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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깨진 그릇

2022.01.31 23:3801.31

깨진 그릇

 

아이

 

 

1

 

부길은 집 안으로 들어가 거실 불을 켰다. 오후 여덟 시가 넘었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나 주미경이야 시내에서 막창 구이 가게를 운영하기 때문에 늘 새벽 한 시가 넘어야 들어왔다. 이 시각에 집에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카 은혜도 집에 없었다. 올해 2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몇 개월째 집에서 빈둥거리는 조카 보고 부길은 얼마 전에 아르바이트라도 한번 해보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래서 혹시 조카가 아르바이트라도 알아보러 나간 건가 싶어 부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한 말을 해서 자신이 퇴근하고 집에 올 시간에 조카가 일부러 밖으로 나간 것 같아 미안했다.

부길은 큰방 불을 켰다. 방에는 2인용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한쪽에는 조카가 사용하는 책상이 하나 있었다.

부길은 책상 위에 있는 연습장을 들춰보았다. 영어 단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회사 이름과 서류 접수 일정, 연락처 등이 적힌 메모가 보였다.

엄마와 외삼촌이 집에 없는 시간에 혼자서 직원 모집 공고를 보며 입사에 도움이 될까 싶어 영어 공부까지 하고 있었을 조카를 생각하니 부길은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조카한테 전화해 지금 어디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늦은 시간에 밖에 있지 말고 얼른 들어오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려고 휴대전화기를 꺼냈는데, 마침 조카한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외삼촌, 나 시내에서 친구랑 저녁 먹고 들어갈게. 냉장고에 샌드위치 있어. 저녁 안 먹었으면 그거 먹어. 맛있게 먹어!

부길은 문자 메시지를 다 읽고 나서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외삼촌 저녁까지 걱정해 주는 조카한테 왜 아르바이트라도 하라고 잔소리를 했는지 후회가 됐다.

부길은 조카한테 늦지 말고 들어오라며 문자 메시지를 보낸 뒤 방을 나가려는데, 매트리스 위에 웬 서류가 한 장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부길은 서류를 집어들었다. 미경이 신청한 가족관계증명서였다. 신청자 본인인 미경의 이름과 출생연월일, 주민등록번호가 맨 위에 적혀 있었고, 그 밑으로 가족사항이 적혀 있었다. 부 주목식, 모 이봉숙, 자녀 이은혜. 그런데 특이한 건 가족관계증명서에 부 주목식과 모 이봉숙의 출생연월일과 주민등록번호도 함께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가족관계증명서야 부길도 지금껏 관공서에 가서 몇 차례 신청한 적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우체국 집배원에 지원하려고 3년 전에 신청한 적이 있었고.

하지만 지금까지 부길이 신청한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부와 모의 이름만 적혀 있었을 뿐, 그들의 출생연월일과 주민등록번호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부길은 비록 부모라도 사망했거나 이혼했다면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이름 이외에 다른 건 안 적혀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미경이 신청한 가족관계증명서는 달랐다.

부길은 가족관계증명서 덕분에 새삼 주목식과 이봉숙의 나이를 알 수 있었다. 주목식은 살아 있다면 지금 일흔여덟, 이봉숙은 올해 예순아홉이었다.

부길의 부모는 부길이 여덟 살 때 이혼했다. 미경의 나이는 열 살이었고.

부모가 이혼한 뒤 부길과 미경은 아버지 목식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 목식이 4년 뒤에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부길과 미경은 친척집에서 지내게 됐고, 그렇게 40년 동안 부길과 미경은 어머니 봉숙을 한 번도 못 봤다.

“두 분이 서로 아홉 살 차이셨구나. 나이 차가 꽤 많이 나셨네.”

부길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다시 매트리스 위에 내려놓았다.

 

 

2

 

부길은 주차장에서 오토바이를 꺼내와 물류 하차장 한쪽에 세워놓은 뒤 타이어 공기압을 확인했다.

우체국에 출근해서 집배복으로 갈아입은 뒤 우편 물류차가 올 때까지 20분 정도 시간이 남는데, 부길을 비롯해서 수살우체국 집배원들은 그 시간 동안 오토바이를 점검한다. 타이어 공기압을 확인하고 브레이크를 점검하고 전조등과 비상등을 살펴본다. 전부 이상이 없으면 체인에 기름을 칠하고 젖은 수건으로 오토바이도 닦는다.

부길이 오토바이를 닦으면서 옆에 있는 동운에게 말을 걸었다.

