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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델릭타 그라위오라

2022.03.01 00:0003.01

델릭타 그라위오라

빗물

 

범은 물고 온 손목을 툭 내뱉었다. 언제나처럼 억울하다는 듯 꿈틀거리는 검푸른 그것을, 자경은 무심히 포도나무 아래 던졌다.

 

“또 사당엘 갔다 온 거야?”

 

목덜미를 쓰다듬자 범이 가르릉 소리를 냈다. 징그럽게 기어 올라오는 손목을 자경은 지그시 밟아 다시 흙에 집어넣었다.

 

“저 손으로 어딜 그리 더듬었을까...”

 

범은 자경의 혼잣말에 절대 답하는 법이 없어서, 자경은 그게 좋았다. 저 손의 주인이 이승을 헤맬 적에 누구의 어디를 어떻게 만졌는지, 그런 건 자경이 알 몫이 아니었다. 죄 많은 영혼이란 무엇이 그리 억울해서, 죽고 난 후에도 이승을 떠돌며 제 가족이라는 것들이나 무고한 사람마저 이 외진 곳으로 불러들이는지도 마찬가지였다. 가지치기를 마친 자경은 밖으로 나섰다. 선선해야 할 바깥 공기에, 익숙한 비린내가 진하게 풍겼다. 먼 곳을 노려보다, 자경은 집으로 걸어갔다. 근래 이 부근에 가득한 귀취(鬼臭)는 사당 근처에서 곧잘 풍겨오던 것과는 달랐다. 바람이 아주 멀리서부터 싣고 온, 깊고도 지독한 원한이었다. 흔하게 널린 생전 죄지은 이의 것이라기엔 너무 짙었다. 하지만 자경은 한낱 농사꾼일 따름이었다. 영혼의 냄새를 맡고 영혼을 끼고 산다고 해서, 먼 길 발 벗고 나서가면서까지 그들의 넋을 달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집에 들어선 자경은 다기에 녹찻잎을 가득 담아 차를 우리고, 양푼에 밥을 펐다. 냉장고 속 나물을 양푼에 쏟아붇고 난 손으로, 우러난 차를 따라 상에 올려놓았다. 희끄무레하게 올라오는 연기 속에, 범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비빔밥을 입에 집어넣으며 자경은 범을 힐끗 보았다.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혼이 된 범을 집으로 데리고 온 이튿날 아침도 저런 얼굴이었다. 그날 범은 귀신의 남근을 물고 왔다. 보자마자, 그것이 산 자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문 채 범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뿌듯한 입꼬리로. 주인 앞에 쥐를 사냥해온 고양이의 표정이었다. 이후로 자경의 포도밭은 가뭄에도 마르는 법이 없었다.

 

퍽.

 

흠향하는 범의 웃음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던 그때, 현관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퍽. 퍽.

 

소리는 멈추지를 않았다. 범이 으르렁대며 털을 곤두세웠다. 범의 등을 쓰다듬어 달래고는, 자경은 문을 열었다. 푸르른 들판만이 눈에 들어왔다. 툭. 발치를 치는 느낌을 향해 자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집요하게 남의 집을 들이받았을 머리가, 자경의 복사뼈를 스치고 집 안으로 스르르 기어들어 침범해왔다. 검푸른 머리는, 데굴데굴 구르며 자경의 집을 두리번댔다.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야?”

 

식사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짜증스러웠다. 방을 둘러보다 범을 발견한 그것은, 범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범이 눈에서 불을 뿜으며 부르짖자, 이내 기가 죽어 까가각, 소리를 내며 식탁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식탁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한 부분이 보였다. 자경은 상을 찌푸렸다. 자그마한 성기가 머리 끄트머리에 매달려있었다.

 

“이 새끼, 삽입만 안 했구만?”

 

“까가각... 내 손발 어디 갔어!”

 

그것이 부르짖었다.

 

“어디서 반말이야? 그건 생전의 너한테 물어!”

 

“씨...발... 저 짐승 새끼가... 까각... 물어갔단 말야...”

 

“달고 다녀봤자 죄나 지을 거! 뭐 하나 보탬이라도 되라고 벌써 거름으로 줬어! 고마운 줄 모르고 어디서 바락바락 욕이야?”

 

그 말에, 그것은 괴성을 지르며 온 집안을 퉁퉁 튀어 다녔다. 자경은 여기가 주택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랫집에 미안할 일이 없으니.

 

“씨발... 나를... 깍... 병신으로... 만들어?”

 

“병신이 뭐 어때서! 살아생전 죄나 짓던 주제에.”

 

죄 많은 영혼들은, 이미 죽어 귀신이 된 몸이 훼손되면 그토록 분해할 수가 없었다. 약한 것을, 아픈 것을,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그렇게 경멸하고 짓밟았으니 자신이 그리된 것을 받아들이기는 죽기보다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남의 생은 파괴하고 제 한 몸 보전하는 것이 일생의 지독한 소망이었으니 말이다. 보나 마나 뻔했다. 뻔뻔하게도 억울하게 죽은 제 가족 한을 풀어달라며 온 가족에게 업혀 왔거나, 기가 약한 엄한 이에게 붙어 왔다가 신당 앞에서 도망쳤겠지. 여우굴에서 도망치면 호랑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까가각... 까가각!”

 

성난 자경과 범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귀신은 억울함에 날뛰었다. 그때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아, 살아서 예의가 없던 것들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위 상하게 꼭 식사 때 찾아와서 저 지랄인 것이다. 자경은 그것을 한심하게 내려봤다. 그런 영혼들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가장 견디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그것은, 자경이 자신을 무시함을 깨닫고 더 크게 부르짖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 말을 마친 자경은 범과 다시 상에 나란히 앉았다.

