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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그때 흰 뱀 한 마리가

2022.06.01 00:0006.01

그때 흰 뱀 한 마리가

미로냥

 

 

도사에게는 십 년이 차(茶) 한 김 식을 순간이고 백 년이 눈꺼풀 한 번 떨릴 시간이라고 한다.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따금 저잣거리에서 도사를 만나 감이나 복숭아를 한 알쯤 얻어 먹은 이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중 단연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 바로 화경이었다.

그 도사 화경 선생이 산천을 유람하며 여러 대가 흘렀는데, 아무개 나라가 허물어지고 인근에 새로 나라가 설 무렵 선생이 청경호 근처 산중에 초막을 짓고 제자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워낙 도력이 대단한 자라, 여덟 방위 아홉 하늘 열 여섯 바다를 두루 누비며 누구 하나 산 것에겐 곁을 아니 내 준 다더니, 결국 스스로 그림을 한 장 그려선 그 안의 미인을 불러내 제자로 삼았단 이야기였다.

이것은 그 무렵의 이야기다.

 

 


 

 

벼락 맞은 바위 가운데 사연 없는 바위도 드물게 마련이다. 개중에는 못된 부모가 어린 자식을 돈 욕심에 팔아 넘겼다가 그만 천벌을 받아 벼락을 맞았다는 투의 이야기도 흔하다. 근자에 새 상감마마가 나라를 일으킨 덕에 비 온 뒤의 죽순처럼 온갖 풍문이 살을 불려 여기저기에서 돋아나고 있다 보니, 어디서 또 비슷비슷한 벼락바위 이야기도 섞여 들었다.

 

“그게 우리 새 왕비님 이야기라지 않아?”

“벼락 맞은 것이? 아니, 어떻게 벼락을 맞고 왕비 자리엘 오른답디까?”

“거, 사람. 벼락 맞을 소릴. 왕비 마마 말고 그 어머니 말요, 어머니.”

 

못된 왕을 무찌르고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 맨 주먹 하나로 몸을 일으켜, 이윽고 자그만 나라를 세우기에 이른 왕은 새 왕비를 맞이했다. 왕비는 망국의 왕족의 피를 이어 받은 여자였는데, 소문에 따르자면 왕이 그녀를 알게 된 계기가 세간에 보기 드문 이야기라 하였다.

 

“박석산 그짝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게 은근히 돌산이라지.”

“한 봉우리는 돌인데 범을 닮았고 다른 봉우리는 숲이 무성하여 시커먼 용의 잔등 같다더만.”

“박석산 그 커다란 바위가 잘 보면 붉은 금이 쩍쩍 가 있으니, 그 연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전, 이제는 천벌을 받아 없어진 그 나라의 죽어버린 왕이 지천에서 재물과 사람을 끌어모으던 시절 이야기다. 죽어버린 왕, 이제는 폐주(廢主)로 불리게 된 왕 탓에 농지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바다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절 박석산에는 못된 뱀이 살아, 그놈이 온갖 제물을 받아먹고 살지며 물길마저 막아버린 통에 산하촌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없는 살림에 한 됫박씩 곡식을 모아 어디 벼슬아치에게라도 부탁해 보려 했지만, 나라가 어지러운 판에 책임 지겠다는 사람 하나 있을 리야. 결국 먼뎃산에서 수행을 쌓았다는 아무개라도 모셔 왔는데, 그이가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이랬다는 것이다.

 

[원, 참 가엾은 노릇이외다. 어린애 하나를 바치면 뱀이 먹고 물러나 앉을텐데 누가 제 새끼를 내어 주겠소?]

 

그예 마을 사람들이 다 단념하고 죽을 날만 기다릴 판에, 마침 궁상맞은 아낙 하나가 나섰다. 눈이 희한하게 형형하고 목소리가 그 양 손 양 발만큼 거친 여자였다.

 

[얼마나 내 놓으시려우?]

 

여자는 이남박 하나를 쓱 내밀었다. 바가지 안에 말라붙은 곡식 찌꺼기와 툭툭 튀는 새빨간 이가 뒤엉켜 있었다. 사람들이 껄끄러운 죄책감을 억지로 누르고, 한 푼 두 푼 내 놓기 시작했다. 바가지 속이 누런 동전으로 가득 찼다. 여자는 바가지를 슬슬 흔들며 채근했다. 더, 더, 조금 더. 내 배 아파 낳아 빌어먹으며 기른 자식인데 슬픈 마음이 돈 꿰미로 뒤덮여 아예 옴쭉달싹을 못 하도록 더, 더, 조금 더 내 놓으시구려. 더, 더, 조금 더. 눈 앞에 삼삼하니 자식새끼가 보이다가도 싯누런 금덩이에 눈이 멀어 이냥 깜깜하도록 더, 더, 내 놓으시구려.

 

쩔겅쩔겅 동전이 차 오르고 달캉달캉 놋쇠 숫가락 하나, 어느 집구석 돌쩌귀에 다듬잇돌 조각까지 여자의 바가지로 날아들었다. 여자는 바가지를 세 번 채우고 다시 삼 세 번 가득가득 눌러 받더니 비로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좋소. 내 딸년을 데려가시구려.]

 

여자의 딸은 더러운 옷가지를 걸치고 산발을 했는데도 정월 보름날의 달님만큼 고왔다. 화등잔만한 눈동자를 슴벅거리며 소녀가 터덜터덜 걸어 제 몸을 내 놓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렸다.

가엾어라.

누군들 측은지심이 없겠는가. 그러나 다만 마을을 위해서다. 물길을 터서 모두 살아남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아이의 등을 떠밀어 박석산으로 향하게 했다.

산 깊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침을 질질 흘리던 못된 뱀이 기다리다 못해 슬그머니 밝은 곳으로 기어나왔다. 커다란 대가리를 쑥 내민 뱀의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심장이 너덜거릴 만큼 놀랐다.

 

[뱀 어르신, 모쪼록 이 아이를 받아 잡수시고 그만 물길에서 비켜 주십시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는 덜덜 떨며 뱀 아가리에 자기 몸을 내 놓았다. 그러나 그때였다. 대명천지에 온 산천이 찌르르 울리도록 고함을 치며, 산에서 산을 옮겨다니던 젊은이가 뱀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젊은이는 한 무리의 장정들을 이끌며 범처럼 흉악한 정치를 피해 몸을 숨긴 신세였는데, 가여운 어린아이가 죄 없이 팔려 죽을 지경에 처하자 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놈! 미물 주제에 사람을 먹고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천벌을 받아라!]

 

젊은이는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높이 치켜들고 흉측한 뱀 대가리를 댕강, 썰어 버렸다. 그러자 사방으로 흰 피가 솟구치더니 하늘이 단숨에 흐려지고 비구름떼가 오글오글 모여, 세찬 물줄기를 쏟아내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이제 논바닥이 다 갈라지는 일은 없겠구나 하고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런데 저만치 바위 위에 보란듯이 앉아 몽당치마를 제끼고 돈꿰미를 정신없이 헤아리던 무정한 어미, 강퍅한 아낙은 비구름 틈새에서 콱! 소리와 함께 내리꽂힌 벼락을 맞아 꿱 소리도 없이 죽고 말았다.

 

“글쎄, 소문에는 그 여편네가 죽으면서 흘린 피가 사방으로 흘러가지고 바위에 남았다지 않아?”

“그래서 그게 벼락바위라고 불린다지?”

“벼락 맞은 바위 앞에서 여자아이는 공손하게 절을 한 번 올리고는, 자기를 구해준 그 젊은이를 따라 나섰다는데…….”

“그 젊은이가.”

 

그 젊은이가 곧 뱀을 베어 낸 그 칼로 악한 왕을 무찌르고 왕이 되더니, 훗날 그 가여운 여자아이를 후비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불쌍한 마을 사람들도, 불쌍한 여아아이도, 모두 새로운 왕 덕분에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는 이야기다. 한편 돈 욕심에 눈이 멀어 딸을 홀랑 팔아 넘긴 나쁜 어미와, 못된 뱀과, 악한 왕은 마땅한 벌을 받았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화경 선생님 거 계시냐?”

 

메기 수염에 작달막한 키의 사내가 그럴싸한 옷을 입고 찾아왔다. 금줄 앞에서 멈추어 집주인을 외쳐 부르는 그를 향해 계집애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안 계신다.”

“쬐그만 게 다짜고짜 반말이야?”

“길쭉한 게 다짜고짜 반말이야?”

“어허! 너 사람이 아니구나?”

“아하! 너 사람이 아니구나?”

 

계집아이는 금줄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메기 수염을 빤히 쳐다보았다. 메기 수염이 먼저 물었다.

 

“계집애야, 너는 그림이지?”

“중늙은이야, 너는 거북이지?”

“어허!”

“아니야? 맞아?”

“어허! 어허!”

“아니야? 맞아? 응? 넌 거북이지?”

“그래, 거북이다! 이 댁 선생이 만드셨다. 그림으로 만든 계집애하고 비길소냐!”

“그림이라도 춘이는 스승님 제자야. 하나뿐인 제자라고 그랬단 말야! 혼내줄 테다!”

 

‘춘’이라고 자신을 밝힌 계집애가 다짜고짜 싸리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메기 수염은 부아가 치밀었다.

 

어린 것이 어딜 감히!

 

메기 수염은 화경 선생의 도움을 얻어 사람이 된 몸으로, 지금은 소열국(昭烈國) 재상댁에서 한 자리 꿰찬 참이었다. 몇 년 나랏녹을 먹다 보니 거북이였던 시절은 쉬이 잊히고 그만 주변 관리들과 다르지 않은 양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다.

 

어린 것이!

 

해서, 메기 수염은 싸리빗자루를 쥔 채 제법 사납게 구는 춘의 손목을 냅다 후려쳤다.

 

“악!”

 

춘은 비명소리와 함께 홀랑 나동그라졌다. 팔목이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뒤틀리고 손목은 툭 끊어져 빗자루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덜렁대는 발로 바닥을 차댔다.

 

“야! 거북이 너! 우리 스승님한테 다 이를 테다! 혼내줄 거야!”

“허이고, 무섭지도 않네. 기껏해야 종잇장 주제에 어른한테 까불어? 또 떠들어 봐라, 갈기갈기 찢어 주마.”

“더 찢어도 다시 붙이면 그만인걸? 흥! 하나도 안 무서워.”

“다시 붙이지 못할 만큼 작은 조각으로 찢어서 후 불어 날릴 게야. 한낱 종이 한 장이면서 겁도 없이…….”

“이해가 안 되네? 거북이도 작은 조각으로 만들면 다시 못 붙일 거 아냐? 그러면 너랑 나랑 뭐가 다른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치어다 보는 춘을 향해 메기 수염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가 아는 주위 사람들이 거개 그렇듯, 메기 수염도 말문이 막힐 때면 얼굴이 벌개졌다. 그리고 더욱 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요 계집애가!”

 

찢어진 손목 한쪽이 매달린 싸리빗자루를 낚아채 치켜드는 순간, 메기 수염은 억 소리를 질렀다. 고작해야 빗자루 하나인데 메기 수염이 버틸 수 없을 지경으로 무거워서 몸이 뒤로 훌렁 넘어졌던 것이다.

 

“어! 역시 거북이였구나?”

 

그럴듯하게 차려 입은 관복 속에서 메기 수염을 매단 거북이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주저 앉은 채로 춘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양 손이 제 자리에 붙어 있었더라면 박수를 쳐 댔을 게 분명했다.

 

“아춘. 위험한 장난은 치지 마세요.”

 

화경 선생이 춘의 몸을 가볍게 짊어졌다. 춘은 한 손에 다른 쪽 손을 들고, 한 점 반성의 기색도 없이 떠들었다.

 

“저 거북이가 먼저 못된 소리를 했어, 스승님. 못된 소리를 하면 입을 막아 줘야 하잖아. 춘이는 잘못한 거 없어.”

“존댓말로 조심조심 잘 가르쳤는데 왜 이리 되셨을까.”

“저자에 나가면 다들 춘이한테 반말을 하니까 그렇지. 춘이도 모두에게 똑같이 해 주는 거야.”

“저한테도요?”

“스승님도 춘이한테 반말 하면 되지.”

“저런. 서로 존댓말 하는 걸로 합의를 봅시다. 아춘.”

“싫어.”

 

화경은 춘의 손목을 다시 이어 붙이고 구겨진 양 발을 편 후 붉은 술을 한 방울 정수리에 떨어뜨렸다. 춘은 다시 발딱 일어나 신나게 마당을 뛰어 다녔다.

그리고 나서, 화경은 관복 속의 거북에게도 물 한 바가지를 끼얹어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어 주었다. 메기 수염은 깨벗은 몸으로 퍼질러져 주저 앉았다가 관복을 주섬주섬 주워 입기 시작했다.

 

“저, 저, 화경 선생. 소생은 사례감의 장인태감이신 상지(尙之) 어른을 모시는 몸으로, 구어은(龜漁隱)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상지 어르신께서 꼭 선생께 부탁을 드리고자 하셔서 소생이 모시러 왔사오니 부디…….”

“빈도(貧道)는 미욱한 몸인지라 오래 전에 속세를 등졌으니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가르칠 제자가 보시다시피 천방지축이니 어디 걸음을 하기 어렵습니다.”

“상지 어르신은 물론이려니와 대비마마께서도 바라시는 일입니다. 대비마마께서 선생께는 받을 빚이 있으니, 물러서지 않으시리라 하셨습니다.”

 

메기 수염, 구어은은 흙바닥에 공손히 고두한 채 힐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화경은 마당을 여전히 빙글빙글 돌고 있는 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선뜻 답했다.

 

“숙공 아씨가 그리 말씀하시면 별 수 없지요. 걸음 하기 전에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방으로 오르십시오.”

 

구어은은 춘과 부딪히지 않으려는 듯 몸을 웅숭그리고는 뒤뚱뒤뚱 걸어 마당을 가로질렀다. 섬돌에 신을 두고 방 안으로 오르자니 어은의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뒤를 힐끔 돌아 보았다. 열린 장지문 너머 마당 한 가운데에서 우뚝 멈추어 선 춘이 눈을 반짝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익!”

 

그 악독한 계집애가 또 덤벼들까 싶어, 어은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푹 감쌌다. 소녀가 달려오기 전에 장지문이 먼저 저 혼자 닫혔다.

 

“스승님! 춘이도 들을래! 스승님!”

 

장지문이 덜컹덜컹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은은 화경이 내 놓은 방석에 앉았다. 접대하는 사람도 없는데 둥그런 소반에는 어느 새 더운 김이 오르는 꽃차가 놓였다.

 

“스승님!”

 

문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양 쪽으로 벌어졌다.

 

“문을 잡아 뜯지 말라고 했지요, 아춘.”

 

화경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문을 뜯은 춘은 스승의 꾸중 따위 아랑곳없이 소반 위를 폴짝 뛰어 스승 곁으로 다가갔다.

 

“아춘. 대답을 하세요.”

“응, 응, 앞으로 안 그럴게. 그러니까 춘이 고쳐 줘.”

“자꾸 이러면 나중엔 못 붙입니다.”

“응. 스승님이 문 안 열어줘서 이런 거잖아.”

 

화경은 한숨을 푹 쉬며 춘의 덜렁대는 손목을 다시 고쳐 주었다. 춘은 냉큼 스승의 무릎에 털썩 주저 앉더니 어은을 향해 거들먹거렸다.

 

“자! 어은이라고 그랬지? 잘 들어 줄 테니까 스승님하고 춘이한테 할 이야기 다 해 봐. 얼른.”

 

어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우선 품고 온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재해산 길목에 큰 뱀이 나타나 사람을 잡아 먹은 지가 벌써 이태 됩니다.”

 

재해산은 옛적 박석산이라고 불렸다. 크고 작은 부침을 거쳐 나라가 들어섰다 망하고 또 새 나라가 들어서는 동안, 산은 유구하되 이름만이 여러 번 바뀌었다. 청경호가 말라붙고 응천이 쇠락해 인근 판도가 변했다고는 해도 재해산이 위로는 천하 대국으로 이어지고 아래로는 여러 포구와 이어지는 길목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오래 닦아 놓은 길도 여럿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라가 망하나, 하여간 오가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거기다 우리 태조께서 고초를 겪다 신령을 뵙고 천명을 받든 곳이 또 재해산 아니겠습니까? 뜻이 참 깊은 땅입지요.”

