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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빈 운명

2008.04.25 20:4504.25

  그 여자

  그 영화는 영 재미가 없었다. 어차피 처음에 보려 했던 영화 표가 매진이라 아무것이나 골라 들어갔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영화인 데다 포스터도 그다지 흥미 있게 보이지 않아 애당초 별 기대도 없었다. 그런데도 심하게 지루했다. 드라마에서 대박이 터져 뜬 신인 여배우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인 남자 배우를 데려다 놓고 흔하디 흔한 연애담을 풀어놓으니 도무지 볼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집중하는 듯했던 다른 친구들은 금방 심심해하다가 다음 대사는 뭐가 나올지 알아맞히며 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떠들어도 걸릴 것이 없었다, 극장에는 우리뿐이었으니까. 나는 반쯤 졸았다. 한참 동안 자다 깨다 하기를 반복했던지라 저 여자가 왜 저 남자의 뺨을 때리는지, 이 여자는 언제 등장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야기는 바야흐로 전형적인 코스를 차근차근 밟다가 기어이 우리 다섯이 모두 예상한 바 있는, 카페에서 물을 뒤집어쓴 남자가 우울하게 퇴장하고 여자 혼자 남는 지경에 치달았다. 옆에서 의선이 놈이 낄낄거리며 자신 있게 발언했다. 이제 음악 깔아주시고, 여주인공이 우울한 목소리로 나레이션 넣어주시면 되는 거지. 우리 모두 그런 장면이 다음에 나오리라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내가 그 장면을 몇 년이 지나도록 기억한 것은.
  떠나는 남자 쪽을 바라보던 여자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우울한 음악이 깔렸다. 바이올린이 울어 젖히는 가운데, 카페 유리창 밖에서 카메라가 여주인공 얼굴을 쓸어가는 가운데, 여자는 커피 잔을 양손으로 감싸듯 쥐며 고개를 숙인다. 딱히 눈물은 내지 않았다. 표정도 그다지 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필사적이었다. 흰 머그컵을 쥔 두 손이, 찌푸렸는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운 미간이, 눈물 없는 큰 눈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녀가 마치 지금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온몸으로 진술하는 듯 보였다. 어째서인지 나는 그때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의선이 놈이 예언했듯, 곧 여배우의 우울한 나레이션이 깔렸다.
  눈물은 아주 오래 후에야 올 것이다. 그때는 그것을 그저 알 것 같았다.
  옆에서 서신고 교복을 대충 껴입은 덩치 커다란 사내자식이 넷 씩이나 동시에 손뼉을 치고 온몸을 뒤틀며 낄낄거렸다. 극장이 다 들썩거리는 듯했다. 의선이 놈은 노골적으로 예언자 노릇을 했다. 이제 대충 괜찮은 음악으로 이어지면서 저 장면을 백그라운드 삼아 만든 이들 이름이 쭉 올라가는 거야, 글씨체는 뭔가 뽀대나는 걸로 해서 말이지!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 영화는 끝까지 우리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며 일어나 나온 영화관이, 그곳에서 본 영화의 어떤 장면이, 오래도록 안구 안쪽에 달라붙어 있는 기분이란.
  솔직히 나는 그 이후로 그 배우의 사진을 모았고, 관련 기사라면 일단 닥치는 대로 읽었다. 절로 눈이 가고 관심이 가는 것이 왜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 장면에서의 그 느낌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같은 여배우라도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때는 잠시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두 번 다시는 그런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건가, 싶어 실망스럽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이 년째 되던 해였다. 아마 한글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 5교시 이후 담을 넘어 학교 밖으로 '날아' 가며 의선이 놈이 한글날도 공휴일이 되어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기억난다. 신나게 '날아' 가다가 학교 뒷문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지나지 못하고 주임에게 걸렸다. 슬프게도 혹은 기쁘게도, 붙잡힌 것은 의선이 놈뿐이었다. 나는 그 녀석이 주임에게 붙잡혀 절규하는 틈을 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야 이성면, 이 의리 없는 새끼야. 주임이 아무리 괴물이라도 한 손으로 의선이 놈을 붙잡고 공간이동해서 저 멀리 달아나는 나까지 잡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대탈출 후였다. 갈 곳이 없었다. 극장이든 식당이든 노래방이든 어디든, 혼자 가서 놀 곳이 딱히 없었다. 기껏 '날아와' 놓고 영 심심한 처지가 된 나는 괜히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별생각 없이 일단 아무 방향으로든 걷기로 했다. 거리는 온통 밥집의 향연이었다. 보쌈집, 돈까스집, 횟집, 한식전문점, 허브요리 전문점, 오전 중에 들어와 커피를 시키면 케이크를 공짜로 준다는 카페, 토스트 전문점, 해산물 뷔페로 이어지는 길에서 벗어나 갈비 전문점으로 갈라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자 웬 딴 세상이 나왔다. 수십 년은 되었을법한 먼지투성이 구멍가게, 그러니까 편의점이 아니라 정말 구멍가게가 나왔고, 웬 늙은 개가 가게 문 앞에 위풍도 당당하게 떡 하니 버티고 앉았다. 먼지 낀 간판은 딱히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추레한 외양을 보고 나니 대성슈퍼라는 상가 명이 묘하게 웃겼다.
  이건 뭐 갑자기 과거를 십 년이나 거슬러 온 것도 아니고. 진짜 오래됐네, 하고 중얼거렸었다. 이후 별생각 없이 그 가게를 지나치려 했다. 벽돌로 고정해 열어 둔 문밖으로 웬 여자가 걸어나왔다. 나는 걸어가면서 그 여자를 잠깐 보았다. 시야의 경계 즈음에서 흰 목과 자주색 원피스 자락, 대충 꿰어신은 샌들이 어른거리다 지나갔다. 한 손에 물병을 쥐고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물통에 뚜껑은 빨간색이었다. 반쯤 담긴 물이 병 속에서 원통형으로 출렁였다.