동운은 부길보다 네 살 어렸다. 하지만 나이만 어릴 뿐 결혼해서 벌써 아이가 셋이나 됐다.

“동운아, 나 어제 퇴근하고 집에 가서 우연히 누나가 신청한 가족관계증명서를 봤거든. 그런데 누나가 신청한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부모님 출생연월일하고 주민등록번호까지 나오더라.”

“그거 원래 나오는 거 아니에요? 저도 얼마 전에 큰애가 필요하다고 해서 동사무소 가서 가족관계증명서 뗀 적 있거든요. 거기에도 저희 부모님 출생연월일하고 주민등록번호 나오던데요? 부모님 연세 잊고 있었다가, 주민등록번호 보고는 새삼 연세가 많으셔서 걱정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 이상하다. 내가 가족관계증명서 뗐을 때는 부모님 이름만 적혀 있었거든. 전에 우체국 입사하려고 뗐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요? 그럼 형 게 이상한 건데. 왜 그렇게만 나오지?”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나는 또 원래 그렇게 나오는 게 맞는 줄 알았지.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은 나 어렸을 때 이혼하셨잖아. 그리고 아버지는 또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그러니까 상황이 동운이 너하고는 다르잖아.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이혼하셨으면,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은 주민등록번호도 없어지는 거라고 생각했고, 또 이혼해서 헤어진 부모는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자식이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도 이름 이외에는 알 수 없는 건 줄 알았어.”

“음, 형 말 듣고 보니까 또 그럴 법도 하네요. 형은 아버님하고 지냈잖아요. 그래서 돌아가신 분하고 어머니 주민번호는 삭제 됐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왜 형네 누님이 뗐을 때는 주민번호까지 다 나온 거죠?”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이상하더라니까.”

“진짜 이상하네. 그게 아들하고 딸하고 또 다른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아들하고 딸이 다르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말이 안 되죠.”

“그나저나 어머니 주민번호를 아니까 기분이 묘해. 지금까지는 그냥 남이라고 생각을 했거든. 찾을 생각도 안 했고,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방법도 몰랐지. 그런데 막상 어머니 주민번호를 알게 되니까, 혹시 어머니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그럼 어머니 한번 찾아보시게요?”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40년 전에 헤어진 어머니를 지금 어떻게 찾아.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

“그렇죠. 40년이면 정말 긴 세월이죠.”

 

부길은 청포로62길 배달을 마치고 다시 인간리 마을회관 쪽으로 내려와 우회전해서 90m 정도를 달린 뒤 왼쪽 청포로62안길로 빠졌다. 청포로62안길 21에 농민신문을 배달하고 나서 바로 옆집인 23에 들러 최상돈한테 온 우편물을 마당에 있는 항아리 위에 올려놓았다.

청포로62안길 23에는 우편수취함이 없어서, 우편물이 오면 항아리 위에 올려놓는 식으로 배달을 하고 있었다.

부길이 우편물을 항아리 위에 올려놓고 얼른 집을 나오려는데, 이번에도 상돈이 거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집배원님, 안녕하세요!”

부길이 아무리 숨을 죽이며 살금살금 마당으로 가 항아리 위에 우편물을 올려놓아도, 상돈은 귀신같이 눈치 채고는 마당으로 나와 부길을 반겼다.

물론 자신을 반겨주는 상돈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70대 후반인 상돈의 목소리가 아이처럼 가냘파서, 부길은 그런 상돈의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으스스했다. 그래서 부길은 매번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마당에 있는 항아리까지 가서 우편물을 올려놓지만, 희한하게도 상돈은 부길의 기척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밖으로 나와 아이 같은 목소리로 “집배원님, 안녕하세요!” 하고 외쳤다.

부길은 이번에도 밖으로 나온 상돈에게 얼른 항아리 위에 올려놓았던 우편물을 건네며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오토바이에 올라 탄 부길은 운전대 앞에 매단 바구니에서 등기 우편물을 확인했다. 다음에 갈 집인 청포로62안길 27-4에 사는 최봉숙한테 온 법원 등기 우편물이 보였다.

봉숙은 60대 후반이었다. 남편 이기업은 70대 초반, 딸 유순은 30대 후반이었고. 딸은 결혼해서 원주에 살고 있었다.