 

“시끄럽구나...”

 

그 말에, 범이 크게 표효 했다. 기죽은 그것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잦아든 소음 너머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따르릉, 따르릉.

 

자경은 잠시 전화기를 쳐다봤다. 이른 시간에 포도즙을 찾는 사람은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매번 떨리고 마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며, 천천히 다가가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니노.”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잘 있었니?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심장이 쿵쿵 뛰었다.

 

“도와줘, 니노. 여기 와서 나 좀 도와줘.”

 

자경은 떨리는 손으로 허벅지를 꽉 그러쥐었다. 한동안 아프지 않던 오랜 흉터가 아려왔다. 상처가 아물고 흉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데도, 이럴 때면 매번 고통스러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범이 냉큼 달려와 십자 모양으로 깊게 벌어진 흉터를 핥았다.

 

“도와줘, 니노...”

 

목소리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외진 곳에서 외진 곳으로 가려면, 큰 도시를 지나야만 했다.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자경은 흔들리는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댔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공기를 떠도는 비릿한 내음이 짙어졌다. 예상대로였다. 자경은, 통화에서 듣지 못한 세라피나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버스는 익숙한 산 밑에 자경과 범을 내려놓았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눈 감고도 오를 수 있는 길이었다. 그게 자경의 마음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다리가 떨렸다. 발길을 돌리려 할 때, 보드라운 꼬리가 다리를 감쌌다. 떨리는 손을 뻗어 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범이 입을 벌려 자경의 손을 깨물었다. 날카롭고 큰 송곳니는 자경의 손가락 하나도 해치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애교에,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자경은 범과 함께 산을 올랐다. 애신 쉼터. 익숙한 팻말이 보였다. 자경의 심장이 다시 빨리 뛰기 시작했다. 눈치를 챈 범이 다가와 부빗, 머리를 부볐다.

 

“세상에, 니노...”

 

쉼터 마당에 서서 초조하게 맴돌던 세라피나는 자경을 보고 잠시 흠칫하며 뒤를 돌았다가, 이내 달려와 자경의 손을 쥐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이름만 불렀다. 니노, 니노. 자경은 세라피나의 손이 떨림을 느꼈다. 아니, 자경이 떨고 있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세라피나가, 잠시 머뭇대더니 자경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경은 그 몸짓을 피했다. 침묵이 흘렀다.

 

“니노, 이렇게 갑자기 찾아서 정말 미안해...”

 

“미안한 줄 알면서 왜 불렀어?”

 

“그게, 있지... 사정이 있었어... 네가 정말 필요해...”

 

세라피나는 자경의 말에 성실히 대답을 했다.

 

“실은, 여기 애 하나가... 얼마 전에 죽었거든.”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며 세라피나가 말했다. 단신 처리된 뉴스에서 본 그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강간을 해서 들어온 애였어. 우리가...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가겠다는 말도 없이 도망을 친 거야... 그런데, 며칠 후에 죽었대...”

 

세라피나의 말은 얕은 숨처럼 토막 나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뉴스에서 충분히 들었다.

 

“그래서?”

 

자경은 차갑게 답했다.

 

“경찰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바로 결론을 못 내렸어.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애 아버지랑 우리가 조사 대상이 됐고. 다들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자살로 마무리되긴 했는데, 있지...”

 

세라피나가 말을 멈추고 자경을 바라보았다. 뻥 뚫렸다고 느껴질 만큼 큰 눈이었다.

 

“나는 알아. 그 애, 자기가 죽었을 리 없어.”

 

“그래서, 나보고 뭘 어떻게 도우라고?”

 

“니노, 네가 영혼들과 가깝다는 걸 다...”

 

“신을 버리고 신이 버린 년, 다른 잡신과 어울리는 음탕한 창부 같은 년. 너, 지금 그런 나를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불러들인 거야? 십몇 년 만에?”

 

“니노. 미안해. 할 말이 없어...”

 

“방금까지 신나게 떠들어놓고 무슨 할 말이 없어.”

 

감정이 격해진 것을 느끼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경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나는 신내림 같은 것 받지 않았어.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점집 많은 싼 동네로 흘러 들어간 것뿐이야.”

 

“그렇지만 니노, 그럼 저 호랑이는 뭐야...?”

 

세라피나가 범을 가리켰다. 자경은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범을 몸 뒤로 숨겼다.

 

“...무슨 호랑이?”

 

“네 뒤에 있는 호랑이 말이야.”

 

“...”

 

범이 보이는구나. 자경은 세라피나를 한참이나 노려봤다. 세라피나도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그래서, 내가 뭘 하리? 굿을 해줄까?”

 

“...너, 나 도와주러 온 거잖아.”

 

자경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애가 왜 죽었는지 밝혀 줘...”

 

“그걸, 내가 여기 있으면 밝힐 수 있어?”

 

“그러지 않으면, 왜 여기까지 와줬어?”

 

자경은 말없이 바람에 펄럭이는 세라피나의 수도복 베일을 보았다. 바람이 불자, 고통스러울 만큼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피 냄새가 지독해서.

 

속으로만 답했다.

 

“아무튼, 날도 추운데 일단 들어가서 쉬어. 이야기는... 천천히 할 수 있을 거야.”

 

세라피나가 쉼터 숙식동의 문을 밀며 말했다.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전 짧게 돌아본 복도 풍경에서부터, 자경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떠나오던 때와는 달리 적막할 만큼 한산해진 쉼터를. 계단을 오르며 세라피나는 말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 떠나간 사람은 많지. ...이제 여기는, 수녀는 나 하나고 안전관리요원 한 명, 생활지도사 한 명이 전부야. 그러다 보니 받을 수 있는 아이들 수도 한정적이 됐고...”