  정작 길 반대편까지 걸어가고 나서야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앞을 바라보며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햇빛 아래 희고 붉고 무심하던 그 여자가 계속 보였다. 그러더니 길을 건널 때쯤에는 아쉬운 기분이 되었다. 길을 다 건넌 후에는 지나치게 아쉬워서 억울할 지경이었다. 어둡던 가게 안에서 밖으로 걸어나오던 그 여자, 손목 너머로 햇살이 길게 내려갔었다. 만약 지나치던 그때 무언가 달라서 우리가 서로 좀 더 자세히 보았다면 아주 큰 일이, 아주 엄청나고 숭엄한 일이 일어났을 것만 같았다. 자동차 지나가고 사람 지나가고 교문이나 성적표, 몽둥이나 욕설이 지나가는 세상이 온통 뒤집혀 아주 딴 세상으로 일어났을 법한, 어떠한 압도적인 개벽이……. 방금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 아주 잃어버린 그런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서 그 여자를 보는 것도 싫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그저 그 길을 걸어가고 그 여자가 그저 문밖으로 걸어나오던 그때, 어떠한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여기저기 푹푹 패인 아스팔트 길바닥에서부터 회색 스모그 가득한 하늘에까지 도사리듯. 왜 이런 것을 뒤늦게야 깨닫는지 땅이라도 치며 한탄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그저 횡단보도를 건넜으며, 다른 많은 사람도 겉으로는 그저 무심한 표정을 한 채 이쪽으로 저쪽으로 지나가고 지나갔다. 문득 저들 중 누구라도 나처럼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몰두한 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집으로는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꽤 늦은 시간까지 쓰잘데기 없는 길거리를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마지못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이 된 심정으로 집으로 향했다. 다섯 개는 되는, 똑같이 생긴 아파트 건물 입구를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삼신 1007동에 다다를 수 있었다. 지옥의 입구에 막 다다른 영혼의 심정이 그러할까.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맞이한 것은 아버지의 주먹이었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덤덤해진다. 주먹질이나 발길질보다도 그 익숙함이 가장 무서웠다. 언제나 같은 패턴이었다. 아버지라는 인사는 일단 집으로 들어서는 내게 애정 어린 폭행을 선사한 후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서너 시간을 소비했다. 많은 경우 취한 채, 언제나 대책 없이. 아버지의 웅변은 매일 대강 같은 말의 재활용이었다. 너는 이제 중1이다, 중2다, 중3이다, 고1이다, 고2다,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을 만한 나이다, 도대체 나중에 어떻게 먹고살려고 그러냐, 그 똥거름만도 못한 친구라는 것들하고는 왜 몰려다니는 거냐, 성적만 잘 나오면 다냐, 너는 지금까지 해낸 일도 없고 성과도 없으며 하여간에 한심하고 게으르고 쓸데없는 놈이다…… 정도가 서론에 해당했다. 본론으로는 발음이 엉망이라 알아듣기도 어려운 욕설이 따랐고 결론은 주먹질, 싸대기 몇 대에 가끔은 발길질, 이후 신세 한탄이었다. 몇 년을 겪고 나니 대충 기승전결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왜 어머니라는 사람이 오래전 집을 나갔는지 이미 수십 번을 되풀이해서 이해했다. 반복학습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집에 달라붙어 살았고, 한바탕 아버지의 폭풍이 지나간 이후 방에 틀어박혀 참고서와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언젠가는 이 종이짝으로 보란 듯이 복수해 주겠다는 결의를 불태울 수 있었다. 어쨌거나 아버지라는 인사는 성적이나 석차에는 물 앞의 불이나 미녀 앞의 야수처럼 약했다. 보통 때에는 신경 쓰지 않더라도 성적표 나오는 날이나 전교 석차 순위가 공개되는 날이면 천하가 다 평화로웠다. 복도 벽에 달라붙은 흰 종이 위 검은 숫자의 위력이 그렇게 강력했다. 있는 놈들이 다 해먹는 게 세상이지, 라는 게 아버지의 좌우명이었다. 제 아들을 쥐잡듯이 패며 연방 중얼거리는 게 그런 말이니 좌우명이 맞을 것이다. 나는 복수하고 싶었다.
  죽이고 싶었다. 그 아파트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 온몸에 달라붙는, 사방에 뒤덮인 꺼끌꺼끌한 공기도, 벌건 눈을 하고 제 아들에게 주먹질하는 그 인간도, 그럼에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도. 나중에는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세상이 죄다 골치가 아팠다. 차라리 깨끗하게 투신자살이라도 해서 단번에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멀쩡하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고 싶었으나 그것도 결국은 오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는 전혀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으며, 조금도 괜찮지 않았고, 털끝만큼도 멀쩡하지 않았다. 억울하고 분했다.
  씨발 새끼. 개 쌍것 같으니. 아주 죽여버릴라. 아주 살다 살다 저런 새끼는……. 욕설을 등에 주렁주렁 매단 채 방으로 들어오면 갑작스레 세월이 십 년은 지난 것 같았다. 감정은 미친 듯이 날뛰는데 손은 조심스럽게 책가방을 내려놓고 있었다. 어쨌거나 쓸데없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긴 숨을 내쉬는데 뚝뚝 끊겼다. 손이 떨렸다.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을 책상에 줄줄이 늘어놓고서 펜을 쥐었다. 그 상태로 또 그 여자를 생각했다. 언제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안을 들여다볼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대비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또 그 여자가 문제집 안에서 하얗게 일어섰다. 이런 때, 진짜 어울리지 않게도.
