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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우주인류학개론

2009.02.27 22:1802.27

seereal0@gmail.com
"우리 과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는데, 외계학과는 외계관을 만들어주는 데가 아닙니다."

1학년 1학기 전공수업 첫 시간, 담당교수님께서 꺼낸 첫 마디를 듣고 나는 몹시 놀랐다. 이 과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은 고1 때부터 나는, 교수님이 지적한 바로 그 착각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 외계관 지망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동기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도 덩달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외계학이 무엇이냐, 사실 이 이름부터가 틀려먹었어요. 원래대로라면 우리 과는 우주학 아니면 우주인류학과라고 해야지 맞아요. 그런데 원래 인류학을 전공하신 김갑호 교수님께서 새로이 사회과학의 한 분과로서 우주학과를 만들려고 할 적에, 공대에서 결사반대를 하는 거야. 우주라는 말은 공학에서만 써야 된다는 거지. 우주항공재료공학과라던가, 우주항공전파공학과같은 데에서만 쓴다는 거였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김 교수님께서는 고민 끝에 그럼 외계인류학과는 어떻겠냐. 그랬더니 또 인류학과에서 난리였어요. 그럴 거면 자기네 대학원 분과로 할 것이지 뭣하러 새 과를 만드냐는 거지. 그래서 할 수 없이 외계학과로 줄여버린 거야. 그렇지만 이런 학문 이름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구. 외국에 나가봐요. 외계학과라 그러면 아무도 못 알아먹어. 그러니 자기 전공 소개할 때는 익스터놀로지라고 하면 안 되고 꼭 스페이스 앤트로폴로지라고 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하여 입학한 후에야 내 전공의 이름을 알게 된 나는 첫 학기부터 암초에 부딪혔다. 과의 특성상 외계거주경험자가 대부분을 차지한 동기들 가운데에서 평생을 지구에서 자라 외계어라곤 번역기를 통해서 시각화해야 겨우 해독할까 말까한 나는 그야말로 지진아중의 지진아였던 것이다. 교수님들은 당연하다는 듯 전공 교과서를 전부 외계어 텍스트로 선정했고, 나는 주변에 앉은 대부분의 동기들이 '와, 난 지구계열 언어보다 이게 훨씬 더 편해'라며 재잘거리는 사이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좌절하고 있었다.

*


일반적인 경우, 외계어를 열다섯 살이 넘어서 체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그것은 음파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문자로 기록될 수도 없다. 굳이 비유하자면 전자기장의 흐름에 가장 가깝겠지만, 사실은 그조차도 아니다.

처음 그들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의 어떤 언어도 알지 못하고 기본적인 바디 랭귀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결국 몇 달간의 시행착오 끝에 규명된 것은, 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매질을 통해 소통하는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물질을 매질로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겐 빛보다 더 빠르고 더 투명하며 더 유연한 매질이 있었다. 지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저 뭉뚱그려 '기(氣)'라고 부르던 실체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NASA에서는 은밀하게 세계 전역에서 '기 수련'으로 이름난 이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각종 우주공학자들에 둘러싸여 물질언어를 익히려 안간힘을 쓰던 외계인들은 비로소 기 수련자들을 통해 자신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전달할 수 있었다.

- 김갑호 저,  '우주인류학개론' 2장, '외계어의 구조와 이해' 중에서 발췌



*


"야, 외계고시 될려면 매질학과 가는 게 더 빨라. 외계관 자녀같은 애들은 다 매질학과에 모여 있다니까. 뭣모르는 우리같은 지구 토박이들이나 외계학과 나오면 외계관 되는 줄 알지."

외계고시에서 다섯 번이나 고배를 마신 뒤 결국 대학원에 눌러앉은 조교 형이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요? 난 매질학과는 외계어 번역하는 사람들이 가거나 아니면 예체능에서 복수전공하는 건 줄만 알았는데."
"반대야. 매질학과 애들이 예체능 복수전공을 하는 거라고. 외계인들은 외계매질로 춤추거나 노래하는 지구인들 보면 껌뻑 죽거든. 자기들로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낯선 매력이 있다나. 그래서 매질학 학위 따고 예체능 계열 한두 개 통달한 사람들이 무형문화재 지정받아서 특례로 외계관 되고 그러잖아. 내가 그걸 미리 알았으면 어렸을 때부터 악기를 익히든가 아니면 무슨 무술이라도 배워두는 거였는데."

과연, 그래서 우리 과 사람들이 그렇게 가무에 능하고 악기도 기본으로 한두 개씩은 당연하게 다뤘던 것이었다. 심지어 '외계학과 4공주'라 불린 여자선배들은 소규모 무용팀을 구성해 학교 소강당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저 나에게는 그저 아마추어 전통무용쯤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 솜씨에 외계어 네이티브들은 그들의 기감(氣感)이 끝내준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려 찬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외계학과 4공주'는 우리 과의 2학년 여선배 네 명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외계학과에 여자가 많기는 했지만 그 네 명은 그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부류였다. 그 중 한 명이 만화영화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세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지라 선배들은 장난스레 나머지 세 명에게도 밍키니, 핑크니, 메텔이니 하는 별명을 붙여 부르곤 했다. 대체 그 별명이 지칭하는 것이 공주인지 요정인지 우주인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들과 친하다는 것이 곧 외계학과의 주류임을 나타내는 징표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외계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들과 친해지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딱히 외계거주경험자들이 토종 지구인들을 따돌리거나 차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미나 뒤풀이 술자리에서 술이 좀 거나하게 오를 즈음이면 그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눈을 감고는 말없이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뭣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무슨 심령소환의식처럼 보이는 그 행위를 그들은 심화(心話)라고 불렀다. 말없이 마음을 나누는 대화라는 뜻이었다. 그 '심화'를 마치고 나서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왜인지 모르게 촉촉해 보였기에, 그저 물질계에서만 사는 나로서는 그네들끼리 무슨 기계(氣界)에서 끈끈한 밀회라도 나누고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알 수 없는 질투심과 소외감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여전히 외계어 텍스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1학년 2학기 때의 일이었다. 그날도 나는 별 일없이 혼자서 학교 식당에 앉아 과자 따위를 뒤적이며 전공 교과서 해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체 이 부분에서 표현된 기장은 '적확하게'를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게'를 말하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날카롭게'를 지칭하는 것인지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어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즈음, 갑자기 내 시야 앞에 긴 생머리가 드리워지며 목소리 하나가 해답을 내놓았다.