 

“그런데 왜 문을 닫지 않아?”

 

그 말에 세라피나가 아주 잠시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니노. 원장 신부님도... 이제, 연로하시고 기력도 많이 쇠하셨어... 주님 곁으로 가시는 날까지는, 이곳을 닫을 수 없어.”

 

2층 복도에는 1층보다 큰 창이 가득했다. 어릴 때는 그것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창밖을 내다보는데, 허연 무언가가 스물스물 내리고 있었다.

 

“어머, 눈이 오네...”

 

세라피나가 멍하니 말했다.

 

“꼭 우리 다시 만남을 축복해주는 것 같아...”

 

세라피나는 허리춤의 열쇠로 직원용 방 하나를 열어주었다. 어린 자경은, 수녀님과 선생님들이 자는 2층에서 자고 싶었다. 너무나. 방안을 들여다보고라도 싶었다. 막상 불이 켜지고 마주한 2층 방은, 생각보다 좁고 허름했다. 그래도, 끔찍한 1층 방을 내주지 않은 것만 해도 배려라고 여겨야 하나. 자경은 생각했다. 방 한쪽 벽을 꽉 채워 놓인 매트리스 위로, 주석 십자가가 묵직하게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십삼 년 전, 자경이 저주하며 떠나온 바로 그 존재였다. 이 방에 사람을 넣어놓으면, 어쩐지 기도를 하라고 떠밀린 느낌이란 말이지. 하지만 자경은 이제 결코 그런 것은 하지 않는다. 대신 범의 등을 끌어안고 노란 털에 얼굴을 묻었다. 북실한 털이 코를 간질였다.

 

“범아, 나는 산 사람이 무섭다...”

 

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걸 깨달으면, 또 소스라치게 무섭다. 언제쯤이면 조금은 덜 떨 수 있을까.”

 

범이 길고 도톰한 분홍빛 혀로 자경의 뺨을 핥았다. 유리를 깰 만큼 거센 바람이 창을 흔들고 갔다. 눈보라는 점점 거세지는 듯했다. 축복이라면, 정말 숨 막히는 축복이군. 중얼대며 자경은 외투에서 핸드폰을 꺼냄과 동시에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아,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인터넷도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삐그덕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방문이 열렸다. 그만큼 조그만 틈새가 생겼을 뿐인데, 복도의 찬 기운이 훅 들어왔다.

 

“니노...”

 

문을 연 세라피나는, 조심스레 한 발 한 발을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리고 아주 차분히 말했다.

 

“사람이... 죽었어.”

 

그 순간, 어디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귀취가 밀려왔다.

 

“너... 시신 볼 수 있니?”

 

자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처럼 십자가를 깨부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112에 먼저 물어보지 그래...?”

 

“어떻게 그래.”

 

“뭔 소리야...?”

 

“전화선이... 끊겼는 걸...”

 

세라피나는, 몇십 년 전 배경의 추리소설 속 주인공처럼 덤덤히 그렇게 말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경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범과 함께 일어나 세라피나의 뒤를 밟았다.

 

 

 

세라피나가 자경을 데려간 곳은 누군가의 방이었다. 거기서 자경이 마주한 것은, 제 손으로 목을 조르고 죽은 이였다.

 

“니노... 어떡해?”

 

세라피나는, 유리잔 하나를 깨뜨렸을 때처럼 말했다.

 

“내일 전화 연결해서 신고해야지...”

 

“아니. 그 전에 말이야.”

 

자경은 세라피나를 돌아보았다.

 

“애들도 알면 놀랄거구... 원장님도 아시면 큰일이잖아.”

 

“당연히 놀라겠지. 당연히 큰일이고.”

 

“밖에 눈이 많이 왔어... 지금도 계속 쌓여. 내일 바로 밑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내일 못 가면, 모레 가면 되지. 모레 안 되면 그다음 날을 기다리고.”

 

“그럼 그전에는?”

 

“야, 허수영.”

 

자경의 부름에 세라피나가 고개를 들었다.

 

“너... 사람 죽었는데 놀라지도 않아?”

 

“이렇게 놀라고 있잖아.”

 

“얼마 전 그 애 죽었을 때도 이랬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는 너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둘은 잠시 서로를 노려봤다. 그러다 자경은 시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목을 꽉 조른 손은, 죽은 뒤 조금 느슨히 풀려있었으나 여전히 올가미 모양으로 깍지가 껴있었다. 자경은 그 앞에 앉아, 혀를 길게 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하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마리아. 자경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죽은 이의 몸이 조금 움찔하는 듯했다. 사망 직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자기 목을 단단히도 졸랐네...”

 

“...이상하지?”

 

세라피나가 자경 옆에 앉으며 말했다.

 

“뭐, 그만큼 조르고 싶었나보지...”

 

“그게 가능해? 자기 몸인데?”

 

“그럼 남의 몸은 가능해?”

 

“티비에서 법의학자가 그러는데, 자기가 자기를 찌르거나 하는 자살방법은 타살이랑 다르게 단호하지 못하대.”

 

“난 그런 거 몰라.”

 

그때, 자경은 마리아의 옆구리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피 한 방울 없이, 액자가 걸려있던 벽에 난 못 자국처럼, 그냥 그렇게 푹 들어간 흔적이었다.

 

“이게 뭘까...”

 

세라피나가 중얼댔다. 그의 눈길도 자경의 시선을 따라 멈춘 모양이었다.

 

“살 자국...”

 

“응?”

 

“아주 깊은 원한은, 살이 되어 날아가 원망의 대상에게 꽂혀.”

