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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판시웨인 입성

2008.03.01 00:1503.01

www.eldoloe.com무엇이 날 인도하는지, 그리고 그 길의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방랑이 이어지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녹슨 검과, 닳아 벗겨진 가죽 부츠, 그리고 그 위에 걸친 헤진 망토는 이 시대의 여행객을 말해준다. 이미, 하늘을 날던 용은 추락했고, 국왕과의 빛나는 맹세 아래 들판을 달리던 기사들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시대는 이미 모험가를 저버렸다. 이 시대는 더 이상 빛나는 검과, 바다를 덮어버릴 거대한 용과, 선홍의 마법사들을 바라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리고 난 그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며, 진리라고. 그렇게 믿으며 여행을 하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황야, 투박한 대지, 붉은 구름이 하늘을 덮은 그 길이 인도하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주변에 펼쳐진 회색의 갈대숲이 나에게 선사하는 바람은 시원하지도 않는, 죽은 바람이었다. 이유없이 검의 그립(Grip)을 쓰다듬었다. 이런 황량한 벌판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것이 지난 5년간의 여행 동안 내가 얻은 것이었다.


모든 이들이 비웃었다. 언제까지 환상 속에서 살 거냐고. 대마법사가 거대한 드래곤 아래에서 세상을 희롱하고, 기사들이 성을 향해 달려가던 시대는 끝났다고. 내가 검을 찼을 때, 모든 이들이 날 걷어 찼다. 그들에게 난 시대를 모르는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처음 들어선 여관에서 나를 당당히 '모험가'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날 정신나간 녀석으로 생각하고 내쫓았다.

집안에서도 별 다를 바 없는 반응이었다. 내 집안은 유서깊은 마법사 가문이었다. 현대의 마법사라는 게 기껏해야 수많은 마법 서적들을 연구하며, 불꽃을 부리거나 바람을 부리는 자들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학자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처음 내가 손에서 불꽃을 뽑아냈을 때, 아버지께서는 날 두들겨 패셨다. 네 녀석이 그러고도 우리 집안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냐, 그런 이단의 행동은 뒷골목에 가서나 하라며 몇 일간 집에서 쫓겨났었다. 그리고 18세─ 귀족가의 자식이라면 모두 근사한 직책을 맡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나이 때 즈음─ 남 몰래 검술 연습을 하던 내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모험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진심으로 날 추방하셨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건데, 난 아버지의 말씀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확실히 근사한 모험가의 꿈 따위란, 역시 꿈으로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붉은 모닥풀을 피우고 지나가던 여행객과 담소를 나누며 구운 토끼를 나눠 먹는다. 그리고 그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여행을 하며 고대의 유적들을 탐사한다, 라는 건 옛날 이야기에 불과했다. 때로는 한 마을에서 출발해 다음 마을까지 수십일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 때면 난 길가의 풀을 씻어 뜯어 먹어야 했다. 한 때는 잘 모르는 열매를 따먹다가 피똥을 사며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밤이면 맹수들은 날 노렸고, 난 늘 두려움에 휩사인 채 잠에 들어야 했다. 그 탓에 난 지금 불면증을 겪고 있다. 하긴, 굳이 깊게 자지 않아도 살 만하다는 건 또다른 의미에서 괜찮은 것일지도 모르지.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바다 냄새를 맡았다.

멀리서 흘러오는 바람에 바다의 냄새와 시원함이 드물게 섞여 있었다. 근처에 바다가 있는건가. 지금은 10일이 넘도록 벌판을 헤매는 중이었기에 이 것은 꽤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바다 근처에서는 마을을 발견하기가 쉽다.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다소 걸음을 빨리했다. 어서 여관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다. 얼마 걷지 않아 주변의 갈대숲은 걷어지고 초록빛 평야가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주변의 수풀은 내 허리까지 올 정도로 높았지만, 사이사이로 난 작은 길이 있었다. 마을이 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그 때, 난 순간적으로 손을 검의 그립에 가져갔다.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지난 모험간 늘은 게 있다면 틈틈이 연습한 검술과 마법, 그리고 생명체의 기척을 느끼는 능력이었다. 생존의 법칙이랄까, 진화의 법칙이랄까─ 확실히 내 감각은 짐승의 그것과 닮아가는 듯 했다. 난 자리에 서서 자세를 낮추고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풀이 움직이고 있었다.

들짐승인가.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에서 들려왔다. 주변의 수풀은 자세를 낮춘 나보다 높았다. 난 그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른발을 디딤발 삼기 위해서 앞으로 빼낸다. 찌익─ 흙 위를 미끄는 내 발소리가 귓가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왼발은 뒤쪽에 고정시키며 자세를 더욱 낮추었다.

