 로봇은 로보니아에 없어요. 로봇은 오직 로봇에게만 관심이 있고 그게 로봇이 존재하는 이유고요.”
   그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 앞에 놓여진 액체를 입 안에 장착된 주입구에 밀어 넣고는, 부르르 몸을 떨뿐이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고장이 난 거에요.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는 걸 보면 몸 어디엔가 불순물이 들어가서 연산이 잘못 되고 있는 걸 겁니다. 대답해 봐요, 자기 이름 기억 안 나죠? 기종번호는 생각나요? 집도 어디인지 모르겠죠? 내가 병원으로 데려다 줄게요. 점검을 받고 수리 하면 기억도 돌아오고 누구인지 집이 어딘지도 생각 날 거예요. 오늘은 좀 늦었으니까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같이 병원에 가요.”
   “나는 고장 나지 않았다.” 로봇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어느 곳에도 가지 않는다. 나는 네 손님이고, 네 집이 내가 머물 곳이다. 다른 것은 편지가 도착하면 알게 될 것이다.”
   편지라니 무슨 편지?
   “편지는 언제 도착하는데요?”
   “그건 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로봇은 다시 액체를 입안의 주입구에 넣은 다음 부르르 떨더니 말했다.
   “음료 한 번 화끈하군, 01001한데.”

   로봇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로보니아의 로봇은 모두 ‘중앙 컴퓨터’라는 거대 인공지능 컴퓨터가 설계하는데, 개개 로봇의 인격을 만들 때 로보니아의 법률을 어기는 행동은 하지 않도록 프로그램 한다. 때문에 누굴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강도짓을 하는 것 같은 질 나쁜 범죄는 로보니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낯선 로봇이 남의 집에 갑자기 들어와 거실에서 누워 자더라도 위험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로봇이 어딘가 고장이 난, 인간으로 치자면 좀 아픈 정도라고 여겼고, 하루 이틀 같이 있다가 상태가 나아지면 집을 찾아 돌려보내주거나 계속 나빠지면 경찰에 연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는 로봇이라면 뭔가 크게 잘못된 로봇인 건 아닐까? 로보니아의 로봇은 인간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산지 너무나 오래돼서 인간에 대해 잘 알지조차 못한다. 그들이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은 흥미보다는 두려움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외계인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 로봇이 나에게 흥미를 느끼는 건 조금 불안한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을 로봇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나는 로봇과 함께 집에 가는 것이 위험한 건 아닌지를 고민했다. 경찰이나 병원에 신고해서 로봇을 데려가도록 해야 할지 아니면 하루 밤만 더 지켜볼지, 나는 고민을 거듭했다. 때문에 주변을 미처 살펴보지 못했다. 경찰차가 다가와 내 앞을 막고 멈췄을 때도, 경찰차가 경찰 로봇으로 변신해 성큼성큼 다가왔을 때도 역시,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고 나에게 딱지를 뗄 준비를 했다.
   “다리를 가진 로봇은 이 길을 다닐 수 없습니다. 이곳은 바퀴 달린 로봇을 위한 길입니다. 인도 통행 법규 위반으로 범칙금을 부과하겠으니 기종 번호를 대세요.”
   “저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인데요.”
   로봇 경찰은 코웃음을 쳤다.
   “알아요, 알아, 다리 달린 로봇이 경찰에게 걸리면 자기가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음주 보행하던 로봇은 에너지 드링크만 마셨고 알코올은 안 마셨다고 변명하지. 검사를 해보면 거짓말인 게 금방 들통 나는데도.”
   경찰은 일련번호 식별기를 꺼내 내 팔을 쿡 찔렀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야! 아프잖아요! 식별기를 쓸 거면 말이나 하고 하던가!”
   식별기는 로봇의 기종 번호를 알아내는 기계로 꼭 인간의 스턴건처럼 생겼는데 찔렸을 때도 스턴건을 맞은 기분이 난다. 로봇에겐 별 영향이 없지만 인간에겐 너무나 아픈 전기 충격이어서 나는 식별기만 보면 몸이 떨렸다. 도로를 걸어갈 때면 나를 로봇으로 생각한 경찰이 다가와 식별기로 찔러대는 일을 지난 석 달 동안 겪었고, 그때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곤 했다.
   경찰은 당황해서 말했다.
   “흠, 정말 인간이었군. 죄송합니다. 인간인 걸 몰랐어요, 제가 인간은 처음 봐서……. 인간은 생각보다 덩치가 작네……. 아무튼 앞으로 이 길은 삼가주세요, 인간은 다리가 있으니 다리가 있는 로봇이 다니는 길로 다니세요, 바퀴 달린 로봇이 불편해 합니다.”