 

세라피나는 말이 없었다.

 

“니노, 여기 정말 귀신이 쓰인 거지? 그렇지?”

 

“너, 시신을 숨기고 싶은 건지, 귀신을 쫓고 싶은 건지 아직 못 정한 것 같은데.”

 

세라피나의 입술이 떨어지려 하는데, 뒤에서 으르렁 소리가 났다. 범이 몸을 낮추고 방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격태세를 갖춘 범은, 이어서 순식간에 마리아의 시신에 달려들었다.

 

“까가...각!”

 

마리아의 빠져나온 혀 아래 감춰져 있던 입술이, 툭 튀어나와 방구석으로 달려갔다.

 

“급하기도 해라. 입술만 빠져나왔군.”

 

검푸른 입술은, 쌕쌕대며 귀퉁이에서 부르르 떨었다.

 

“까각... 저걸... 왜 불러들였어? 내보내! 내보내!”

 

겨우 한 줌 입술로 남은 마리아를 바라보며, 자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작아질 존재를, 어릴 땐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쉼터 아이들보다 신과 한층 더 가까운 존재라는 신부나 수녀가 아니어도, 생활 지도사들 역시 소녀들에겐 그렇게 우러를 수 없는 대상이었다. 나를, 가정폭력을 당한 여자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준다는 여기 이 쉼터에 머물게 할 수도, 강간한 아빠와 죽어라 때린 엄마에게 돌려보낼 수도 있는 사람. 내게 밥을 주고 옷을 주는 사람. 어쩌면 신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이었다.

 

“저거 내보내! 내보내!”

 

까각, 까각. 마리아, 아니 입술은 계속 그렇게 외쳤다. 범이 입을 쩍 벌리고 다가서는데, 자경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콩, 범의 분홍빛 코가 자경의 손바닥에 부딪히고 범은 꾸르르,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뭘 내보내?”

 

자경의 말에 마리아는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더니 중얼중얼, 방언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마리아, 개신교로 개종했었어?”

 

자경이 세라피나를 뒤돌아봤다. 세라피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저기요, 마리아. 나, 알죠? 자경이에요.”

 

“니노, 니노 말이에요.”

 

“내보내! 저거 내보내라고!”

 

“...마리아. 어떻게 죽었는지 말할 생각 없어요? 그럼 우리도 계속 듣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범이 침을 뚝뚝 흘렸다.

 

“네가 잘 알잖아? 네가 잘 알잖아?”

 

몸에서 입술만 간신히 도망쳐 나온 마리아는, 퉁퉁거리고 방안을 뛰어다니며 말했다.

 

“나는, 마리아보다 뭘 잘 안 적이 없는데...”

 

“맞아요, 마리아 선생님. 우리는 다 컸어도, 여전히 선생님의 아이들이잖아요.”

 

세라피나가 거들었다. 입술은, 잠시 둘을 응시하더니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리고 이내 굳게 닫혔다.

 

“...아무래도, 알아서 알아내야겠다. 이젠 다 컸으니까.”

 

자경이 범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범이 거대한 입을 벌렸다. 끝내 열리지 않은 마리아의 입술은, 범의 송곳니 아래 짓이겨졌다.

 

“우와... 저거, 먹는 거야?”

 

세라피나가 나른하게 물었다.

 

“...여기, 아직 텃밭 있더라? 오면서 보니까.”

 

“응?”

 

“일단 거기 갔다 올게. 얘기는 천천히 하자.”

 

“...시신은 어떡하지, 니노?”

 

“난 그런 거 몰라. 썩어 문드러져 냄새가 풍길 때까지 알아서 잘 숨겨보든가. 경찰한테는 시체가 지가 알아서 숨었다고 말하고. 여기, 그런 거 전문이잖아.”

 

세라피나는 뜻밖에 조용했다. 그러더니,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나도 같이 내려가야겠다. 가는 길에, 가믈리엘한테 들르자.”

 

들르자?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자경은 생각했다.

 

“세라피나. 아니, 허수영. ...뭐라고 불러줘야 할까? 너는 참... 여전하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니.”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자경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했다. 그것을 판단할 틈도 없이, 세라피나는 자경을 앞질러 방문을 열었다. 자경과 범도 뒤따라 나와 문을 닫았다. 계단을 내려가며, 세라피나는 옅게 콧노래를 불렀다. 잊힌 제목의 성가가 멎을 무렵, 세라피나는 출입문 가장 가까운 방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자경은 굳이 그리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건물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님!”

 

그때, 세라피나가 흐느끼듯 외쳤다. 외침이었으나 아주 작은 외침이었다. 자경의 귀에만 들릴 만큼. 자경은 잠시 멈춰서서 고민했다. 그러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흐린 간접등만 켜진 건물 현관 바닥 위를, 문간 방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가 가늘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믈리엘은 방에서 혀를 깨물고 죽어있었다. 그는 자경, 아니 니노와 세라피나가 어릴 적 이곳의 안전관리요원이었고 지금도 그러했다. 말로만 듣던 이런 죽음이 가능하군. 자경은 피로 범벅된 가믈리엘의 얼굴 앞에서 생각했다. 그의 뺨에, 마리아와 같은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누군가 날렸을 살의 흔적이었다. 세라피나를 돌아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니노.”

 

세라피나가 말했다.

 

“귀신을 쫓아줘...”

 

“...가믈리엘이 죽었네.”

 

“응. 이제 시신처리는 누구한테 부탁하지?”

 

“너도, 죽을까 봐 겁나?”

 

“아니.”

 

“그럼 왜 그렇게 귀신을 겁내?”

 

“원장님이... 아시면 안 되니까.”