"굳이 해석하자면 '직접적으로'가 제일 맞을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메텔 누나였다.

"아... 고마워요."
"외계어는 지구언어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그냥 느끼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워."

아. 그렇군요. 메텔이니까 그러시겠지요. 그녀가 메텔이란 칭호를 얻은 것은 지구의 날씨가 너무 춥다며 늦봄이 다 갈 때까지도 두꺼운 털모자를 쓰고 다닌 탓이 컸는데, 아닌 게 아니라 갈색 빛이 도는 긴 생머리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어딘가 메텔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그 메텔 앞에서 기름기가 잔뜩 배어든 감자칩을 물고 머리를 쥐어뜯던 나는 그야말로 들창코의 철이처럼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이번에 외계교환학생 신청 안 하니?"

아, 외계어로 저글링을 하는 네이티브들도 탈락하기 일쑤라는 그 바늘구멍말씀이신가요. 외계. 당연히 가고는 싶었다. 그러려고 외계학과에 들어온 거니까. 하지만 전공책 독해시간이 되면 번역기 앞에서 쩔쩔매는 내가 언감생심 무슨 외계교환학생인가. 애초에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난, 외계어능력평가도 간신히 500점 넘었고... 아마 안 될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신청은 해봐. 대학원 선배 말 들어보니까 외계어 실력만으로 뽑는 건 아니래. 그리고 아마 내 생각엔 너도..."
"네?"
"잘은 모르겠지만 넌 될지도 몰라. 아무튼 해 봐."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리와 난데없는 희망을 남겨놓고 그녀는 가 버렸다. 메텔 누나가 가고 나서도 한동안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무슨 빛깔이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외계인들도 전부 그녀처럼 향기롭게 말하고 걸음걸이마다 반짝이는 입자를 흩뿌리고 다니는 걸까 하고 정말로 궁금해졌다.

*


이 외계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은 경고를 위해서라고 사료됨. 이들의 의도를 해독한 바에 따르면 앞으로 이삼십 년 안에 지구에 대형 운석의 충돌내지는 대규모 지각변동이 있을 가능성이 크며, 이대로 있다가는 인류를 비롯한 지구 생물종의 90%가 멸종하는 대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고 전했음. 이는 단순한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현 지구 인류의 업보에 대한 우주적 질서의 반영이라고 함. 외계문명권 내에서는 이 사실을 지구인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고 오랜 논의 끝에 현 인류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론을 내려 이들이 파견된 것으로 추측됨. 그러나 여전히 현재의 지구인류는 차라리 멸절되는 것이 우주환경의 보존을 위해 나을 것이라는 반 지구파 세력도 만만치 않음을 밝혔음.

이 사실이 일반에 알려질 경우 대단한 혼란이 우려되므로 극비에 부칠 것을 권고함.

- 지구-외계인류 교류소통협력위원회,  외계인류 방문의 목적에 대한 1차 보고서 중



*


꼭 메텔 누나의 권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외계교환학생 신청서를 냈다. 신청서를 받는 과사 직원이 어쩐지 내 외계어 성적란에 기재된 점수를 보고 비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직원은 그저 내 얼굴을 보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다음 주 수요일 두 시까지 5층 실험실로 오세요."

우주교류협력연구소 실험실. 통칭 '우교연'으로 불리는 그 신비의 장소는 평소에는 좀처럼 다가가기 힘든 곳이었다. 외계어 능통자들은 그 근처에 가기만 해도 두통이 생긴다느니, 기장이 혼란스러워서 정돈이 안 된다느니,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말로만 듣던 kMRI 머신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이번 검사는 외계문명거주적합성을 평가하기 위한 것으로서, 기존 거주경험자에게 별다른 특혜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호명하는 순서대로 나와서 kMRI 머신 위에 누워주세요."

그것은 인체에 내재된 기장을 측정하고 적절한 자극을 주어 그 활성도를 기록하는 기계로서, 국내에는 단 두 대밖에 없다는 값비싼 도구였다. 선배들은 그 안에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진다느니, 부작용으로 밤마다 여자 울음소리 같은 환청이 들릴 수도 있다느니 하는 괴담을 늘어놓아 우리에게 겁을 주곤 했다.

"그거 다 뻥이야. 그냥 좀 간질간질하다가 금방 끝나."

내가 자신의 권유대로 외계교환학생 신청서를 냈다는 것이 자못 뿌듯했던지 메텔 누나가 조금 친근해진 억양으로 말했다. 그녀는 근로장학생 자격으로 심사를 돕고 있었다. 메텔 누나의 말을 들어보니 외계에 나가는 지구인들은 대개 k지수 측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측정 과정은 단순했다. 실험대 위에 올라간 뒤 누나가 스위치를 누르자 원통형의 기구 안으로 몸이 밀려들어갔고, 그 안에서 삑삑대는 소리가 몇 번 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는 다시 사람을 토해냈다. 아마도 건너편 방 프린터에서 무언가가 출력되는 걸 보니 즉석에서 결과가 나오는 듯했다. 대여섯 명이 들어갔다 나온 뒤 내 차례가 되었다.

기계 안에 들어가 기장을 측정당하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피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나기도 하고, 머리가 자글거리는 듯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한이 들더니 뱃속에서 무언가 뭉클거리는 것이 올라오고는 느닷없이 가슴 속이 화하고 트이는 것이었다. 그런 기분은 생전 처음이었다.

기계 바깥으로 나와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데, 실험실 안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방에서 조교 형은 내 것인 듯한 평가지를 들고 다른 연구원들과 수군대고 있었다. 얼마나 못나왔으면 저렇게 놀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오지랖 넓게 그 대화를 훔쳐들은 누군가가 속삭였다. 이백 십이래. 뭐? 지구인한테서 그런 수치가 나올 수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내 친구는 반년이나 증폭훈련 받았는데도 칠 점밖에 안 늘었다고 그러던데. 그런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조교 형이 나를 불렀다.