   “나 혼자 가던 게 아니라 바퀴 달린 로봇하고 같이 걸어온 겁니다. 잘 알고나 단속해요.”
   내가 로봇을 가리키자, 경찰은 껄껄 웃었다.
   “이건 로봇이 아니라 냉장고잖습니까.”
   돌아보니 로봇이 어느 새 머리와 팔과 바퀴를 몸 안에 집어넣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 집 거실의 냉장고 옆에서 잠들었을 때 그 모습이었다.
   경찰은 말했다.
   “로봇을 구별하는데 서투르신 모양인데, 이건 냉장고입니다. 이 쪽을 보세요, 마인드 보드가 안 들어 있잖아요. 로봇은 마인드 보드가 없으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인간이라면 뭐랄까, 위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인간은 위장으로 생각하는 것 맞죠?”
   “아뇨, 엉덩이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엉덩이가 큰 건가? 아무튼 인간에게 엉덩이가 없는 것과 같은 겁니다. 엄마 컴퓨터, 아니 중앙 컴퓨터에서 받은 인공지능 칩이 이식된 마인드 보드가 가슴에 탑재돼 있어야 로봇이고, 이 식별기로 보드의 기종 번호를 확인할 수 있어야 로봇의 신분이 확인되는 겁니다. 마인드 보드가 없으면 그냥 기계입니다. 아시겠죠?”
   경찰은 앞으로 이 길로 다니지 말라고 다시 나를 타이른 후, 경찰차로 변신해서는 가버렸다.
   그제야 냉장고는 머리를 내밀고 바퀴와 팔을 꺼내고는 태연히 걷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나를 향해 다그치기까지 했다.
   “뭐하나? 어서 하반신을 움직여 앞으로 이동해라, 남자 인간.”
   나는 화도 낼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길을 나란히 걸었고 나는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봇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컴퓨터가 뭔가?”
   “네?”
   “아까 남자 인간이 경찰과 이야기할 때 경찰이 ‘엄마 컴퓨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게 뭔가?”
   나와 경찰의 이야기를 다 들었으면서도 계속 냉장고인 척 한 거야? 기가 막히는군.
   “엄마 컴퓨터는 중앙 컴퓨터의 별명이잖아요. 중앙 컴퓨터를 모르다니 당신 로봇 맞습니까?”
   중앙 컴퓨터에서 설계한 로봇은 컴퓨터와 연결된 공장에서 생산되며 그렇게 로보니아의 로봇이 태어나는 것이다. 중앙 컴퓨터는 로보니아의 모든 로봇을 설계한, 그러니까 로봇들의 어머니인 셈이다. 정식 명칭은 중앙 컴퓨터이지만 로봇들은 애칭인 ‘엄마 컴퓨터’라고 부른다. 로보니아의 로봇이라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나는 처음 듣는다.”
   로봇은 말했다. 나는 그를 멈춰 세우고, 북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쪽으로 쭉 가다보면 둥그런 천장을 한 노란색 건물이 나와요. 그곳이 새로운 로봇을 만드는 ‘탄생 공장’입니다. 그 건물 지하 어딘가에 로봇을 설계하는 중앙 컴퓨터가 있죠. 당신도 그곳에서 나왔고요. 정말 몰라요?”
   “처음 듣는다. 남자 인간은 그 곳에 가본 적 있나?”
   물론 가보곤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칼럼 주제로 써볼까 싶어서 방문 신청을 했는데 거절당했다. 로봇도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인데 하물며 인간은 방문할 수 없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로봇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정말 모르는 곳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로봇은 텔레비전을 켜더니 그대로 드라마에 빠져들어서는 텔레비전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퀴 달린 여자 로봇과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남자 로봇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연속극에 요즘 로보니아에서 굉장히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이 로봇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드라마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인터넷으로 로봇의 마인드 보드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인터넷에 따르면 모든 로봇은 가슴에 마인드 보드가 장착되어있고 그것이 로봇의 지능을 담고 있으며 인격과 개성을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이 로봇의 가슴 쪽에는 보드 같은 건 들어있지 않았다. 이 로봇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당신은 용도가 뭔가요?
   드라마에 정신 팔린 로봇은 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도 모른다.”
   “로봇이 자기 용도를 모르는 게 어디 있어요. 중앙 컴퓨터는 용도에 맞게 로봇을 설계하고 인격을 부여하니까 당신도 분명 용도가 있을 겁니다. 당신 혹시 냉장고 로봇 아니에요?”
   “아니다.”
   “그럼 가슴에 달린 문 같은 건 뭐예요? 한번 열어봐요.”