 

어은이 괜히 으쓱거리다가 춘의 새카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또 말을 이었다.

 

“하여간 그 재해산에 어느날 부터인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을 죽인다는 겁니다. 뱀은 흡사 산줄기 하나가 통째로 일어난 듯 실로 거대한데, 느티나무 숲 사이에서 고개를 쓱 내밀면 사람은 물론 날던 새들도 놀라 툭툭 떨어진다나요? 어디 뱀 소굴을 잘못 밟고는 해괴한 소문을 내나 싶어 병졸도 보내 보고 관리도 보내 보고 제관도 보내 봤사온데…… 도무지…….”

“그래서 누가 뱀을 봤습니까?”

“하이고! 어찌 아셨습니까? 목격자가 있는 걸 말입니다요.”

“제관이나 관리겠지요.”

“세상에나, 용하셔라. 거 참, 저도 한때 선적 끄트머리에다 대가리를 들이밀었던 몸입니다만 화경 선생은 과연 대단하십니다. 훤히 꿰뚫어 보시고…… 천리안이 따로 없네.”

 

추켜세우려는 속셈 반 진심 반 섞어 어은이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스승님, 어떻게 안 거야? 스승님 정말 천리안이야? 다 보여?”

“뻔한 것 아닙니까. 아춘, 기억해 두세요. 도저히 핑계를 삼을 수 없는 인물이 목격자가 되어야만 누군가 움직이게 마련입니다.”

“도저히…… 핑계…… 아휴, 스승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곰곰이 따져 보세요. 아춘은 명석한 분이니 금세 아실 겁니다.”

 

화경이 빙그레 웃었다. 대놓고 달래는 소리라 어은은 혀를 내둘렀다. 춘은 팔짱을 끼고 스승에게 턱 기대어 연신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야기를 마저 하시지요.”

“아차! 네…… 그것이…… 그렇습니다. 제관이…… 크흠, 상선 영감의 종형제 뻘 되는 분인데, 아무튼 참 믿을만한 분입니다. 그분이 지난 열 닷샛날에 힘차게 나섰다가 아랫사람을 싹 잃고 혼자 돌아오셨습니다. 보셨다더군요, 뱀을. 참말 거대했다 하시더이다. 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떠서 비늘까지 낱낱이 번쩍거리는 통에 놀라서 간이 툭 떨어졌다면서…… 아, 그분 말고 그분의 아랫것들 말입니다. 허 참. 허 참.”

“상선 태감의 종형제 뻘 되는 귀한 분이 보고 오셨으니 더는 모른 척 하기 어렵겠군요. 뱀이 없다 주장하자니 아랫사람들을 잃은 죄를 설명할 방도가 없고.”

“네, 네. 그렇습니다. 제가 또 여기 오기 전에도 뵙고 왔습니다. 참 건장하던 분이 그 새에 빼짝 말라가지고 삭정이처럼 부들부들 떠시더군요. 뱀이란 게 무시무시하기도 하지. 그분 말씀으로는 재해산이 아예 통째로 그 뱀인 게 분명하니, 산길을 틀어막고 불로 확 지져야 한다나요? 허 참, 허 참…….”

“야아, 대범한 수로군요.”

“화경 선생, 놀리지 마십시오.”

“놀리긴요. 빈도는 진심입니다. 이기지 못할 괴물이라면 태워 없애는 것이 상책. 못해도 중책은 되지 않겠습니까?”

“호선(狐仙)의 수제자쯤 되시는 분이 산을 태우라 하십니까요? 하이고! 그 말만으로도 죄 받으십니다.”

 

어은이 못마땅한 얼굴로 다가 앉았다. 화경은 무릎에 앉은 춘에게 소매를 맡긴 채 태연히 웃었다.

 

“산을 지워 없애나 개구리 한 마리를 집어 던져 납작하게 말려 죽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이 화경은 죄 많은 인간이지요. 그 죄에 하나 보태 짊어지라면 그리 하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고, 선생. 모쪼록 소생에게 홍진의 삶을 주셨듯이 이번에도 좋은 수를 내 주십시오.”

“산을 태우라니까요.”

“선생도 그 산하고는 연이 깊으시면서 어찌…….”

“그 뱀을 잡지 아니하는 데는 다른 연유가 있으시지요? 업이니 죄니 핑계를 대며 남의 손을 빌리는 그 의뭉스러움이 산을 태우는 것보다도 큰 죄입니다.”

 

어은이 웅얼거렸다.

 

“대비마마께서 말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선생. 다 아시지 않습니까?”

“빈도에게 별다른 수가 없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태워 없애는 것이 상책.”

 

화경은 아주 어린 모습으로만 뇌리에 남은, 대비 숙공을 떠올렸다.

소열국 태조의 후비. 현왕의 계모.

숙공 아씨.

 

그녀는 망한 소선국 현주(縣主)였다. 소선국 마지막 태자(太子) 미상(美祥)이 워낙 난봉꾼이었던 터라 슬하에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자식을 두었는데, 숙공의 어머니는 넓적한 코에 더 넓적한 얼굴을 가진 여염 아낙이었다. 말하자면 천한 신분이다. 태자가 치맛자락에 짧은 글을 남겼기에 여자는 제 딸의 아비를 알았다. 그녀는 제 딸, 즉 숙공에게 이름을 얻어 주려고 한 번 왕성에 올랐다.

 

꼭 한 번.

상주할 이름이 없어 허둥거리는 걸 누가 ‘바늘네’라고 적당히 썼는데, 결국 그게 그녀의 유일한 호칭으로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를 가엾게 여긴 대군곁이 나서서 모녀를 잠깐 돌보아 주었다고 전한다.

 

숙공은 응달에 숨어 핀 꽃처럼 조심스레 자랐다.

그와 박자를 맞추어 소선국은 걷잡을 수 없는 파란을 겪었다. 왕이 시해되고, 재상이 여덟 조각이 나서 강과 호수에 떠오르고, 개구리떼가 한꺼번에 울며 왕성 담에서 떨어져 내리고, 정전(正殿) 앞 월대에 시뻘건 달빛이 비치더라고 했다. 우물이 상하고, 땅이 상하고, 바람이 상하더니 상한 구름 아래 사람도 죄 상했다. 눈 달린 소선국 사람은 누구나 저희들의 나라가 썩어 문드러지다가 이내 톡 떨어질 것을 알았다.

한 번 기울기 시작하자 달이 이우는 속도보다도 나라 망하는 속도가 빠른 듯 보이기까지 했다.

 

때를 맞추어 소열국의 태조가 등장한다.

소열국의 태조는 소선국 제니(濟泥) 땅 종지기 구씨가 늦게 본 막내였다. 그렇게 전한다. 어릴 적에는 이렇다 할 이름 없이 막둥이라고 불렸고 나중에 심마니 흉내를 낼 무렵엔 이름이 도라지였단다.

 

그는 몇몇 건달들과 함께 군역에 징발되어 제니 땅을 떠났다. 당시 이지를 잃고 욕심과 의심으로 눈이 흐려진 왕은 쓸모 없는 전쟁을 남발했다. 생떼같은 젊은이들이 이리저리 끌려가 덧없이 죽어버렸다. 도라지는 못배웠지만 그래도 예감이란 게 있었다. 보나마나 끌려가서 화살받이로나 굴러먹다 죽으리란 걸 알았다. 당연히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안 가면 죽으니 출발했을 뿐이다. 그렇게 안 그래도 걸음이 천근이고 그림자가 만근인 와중에 길까지 잘못 드는 바람에 박석산을 지나게 됐다.

 

[늦었다고 시비를 걸어 바로 모가지를 쳐 버리는 게 아닐까…….]

 

근심하며 산을 넘던 도라지는 소피를 보려고 바짓단을 풀다가 허연 끈 같은 것이 시야 끝을 홱 스치는 걸 발견했다.

 

흰 뱀이었다.

 

희고 가느다란, 연초에서 피어 오른 연기 같은, 은핫물 귀퉁이에서 툭 터져 슬그머니 흐르는 별똥 같은, 쬐그만 뱀.

 

[저것도 어리석어서 죽을 길로 오누나.]

 

뱀이 수풀로 사라지지 않고 유유히 기어 다가오는 걸 보며 도라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깟 뱀이야 수태 잡아 죽였다. 심심풀이로도 잡고 먹으려고 잡고 괜히 잡고 짜증나 잡고 팽개치려고 잡고 놀라서 잡고 아무튼 도라지 눈에 띈 뱀은 항시 죽어 나갔다.

 

한데 이 날만은 그가 뱀을 위해 쾌히 길을 터 주었다. 대단한 이유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발이 움직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풀숲으로 매끄럽게 나아가는 뱀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사이 도라지는 자기 신세가 왈칵 서러워졌다.

 

[이대로 가 봤자 괜한 트집을 잡혀 죽을 게 뻔한데, 나야말로 어리석어 죽을 길로 가는 게지.]

 

침을 탁 뱉고 나서 그는 앞섶을 추슬렀다.

지극히 자연스럽게도 생각 하나가 꼬리를 물었다.

 

[저 뱀처럼 쓱 하니 길을 건너가 볼까. 나 같은 놈을 만나면 길을 터 줄 것 아닌가.]

 

시야 끝을 스칠 때는 옷자락 같던 것이 이윽고 눈 앞을 지날 때는 허연 뱀이었다.

생각 또한 그러해서, 처음 마음 속에서 일어날 때에는 작은 파문에 불과하던 것이 서서히 형태를 갖출 즈음에는 완연한 계획이고 주장이었다.

그의 시선이 땅바닥에 꽂힌 걸 알고 동행이던 건달이 물었다.

 

[어이, 자네. 무얼 보나?]

[흰 뱀 한 마리가 지나가기에.]

[그게 왜? 여긴 원체 뱀이 많아. 박석산 요괴가 자리를 비워서 잡것들이 득실대는 게지.]

 

거기서 끝날 것을, 도라지는 자기 마음이 신산한 탓에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니, 우리 고향 마을에선 흰 뱀이 상서로운 징조다.]

[상서롭긴? 개뿔이! 겨우 성벽 보수나 하러 가는 처지에 상서는 어느 발가락에 가 붙었다더냐.]

[여기 와 붙었고 말고. 내 담이 큰 걸 꺼내 보여 줄까? 이봐, 상서로운 징조를 허투루 놓치면 안 되지. 그러니 적당히 나라를 하나 세워 보세.]

[뭐라고? 나라를?]

 

얼떨결에 건국한다는 말이 없다면, 그때 만들었어야 옳다.

 

[나라를 못 만들 건 뭔가. 성벽도 무너지는데 나라야 뭐. 무너뜨리고 새로 세우면 그만 아닌가?]

[딴은 그래. 갈 길은 멀고 피차 차출 당해 가는 신세.]

[그래. 가서 죽느니.]

[어쩌면.]

 

뜻밖에도 허황한 꿈을 품은 자가 많았던지 몇몇 사람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흰 뱀이 하늘을 대신해 계시를 주었다.]

 

그렇다고 치자.

뒷말을 삼키고 앞 말만 뱉자, 뱉어 놓은 것만 꾸물꾸물 퍼져 나갔다. 도라지는 검으로 나뭇가지 하나를 착 베어냈다. 연한 그 가지 하나와 더불어 그의 과거가 함께 잘려나간 양, 도라지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었다.

 

일이 되려면 콧바람에도 적의 성벽이 무너지는 법이다.

 

요행히 손에 굴러 떨어진 빈 요새를 시작으로 우연이 우연을 불렀다. 주먹 깨나 쓴다는 자가 머리 깨나 쓴다는 자를 데리고 오고 마침 인근의 산적떼에 세가 밀려 우왕좌왕대던 장수 몇이 도라지와 손을 잡았다. 단숨에 하얀 뱀이 증거한 영웅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금세 늘었다. 운수란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다. 때가 선택하여 관을 씌워준 사람은 순풍을 만난 배와 같아서 정해진 항로를 유유히 타고 나아갔다.

 

도라지는 매번 얼떨결에 입성했다.

그리고 매번 얼떨결에 성주가 되었다.

 

자기가 왜 성주가 되는 지도 모르고 그저 어영부영 등 떠 밀리다 보니 성주였다. 다른 자들이 눈치를 보며 이 조그만 반역이 성공할지 어떨지 재는 틈에 뭘 잴 줄 모르는 도라지가 동그마니 성주의 의자에 남은 셈이었다.

 

[들통나는 게 아닐까?]

 

도라지는 자기 거짓말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자기 목이 툭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식은땀에 절어 깨어난 날이면 하늘은 더 높고 푸르러서 그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고, 옥을 깎아 만들어 붉은 비단을 깐 의자도 그저 촌집의 똥간처럼 징글맞았다.

 

[그때 그 뱀이.]

 

그 하얀 뱀 한 마리가 도라지의 시야를 스치던 날을 떠올리며, 도라지는 박석산 아래 사당을 지었다. 밤잠을 설치고 홀로 사당을 기웃거리자니 희고 서느런 것이 또 한 번 그의 눈 앞을 지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상서로운 뱀이시다.]

 

그때 그 뱀인 듯 하여 이름을 붙이고 술을 부었다. 덕분인지 우연인지 그날부터 그는 잠을 잘 잤다. 사당에 술 붓는 걸 거르지 않고 백 일. 도라지는 고전했다. 나라의 절반이 이미 도라지의 수중에 떨어진 후였다. 잘 되던 일이 지지부진하고 쉽게 이길 자리에서 이쪽 요새가 비바람에 부서졌다. 막 골라놓은 장수가 죽고 빼돌린 밀서가 사라졌다.

 

도라지는 뱀에게 제물을 바치기로 했다. 눈을 돌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뱀을 모시는 마음인지 그는 몰랐다. 구분할 수 없었을뿐더러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싯누런 뻘에 가죽신 신은 발을 파묻고 뱀을 외쳐 불렀다.

 

젊은 여자를 바쳤다.

다음 날 하늘이 거짓말처럼 개고 소선국 왕세손이 포로로 잡혔다.

 

사람을 바치고 또 바쳐 가며 도라지는 이겼다. 시작이 뭐였든 이제 피와 뱀과 승리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사람을 바쳐서 이겼는지 사람을 바치기 위해 이기려는지 그는 몰랐다. 어영부영 흰 뱀의 가호를 떠들던 순간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기분으로, 그는 소선국의 왕세자로부터 옥새를 빼앗았다.

 

상상한 적도 없는 월대(月臺)를 흙발로 올라, 도라지는 승전보가 성벽을 넘는 동안 우두커니 북면(北面)하였다. 아무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피에 젖은 옥좌가 비어 있었다. 그는 왕의 목을 가져온 용사를 치하하고 옥에 갇힌 태자 미상을 불렀다. 이제는 폐태자가 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남자를.

 

[딸을 내 놓으시게.]

 

그 말에 미상은 상처 하나 없이 멀끔한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딸은 죄 시집을 갔거나 너무 어리다고 답했다. 그때 숙공은 열 두어 살. 내놓지 못할 나이도 아니었으나 기실 그는 숙공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늘네도 숙공도 이름을 받아간 이후 한 번도 그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어리든 늙었든 상관 없어. 곧 피 흘리고 죽을 거니까.]

 

상서로운 뱀에게 제물로 바친다고 했다.

미상은 자신을 무릎 꿇린 남자의 말이 기가 막혔다. 제물이라니. 뱀이라니! 왕세자는 법도를 잊고 그만 도라지를 힐끔 올려다 보았다. 그에게도 아비의 정은 있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 사랑스러운 딸들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차마 아까웠다.

품에 끼고 보듬던 개 한 마리도 내놓으려면 가여운 법인데 제 핏줄임에랴.

 

[왜, 없다고는 못 하시겠지? 태자 전하. 아무 왕족 여인네라도 바칠까 하였는데 역시 공주가 좋아. 태자비를 달라 하기는 민망하니 어린 공주 하나쯤 천하를 위해 내 놓으시게.]

[차마, 차마, 그것이 차마…….]

[아니면 뭐야? 그대가 친히 죽으려고?]