"너, 정말 외계 거주 경험 없냐?"
"저 토종인 거 형이 더 잘 알잖아요."
"그래, 알지. 그럼, 부모님께서도 외계랑 관계없으시고?"
"음... 엄마가 별 보는 건 좋아하세요."
"짜식이, 농담하지 말고."
"아, 형. 대체 왜 그래요."
"내가 석사과정 내내 이거 측정하는 게 일이었는데, 백육십 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근데 너, 이백 점 넘게 나왔어. 세계 신기록이 몇인지 알아? 이백 십오야. 게다가 이건 지수방식으로 측정되는 거란 말야. 외계인이 아니고서는 못 나올 수치같애. 너, 정말 지구인 맞아?"
"형!"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교수님하고 상의해 볼 테니까. 아마 좀 보자고 하실 거야."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바로 다음날 나를 만난 교수님은 나를 한 번 더 kMRI 머신으로 밀어 넣더니 직접 당신의 두 눈으로 내 k지수를 확인하셨다. 그리고는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게 당장 내 몸을 실험대 위에 눕혀놓고 해부라도 해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처참한 외계어 성적과 미흡하기 그지없는 전공지식에도 불구하고 전교에서 티오가 둘밖에 없는 외계교환학생에 선발되었다. 나머지 한 명은 외계어로 시를 쓴다는 매질학과 학생이었다. 동기들은 대체 무슨 비결이 있냐며 내게 물었지만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메텔 누나는 결과를 듣고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외계어 쓰는 거, 별로 대단한 것도 아냐. 사실 꼭 어렸을 때 외계에 나가야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 지구인들도 원래는 외계매질을 쓸 수 있어. 근데 너무 물질언어에만 의존하다보니까 그 통로가 닫힌 것뿐이야."

어느새 나와는 이틀에 한 번쯤 점심을 같이 먹게 된 누나가 외계어 느끼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며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사람들이 그다지 다니지 않는 구석진 등나무 벤치에 앉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안 되는 거 아닐까. 내가 외계어를 알아들을 리 없잖아. 그때 한순간, 부드러운 바람이 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이파리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의 햇볕이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음이 사악 풀어지는 느낌 사이로 무언가가 스며들었다. 뱃속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나에게 무얼 전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는 해석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알겠어요. 이런 거군요."
"해석할 필요는 없어. 금새 받아들이는구나. 역시 넌 자질이 있을 줄 알았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가끔 네 기장이 좀 특이하기도 했고, 그리고 꼭 뭐라 말할 순 없는데... 네 눈빛이..."
"눈빛이 왜요?"
"날 보면서 내 눈이나 얼굴이 아니라 좀 다른 걸 보는 것 같더라고."
"아, 그거."
"뭐야, 뭐라도 보이는 거니?"

누나가 지나간 자리에선 빛이 나요. 향기도 나구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게 얼마나 쪽팔리는 대사인지 새삼 깨닫고는 혼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학생회관 점심메뉴로 나온 돈까스를 다 먹을 때까지 나를 추궁했고, 후식으로 커피와 와플을 사들고 벤치에서 다 먹어치울 때까지도 뭐가 보이는지 가르쳐달라고 졸라댔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녀의 주변에서 뭘 느끼는지는 말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외계어로 노래를 부르라면 불렀지.

*


일반적으로 k지수는 외계문명거주적합성을 평가하기 위해 측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k지수가 낮더라도 실제로 외계문명에서 거주하는 데에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k지수는 외계인들이 경고한 지구 문명의 위기에 대비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즉 일정 수준의 k지수를 가진 지구인들이 최소한 열 명 이상 모여 있어야만 인류문명의 위기를 막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존재의 용량'이라고 표현했다.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수많은 '기 수련자'들의 k지수는 오히려 일반인보다 낮은 수준으로 측정되었다. 일반적으로 고단위 k지수를 보유한 사람들은 다소 순진하고, 쾌활하며, 겸손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고통에 공감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지구-외계문명 협력기구(EECCO, External-Earth Civilization Cooperation Organization) 내부교육용 자료, 'k지수란 무엇인가?' 중



*


그해 겨울 메텔 누나와 점심 뿐 아니라 저녁과 안주를 함께 먹는 사이로 발전했을 즈음, 나에게는 이따금씩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어서 급히 뛰어가고 있는데 문득 오한이 들고 머리카락이 쭈삣 서는 느낌이 들어 우뚝 멈춰 섰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하고 서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데 갑자기 건물 옥상에서 대형 간판이 굉음을 내며 추락했다. 그대로 걸어갔더라면 내 머리 위에 곧바로 떨어졌을 참이었다.

이상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이상하게 너무나 학교에 가기 싫었다. 가뜩이나 못 알아듣는 수업인데 출석점수까지 깎아먹었다가는 C 받기도 힘든 처지였지만, 그날은 정말 방안에서 발가락 하나 떼서 나가기가 너무너무 힘들었다. 결국 기숙사 입구까지 나갔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방으로 들어와 그대로 쓰러져 잤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점심을 먹으러 나갔는데, 기숙사 식당은 난리가 나 있었다. 내가 그대로 나갔더라면 탔을지도 모를 셔틀버스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스무 명이 죽고 나머지도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가장 섬뜩했던 일은 메텔누나와 함께 있을 때 벌어졌다. 그날은 모처럼 둘이 시내로 놀러나가 제법 데이트다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영화를 한 편 보고 저녁 먹을 시간은 좀 남았기에 고궁 근처 돌담길에서 한가롭게 걸으며 주변 인물들의 가십을 나누며 수다를 떠는, 몹시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주인류학개론을 가르치는 모 교수님은 취미가 외계인들과 함께 벌이는 파티라는 둥, 3학년 때 외계고시에 붙은 전설의 모 선배가 사실 외계인혐오론자라는 둥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즈음 갑자기 몸이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순간 손발이 내 것이 아닌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더니 그 손발이 제멋대로 움직여 누나를 껴안고는 그대로 맨 땅에서 앞으로 펄쩍 뛰어 다이빙을 해 버렸다. 땅바닥에 곤두박질친 뒤에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우리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대형 덤프트럭이 달려들어 유서 깊은 고궁 벽을 그대로 박살내놓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건 말건 별 탈 없이 지나간 이상 기말고사는 다가오고야 마는 것이었다. 나는 '외계어로 쓰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게'라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시는 교수님의 코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는데, 그때의 내 심정은 차라리 이집트 상형문자로 답을 쓰라면 차라리 해볼 수도 있겠단 것이었다. 아무튼 무슨 말이라도 써서 답안지는 채워야 했으므로 시험지 위에 나도 이해하기 힘든 답안을 꾸역꾸역 토해내고는 비참한 심정으로 강의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가자 다른 시험을 끝내고 나온 메텔누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뜻밖에도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기다리던 일이긴 했지만 하필이면 왜 오늘이란 말인가. 나는 어젯밤 새벽 세 시까지 교과서와 씨름하다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떡진 머리로 대충 나온 참이었다. 이 꼴로 누나네 집에 가다니, 말도 안 돼. 그렇게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게 그만 눈치 채인 모양이었다. 누나는 빙긋 웃으면서 자기도 오늘 부스스하다고 괜찮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니 누나, 나 그 손톱에 때도 꼈거든요. 미리 말이라도 좀 해줬으면 머리나 감고 오는 건데. 내 어깨 위에 하얗게 떨어져 있는 게 과연 비듬일까 먼지일까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녀를 따라 학교를 나섰다.