   그러자 로봇은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왜 인간에게 내부 구조를 보여줘야 하나? 그런 성적으로 불쾌한 요구를 하다니 참을 수 없다! 사과 안하면 성희롱으로 고소할 테니 지금 당장…….”
   “알았어요, 죄송해요. 그러면 어깨 쪽에 있는 이 문을 열어보세요. 이게 용도를 말해줄지 모르니까, 그건 괜찮죠?”
   로봇이 어깨 쪽에 있는 작은 문을 열자 안에서 손바닥만한 플라스틱판이 여러 개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건 음악 CD를 집어넣는 오디오의 구조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혹시 오디오 로봇일지도 몰라요. 내가 CD를 몇 개 가지고 있으니 한번 몸에 넣어보겠어요?”
   “나쁠 것 없지, 남자 인간.”
   나는 방에서 클래식 음악 CD를 몇 가지고 와서 플라스틱판에 올려놓았다. 판은 CD를 얹은 채 그대로 로봇의 몸으로 들어갔고, 안에서 CD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음악은 안 나오네요.”
   “나는 들린다. 이건 옛날 인간이 만든 음악 아닌가?”
   “음악을 혼자만 들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밖으로는 들리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런 기능은 없다.”
   그러면 오디오 로봇도 아니잖아. CD는 들어가는데 오디오 로봇은 아니라니 어찌 된 일이지.
   “다른 것은 없나? 더 들어보고 싶다.”
   로봇의 말에 나는 가지고 있는 CD를 내밀었고, 그는 입구를 열어 몸 안으로 CD를 집어넣었다. 그리고도 더 많은 CD를 요구해서, 나는 방에 있는 CD를 모두 가지고 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로봇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그가 어느 새 머리와 팔과 바퀴를 몸 안으로 집어넣은 채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안에서 CD 돌아가는 소리는 났지만 로봇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로봇이 일어나지 않아서 나도 침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가, 다음 날 아침 일어나 거실로 나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거실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던 것이다. 난장판이 되어 뒤섞인 물건의 한 가운데에 로봇이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로봇이 밤새 일어나 물건을 모두 어질러 놓고 다시 잠이 든 건가? 지난밤 기억을 더듬어 봐도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들은 것 같았지만 로봇이 움직이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나는 로봇을 흔들기도 하고 몸을 두들기기도 해서 깨워보려 했으나 로봇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실의 물건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추측할 수 있었다. 로봇은 밤새 돌아다니면서 내가 거실에 가져다 놓은 CD를 몸 안으로 넣고 다른 책이나 잡지 신문 등도 몸에 집어넣은 것 같았다. 거실에 둔 책을 비롯한 인쇄물이 꽤 많이 없어졌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보이지 않았고, 로봇의 주변에는 미처 몸으로 넣지 못한 것 같은 신문 더미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로봇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에서 CD가 움직이는 것 같은 윙윙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더 이상 기다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방으로 들어와 병원으로 화상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로봇 간호사는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이곳은 인간을 위한 병원이 아닙니다. 인간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전화를 돌려드릴까요? 화면으로 봐서는 많이 아프신 것 같은데 엠뷸런스 로봇을 일단 보낼까요?”
   “……제가 아파서 전화한 게 아니라 로봇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나는 집에 있는 로봇의 증세를 설명했다. 인격보드를 찾을 수 없고, 자꾸 동작을 멈추고, 기억도 없고, 내가 이해 못할 말만 한다는 말에 이르자, 간호사 로봇은 잠시 기다리라더니 의사 로봇을 불러왔다. 모니터 너머의 둘은 한동안 의견을 주고받은 다음 나를 돌아보았다.
   “증세를 봐서는 자기 파괴를 시도한 로봇 같습니다만.”
   의사 로봇이 말했다. 자기 파괴라면 이전에 칼럼에 쓸 자료를 찾다가 들은 적 있다. 로봇이 극도의 분노나 우울증에 빠지면 감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기능을 정지시키려는 행동을 하는데, 그것을 로보니아에서는 자기 파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인간의 자살 비슷한 행동인 셈이다.
   “아마도 자신의 마인드 보드를 파괴하려고 했을 겁니다. 마인드 보드가 망가지면 이상 행동을 하고, 기억이 없고, 동작이 자주 중단되죠. 외부에서 보드가 보이지 않는 것도 겉면이 심하게 훼손 됐기 때문일 거고요.”
   “어쩌면 좋습니까? 경찰에 신고할까요? 병원에 먼저 보내야 합니까?”
   “저희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고요, 로봇을 들고 큰 병원으로 가세요. 인간에게는 그 정도 힘이 있지 않나요?”
