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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바다색 그리고 청록색

노말시티

 

서지안 씨는 2008년 3월 인천의 한 산부인과에서 두 개의 X 염색체 중 하나에 독특한 변이를 지닌 채 태어났다. 변이는 시각을 담당하는 원추세포와 관련된 포톱신이라는 단백질, 그중에서도 인간이 볼 수 있는 세 가지 색 중 녹색과 연관된 단백질에서 나타났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 색맹이 되는데 서지안 씨의 경우에는 색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파장의 색을 보는 쪽으로 변이가 일어났다. 게다가 서지안 씨는 변이가 일어나지 않은 유전자도 남아 있었기에 보통 사람은 세 가지만 있는 원추세포를 네 가지나 지니게 되었다.

원추세포가 네 가지인 것만으로 더 많은 색을 볼 수는 없다. 네 가지의 원추세포를 모두 활용하여 시각 정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뇌가 발달해야 한다. 서지안 씨는 자신이 하늘과 맞닿은 바다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갖추었다고 말하곤 했다.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달리 대부분의 인천 사람은 바다를 볼 수 없는 곳에 살고 있지만 다리로 연결된 섬에 살았던 지안 씨는 매일 바다를 보았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경계를 잃을 정도로 섞여 있다고 말하는 게 의아했다고 한다. 지안 씨의 눈에는 하늘과 바다가 노랑과 빨강처럼 전혀 다른 색이었기 때문이다.

서지안 씨는 자신이 볼 수 있는 색에 이름을 붙인 사람으로 유명하다. 네 가지 원추세포를 지닌 사색자(tetrachromat)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지안 씨처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원추세포로 완전히 다른 색을 보면서 그 색에 체계적인 이름을 붙인 사람은 없었다. 지안 씨가 붙인 이름 덕분에 전 세계에 숨어 있었던 잠재적인 사색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깨달을 수 있었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지 더 많은 색을 본 게 아니라 인간의 편협한 시각으로 자연에 엄연히 존재하는 색을 지우는 폭력의 부당함을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빨강(Red), 녹색(Green), 파랑(Blue)을 담당하는 세 가지 원추세포로 세상을 본다. 우리가 인식하는 색은 모두 이 세 가지 색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사실 빛의 스펙트럼상에서 R 원추세포와 G 원추세포가 보는 파장은 가깝게 붙어 있는 반면에 B 원추세포가 보는 파장은 멀리 떨어져 있다. 이는 애초에 X 염색체상에 있는 R과 G 원추세포의 유전자가 다른 하나에서 변이되어 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이는 수천만 년 전 영장류에서 일어났다. 영장류를 제외한 포유류는 여전히 원추세포가 두 가지밖에 없어서 빨강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서지안 씨에게는 G 원추세포에서 변이된 네 번째 원추세포가 있는데 이 세포가 감지하는 파장은 녹색과 파랑의 중간에 있다. 녹색과 파랑이 절반씩 섞인 이 색을 영어로는 시안(cyan)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청록색 혹은 옥색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보면 시안은 청록색과는 매우 다르다고 느껴지며 오히려 하늘색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지안 씨는 청록색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청색과 녹색이 섞인 색이잖아요. 실제로 RGB로 만들어진 시안 색의 명도를 낮추면 청록색으로 보여요. 하늘색과는 전혀 달라요. 하늘색은 C값이 제일 높은 색이니까요.”

우리가 보는 모든 색은 RGB의 조합이다. 하지만 지안 씨가 보는 색은 RGCB의 조합이다. C, 그러니까 시안 색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색으로 보인다. 우리에게는 C에 해당하는 파장이 제일 많은 빛과 G와 B가 반반씩 섞인 빛이 모두 똑같은 시안 색으로 보이지만 지안 씨에게는 C와 GB, 그리고 GCB가 빨강, 녹색, 파랑만큼이나 확연히 구분되는 다른 색으로 보인다. 이 셋을 지안 씨는 하늘색, 청록색, 바다색으로 구분한다. 그래서 지안 씨는 하늘과 바다를 전혀 다른 색으로 보는 것이다.

