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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라데아(Oradea)는 루마니아와 헝가리 사이의 국경지대인 현 루마니아령 크리샤나 (Crişana) 지역에 위치한 도시이다. 10세기에 작은 성곽으로 시작하여 11세기에 헝가리 왕 라슬로 1세 (Szent László I)가 지배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1437년 헝가리의 시기스문드 왕이 타계하여 오라데아 대성당에 매장된 후 주교령으로 귀속되었으며, 1474년 투르크족의 침략으로 궤멸되었다. 이후 1570년부터 1596년까지 새로운 성곽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하였다.
    문제의 원고는 이러한 재건 과정 중에 성곽 지하에 파묻혀 일부 멸실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원고에 따르면 투르크족 침략 이후 재건되기까지 형식상 주교령이었던 오라데아에 왕이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루마니아와 헝가리 역사는 물론 동유럽 중세사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발견이나, 상기한 왕의 존재를 증명할 다른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과 함께 진위 여부의 불분명함과 그 초현실적인 내용 등으로 인하여 이 원고의 존재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원고의 존재를 아는 것은 학계의 최고 권위자인 극소수의 학자들 뿐이며, 이들 사이에서도 원고가 과연 진본인지, 위서(僞書)라면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꾸며내었는지 등이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천지창조 후 6994년
    신에게 바친 도시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로서 기록을 남기다.
   
    신의 시간은 영원하다.
    시간의 구슬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구슬은 흘러도 떨어지지 않으며 떨어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물이 흐르듯이 뒤에서 앞으로 이어지며 나아갈 뿐이다.
    시간의 구슬을 지배하는 자, 인간의 시간 또한 지배한다. 시간의 구슬을 지배하는 자만이 지상에 거하는 인간의 유일하고 진정한 군주이다. 신을 찬양하라. 신의 목소리를 찬미하라. 영원한 신의 시간을 찬양하라.
    신이 내려주신 군주의 능력을 찬미하라. 시간을 지배하는 자, 역사 또한 지배한다.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곧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나, 오라데아의 마지막 왕은 또한 지상의 첫 번째 진정한 지배자이며 유일한 군주이다.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시간 또한 지배한다. 시간은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남는다. 기억을 잃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어둠 속에 잠기면 그 어둠 속으로부터 그들이 솟아오른다. 그들이 다가온다. 그들이 다가온다 그들 [원문 일부 해독 불가]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이며 지상의 역사에 있어 첫 번째 유일한 지배자에게도 신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똑같이 공평하게 생명을 부여하셨다. 마을은 작아 그 주민의 수가 간신히 30여 호를 헤아렸다. 아비는 양을 치고 어미는 실을 자았으나 문득 태기가 있어 남아를 생산하니, 태생은 미천하였으나 그 위업은 창대하리라는 것이 신이 나에게 내리신 운명이었다. 신이 주신 운명은 절대적이며 그 힘을 거스를 자 세상에 없다. 운명을 거스르고 미천한 태생을 함부로 입에 올려 신이 내리신 나의 사명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던들 부모와 형제와 일가 30여호는 어둠 속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 신은 전지전능하시고 언제나 공정하시며 그의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다. 신을 찬양하라. 신의 목소리를 찬미하라. 신의 목소리여 자비를 베푸소서. 부디 이 가련한 영혼을 어둠에서 구하소서. 어둠에서 구하소서.
    양을 치고 실을 잣는 백성들의 소박한 마을에 한 이인(異人)이 있었으니 그는 신이 창조하신 시간이라는 존재를 탐구하는 학자였다. 마을의 아들 가진 부모들을 설득하여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려 했으나 수도원에 몸을 바치지 않은 자가 함부로 글을 배우면 마(魔)가 깃든다 하여 모두들 꺼렸으니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그에게서 읽고 쓰기를 배운 것은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인은 글과 함께 시간의 구슬을 보는 법을 내게 가르치려 하였으나 나이 어렸던지라 스승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때에 배우지 않았더라면, 마가 깃든다 하였을 때 이인을 멀리 하였더라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내게도 강물처럼 흘러가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노인이 되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내 부모와 함께 먼지로 화(化)하여 육신은 땅으로, 영혼은 하늘로 돌아갔을 것이다.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나 이인을 만난 것도 그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모두 나의 의지가 아닌 신의 뜻이다. 신의 뜻인가 악마의 장난인가. 시간의 구슬로 인해 목숨을 건진 것이 한 번이 아니니 이것은 구원인가 저주인가.
   