 

눈을 치켜 뜬 미상은 도라지가 씩 웃는 광경에 얼굴이 붉어졌다. 네까짓 것이 그런 숭엄한 용기를 내겠는가 묻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니라고 답하고 싶은 욕망이 불쑥 치솟았다가 공포로 스러졌다. 미상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죽고 싶지 않았다. 못 들은 척 손끝만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태자 미상은 화려한 감옥으로 변해 버린 동궁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측근에 남았던 가엾은, 이제 어찌 생계를 유지하나 고민하던, 한때는 모두 나라 안에서 가장 귀한 신분이던 처첩들이 함께 머리를 짜냈다.

 

[그러고보니 그, 왜, 하나 있지? 냉궁에 틀어박힐 걸 그래도 먹고 살게 해준 그 아이말야.]

 

모두가 기뻐 모처럼 웃었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으셔서 이런 수를 마련해 두셨네!]

 

그에 미상이 신이 나서 대군곁을 불러 소식을 전했다. 숙공이 낙점 받았다는 말에 바늘네는 무너지듯 엎어져 한참 울었다. 울다가 달려가서 차라리 저를 보내달라고 호소했는데 물론 그간 한 번 얼굴 비친 적 없는 미상은 이번에도 만나주긴 커녕 글줄 하나 보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늘네가 어찌 하였는가 하면.



 

“……어찌 하였는데?”

 

춘이 화경의 품에 기대 물었다. 화경은 웃으며 답을 감췄다.

 

“뱀을 태워야지 다른 수가 없다는 건 참말이야, 스승님? 그 거북이가 스승님 그림에 질질 끌려서 돌아갔잖아. 정말 다른 수가 없어?”

“골칫거리를 없애고 싶으면 자기 손에 피를 묻히든, 아니면 자기 피를 흘리든 택해야지요. 남의 피만 쏟으려 들면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은 신령한 뱀이 요괴가 되게 했어?”

“제가요? 왜 죄다 제 짓이라고 여기실까.”

 

화경은 춘을 가볍게 안아 들고 방 바깥으로 나섰다. 손님이 들었나 난 흔적도 없이 사철 피는 복숭아꽃이 향기를 풍겼다. 춘은 스승의 품을 벗어나 좋아라 뛰어 다녔다. 보이지도 않는 향기를 쫓아 마당 끝에서 담장 끝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춤추듯 오갔다.

 

“뱀이 어디에서 왔는지 스승님은 알잖아? 그러면 스승님에게 책임이 있는 거지. 알면, 그런 거야.”

“저는 모릅니다.”

“거짓말.”

 

춘이 우뚝 멈추어 화경을 향했다. 화경은 그림 족자 저편으로 혼자 숨었다. 춘은 화가 나서 족자를 떼어 내 이리저리 흔들고 휘두르고 하다가 둘둘 말아 쌀독에 푹 꽂아 버렸다.

 

“쥐가 와서 쏠아도 춘이는 안 꺼내 주어야지.”

 

춘은 쌀독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스승이 장난스레 우는 소리를 하며 춘에게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렸다.

 

“이봐, 이봐.”

 

목소리가 쌀독에 꽂은 족자가 아니라 등 뒤에서 들렸다.

 

“이봐, 이봐. 거기 아리따운 종이 아씨.”

 

춘은 홱 돌아 보았다. 대문을 넘지 못한 거북이 뻐끔거리고 있었다. 돌아간 줄 알았던 어은이었다.

 

“종이 아씨, 이야기를 듣고 싶지? 내가 해 드리리다.”

“무슨 얘기? 거북이 너 스승님이 알면 도로 영영 거북이 된다? 빨리 돌아 가.”

“뱀 이야기를 마저 하고 냉큼 가지요. 아씨, 이리 와 봐요.”

 

어은은 아주 공손한 태도였다. 비굴하게 보일 만큼 곰살궂게 웃으면서 어은은 춘을 불렀다. 춘은 쌀독에 꽂은 족자로 손을 뻗었다가 망설임 끝에 거두어 들였다.

 

‘스승님은 고생 좀 해야 돼.’

 

그녀는 쫄래쫄래 어은을 향해 갔다.

화경 선생의 초막에서 멀어지기가 무섭게 그럴싸한 가마가 척하니 나타났다. 어은은 잔뜩 거드름 피우며 춘을 태웠지만, 춘은 가마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알 바가 아니었으므로 조금도 감탄하지 않았다. 어은은 가마꾼을 여럿 두고 부리는 일이 어떤 건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었다. 그래도 꾹 눌러 참고 용건을 꺼냈다.

 

“자. 그러니까…… 종이 아씨, 잘 들으시오.”

“응, 거북아. 듣고 있어.”

“깩!”

 

가마꾼이 주워듣고 자기를 우습게 볼까 싶었는지, 어은이 짜부라진 개구리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껏 모가지를 웅크렸다.

 

“거, 거, 아무데서나 거북이 거북이 하지 마시오! 내 이래 봬도 지금은 재상님을 모시는 몸으로 체면이라는 것이 있단 말이외다.”

“거북인 거북이지 뭘. 거북이가 날더러 종이 아씨라고 해도 나는 화 안 나는걸? 넌 왜 화를 내?”

“글쎄, 그게.”

“넌 네가 거북인 게 싫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오. 대저 인간이란 것들은 인간 아닌 걸 죄 우습게 본단 말이오.”

“우습게 보든 말든, 좋든 말든, 뭐 어쩌니? 넌 거북이잖아.”

“그건…… 그렇지요.”

 

어은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주둥이를 쑥 빼놓고는 기어이 덧붙였다.

 

“아, 아무튼 하지 마시오. 거북이라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남들 앞에서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된다는 것만 알아 두시오.”

“저런. 난 거짓말 못 해. 너도 하지 마, 거북아.”

“에이, 참. 그 참.”

 

구어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리 되면 별 수 없다. 어디 번잡한 데 풀어 놨다가 나만 곤란한 지경에 처하겠어. 곧장 재해산으로 가는 수밖에.’

 

그래서 그는 자기 상관에게 연통을 보내 놓고, 곧장 행렬을 돌려 재해산으로 향했다.

 

“종이 아씨, 잘 들으시오. 이제 그 뱀 이야긴데 말입니다. 아씨는 이래저래 궁금하신 게 많지요?”

“응. 뱀 이야기 듣고 싶어. 스승님이 다 말씀해 주지 않으셨잖아? 옛날에 바늘네라는 여자 딸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는 데까지 들었지. 그래서? 뭐 어찌 되었대? 바늘네는 딸을 바쳤어? 그 후로 뱀이 사람을 더 많이 먹게 됐을까?”

“그리 보채지 않으셔도 천천히 말씀해 드리리다. 어차피 재해산까지는 한참이요.”

 

어은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소열국 대비마마의 돌아가신 어머님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 젊을 적에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바늘네야 바늘네야’ 이리 불리셨다더군요.”

 

사연은 이렇다 한다.

 

 


 

 

딸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고 바로 다음 날, 바늘네는 굳게 마음을 먹고 홀로 길을 나섰다. 별 뾰족한 수도 없는 채 저잣거리 소문에 의지해 겨우 찾아간 곳은 인근의 어느 성읍이었다. 박석산 호선(狐仙)의 거처였다고도 하고 검선(劍仙)으로 이름난 녹주 신녀의 고향이란 소문도 도는 곳이었는데 당시에는 상당히 번성하여 매일같이 사람으로 넘쳤다.

 

흥청망청 장이 서고 뒷골목에서 세상의 온갖 귀하고 희한한 것이 다 굴러다니는 성읍에서 바늘네는 사흘을 헤매다가 화경 선생을 만났다.

 

그녀는 냅다 엎드려 화경 선생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생명줄처럼 붙들고는 빌었다. 하늘과 땅과 북두와 남두와 모든 물것과 나락에 떨어진 여우 신령에게 빌고 또 빌었다. 사라진 영명국의 마지막 왕후였다던 녹주 신녀의 이름을 입에 올려가며 정에 호소하고 야박하다 을러대며 눈물을 쏟았다.

 

[쇤네 듣기로 높은 분들은 말로써 발이 묶이고 발로써 빚을 지며 말로써 차마 뿌리치지 못하여 한 번 돌아본다 하더이다. 쇤네가 욕심을 부리고자 이리 귀한 분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오며, 다만 어린 딸의 목숨을 구하고저 함이니 자비를 베풀어 주사이다.]

 

바늘네가 화경 선생에게 수를 내 달라 그리 간절히 빌었으나, 선생은 청을 거절하였다 한다. 딸을 구할 방법이 더는 없구나 싶어 넋을 놓은 그녀를 보고, 근처의 어떤 자가 딱하게 여겼던지 주전부리를 나누어 주면서 꾀를 내었다.

 

[이 보오. 경열공(景說公) 같은 호걸이라면 힘없는 여인네를 가엾게 여길 줄 아실 테니, 한 번 호소해 봄이 어떠오?]

 

경열(景說)이라 함은 도라지가 그 즈음 얻은 이름이었다. 글 깨나 배웠던 이들이 구씨, 구 아무개, 도라지, 하고 마구 부르기엔 도라지가 제법 높은 자리까지 오른 탓이었다.

 

[어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쇤네가 나아가 빌어도 어디 높은 분들이 귀를 기울여 주셔야지요. 그림자 한 번 못 보고 물러나온 참입니다.]

[따님을 바치려면 한 번은 어전에 나아가지 않겠소? 그때 어린 딸을 두고 우선은 초상을 하나 그려서 가시구려.]

[초상이요? 그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이리 마주친 것도 인연이니 복덕을 짓는 셈 치고 도와 주리다. 마침 초상을 그릴 만한 이를 내가 잘 아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이 덕분으로 바늘네는 딸의 초상을 얻었다.

그리고 반신반의하며 도라지에게 나아가 초상을 바치며 다시 한 번 읍소하였다.

 

[쇤네의 아이는 이리도 어립니다. 그러하니 딸을 대신해 쇤네가 박석산으로 가게 해 주사이다.]

 

도라지가 제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정복자라 하여도 어린 계집애의 초상을 두고 보니 마음이 움직였다. 하기야 등 떠밀려 창칼을 쥐기 전까진 그도 순박한 촌백성이지 않았던가.

 

[저런. 아비의 정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름만 왕족으로 자란 계집애라니, 가엾구나.]

 

그리하여 도라지는 초상을 받고, 대신 바늘네를 뱀의 제물로 보내 주었다.

 

 


 

 

“……그래서 우리 대비마마께서는 내도록 선생을 원망하셨다 합니다. 어찌하여 화경 선생께서는 한 번 정을 베풀지 않으셨단 말인가? 어찌 홍진에 발 묶인 선인으로서 차라리 마음 한 번 돌리지도 못하셨던가? 하고 말입죠.”

 

춘은 어은이 한숨을 푹 쉬며 말을 멈출 때까지 얌전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은은 자기 이야기 솜씨가 제법인 모양이라고 내심 자화자찬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그래서? 뱀이 바늘네를 먹었어? 뱀이 왜 사람을 먹는데? 왜 다시 나타났는데? 이태 전부터 나타났다고 했잖아. 그 전엔 괜찮았던 거지? 한참이나 괜찮다가 왜 또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 먹어? 그 전에도 그랬어? 그 전엔 뱀이 달라고 안 했는데도 누군가 사람을 막 갖다 준 거지? 그랬지? 그런데 이제는 왜…….”

“아이고, 머리가 아프니 조용히 좀 해 보시오. 종이 아씨.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뱀이 다시 나타났고, 사람을 해치고, 그러니 그 놈을 잘 달래서 없애야 한다는 겁니다.”

“스승님이 산을 태워 버리면 된다고 했잖아. 태우면 안 돼?”

“안 됩니다!”

 

어은이 손사래를 쳤다. 춘이 영 불만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그는 흡사 큰 은혜라도 베풀 듯 은근한 얼굴로 춘을 바라 보았다.

 

“그리 궁금한 게 많으시니, 이건 어떻습니까? 종이 아씨.”

 

사실 그는 춘을 가마에 태울 적부터 이럴 작정이었다.

 

“아씨께서 친히 재해산으로 가셔서 뱀을 만나 보시는 거요. 직접 궁금한 걸 죄다 물어보시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가마가 우뚝 멈추어 서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상에! 그러면 되겠다, 거북아! 너 되게 똑똑하구나?”

 

춘은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어은도 메기 닮은 얼굴로 헤쭉 웃었다.

 

화경 선생을 끌어내 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선생의 제자를 끌어다 놓았으니 이제 상지 어르신도 면이 설 터였다.

 

‘주인의 복은 하인의 영광이라 하였다.’

 

아니, 그 반대던가?

어은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아무려면 어떠랴 싶어 히쭉 웃었다. 결국엔 다 좋게 끝이 날 터이고 그는 더욱 인간답게 재물을 누리게 되리라.

 

큰 재물을.

 

‘그러면 금으로 거북을 만들어야겠어.’

 

그러는 사이 가마는 무사히 재해산 기슭에 닿았다. 요사한 뱀이 나와 사람을 먹는다는 소문이 퍼진 탓인지 산 아래 마을은 뒤숭숭했다. 관에서 나온 병졸들이 어귀에 도열하여 눈을 빛냈다. 그 삼엄한 가운데로 천천히 들어선 가마에서 면화를 신은 퉁퉁한 발이 툭, 튀어 나왔다. 어은이 어기적어기적 내려 서서 손짓하자 새로 돋은 버들 잎 같은 소녀가 따라 내렸다.

춘이었다.

어은은 싸늘한 시선 속으로 춘을 떠밀어 놓았다.

 

“들으시오, 아씨. 이제 홀로 산으로 드실 거요. 우리가 다 여기에서 단단히 지켜 드릴 터이니 걱정 말고 가시구려. 해가 뉘엿뉘엿 지면 뱀이 툭 튀어나올 터이니 놀라지도 마시고.”

“안 놀라.”

“커다란 뱀을 만나면 무서우시겠지만 사람을 잡아 먹는 것만은 아니니 너무 떠실 것 없소.”

“안 떨어.”

 

뱀이 사람을 해친다는 말을 백 번쯤 했던 주제에 어은은 의뭉을 떨었다. 춘은 어차피 좀 찢어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보니 어은의 말을 내내 흘려 듣던 참이었다.

 

“뱀은 반드시 사람의 이름을 묻고,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그리고 팔을 물어 뜯는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뭐라 말을 한다는데, 그걸 온전히 기억하는 이가 없답니다. 다들 크게 놀라 그렇습죠. 사람이 어쩌고 저쩌고, 뭐 그런 소리일 게 뻔합니다.”

 

어은이 헛기침을 하며 몸을 낮추었다.

 

“아씨, 그 요물이 번잡스레 뭐라뭐라 지껄였을 터인데 실은 우리 나리께서 그걸 궁금해 하십니다. 알면…… 알면 뭘 할 수 있겠지요. 그…… 방비를 할 수 있을 겝니다. 하니 그걸 알아 오십시오.”

“내가?”

“아씨가 아니면 뉘가 합니까? 아씨만 혼자 들어가시는 거라니까요. 거 참, 그새 잊으셨구만.”

“안 잊었어. 그런데 꼭 뭘 알아와야 해? 안다고 뭘 해. 알면 인연만 엉키는 거라고 우리 스승님이 그랬어.”

“그러는 아씨도 뱀에게 궁금한 게 많아 여기까지 오신 게 아니오?”

“그렇지.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나도 뭘 알려다가 인연이 엉켰잖아? 거북이랑도 만나고 여기 사람들도 잔뜩 만나고. 이제 뱀도 만나겠지. 음…… 그러고보니 이미 다 엉켰구나?”

 

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경은 그녀를 데리고 바깥 나들이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림 속에서 불러낸 그녀는 쉽게 망가졌고, 화경은 온갖 도술로 뒤덮인 집에서도 몇 번이나 그녀를 고쳐 주어야 했다. 누군가를 만나고 아는 일은 그림에 불과한 춘을 쉽게 상하게 하는 길이라고, 화경은 누누이 이르곤 하였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뭐. 거북아. 내가 가서 뱀한테 물어봐 줄게. 사람들한테 뭐라고 했는지 말이야.”

“아이고! 이 거북이 마음이 참 든든합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소, 아씨.”

 

춘이 흔쾌히 답해 준 게 얼마나 좋았던지, 어은은 자기를 거북이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벌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나 한 양 기뻐하는 무리를 등 뒤에 남긴 채, 춘은 걸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이 금세 숲 그늘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는 걷는 동안 어은의 말을 되새겼다.