“하늘이 파란 이유와 바다가 파란 이유는 달라요. 하늘이 파란 이유는 시안 색이 가장 많이 산란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늘은 하늘색(C)이에요. 바다가 파란 이유는 바다에서 빨간색이 가장 많이 흡수되기 때문이에요. 바다색에는 파랑과 시안과 녹색이 전부 있죠. 그래서 바다는 바다색(GCB)이고요.”

우리는 RGB의 조합에 따라 수많은 색을 구분하는데 그중에서도 각 성분의 차이가 명확한 색을 선명하다고 느낀다. R 성분만 있고 G와 B 성분은 전혀 없을 때 그 색을 선명한 빨강이라고 보는 것이다. 세 가지 원소의 조합이므로 인간에게 선명한 색은 크게 여덟 개다. 빨강(R), 녹색(G), 파랑(B)의 세 가지 순색과 각각이 조합된 노랑(RG), 시안(GB), 마젠타(RB)에 하양(RGB)과 검정(X)을 더하면 여덟 가지 색이 된다. 같은 원리로 지안 씨는 세상을 열여섯 가지의 원색으로 본다.

앞서 말했듯 하늘색(C)과 바다색(GCB)은 우리에게는 시안 색으로 보인다. 지안 씨는 이 시안 색을 청록색(GB)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세 가지 순색에 하늘색이 더해진 색에 지안 씨는 모두 하늘과 연관된 이름을 붙였다. 빨강과 하늘을 더하면 노을색(RC), 파랑과 하늘을 더하면 새벽색(BC), 녹색과 하늘을 더하면 오로라색(GC)이 된다. 우리에게 노을색은 채도가 낮은 빨강, 새벽색은 녹색이 살짝 섞인 파랑, 오로라색은 파랑이 살짝 섞인 녹색으로 보인다. 지안 씨에게 이 색들은 모두 선명한 원색이다.

세 가지 성분이 섞인 색에는 반사된 색의 이름을 붙였다. 산란되거나 굴절된 빛을 보는 하늘과는 달리 물체에서 반사된 빛에는 보통 흡수된 특정 성분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빨강이 빠진 색은 바다색(GCB), 파랑이 빠진 색은 풀잎색(RGC), 녹색이 빠진 색은 꽃잎색(RCB)이다. 우리에게 바다색은 시안 색, 풀잎색은 노란색에 가까운 녹색, 꽃잎색은 보라색으로 보인다.

“실제로 모든 풀잎이 풀잎색으로 보이는 건 아니에요. 오로라색이거나 그냥 녹색일 때도 많죠. 다만 생명체가 지닌 색을 모두 합한다면 풀잎색일 거에요. 파란 생물은 극히 드무니까요. 꽃잎색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꽃이 꽃잎색인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꽃잎은 녹색과 구분되기 위해 색을 진화시켰잖아요. 그래서 녹색이 빠진 색을 꽃잎색이라고 부르는 거죠.”

서지안 씨가 색의 이름을 붙인 과정은 이처럼 과학적이다. 다만 마지막 두 색에서는 살짝 짓궂음이 느껴진다. 지안 씨는 모든 성분이 포함된 색을 진백색(RGCB), 시안이 빠진 색을 가백색(RGB)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색은 모두 똑같은 하양으로 보인다. 지안 씨에게 가백색은 하양과는 전혀 다른 선명한 유채색이다. 원칙대로라면 시안 색만을 흡수하는 물질을 따서 이름을 붙였어야 한다. 무엇보다 엄연히 존재하는 색을 가짜 백색이라고 부르는 건 지안 씨 답지 않다. 그런데도 굳이 가백색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색을 하양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놀리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게 묻자 지안 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글쎄요. 저희가 누굴 놀릴 입장인지 모르겠네요. 굳이 말하자면 짜증에 가까워요. 진백색이어야 할 곳이 선명한 가백색으로 칠해져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극장에서 빨간색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스크린 위에 영화를 상영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걸 가백색이라고 불러 주는 건 오히려 삼색자(trichromat)를 최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사색자에게 가백색은 그저 불편하고 짜증 나는 색이 아니다. 사색자들은 가백색 잉크로 진백색 종이에 글을 쓴다. 삼색자가 그 글을 읽기 위해서는 특별히 제작된 필터가 필요하다. 가백색 잉크로 인쇄된 전단지는 사색자가 주도하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인간 중심의 세상, 정확히 말하면 소수의 권력자에게 인류와 지구와 우주 전체가 봉사하게 만들려는 폭력적인 독재를 깨뜨릴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 왜 나쁘냐고 반문하기도 하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저들이 말하는 인간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거예요. 저들이 말하는 세상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시당하는 거죠. 본다는 건 그래서 중요해요. 보지 못하면 알 수 없으니까요.”