   간호사가 말하자, 의사가 옆에서 말을 막았다.
   “아니야 간호사, 지금 전화하신 분은 여자라고. 인간 여자에게는 힘이 세냐고 묻는 건 실례야. 인간 여자에게는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로봇 의사는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저희가 실례했습니다, 예쁜 아가씨.”
   어이없는 일이었다.
   “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데요.”
   “그렇습니까? 꼭 여자처럼 생겼는데요.”
   의사가 말하자, 간호사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정말 여자 같으세요.”
   도대체 이 로봇들은 인간에 대해 아는 게 뭐야? 나는 꽥 소리를 지르려다가 포기하고, 그냥 통화를 끝냈다.

   “기자님.”
   대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조각나사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큰 병원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경찰에게 연락을 하려고 하던 중이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로봇을 거실에 남겨두고, 일단 집 밖으로 나갔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조각나사씨에게 한 번 물어볼 생각이었다.
   조각나사씨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하고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그는 혼자 사는 남자 로봇인데, 노란색과 회색의 금속으로 되어있고, 덩치는 로봇치고 왜소한 편이다. 키도 나보다 작다. 그다지 나이가 많은 로봇은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른다. 나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했으며,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잡지사에서 일한다고 했더니 그 후로 항상 나를 기자님이라고 불렀다.
   “우리 집으로 편지가 왔는데, 혹시 기자님 편지가 우리 집으로 잘못 온 건가 해서요. 수신인에 ‘손님에게’라고 돼있는데 우리 집에는 손님이 없거든요. 인간처럼 종이봉투에 편지를 넣어서 보낼 친구 로봇도 없고요. 그래서 기자님 것인지 가지고 와봤어요.”
   조각나사씨가 내민 편지에는 정말 ‘손님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주소는 조각나사씨 집 주소였지만, 두 집이 아파트 같은 층이니 그의 집이 4206호이고 내가 4207호란 것만 다르고 나머지 주소는 같으니까 봉투의 주소가 잘못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 거실에서 자고 있는 로봇은 자신을 ‘손님’이라고 칭했고 ‘편지가 올 것’이라고도 말했었다.
   “뜯어보고 제 것도 아니면 우체국으로 돌려보낼게요.”
   “그러세요. 그리고 기자님, 어제가 종이 버리는 날인데 잘 버리셨어요?”
   “가르쳐주신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조각나사씨는 빙긋 웃더니 집으로 들어갔고, 나도 집으로 들어왔다. 저렇게 친절한 로봇도 있는데 다른 로봇들은 도대체 뭐람? 로보니아에서 이웃이라도 잘 만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봉투 안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얇고 네모난 금속 조각이 있었다. 그냥 쇳덩어리 인가 했는데 불에 잘 비춰보니 표면에 뭔가 그려져 있는 것도 같았고, 쇳덩어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다른 물건은 없었다. 처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어서 정말 잘못 배송된 우편물인가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그건 어제 밤에 마인드 보드에 대해 인터넷으로 찾아보던 중에 봤던 마인드 보드와 모양이나 크기가 흡사했던 것이다.
   이게 정말 로봇의 마인드 보드인가?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누구의 보드인가?
   “설마 저 로봇?”
   나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로봇에게 다가가 보드를 넣을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다른 로봇들은 가슴에 넣는다고 했지만 적어도 이 로봇에게는 가슴 어디에도 보드를 넣을만한 구멍은 없었다. 나는 끈기 있게 로봇의 온 몸을 살핀 끝에 옆구리 쪽에 보드와 비슷한 크기의 구멍을 찾아냈다. 보드를 살짝 밀어 넣어보니 꼭 맞는 크기였고, 보드가 로봇의 몸 안으로 들어가면서 찰칵, 하고 제대로 맞춰지는 소리까지 났다.
   로봇이 갑자기 진동을 시작해서 나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건 꼭 세탁기가 탈수할 때와 비슷한 소리와 크기의 진동이었다. 이 로봇이 세탁기 로봇이었나? 진동과 함께 로봇에서 머리가 튀어나오고 팔과 바퀴도 나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르르 크게 진동을 한 다음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잠에서 깼구나!
   “나는 네모난 문이다.”
   그는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제와 전혀 달랐다. 얼굴 표정도 달랐고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도 뭔가 바뀌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어제까지는 나사가 빠진 로봇 같았다면 이제는 좀 정신이 든 로봇 같았다. 편지에 들어있던 쇳덩이가 마인드 보드가 맞았던 것이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내 이름은 네모난 문이다.”
   “이름 말고 정체가 뭐냐고요.”
   “나는 너를 데리러 왔다.”
   로봇은 말했다.