"어때, 맛있지?"

나는 메텔 누나라면 집에서도 무슨 크림소스 스파게티에 와인이라도 곁들이면서 우아하게 식사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쳤을 땐 고기가 최고라며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삼겹살을 두 근이나 사들고는 자신의 원룸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과연, 가끔만 먹는 것도 아니었는지 누나네 집에는 탄 돼지기름 자국이 선명한 부루스타에 가장자리로 기름이 빠지는 구이용 불판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누나는 잔뜩 들떠서는 얇은 무에 삼겹살, 돼지기름에 구운 김치를 한입에 싸 넣고 우물거리며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난 나중에 이거 못 먹게 되면 너무 슬플 것 같아."
"삼겹살을 못 먹긴 왜 못 먹어요."
"응... 나 가족들이 전부 외국에 있거든. 졸업하면 다시 돌아가야지."
"그렇군요. 그치만 외국에서도 돼지고기는 먹잖아요."
"이거랑은 느낌이 다르잖아. 얼른얼른 먹어. 고기 탄다."

그녀는 혼자서 돼지고기를 한 근 넘게 먹어치우고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나도 덩달아 나머지 한 근을 해치웠는데, 그 삼겹살에는 무슨 약이라도 들어 있었던 건지 그렇게 달콤하고 기름진 고기는 처음이었다. 설마 삼겹살도 외계매질을 실어서 구울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뒷정리를 자청해 그릇을 씻었다. 돕겠다는 누나를 만류하고 그냥 옆에서 말동무나 해달라고 했다.

"난 엄마가 직장 다니셔서 이런 건 맨날 했거든요. 그냥 시키세요."
"그렇구나... 근데 너 말야, 그 뒤로 별일 없니? 몸은 괜찮아?"
"뭐가요?"
"그때 트럭에 치여서 죽을 뻔 했잖아."
"아 그거요. 무릎 좀 까진 거 말고는 별 탈 없었죠 뭐."
"또 이상한 일은 없었니? 사고 당할 뻔 했다며."
"에이, 그냥 우연인데요. 칫솔 대신에 면도기로 이빨 닦을 뻔 했던 거랑 길가다가 맨홀에 다리 하나 빠졌던 거... 그거랑 술먹고 지하철 기다리면서 졸다가 한번은 철로에 굴러떨어질 뻔 한 거 있죠. 요새 제가 좀 덜렁대나봐요."

누나는 내 말을 듣더니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조금 눈꼬리가 쳐지고 뽀얀 이마를 살짝 찡그린 그 모습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걱정스럽다는 듯 조금 내민 입술로 시선이 내려갔을 때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내가 뭘 했더라? 고무장갑은 벗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저기... 있지... 그건 좀..."

아마도 그 때 나는 그녀의 목덜미나 가슴팍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누나는 붉어진 얼굴로 내 손을 잡고는 살짝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아, 미안해요!"
"네가 싫다는 게 아니라..."
"누나, 정말 미안해요."

그녀는 난처한 듯 웃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허둥댔다. 이럴 거면 좀 제대로 씻고나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외계어 강독을 시켰던 때보다 수천 배는 더 쪽팔렸다.

"아, 씨, 정말,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좀 진정해."
"미안해요. 화났죠?"
"그런 거 아니야. 나 화 안 났어. 일루 와 봐."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고는 나를 작은 방석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내가 뭐 하나 가르쳐줄게. 눈을 감아 봐."

나는 그대로 숨을 고르면서 앉아 있었다.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 때 문득 나를 둘러싼 공기가 갑자기 가벼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순간, 무언가 따스한 느낌이 밀려들어왔다. 연두색 파도가 마음속에 온통 차올랐다. 그 물결은 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가슴이 저릿해지고, 왜인지 나는 눈물이 났다.

"왜 이러지... 나 웃기죠, 누나."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가 빙그레 웃는걸 알 수 있었다. 내 마음 속을 휘젓던 '그것'은 점점 몽글몽글해지더니, 하나의 느낌이 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랑해>

그것이, 내가 최초로 이해한 심화의 내용이었다.

*


흔히 지구인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심화가 텔레파시나 독심술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심화는 그런 게 아닙니다. 물론 말 대신 심화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그건 아주 낮은 수준에서 쓰는 겁니다. 중요한 건 경험 그 자체, 감각 그 자체, 마음 그 자체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거지요. 여기엔 어떤 거짓도 꾸밈도 개입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말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오해를 겪습니까? 내가 말하는 진리와 네가 말하는 진리가 서로 다르다고 박터지게 싸우고 죽인 게 인류의 역사잖아요. 그리고 서로 못 믿고 의심해서 먼저 배신하려고 하고... 외계인들은 그런 지구인을 잘 이해하지 못해요. 왜 못 믿니? 그냥 마음을 열면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죠. 사실 평생을 지구에서만 살아온 사람도 조금만 훈련하면 심화를 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을 닫아 버리는 거예요. 자기 마음을 읽힐까봐, 상대방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지 않아서 쉽사리 심화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거죠. 저는 바벨탑의 저주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순간 누군가를 의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된 거라고요. 그래서 지구에 오해와 오류투성이인 언어가 필요해진 게 아닐까요.

- '지구인과 외계인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가?' 김갑호 교수 초청강연 중



*


그해 연말, 집에 내려가 외계교환학생이 되었다고 말하자 엄마는 반색을 하셨다. 그 이유가 k지수라고는 굳이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실력으로 그 자리를 쟁취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지구를 떠나려면 반년도 넘게 남았는데도 엄마는 호들갑을 떨면서 외계에 가면 뭐가 필요할지 인터넷에서 열심히 검색을 해 보는 것이었다.