보게 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명한 문장에서 사랑하면을 보게 되면으로 바꾼 이 문장은 사색자의 대표적인 구호가 되었다. 보게 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 본다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는데 첫 번째로 보는 것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습이며 두 번째로 보는 것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볼 때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세상의 다채로운 광경이다.

사색자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인간이 덧칠해 놓은 세상의 흉함이다. 사색자들에게 자연은 다채롭다. 더 많은 종류의 색으로 반짝이는 세상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쉰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세상은 얼룩덜룩하고 지저분하다. 삼색자의 눈에는 깔끔하게 시안 색으로 칠해진 벽이 사색자에게는 하늘색과 바다색과 청록색이 엉망으로 뒤섞인 모습으로 보인다. 인간의 미적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여 구성한 색의 조합이 사색자에게는 전혀 조화로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했지만 그 모방은 오직 인간에게만 유효하다. 자연을 본떠 칠해 놓은 조형물의 색은 인간의 눈에만 자연과 조화로울 뿐 다른 동물의 눈에는 아무렇게나 덧칠된 흉물로 보인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사랑은 일방적인 감정이고 편협한 시선이죠. 인간의 관점에서 쏟는 사랑은 자연에게는 폭력일 수도 있어요. 사색자의 눈에는 인간이 자연 위에 쏟아 놓은 일방적인 사랑이 얼마나 흉한지가 적나라하게 보여요. 그러면 알게 되죠. 사랑하기 이전에 상대방의 시선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요. 우리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세상을 덧칠해서 안 된다는 것을. 더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선을 마음대로 지워버려선 안 된다는 것을.”

서지안 씨는 사색자가 보는 세상이 진짜 세상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영장류를 제외한 포유류는 대부분 이색자(dichromat)거나 단색자(monochromat)다. 단색자에게 세상은 순수한 흑백이다. 조류나 파충류 중에는 사색자가 많다. 이들이 지닌 네 번째 원추세포는 주로 자외선 영역을 보기 때문에 같은 사색자라고 해도 이들이 보는 세상과 지안 씨가 보는 세상은 전혀 다르다. 인간 중에서도 지안 씨와 같은 사색자가 있는 반면에 이색자나 단색자도 있다. 그리고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시각 이외의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다른 사람이 눈으로 보는 세상과는 또 다르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물이 자신의 결정 구조를 인간이 보기에 예쁘게 만든다고 여기고 밥에게 인간의 언어로 칭찬을 해주면 썩지 않을 거라고 상상한다. 반려동물이 인간과 동일한 욕구를 느끼고 인간의 언어로 생각한다고 무심결에 믿기도 한다. 엄청난 양의 제초제를 뿌려 푸르게 가꾸어 놓은 골프장은 인간에게는 속이 탁 트일 정도로 시원한 풍경일 수 있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학살 현장이다. 벚꽃이 휘날리는 봄이나 단풍으로 물든 가을의 아름다움 역시 그저 인간의 시선일 뿐이다. 인간이 아름다워하는 모든 것들은 오직 인간의 눈에만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것도 인간 중 일부에게만 그렇다는 사실을 인간은 깨달아야 한다.

남극의 얼음이 녹고 해수면이 상승했다. 전세계에서 이상 기후 현상이 속출했다. 산호초가 하얗게 죽어가고 꿀벌이 모습을 감추었다. 서지안 씨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를 멈추기 위해 앞장섰을 수도 있다. 자연을 보호한답시고 인간의 눈에만 자연과 비슷한 추한 대체물로 세상을 뒤덮어 가는 어리석음을 지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안 씨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지안 씨는 깃발을 들었다.