 

[사람의 이름을 묻고,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그리고 팔을 물어 뜯는다고 합디다.]

 

뱀은 왜 사람을 바라볼까?

왜 나타나서 사람을 먹어 치울까?

 

“맛있나? 맛이 그리 좋을까?”

 

춘은 이따금 이끼와 돌과 나무뿌리가 만나는 지점에 멈추어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참 배가 고프면 그리 되나? 스승님이 안 계시니 물어볼 수가 없네. 아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림 족자를 떼어 내서 댓돌에 살짝 엎어 놓기만 할 걸 그랬다.

돌돌 말아 쌀독에 처박지기까지는 하지 말 것을.

 

춘은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왜 뱀은 여기 사는 걸까? 왜 그렇게 오래 살지? 스승님도 왜 계속 살면서 왜 계속 묻는 거지? 춘은 잘 모르겠어.”

 

춘은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이야기를 듣자 궁금해서 몸이 달았다. 안다는 건 인연이 엉킨다는 것. 그 말은 참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진짜 인간도 아니고, 종이에 그린 그림에 불과하다. 죽지 않으니 두렵지 않았다.

두렵지 않으니 호기심은 온전하게 밝은 색채로 반짝거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뱀에게 갔다.

하나 예상과 달리 뱀을 만나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덩굴에 엉킨 잎사귀만 보아도 뱀인가 하여 기웃거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구름이 스쳐도 뱀인가 싶어 망설이느라, 춘의 걸음은 더없이 느렸다. 결국 하루 밤낮을 헤매다 겨우 낡은 사당을 발견했을 때쯤에는 그녀도 어지간한 움직임에는 질려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그녀를 염려해 온 화경이 보았더라면 복잡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춘은 지쳤다. 큰 요괴 덕분인지 산은 기괴하리만큼 고요했고 산토끼 한 마리 보이질 않았다. 이윽고 밤이 찾아와 시야가 막혀 버리자 그녀는 사당 바람벽에 기대 앉아 어깨를 감쌌다.

 

‘아이, 심심해. 재미 없어.’

 

끼니를 챙기지 않아도 허기 따위는 느낄 리 없는 몸이건만, 괜히 속이 허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어째 허여멀건 것이 보이는 듯도 싶었지만, 또 무슨 너럭바위 같은 것이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해 버렸다.

 

“뱀이고 뭐고 없구만, 뭘. 거짓말쟁이 거북이.”

 

춘은 낡디 낡은 사당 안을 흘끗 들여다 보았다.

쑥대밭이 된 내부에 찢어진 천과 썩어가는 제단이 보였고, 그 곁에 밤보다 더 한층 검은 것이 고여 있었다. 춘은 사당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것이 스르르 몸을 풀자 하얗고 반질반질한 것들이 오그르르 흩어졌다.

 

뼈였다.

 

희고 반들거리는, 무수히 많은 뼈.

 

춘은 그것을 하나 주워 들고 오래도록 들여다 보았다. 맡아 본 적 없는 냄새가 훅 풍겼다. 뱀 냄새였으나 그녀는 그게 뭔지 몰랐다. 모든 관심이 뼈에 들어붙었다. 정적 속에서, 밤보다도 검은 어둠 속에서, 춘의 눈동자 역시 닦아 놓은 조약돌처럼 반들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코 앞에 뱀 대가리가 보였다. 누런 눈동자가 수정 같은 피막에 싸여 빛났다. 춘은 뱀을 대신해 제가 눈을 한 번 끔벅거렸다.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몸을 빼낸 뱀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색이었다.

 

“왔구나.”

 

뱀이 말했다. 사당 안쪽 그늘에서 무언가를 하나 돌돌 싸매고 있던 뱀이 거대한 몸뚱어리를 스르르 풀었다.

 

“너는 너냐? 아니면 너 역시 잠깐 찾아온 사절이냐? 나는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실은 글을 쓸 수도 없어. 나는 거짓말을 했지. 한참 기다렸다. 오래 사는 신령한 생물인지라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야. 다만 지루하여서, 그래, 기다리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그저 조금 궁금해서, 그래서 묻는 거란다.”

 

사악사악 소리가 났다. 뱀의 몸뚱이가 스륵스륵 기어 춘을 감아 올렸다. 빙글빙글 돌아 아주 은근하고도 매끌거리는 비늘이 춘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리고 보기보다 교묘한 움직임으로 꼬리가 다가와 춘의 손아귀에서 뼈를 가져갔다.

 

“대답을 아니 해 줄 것이냐? 혹시, 네가 바로 ‘내 아기’냐? 응? 도사 놈에게 물어 진짜 몸을 가져온다 하였잖아? 이제 올 때가 되지 않았니? 내가 또 서둘렀더니? 응? 대답 좀 해 주렴.”

 

흰, 뾰죽한 대가리가 춘의 이마에 톡 닿았다. 춘은 그것이 응석을 피우는 양 여겨져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 아래 비늘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끈적거리는, 동굴 속 이끼 낀 바위 비슷한 감촉이었다.

 

“뱀은 말이 많구나. 심심해서 그래?”

“아. 드디어.”

 

뱀이 살짝 웃었다.

 

“드디어, 대답을 해 주는 구나. 내 아기야!”

 

내 아기!

그 울림이 하도 희한해서 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춘이는 아기가 아니야! 스승님은 아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춘은 다 컸는걸!”

“내가 오래 살았으니 너희는 다 아기란다. 그래, 하지만 참 오래 기다렸구나. 겨우 대답을 해 주는 이를 만났어. 아니, 아니다. 그리 오래는 아니었어. 실언이란다. 나는 잘 기다리는 이니까. 다만 아기에게 거짓말을…… 거짓이 아니야, 허풍. 허세, 그래, 허세를 부렸지. 아기야. 나는 실은 글을 몰라. 글을 몰라서 읽지 못했어…….”

“나도 글을 잘 모르는데. 아, 조금 몰라. 다 모르는 건 아니야. 근데, 스승님이 그러는데 배우면 된대.”

“스승?”

“응. 우리 스승님. 내가 쌀독에 처박아 놔서 나중에 혼날 지도 모르지만. 음, 근데 뱀아.”

“역시 너는 내 아기가 아니구나.”

 

뱀이 매우 실망스러운 듯 대가리를 푹 떨어뜨렸다. 녀석이 도로 그늘 속으로 되돌아갈까 싶어, 춘은 얼른 외쳐 불렀다.

 

“뱀아, 들어 봐봐.”

“그래. 말 하렴.”

“날 먹을 거니?”

 

그 말에 뱀은 쉭, 하고 불쾌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춘을 감았던 몸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신선이 되려면 업을 쌓아선 아니 되는 법이다. 한즉, 나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뱀은 심지어 우쭐거리기까지 했다. 춘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대하고 흰 생물이 다시 시커먼 어둠 속으로 파묻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녀석은 사당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반들거리는 뼈 무더기를 아무렇게나 툭툭 쳐내면서도, 무언가 희고 둥근 것 하나를 알처럼 소중히 품은 채. 사위가 하도 어두워서, 녀석의 대가리만 어둠 속에서 쑥 떠오른 것 같이 보였다.

 

“새로운 아가. 내 차례다. 좀 알려 다오. 내 아기는 언제 온다던?”

“네 아기가 누군데?”

“내 아기는 내 아기란다. 종이 인간이었지. 진짜 모습은 못 보아서 몰라. 오면 알아볼 수 있을 거다. 백 년도 안 지났으니까. 바로 어제 같은걸.”

“나는 그런 거 몰라. 아무튼 뱀아, 너는 그럼 사람 안 먹는 거지?”

“아무렴.”

 

그 말에, 춘은 미간을 좁히고 쫑알거렸다.

 

“그럼 여기서 사람 잡아 먹는 건 어느 뱀이야? 거북이가 가서 물어보고 오랬는데.”

“이 산에 뱀은 나밖에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 나는 신선이 될 요량이니 사람을 해치지 않아.”

“그치만…… 눈을 이렇게 쳐다보고 뭘 묻고, 그리고 팔을 물어 뜯는다던데? 그게 너 아니니?”

“팔.”

 

뱀은 겨우 알아들었는지 대가리를 좀 더 빼내어 춘과 시선을 맞추었다.

 

“아가가 보낸 사절인가 싶어 몇 녀석에게 물어는 보았지. 종이 인간들이 많기에 그 팔을 물어 먹과 물감을 얻은 적은 있단다. 아가에게 뭐라고 써 두려고.”

 

끝이 갈라진 혀가 춘의 손등을 두들기다 손목을 한 번 핥았다.

 

그리고는, 바로 이렇게! 하고 말하듯, 뱀의 주둥이가 쩍 벌어지더니 춘의 손목을 콱 깨물었다.

 

그럴 리가 없건만 춘은 뱀이 자신의 손목을 문 채로 씨익 웃었다고 생각했다.

 

찌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춘의 손목이 찢겨 나갔다. 타는 듯한 통증이 그녀를 꼬챙이 꿰듯 확 뚫고 지나갔다.

 

“아아아아악!”

 

춘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아파!

 

찢겨 나간 부위가 태워버린 종이 가장자리처럼 거멓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뱀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춘을 내려다 보면서 제 쪽이 더욱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외쳤다.

 

“왜! 어, 왜? 어째서? 어? 어! 어어! 어! 아가! 어,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너는 먹도 물감도 흘리지 않지? 왜?”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통에 벌벌 떠는 춘의 이마 위로, 뱀의 서늘한 숨결이 내려앉았다.

 

“아가…… 그러면 네가 바로 진짜 인간이니?”

 

춘의 의식이 푹 까라졌다.

 

‘스승님…….’

 

뱀은 춘의 몸뚱이를 대가리로 툭툭 치고 꼬리로 한 번 감아 올렸다가 툭 떨어뜨렸다. 처음 떨어뜨릴 적엔 마른 나뭇가지처럼 제법 묵직하던 것이, 두 번째 떨어뜨릴 적엔 넓적한 이파리처럼 가량가량하였다.

찢겨진 탓에 그림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잠들었니? 아가야. 거 참 이상하구나. 왜 네게서는 먹도 물감도 떨어지지 않는 게냐?”

 

뱀은 나동그라진 춘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인간이란 정신을 잃으면 살짝 깨물어서 깨우면 된다고 했다. 뱀에게 그걸 가르쳐 준 것은 바로 뱀이 아직도 기다리는 그 ‘아기’였다.

 

“미안하구나. 아가. 너를 좀 더 상하게 하마. 하지만 아주 살짝 깨물 거란다.”

 

뱀은 기어가서 구겨진 팔을, 이미 종이로 돌아간 그것을 혀로 한 번 건드렸다. 혀끝에 먹이 묻어 나왔다. 비로소 뱀은 다른 것을 떠올렸다.

 

“아가. 너는 혹 진짜 인간이니?”

 

당연히 춘은 대답하지 못했다. 팔이 떨어진 부분부터 검게 물들어가던 몸은 이제 반 넘게 종이로 변해 버려, 목소리는커녕 온기조차 날아간 지 오래였다. 뱀은 춘의 납작한 몸을 더 핥는 대신, 소중하게 품고 있던 둥그런 것을 가져와 데굴데굴 굴렸다.

알이 아니라, 희고 둥글고 오래된 해골이었다.

뱀이 해골의 가장 둥근 부분을 핥자 먹자국이 남았다.

 

“너도 대답을 하지 않을 모양이구나. 어찌하여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는단 말이냐? 내 알고 싶은 것은 다만 내 아기의 행방이거늘.”

 

해골 위의 먹자국은 꼭 어지러운 발자국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먹자국이었다. 그간 ‘아기’의 행방을 알기 위해 말을 붙여 보았던 자들은 하나같이 좀 더 질척하고 새빨간 먹을 흘렸건만, 이번에는 밟힌 솔방울이나 타고 남은 가을 풀 자리 비슷한 흔적만 남았을 뿐이었다.

 

“아가.”

 

듣는 이 없어 이미 ‘흔적’ 외에 아무 것도 아닌 자리를 내려다 보면서 ‘내 아기야’ 하고 속삭였을 때,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산을 그대에게 넘길 적에 바란 바는 오로지 안녕뿐이었거늘, 무슨 연유로 이리 파란을 일으키십니까? 재해산의 공자여. 하얀 뱀 나리여.”

“누구냐.”

 

뱀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도 창도 없는 벽에서 난 작은 틈이 달빛을 토해냈다. 빛줄기는 올곧게 뻗어 뱀의 꼬리를 비추었다. 뱀은 그것이 간지러워 꼬리를 치웠다. 산에 찾아 들었던 사람들의 팔을 물었을 때 흘렀던, 예의 그 붉고 질척한 ‘먹자국’이 거기 있었다.

 

‘먹자국’은 붉고도 느꺼웠다가, 이제는 말라붙어 흙바닥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색깔로 변했다.

 

먹자국이란 항상 그랬다.

물감도.

뚝뚝 흘러내리고, 천천히 마르고, 그리고 썩어버렸다.

 

‘아가’도 그랬다.

 

뱀이 옛일을 방금 전 일처럼 떠올리는 동안 달빛은 고였다. 낡은 사당의 고즈넉한 바닥 위에 고인 빛은 조금씩 둥글어지더니, 꾸물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처음 뵙습니다. 백사 나리.”

 

화경이었다.

 

“누구냐? 너도 종이 인간이냐? 아니면 내 아기가 보내서 왔더냐?”

“나리께서 찾는 분을 모셔 왔사오니, 대신 빈도의 몫을 돌려받고자 합니다.”

“오, 비로소 내 아기가 왔느냐?”

 

뱀은 반색하였다. 화경은 몸을 물렸다. 신선의 그늘에 숨었던 여자가 접선으로 반쯤 가렸던 얼굴을 천천히 드러내었다. 달이 수줍어 서둘러 이울 만큼 아름답고, 가을 국화가 두려워 재빨리 시들 만큼 우아한 여자였다. 둥그스름하고 흰 이마는 옥돌 같고 새치름한 눈매는 뒤집어 놓은 한 조각 조각배 같은. 작약에 모란을 더하고 첫 봄비를 보탠 듯한. 그야말로 불세출의 미인이었다. 늘씬한 키에 소박한 흰 의복을 걸치고 옥색 표대를 허리에 맨 그 여자는 우아하고도 연약해 보였으며,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잿빛이 섞였으되 얼핏 창백한 신월을 연상케하였다.

매초롬한 그 눈매는 붉었다.

여자는 나이 들었고, 이제는 오래 걷는 것이 힘에 부치는 듯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 한 번도 미색을 잃지 않은 사람 특유의 신산한 오만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뱀은 한참이나 여자를 들여다 보았다. 여자도 뱀을 지그시 응시했다. 다른 인간들처럼 두려워 떨지도 않았고 낯설어 도망치지도 않았다. 여자가 뱀에게 건넨 것은 오히려 오래 품어온 증오로 벼려진 시선이었다.

 

뱀은 고개를 저었다.

 

“내 아기가 아니구나. 그러나 비슷한 냄새가 난다. 너는 누구냐?”

“당신이 해친 이의 딸이외다.”

 

답하며, 여자는 형형한 눈을 더욱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혀에서 검을 뽑아내 상대를 찔러 버릴 듯 날카롭게 덧붙였다.

 

“하도 많은 사람을 해쳐 기억이나 하실지 모르겠군요.”

“모른다. 나는 사람을 해치지 않아. 그러면 업이 쌓여서 등선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여기에 술을 부으며 같이 바친 처녀가 수십 명은 족히 넘을 진대, 어찌 거짓을 고하시오?”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양 파안대소하였다. 화경은 한 걸음 곁에서 뱀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그의 반듯한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가가 잘못 되었구나.’

 

사실 춘을 멋모르는 아이로만 본 것이 단초가 되었다.

난만하기가 한 철만 사는 꽃 같은 것이 춘이었다. 겹채송화처럼 화사한 얼굴로 온갖 심술이며 장난을 쳐대는 걸 귀엽게만 보와 왔더니, 오늘은 기어이 스승을 화폭에 슬쩍 가두기 까지 할 줄이야. 화경은 화폭에 갇혀 쌀독에 거꾸로 꽂히는 수모를 겪고도 잠깐은 느긋하였다. 그 몹쓸 거북이 근처를 배회하다가 이때다 싶어 순진한 아이를 꾀어갈 줄은 몰랐다.