 

자경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귀신은 사람을 죽이지 못해. 그 애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도, 네가 생각한 죽음과는 달랐을 거고.”

 

“하지만... 피비린내가 나는걸. 원혼 냄새가... 자꾸 짙어져만 가잖아.”

 

자경은 흠칫 놀라 세라피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귀취를 맡는단 말인가. 그러다, 그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똑바로 말해. 죽었다는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라피나는 피투성이가 된 가믈리엘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자경을 쳐다봤다.

 

“그 애가... 어떻게 죽어있었는지 알아? 현관문은 열려있고, 먹지도 않던 소주에 청산가리를 넣어 마셨대. 근데 정말 이상한 건, 병에도, 잔에도, 사람 지문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야.”

 

“그게 뭐가 이상해.”

 

“자살했다면, 어떻게 아무 데도 지문이 없지? 극약을 먹고 죽어가는 동안에 그걸 지우고, 지운 흔적까지 치웠다는 거야?”

 

자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그딴 거 말고, 그 애한테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해. 얼마 안 있으면 자립지원금까지 받아 나올 수 있었다는 애가, 자기 집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애가, 왜 그렇게 급하게 여기를 내려가서 죽어야만 했는지.”

 

“...니노, 나는 귀신을 쫓고 죽음을 멈춰달라고 너를 부른 거야.”

 

자경은 이를 꽉 깨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귀신 쫓기는 뭔데?”

 

“누구 손에 죽었는지, 어째서 여기를 떠나지 않는지 묻고 달래서 보내는 거.”

 

“나는 그런 걸 할 수 없어.”

 

“니노, 네가 영혼을 본다는 소식은 모두가 알아.”

 

“나는 무당이 아니야.”

 

“하지만 귀신을 보잖아! 그러면, 불쌍한 귀신도 달래서 보내주고 여기도 지켜줄 수 있는 것 아니야?”

 

“그 애 영혼을 어떻게 달래지? 어떻게 보내지? 원한을 품다 품다 못해 이곳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살아생전 받은 고통을 캐묻고, 죽은 몸을 다시 죽여? 허수영. 세라피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미 죽은 영혼을 달랠 방법은 없어. 레퀴엠이든 살풀이든, 다 산 사람 마음 달래자는 것뿐이야!”

 

“말조심해!”

 

“못해! 그래, 나는 닥치질 못해서 신을 버리고 쉼터도 교회도 떠났어. 너는 말조심을 잘하니 이 개 같은 곳을 지키고 있고.”

 

“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알지. 많은 걸 알지. 이젠 송장처럼 누워있다는 원장이 지금보다 덜 주름졌을 적, 밤마다 내 옷 속에 손을 넣고 주물럭댄 것도, 어떤 날엔 속옷까지 벗긴 것도, 다른 방에도 그렇게 들어간 것도 알지.”

 

“그래서 잘난 너는 다 지난 후에, 고발하겠다고 교회를 흔들어놓고 성당을 떠났잖아. 아니, 여기를 제일 흔들어놓았잖아. 종신서원하여 주님의 영원한 종이 되겠다고 수녀가 된 약속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그러면 됐지, 뭘 바라는 거야? 그 난리를 쳐 놓고, 아직도 억울해? 나가서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그만이잖아!”

 

“억울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 수만 번을 말했어도, 원장의 머리를 으깨놨어도, 여전히 매일 억울했을 거야. 그런데 그러지도 못했어. 너희가 내 입을 틀어막았거든! 신의 종이라는 자들이 힘을 합쳐 그랬거든! 기억 안 나?”

 

세라피나의 눈이 흔들렸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떠나고... 여기는 더 큰 지옥이 됐어.”

 

자경은 몸에 힘이 탁 풀렸다.

 

“그게 내 탓이니?”

 

자경은 분노와 허무로 떨리던 몸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세라피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네가 여기를,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아.”

 

“...”

 

“그런데, 나도 네가 미웠다.”

 

세라피나는, 자경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같이 강간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데, 너는 왜 자꾸 비밀을 말할까. 왜, 왜 나를 더 무섭게 만들까. 여기를 나가면 우리가 어디로 간다고...”

 

자경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세라피나를 노려봤다.

 

“너는 너만 불쌍하구나.”

 

세라피나가, 고개를 들어 텅 빈 눈으로 자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가서... 행복했어?”

 

“아주 좆같았어.”

 

“...”

 

“그렇지만 여기처럼 지옥은 아니었어.”

 

“나는 여기가 사라지는 게 무서워.”

 

“너는 비겁하니까.”

 

“비겁하지 않은 건 뭔데?”

 

“비겁하게 굴지 않는 것.”

 

세라피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무릎에 묻었다. 그때, 검푸른 무언가가 어기적대며 움직였다. 가믈리엘의 영혼이었다. 산 자들의 대화가 길어진 틈에 도망치려 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범이 으르렁대며 이빨을 드러냈다. 자경도 그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굳이 말리지 않았다. 범이 무엇을 먹어치울지 알았지만,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터였다. 어차피 이곳은 지독한 침묵의 땅이었다. 자경의 눈치를 살피던 범은, 검푸른 몸뚱이에 벼락같이 달려들어 혀를 뜯어냈다. 그런데 뜻밖에 혀는 단숨에 끊기지 않았다. 찢어져 가면서도 끈질기게 망령의 목구멍에 붙어 버티던 혀는, 꿈틀대며 떠들었다.

 

“니노. 니노네? 천박한 종년.”

 

킥킥 소리가 났다. 혀가 웃는 것인지, 무엇이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가면 끝일 줄 알았지? 너는 언제나 여전히 여기에 있었던 거야.”