부길은 봉숙을 볼 때마다 여덟 살 때 헤어진 어머니가 생각났다.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았다. 그리고 생김새가 미경과 비슷했다. 친척들이 늘 그랬다. 미경은 어머니를 꼭 빼닮았다고. 그래서 우편물이 와도 일부러 우편수취함에 안 넣고 꼭 마당 안까지 들어가서 집 현관문 손잡이에 끼워놓거나, 아니면 현관문을 열고 마루 위에 던져놓았다. 택배가 오면 가장 먼저 들러서 배달했다. 등기 우편물이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으면, 택배 배달하면서 메모해 두었던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해서 근처에 있다고 하면 기다렸다가 만나서 건네주었다. 봉숙이 집 뒤 텃밭에서 일이라도 하고 있으면, 일부러 가까이 가서 잡초라도 뽑았다. 그러면서 부길은 혹시나 이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어머니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도 금방 머리를 저었다. 어머니와는 성이 다르니까.

부길이 봉숙에게 온 등기 우편물을 들고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텃밭에서 채소를 돌보던 봉숙이 오토바이 소리라도 들었는지 부길한테 다가왔다.

“오늘 저한테 등기 온 게 있지요? 법원에서 보낸 거. 안 그래도 오늘쯤에 올 거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아이고, 이거 땅 문제 때문에 아주 골치 아프네.”

봉숙이 흙 묻은 목장갑을 손으로 탁탁 털면서 말했다.

“네, 어머님한테 온 등기네요. 최봉숙님. 이거 받으시고요, 여기에 서명 좀 해주세요. 이게 법원에서 온 거라 아무래도 직접 해주셔야 할 거 같아요.”

그러면서 부길은 업무용 PDA를 봉숙에게 내밀었다.

봉숙이 PDA에 서명을 하고 나서 다시 부길에게 건네자, 부길은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 봉숙에게 몇 년 몇 월 생인지 물었다. 법원에서 보낸 등기 우편물 중 일부는 본인 확인 차원에서 출생연월을 입력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도 말해야 돼요?”

“네. 이게 법원 등기라서 그래요.”

그러면서 부길은 다시 업무용 PDA 화면을 봉숙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 출생연월을 입력하라는 칸이 보였다.

“참 내, 별 걸 다 적네. 52년 10월이요.”

부길은 52와 10을 입력한 뒤 등기 우편물을 봉숙에게 건네고 집을 나왔다.

업무용 PDA를 든 부길의 손이 조금 떨렸다. 방금 봉숙이 불러준 출생연월, 52년 10월.

미경이 신청한 가족관계증명서에 적힌 어머니 이봉숙의 출생연월일은 1952년 10월 01일이었다.

부길은 다시 가서 봉숙에게 생년월일이라도 묻고 싶었다. 혹시 1952년 10월 01일생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괜히 봉숙이 불쾌하게 생각해 우체국에 항의 전화라도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 전에 생년월일이야 얼마든지 똑같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3

 

부길은 미경과 함께 아침 일찍 집 근처에 있는 행정복지센터로 갔다.

부길은 어제 점심을 먹으면서 혹시나 싶어 휴대전화기로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접속해 이혼한 부모를 자식이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직계비속의 자격으로 이혼한 부모의 주민등록초본이나 제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나왔다. 그리고 주민등록초본에서 최근 거주지를 확인하면 된다고도 나왔고. 그래서 부길은 밥도 먹다 말고 수살면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어머니 이봉숙의 주민등록초본을 신청했다. 하지만 행정복지센터 직원의 말로는 부길의 가족관계 증명으로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부길은 미경의 가족관계증명서가 떠올라, 내일 미경과 다시 집 근처 행정복지센터에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길은 배달을 마치고 나서 우체국으로 복귀해 국장한테 내일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서 오전 열한 시 정도에 출근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미경이 행정복지센터 직원한테 먼저 가족관계증명서를 신청한 뒤 자신이 딸임을 증명하고 나서 이봉숙의 주민등록초본을 신청했다.

미경의 요구에 직원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모습만으로 부길과 미경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40년 동안 헤어져 지내던 어머니였는데,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이토록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직원이 키보드 두드리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데요. 어머님이 52년생 이봉숙님 맞으시죠? 그런데 거주불명자로 나와요. 1981년도에 주민등록도 말소가 된 상태고요. 초본을 떼 드릴 수는 있는데요, 거주불명자라서 최종 주소지는 말소될 당시 사셨던 서울 신당동이에요.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떠요.”

“신당동은 어머니가 이혼하시기 전에 저희랑 같이 살았던 곳인데요. 그럼 그 이후로 본인이 주민등록을 말소시켰다는 말인가요? 부길아, 우리 어렸을 때 살던 곳이 신당동 맞지?”