서지안 씨는 C 원추세포의 변이가 일어난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검사 결과 한국인의 12%가 이미 해당 변이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그들의 뇌는 C 원추세포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훈련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C 원추세포에서 감지한 신호를 그냥 무시하거나 B 와 G 원추세포에서 감지한 신호와 섞어서 처리했다. 서지안 씨가 자신이 보는 색에 이름을 붙이고 그 색들을 명확히 구분해 보여주자 잠재적인 사색자들은 조금씩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색자 능력의 발현이 소득 수준과 관련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아무런 과학적 인과 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은 명확했다. 사색자 능력이 발현된 사람 열 명 중 아홉 명은 저소득층이었다. 그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고소득층은 세상을 다르게 볼 이유가 없어서라는 설명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위기를 맞은 것은 지구만이 아니었다. 소득 격차가 극심해지고 계층이 분화되었다. 인간의 기본권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지는 사립학교의 라인을 타지 않으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언론은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죄를 지어도 선처를 받거나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투표권은 있었지만 투표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은 후보자가 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기득권자의 시선으로 세상이 칠해져 갔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론에서 칭송하는 나라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았다. 그들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는 거짓과 협박과 탐욕으로 얼룩진 지옥으로 보였다. 다른 나라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권력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머물며 대를 이어 전해졌다. 부자들의 눈에 세상은 그저 아름다웠다. 엄연히 존재하는 부조리가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다르게 볼 이유가 없었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전단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했다. 오직 사색자만이 가백색으로 쓰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종이에는 세상의 진짜 모습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던 부조리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언론에서 노래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전부 허상이었다. 자신과 같은 세상을 보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깨달았다. 녹색 지하철은 오로라색 글자를 온몸에 새긴 채 서울 시내를 달렸다. 청록색 벽에 하늘색과 바다색으로 그려진 그림은 권력가들의 추태를 풍자했다. 이 모든 것들이 삼색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세상에 뿌린 거짓과 협박과 탐욕을 보지 못하듯이.

사색자들만이 볼 수 있는 글씨나 그림을 공공장소에 게시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던 차별금지법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삼색자들은 가백색으로 쓰인 글자가 삼색자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삼색자의 기준으로 꾸며진 세상은 정상이었지만 사색자의 기준으로 쓰인 글자는 비정상이었다. 사색자가 보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아예 사색자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C 원추세포를 지닌 사람도 세 가지 색으로만 세상을 봐야 했다. 그게 그들이 원하는 효율적인 세상이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서지안 씨는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사색자나 전단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공금 횡령과 업무 방해 혐의였다. 그래도 사색자는 줄지 않았다. 가백색 전단지도 오로라색, 바다색으로 모습을 바꾸며 끊임없이 뿌려졌다. 이를 적발하기 위해 보급된 C 검출용 필터는 오히려 이들의 저항에 불을 붙였다.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본 삼색자들은 익숙했던 주변이 필터 하나로 인해 모습을 바꾸는 경험을 통해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이 믿고 안주하던 세상에 커다란 균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게 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뜻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실제 모습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색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지워졌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기록되고 전파되었다. 사색자 혁명 혹은 시안 혁명이라고 불리는 혁명의 시작이었다. 서지안 씨 본인은 매우 싫어하지만 이 혁명을 지안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기록하고 목소리를 부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시선만이 옳다는 독선과 상대방의 세상을 나의 기준으로 덧칠하는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그다음이죠.”

만기 출소 날, 서지안 씨가 지지자들 앞에서 한 연설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시안혁명당의 로고인 삼색기는 하늘색, 바다색, 그리고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깃발은 사색자에게는 삼색기로 보이고 삼색자에게는 시안 색으로 칠해진 단색기로 보인다. 그 두 가지 시선은 똑같이 옳다. 하늘과 맞닿은 바다는 사색자의 눈으로 보든 삼색자의 눈으로 보든 똑같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자연이 시선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경이로움이 된다.

지난달 실시된 총선에서 시안혁명당은 전국 평균 6%의 지지율을 기록했음에도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선거 직전 교묘하게 개정된 선거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6%의 지지율은 지워지지 않고 기록되었다. 세상은 6%만큼 새로운 색으로 칠해졌다.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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