 

그 순간, 어디서 새까맣게 빛나는 살이 날아와 그 혀에 꽂혔다. 툭. 혀는 그제야 완전히 끊어져 범의 입에 물렸다.

 

“...그러고 보니 텃밭에 가던 길이었지.”

 

자경이 울음을 그치고 일어섰다. 이미 죽은 혀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자경은 방을 나가려다 말고, 앉아있는 세라피나를 향해 말했다.

 

“나, 가기 전에 주방 가서 물 한 잔 마실래.”

 

답이 없었다.

 

“같이 가면, 비밀을 하나 더 알게 될 수도 있는데.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자경은 문을 열고, 익숙한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 하나가 뒤따라왔다. 주방 불을 켠 자경은, 찬장에서 머그잔을 꺼내 싱크대로 갔다. 그리고 물을 따른 후 식탁에 놓았다. 그러고는 티슈를 한 장 뽑아 자신이 잡았던 잔 표면을 꼼꼼히 닦았다. 아주 천천히. 자경은, 그렇게 닦은 잔을 입으로 물어 들어 올리고 고개를 젖혔다.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물줄기는 자경의 입 밖으로 주르륵 흐르면서도 또 입안으로 들어갔다. 물이 사라지고, 컵을 던지듯 뱉은 자경이 세라피나를 바라봤다.

 

“손을 안 대고도 얼마든지 먹을 수도, 죽을 수 있어.”

 

세라피나는 휘청이며 벽에 손을 짚었다.

 

“경찰도 알았을지 몰라... 세상 사람들은, 너희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어.”

 

“...너는, 그 애가 그런 방법을 썼을 줄 어떻게 알았어?”

 

답을 하려 입을 여는 자경의 목이 메어왔다.

 

“해봤으니까. 나 같이 힘없는 여자 하나 죽으면 다들 그러려니 할 것 같아서, 잠시라도 살해당한 것처럼 보이면 세상이 나를 보아줄까, 너희의 죄를 알까, 수없이 생각하고, 연습해봤으니까.”

 

세라피나는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계속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애가 그날 어떻게 죽었건, 그건 이곳 때문이야. 이곳이 그 애를 죽였어.”

 

자경이 말했다. 세라피나는 이번에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비밀을 알았으니, 너도 말해야지.”

 

자경은 세라피나에게 다가갔다. 세라피나는 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한동안 멈춰 서있었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익숙한 경멸이 자경의 얼굴에 떠오르려 할 때, 세라피나가 말했다.

 

“그 애는 제 물건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갔어.”

 

세라피나는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상자 하나를 꺼냈다. 겨우 라면박스 하나에, 한 사람의 소유가 모두 들어갔다. 노트가 보였다. 자경은 손을 넣어, 연약한 자물쇠가 대롱대롱 달린 일기장을 꺼냈다. 범과 눈을 맞추자, 다가와 그것을 물어뜯었다. 툭, 일기장이 열렸다. 자경은 페이지를 넘겼다. 손이 조용히 떨렸다. 자경은 공책을 덮고 품에 꽉 안았다.

 

“원장, 아직도 그 방에서 자니?”

 

세라피나는 말없이 눈을 피했다. 자경은 노트를 끌어안은 채 문을 거칠게 열고 복도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고, 현관을 나섰다. 숙식동 옆에 단단하게 지어진 사택. 밤마다 떠올리며 떨던 그곳을 향해, 자경은 걸어갔다. 깜깜한 어둠에 묻힌 사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범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니노.”

 

사택 앞에서, 세라피나가 자경을 불렀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뭐를?”

 

“여기서 자라 어른이 되고... 서원을 하고... 또 서원을 한 끝에 종신서원을 하고, 수녀의 몸으로 이곳에 돌아와 아이들을 보고. 왜, 그러다 어느 날 떠났어? 왜 갑자기, 왜 하필 그때, 지난 일을 밝히고 싶어졌어?”

 

자경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너는 어떻게 그랬어? ...말해줘...”

 

자경은 세라피나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세라피나.”

 

이곳을 영영 떠나간 후 처음으로, 자경은 그 지긋지긋하던 세례명으로 누군가를 불러보았다.

 

“너는, 신을 사랑했니?”

 

세라피나는 답이 없었다.

 

“나는 그렇지 않았어. 원망해본 적도, 의심해본 적도, 사랑한 적도 없었어. 그런데, 달리 할 수 있는 게 떠오르지 않더라. 그래서 수녀가 되기로 했어. 그렇게 수녀가 되고, 네 말대로 다시 여기로 왔어.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아서.”

 

세라피나는 계속해서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여기 오고 나서, 아이들을 사랑하게 됐어.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됐어. 신이 만든 아이들을... 그래서 나는, 아이였던 내게 원장이 지은 죄를 용서할 수 없어졌어. 그런 인간이 신과 가장 가깝다고 자처하면서 신부라는 이름으로, 신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보게 더는 놔둘 수 없었어...”

 

자경이 뒤를 돌았다.

 

“세라피나, 너는 귀신이 무섭니?”

 

세라피나는 눈물을 흘리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나는 귀신 같은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귀신은 나를 더듬지도, 멋대로 입 맞추지도, 강간하지도 못하니까. 나는, 원장이 차라리 악령 같은 거였으면 했어. 그런데, 사람이잖아. ...그냥 사람이잖아.”

 

“니노.”

 

세라피나가 울부짖었다.

 

“미안해.”

 

“미안해해야지.”

 

“나를 용서하지 마.”

 

“안 할 거야.”

 

“너는 어째서 노예였던 소녀의 이름을 굳이 찾아내 고른 걸까, 네가 떠나고도 가끔 궁금했어. 나는, 얼결에 세례명을 받아놓고 뒤늦게 세라피나라는 성녀가 가난한 소녀였다는 걸 알고서... 실망했거든, 실은.”