미경이 직원과 부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물었다.

“응. 신당동. 그런데 왜 말소가 됐지? 저기, 그럼 혹시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부길이 그렇게 묻자, 직원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게 여러 가지 상황을 뜻하는 거라서요, 제가 뭐라 딱 꼬집어서 말씀드리기가 어렵거든요.”

직원의 말에 부길과 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어머니 제적등본은 뗄 수가 있을까요?”

부길의 말에 직원이 다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네, 제적등본은 뗄 수 있네요. 이봉숙님 오빠 되시는 분이 호주시고, 그 밑으로 이봉숙님 것도 있네요. 이거라도 떼서 드릴까요?”

“네, 어머니 제적등본 한 통 부탁드립니다. 아참, 그런데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혹시 저는 어머니 아들로 안 되어 있나요? 어제 수살면에 있는 면사무소 갔더니 제 이름으로는 어머니가 확인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후견인이 되셨는데, 그러면서 부모 자식 관계가 누락이 된 건 아닌가 싶어서요.”

부길이 어제 수살면 행정복지센터 직원이 어머니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한 말이 떠올라서 물어보았다.

“뭐 그럴 수도 있는데요, 확실한 건 대법원 가셔서 한번 알아보셔야 해요. 아마 제가 볼 때는 옆에 계신 주미경님께서도 전에 대법원 쪽으로 해서 가족관계를 새로 정리하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나중에 대법원 가셔서 한번 알아보세요. 그게 가장 확실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길은 이봉숙의 제적등본을 받아든 뒤 호주 이재덕의 본적부터 확인했다. 강원도 원주시 인수동 106번지의 7.

원주와 자광시는 자동차로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제적등본에는 호주 이재덕, 처 김금주, 자 이창호, 자의 처 박금숙, 손자 이윤희, 손자 이성우, 동생 이봉숙의 정보가 들어 있었다. 처 김금주와 자의 처 박금숙의 정보에는 전호적 주소도 있었고.

“외삼촌 이름이 이재덕이시네. 외숙모가 김금주고. 이창호는 외삼촌 아들. 외삼촌이 엄마 호주로 되어 있구나.”

부길이 재적등본을 들춰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이걸로 어떻게 하게?”

미경이 그렇게 묻자 부길이 재적등본을 몇 번 더 들춰보았다.

“일단은 이번 휴일에 외삼촌 본적지로 한번 가봐야지. 그리고 거기 가서 외삼촌 못 찾으면 여기 외숙모 전호적 주소도 나와 있으니까, 거기에도 가보고. 가서 물어봐야지. 이재덕이나 김금주씨 아느냐고.”

“만약에 모른다고 하면?”

“그럼 여기 자의 처 박금숙, 그러니까 형수님 전호적 주소도 있어. 전라북도 정읍. 여기에도 가봐야지. 일단은 순서대로 한번씩 가보는 거야. 그럼 뭔가 알아낼 수도 있잖아. 우선은 그렇게 가볼 수 있는 곳부터 다 가봐야지. 그 수밖에 없어.”

“그래 그럼, 휴일에 한번 가봐.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엄마하고는 40년 동안 못 만났어. 설마 이렇게 간단히 찾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자.”

“알았어. 그래야지. 쉽게 찾으면 그것도 이상하다. 말이 안 되잖아.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걸 여태 가만히 있었다고 하면 말이 안 되지.”

 

 

4

 

부길은 토요일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외출 준비를 마친 뒤 오전 아홉 시도 안 된 시각에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강원도 원주시 인수동 106번지의 7. 부길이 살고 있는 집에서 47km 떨어진 곳이었다. 자동차로는 고작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부길은 어제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미리 컴퓨터를 켜고 지도 검색 사이트에서 강원도 원주시 인수동 106번지의 7을 검색해 보았다. 도로명 주소로는 등록이 안 되어 있었고, 대신 106번지의 7이라는 땅에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건물의 도로명 주소는 서원로118번길 29.

부길은 거리뷰를 클릭해 서원로118번길 29 주변 골목길도 살펴보고, 서원로118번길 29가 어떤 모양의 건물인지도 살펴보았다.

컴퓨터 모니터에 보이는 서원로118번길 29는 2층짜리 붉은색 벽돌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옆 건물은 유리 가게였고.