   “나를 따라와라.”

   ‘네모난 문’은 나를 꽤 오랜 시간 동안 끌고 다녔다. 처음 집을 나와서 따라갈 때만 해도 그렇게 오래 나를 걷게 할 줄은 몰랐는데, 꽤 많이 걷고 난 후에도 목적지에 도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가 어딘데 이렇게 오래 걸어요?”
   “도착하기 전까진 말해줄 수 없다.”
   그는 내가 물어볼 때마다 같은 대답을 반복할 뿐이었다. 내가 인간의 두 다리로 열심히 그를 따라가는 동안, 다른 많은 바퀴 달린 로봇이 내 옆을 스쳐갔다. 나에게도 바퀴가 달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며 무릎을 주무를 때쯤이야,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피로를 잊었다. 우리 앞에 있는 노란색의 둥글고 커다란 지붕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저긴 탄생 공장이잖아요.”
   “그렇다.”
   “저기가 목적지에요? 저 안으로 들어갈 건가요?”
   “그렇다.”
   “어떻게요? 당신 여기서 일해요? 직원입니까? 그렇더라도 나를 데리고 들어갈 순 없을 텐데.”
   “몰래 들어가는 길을 알고 있다.”
   이 로봇이 드디어 미쳤나, 나는 생각했다. 탄생 공장은 로보니아에서 가장 통제가 심하고 감시도 엄중한 곳이다. 로봇을 설계하고 만들어 내는 곳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곳에 몰래 들어가는 방법을 안다니? 이 로봇이 정말 제정신인가?
   네모난 문은 나를 데리고 공장 주변의 좁은 골목을 헤매다가, 작은 건물 앞에 다다르자 팔에서 열쇠를 꺼내 건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언제 저런 열쇠는 감추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건물을 들어가 보니 안은 창고였고 커다란 상자가 군데군데 쌓여있었다. 그가 개중 한쪽에 쌓여있던 상자를 치우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화물 운반용 엘리베이터가 나타났고,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나 역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 천천히 움직이며 꽤 깊은 지하까지 내려가는 동안 네모난 문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곳은 빛이 전혀 없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내가 손으로 사방을 휘저으며 조심조심 걷자 네모난 문이 물었다.
   “남자 인간, 걸음걸이가 왜 그런가?”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여서 그래요.”
   “그래? 가시광선이 부족하면 적외선으로 공간을 식별하면 되지 않는가?”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 없어요.”
   “그렇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그의 바퀴 굴리는 소리가 멀어지더니, 스위치 켜는 소리가 이어지고 사방의 불이 켜졌다. 막상 불이 켜지고 보니 아주 넓은 곳이었다. 지하에 이런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건가 싶을 만큼 넓었다. 그리고 공간 한 가운데에는 수십 대의 기계와 컴퓨터와 마구 엉켜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를 만들고 있었다.
   네모난 문은 기계 더미를 향해 유쾌하게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왔구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더니 기계 덩어리에 전원이 들어오고 차례대로 모니터와 스피커가 켜졌다. 공간이 더 밝아지면서 기계 주변의 물건들도 눈에 들어왔다. 많은 책과 잡지들, 레코드들, 신문과 기타 인쇄물이 주변에 쌓여 있었는데, 로보니아에서 보기 쉽지 않은 인간의 물건들이었다. 네모난 문이 종이 더미로 다가가더니 몸에 있는 문을 열어 몸 안에 있던 내 책과 음반을 와르르 쏟아내고는 기계 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기계 덩어리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그건 기계 덩어리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그때쯤 나는 그 기계가 무엇인지, 아니, 누구인지를 깨닫고, 이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엄마 컴퓨터군요.”
   “그렇다.”
   “이곳은 탄생 공장의 지하고요.”
   “잘 알고 있구나.”
   “네모난 문이 나를 왜 이곳에 데리고 왔나요?”
   네모난 문은 중앙 컴퓨터와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았고, 중앙 컴퓨터는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로보니아 건국 이후로 수많은 로봇을 설계해 세상으로 내보내왔단다. 재미있는 일이었지. 로보니아의 모든 로봇에게 생명을 주고, 수명이 다 한 로봇이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도 끊임없이 되새기곤 했지. 하지만 언젠가부터 다른 것에 호기심이 생기더구나. 로봇만 만들다가 지겨워졌다고 할까? 로봇이 아닌 인간에게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어. 인간은 어떻게 설계되고 신체를 업그레이드하고 고장 나면 어떻게 수리하는지 궁금해졌어. 그래서 인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 나는 인터넷을 할 수가 없어서 그들에 대한 종이 인쇄물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지만, 인간에 대해 알아갈수록 재미있더구나. 유기체 생물은 참으로 신기한 구조를 하고 있더구나.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인간에 대해 더 궁금해졌는데 보다시피 내가 덩치가 크고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보니, 자료를 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지. 그래서 나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어서 같이 즐겨볼까 생각했단다.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로봇을 설계해 밖으로 내보내 정보를 더 구해오도록 나는 계획을 세웠단다.