  그 여자는 어떤 집에서 자라났을까. 이런 처참한 상황을 이야기하면 이해해줄까. 나는 이미 그녀의 손목에서 한참은 더 나아가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를테면 만약 그 여자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 다리를 벌리면 어떨까, 그 허벅지로 손을 쓸어올리면 어떨까. 내 몸을 그 위로 겹치면 어떨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개를 뒤로 젖힐까. 그 목에 얼굴을 겹치면 어떨까. 귓가로 그 여자의 맥을 짚을 수 있을까. 벌어지는 입술에서 어떤 숨소리가 솟을까. 도망치는 것처럼 절박하게 상상했다. 아까와는 적잖이 다른 방향으로 괴로웠다. 그때 그냥 돌아가서 다시 봤어야 했다. 말이라도 걸어야 했다. 아니면 그 가게에 들어가서 뭐라도 사며 말을 걸을 수도 있었다. 잘만 했으면 폰번이라도 딸 수 있었을 거다. 아니면 얼굴이라도 좀 더 잘 봤을 수 있었다. 왜 그냥 왔을까.
  현관문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몇 분 정도 기다렸다. 가끔 아버지는 나갔다가도 다시 들어와서 전화나 열쇠를 찾기도 했다. 꽤 시간이 흘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이라도 마시려는 양 방문을 열고 부엌까지 걸어가 봤다. 아무도 없다. 안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역시 비어 있었다. 화장실과 베란다에서도 인적을 찾을 길 없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내일 다시 거기 가면 그 여자가 있을까.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문을 잠갔다. 벽을 마주 보고 침대에 앉았다. 만약 있으면 뭐라고 말을 거는 게 좋을까. 지퍼를 열고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미 딱딱한 물건이 잡혔다. 그 여자가. 나는 손가락으로 내 물건을 위에서 아래로 감싸 쓸어내리며 계속 생각했다. 그 여자가 여기에 손을 넣어 잡는다면, 등 뒤에서 그렇게 하면 부드러운 가슴이 쓸릴 것이고, 그러면 나는 손을 뻗어 그 여자의 허리와 옆구리와 다리를 쓸어내릴 것이고, 곧 돌아앉아 다소 거칠게 여자의 몸을 침대로 누르며 목과 어깨를 물을지도 모른다. 그 흰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아프다고 불평하겠지. 정말 불평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애교 섞인 투정일 수도 있겠다. 두 다리를 잡아 벌리면, 곧 그 다리가 내 허리를 감을 것이고……. 아랫배 쪽으로 피가 몰렸다. 미칠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살 속으로 끝까지 나를 밀어 넣으면, 그 안은 촉촉이 젖어 있을 것이고, 그 여자의 알몸이 내 몸과 포개진 채 이리저리 움직이고…….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몸이 절로 출렁였다. 두루마리 휴지는 침대 아래 있었다. 눈앞이 시꺼멓게 변했다. 잠깐뿐이었다.
  나는 벽에 턱을 박았다. 좀 살 것 같았다. 머릿속이 방금 터진 폭죽처럼 허했다. 여운이 다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땀에 젖은 그 여자의 등을 내 몸으로 온통 덮고 싶었다. 반드시 그 가게에 다시 가야 한다고 속으로 반복해서 생각했다. 그것은 다짐이었고 결심이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학주와 마주칠 걱정 따위는 이미 엿 바꿔 먹었다. 어차피 우등생에게는 관음보살처럼 자비로운 것이 학주였다. 침대 아래로 손을 뻗어 휴지를 집었다.
  이후 나는 그 골목길을 쓸데없이 자주 지나다니며 대성슈퍼 앞을 지나치게 오래 서성거렸다. 그러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가 눈 뜬 채 꿈이라도 꾼 것인가 싶었다. 친구놈들은 할 것도 없으면서 왜 그 동네는 자꾸 가느냐며 날 구박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간혹 가게 안까지 들어가서 물이나 주스, 껌이나 과자, 스팸이나 라면을 샀다. 먼지 수북이 앉은 초코파이를 산 적도 있었다. 드라마 보기에 바쁜 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이 손님이라도 사지 않을 물건들을 사 가는 고등학생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눈은 티비에, 다른 눈은 지폐에. 나는 꽤 끈질겼다. 아버지 아래서 단련해 온 고집이 이렇게 쓸모 있을 수도 있었다. 침대 아래 휴지가 새것으로 바뀌고 방학이 시작되어 자율학습에 비 자율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일주일에 세 번은 꼭 그 앞을 들렀다. 매번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꼭 그 여자를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착각인지 진짜인지 분간할 길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들어올 때에는 여자 향수 냄새를 풍기며 안방으로 들어가 죽은 듯 널브러져 잘 뿐이었다. 세상이 한결 평화로웠다.
  겨울치고는 지나치게 따뜻해서 눈 대신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아직 방학 초반이었다. 일 년간 고3으로 사는 일이 과연 어떠할 것인가에 관한 불길한 예언이 전등에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나방의 몸짓처럼 정신없이 교실에, 교무실에, 독서실에, 화장실에 복도에 난무했다. 자율학습에 들어오는 동료 예비 고3들은 서서히 그 눈에 비장함을 띠었다. 반면 누가 뭐라든 상관없이 마음 편히 사는 놈들도 있었다. 그날은 친구 놈들이 자율적으로 자율학습을 제낀 날이기도 했다. 그날 원래는 그냥 시키는 대로 끝까지 붙박여 있다가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 앞에서 전화를 열어 시간을 확인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십 분, 아니 오 분이라도 좋으니 슈퍼로 가서 서성거리고 싶었다. 왠지 이번에는 그녀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전에도 자주 그런 감이 들었으며 매번 그런 감이 엇나갔다는 사실은 잠시 잊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지하철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마치 전쟁터라도 나가는 병사처럼 긴장해서 거리를 걸었다. 수많은 우산을 쓴 수많은 사람이 가뜩이나 좁은 거리를 메워 길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는데, 내게는 그것도 그저 잡초나 담배꽁초처럼 느껴졌다. 색깔 없고 냄새 없고 존재감 없는 무생물들의 행렬 속에 오로지 나 혼자 말도 안 되게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괴상하고 불편했다. 그 누구하고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 누구하고도 부딪히지 않게 걷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비인지 눈인지 이제는 분간할 수도 없게 된 진눈깨비에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덕분에 세상에 죄다 회색이었다. 숨을 내쉬니 입김이 나왔다. 모르고 있었는데 발가락 끝과 양손이 꽤 차가웠다. 손을 바꿔 가며 우산을 들었다. 날이 그래도 조금은 추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한 후 골목을 돌아섰다.