부길은 서원로118번길 29 근처에 차를 세운 뒤 어제 지도 검색 사이트에서 미리 주변을 살펴본 기억을 더듬어가며 집을 찾아갔다. 동네가 어제 지도 검색 사이트에서 본 그대로라서 부길은 쉽게 서원로118번길 29를 찾을 수 있었다.

서원로118번길 29는 역시 2층짜리 붉은색 벽돌 건물이었다. 1층에 집이 두 개였고, 2층에도 집이 두 개였다. 그리고 서원로118번길 29 옆에는 정말로 유리 가게도 있었고.

부길은 우선 1층에 있는 두 집부터 가보기로 했다. 왼쪽 집 현관문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자, 부길은 발길을 돌려 오른쪽 집으로 갔다.

오른쪽 집은 계단 밑에 파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제적등본을 통해 확인한 외삼촌 이재덕의 나이 79세. ‘혹시 파지라도 주워서 생활하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부길은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오른쪽 집 역시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부길은 2층으로 올라가, 1층과 마찬가지로 왼쪽 집과 오른쪽 집 초인종을 눌렀다. 이번에도 두 집 다 인기척이 없었다.

부길은 하는 수 없이 건물 옆 유리 가게로 가서, 옆 건물에 사람이 사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유리 가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부길은 다시 서원로118번길 29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유리 가게 바로 옆집에서 녹색 철문이 열리더니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부길이 여자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죄송하지만 뭣 좀 여쭤볼게요.”

부길의 말에 여자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혹시 여기 2층 건물이요, 이 건물에 사람이 살고 있나요? 집이 네 개나 있던데, 초인종 눌러보니까 네 집 다 아무도 안 계신 것 같아서요.”

“네, 사람 살아요. 네 집 다 사람 살아요. 그런데 어디에서 나오셨는데요?”

여자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부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디에서 나온 건 아니고요, 외삼촌댁이 여기인 거 같은데 확실치가 않아서요. 그럼 혹시 여기 번지가 106번지의 7이 맞을까요? 그런 건 잘 모르시죠?”

“저 집이 몇 번지인지는 몰라요. 이 동네가 다 번지수가 엉망이라, 번지 물어보면 몰라요. 우리 집 번지만 알지 뭐 남의 집 번지까지는 모르죠. 우리 집도 여기 유리 가게하고 그 뒤에 있는 집하고 해서 다 같은 번지 쓰니까 헷갈리지.”

여자는 말을 마치고 나서 부길이 다른 걸 더 물어보기도 전에 서둘러 골목 아래로 내려갔다.

부길은 휴대전화기를 꺼내 지도 검색 사이트에서 인수동 106번지의 7을 검색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맞았다. 그래서 부길은 다시 한번 건물 안으로 가서 네 군데 집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네 군데 모두 인기척이 없었다.

부길은 하는 수 없이 외숙모 김금주의 전호적 주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김금주는 이재덕과 동갑인 79세였고, 전호적지는 강원도 영월이었다. 지금 부길이 있는 서원로118번길 29에서 49km 떨어진 곳이었다. 자동차로는 50분 정도 걸렸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이재덕이나 김금주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하면, 외사촌 형의 처인 형수 최경임의 전호적지인 전라북도 정읍까지 가야 했다.

부길은 서원로118번길 29에서 나와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왼쪽 골목길에서 두 노인이 장기를 두고 있는 게 보였다.

부길이 두 노인한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뭐 하나만 좀 여쭤보려고요.”

부길의 말에 두 노인이 장기를 두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한 노인은 빨간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고, 한 노인은 검정색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얼핏 봐도 두 노인 다 재덕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두 노인은 부길을 쳐다보면서 손으로 장기 알을 만지작거렸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어서 물어보라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혹시 이 근처에 이재덕이라는 분 사시는 곳이 어딘지 모르실까요? 올해 연세가 일흔아홉이세요.”

부길의 말에 두 노인은 계속 장기 알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빨간색 야구 모자를 쓴 노인이 맞은편에 앉은 노인한테 물었다.

“이재덕이라면 저 윗집에 사는 영감 아닌가? 거 왜 아파트 경비하던 영감 있잖아?”

“그래, 그 영감 이름이 이재덕이지. 그런데 젊은 양반이 그 영감은 왜 찾아?”

검정색 뿔테 안경을 낀 노인이 안경 알 위로 눈을 치켜뜨면서 부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노인의 말에 부길이 얼른 한 걸음 다가섰다.

“이재덕이라는 분을 아세요? 혹시 이 근처에 사실까요?”

“거참, 아 그 영감은 왜 찾냐니까?”