 

“세라피나는 가진 게 없어도 언제나 자기 음식을 남에게 반씩 나눠줬대.”

 

자경은, 기부받은 낡은 티셔츠를 나눠 입은 후 이름만이라도 공주였으면 좋겠다, 투덜거리던 어린 세라피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주 작고 떨리는 얼굴이었다. 공주의 이름을 원해서 세라피나는 행복했을까, 자경 역시 종종 궁금했다.

 

“나는, 니노가 노예 출신이어서 좋아.”

 

어린 날처럼 말하며, 자경은 사택의 무거운 문을 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짤랑, 세라피나가 허리춤의 열쇠를 꺼내 꽂았다. 문이 열리자 비릿한 귀취가 진동을 했다. 불 꺼진 사택 안은 어두웠다. 캄캄한 거실에서, 자경은 세라피나에게 물었다.

 

“그 사람, 지금 많이 늙었니?”

 

“응.”

 

“많이 아프니?”

 

“응. 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는 연명의 의미만 있다고 했어. 원장님이 지내던 곳에서 편안히 어서 소천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셔왔어.”

 

“그렇구나...”

 

자경은 벽을 더듬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원장이 잠들어있을 가장 크고 깊숙한 방이 보였다.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누구시오?”

 

천사가 조각된 침대 위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자경은 침대로 다가갔다.

 

“저, 니노예요.”

 

그 말에 침대 위 노인은 눈을 번쩍 떴다. 일어나려 하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듯했다.

 

“저를... 기억하세요?”

 

노인은 답이 없었다. 대신 눈을 다시 감더니, 중얼중얼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기억 못 하실 수도 있겠네요. 아주 많은 아이들을 보셨으니...”

 

원장은 계속 기도문을 읊으며 묵주를 돌렸다.

 

“저는 기억하는데. 원장님, 밤마다 자주 제 방에 들르셨잖아요. 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주 어린 제 가슴과 배를 만지고, 아래 입은 속옷도 내리셨잖아요.”

 

원장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누구시오. 나는 하느님과 성모와 성인들이 지키는 몸이오. 썩 물러가시오!”

 

“그 몸으로, 저한테 죄를 지으셨잖아요. 다른 아이들에게도요. 얼마 전 죽은 아이에게도요. 왜 그러셨어요?”

 

“니노.”

 

그제야, 원장은 기침하듯 자경의 세례명을 내뱉었다.

 

“아, 이제 신을 떠났으니 그리 부르면 안 되겠지.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몰라도 상관없어요. 죽는 날까지 모를 걸 아니까. 하지만 내가 알고, 신이 알고, 이제 세상이 알게 할 거야.”

 

“그 더러운 입에 어찌 하느님을 담아!”

 

“귀신보다 더러운 새끼가 어떻게 감히 신을 들먹여! 그래서 너는 더 더러운 거야!”

 

자경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귀신이라는 말에, 뒤따라온 범이 산 같이 울부짖으며 다가왔다. 그 소리에 원장 신부는 꺽, 숨들이키는 소리를 냈다.

 

“용서를 빌 기회를 수도 없이 줬어. 이젠 선처를 바라야 할 거야.”

 

신부는 드디어 저 뒤에 선 세라피나를 발견하고 부르짖었다.

 

“세라피나! 세라피나! 이 침입자를 내쫓거라.”

 

“...원장님... 그런데요... 이 방에 오니까 피비린내가 더 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그거 아니?”

 

자경이 원장에게 말했다.

 

“사탄들은 자기들끼리 지키는 규율이 있대. 그리고 그 원칙 중에 하나가, 아동과는 절대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거야. 너는 사탄만도 못한 사람이야. 네가 그걸 몰라도, 값은 치러야 해. 너 말고... 여기 남아 침묵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귀신이 아니라, 자기들의 죄 때문에. 그 죄가 제 목을 조르고 혀를 자른 거야. 입을 다물어서, 영영 다물게 된 거야.”

 

“...세라피나!”

 

“아... 세라피나는, 죽지 않았지. 나를 여기로 불러들였으니까.”

 

자경은 범의 뺨에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목덜미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범은, 날아올라 침대를 덮쳤다. 와드득, 와드득. 물어뜯는 소리가 났다. 까가각, 원장 신부의 바람 빠진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침대를 내려온 범이 뱉어낸 것은 작고 쪼그라든 성기였다. 이어서 나온 것은, 자그맣고 검푸른 도넛 모양에 작은 구멍이 징그러울 만큼 가득히 송송 뚫려있는 무언가였다.

 

“저게... 뭐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세라피나가 물었다.

 

“병,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자경은 다리 사이를 붙들고 벌벌 떠는 노인에게 몸을 굽혔다.

 

“그렇게 좋아하는 신의 곁에 못 갈 거예요. 병도, 죽음도 당신을 떠나갔어요. 증상은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것들이 가져다준 고통과 수치는 더 끔찍해질 거예요. 주인을 잃었으니 마구 날뛸 거거든요. 살아서, 세상의 법으로 재판받고 결과를 기다리세요. 병은 참작되지 않을 거예요... 사라졌으니까요.”

 

“끄으... 더러운 사탄마귀야, 네가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원장 신부가 울부짖었다.

 

-당신 때문에 소녀들이 끔찍하게 아프고, 수치스러웠으니까.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수치였으니까.

 

자경은 속으로만 말했다.  그가 궁금해하는 것을 끝내 알려주지 않은 채, 자경은 범과 세라피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새 눈이 그쳐있었다. 그러나 내리는 족족 쓸었어도 무릎이 푹푹 빠질 만큼 쌓여버린 눈은 아직 녹지 않았다. 어두운 눈길을 헤치며 숙식동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래서 짧지만 길었다.