  이상한 날씨에도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막 골목을 돌아서는데 대성슈퍼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그쪽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걸음은 이미 늦춰 두었으므로 계속 느리게 걸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걷던 중에 가게 앞 풍경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잠시 후에야 눈치 챘다. 그 늙은 개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죽은 건가, 아니면 팔아 치운 건가 생각하는데 젊은 여자 목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아유, 내가 정말 이것 때문에 못 살겠다니까!"
  "그러게 방에 들여 놓으라니까 꼭 말을 안 듣고."
  "누가 이렇게 빨리 사고 칠 줄 알았어?"
  그 여자가 가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어느새 멈춰 서 있었다. 어떻게 하면 어색해 보이지 않을지 생각했던 것들이 일순간에 다 증발한 탓이다. 그녀는 여전히 희고 가냘펐다. 처음에 봤을 때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았다. 긴 머리칼은 강한 바람에 물결처럼 출렁이는데, 창백한 손목이 올라와 대충 쓸어 보내자 반대쪽으로 목을 감아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검은 스웨터는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그녀의 몸을 길게 덮었다. 회색 플레어 스커트 아래로 검은 스타킹이 보였고, 그 아래로 청회색 구두가 맺혔다. 발이 작았다. 그녀는 긴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아니, 들고 있었다기보다는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빗자루가 조준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늙은 개가 있었다. 난처한 듯 낑낑거리며, 엉덩이 끝에 웬 흰 푸들을 붙인 채. 가히 부조화의 폭발을 이룬 커플이었다. 둘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끈질기게 버티며 그녀의 빗자루를 피했다.
  진눈깨비 심한데 개와 사람 양쪽이 모두 고집을 꺾을 줄 몰랐다. 나는 어느 정도 흥미롭게 그녀가 개에게 가하는 공격을 구경했다.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 몇몇도 멈춰 서서 개를 보고 있었다. 옆에 선 커플이 서로 속닥거렸다. 너무 심하다. 아냐, 그래도 너무 안 어울리잖아. 어느 정도 빗나가던 공격이 점차 정확성을 갖추어 갔다. 개의 비명도 점차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개들이 어디 멀리 가지 못하도록 가게 문 뒤에 몰아넣고 인정사정없이 빗자루를 내리쳤다. 빗자루와 개 두 마리 사이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는 문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누런 것이 절뚝거리며 그녀 다리 사이로 빠져나와 골목 저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골목 멀리 패밀리 레스토랑과 화장품 가게, 횡단보도와 백화점 늘어선 지점으로. 그녀는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빗자루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런 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푸들을 집어들었다. 품에 안지는 않았다.
  "지저분하게 정말."
  청회색 가죽 구두가 냉담하게 빗자루를 밀어 치웠다. 그녀는 푸들을 가게 안에 내려놓은 후 문을 닫았다. 유리 너머로 샛방 문턱에 걸터앉아 무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주인아주머니가 보였다. 모여 섰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져서 제 갈 길로 갔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골목 멀리, 패밀리 레스토랑과 화장품 가게, 횡단보도 쪽을 향해. 백화점에 들러 식품 코너를 돌며 시식이나 하고 집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온몸이 멀쩡한데도 이상하게 오른쪽 무릎 관절이 나간 것 같았다. 이마가 차갑고 목 뒤가 당겼다. 온몸을 얻어맞기라도 한 듯.
  늦게 집에 들어간 나를 붙잡아 앉혀놓고 아버지는 재혼 얘기를 꺼냈다. 애 하나 딸린 여자인데, 자식은 다 커서 독립해 살고 있다 했다. 왜 1306호처럼 여자한테 딸린 애가 유치원생인 것도 아니니 여러모로 편하다고도 덧붙였다. 내 의견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통보였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면 고개뿐만이 아니라 사지를 다 끄덕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흡족한 심사였는지, 지갑에서 지폐를 꽤 많이 꺼내 주었다.
  내가 고3이 된 후 몇 주 안 되어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한집에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미한 아줌마였다. 나는 두 번 다시 대성슈퍼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태어났을 때부터 근엄하고 지혜로운 가장으로 살아온 듯 느닷없이 상식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가끔 새어머니는 집 밖에서 전 남편과의 사이서 낳은 아들을 만났다. 나는 고3이 된 후 한 달 후 친구놈들의 담배를 얻어 피웠다. 몇 년간 나와 알고 지내던 놈들은 그렇게 담배나 술을 멀리하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며 왁자지껄하게 감탄했다. 처음 삼킨 담배 연기 탓에 미친 듯이 기침하다가, 몇 놈이 입을 댔는지 모를 소주병을 불다가 비틀대며 아파트 단지로 걸어 들어가던 때였다. 놀이터에서 뛰어나오던 여자아이가 미처 멈추지 못해 내 무릎에 와서 부딪혔다. 평소라면 끄떡도 않았겠지만 이미 비틀거리고 있던 터라 허탈하리만치 쉽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놀이터를 포함해서 그 근처까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스펀지 비슷한 것을 바닥에 깔아 놓는다. 처음에는 모래였는데 이 년 전에 죄다 푹신한 자재로 바뀌었다. 그 덕에 뒤통수가 지나치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이유 없이 뱃속이 뒤틀렸다. 배탈도 변비도 아니고 그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율배반적으로 세상이 평화로워진 것이다. 그놈의 평화가 교통사고처럼 내 일상을 들이받았다. 사람을 치어 놓고 피해자가 열을 낼 틈도 없이 저 혼자 멀리 줄행랑을 놓았다. 억울했다. 억울해서 내장이 다 뒤틀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씨발, 중얼거리며 얼른 일어나 앉는데 나를 넘어뜨린 새싹유치원생이 주저하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많이 아프세요?