검정색 뿔테 안경을 낀 노인이 다시 한번 부길에게 그렇게 물었다. 부길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잔뜩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재덕씨가 제 외삼촌이시거든요. 처음으로 제가 집에 방문하는 거라서요, 집이 이 근처인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딘지를 모르겠어서요.”

“아니, 그 나이 먹도록 외삼촌 집을 처음 방문할 수도 있나?”

이번에는 빨간색 야구 모자를 쓴 노인이 부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네, 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부길의 말에 두 노인이 한참을 장기 알만 만지작거리더니, 검정색 뿔테 안경을 낀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부길에게 골목길 위에 있는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노인이 가리킨 건물은 지금껏 부길이 살펴본 2층짜리 붉은색 벽돌 건물인 서원로118번길 29였다.

“저 집이야. 저 집 1층에 이재덕이가 살아. 1층 왼쪽 집. 보아 하니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알려주는 거야.”

부길은 노인이 손으로 가리킨 서원로118번길 29를 바라보았다.

“아, 저 집이요? 안 그래도 저 집인 것 같아서 조금 전에 저 건물에 있는 네 군데 집 다 초인종을 눌러봤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안 나오시더라고요. 그럼 지금은 집에 안 계시나 보네요.”

“지금 집에 없긴 왜 없어? 저 집 아주머니가 다리가 불편해서 아무 데도 안 나간다고. 매일 집에만 있어. 그러니까 이재덕이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주머니는 집에 계실 거야. 다시 가봐. 가서 초인종도 누르고, 안에 누구 계시냐고 큰소리로 계속 불러. 그래야 안에서 사람이 나오지, 안 그러면 안 나와. 노인네들이라 귀가 어두워서 여러 번 부르지 않으면 못 듣지.”

 

 

5

 

빨간색 야구 모자를 쓴 노인 말대로 부길은 1층 왼쪽 집으로 가서 초인종도 누르고 손으로 현관문도 세게 두드렸다.

“계세요! 계세요!”

부길이 몇 차례 그렇게 외치자 마침내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그러면서 누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백발에 얼굴이 갸름하고 뒤통수가 볼록 튀어나왔다.

부길은 남자를 보자마자 외삼촌 재덕이라는 걸 직감했다. 부길이 재덕을 마지막으로 본 게 40여 년 전이었다. 부길이 일고여덟 살 때 보고 못 봤으니까 그 정도 됐다. 그러니 부길은 재덕의 얼굴을 전혀 몰랐다. 일고여덟 살 때 본 얼굴을 40여 년이 지나서 다시 본다 한들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부길은 현관문 열고 나온 남자를 보자마자 외삼촌 재덕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만큼 둘은 닮았다. 부길이 30여 년 뒤에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그때는 재덕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둘은 닮았다. 그래서 조금 전 골목길에서 장기 두던 두 노인도 부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순순히 재덕의 집을 알려준 것이었다. 부길의 얼굴에서 재덕의 젊은 시절 모습이 보였을 테니까.

재덕 역시 현관문을 열자마자 부길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한동안 말없이 부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래, 부길이구나. 부길이야. 잘 왔다. 잘 왔다, 부길아.”

재덕의 말에 집 거실에서 누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현관 쪽으로 걸어나왔다.

“부길이가 왔다고! 아이고, 도대체 이게 뭔 소리래!”

금주가 쓰러질 듯 위태롭게 걸으면서 부길한테 다가오더니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부길이가 맞구나. 부길이가 맞아. 어렸을 때 얼굴이 아직 남아 있네.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래, 그래. 얼른 들어와라. 들어와.”

골목에서 장기 두던 두 노인도 어느새 서원로118번길 29 계단 밑에서 재덕과 금주가 부길을 맞이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재덕과 금주가 소파에 앉는 걸 보고 나서 부길이 큰절을 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일찍 외삼촌을 찾았어야 했는데, 이제야 이렇게 왔네요. 두 분 건강하시죠?”

부길의 말에 두 사람은 눈물만 흘렸다.

“아니다. 늦기는, 이렇게라도 찾았으니 다행이지. 우리야말로 진즉에 너희를 찾았어야 했는데, 방법을 알아야 찾지. 아무튼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래, 아버지는 잘 있고? 부길이 네 아버지가 나보다 한 살이 어렸어. 그러니 올해 일흔여덟이겠구나. 아직은 정정하지?”

재덕이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엄마랑 이혼하고 나서 4년 뒤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벌써 돌아가신 지 36년 됐네요.”