"엄마, 오늘은 별 안 봐요?"
"아유, 그래야지. 오랜만에 왔는데 우리 아들이랑 같이 별도 좀 보고 그래야지."

고등학교 물리교사인 엄마의 취미는 천체관측이었다. 서울에서 명문대를 졸업한 엄마가 굳이 시골 촌구석학교를 자원해 틀어박힌 것은 이곳이 전국에서 가장 별이 많이 보이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난 외식 안 하고는 살아도 별 안 보곤 못 살아.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엄마의 모습은 내 어린 눈에도 참 예뻐 보였다. 덕분에 나는 도시에 사는 애들은 다 다닌다는 외계어 학원이나 개인교습 따위는 꿈도 못 꾸었지만, 그래도 밤마다 엄마와 함께 망원경을 들여다보면 전혀 새로운 신천지가 펼쳐지곤 했다. 어쩌면 내가 외계학과를 지망한 것도 엄마와의 그 시간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어? 왜 이러지? 오늘 좀 이상하네?"

반년 만에 망원경을 들여다 본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좀 특이한 것들이 보였다.

"엄마, 이게 뭐에요? 뭐가 막 움직여. 반짝이는 게 두 개쯤  동쪽에서 서쪽하늘로 가로질러 가는데?"
"얘는, 항공기겠지."
"근데... 아무 소리도 안 나잖아."

갑자기 엄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황급히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것'들의 흔적은 맨눈으로 보아도 뚜렷했다. 하늘에 별보다 아주 조금 큰 것들이 나타나 이리저리 밤하늘을 종횡무진으로 쏘다녔다. 그리고 이따금씩 번개라도 치는 것처럼, 아니 누가 밤하늘에 형광등 스위치라도 올린 것처럼 무언가가 번쩍번쩍 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엄마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왜 그래요?"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는 마치 어린애처럼 옥상 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어댔다. 나는 몹시 당황해서 휴지라도 가지고 오려 했지만 엄마는 내 옷자락을 붙들고 놓아 주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엄마를 거의 질질 끌듯 모시고 내려왔다. 집에 들어와 소파에 앉아서도 울음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뜨거운 코코아를 만들어 드렸다.

"이거... 너무 달잖아..."
"급하게 타다보니까... 여기 휴지도 가지고 왔어요."

눈과 코언저리가 온통 시뻘게진 엄마는 아직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으며 코코아를 마셨다. 몹시 놀란 듯했고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뜨거운 코코아 한 잔을 거의 원샷하듯 마신 엄마는 내 것까지 홀짝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래요, 엄마."
"내가, 너네 아빠 낚시 갔다가 실종됐다고 그랬잖아."
"네."
"사실 그거 아냐."
"네?"
"그때도 나랑 같이 별 보다가... 하늘에 이상한 게 막 나타나고 번쩍거리더니... 다음날 사라졌어."

뭐라구요? 뭐라구요? 뭐라구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엄마는 이따금씩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너 팔봉산에 있는 시원사 알지?"
"네. 어렸을 때 몇 번 갔었잖아요."
"니네 아빠는 거기 승려였어."
"네? 그럼 엄마가 파계시킨 거예요?"
"아냐! 거긴 종파가 달라서 대처승도 되는 데였다고."
"아..."
"근데 나랑 결혼하고 나서, 동안거를 갔다 왔거든."
"동안...거가 뭐에요?"
"스님들이 겨울마다 수행 떠나는 거 있어. 근데 그거 갔다 와서, 같이 별 보는데 뭐가 번쩍번쩍하더니, 그날 밤에 사라졌어."
"사라져요?"
"정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니까. 속옷도 잠옷도 심지어 금니까지도 다 그대로 있는데 사람만 싹 없어진 거야."

*


...최근 시도된 고단위 k지수 보유자들에 대한 소멸시도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방식으로 시도되었기에...앞으로는 지구에 적합한 방법으로...최대한 자연스러운 사고를 가장하여......

-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감청한 반지구파 외계지령 내용



*


그날 밤이었다. 절대 엄마 옆을 떠나면 안 된다고 떼쓰듯 강요하는 엄마 때문에 할 수 없이 안방에 있는 엄마 침대 옆 바닥에 요를 깔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스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좀 버거웠는데, 그분이 금니만 남기고 증발해버렸다는 얘기까지 듣고 나니 '아 그랬군요'하고 끄덕이고 퍼질러 자기엔 좀 쉽지 않은 기분이었다. 침대 위에서 연신 훌쩍이던 엄마는 당부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이내 잠들어 약하게 코를 골았다. 나는 나도 이대로 증발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내가 사라져버리면 나대신 누가 메텔누나를 빼앗아버릴지도 몰라. 외계교환학생 자리는 또 누가 차지할까. 그런 부질없는 걱정을 하면서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


<일어나>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글자도 아니었고, 단지 뜻이었다. 그것이 내게 말을 걸었다.

<어서 일어나. 급해.>

벌떡. 그 순간 나는 누군가가 내 팔을 휙 잡아당긴 것처럼 일어났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나가야 돼. 옷은? 몰라. 일단 나가야 돼. 나는 잠옷 겸 실내복 겸 입은 긴팔 츄리닝 차림새 그대로, 현관에서 눈에 띄는 슬리퍼를 꿰어 차고는 현관문을 살짝 열었다. 찬바람이 얼굴을 휘감았다. 나는 미끄러지듯 집을 나섰고 그대로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뒷길로 나와. 최대한 조용히.>

십 수 년간 살아온 우리 동네였다. 하지만 그날은 처음 시작한 게임 속 미로처럼 왠지 낯설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 모든 것이 푸르게 얼어붙은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갈림길마다 나에게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었다. 나는 마을을 지나 오솔길로 들어갔다. 잠시 산길을 오르다가, 어릴 적 익숙하게 뛰어다녔던 놀이터인 해뜨미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해가 떠오르는 언덕으로, 친구네 아버지가 매화나무를 기르는 곳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봄만 되면 가지치기에 여름이면 매실 따는 데 동원되는 게 일상사였다. 우리는 하늘이 탁 트인 그곳에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뒹굴고 놀았다. 그런데, 거기에 웬 헬리콥터가 한 대 있는 것이 아닌가.

"어서 타. 빨리!"