 

“맞다, 텃밭... 얼어있어서 괜찮으려나.”

 

세라피나가 우물우물 말했다.

 

“원장의 병도, 거름으로 줄 거야?”

 

“...아니. 아동성폭력범의 것은 거름으로 쓰지 않아.”

 

텃밭에 도착한 범은, 입속 깊이 숨겨둔 혀와 입술을 뱉어냈다. 쌓인 눈 위에 그것들이 떨어지자, 눈이 녹고 흙이 드러났다.

 

“범이 귀신 몸을 뜯어내도록 놔두는 건, 나쁜 짓 당한 사람들 원한을 풀어주려는 거야?”

 

“아니.”

 

“그럼 왜?”

 

“포도가 잘 자라라고.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 맛있는 포도를 먹게 하려고.”

 

자경은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영혼의 상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 견디는 방법을 찾아낼 뿐이지... 그리고, 죄도 마찬가지야.”

 

자경이 세라피나를 마주 봤다.

 

“세라피나, 너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나한테, 그리고 아이들한테.”

 

“...속죄할 수 있을까.”

 

“모르지. 알 수 있는 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것뿐이야.”

 

자경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씻기지 않은 응어리가, 자경의 몸을 떨리게 했다.

 

“나쁜 년! 어떻게 그래, 어떻게! 너도 아픔을 알면서, 어떻게...”

 

자경은 세라피나의 가슴을 마구 쳤다. 그때마다 세라피나는 밀려나며 눈길에 미끄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그러면 자경은 거듭 세라피나를 때렸다.

 

“나는 네가 나를 외면한 걸, 진실을 숨기려고 한 걸 영원히 증오할 거야...”

 

자경은 욕을 내뱉으며 계속 울었다. 울며 세라피나를 때렸다. 그러다, 넘어지듯 눈길에 주저앉았다. 세라피나와 자경은 눈밭에 함께 나뒹굴었다. 눈물이 자경의 눈에서 흘러나와 뺨을 적시고 귀로 흘러 들어갔다. 자경은, 문득 몸을 돌려 세라피나를 향해 주먹을 들어 올리다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 새끼가 나한테 한 것처럼 너한테 한 짓을, 영원히 증오할 거야. 영원히 마음 아파할 거야. ...그 놈이 사라지고, 세상이 사라지고, 내가 사라져도.”

 

몸을 피하던 세라피나가, 자경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니까 살아서 말해. 네가 아는 모든 걸 말해.”

 

세라피나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니노. 그거 알아? 이번 교황이, 아동 성범죄를 델릭타 그라위오라로 정의했대.”

 

“그게 뭐더라...”

 

“가장 무거운 죄. 비밀 유지의 예외사항.”

 

“멋지네. 죽은 지 오래인 라틴어로 그렇게 말하니까, 참 멋들어지네.”

 

“그치? 교황이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되고, 아니면 델릭타 그라위오라가 아닌가 봐.”

 

눈이 내린 세상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둘이 계속 무언가를 말하지 않았다면, 이곳엔 침묵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보드라운 털이 언 뺨에 닿았다. 갸르릉, 범이 입을 열자 온기가 느껴졌다. 범은 자경의 옆에 엎드려, 눈을 꾹 감았다. 자경은 손을 뻗어 범을 쓰다듬었다. 총에 맞아 뻥 뚫린 자리가 만져졌다. 동물원을 탈출해 사살된 범의 영혼을 거둬오던 날, 뉴스를 본 자경은 생애 마지막 기도를 했다. 기도문대로 하지 않았다. 어릴 때 가보지 못한 동물원을 어른이 되고 찾아가며 들떴던 마음이 미안했다. 성호를 긋고 눈을 떴을 때, 창 밑에서 호랑이 소리가 났다. 그날을 생각하며 범의 총상을 만지는데, 범의 몸이 떨렸다. 호랑이도 추위를 타던가. 생각하던 자경은 범의 목을 꼭 끌어 안아줬다. 범과 자경은 밤마다 함께 떨며 잠들었다. 두려움은 영혼이 되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붙어서 잠을 청했다.

 

“니노. 여기가 사라지고 나를 받아주는 수녀원도 없으면... 나는 어디로 가지?”

 

세라피나가 말했다.

 

“농사는, 공주 같은 일이 아니라 싫니?”

 

자경이 물었다. 세라피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문득 자경은 알아차렸다. 더는 비릿한 원한의 귀취가 나지 않았다. 더듬더듬 가슴에 손을 갖다 대 보았다. 날카로운 살이 빠져나가고 흐르는 피가 멈춘 가슴이, 외투 너머 부드럽고 보송한 피부밑에서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십자가를 부수고 과거를 떠나오던 날, 저주처럼 새겨졌던 허벅지의 흉터가 웬일로 아프지 않았다.

 

“이상하게 갑자기 비린내가 안 나네...”

 

세라피나가 꿈꾸듯 말했다.

 

“전에는 항상 났거든. ...근데 있지, 하느님도...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때가 있대.”

 

“누가 그래?”

 

“그럴 땐 사과의 표시로, 그 사람을 지키는 징표를 새겨놓는대.”

 

“수녀가 성경에 쓰이지 않은 말을 하네. 성경에 쓰이지 않은 말은 귀신의 말이라더니.”

 

“꿈에서, 그 애가 그랬어...”

 

세라피나를 쳐다보던 자경은, 허벅지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죽은 이와 산 자의 몸이 햇빛 아래 공평히 드러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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