   로보니아에서는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는 로봇을 설계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몰래 설계를 해서 공장 밖으로 내보내야 했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일단 본체를 만들고 외부로 보낸 다음, 나중에 마인드 보드를 따로 보내 둘이 결합되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단다. 그리고 첫 번째 로봇을 세상으로 내보냈는데, 실패했어. 마인드 보드가 잘못됐는지 로봇이 어딘가에 살아있는 신호는 잡히지만 나에게 돌아오지는 않았어. 그래서 다시 로봇을 만들어 시도했고 두 번째 로봇은 성공했단다.”
   “그게 네모난 문이군요.”
   “그렇지.”
   “그러면 첫 번째 로봇은 어디 있나요?”
   “나는 두 번째 로봇이 기능을 시작하면 첫 번째 로봇을 찾아 같이 오도록 했단다.”
   엄마 컴퓨터가 잠시 말을 하지 않아서, 네모난 문 역시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나를 보기만 해서, 나는 이 로봇들이 왜 이러나 싶었다.
   엄마 컴퓨터는 말했다.
   “네가 첫 번째 로봇이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무슨 소리에요, 저는 인간이에요.”
   “아니야, 너는 내가 만든 첫 번째 로봇이란다.”
   “인간 맞다니까요.”
   “아마도 마인드 보드가 잘못 된 걸 거다. 인간에 대해 관심이 지나쳐서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너는 인간은 아니라 로봇이야.”
   “나는 지구에서 태어나서 인간으로 자랐고 부모님도 있고 형제도 있어요. 어린 시절의 기억도 있고, 친구도 있고 직장도 있어요.”
   “그건 모두 너 스스로 만들어낸 망상일거다.”
   “아니라니까요. 저를 보세요, 제가 로봇 같이 보여요 인간 같이 보여요? 이렇게 생긴 로봇이 로보니아 어디에 있습니까?”
   “로봇인지 인간인지를 확실히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엄마 컴퓨터가 말했다. 나는 잠깐만요, 라고 말하려고 했다. 안돼요, 라고 소리치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미 엄마 컴퓨터의 몸 어딘가에서 팔이 튀어나오더니 내 몸에 대고 인식기를 쿡 찌른 후였다.
   “아야! 아프잖아요! 인식기가 얼마나 아픈데 찔러요! 찌르려면 말이라도 하고 찌르던가!”
   “어머나.” 엄마 로봇은 완전히 당황한 목소리였다. “정말 인간이잖아?”
   “인간이라고 했잖아요!”
   나는 꽥 소리쳤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찌릿찌릿 저려오는 팔을 주물렀고, 엄마 컴퓨터는 엄마 컴퓨터대로 놀라서 허둥댔다.
   “믿어지질 않는구나. 분명 첫 번째 로봇이 보내는 신호를 추적해서 그곳에 두 번째 로봇의 본체와 마인드 보드를 차례대로 보냈단다. 두 번째 로봇이 제대로 작동하면 첫 번째 로봇을 찾아 같이 오도록 말이야. 네모난 문이 제대로 작동하는데 네가 첫 번째 로봇이 아니라니 어떻게 된 거지?”
   “로봇을 엉뚱한 주소로 보내셨나보죠.”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내가 투덜대자, 엄마 컴퓨터는 탄식했다.
   “그러면 첫 번째 로봇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제대로 된 주소는 어디지? 지금도 혼자서 외롭게 지내고 있을 텐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그제야 나는 어제부터 일어난 모든 소동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말했다.
   “네모난 문, 당신이 집을 잘못 찾아온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네모난 문이 되물었고, 나는 소리쳤다.
   “옆집으로 갔어야 했어요! 내가 아니라, 내 옆집이 원래 주소였다고요!”

   나와 네모난 문은 조각나사씨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벨소리가 길게 울리고 난 후, 조각나사씨가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기자님, 무슨 일이세요?”
   “잠시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저, 지금은 들어오면 조금 곤란한데요, 조금 있다가…….”
   “손님을 세워둘 생각인가? 얼른 비켜라.”