메텔 누나였다. 누나가 대체 왜 헬기를 타고 우리 동네에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란 느낌에 그냥 올라탔다. 그녀는 나에게 벨트를 매게 하더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헬기를 조작해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누나,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요?"

누나는 헬기를 조종하느라 바빠 내 말에는 대답할 여유가 없어보였다. 헬기는 한동안 휘청거리며 수직으로 날아오른 뒤 이내 평형을 찾았다. 그제야 누나는 뭐라 말을 했지만 프로펠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눈을 감으라는 시늉을 했다. 누나의 심화가 느껴졌다.

<빨리 나와서... 정말... 다행... 조금... 늦었더... 집.. 폭발... 그대로 죽었...>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땅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추인 우리 동네가 보였다. 그리고 선명하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하나.

엄마, 엄마.

그것은 우리 집이었다. 누나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대로 뛰어내렸을 지도 모른다. 몸부림을 치면 그 진동 그대로 흔들리는 작은 헬리콥터 안에서, 그날 나는 평생 운 것보다 더 많은 울음을 쏟아냈다.

*


대속진 발동 조건

1. 200단위 이상 k지수 보유자 10인 이상
2. 행성 단위 대속진 운용 가능 외계인 3인 이상
3. 대상자들 동시 집결(섬 지역)

- EECCO 대속진 운용 계획 보고서 중



*


헬기는 그대로 밤새 날아갔다. 그 좁은 좌석 안에서 나는 몇 번이고 대체 왜 그랬느냐고, 엄마를 데리고 나오게 하지 그랬냐고 물었지만 누나는 나중에 말해주겠다고만 하고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동이 터오를 때 즈음, 우리는 한 섬에 도착했다. 헬기에서 내리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베고 지나갔다. 투명한 파란 허공은 돌이라도 던지면 파스스 소리를 내며 부서질 듯했다.

"저리로 들어가 봐."

그녀가 나를 살짝 건드리더니 작은 오두막을 가리켰다. 나는 무어라 화를 내고 싶었지만 아무런 힘이 나질 않았다. 그저 터덜터덜 걸어 그리로 들어갔다. 오두막 안에는 나처럼 별로 표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열 명 남짓 앉아 있었다. 서구 쪽 사람인 듯한 금발의 여자도 있었고, 아프리카 출신임이 분명한 진한 초콜릿색 얼굴의 소년도 있었다. 동양인은 나와 누나뿐인 듯했다.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을 EECCO 소속의 직원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참을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마음속에 또다시 어떤 울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도리가 없었어요. 만약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지체했다면 여러분까지 모두 살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온갖 언어로 아우성을 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뜻을 온전히 알 것 같았다. 내 가족들은 전부 물에 빠져 죽었어요. 아직 젖도 못 뗀 아이가 눈앞에서 불탔어. 내 애인도, 내 부모도. 왜 나만 구했어. 차라리 나도 죽여. 그들의 분노와 내 슬픔이 뒤섞여 마음이 찢겨나갔다.

<'대상자'들의 가족까지 구조하다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간신히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서 여기까지 오신 거잖습니까.>

나는 미처 모르는 사이에 반지구파 외계세력에게 테러의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그동안 겪었던 아찔한 순간들이 전부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대체 왜? 왜 나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제야 열 명이 찼으니까요.>

그러더니 그 남자는 어떤 영상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아니, 보여주었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 그저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검게 타버린 거대한 돌덩이였다. 군데군데 갈라진 틈새 사이에선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아프리카였다.

<약 일주일 뒤의 지구입니다. 달 절반 크기의 운석이 충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커먼 숯덩이. 연기조차 피어오르지 않는 그것은 말 그대로 죽음의 별이었다.

<이것은 지구 인류가 그동안 쌓아온 업보의 결과입니다.>

열 명의 사람들은 그 검은 지구를 보고는 공포에 질렸다. 아프리카 소년이 겁을 먹은 듯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류의 삶을 조금 더 연장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지구에 딱 열 명, 그 업보를 대신 받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여러분이 테러의 대상이 되신 이유입니다.>

*


사람들이 충격에서 벗어나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누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도 없었다.

"정말, 미안해."
"대체... 뭐에요."
"난, 너 같은 사람들의 보호역으로 파견된 거야."
"무슨 소리에요... 그게."
"이 몸은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거고..."
"무슨 소리냐구요!"

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자 그녀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더니, 힘겨운 듯 말했다.

"난, 지구인이 아냐."

*


외계문명이 존재하는 나선성운 NGC5257과 지구는 약 3억 광년의 거리로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와 외계문명 사이에 어떻게 교류가 가능한지 구체적 방식을 설명하고, 또 해당 방식에 따라 야기되고 있는 사회문제는 무엇인지 간단히 서술하시오.

지구에 존재하는 가장 빠른 우주선을 이용하더라도 빛의 속도를 넘어서진 못한다. 그러므로 지구인과 외계인이 각자의 몸을 가지고 물질을 통해 서로의 행성에 방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구인과 외계인이 상호간의 문명을 방문코자 할 때에는, 서로의 몸을 빌려 쓰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외계매질을 통한 물질제어시스템'을 통한 '원격제어'는 물질적으로는 자신의 행성에 거주하면서 서로 상대 행성에 있는 특정 인물의 신체를 일정 기간 동안 조종하는 것을 말한다. 교환기간 중 조종당하는 몸 주인의 의식은 일종의 수면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따라서 이 기간 있었던 일에 대한 사건기억은 남지 않게 된다.

EECCO 원격제어규약에 따르면 교환기간 중 해당 인물의 신체에 상해를 입히거나 결혼, 임신 등 이후 생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EECCO에서는 교환기간 중 한쪽이 사망하거나 여타의 이유로 교환계약을 파기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체적으로 자원을 받아 잉여교환인력 풀을 관리하고 있다. 이런 사망과 계약파기 이외에도 지구-외계인간 인체교환이 이루어진 경우 기간이 길어질수록 원상복구 시 달라진 인격으로 인해 원래의 인간관계가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이 발생해 교환자들은 대개 사회생활의 복귀에 다소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EECCO 규약에도 불구하고 교환기간 중 임신과 출산을 하거나 복구 불가능한 상해를 입는 등의 부작용이 있어 보증금 제도 등의 도입이 검토되고 있는 상황이다.  