“아버지가 죽었어? 아니, 어쩌다 그렇게 됐대? 우린 그래도 부길이 너하고 미경이가 아버지 밑에서 잘 크고 있겠거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지. 너희 아버지가 그때 가방 공장을 크게 해서 돈이 많았어. 그래서 어쩌면 새 장가라도 들어서 애들 잘 키우겠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지. 죽은 줄은 몰랐다.”

금주가 말을 하고 나서 한숨을 크게 쉬었다.

“어쩌다 그렇게 일찍 죽은 거냐? 너희 엄마랑 이혼할 때도 어디 아프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재덕 역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혼하시고 나서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셨어요. 그 뒤로 계속 아프셨는데요, 몇 년 이따 돌아가시더라고요. 저희도 너무 어릴 때라 실은 아버지가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는 몰라요. 친척들한테 물어봐도 무슨 병인지 모른다고 하시고요.”

“그랬구나. 그랬어. 아이고,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냐, 그래.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참. 그동안 너희 둘이 고생이 많았겠구나. 어디, 그럼 친척집에라도 가서 지냈던 거냐?”

“네, 누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큰집에서 지냈어요.”

“그럼, 그때라도 엄마를 좀 찾아보지 그랬어?”

금주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네,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어요. 이번에도 그냥 우연히 찾아나서 본 거고요.”

부길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도 너희 찾고 싶기는 했는데, 네 엄마는 그렇다 쳐도 우리라도 어떻게든 너희 찾고 싶기는 했는데, 방법을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부길이 너는 용케 여길 찾아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은 거냐?”

재덕이 그렇게 물으면서 금주에게 먹을 거라도 갖고 오라고 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과일도 안 내오고 여태 이러고 있었네.”

그러면서 금주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주방으로 갔다.

“알아보니까 부모가 이혼을 했어도 자식은 이혼한 부모의 주민등록초본이나 제적등본을 뗄 수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며칠 전에 동사무소 가서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 엄마는 거주불명자로 처리가 돼서 초본을 떼도 이혼하기 전에 살던 주소가 최종 주소로 나와요. 서울 신당동이요. 그래서 대신에 제적등본을 떼보니까 호주가 외삼촌으로 되어 있고, 그 밑으로 엄마 호적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제적등본 보고 여기 주소로 한번 와본 거예요.”

그러면서 부길이 손에 들고 있던 제적등본을 재덕에게 보여주었다.

재덕이 한참을 부길한테서 받은 제적등본을 살펴보았다.

“그래, 내가 네 엄마 호적을 20년 전에 내 밑으로 해놨다. 부길이 너 태어났을 때는 외갓집이 경북 의성이었어. 혹시 기억하니?”

“네, 거기에서 과수원 하셨잖아요. 어디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과수원은 기억이 나요.”

“그래, 기억하는구나. 우리가 예전에는 의성에서 과수원을 했어. 그러다 너희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나서 여기 원주로 온 거야. 여기가 내 고향이기도 하고. 그리고 여기로 와서 얼마 안 이따가 내가 네 엄마 호적을 내 밑으로 해놓은 거지. 그래야 나중에 조상님들 볼 면목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부길은 재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재덕이 말을 이었다.

“실은 네 엄마가 성을 바꿨어. 이씨에서 최씨로 바꿨어. 이제는 이봉숙이 아니라 최봉숙이야. 그래서 아마 거주불명자로 나오는 걸 거다. 이봉숙으로는 주민등록도 말소가 됐을 거고.”

“네, 그래서 그랬군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동사무소에서 그러더라고요. 1981년도에 말소가 됐다고요. 그래서 전 혹시나 돌아가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랬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설마 성을 바꿨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테니까.”

금주가 사과를 깎아서 접시에 담아 부길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부길이 너는 지금 어디에서 사니? 결혼은 했고?”

“아니요, 결혼은 아직 안 했어요.”

“결혼을 아직 안 했어? 부길이 네가 올해 몇이지?”

“마흔여덟이요.”

“그래, 그 정도 됐지. 그런데 아직 결혼을 안 했어? 그럼 미경이는?”

“누나는 몇 년 전에 이혼했어요. 딸이 하나 있는데요, 지금은 저하고 누나하고 조카하고 셋이서 살아요. 여기에서 얼마 안 멀어요. 자광시에서 살거든요. 서울에서 살다가 5년 전에 자광시로 왔어요.”

“자광시? 네 엄마도 자광시에서 사는데!”