 

아까운 쌀독을 깨뜨리고 젯상에나 올리려고 오래 모았던 낟알을 사방으로 흩뜨리면서 겨우 놓여난 화경은, 구어은이 춘을 홀랑 집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기가 막힌 나머지 짜증도 나지 않았다. 갖은 고생 끝에 그림에서 불러내 겨우겨우 사람 꼴을 좀 갖추는가 싶었더니 세속의 독기를 쐬어 다 망칠 판이었다.

 

[처음부터 그 거북이도, 아니 애당초 딸을 그려달라는 청원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불평하며, 그는 곧장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소열국 왕궁에서도 구중심처라는 대비전으로 날아 들어 따졌다.

 

[숙공 아씨에게는 빈도가 별다른 빚이 없는데 어찌 이리 잔혹하게 구십니까?]

 

나비로 변했던 몸을 툭툭 털어 내고 본딧모습으로 하소연을 늘어놓자, 무료한 얼굴로 기대 앉았던 숙공이 자세를 바루며 쏘아붙였다.

 

[화경 선생인가? 당신이 만약 본궁의 가엾은 어머니를 도와 주셨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게요.]

[빈도가 무엇을 더 도와 드렸어야 합니까? 숙공 아씨, 빈도는 당신네들이 저 좋을 대로 떠들어대는 걸 모르는 척 해 왔습니다. 충분히 관대하지 않습니까?]

[하, 잘난 도사 나리를 두고 누가 그리 혀를 놀렸다고 그러시는지?]

[빈도는 숙공 아씨께 그저 인연의 도리(道理)를 다할 뿐, 갚아야 할 빚이라곤 전연 없습니다. 그런데 아씨의 수하가 제 귀인을 훔쳐 갔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빈도가 그이를 꼭 돌려 받아야겠으니, 아씨께서 동행해 주십시오.]

[어디로?]

[아씨의 백성들이 줄줄이 울며 넘었던 산으로 갑니다.]

[본궁의 가여운 어미가 뱀 요괴에게 잡아 먹힌 그 산으로? 좋소, 갑시다. 가서 그 뱀의 대가리를 쪼개 놓아야겠네.]

 

‘그리 하였는데.’

 

화경은 창백한 얼굴로 뱀을 돌아 보았다. 그 곁에 죽일 듯이 눈을 빛내며 선 숙공이 보였다.

 

‘크게 잘못 되었구나.’

 

게다가 남은 방법이 별로 없었다. 그는 숙공이 마음에 걸렸다. 안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앎이란 다만 더 많은 죄의식과 더 복잡한 인연의 연쇄에 다름 아니었으므로.

 

그런데도 방법이 더 없었다.

 

뱀은 이미 춘을 물어뜯었다. 찢긴 종잇조각은 대개 적당한 처치를 하여 붙이면 그만이었으나 범상한 인간이 아니라 오래 묵은 요괴에게 당한 탓에 문제가 컸다. 요괴의 독이 춘의 몸뚱이를 잠식하여 그녀는 이미 이지를 잃었고, 먹자국만 남고 말았다. 화경은 그녀의 먹이 옮겨 묻은 해골을 바라보았다.

 

[다정도 병인지라 네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게다. 감히 누구를 돕겠다 나서는 것조차 교만일진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화경아.]

 

스승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화경이 뱀과 숙공을 나란히 돌아보며 청했다.

 

“짓지 않은 죄로 손을 적신 것은 피차 일반이니, 죄의 시말을 함께 보러 가십시다.”

 

그는 오래묵은 해골 위의 먹 자국을 어루만졌다.

화경이 먹 위에 손끝을 붙인 것만으로도 그림은 차차 정교해졌고 주위는 마치 등불을 켠 듯 밝아오기 시작했다. 세상 제일가는 도사의 재주 덕분에 온 지면이 얼룩덜룩하게 물들더니 이내 거대한 그림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뱀과, 그 지척에 선 숙공이 차례차례 그림 속으로 걸어 사라졌다. 화경은 끝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앎은 때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기에. 그러나 아끼는 제자를 이대로 잃을 수는 없어, 그의 걸음도 묵직하게 그림 속으로 움직였다.

 

이제 옮겨 붙은 먹자국을 따라 끝까지 걷는 수밖에 없다.

 

 


 

 

오래 전 일이다.

그 시절, 성시는 전시라는 걸 믿기 어려울 만큼 흥성하였다. 오늘 살고 내일은 다시 없을 양 휘황한 청루가 늘어선 거리에서 화경은 발자국 소리 없이 걸었다. 발 아래 주인 잃은 동전이 밟혔다.

이내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도사 나리.]

 

옷자락을 잡아채는 손길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낯선 여자가 열렬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청이 있어 왔습니다. 모쪼록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는 망설였으나 오히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 그녀의 청에 응하기로 결심했다.

더 알면 더 깊이 정을 쏟는 법이었다.

눈에 한 번 담았던 것은 어느 때고 눈꺼풀 아래 들러붙은 것처럼 잔상을 남기게 마련이었다.

오래 살며 끝내 등선하지 못한, 그의 스승의 말에 따르자면 다정하여 병 깊은 화경 선생에겐 미련이 참 많았다.

 

[빈도가 들어 드릴 만한 일이라면 기꺼이 그리 하지요. 무엇을 바라십니까?]

[그림을 한 장 청하나이다.]

 

여자, 바늘네는 손을 놓치는 순간 이 수상한 도사가 연기처럼 사라지리라 믿는 사람같이 간절히 옷깃을 움켜쥐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림을 원하나이다. 제가 듣기로 도사 나리께서는 그림 한 장을 그려 진짜 사람과 똑같은 형상을 불러 내신다 하더이다. 나리, 제게 딸자식이 하나 있사온데…… 바라건대 딸을 꼭 닮은 계집애를 그려 주십시오.]

[딸을 닮은 종이 아씨가 필요하시다 이 말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허튼 짓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높은 분이 제 딸을 사지에 던져 넣으려 하시니 그를 대신하고자 함입니다. 부디 가엾은 어린것의 목숨을 돌보아 주십시오. 이 은혜 백골에 새겨 영영 잊지 아니하리니.]

 

‘바로 어제 같구나.’

 

해골에 깃든 기억을 들여다 보며 화경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소맷자락을 한 번 휘둘러 흐릿한 기억을 휙 몰아내어 버렸다. 소매에서 일어난 바람이 기억의 수면을 일그러뜨리자 모든 것이 물결처럼 빠르게 흘러 사라졌다.

 

“……그려드렸는가?”

 

곁에 붙어 선 숙공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어린 아씨를 한 번 뵈었습니다. 아씨는 그저 대접에 담긴 수단(水團)에 꽃가지가 얼비치는 것인 줄로만 아셨을 테지요. 수교위를 집어 먹느라 정신이 없던 그 까만 눈동자가 아직도 선합니다.”

“허, 본궁을 그리셨다? 하면 어찌하여 본궁의 어미가 험한 길을 가셨단 말인가?”

“누가 뜻을 바꾸었겠지요.”

 

화경은 갈필로 그은 선 안에 갇힌 양 막막한 시야를 흩고 또 흩었다. 검푸른 먼지가 피어 올랐다. 시야 저편에서 흰 뱀이 구물구물 기어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빈도는 틀림없이 종이 아씨를 그려 드렸습니다. 도력을 불어 넣어, 조심조심 걷고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는 어린 아씨를 만들었지요. 산에 바치면 저 흰 뱀 나리께서 보고 집어 먹든, 휘휘 감아 죽이든, 아니면 팽개쳐 두든, 좋을 대로 하시리라 믿었습니다. 이후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한데 세월이 물처럼 흐른 지금에 이르러 보니, 아씨는 빈도를 원망하고 계시고 소문은 영 다르게 났더군요.”

“그래. 도사께서 박정하여 본궁의 어미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들었네. 대왕께서 어머니를 가엾게 여겨 제 대신 산에 오르는 걸 허락해 주셨다고. 어머니께선 그 길로 뱀의 제물이 되셨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셨지.”

“풍문이야 그저 뭍에 내 놓은 생선에서 풍기는 냄새 같은 것이라, 빈도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진실이 아니면 아무래도 좋았으니. 예 와서 백사 나리가 품은 해골을 보고서야 알겠습니다. 아, 참으로 그 그림은 제물이 되지 못하였구나. 아씨의 모친이 산을 올랐구나.”

“대관절 그 연유가 무엇인가?”

“대관절, 그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화경은 되물었다. 숙공은 제 발치를 휘감은 흰 뱀을 내려다보았다. 뱀은 조금 전 현실에서 마주한 것에 비해 몹시 자그마했다. 가늘고, 매끄럽고, 작아서 정말이지 아무 수풀이나 찌르다 보면 툭 튀어나올 범상한 뱀 같았다. 산을 차지한 채 제사를 받아먹고 왕국을 무너뜨리고, 한 사내를 영웅으로 들어 올린 후 이제는 그저 길손을 해치는 요괴로 전락한 그런 대단한 생물처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뱀은 말을 하지도 않고 대가리를 들이밀어 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저 뱀이었다.

 

붓으로 한 번 쓱 그은 선처럼 생긴, 평범한 흰 뱀.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씨께서 어찌하여 이 나라의 국모 되셨겠습니까?”

 

답을 재촉하듯 화경이 다시 묻자 숙공은 할 말을 잃었다.

 

“본궁이 어찌 아는가?”

“결과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언제까지고 화창한 청춘 같은, 봄만을 누리듯 해사한 얼굴의 도사가 숙공을 똑바로 가리켰다. 그리고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덧붙였다.

 

“결과를 누리면서 연유를 알지 못한다 하시니 왜 그리 뻔뻔합니까?”

 

아무 것도 아닌 뱀이 숙공의 치맛자락을 파고 들었다. 묵직하게 발목을 휘감은 그것에 붙들린 양 그녀는 하릴없이 화경의 폭언을 뒤집어썼다. 도사는 아직 대왕이 아니었던 시절의 도라지를 보여 주었다. 바늘네의 기억 속에서 목소리로만 울릴 뿐이었던 거대한 사내를.

 

화경이 그려준 그림에서 나온 숙공은 진짜 숙공과 똑같았다.

옛날, 바늘네는 ‘그림’ 숙공을 데리고 도라지 앞에 나아갔다.

 

[홍복을 누리옵소서, 위대하신 분. 바라신 바 대의를 위해 쓰시라고 쇤네의 어린 딸을 바치나이다.]

 

바늘네가 절하며 어린 계집애를 곁에 세웠다. 옥색 비단으로 지은 장의를 걸치고 말갛게 선 ‘그림’ 계집애는 숙공 본인이 보기에도 어린 시절의 그녀를 쏙 빼닮았다. 그녀는 생생하고 아름다웠으며 어디를 보아도 진짜 인간일 뿐 결코 종이에서 튀어나온 가짜같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당시 도라지는 아직 건달 시절의 행동이 몸에 남아, 절차를 별로 따지지 않고 몹시 자유분방했다. 그는 단숨에 높은 대를 벗어나 쿵쿵 발을 울리며 다가와 계집애 앞에 섰다.

 

[숙공이라고 하옵니다.]

[연치는 이칠(14세)쯤 되었고?]

[겨우 이륙(12세)이옵니다. 나리.]

[그렇구나.]

 

도라지는 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그림’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아주 한참동안 침묵한 후 들릴 듯 말 듯 되뇌었다.

 

[……그렇구나.]

 

바늘네는 고두(叩頭)한 채로 도라지가 명을 내리기를 기다리다가 의아하여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값비싼 가죽신 코끝이 그녀의 시야에 걸려, 그녀는 도라지가 감히 내려 섰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화들짝 놀란 바늘네의 머리 위로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칠도 되지 않은 아이를 사지로 보내니 그것은 군주된 자의 할 바가 못된다. 이것이 본인의 뜻이라. 재고하건대…….]

 

그나마 그녀를 동정하여 가까이 지냈던 내관이 초조하게 도라지의 낯을 살폈다. 이제 모두가 감히 도라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려 경열공이라 칭하는 남자가 깊이 가라앉은 눈을 들어 좌중을 향했다.

 

[……숙공의 어미로 하여금 그 여식을 대신하도록 허하노라. 숙공은 항아로 삼아 어미의 공을 누리게 하라.]

[나리!]

 

바늘네의 목에서 찢어질 듯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도라지는 시커먼 정념이 뚝뚝 흘러 떨어지는 얼굴로 돌아서서 제 몫의 의자로 돌아갔다.

기억을 지켜보던 숙공이 새하얗게 질린 채 외쳤다.

 

“본궁은 종이에서 나오지 않았노라. 틀림없는 사람이다.”

 

화경이 답했다.

 

“압니다. 그러기에 결과를 누리며 살아 계시지요.”

 

숙공의 치맛자락 아래에서 아주 가느다랗고 작은 흰 뱀이 기어 나와 기억 속의 바늘네를 향했다. 바늘네의 떨리는 등이 이지러지며 모래 바람이 세상을 뒤덮었다.

 

기억은 거칠거칠했고 목소리는 이내 멀어졌다.

숙공은 기억 속의 젊은 어머니가 두 주먹을 꼭 쥐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바로 다음 순간, 바늘네는 창칼을 든 병사와 제관에게 둘러싸여 황폐한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술 한 잔을 끼얹으며 제문을 읊은 자리에 흰 뱀이 또아리를 틀었다. 푸른 잎 하나가 떨어져 뱀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뱀은 대가리를 치켜 들었고, 숙공이 아는 바와 같이 거대한 그것이 사뭇 요괴다운 움직임으로 튀어나왔다.

 

바늘네는 홀로 남아 웅크리고 앉은 채 덤불 너머에서 고개를 내민 뱀을 바라보았다.

 

[너는 뭐냐?]

 

뱀이 물었다.

 

[제물입니다.]

 

바늘네가 답했다.

 

[제물이 무엇이냐?]

[그간 어르신께 바친 제물을 흠향하지 않으셨습니까? 여기 저 말고도 다른 처자들이 많았을 터입니다.]

[처자? 인간 말이냐? 인간은 많지. 이몸이 하마 몇 해나 여기서 수행을 쌓고 있는데 인간을 모르겠냐? 그래, 너는 인간이구나. 하여서? 인간이 처자냐? 인간은 제물이냐? 제물은 그저 인간이더냐?]

 

뱀의 질문에 말을 잃고서 바늘네는 비로소 주위를 둘러 보았다. 흩어진 뼈 사이에서 자란 풀과 뿌리가 드러난 나무. 앙상한 가지 너머로 흐르는 구름. 술 냄새. 향 냄새.

 

뱀.

 

[어르신께서는…… 저를 해치지 않으십니까?]

 

바늘네는 하도 공교로워 뱀에게 물었다. 그 맹랑한 질문에도 뱀은 답하지 않고 시든 풀잎이며 썩어버린 나무등걸을 휘휘 감고 꼬리 장난을 쳤다.

 

[어르신.]

[성가시게 구는 구나. 왜 해치라고 야단이냐? 너는 여기 죽으러 왔더냐? 왜? 뱀에게 물려 죽는 걸 숙원으로 여겼더냐? 어찌하여? 이 보렴, 아기야.]

 

뱀의 목소리가 꽤나 다정하여, 바늘네는 놀랐다. 거대한데도 비늘이 매끄러워서 오랜 영물이라기보다 한창 때의 청년 같은 목소리로 뱀은 노인처럼 조곤조곤 덧붙였다.

 

[아기야. 내가 만약 사람을 해치면 등선을 하지 못한단다. 훌훌 벗고 이왕이면 높은 영수(靈獸) 되어서 오래도록 이 산을 지킬까 한다.]

 

바늘네는 거칠게 호흡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간 해 온 인신공양이 모두 헛것이었다니. 뱀은 제가 사람을 상하게 만든 줄 전연 모르는 것이다. 그녀는 그만 한숨을 폭 쉬었다.

 

‘가여워라. 벌써 일을 다 그르친 걸 알면 얼마나 서러울까.’

 

가여워서 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어떠냐? 아가. 곧 될 성 싶으냐? 응?]