- 외계학과 전공필수, '우주문화론' 기말고사 문제 모범답안 예시



*


그랬던 것이다. 괜스레 내게 말을 걸어 친한 척을 하고, 외계교환학생 신청서를 내게 해 k지수를 측정하게 하고, 데이트를 가장해 내 주변을 맴돌았던 것도, 굳이 집까지 초대해 심화를 가르쳐준 것도 전부 임무 수행의 일부였을 뿐이다.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그럼, 그건 뭐였어요? 그 때 누나 집에서... 심화로... 그것도 임무였어요? 그래요?"

누나의 속눈썹이 살짝 떨린 듯 했다. 그녀는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내 가슴 속에 무언가가 울려왔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닫아버렸다.

"됐어요. 이젠 싫어요."

그 때 누나의 짙은 갈색 눈동자 너머에 무언가가 비쳤다. 푸른 빛깔의 그림자 같다고 생각했다. 수억 광년 떨어진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인 듯도 했다. 그녀는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요원이 다가와 눈짓으로 우리를 재촉했다. 결국 나는 누나의 진심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지구를 위해 내 몸을 내어놓을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앉아서 다 같이 죽을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열 분 모두 동의를 하셔야만 대속진 운용이 가능해집니다.>

다들 망설이는 눈치였다. 저 사람의 말이 정말일까, 반신반의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사고들을 생각하면 정말 일주일 뒤에 지구가 시꺼멓게 타 버리는 것도 마냥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에 빠져 있을 즈음, 아프리카 소년이 벌떡 일어나 무어라고 말했다. 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일어났다. 나도 일어섰다. 앉아서 이대로 죽느니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제각각 동의를 표하는 문서에 서명을 했고, EECCO의 요원들은 대속조치를 위한 진을 펼치기 위해 바닥에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렸다. 열 명의 사람들이 정해진 자리에 앉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누나를 포함한 세 명의 요원들이 도형의 바깥에 섰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되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살아서 지옥에 온 것만 같았다. 대속조치의 시작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짝 하고 공간을 가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열 명 모두의 몸에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고통이 엄습했다. 러시아에서 온 중년 여자는 몸 여기저기에 붉은 열꽃이 피더니 순식간에 온몸이 두 배쯤 되는 모습으로 부어올랐다. 남미에서 왔다는 내 또래의 청년은 전신의 뼈가 하나씩 하나씩 부러져 몸의 형태가 무너지고 있었다. 아프리카 소년은 눈에서 붉은 피를 흘렸다. 금발의 여자는 머리카락과 이빨이 전부 빠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온 내장을 벌레가 파먹는 듯 한 고통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뒤에 선 요원들은 땀을 비 오듯 흘렸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에는 잠시 허공을 떠도는 투명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고통에 사로잡힌 모두의 몸뚱이 위에 검푸른 구름이 비친 듯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 여자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혀를 물었다. 그 순간 내 몸을 파먹는 벌레가 두 배로 늘어난 것처럼 통증이 가중되었다. 죽고 싶어. 이걸 견디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프리카 소년도 자해를 하려는 듯 자기 팔을 물어뜯었다. 한 요원이 소년을 말렸지만 이미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달콤한 죽음의 유혹이 탐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세 명의 사람들이 더 죽어나갔다. 내 온몸은 보이지 않는 벌레로 뒤덮인 듯,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이대로 숨을 멈추기만 하면 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쉬지 않자 조금씩 몸이 마비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끝이야, 이제 끝. 끝.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 손을 꼭 붙들었다. 눈을 뜨지 못했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느낌. 누나였다. 잠시 고통이 줄어들었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다. 하얗게 핏기가 가신 그녀의 얼굴이 보인 것 같았다. 누나의 갈색 머리칼을 만지고 싶었다. 붉은 입술을 보고 싶었다. 수줍은 듯 움츠러든 하얀 어깨를 한번만 더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전했던 그 마음에, 답을 건네고 싶었다.

그렇게 까무러치기를 몇 번, 해가 수차례 떴다 진 듯했다. 새가 울며 날아간 듯도 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몇 번이고 불타던 우리 집을 보았다. 메텔 누나의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그리고... 영원할 것만 같던 그 고통도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죽비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한 남자가 들어와 조치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는 운석이 지구와 화성의 궤도의 사이로 빗겨 갔다고 전했다. 일단 지구는 위기를 넘긴 것이다. 나는 가까스로 일어났다. 내 옆에는 메텔 누나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힘겹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파리한 얼굴은 몹시 지친 듯했다. 누나의 몸을 소파에 누이고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하게 낯선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눈을 뜬 그녀가 잠시 동안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

"누구...세요?"

*


이번 대속진 운용의 결과로 인류의 명은 약 십오 년간 연장되었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한 조처로서 이 행성에서 인류의 영속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지구인류의 전격적인 각성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고단위 k지수 보유자들에 대한 반 지구파의 테러가 점점 더 교묘한 방법으로 자행되고 있어  다음번 명 연장의 가능성은 불투명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번 대속진 운용에 참여한 지구인 10인 중 네 명이 진행 도중에 사망하였으며, 지원인력으로 참가한 외계요원 1인도 과도한 기력소진으로 인해 소멸되었습니다. 생존자들은 제각각 본국으로 후송되었고, 일정한 회복기간을 거쳐 본래의 삶으로 복귀하도록 지원할 예정입니다.

- 지구-외계문명 협력기구(EECCO) 극비문서, 3차 대속진 운용 결과 보고서



*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소되어 텅 빈 집터, 그리고 엄마의 유골함이었다. 친척들은 내 시체가 흔적도 없이 타버린 것으로 알고 엄마와 함께 내 장례까지 치러버린 참이었다. 나는 그 일의 후유증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고, 몸 여기저기엔 흉터마저 남아 있었기에 그들에겐 폭발을 피해 도망갔다가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어찌어찌 둘러댔다.

그 뒤로 나는 꼬박 반년을 병원에서 요양해야 했다. EECCO에서 입원비를 지원하고 간병인도 보내 주었지만 가족 하나 없는 채로 입원생활을 하는 것은 지독하게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혼자 잠든 밤이면 그날의 고통이 되살아나 나를 괴롭혔다. 누나의 마지막 미소가 환영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한번만 더, 한 번만 더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절대로 마음을 닫아버리지 않을 텐데. 누나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내 입안 어딘가에 까끌거리며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됐어요. 이젠 싫어요.