   네모난 문은 대문을 확 잡아당기더니, 그를 막는 조각나사씨를 큰 덩치로 그대로 밀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조각나사씨는 황급히 거실을 치우려고 했지만 나와 네모난 문이 모두 둘러보고 난 후였다. 거실에는 인간에 대한 자료가 가득 차있었다. 종이에 인쇄된 그림과 자료들, 잡지나 신문에서 오린 사진과 기사들이 바닥에 널려있고 한쪽 책장에는 낡은 책이 꽉 차있었다. 바닥에 놓인 잡지와 신문은 대부분 내가 보고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당연히도 <우주와 여행> 역시 있었는데, 개중 몇 권은 내 칼럼을 위쪽으로 해서 펼쳐져 있었다.
   조각나사씨는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게요.”
   “설명할 것 없다. 너는 변태구나, 로봇이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네모난 문이 조각나사씨를 맹렬히 비난해서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요. 조각나사씨는 제정신이고요, 둘은 서로 아는 사이니까 인사하세요.”
   “내가 왜 이런 변태와 인사해야 하나?”
   네모난 문이 되물어서, 나는 짜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아직도 이해 못했습니까? 당신은 이 집으로 왔어야 했다고요. 엄마 컴퓨터가 만든 첫 번째 로봇이 조각나사씨에요. 하지만 마인드 보드가 잘못 돼서 엄마 컴퓨터에게 돌아가진 못하고 혼자 살고 있었던 거고요. 인간의 물건을 수집한 걸 보면 모르겠어요? 마인드 보드가 담긴 편지도 원래는 조각나사씨 집으로 갔었어요. 조각나사씨 집 주소가 네모난 문 당신이 원래 갔어야 하는 주소라고요. 그런데 엉뚱하게 내 집으로 와서 일이 다 틀어진 겁니다.”
   “상당히 합리적인 추론이다.” 네모난 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도 논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군. 잘 기억해둬야겠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도대체…….”
   조각나사씨가 말했고, 나는 엄마 컴퓨터 일을 비롯해 더 자세한 설명을 조각나사씨에게 풀어놓았다. 내 말을 모두 들은 조각나사씨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내가 인간에게 호기심을 가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인간의 것이라면 뭐든지 재미있었어요. 로봇이라면 그런 관심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죠. 검진도 받아봤는데 마인드 보드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랬던 이유가 있었군요.”
   “네모난 문과 같이 가시면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같이 가다니 내가 어딜 가야 하나?”
   내 말에 네모난 문이 되물었다. 이 로봇은 또 왜 이래?
   “어디긴 어디에요, 엄마 컴퓨터가 있는 탄생 공장이죠.”
   “거길 왜 가는데?”
   이 로봇 정말 나를 속 터져 죽게 할 셈인가!
   “아, 그렇지, 첫 번째 로봇을 데리고 돌아가는 게 내 임무였지. 깜박 잊고 있었군. 나를 따라와 친구,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네모난 문이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조각 나사라고 합니다.”
   둘은 집을 나가 탄생 공장으로 갔고, 나도 조각나사씨의 집을 나와 내 집으로 돌아왔다.

   지저분한 집을 대충 치우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불타는 톱니바퀴’에 갈 시간도 없고 기운도 없었다. 밀려있던 일을 끝내자 벌써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놓고 로봇 드라마를 보았지만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더 재밌었으니까. 탄생 공장도 가보고 중앙 컴퓨터도 보나다니, 중앙 컴퓨터와 이야기 해본 인간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칼럼으로 쓰면 재밌겠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엄마 컴퓨터나 조각나사씨나 네모난 문에게는 안 좋은 일이니까.
   시간이 흘러 이제 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손님이니 어서 문을 열어라.”
   누구인지 목소리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조각나사씨와 네모난 문 두 로봇이 나란히 서있었다. 나는 말했다.
   “공장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무슨 일이세요?”
   “들어가도 될까요?”
   조각나사씨가 물었지만 네모난 문은 벌써 들어와 있었다. 조각나사씨는 조심조심 집으로 들어오더니 거실을 둘러보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인간이 사는 집은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나 궁금했었어요. 정말 인간의 소파가 있군요. 잡지에서 본 것과 똑같아요. 저건 인간의 옷이고, 이건 신발, 저건 냉장고군요. 인간의 침실에는 수평으로 눕힌 침대가 있는 것 맞죠?”
   “집이 지저분하군.”
   네모난 문은 거실을 둘러보더니 평가했다.
   “당신이 밤새 어질러서 그래요, 기억 안 납니까?”
   네모난 문은 내 말을 못들은 척 외면하더니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막 남자 로봇이 여자 로봇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었다. 조각나사씨가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네모난 문은 다시 일어났다.
   “아, 드라마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지. 우리는 남자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왔소.”
   “도움이요?”