[곧 이루실 것입니다.]

 

가엾다 생각하니 목소리가 절로 부드러워졌다. 바늘네의 자그마한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뱀은 한껏 뻐기기 시작했다.

 

[아가. 예 살던 호선생 이야기를 좀 해 주랴?]

 

바늘네의 입가에 떠오르는 흐릿한 미소와 함께 사위가 검은 모래로 변해 내려앉았다. 뱀이 조곤조곤 바늘네를 향해 온갖 옛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사방이 일렁일렁, 밤 호수에 거꾸러진 밤하늘처럼 흔들거렸다. 금빛 모래가 흘러 떨어진 별빛처럼 흩날렸다. 숙공은 빛 바랜 머리카락에 엉겨 붙는 모래를 털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녀가 묻자 화경이 답했다.

 

“바로 빈도의 가여운 제자입니다.”

 

숙공이 돌아보았다.

 

“이 먼지가?”

“찢겨 남의 기억 사이에 흩어진, 어린 춘입니다.”

“네 제자가 뱀이라는 말이더냐 흩날리는 모래란 말이더냐?”

“그 모든 것입니다. 나무가 되었다가 여울이 되었다가 저 평원에 버려진 가죽신 한짝이 되었다가 이제는 저 태감의 뒤통수가 되는, 이 모든 기억입니다. 이 아이는무엇이라도 되지요. 제자가 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기 전까지는 피의 주인의 기억 속에서 이것이었다가 또 저것일 겁니다.”

 

화경은 붉은 모래 폭풍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숙공에게 붓 한 자루를 건네 주었다.

 

“아씨께서 친히 이것을 들고 저 모든 것 속으로 나아가, 빈도의 가여운 제자를 주워 와 주십시오.”

“본궁은 신선도 아니고 심지어 화공조차 아닌데 어찌 이것을 본궁에게 주느냐?”

“그럼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빈도의 가여운 제자는 이미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그애는 저 먼지 틈새에서 빙빙 돌 뿐 끝내 되돌아나올 수 없겠으니 후회가 많은 인간이 가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허, 감히 본궁이 후회가 많은 인간이라는 겐가?”

“머뭇거리지 않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아씨께서도 자연 그러하실 테지요.”

 

숙공이 자기 손에 들린 붓을 내려다 보았다. 여우 꼬리처럼 탐스러운 털이 달린 검은 자루에는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선생. 선생은 후회도 미련도 없는가?”

“빈도는 감히 선술을 익혀 상천과 중천의 경계를 넘나들거니 후회와 미련을 꿈꾸지 않습니다.”

“흥, 정녕 자네가 후회도 미련도 없을 테면 상천의 신선이 되었을 게 아닌가?”

“없다 하지 않았습니다.”

 

화경이 드물게도 그 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벽에 그린 그림 같이 보이던 사내가 한 순간 흐드러진 복숭아 꽃가지처럼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자금(紫禁)의 기둥 사이를 거닐며 홍진의 가장 높은 누각에 올라 온 세상 미인을 두루 구경하며 살아온 숙공조차 한 순간 시선을 빼앗길 만큼 화려하였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화경 선생은 왕조가 태어나고 시드는 내내 저 모습 그대로 살았다 하거늘, 그에게도 후회와 미련이 있을 터인가?’

 

그 말을 듣기나 한 듯, 화경이 입을 열었다.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돌아섰다.

 

“아씨께서 그 붓으로 길을 그려, 빈도의 제자를 데려와 주십시오. 지겹도록 옛일을 되새기다 보면 뱀이 허물을 벗듯 기억도 벗겨져 허옇게 말라버릴 터입니다.”

 

푸른 물결을 헤치고 거닐 때조차 홀로 정월의 달처럼 흰 사내가 걸었다. 붉은 물감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것 같은 막막한 저편으로 천천히 걸어 멀어져 갔다. 숙공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주름진 손가락을 다급하게 뻗어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가 미끄러졌다.

 

“화경 선생!”

 

숙공은 분주하게 발을 놀려, 무심히도 멀어져 가는 신선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이 기괴한 세계에 홀로 내버려질까 싶어 더럭 겁을 먹었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래도록 품어 온 한이, 원망이, 그녀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다.

 

‘내 어머니에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면 대체 왜 어머니가 산으로 왔단 말인가. 왕께서 어머니를 보냈다고 하였지? 아까 본 것이 어머니의 기억이라고 저 신선은 주장하는 게지? 그러나 그게 참말이겠는가? 기억만큼 못 믿을 것도 없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기억이 아니야. 이것이…….’

 

숙공은 걸었다.

숨이 턱에 차도록 걷고 또 걸었다.

한참만에 양지 바른 볕을 만나 겨우 숨을 돌리자, 발 아래에 들러붙은 그림자로부터 주위 풍경이 일변하였다. 눈을 깜박인 후에는 몸이 전에 없이 가볍고 눈에 비친 제 팔다리가 늘씬하여, 숙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봄이었다.

 

대낮이었고, 더하여 남은 하루는 징그럽게도 길 예정이었다.

낯익고도 낯선 초막이 눈에 들어왔다. 숙공의 걸음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댓싸리를 엮어 세운 담장이 반, 나머지 반은 돌과 나무를 쌓아 만들다가 허물어지면 허물어진 대로 방치한 상태였다. 손바닥만한 마당에는 민들레꽃이 가득했다. 개도 닭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적적한 집이었다.

 

숙공 자신이 열 두 살쯤 머물던 바로 그 집이었다. 숙공은 낡은 방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열두 살의 봄.

바람은 소리없이 고였고 꽃잎은 물올랐다. 아무것도 상하지 않을 만큼 온화한 나날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수심에 젖을 때, 그 상실은 어린 그녀를 오히려 돋보이게 꾸며 주었다. 툭 치면 부서질 듯 알량한 방문이 열리고 섬돌로 발을 뻗는 어린 계집아이, 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어렸던 모습으로부터 저도 모르게 몸을 감췄다. 담장은 늙은 숙공의 몸뚱이는 커녕 그림자도 다 감춰 주지 못할 터였는데도.

열 두 살 숙공은 어리고 아름다웠다. 수심 깊은 얼굴조차 빛이 났다.

너무나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숙공은 눈물이 났다. 그리도 거지같이 가여운 삶이라 여겼건만 기억 속에서는 징글맞게도 싱그러웠기에.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건만, 기억 속에서 마주치니 이상하리만큼 정겨웠기에.

그것이 도리어 서러웠다.

 

“아씨.”

 

어린 숙공을 향해 곰살맞게 인사를 건네며 들어서는 사람은, 그녀가 익히 아는 자였다.

다름아닌 상지.

구중심처에서 손 꼽힐 만큼 권력을 얻어, 이제는 사례감에서도 첫 손 꼽히는 태감으로 자리 잡은 그 상지의 수십 해 전 모습이었다.

그는 본디 소선국의 관료로 소년급제한 귀한 몸이었다. 비단에 파묻혀 태어나, 금으로 칠한 들보 아래 자랐으며,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이름난 학자들이었다. 그의 가문은 소선국이 서기 전부터 토호였으며 항시 이기는 쪽을 택하였기에 아름다운 이야기만에 서책에 남았다. 이를테면 소년 상지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 한숨 한 번으로 용도 때려잡을 듯 양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운수란 기이한 것이다. 관료였던 그가 군주에게 사소한 죄를 범한 후 그는 우스꽝스러워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순식간에 위세가 꺾였다. 한 번 잘못한 선택은 두 번 실수를 불렀고, 어느새 누대에 걸쳤던 위명은 그의 문중과 함께 봄꽃이 져버리듯 스러져 알량하니 상지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필시 상지에게도 자랑할 만한 성씨가 있었을 터이나, 그 즈음 상지는 이제 죄를 범하여 거세 당하고 온 천하의 웃음거리로 전락하여 그 자신이 상지라고 불린다는 것말고는 아낄 게 없는 신세였다.

그 즈음이란 도라지가 경열공으로 불리기 시작하던 때다.

죄를 짓고 거세하여 환관이 된 후에도 꺾이지 않고 설욕할 기회를 엿보는 상지에게서 도라지는 자기 자신을 보았던 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도라지는 이겼고, 왕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상지는 그의 조상들이 그러했듯 자신이 ‘이기는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진탕으로 변한 자신의 길을 다시 비단으로 뒤덮고 싶었다. 

 

“아씨, 어리고 가여운 아씨. 아십니까? 대왕께서 자비를 베풀어 아씨를 구명하여 주었으니, 이 향긋한 밥과 차도 대왕의 은덕입니다.”

 

환관으로 일하던 상지가 가장 자신했던 것은 다름아닌 욕망의 향방을 기민하게 읽는 것이었다.

상지는 홀로된 숙공을 이따금 찾아와 돌보고 가엾게 여겨 주었는데, 숙공이 슬슬 마음을 열 무렵이 되자 거처를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그는 숙공이 철이 들 무렵부터 끝없이 속삭였다.

 

“아씨. 우리 대왕께서 아씨를 가여이 여겨 자비를 베푸셨던 일을 기억하소서.”

 

그녀를 돌보는 이들이 누누이 속삭여 익히 아는 이야기였다. 박정한 신선을 찾아가 애걸하다 내쫓긴 어미를 왕이 어여삐 보아, 그 딸을 제물에서 면해 주었다는 미담. 어렸던 숙공은 귀에 인이 박히도록 대왕을 향한 찬양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결국 내 대신 어머니의 목숨을 받아 갔을 뿐이지 않아? 대체 어디가 자비로운 거야?’

 

다만 숙공은 조숙했다. 내심 조소하면서도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만큼은. 숙공을 돌보아주는 이들은 당연히 모두 상지의 돈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이들이 돌아가며 속삭이자 숙공은 방년이 되기도 전에 상지의 애걸 앞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리 자애로운 대왕께서는 실은 외로운 분이십니다. 아씨같은 무구한 분께서 대왕을 위해 부디 정을 베풀어 주소서."

 

어린애가 정을 베풀어야 할 만큼 외로운 이가 세상엔 있을 터이나 그게 저 용상의 주인일 리 천부당만부당한 일. 다 알면서도 가장 많이 가진 이 앞에 무릎을 꿇는 김에 '이는 결코 굴종이 아니라 다만 가여워 연민을 베푸는 일' 하고 자신을 달랠 뿐이다.

강자가 고개를 숙일 때는 여타의 변명이 필요치 않다.

약자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찧어야 할 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야만 한다.

충의. 결의. 의리. 예의. 은원과 사랑.

 

숙공은 도라지가 경열공으로 불릴 무렵 어머니를 잃었다. 그가 더 높이 올라 새 왕국의 천자가 된 후에는 기어이 후궁으로 입궁했다.

그녀의 뒷배는 군주의 신임을 받는 상지였고 숙공은 처음 궐에 든 순간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모든 것이 이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숙공이 모르는 왕은 숙공을 알았고, 그녀가 외우듯 기억한 '군주의 자비'는 이제 일종의 빚이 되어 그녀 앞에 떨어졌다. 궁궐의 삶을 견뎌내며 그녀는 내도록 그 빚을 갚아나가야만 했다.

 

약한 계집애는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리 많은 빚을 지게 마련이었다.

군주의 자비라는 빚.

상지가 생활을 보살펴주었다는 그 빚.

돌아보면 어린 계집애의 버선 한 켤레까지 다 갚아야할 것이었다. 궐에 들어 머리에 꽂은 비녀 하나, 얻어 마신 차 한 잔까지 모조리 주고 받아야 할 빚이 되었듯이.

 

살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했다.

그리 여기자면 왕이 부린 모든 변덕조차 자비가 맞았다. 그의 변덕으로 인해 숙공 자신이 살아남았으니, 결과가 어찌 되었건 의도가 무엇이건 대왕은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다. 권력이란 매양 그러한것. 씨알만한 자비조차 하늘 전체만큼 거룩한 것. 그래서 숙공은 믿었다. 태감인 상지가 자신을 가엾게 여겨 후궁 자리를 주선했으리라고. 또한 왕은 가여운 여인네를 제물로 보낸 미안함 때문에 그 딸을 맞이해 금은보화를 안겨 주었으리라고.

 

‘저 차디찬 용상에 그런 아기자기한 마음이 있을리야?’

 

하고 의심이 고개를 들 때면 눈을 돌렸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다. 구중심처란 그 화려함 만큼이나 사소한 얼룩도 크게 여기는 곳이었기에.

 

‘그 신선 때문이다.’

 

숙공은 눈물 지을 때마다 떠올렸다.

 

‘그 신선이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득 발을 멈추었고 자신이 아까와 똑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숙공은 이제 홀로 숲길에 서 있었다. 열 두 살의 가엾고 기댈 곳 없는 숙공도, 그녀를 찾아와 고개를 숙이던 젊은 상지도 없는 길가였다.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에 어떤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 어깨를 덮고 앉은 그 얼굴이 낯익었다. 숙공 자신의 기억 속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러나 어딘지 다른 사람 같은, 그런 얼굴.

 

바늘네였다.

숙공의 어머니였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젊었다. 열 두어 살에 헤어져 다시는 못 보게 된 어머니. 언제나 올려다 보던 그 얼굴을 이제와서 내려다 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숙공이 손을 뻗기 전에 바늘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뱀 나리.]

 

숙공은 젊은 어머니가 자신 너머에서 보고 있을, 거대한 뱀을 떠올렸다. 축축한 숨결이 정수리를 타고 흘렀다.

 

[그러면 어르신은 호선생의 제자신가요?]

 

바늘네의 질문에 뱀이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 은원을 아는 영물이니 그 노인네의 제자일 리가 있겠느냐? 그 노인네는 말이다, 아주 어리석은 양반이었단다.]

 

뱀이 둘둘 또아리를 틀고 앉아 바늘네에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 양반이 어찌 어리석은 양반이었는가요?”

 

 


 

 

춘은 바늘네의 곁을 얼쩡거리고, 뱀의 잔등을 타고 오르고, 돌과 먼지와 나무와 풀을 헤집다가 지쳐서 털썩 주저 앉았다. 낯선 여자를 향해 아가, 하고 부르는 뱀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이 주위에는 산 것이 그 둘 뿐이었다. 뱀과 여자. 여자와 뱀. 춘은 하릴없이 뱀의 이야기나 듣기로 했다.

 

‘그런데 박석산 호선생이면 우리 스승님의 스승님이시지?’

 

곁가지로 스승 이야기도 좀 묻어 나오면 좋을 터인데.

날 때부터 잘난 신선인 양 빤드르르한 얼굴로 새침을 떠는 스승을 놀릴 만한 거리가 좀 있으면 그 아니 재미있겠는가 말이다.

어린 춘은 이제 팔이 찢어지고 온 몸이 산산이 먹물로 흩어지면서 느꼈던 고통 따윈 잊고, 어린아이다운 명랑함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막막한 곳에 갇힐 거라고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았다. 밤은 밝게 마련이고 뒤엉킨 것은 풀리게 돼 있으니, 한창 외롭고 나면 또 번잡해지지 않겠는가?

 

“호선생은 어리석고 말고. 그 호선생은 본디 신유림에서 노닐던 귀한 몸이거든. 박석산으로 숨어들어 조용히 제자를 길렀는데 홍진(紅塵)의 때가 씻겨 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그 슬하에 겨우 둘이 남았다더라. 그 긴 세월 이리저리 치이고 업을 쌓고 해 가면서 제자를 들였건만 남은 게 둘이라니 우스운 일 아니냐? 아가. 애당초 사람 자식을 들이지 말지. 저도 하늘 여우였으면서 어찌 그걸 몰라?”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츳, 츳, 안쓰러워하였다. 곁에 바짝 붙어 앉았던 춘은 바늘네의 둔한 몸뚱이가 뱀 앞에서 내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림에서 튀어나와 안온하게 스승이 지어 놓은 집에서 자란 춘에게 있어 꽤나 생경한 감각이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고 목구멍이 바싹바싹 말랐다. 뻑뻑한 눈으로 열이 슬슬 올랐다. 춘은 주저앉고 싶었고 벌렁 드러눕고 싶었다. 뼈마디가 쑤시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산 속에서 맞는 밤은 상당히 추웠다.

 

“선생은 검선(劍仙) 녹주와 화선(畵仙) 화경을 거두었는데.”