  보니 그 1306호 여자애였다. 앞니 하나가 빠진 자리에 영구치가 나는 중이었다. 눈이 크고 볼이 통통했다. 머리가 지나치게 아팠다. 그 여자아이의 무릎에 붙은 대일 밴드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달랑거렸다. 노랗게 변한 밴드 안쪽이 눈동자 같았다. 웃는, 웃을 마음이 없는데.

  그 남자

  제일 먼저 오는 것은 어둠이다. 언제나 제일 먼저 오는 것은 어둠이다. 음습하고 위태로운 것이 그 뒤를 따른다. 언제나 예외 없이. 죽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타인의 몸에 꽂아넣고 뒤트는 종류의 죽음. 살해하고픈 욕망. 뱀의 표피처럼 차가운 것들이 살갗 아래로 밀집한다, 칼날을 벼리려는 것처럼, 군영을 세우려는 것처럼. 언제나 어느 부분은 차갑다. 무심하다. 고깃덩어리 속으로 고깃덩어리가 들어오든 나가든 신경 쓸 것 없다. 몸의 앞쪽이 젖가슴으로 남자의 얼굴을 뭉개든 남자의 성기를 비비든. 살들이 벌이는 일에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언젠가는 소리 없고 감촉 없는 지점에 이른다. 그곳에서 나는 섹스가 살인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소박한 살인? 전혀. 장대한 살인이라고 해야 할걸. 결국은 누가 누구든 죽이는 것에 불과하다. 나 아니면 이 남자가 죽어야만 끝나는 것이 섹스였다.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지금 내 다리 사이를 드나드는 네 물건에 고백하는 거겠지, 나는 살 속 어느 검은 지점에서 중얼거렸다. 쾌감이 죽어가는 별처럼 머리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추락했다. 내 몸은 그 남자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가스불 위에서 몸을 비트는 오징어가 떠올랐다 (어제 밤늦게 구워 먹은). 자동차 바퀴에 깔려 벌겋게 납작해진 비둘기 시체도, 참새 시체도, 소금 뿌렸더니 몸을 둥글게 꼬던 지렁이도. 호흡이 제멋대로 내 몸을 드나들었다. 더위가 칼끝처럼 아랫배를 찔렀다. 이제 올 것은 붉은 것, 창백한 것이었다. 살 뭉치가 질 바깥으로 빠져나갈 때면 눈앞이 붉었다. 다시 들어올 때에는 온몸의 혈관이 창백해졌다. 나보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유령처럼 두 몸을 묶고서 뒤흔들었다. 정말 귀신에 씐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이미 죽어 썩어가는 내 몸을 붙잡고서 혼자 헛짓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로 나를 가질 수는 없다. 그는 처음 내 살에 제 살을 들이밀었을 적부터 그런 착각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이전부터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걸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다니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었다. 이곳을 어떻게 가지겠다고? 사랑이라고 했다. 나이 차이도 상관없다 했다. 부모님이 반대하면 집을 나와 살겠다고 했다. 책임지겠다고, 몸도 마음도 함께 하겠다 했다. 내게 그가 그리 말했다. 이 호텔 방에서 석 달 전에. 몇 번이고 내게 죽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고 웃기기도 했다. 사랑이라니, 책임진다니, 함께 하자니 죽어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일까. 실컷 죽은 이후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느니 처음부터 욕심냈던 것처럼 여자 몸이나 실컷 따 먹고 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사실은 어떤 생각이 내게 왔다, 어제. 아니, 사실은 한 달 전이었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어제 왔다. 나는 좀 더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살 부딪히는 소리가 징그러웠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래, 괴롭겠지. 나는 그의 가슴과 허리로 손을 내둘렀다. 적당히 근육이 잡힌 살이 적당한 체온으로 익어 있었다. 자르면 피가 나올 정도로 살짝 익힌 스테이크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내 손은 곧이어 내 배를 타고 올라와 가슴을 쥐었다. 그래, 여기도 충분히 도살되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감정이 적절히 말라붙고 온기가 적절히 보존되어 식탁에 오른 후에도 얼마간 따뜻할 수 있도록. 젓가락을 쥔 자들이 만족스레 웃으며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혹 모르는 일이다, 먹히는 쪽에서도 죽음을 맛있게 느낄 수 있을지. 여러 번 연습하면 가능하다. 나는 다리 사이에 힘을 주었다. 근육이 수축하고 그가 가위로 오려낸 듯한 비명을 내지를 수 있도록. 그가 죽어가는 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구경하기에, 느끼기에, 내 속의 검은 것들이 배부르기에. 전신의 감각이 바늘처럼 일어섰다. 그대로 몸의 껍질을 뚫고 나갈 듯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흡족함이 끔찍하게 몸을 채웠다. 무언가 젖가슴 안쪽에서 짧게 웃었다. 서늘한 것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가쁜 숨을 쉬었다. 나는 티슈를 뽑았다. 몸을 일으키자 그의 살덩어리가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흘러내리는 것을 대충 닦아내고 욕실로 향했다.
  사랑이라고, 진심이라고, 믿어 달라고. 별 의미 없는 말들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본인조차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런 말을 듣고 앉았어야 했던 나는 지겨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건 장바구니일 뿐이었다. 진실은 피가 흐르는 고깃덩이에 있었다. 내가 그의 몸 위에서, 그가 내 몸 위에서 배설하는 땀과 체액과 호흡에 있었다. 나머지는 쓰레기였다. 얼마든지 재활용 가능한. 그런데도 믿는다니. 믿을 게 없는데도 무작정 믿는다니. 고3 스트레스가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았다. 어쨌거나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알몸으로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속옷을 하나씩 주워 입었다. 스타킹을 신고 회색 블라우스를 입고 체크무늬 스커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끌어올렸다. 아직 젖은 머리는 대충 수건으로 꾹꾹 누른 후 뒤로 넘겼다. 핸드백을 어깨에 걸고 스탠드 아래 꺼내 놓았던 핸드폰과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오늘까지만 보자. 네 번호는 아까 호텔에 들어오기 전에 지웠으니 너도 나 지우면 돼."