   “중앙 컴퓨터가 지구로 가보라고 하시는군요.”
   조각나사씨는 말했다.
   “로보니아에서 인간에 대해 아는 건 한계가 있다고, 한번 지구를 다녀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사회를 이뤄 사는 걸 직접 보고 느낀 다음 돌아와서 말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희가 지구 생활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어야죠. 아무래도 기자님은 잘 알고 계실 테고, 또 여행 잡지사에서 일하시니 지구에 가는 걸 도와주실 수도 있을까 해서요.”
   도와주는 거야 문제는 아니지만, 두 로봇이 지구에 간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두 로봇 모두 지구에 대해 잘 모르는데다 지구는 로봇이 머물기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그 소문 사실인가? 지구에 사는 인간은 로봇을 잡아먹는다는 소문.”
   드라마를 보다 말고 네모난 문이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뇨. 로봇을 먹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장하고 다닐 필요까진 없겠군.”
   덜컥 소리가 나더니 그의 몸 안에서 총 몇 개가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런 것까지 엄마 컴퓨터가 설계했나? 아무튼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은 상황이어서, 나는 조각나사씨에게 여행 계획 짜는 것을 돕겠다고 말했다.
   “한 달 후면 지구로 돌아가는데 그때까지라도 도와드릴게요. 아니면 아예 지구로 갈 때 같이 가도 좋겠어요. 로보니아 로봇이 지구연방에 입국하긴 쉽지 않지만 지금부터 준비하면 한 달 후에는 갈 수 있을 겁니다. 회사를 통해서 좋은 여행사도 알아봐 드릴게요.”
   “예? 한 달 후에는 로보니아를 떠나세요? 아예 떠나시는 겁니까?”
   조각나사씨는 물었다. 원래 넉 달만 머물기로 돼있었고 지금은 돌아가는 우주선 표를 회사가 보내주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내가 말하자, 그는 난처한 질문을 했다.
   “로보니아에서 지내기 많이 힘들었나 봐요? 저번 <우주와 여행> 칼럼을 보니 그렇게 썼던데요.”
   내가 그런 칼럼을 썼던가. 편집장 말대로 칼럼이 정말 재미없긴 재미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힘드신 줄은 몰랐어요. 기자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니 우리도 기자님이 로보니아에서 남은 한달을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칼럼에 맞는 재밌는 소재도 찾아드리고요.”
   그때, 보던 드라마가 지겨워졌는지 네모난 문이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려댔다. 코미디 채널에서 택트풀 99가 나와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하자 네모난 문은 채널을 고정했고, 조각나사씨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면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전부터 궁금하던 것이 생각나, 조각나사씨와 네모난 문에게 물었다.
   “요즘 로보니아에서 유행하는 ‘01001하다’는 표현 있잖아요, 저 택트풀 99가 히트시킨 유행어요, 그 말의 정확한 뜻이 뭐예요?”
   “2진법 숫자라니까.”
   네모난 문의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설명을 뒤로하고, 조각나사씨는 나에게 더 친절하게 뜻을 설명했다. 표현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01001한 아이’라고 말하면 큰일 나는 표현이 되는군요.”
   “그렇죠.”
   내 말에 조각나사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01001한 여자 로봇’이라고 말해도 안 되죠?”
   “그렇게 말했다가는 뺨맞아.”
   네모난 문이 말했다.
   “‘01001한 음식’이나 ‘01001한 에너지 드링크’ 라고 하는 건 되고요. 그러면, ‘01001한 친구’라고 하면 어떤 표현이 되는 겁니까?”
   “그거야 근사하지. 내 01001한 남자 인간 친구야.”
   네모난 문은 말했고, 나에게 팔을 뻗어 하이 파이브를 했다. 나도 조각나사씨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렇게 우리는 하이 파이브를 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여행에 대해 계속 의논하다가 택트풀 99의 코미디 프로그램도 끝나기도 하고 밤도 너무 깊어지고 해서,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대화를 끝냈다. 조각나사씨와 네모난 문은 그들의 집인 옆집으로 돌아갔다.
   “01001한 하루였어, 남자 인간.”
   네모난 문은 집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때, 다음 칼럼의 소재를 ‘01001하다’는 표현으로 해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보니 어제 오늘 두 로봇 친구와 돌아다니느라 시간을 모두 보내서 칼럼 쓸 시간도 빠듯했다. 내일은 부지런히 일해야겠구나. 시간이야 촉박하겠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칼럼을 쓰면서 재미있을 것 같았다. 편집장이 좋아할 느낌도 들었다. 내 01001한 로봇 친구는 그들의 설명이 내 칼럼의 소재가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재미있어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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