2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겨우 학교로 돌아갔다. 캠퍼스는 지구가 위기를 맞았건 말건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벌써 외계고시 준비에 들어간 동기들은 시험공부에 여념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메텔 누나, 아니 한때 그런 별명을 가졌던 여자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고 취직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왜인지 그녀를 더 이상 메텔이라 부르지 않았다.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아. 다들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여자는 머리를 자르면 분위기가 확 바뀌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나 역시 그녀에게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메텔 누나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과연 그녀는 누구였을까. 나는 EECCO에 몇 번이고 누나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대단히 죄송하오나 요청하신 파일은 EECCO 외계문명정보규약에 따라 공개가 제한되어 있습니다.'라는 거절의 메시지뿐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그 조치에 참여했던 외계인 요원 한 명을 어렵게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를 통해 나는 몰랐던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이 파란 행성에 고향보다 더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3년째 지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고단위 k지수 지구인을 찾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 나를 찾아낸 뒤 동료 요원에게 들뜬 얼굴로 그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 내 어머니를 함께 구하려다 상부로부터 크게 문책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 날, 내가 고통에 못 이겨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자신의 모든 기운을 내게 불어 넣었다는 것. 그제야 나는 비로소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희미한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누나가 내게 준 삶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으로 한 것은 외계교환학생 자격을 포기한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수억 광년 넘어 존재하는 어떤 별이 아니라 지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은 대체 그걸 왜 포기했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 자격을 어떻게 얻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만 둔 이유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지독한 사건으로 득을 본 것이 딱 하나는 있었다. 번역기 없이도 외계어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누나의 말이 맞았다. 그것은 해석하는 것보다 그냥 느끼는 편이 훨씬 쉬웠다. 하지만 이 역시 이유를 설명할 순 없었기에 친구들에겐 그저 휴학기간동안 죽어라 공부했다고 둘러댔다. 이따금씩 학교 안을 걷다보면 자기들끼리 심화를 나누고 있는 외계출신 동기들의 대화가 들려오곤 한다. 그들은 대개 심화로 내일 무슨 영화를 보러 가자느니, 수업 들어가기 싫은데 술이나 마시러 가자느니 하는 수다를 떤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가 내게 보내주었던 것과 같은 따스하고도 뭉클한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연녹색의 부드러운 파도도, 온몸을 감싸는 듯한 감미로운 향기도, 주변의 대기를 물들이는 다사로운 빛깔도.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졸업하기 반 년 전, EECCO에서는 나에게 특채로 외계관 자격을 부여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외계인들을 회유해 지구 멸망에 대한 정보를 캐내거나 아니면 지구인들을 대상으로 k지수 증폭훈련 프로그램 따위를 운영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 사건 이후로 드나들기 시작했던 환경단체의 상근자로 취직했다. 친척과 친구들은 다들 나에게 미쳤냐고 했다. 내 외계어 실력이면 웬만한 초행성기업에는 너끈히 취직할 수 있는데 뭣하러 그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생고생을 하러 가냐는 것이었다. 너 그러다가 후회할 거야. 오래 못 갈걸. 나중에 애 학비는 어떻게 댈래. 노후는 어쩌고. 이십년, 삼십년 뒤를 생각해 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떠올린다. 그 섬에서 보았던 검은 지구. 벌겋게 달아올라 붉은 핏물을 흘리던 지옥 같던 행성의 모습을. 내 몸을 휘젓고 다니던 인간들의 업보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어가던 죄 없는 이들의 얼굴을. 그리고 생각한다. 내 손을 꼭 잡던 누군가의 마음. 이름 모를 외계인이 생명을 태워 지켜준 내 목숨의 의미를.

나는 정말로 지구에서 이십년, 삼십년 뒤의 삶을 맞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정말로 많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중요한 것은 외계인류가 정말로 실재하는가, 외계에 인류가 살 수 있는 행성이 또 존재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우리는 새 행성을 얻을 자격이 있는 존재인가? 이 우주에서 희귀하고 가치로운 오아시스, 지구조차 파먹고 착취해 망가뜨리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만약 외계인류가 존재한다 치자. 이런 지구인들을 그들의 행성에 초대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을 더더욱 살아나도록 가꾸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미래 또한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반복되는 가뭄과 홍수, 각종 전염병의 창궐, 물질문명의 정신적 빈곤함으로 인류 대부분이 신음하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새삼 깊이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김갑호 교수의 미공개 노트 중 발췌.







약력: 1999년에 세상이 멸망한다기에 대학도 못가보고 죽는구나 하고 우울한 십대를 보내다가 21세기가 무사히 찾아오자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논술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모조리 죽어버렸던 감성을 이십대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다시 살려냈다. 이런저런 웹진과 블로그에서 남의 창작물을 가지고 이리저리 재단하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어 앞으로는 인류의 미래와 우주의 앞날을 밝혀주는 재미있는 글들을 많이 쓰려고 한다. 지금은 강원도의 한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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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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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펭도 09.03.01 03:29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보여집니다"를 "보입니다"로 바꾸면 더 좋을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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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3.01 10:09 댓글 수정 삭제
    펭도 // 어젯밤 세시반에 미투데이에서 웬 문자를 보내주더군요! 그런 기능이 있는지 몰랐어요.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음... 그리고 어법상 '보입니다'가 맞기는 한데, 보고서 스타일에는 '보여집니다'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썼답니다. 하지만 역시 펭도님이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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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9.03.01 18:54 댓글 수정 삭제
    아, 정말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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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3.02 00:44 댓글 수정 삭제
    ida // 와, 이다님이다. 이다님께 그런 말을 들으니 어디가서 자랑하고 싶네요. 어디가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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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gabrand 09.03.04 23:57 댓글 수정 삭제
    와 진짜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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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희 09.03.19 21:42 댓글 수정 삭제
    딴짓하다 다시 봤는데, 역시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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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 09.05.19 22:10 댓글 수정 삭제
    지구를 소중히 하고 관심 가져야 겠어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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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y導 09.09.23 13:5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회사인데도 이거 읽느라고 눈을 못뗐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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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speh 14.05.26 13:37 댓글

    너무재밋어요 ㅋㅋㅋ 건필해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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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하 15.08.22 18:44 댓글

    와.. 진짜 너무 재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입부가 조금 지루했어요. 물론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요

    그래도 진짜 너무 좋네요. 교훈도 담겨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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