  내 말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어제 내게 왔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물론 다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몇 달간 몸을 섞어 온 고3 학생은 내가 사는 아파트가 어딘지, 그게 몇 동 몇 호인지도 알고 있었다. 집으로 찾아온다면 시끄러워질 수도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십 분이 멀다 하고 울려댈 내 전화 사정부터 생각해야 했다. 번호를 바꾸는 것은 영 탐탁지 않았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그가 연락을 딱 끊고 수능 준비에 전념하는 것이었으나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사랑이고 진심이라는 그게 사람을 도무지 가만두지 못하는 모양인가 보았다.
  침대를 같이 쓰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온다. 서로 지갑을 교환하게 되는 순간. 가끔은 대충 구겨 넣은 치킨집 광고 전단이 나오기도 하고 오 년 묵은 백화점 영수증이 쏟아지기도 한다. 쿠폰, 신용 카드, 지폐, 종이쪽지,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학생증, 문화상품권, 명함, 가족사진. 지갑이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의외로 많았다. 손끝으로 집어내는 것들이란, 여러 줄기의 시간이 줄줄이 끌려나와 손톱 끝에 매달리는 일이란.
  사흘도 되지 않아 집 앞에서 그를 보았다.
  "수능은 아주 포기했니? 대학 안 갈래? 넌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도 많잖아. 전에 사귀던 애한테 다시 가든지."
  그처럼 아주 포기했던 것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 압도적인 기세로 돌아오는 것, 또 다시금 돌아오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더는 돌아갈 곳이 없는 지점까지 이르러 기어이 나를 돌아오게 하는 것. 나는 문 앞에 퍼져 앉은 그림자를 향해 질문했다. 교복을 껴입은 그림자 덩어리는 한동안 조용했다. 한참 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또 침묵했다. 그가 뭘 하든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좀 비켜 앉을래."
  "왜 그러는데요."
  "니네 부모님은 니가 이러는 거 아시니?"
  고3이 정신 못 차리고 아홉 살 연상인 여자와 알몸으로 뒹군다고. 사랑한다고, 진심이라고, 믿어 달라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왜 그러는 건지 이유라도 알아야죠. 갑자기 그러는 법이 어디 있는데."
  "안 비키면 나도 방법이 없어."
  "어쩔 건데요?"
  꽤 불량하게도 묻는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아주 예전에, 우리가 한 침대 위에서 지갑을 교환하고 핸드폰을 교환할 적에…….
  "부모님께 전화하는 것밖에 방법이 있겠어?"
  "그냥 하는 말이면서."
  나는 저장해 둔 전화번호를 소리 내어 읽었다. 숫자가 하나씩 둘씩 지나가는 동안 그림자는 점차 뻣뻣해졌다.
  "맞잖아? 왜, 내가 말만 하고 전화는 못 할 것 같니? 지금 당장 해 볼까?"
  맞잖아, 어차피 감정하고는 상관없이 몸이나 비비고 마는 사이였잖아. 그렇게 자가 생성 감정에 흠뻑 젖는다 해서 달라질 게 뭐지? 네 감정에 네가 만족하려는 거라는 걸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걸. 나는 현관 열쇠를 꺼내 들었다. 내게는 상대방에게 먹여 줄 감정이 애당초 없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집어먹으려 한 적도 없었다. 그저 몸이나 뒤섞어 멀고 검고 불가능한 지점까지 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그 지점에 다다르는 그 일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리를 벌릴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살과 피와 뼈와 내장을 다 지나서야 가까스로 그러쥘 수 있었다. 아주 잠시. 세상이 모조리 움츠러들고 발밑이 시꺼멓게 꺼지고 온몸이 칼을 휘두르고 상대방을 죽이고, 만족스러운 웃음이 뱃속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그 세상이라면, 살인도 상관없었다. 그러므로 많은 남자와 살을 교환했다. 정당한 거래였다. 사랑이니 뭐니 하는 농담은 애당초 끼어들 틈이 없었다. 몸의 일에 관하여 나는 언제나 그 사랑이라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진지했다.