“저도 압니다. 화경 선생은 세상 무엇이든 그림 속에 담아두고, 무엇이든 그려서 꺼낼 수 있다더군요.”

 

바로 그 화경에게 청해 자기 딸을 그렸으면서, 바늘네는 모른 척 말했다. 뱀이 반색했다.

 

“아, 그 신선을 만난 적이 있었느냐? 아가. 그림 속에서 진짜와 똑같은 산과 들을 꺼낸다니 우스운 재주다. 호수에 비친 달이랑 다를 바가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내가 어느 날은 웅덩이에 고인 물을 이렇게 들여다 보았더니만 흐드러진 명자나무 꽃이며 퍼런 하늘이 생생하였단다. 그런데 이 배를 쑥 들이밀고 기어가 보았더니 비늘엔 꽃향기도 하늘 빛깔도 한 점 묻지 않고 흙탕물만 배기지 않았겠니? 물에 다 비쳐 담겼단들 진짜가 아니었던 게야.”

“진짜가 아니나 진짜를 고스란히 비추어 주니, 가히 대단한 재주가 아닙니까? 제게는 그 재주가 간절했지요.”

“아가는 그 신선을 만났구나. 원하는 걸 얻었느냐?”

 

뱀의 비늘은 밤 공기보다도 차게 느껴졌다. 바늘네는 퍼렇게 질린 입술을 벌벌 떨었다. 하늘은 높고 어둡고 숲은 깊어서 사위는 온통 축축했다. 바늘네는 서서히 얼어붙었다.

 

“얻고 말고요.”

 

바늘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얻었사오나 진짜가 왔답니다. 거짓을 가져갔더니 하잘것없는 진짜를 바치라 하였기에.”

 

바늘네가 떨자 뱀이 잎사귀를 잔뜩 물어와 주었다. 바늘네의 어깨에 뭔가를 덮어주며 돌보아 준 이는 뱀이 처음이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다독다독 우리 아가. 뱀은 산 곳곳에서 녹슬어 가던 부러진 창, 구부러진 숟가락, 헤어진 신발과 찢긴 저고리를 하나 둘 물어왔다.

 

“박석산에서 제자를 둘 길렀던 호선생은 긴 세월 걸쳐 면벽수행을 하였어도 등선하지 못했단다.”

 

뱀은 호선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늘어놓으며, 바늘네 앞에서 은근히 허세를 부렸다. 이파리 하나에도 고마워하는 그 ‘아기’가 뱀은 슬슬 마음에 든 참이었다.

 

“여우보단 역시 이 뱀이 훨씬 뛰어난 게지.”

“참말로 대단하십니다, 뱀님. 곧 등선하시겠지요.”

 

바늘네는 뱀이 가여웠다. 뱀 자신은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저 산 아래에선 뱀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바쳐 왔던 것이다. 목숨을 앗는 것은 중죄이니, 그런 죄에 연루된 뱀이 하늘로 불려 올라갈 날 따윈 오지 않을 터였다.

 

‘가엾어라!’

 

박석산 호선생은 녹주와 화경이라는 유명한 도사들을 제자로 두었으나, 결국 여우 구슬이 없어 등선하지 못했다 한다. 뱀은 바늘네의 허리를 둘둘 감고 속삭였다.

 

“여우구슬을 바로 그 제자들이 가져간 거야. 제자 놈들에게 뺏긴 게지. 참으로 어리석은 여우가 아닐 수 없다. 속세와 멀리 하여야 큰 도에 이르는 법이거늘, 어찌 피 냄새 살 냄새 풍기는 인간들을 거두었단 말이냐? 안 그러냐?”

“뱀 님도 저를 거두지 않으셨습니까?”

“내 아기, 너와는 다르단다. 너는 내 제자도 아니고 내 적도 아니며, 내 피붙이도 아니니 너는 그저 이 잎사귀 하나와 다르지 않단다.”

 

뱀이 저 스스로 떨어진 감잎 하나를 물고와 바늘네의 몽당치마에 톡 떨구었다. 스스로 시들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곁을 지켜 주마, 하고 뱀은 약조하였다. 바늘네는 잎사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약조해 주십시오, 나리. 다른 이들 눈에 띄지 않고, 저와 여기에 숨어 살아가겠다고.”

 

영웅을 만든 뱀은 이제 사라졌다고 하자.

더는 사람 제물이 없어도 된다고, 고요한 산이 되었다고, 모두가 믿도록 하자.

그러면 저 바깥에서 바늘네의 어린 딸은 무럭무럭 자랄 테고, 인적이 드물어진 이 산중에서는 그럭저럭 여러 계절이 차례차례 지날 테고, 이윽고 바늘네는 뱀 곁에서 시들어 죽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녀를 위해 잎사귀를 따 내미는 이의 곁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닥쳤다. 한없이 신선에 가까운 뱀도 본성을 완전히 벗지 못해, 기운이 빠져 낡은 사당 깊숙한 곳에 즐겨 또아리를 틀었다. 바늘네는 추위에 떨었다. 산을 내려갈 수는 없었기에 산 곳곳을 누비며 무엇이든 사람 흔적을 찾곤 했다. 그렇게 봄이 올 때쯤, 바늘네는 매우 쇠약해지고 말았다. 뱀은 버석대는 갈잎처럼 시들거리는 바늘네에게 덜 벗겨진 밤송이를 주워다 주었다. 보들보들한 털로 뒤덮인 새순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죽이지 않는 뱀은 삼라만상의 아름다운 결들을 선보일 수는 있을 망정 죽어가는 바늘네를 배부르게 하지는 못했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몰래 바늘네를 보러 왔다.

바늘네의 딸을 대신 맡아주었던 환관, 상지였다. 바늘네의 이름마저 잊었을 법한 그가 잘 꾸민 웃음을 지으며 어찌나 어제 본 양 반가워하는지 몰랐다. 상지와 그의 무리는 때마침 뱀이 깊은 굴로 기어들어간 틈에 바늘네와 조우했다. 산은 드물게도 조용했고 날도 맑았다. 상지가 한 광주리 가득 먹을 것을 가져왔으므로, 바늘네는 그것을 받았다. 사슴고기 한 입과 말린 두부를 씹어 삼키자마자 상지가 물었다.

 

“이보게, 그림이 점점 흐려지고 있네. 어찌하면 좋은가?”

“그걸 왜 쇤네에게 묻습니까?”

“상감마마께서 그 항아를 심히 아끼시니 밤을 함께 한 것이 여러 날일세. 그러던 차에 색이 흐려지고 빛이 바래니, 나라 안의 화공을 모두 불러모아 보아도 선인의 그림인지라 보수할 수 없다는 게야. 한즉 어쩌겠나. 노부가 이 지친 몸이라도 끌고 자네를 보러 올 수밖에.”

 

바늘네는 어리디 어린 자기 딸을, 그것도 그림에 불과한 것을 끼고 산다는 왕이 고깝고 혐오스러워 매몰차게 말했다.

 

“그림을 그린 이에게 가서 달라 하시오.”

“도사란 족속들은 왕명에도 따르지 않고 관가의 눈에도 띄지 않으니 별 수가 없지 않은가. 자네가 좀 도와주게나.”

“쇤네가 뭘 안다고 돕겠습니까.”

“자네가 이미 뱀에게 죽었더라면 단념할 참이었네. 그러나 이리 살아 있지 않은가? 필시 하늘이 우리 대왕을 위해 마련하신 바일 걸세. 자, 이 칼을 받게. 잠깐이면 된다네.”

“...뭘 하시려는 게요?”

 

상지는 초조한 얼굴에 두 눈 만은 일종의 광기로 번들거리며 바늘네에게 바짝 다가섰다. 바늘네는 어떤 예감으로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권력 곁에서 권력의 온기를 더 누릴 수 있으리라 판단한 태감이란 뭐든 하는 법이다. 바늘네는 금세 눈치 챘다. 그가 내민 칼날이 벌써 어둠 속에서도 달무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자네 피로 덧칠을 하면 혹시 모르지 않나?”

 

도사가 피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단순한 풍문일 터였다. 뛰노는 노루, 퍼덕거리는 장닭과 자라며 들꿩을 잔뜩 그릴 때도 그것들의 피를 원했겠는가? 복숭아나무를 그리려고 원래 서 있는 나무를 베어냈을 리 없다. 도사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바늘네는 뻐끔거렸다. 상지도 이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내심으로는 알았으리라고. 그러나 한낱 하층민 여자 하나쯤 죽어도 그만이라는 것 역시, 잘 알았으리라고.

 

칼날이 두 손 젓는 바늘네의 빈 품을 파고들었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늘네는 자신이 대단히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것이 마지막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서러움과 분노가 휘몰아쳤다. 상지는 허겁지겁 바늘네의 피를 어디다가 조금 받더니,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자네 딸은 노부가 잘 돌보아 주겠네. 염려 말게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걸로 그림을 보수하여 왕의 품에 내내 안겨주겠다고 상지는 말했다. 바늘네는 어이가 없어 허, 허, 숨을 몰아쉬었다. 상상 속에서는 상지를 죽이고, 따라온 무리를 모조리 어디 계곡에라도 쳐넣고, 이냥 대처까지 달려가 목놓아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 앞이 새빨개졌을 때 이제는 익숙해진 사악사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 잎 젖은 잎 위를 스치며 굳이 그녀에게 기척을 내는 소리.

뱀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내 아기야.”

 

바늘네의 붉은 시야가 일순 밝아졌다.

 

‘가엾어라.’

 

뱀은 이제 혼자 남을 것이다.

뱀은 바늘네를 잃을 것이다.

뱀은 그의 아기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죽음을 알면 슬퍼하겠지. 슬픔이 화가 되겠지. 더는 이 가여운 뱀에게 죄를 얹어주지 말아야지.’

 

바늘네는 어떤 왕도, 신선도 가엾지 않았지만 이제는 뱀이 가여웠다. 그래서 자신 주위를 빙빙 돌며 붉은 피를 문지르는 그 흰 머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보오, 어르신. 보오, 신선이 되려 수행하던 나리.

나는 실은 저 화경 선생이 그린 그림 한 자락에서 걸어 나온 몸으로, 본디 먹과 물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림이란 먹이 흐려지고 그 족자가 닳아 헤지기도 하는 법. 이제 다 지워질 때가 왔답니다.”

 

뱀은 피 냄새를 맡았으나 바늘네가 그리 말하니 덥석 믿고 말았다. 그간 산에 올라와 오들오들 떨다 시들어버린 놈들도 그럼 죄 그림이었을까. 저희끼리 지절대며 산을 오르고 내리고 살고 죽던 이들도 모두 그림에 불과했을까. 뱀은 헤아리지 못했다.

 

“아가, 내 아기야. 싫다. 지워지지 말아라. 내 다시 그려주마, 그려주고 말고.”

“이미 물감이 다 쏟아져 버렸으니 어쩌겠습니까. 너무 서글퍼 마시오. 화경 선생은 세상에 있는 것만 그리는 이랍니다. 이몸도 저 바깥에 팔팔하게 살아 있지요. 여기서 지워지는 것은 그저 이몸의 그림에 불과합니다. 수면에 비추었던 달이 여울에 흐려저도 고개 돌리면 그 자리에 고스란한 것처럼…….”

 

바늘네는 죽었다. 뱀은 그녀가 더 대답하지 않는데도 뺨과 목과 콧등을 긴 혀로 핥으며 청하였다.

 

“아가, 내 아기야. 그러면 진짜 너로 다시 오너라. 언제고 진짜 너로 다시 오기만 하면, 내 너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승천하여 주마. 신선이 되는 것을 보여주마.”

 

뱀의 그 속삭임은 죽은 바늘네의 해골에만 남았다.

 

 


 

 

숙공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리 된 것이구나.’

 

숙공의 비단신이 바늘네의 피 웅덩이 위를 디뎠다.

 

‘그리 된 것이었어.’

 

기억 속을 헤매던 뱀이 이제 여러 해를 지나 벌벌 떠는 인간들 앞으로 툭툭 튀어나왔다. 그들에게 물었다.

 

나의 아기야. 아기들아, 세상은 그걸로 가득하지?

그림에서 튀어나온 가짜 인간으로 가득한 게지?

아가, 아가들아.

진짜 사람은 어디 있느냐? 먹도, 향기도, 색과 그림자도 아닌 진짜는. 찢어져 썩어 문드러지는 종잇장 말고 진짜배기 사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뱀의 목소리를 쉬익쉬익 위협적으로 들렸고, 잔뜩 치켜든 대가리는 당장이라도 산 것을 삼켜버릴 듯 거대했다. 뱀은 날쌔게 달려들어 인간의 팔을 물어뜯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찢겨지고 부서졌다.

 

“네가 진짜 인간이냐? 아니면 그림이냐?”

 

모든 인간이 붉은 피를 쏟아냈다.

바늘네와 같이, 뱀에게는 먹과 물감으로 보이는 비릿한 것이 산을 더럽혔다. 뱀은 붉은 웅덩이 위를 기어 삭아가는 해골을 보듬었다.

 

“진짜는 어디 있느냐?”

 

 


 

 

춘은 어두운 숲을 거닐며 뱀이 홀로 사람들을 물어 뜯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뱀이 소중하게 안은 해골로 다가갔다. 이제 뱀 앞에서 죽어가던 여자는 없고, 처음 사당에서 본 것처럼 해골만 거기 있었다. 뱀이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 기다린 후에 춘은 해골을 손에 들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딜까, 스승님? 이 해골은 아까 그 바늘네라는 사람일테고 그러면 여기는 도대체 어디일까?”

 

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골의 정수리로부터 뻥 뚫린 눈, 코, 이미 동강난 턱뼈 아래로 반짝거리는 붉은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하, 이게 길인가 봐!’

 

그렇게 춘은 옮겨 붙은 먹자국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신나서 걷다 보니 어느 틈엔가 낯선 길이 보이고, 처음에 보았던 사당 앞의 도도록한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숙공이 보였다. 춘에게는 낯선 여자. 화려한 옷을 입은 처음 보는 여자였다.

붉은 먹자국의 끝이 그 여자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누구야?”

 

춘의 눈에 숙공이 보였다.

붓으로 바닥에 길을 그리며 조금씩 걷고 있던 숙공의 눈에도 춘이 보였다.

 

“자네가 도사 화경의 제자인가?”

“내 스승님을 알아?”

“도사가 자네를 바깥 세상으로 데려오라 하였네. 자, 어서 길을 안내하게나.”

“나, 길을 모르는데?”

 

숙공은 쥐고 있던 붓을 들어 올렸다.

 

“이 붓으로 길을 그려서 나가면 된다고 하더군. 자네는 선인의 제자라면서 그것도 모르는가?”

“와! 스승님이 주셨어? 나도 가지고 싶어!”

 

춘은 생기 넘치는 눈으로 거리낌 없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숙공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붓을 품에 끌어안듯이 숨기며, 몸을 아예 외로 돌리자 춘이 곁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나도 보여줘! 아춘도 잘 그릴 수 있는데!”

 

다시 붓을 들어 바닥을 그으며 숙공은 춘의 칭얼거림을 못 들은 척 하고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성가신 계집애에게 붓을 넘겨주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걷기나 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그러나 숙공이 지금 서 있는 곳은 평범한 세간이 아니었다. 신선술로 이름 난 화경 선생조차 내부를 다 파악할 수 없어 붓이나 하나 들려 보낸, 불가사의한 장소였다.

 

‘장소조차 아닐 지도 모르지.’

 

뱀의 꿈 속인지, 이미 세상에 없는 바늘네의 원념 속인지, 아니면 재해산에서 피를 흘린 이들의 공포와 저주가 서린 장소인지, 숙공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화경 선생이 준 붓으로 열심히 길을 그려서 출구를 향해 가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을 해선 위험했다. 거기다 춘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천진한 소리나 해 대니, 혹 붓을 맡겼다가 망가뜨리기라도 하면 참으로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데 너는 이름이 뭐야? 너도 스승님의 제자야?”

 

붓으로 길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몸을 몇 번이나 굽혀야 했고, 붓에서 나오는 붉은 물감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숙공은 이대로 길이 뚝 끊기면 어찌해야 할까 염려했다.

 

“응? 이름이 뭐야? 스승님이 왜 너에게는 붓을 주고 나한테는 안 줬을까?”