부길의 말에 재덕이 놀라면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도요? 와, 그러면 혹시 시내 어디라도 다니면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엄마 얼굴은 기억나니?”

“아니요, 워낙에 어렸을 때 헤어져서 기억이 안 나요. 집에 엄마 사진도 한 장 없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길에서 마주쳤더라도 못 알아봤을 거예요.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거고요. 40년이나 지났잖아요.”

“그래도 네 엄마는 부길이 너 보면 알아보겠지. 나도 딱 보니까 부길이 넌 줄 알겠던데. 네 외삼촌도 부길이 너 알아봤잖아.”

금주가 그렇게 말하면서 부길에게 사과를 집어주었다.

“그런데 엄마는 왜 성을 바꾸셨어요?”

부길이 사과를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부길의 말에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금주는 소파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떼어내고 있었고, 재덕은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결심이라도 섰는지 재덕이 입을 열었다.

“실은 네 엄마가 재혼을 했어. 남자한테는 재혼이라는 사실도 숨겼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남자도 성이 이씨인 거야. 지금이야 상관이 없지만, 그때만 해도 동성동본은 결혼을 못했다고. 그래서 네 엄마가 성을 바꿨어. 최씨로. 벌써 40년 가까이 됐겠다. 딸이 하나 있어. 서른여덟인가 아홉인가 그래. 걔는 결혼해서 여기 원주에서 살아. 가끔 우리한테 인사하러 오는데, 걔 올 때마다 우리야 부길이 너나 미경이 생각 때문에 괴롭지. 그래서 걔 오는 거 별로 반기지도 않았고.”

어머니가 재혼했다는 말에 부길은 말없이 사과만 먹었다.

“그래서 내가 네 엄마 호적을 계속 내 밑에다 놔둔 거야. 아무리 성을 바꿨어도, 그래도 이봉숙은 이봉숙이잖아. 내 동생이기도 하고, 그리고 네 엄마이기도 하고.”

재덕이 슬그머니 부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뒤에 다시 자기 손을 만지작거렸다.

부길은 말없이 사과를 먹으면서 방금 재덕이 한 말을 떠올렸다.

‘재혼해서 성을 바꿨다. 이씨에서 최씨로. 최봉숙. 그럼 지금의 남편은 성이 이씨라는 얘기다. 그리고 딸이 하나 있다. 서른여덟인가 아홉. 딸은 결혼해서 이곳 원주에 살고 있고, 엄마는 그 남자와 지금 자광시에서 살고 있다.’

부길은 며칠 전 법원 등기 우편물을 배달했던 수살면 청포로62안길 27-3 최봉숙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면서 머리를 저었다.

“전화 한번 해보지요?”

금주가 부길의 눈치를 보면서 재덕의 무릎을 툭툭 쳤다. 봉숙에게 전화를 해보라는 말이었다.

금주의 말에 재덕이 주머니를 뒤져 낡은 폴더형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해봐야지. 부길이가 왔다고 말해야지. 부길아,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엄마한테 전화해 볼게. 네 엄마도 틀림없이 좋아할 거다. 그 전에 아마 믿기지가 않겠지. 나도 지금 믿기지가 않는데.”

그러면서 재덕이 느릿느릿 번호를 눌렀다.

부길이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보았다. 아까 집안으로 들어올 때 현관문을 닫지 않았는지, 아직까지 문이 열려 있었다.

그때 봉숙이 막 전화를 받았는지, 재덕이 봉숙에게 부길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부길은 열려 있는 현관문을 닫으려고 일어섰다.

곧이어 재덕의 휴대전화기에서 봉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봉숙이 얼마나 소리를 버럭 질렀는지, 현관문을 닫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걷고 있는 부길의 귀에도 봉숙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왜 살아 있다고 했어! 죽었다고 했어야지!”

부길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몸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하고 솟구치더니, 목을 타고 머리 위로 올라와 코와 눈을 뜨겁게 달궜다.

부길이 다시 걸음을 옮겨 현관문 있는 곳까지 갔다.

봉숙은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부길이 듣기에 그런 봉숙의 목소리는 어딘가 귀에 익었다.

현관문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높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부길은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를 찾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부길을 괴롭혔다.

아이

아이

댓글 2
  • No Profile
    운칠 22.02.11 05:07 댓글

    화차였군요. 문장이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여 술술 잘 읽었습니다!

  • 운칠님께
    글쓴이 아이 22.02.13 18:03 댓글

    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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