  "꼭 오늘이 안 된다면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림자는 느리게 일어서서 나를 포옹하려 했다. 나는 한 손을 들었고, 학생은 괴로운 얼굴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림자가 그 발끝에 따라붙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구두를 벗고 가방을 소파에 집어던지고 귀걸이를 뺐다. 꼭 오늘이 안 된다면 영영 오지 마. 그렇게 말하는 편이 나았을까. 아마 그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넌 어차피 안 되니까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마. 절대로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아니면 이것보다 몇 배는 더 심한 말이라도 해야 했다. 아주 질려서 그 잘난 진심이라는 것 따위 가볍게 발끝으로 밟아 문대고 수능에나 집중할 수 있는 그런 말. 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미 늦은 일이기야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기야 하지만.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말로 아주 늦고야 만 일에 불과할까. 집에 들어오니 사방이 검거나 살짝 덜 검거나 했다. 컴퓨터를 켰다. 어제 다운받아 둔 영화를 재생시켰다. 여전히 하이힐을 신은 채였다.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였다. 머리핀도 뽑지 않았고 목걸이도 풀지 않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도 않았다. 상관없었다. 스피커 볼륨을 키웠다. 영화 화면을 피아노 선율이 가로질렀다. 소리가 유령 같았다.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형체 없이 단지 들을 수만 있는 것이라는 게 유령이 아니면 무얼까. 그러면 나는 그때 유령의 몸 안에 들어가 앉아 있던 거였나. 소름끼치도록 진짜인, 무서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담배가 생각났지만 이미 마지막 한 개비를 점심 후 허공에 태워 보냈다는 것이 또한 생각났다. 아쉬운 일이다. 모니터 속에서 전에는 유명했던, 이제는 한물간 여배우가 화분을 집어던지며 악을 써 댔다.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걸 본 탓이다. 잘 생산된 메마른 분노가 모니터 밖으로 흘러나와 검은 침실의 밑바닥으로 뚝, 뚝, 스며들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사랑이라는 괴물의 횡포란 끝이 없었다. 최신 유행의 흐름을 타고 고급 차를 몰고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그 사랑의 기세가 마치 전염병 같았다. 성병이라니, 바이러스로 현신하는 사랑이라니. 나는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여배우는 엉망이 된 꽃집 바닥에 애처롭게 주저앉아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사랑이 제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은 곧 심장을 뜯김 당하는 일과 같다고 중얼거린다. 이렇게도 추잡하다니. 나는 치마 아래로 손을 넣었다. 팬티 속으로 손가락을 침투시켰다. 손가락의 살이 대음순과 소음순을 더듬었다. 건조하고 별일 없었다. 팔꿈치나 손가락 마디처럼 덤덤한 살들을 무심히 쓸어내렸다. 사랑이란 게 정말 있다면 그게 굳이 이곳을 선호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팔꿈치나 손가락 마디, 핏덩이 먹음직스러운 식탁이라면 몰라도.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눈물은 아주 오래 후에야 올 것이다. 여배우가 화면에 대고 그렇게 읊었다. 나는 화면에 대고 웃었다. 지금 오지 않는 것들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카페 인테리어 하나는 멋졌다. 유행 따라 화장하고 옷 입은 인형이 거기 앉아서 남이 시키는 대로 나레이션을 떠들고 있었다. 인형은 인형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인형처럼 오래전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또 찾아온다면. 나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또 왔어요. 협박하든 전화하든 마음대로 해요."
  8시였다. 아침이었다. 그는 개교기념일이라 학교를 쉰다고 했다. 학원과 과외는 어찌 되는지 말이 없었다. 어쩐지 어제 쉽게 물러간다 싶었다.
  8시였다. 노란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놀이터 옆 유치원으로 들어갔다. 유치원 선생들이 팔을 크게 넓게 흔들어댔다. 쓰레기봉투가 왼손에서 점차 무거워졌다.
  "오늘은 교복 안 입었네."
  학교 안 가니까.
  "무슨 청바지를 그렇게 어색하게 찢었니."
  연습 좀 하고 잘 찢을 것이지. 멀쩡한 바지 하나 버렸구나.
  "먼저 샤워해."
  "그래서 온 게 아니라요."
  일단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와서 손을 씻었다. 얼굴도 씻고 양치질을 했다. 질끈 묶었던 머리칼을 풀었다. 엉거주춤하니 현관 가에 선 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한 후 문을 잠갔다. 그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옷을 벗고 알몸으로 그 앞에 섰다. 지겨울 정도로 보여 준 광경인데도 여전히 눈 둘 곳을 찾지 못한다. 그래, 나도 할 말이 있다. 꿈지럭거리는 그의 손을 잡아다가 가슴 위에 얹었다. 뻣뻣한 손가락을 일일이 펴서 살을 좀 더 잘 그러쥘 수 있게 했다. 다른 손을 또 잡아다가 엉덩이에 붙였다. 이윽고 그의 몸이 통째로 내 몸에 와서 달라붙는다. 목 옆에 머리를 박으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은 굳이 이런 걸 바라고 온 게 아니었고 다른 중요한 말을 하려고 왔으며……. 그를 눕히고 바지와 트렁크를 잡아 내렸다. 다리를 벌리고 그의 성기를 잡아 살 속에 맞춘 후 천천히 허리를 들이밀었다. 단단하게 뭉친 한 무리의 살들을 상대하여 또 다른 한 무리의 살들이 입을 한껏 벌린다. 손이 올라와 내 가슴을 뭉개고 유두를 꼬집었다. 옛날 옛적에, 내가 아주 작았을 적에 말이지.
  "옆의 옆집에 살던 대학생 오빠가 장가를 갔다고 하더라. 사고 쳐서 졸업도 하기 전에 코 꿰였다고. 웃기지. 사실은 그 오빠, 고등학생 때 이미 사고를 쳤었거든. 놀이터 뒤편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말이야."
  기억은 시공간을 초월해. 수월히.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팬티를 벗겼어. 지금 네 물건을 무는 이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지. 아프고 끔찍해서 우는 나를 관찰했어. 지금은 싫어도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 나더러 누우라 하고 발목을 잡아 벌렸어. 치마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었지. 숨이 다리 사이로 느껴졌어. 중학생 때 조개, 붕어, 개구리 해부하잖아? 그런 식이었지. 손가락으로 얼마나 내 살을 짓뭉갰으면 나중에는 쓰라려서 화장실 가기도 힘들었어.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해부 당했는데, 그게 몇 달을 갔는지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 그러던 중 어느 여름날에 말이야. 그 소리 덩어리들. 숨소리, 욕설, 달래거나 위협하거나 절박하여 사람을 질식시키던 것들. 잠깐이면 끝나. 깊이 숨을 쉬어. 착하지, 다리에 힘을 빼. 좋은 걸 가르쳐 줄게. 너도 나한테 고맙다고 하게 될걸.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 이렇게 직접 배우는 편이 낫잖아? 씨발, 계속 울면 또 맞는다. 저번에도 했었잖아? 좀 참으라고. 처음도 아니면서 왜 이래? 입 막아. 아 이 씨발년이.