찰나, 수풀이 요동치며 인영(人影)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 것은 인간보다 훨씬 작았고, 온 몸은 마치 뼈에 가죽을 붙여놓은 듯이 허약했다. 그리고 손에는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의 무기를 보는 순간, 난 발을 디디며 날아가 순간적으로 검을 뽑고, 가로로 그었다. 선혈이 튀어 내 몸을 적셨다. 그리고 마치, 시간을 뒤쫓듯 곧바로 양 옆에서 마찬가지의 인영이 튀어 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난 곁눈질로 그들을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희귀하게 생긴 인간들이었다. 마을에서 추방당한 나병 도적집단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그들의 주변에서는 악취가 나고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몸을 틀며, 뒤로 미끄러지듯이 다섯 발자국 물러섰다. 주변의 기척을 느껴볼 때, 눈 앞에 있는 이 두 녀석 이상의 적은 없는 듯 했다. 고개를 들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피부는 검게, 아니 회색빛으로 그을려 있었고 체구는 금방 느꼈던 것 보다 훨씬 작았다. 얼굴 역시 광대뼈와 눈이 지나치게 튀어 나와 있었고, 온 몸은 시체라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로 뼈만 앙상하고 상처와 굳은살 투성이였다. 옷도 사타구니만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두른 천이 전부였다. 그들은 한 손에 각각 작은 몽둥이와 녹슬어 날이 나간 시미터를 들고 있었다.

"그대들은 누구입니까. 도시에서 추방당한 도적 집단입니까."

난 날카롭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날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한 녀석이 대답했다.

"가진, 것내놔, 라인간."

장애인인가….

도시에서 추방당할 만하군. 인간은 불쌍한 이들에 동정심을 느낀다. 그리고 선한 인간은 그들을 잘 감싸안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동정심이 아닌 혐오감을 주는 존재들이다. 아무리 불쌍하더라도 인간은 혐오적인 존재에게 정도 이상의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오히려 핏박하고, 억압하며, 추방한다.

"물러나십시오. 전 당신들을 해치고 싶은 생간은 없습니다. 방금 벤 사람 역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난 이들을 완전히 물러나게 할 작정으로 검을 고쳐쥐었다. 그들은 주춤했으나,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완전히 물러서진 않았다. 침묵과 함께, 대치의 시간이 흘렀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먹다, 있다내, 놔라인, 간."

난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들었다.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은 틀림없이 나약한 체구 때문에 산 속에서 살아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약탈하는데, 이들이 원하는 것은 식량 뿐인 듯 했다. 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자세만 풀어 가방을 열었다. 그리곤 조금 남아 있는 건량을 꺼내어 그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들은 날렵하게 뛰어 올라 그것을 낚아 채더니 날 바라보았다.

"이제 물러가십시오."

내가 칼을 든 손에 경계를 풀며, 뒤로 더 물러나자 그들은 주춤거리더니 자신들의 쓰러진 동료를 데리고 돌아갔다. 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금 저 사람을 벤 것이 후회스러웠다. 물론, 단숨에 죽을 정도로 베지는 않았지만 금새 병균이 옮아 죽을지도 모른다. 난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수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 순간, 머리 위로 갑작스런 그림자가 드리웠다. 난 검을 고쳐쥐며,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 그리고 수십개의 눈과 마디선이 선명하게 보이는 몸통─

그것은 인간 정도 크기는 될 듯한 잠자리였다.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드래곤플라이…….

언젠가 폰헬의 모험 일지에서 본 적이 있다. 물론, 그 일지는 200년도 전의 이야기였다. 난 자세를 풀며 멍하니─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움직이는 날개와, 선명하게 보이는 그 것의 머리와, 다리와, 몸통을 바라보았다.

그 것, 그 드래곤플라이의 뒤로 파란 하늘이 펼쳐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 속에 무언가 있었다.

너무나도 높게 날고 있는 그것은 매우 작게 보였다. 그러나 선명한─ 바다라도 희롱할 정도로 큰 날개와 대지를 덮어버릴 몸통, 한 마리의 거대한 뱀을 연상케 하는 길다란 꼬리.

용이었다.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다 냄새를 가득 담고 흘러오는 바람이 충만한 가운데, 저 푸른 하늘과 이 푸른 대지가 날 축복하듯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난 내 검을 뽑아 높이 치켜 들었다. 내 녹슨 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빛을 발하듯, 햇빛을 받아 은빛의 검신을 찬란하게 빛냈다.

그리고 동시에 내 머리를 하나의 글귀가 스쳐지나갔다.

「 난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때, 병에 걸려 추방당한 인간즘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서,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야 들었지만 그들은 '고블린'이라는 종족이라고 했다. 먼 옛날에는 인간이었다고 하나, 동굴 속에 갇혀 지내면서 악령이 씌였다고 한다. 그 곳의 모험자길드에서는 그들을 몬스터로 규정하고 있다. 난 그들을 처음 만난 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곳은 바다 바람이 충만한 곳이었고, 용이 나는 곳이었다. 그 곳은 나에게 모험을 준 파라다이스, 판시웨인의 동부였다. 」

"파라다이스… 인가."

눈을 찌르는 햇빛에 난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계속 바라보았다. 나의 입가에는 실로 오랜만에, 진심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저 멀리, 희미한 안개 속에 그 높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국가, 판시웨인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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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엘피라는 사이트 엘도로에를 만들어 운영하는 운영자이며, 현재는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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