 

이렇게나 사람을 경계할 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같은 계집애라니. 숙공은 저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었다. 궁궐에서 살며 눈치를 살피고 작은 실수에도 목숨을 잃을 각오를 했다. 칼 위를 걷듯이 살아 대비 소리를 듣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하고 남몰래 피눈물을 쏟았던가.

 

숙공은 몸을 쭉 펴고 당당한 대비마마같은 자세로 거만하게 물었다.

 

“자네는 어디에서 왔는가? 신선이 자네를 줍기 전에 누구의 여식이었는가?”

“나? 스승님이 춘은 그냥 그림이라고 하였어. 스승님이 그리신 거야.”

“…자네는 거짓말을 하는가.”

“아닌데, 거짓말. 춘은 정말로 그림이야. 그래서 이렇게 찢어지기도 하는데.”

 

그제야 춘의 내민 손이 납작하게 눌려 너덜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숙공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춘은 오히려 배실배실 웃으며 제비 새끼처럼 지절거렸다.

 

“아까 뱀이 물어서 완전히 찢어졌는데, 어느샌가 이렇게 다시 달려 있었어. 스승님한테 빨리 가서 고쳐달라고 해야지.”

 

이렇게 산 사람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화경 선생은 숙공을 대신해 그림 숙공을 그려주었어야 한다. 화경 선생이 재주를 부려 주었다면 필시 모든 일이 무사히 지나갔을 터. 그러면 숙공은 어머니와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자기 힘으로 일군 복을 누렸을 지도 몰랐다.

 

[빈도는 틀림없이 종이 아씨를 그려 드렸습니다.]

 

숙공은 점점 자기 맥이 빨라지는 것도 모르는 채, 붉어진 목덜미를 문지르며 발을 재촉했다. 춘이 뒤를 졸졸 쫓아오며 참견해 대는 것이 듣기 싫었다.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씨께서 어찌하여 이 나라의 국모 되셨겠습니까?]

[결과를 누리면서 연유를 알지 못한다 하시니 왜 그리 뻔뻔합니까?]

 

“어디로 가는 거야? 붓으로 길을 그리지 않아도 돼?”

 

숙공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신선 때문이다.’

 

궁궐에서 후궁의 삶을 버티는 내내 그러했듯, 그녀는 원망할 것이 필요했다.

 

‘그 신선이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은 나이들고 볼품 없는 사내였다. 그를 둘러싼 값비싼 의복과 그가 움켜쥔 채 아무렇게나 하사할 수 있는 보물들을 제외하면, 그는 촌부와 다르지 않았다. 숙공은 상지가 자신을 가져다 바친 날 왕이 그녀를 향해 손짓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고개를 들라.]

 

왕 앞에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야, 그런 걸 허락했다간 금세 모든 사람들이 왕의 정체가 저잣거리의 필부에 지나지 않는단 사실을 눈치채고 말 테니까.

 

[오, 나의 선녀가 돌아왔구나! 장하다, 장해!]

 

왕은 손짓하여 숙공을 품으로 불러들였다. 방년도 되지 않은, 지나치게 위압적인 궁궐의 모든 것에 잔뜩 주눅이 든, 의지할 것이라곤 왕의 변덕스러운 총애 뿐인, 가냘픈 계집애는 벌벌 떨며 부름에 응했다.

 

한 발 한 발, 금으로 장식한 층계를 따라 오를 때 그녀는 상상했다.

뱀에게 바쳐진 그녀의 어머니를.

뱀에게 고개를 내밀고 사지가 찢겨 죽어갔을 젊을 여자를.

그러면 수런거리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말이 통하는 왕에게 안겨 진땀을 흘리는 자신의 처지가 나아 보였다.

 

‘전부 그 화경 선생 때문이다.’

 

그림 한 장만 그려 주었다면 모든 건 좋게 지났을 텐데. 신선이 촌 아낙을 가엾게 여겨 주기만 했더라면 숙공은 어머니 품에서 살았을 터인데.

 

‘……한데, 화경 선생이 실은 어머니를 가엾게 여겼던 거라면.’

 

화경 선생이 그림을 그려 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왕의 명령에 의해 죽으러 갔다면. 왕은 그림에서 걸어나온, 숙공의 그림자를 사랑하여 품고 지내다가 그림이 낡아 더는 품을 수 없게 되자 그림의 대체품으로서 진짜 숙공을 원했을 뿐이라면.

 

상지가 어린 숙공을 가엾게 여긴 게 아니라면.

왕이 어린 숙공을 향해 일말의 죄책감도 미안함도 가진 일이 없었던 거라면.

숙공 자신이 누린 좋은 일들이나 그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비극들이, 모조리 화경 선생의 탓만은 아니라면.

 

“어디로 가는 거야? 붓으로 길을 그려야지! 왜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거야?”

숙공은 춘의 목소리에 발을 뚝 멈추었다.

 

“다리가 아파서 못 하겠다. 세답방 항아들처럼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긁어대는 짓을 더는 못 하겠단 말이다.”

 

숙공은 자신이 싸늘하게 내뱉는 걸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럼 춘이 대신 그릴게! 붓을 나한테 줘.”

 

춘이 신이 나서 달려와 숙공의 앞을 가로막고 손을 내밀었다. 찢겨진 종잇짝을 어깨에 매달고도 춘의 얼굴에는 슬픔이 없었다. 두려움도 굴종도 없었다. 숙공은 점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가슴 속에서 수십 해 동안이나 맴돌던 원망이 뚝 그치고, 불길 같은 증오가 들끓었다.

타올랐다.

 

‘전부 그 도사 탓이다.’

 

고개를 젓는 것이 더 빨랐다. 생각을 도슬러 바로 잡느니보다 익숙한 원망에 손자국을 더하는 쪽이 쉬웠다.

 

‘이건 죄다 환상이다. 항아리 속을 들여다 보다 홀려서 하룻밤 지새 버린다던 소문을 잊었느냐? 숙공. 신선이 보여주는 환상은 마구잡이로 그린 그림과도 같은 것. 어디에 참이 있더냐. 무엇이 반드시 사실이더냐. 이건 다 나를 속이려는 광대짓에 불과한 게야!’

 

모든 것이 참일 리 없다.

이건 죄 화경이라는 잔재주 많은 사기꾼의 변명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로소 단전에서부터 숨이 차 올랐다. 숙공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속지 마라, 숙공아. 속아서는 안 된다, 숙공아. 옥좌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며 있을지 없을지 모를 어심에 의지해 살아오는 동안 믿을 거라곤 너 하나였지 않으냐. 네 눈이 흐려지면 내일은 없다. 네 마음이 비틀거리면 너는 없다. 숙공아, 숙공아…….’

 

숙공은 어느 새 그 서럽고 괴로운 열 두 살이었고, 사방은 따스한 햇살로 가득했으며, 비단신도 누비옷도 없이 거적같은 자루옷을 걸친 채 멀리 떠나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한 자루의 붓. 붓 끝이 춘의 손을 지나 옷가슴에 툭, 닿았다. 붉은 물감이 핏자국처럼 번지다가 횡으로 한 획을 그으며 내려가 춘의 허리춤에서 멈추었다.

 

“고개를 숙이지 않을 테다. 사죄하지도 않을 것이야. 어심이란 반성을 모른다. 용상은 죄를 모른다. 저 높으신 분들이 수치를 알겠느냐? 그것은 벼락처럼 내리 떨어질 뿐이니, 죽어 넘어져도 그 자리에 있었던 탓. 고심하며 상벌을 떠드는 건 못난 놈들이다.”

“왜 울어?”

 

춘이 손을 뻗어 숙공의 뺨을 닦아 주었다. 숙공은 그 손이, 그저 낡디 낡은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뺨에 와 달라붙은 종잇장에 무엇이 그려져 있겠는가. 읽지 못하고 보지 못한 그림 숙공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겠는가. 왕이 마음을 빼앗겨 욕심을 부린 그 아름다운 어린아이가 정말로 숙공의 삶에 축복이겠는가.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미안하지도 않다. 이건 죄다 네 놈의 탓 아니냐!”

 

뿌연 시야를 거리끼지 않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숙공의 손이 크게 반원을 그렸다. 움켜쥔 것은 날카로운 날붙이로 변해 상대에게 푹 꽂혔다. 숙공은 더 이상 붓이 아닌 그 날붙이가, 자신의 여린 손바닥도 같이 갈라버리는 것을 느꼈다.

고통이 반가웠다.

피를 흘리는 것이 좋았다.

그녀도 무고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녀도 상처 입은 쪽이 될 테니까.

 

“네 놈 탓이다! 네 놈의 탓이야!”

 

더없이 미운 이의 옆구리를, 가슴을, 팔을, 등을, 목을, 숙공은 거리낌 없이 찌르고 또 찔렀다. 종이 계집애인 줄 알았던 그것은 이윽고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모로 넘어갔다.

 

화경 선생인가?

재해산의 크고 흰 그 뱀인가?

어린 자신을 꾀어 후궁으로 들여보내고는 승승장구한 상지일 것인가.

아니면 열 두 살짜리 계집애를 탐내 그림까지 끼고 살았던, 그 지저분한 대왕인지도 몰랐다. 세상사 숙공을 비틀거리게 한 모든 무엇이 무너져내렸다.

숙공은 손아귀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붉은 피가 흘렀다.

피가 흐르자 모든 게 허망하였다.

폐허 위에 서 있는 양 가슴 속이 신산하였다. 숙공은 마른 눈가를 더듬었다. 눈물 대신 피가 그녀의 뺨을 적셨다.

 

“이러려던 게…….”

 

숙공 앞으로 눈이 흐려진 뱀이 기어왔다.

거대한, 큰, 하얀 뱀이었다.

뱀이 주춤거리며 물러앉는 숙공의 비단신 끝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럴 리 없건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왔구나.”

 

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아가, 내 아기야. 옛날 이야기를 들어보련. 나는 아주 대단한 뱀이란다. 나는 이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 바늘네에게 속삭이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너로구나, 내 아가야. 네가 드디어 왔구나.”

 

뱀은 찢겨진 몸을 추슬러 숙공의 몸을 감싸고 올라, 상처가 크게 벌어진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제 몸뚱이로 문질렀다. 숙공의 주먹이 저절로 헐거워지고, 시뻘건 금속 조각이 지면에 떨어졌다. 뱀은 숙공의 손바닥을 핥아 주며 속삭였다.

 

“너로구나, 네가 왔구나.”

 

반가운 그 목소리에 숙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뱀이 기다려 온 것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죽은 어머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이는 이미 죽고 없소’ 하고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왜 대답할 수가 없는가.

왜 그이는 이미 죽었고 당신은 무수한 죄를 저질렀으며, 이 산은 피에 물들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가.

 

‘가엾구나.’

 

가여워서 그랬다.

가여워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가야. 기다렸다.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

 

뱀이 숙공의 몸 앞에 길게 드러누웠다. 온 몸 가득 상처 투성이인 채, 뱀의 꼬리가 지면의 금속 조각을 툭툭 쳐댔다. 숙공은 뱀이 시키는 대로 자신이 떨어뜨린 칼을 주워들 수밖에 없었다.

 

“자, 너에게 내 몫을 주마. 아가야, 그러면 너는 더 아프지 않을 거란다. 너는 다시 숨을 쉬고 인간으로 살 수 있을 거다. 이 날을 위해 나는 오래 기다렸다.”

 

뱀은 말했다.

내 배를 갈라, 붉은 속을 파헤치거라.

영물이란 무릇 구슬을 품게 마련이니 여우에게는 여우구슬이. 뱀에게도 잉어에게도 이따금은 여의주가. 그것이 보잘것없는 모래알갱이거나 갯가의 조약돌에 불과할지라도 오래 품고 오래 기원하면 때때로 뜻이 깃들어, 하늘이 응하여 답하기에.

 

‘가엾구나.’

 

숙공은 오래 전, 자신의 어머니가 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픈 배와 아픈 몸과 슬픔으로 가득한 삶을 짊어지고도 문득 떠올렸던 것을 이해했다.

가여워서, 차마 가여워서 어쩔 수가 없다고.

뱀이 부드럽게, 피투성이 뱃속을 헤집어 숙공의 칼끝을 적셨다.

 

“아가. 네가 진짜 인간이건 한낱 그림에 불과하건. 가여운 네게 숨을 주려고 내가 오래 기다렸단다.”

 

이제 숙공은 모든 안개가 걷힐 것을 알았다.

그녀의 칼끝이 도로 붓머리로 돌아가고, 뱀이 흘린 피가 강줄기처럼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았다.

자신이 더 이상 열 두 살짜리 무력한 촌 계집애도 아니며 구중궁궐을 누비며 어린 왕의 대비로서 장막 뒤에 좌정한 것을. 흰 뱀이 죽어 쓰러졌기에 더는 산을 찾는 이가 놀라지 않을 것을. 다 알았다.

 

붉은 길을 따라 아홉 발자국을 걷자, 그녀는 노회한 대비마마였고 구름같은 인파가 권력 앞에 알랑대기 위해 대령해 있었으며, 산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발치에 뱀의 뼈와 죽은 사람의 해골이 화선지를 깔고 널브러져 있었다. 숙공은 입 속의 혀처럼 굴겠다고 몰려와 영견을 내밀고 그 산중까지 끌고 올라온 가마로 안내하는 이들 사이로 걸어가며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본궁이.”

 

그녀는 정말이지 다 알았다.

그러나 그 볼품없는 늙은 왕처럼 그녀 역시 볼품없는 늙은 궁중 여인이었다.

 

“본궁이 재해산의 요망한 뱀을 물리쳤으니 자네들은 그리 알라.”

 

그녀는 거기까지 따라온 상지의 검버섯 핀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어, 비단 한 장을 달라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피투성이 돌조각 하나를 감싸 뼈가 있는 방향으로 던져 주었다.

 

뼈와, 해골과, 찢긴 화선지와, 그리고 피투성이 돌멩이 하나가 재해산에 남았다.


 


 

 

재해산이 박석산으로 불리던 시절, 벼락바위라는 유명한 바위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 바위에 얽힌 전설을 재미있어했는데, 소선국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촌 영웅이 가여운 어린애를 구해주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란 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고 마을을 건너고 산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사설이 들러붙게 마련이나, 대체로 내용은 비슷하다.

비가 내리지 않아 고육지책으로 가난한 계집애를 하나 제물로 구한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의 무게에 두려워하던 순간에 그 영웅은 나타난다. 영웅은 물줄기를 가로막고 주저앉은 못된 흰 뱀을 두 동강 내고, 계집애와 마을 사람을 모두를 구해 준다. 그리고 하늘이 화답하듯 벼락을 떨어뜨려 계집애를 팔아넘긴 사악한 어머니를 죽여 버린다.

악녀는 벌을 받아 죽고, 마을 사람들이 제물 값으로 모아 주었던 돈꿰미는 그 자리에 흩어지며, 영웅은 명성을 얻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불행과 부도덕으로부터 벗어나고 어린애 하나가 구원 받는다.

악녀가 죽은 자리는 전설로 남는다.

사람들은 이 영웅이 새로운 왕국을 세워 왕이 된 후, 그 가여운 어린애를 후궁으로 맞이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후궁이 된 촌 계집아이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다고 한다.

 

 


 

 

혜왕의 서모는 소선국 현주였다고 하는데, 사가에서의 이름이 숙공이다.

선대의 후궁으로 들어와 세 아이를 잃었으되 정궁의 신임을 얻어 혜왕의 양모가 되었는데, 대비가 된 후 편안하게 여생을 다 누렸다.

항설에 따르면, 대비는 젊을 적 화경 선생이라 불리는 유명한 도사에게 보물을 하나 건네주었으며 그로하여 선생이 재해산의 뱀을 퇴치해 주었다고 한다. 선대가 소선국을 무너뜨릴 적에 흰 뱀의 가호를 얻었다는 전설이 하도 유명하니, 누군가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를테면 화경 선생이 재해산을 거닐다 커다란 뼈 하나를 장사 지냈는데 그것이 바로 신령한 흰 뱀이니, 왕가에서 그 보답으로 반쪽짜리 여의주를 주었다는 것이다.

 

화창한 봄날, 화경 선생은 어린 제자를 데리고 저자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 항아가 바로 여의주의 현신이라고 한다.

 

 

(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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