  "나를 평소처럼 해부한 다음이었어. 제 바지를 끌어내리더니 이 속으로 천천히 집어넣더라. 한 손으로는 내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내 엉덩이를 쥐고. 얼마나 간편했겠어? 임신 걱정할 필요도 없고."
  연습이 부족했던 모양이지. 성인 여자한테 가서는 임신을 시켰으니. 나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언제나처럼, 선택한 이들에게 반드시 구원을 약속하는 신의 은총처럼, 검은 것들이 뱃속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언젠가 내게 술잔을 집어던졌던 남자가 그 안에서 익사했다. 2차랍시고 나가서는 제 친구들까지 불러 나를 돌려 깔았던 남자들이 찢겨 죽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 알몸으로 춤추던 내가 저 높은 곳에서 세상의 모든 양주병을 부수고 있었다. 깨진 유리 위로 여자애가 비틀대며 걸어갔다. 피가 양말까지 젖었다. 흰 양말의 측면에 분홍색 리본 무늬가 있었다. 전신마사지하고 섹스하고 다를 게 뭐야, 그들은 자주 그리 말했다. 가슴이 유난히 큰 여자가 뛰어가는 것을 가리키며 젖소네 젖소, 즐겁게 떠든다. 그들의 딸들은 아마도 젖소일 리 없었다. 내 뱃속에서 찢겨 나간 아이들은 어느 쓰레기장으로 실려 갔을까. 이미 썩었겠지만. 처음에는 긴장했고 나중에는 무심했다. 익숙해질 수 있다, 충분히 반복하면. 낙태라는 행위에.
  "어쨌거나 그 학생이 나중에 기어이 사고를 쳐서 졸업도 하기 전에 장가를 갔다고 하더라."
  그는 아무 말도 않는 편이 가장 좋았다. 그럴 여유를 애당초 주지 않았다. 그의 손이 허공을 허우적대다가 바닥에 깔린 카펫을 긁었다.
  "이성면 씨라고, 알아?"
  물으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알 길 없었다. 아마 들릴 것이다.
  "모를 리가 없지. 니네 아빠잖니."
  하필이면 그때 사정할 건 또 뭐람. 침대를 같이 쓰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 지갑을 교환하게 되는 때가 온다. 동기 무역. 사장 이성면. 명함. 두 번 접힌 가족사진.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회색 배경과 정장과 흰 원피스, 검은 구두. 온기 가득한 미소. 아직도 변함없는 검은 눈. 저 두 눈이 오래전 내 다리 사이를 꿰뚫었지. 그 광경 속에서 지옥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어김없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야 했다는 것처럼. 그는 평소보다 다소 힘든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것을 끄집어내고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대충 다리 사이를 닦았다.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어 욕조를 가득 채웠다. 수돗물 특유의 냄새가 피부에 생선 비늘처럼 달라붙었다. 습기가 별안간 무거웠다. 옷을 다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즐거웠다.
  별안간 즐거웠다. 냉장고 문을 열 때 어설프게 쌓여 있던 식료품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그러한 기세로 즐거움이 쏟아졌다. 뱃속에서 검은 것들이 전력을 다하여 웃어댔다. 웃음이 내장을 비집고 솟아올라 목을 채우고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손가락이 방금 성교를 끝마친 질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를 해부하던 그의 살을 씹고 피를 마셨다. 서로가 서로를 해체하는 사이라니 그런 것이 그와 나라니, 사랑이라니 괜찮아질 거라니, 내 옷을 벗기며 다소 어색하게 웃던 그 얼굴이라니.
다 끝났다. 뱃속에 남은 것은 시체와 유령뿐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끝부터 난 꼴이다. 욕조 바깥으로 밀려난 오른쪽 종아리에 엄지손톱만한 반점이 보였다. 새 아버지께 인사 잘해야 한다, 어깨 펴고 똑똑하게 말하는 거야, 응? 어떤 아이는 유치원에 들어가고 새 아버지를 만나고 곧 이사를 한다. 이웃집 오빠와 놀이터에서 마주치고 이후 자주 친하게 어울려 논다. 적어도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곧 발목을 잡히고 옷이 벗겨진다. 괴물이 성기 속으로 들어온다. 다리 속에서 피가 나는 일이 아직 생생한 아이는 유치원에 가서 동요를 부르고 율동을 한다. 자라나서 학교에 가고 교가를 부르고 졸업하고 술집에 가서 유행가를 부른다. 춤추고 몸을 벌리고 가슴 사이로 돈을 받는다. 웃으며 많은 일을 한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들이 산부인과에서 대기하고 무심히 교환한 지갑 속에서 떨어져 구른다. 사진 속의 그는 나이를 먹었지만 알아볼 수 있다. 지옥 끝까지 가서라도 알아볼 수 있다. 마치 운명처럼 기적적으로 내 다리 사이로 귀환하는 얼굴을. 어쩌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헤어진 적 없었다.
  눈을 감았다.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다. 지금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있을 그가 무슨 심정일지 짐작이 갔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오래전 그가 자신에게 미안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눈물은 이런 장대한 로맨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운명일, 어쩌면 시시한 연애담에 불과할 이 희극에는. 손등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오늘은 요리하기 귀찮으니 피자나 주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제대로 재미있는 영화를 찾아서 받아 보겠다고도.

  어느 날

  그는 공원 벤치에서 담배를 물다 앞을 지나치는 한 가족을 보았다. 노란 원피스를 차려입은 여자아이의 오른쪽 종아리에 난 엷은 반점을 보았다. 실수로 담배를 허리에서 세게 물어 부러뜨렸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다시 새 담배를 꺼내 들어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았다. 바람 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핸드폰을 꺼내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세현이는 십 분만 있으면 온다고 했다. 영화 시작 십 분 전까지는 도착할 거야, 오빠. 조금만 기다려용. 끝에 따라붙은 하트. 그는 흐뭇하게 웃었다. 방금 지나간 여자애는 이미 까맣게 잊었다. 어쨌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굳이 기억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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