    어느 날 평화로운 나라에 이교를 믿는 야만인의 무리가 쳐들어와 함부로 베어 죽이고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무능한 지배자가 백성을 구할 길을 알지 못하니 저의 구차한 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리어 무고한 백성의 마을로 군졸들을 보내어 장성한 남자를 모아다 화살받이로 앞에 세웠다. 고향 마을에도 깃발을 앞세운 왕의 군사가 들어와 칼을 들 수 있는 남자는 모두 줄세워 데려갔으니 당시 내 나이 열 여덟이었으며 여자*
    [판독 불가. ‘여자’라는 이 단어는 또한 ‘신부’ 혹은 ‘아내’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이후 문장 멸실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음]
    목동의 지팡이 대신 장검을 손에 들고 나는 선혈이 낭자하며 골육이 쇄절하는 온갖 살육의 장(場)을 목도하였다. 그러나 그 피바람의 한가운데에서도 번번이 살아남았으니 이는 모두 신의 뜻이 아니면 무엇이랴. 그러한 와중에 적병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크게 다쳐 쓰러졌으며 이후 일곱 낮 일곱 밤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피아(彼我)의 구분조차 불가한 시체들의 산 아래 파묻혀 지내었다. 시련의 일곱 낮밤이 지날 동안 나를 살린 것은 오로지 신이 내려주신 새벽의 이슬이었다. 그 이레 밤낮이 지난 후 가까스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으나 사방에는 주검만이 가득하여 동서와 남북의 구분이 무의미하고 깨어진 머릿속에는 고통만이 흘러넘쳐 눈 앞을 가리니 나아갈 바와 물러날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한 형국인 즉, 죽어 넘어진 적병의 살을 씹고 피를 마시며 다시 사흘 밤낮을 걸었으나, 다다른 곳은 다름이 아니라 이교를 믿는 야만 무리의 진영이었으니 그 무참함이란 인간의 혀로 일러 형용할 수 없다.
    야만족의 옷차림과 말씨가 우리와 같지 않음을 깨닫자 참혹하고 절망스러운 바 있어 문득 자리에 쓰러지니 무뢰배의 괴수는 그들 사이에서 의술 쓰는 자를 불러 내 머리에 습포를 두르고 입에는 냄새가 고약한 약물을 흘려넣게 하였다. 이는 이교의 무리가 너그러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 살려두고 오래 괴롭히며 심문하여 아군에 여러 가지 모사를 획책하려는 계략임이 틀림없으니 부상으로 취약해진 와중에도 나는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초월자를 따르는 군사들을 배반하고 영혼을 타는 지옥불에 내맡기기보다는 차라리 육신의 한 번 죽음을 각오하였다. 그러나 신의 뜻은 오묘하여 인간의 지략으로는 헤아릴 수 없으니 보라, 이교의 의술을 쓰는 자에게 사흘 밤낮으로 약을 받아먹은 후에도 나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어린 날 스승이 그토록 힘써 가르치려 했던 시간의 구슬을 이 눈으로 보고 이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곧 지상 역사의 진정한 지배자로 거듭남이 있었음이라.
    신의 시간은 영원하며, 시간의 구슬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어지지 않고 흐르지 않는 것은 오직 죽은 자의 시간 뿐이다. 죽은 자는 신의 무한한 어둠에 속하며, 한 번 어둠에 잠긴 시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 바닥 없는 어둠 속에서 그들이 솟아오른다, 그들이 다가온다. 신이시여 나는 당신의 뜻대로 모두 행했나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을 막아주소서, 어둠을 [원고 가장자리 훼손으로 문장 일부 멸실됨]
   
    ***
    기억은 시간 속에 새겨진다.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시간을 지배한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구슬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능력을 얻은 이래 내가 속한 군사는 불패이며 나는 하늘 아래 무적이니 이는 모두 신의 뜻이며 위대하신 초월자의 행하심이다.
    이교의 무리 속에 붙잡혀 주위를 둘러싼 군사를 돌아보며 나는 나를 가둔 자들의 속에서 시간의 구슬을 가려서 뽑아내었다. 나를 치료한 의원으로부터는 이교의 무리 중 죽은 자가 몇이고 다친 자는 몇인지, 군영 안에 진을 친 병졸들로부터는 그 무리 전체의 숫자와 어느 군사가 언제 어디에서 파수를 보는지, 그리고 다친 나를 심문하러 온 이교의 괴수로부터는 어느 군사가 언제 어디를 치고 그 수는 몇인지, 다시 없이 귀중한 기억이 새겨진 시간의 구슬을 가려내어 나의 속에 소중히 품었다. 더욱이 시간의 구슬이 사라진 자리에는 흰 공백이 남았고, 수장을 비롯한 병졸들의 안에 퍼져가는 이 공백으로 인하여 이교도의 무리 속으로 혼란과 두려움이 스며들어 빠르게 번져나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며 나는 신을 찬양하고 그 깊은 뜻에 감사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적들의 안에서 골라낸 시간의 구슬에 힘입어 아무도 파수를 보지 않는 시각에 아무도 파수를 서지 않는 장소를 통과하여 적의 소굴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다시 한 번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죽은 병사의 시체가 산과 같이 쌓이고 그 피가 강과 같이 흐르며 살 썩는 냄새가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공기 중에 진동하는 벌판으로 나아갔으나 나의 마음은 오히려 즐겁고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문득 신묘한 기운이 있어 주위를 둘러보매 그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며 위를 쳐다보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요 다만 흐르지 않고 멈추어 선 대기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어둠 속의 그림자에 둘러싸였으니 마음은 비할 데 없는 기쁨 속에 머무르고 몸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 거하였으며 정신은 돌연 아득하여 뜻한 바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혹은 공중에 들린 것과 같고 혹은 물 속에 잠긴 것과 같았으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고 눈꺼풀조차 한 번 떨 수 없었으나 문득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을 둘러보매 이미 아군의 성문 앞에 도달하였으니 이는 전능하신 초월자의 행하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오래 소리친 끝에 이윽고 성문이 열리고 나와 같은 옷을 입고 나와 같은 말씨를 쓰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반갑고 아득하여 기운이 소진한 탓으로 문득 쓰러지매 드디어 동포의 팔에 안기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정신을 차리자 곧 아군의 장수에게 불리어 가매,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장수의 머릿속에 악마와 같은 계획이 번득임을 알아보았다. 과연 장수가 입을 열어 가로되 이교도의 군진에 몇 날 몇 밤이고 붙들리어 있다가도 살아온 자가 많지 않으니 이는 반드시 적군과 내통했음이며,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신을 팔고 왕의 군대를 팔아 알아낸 바를 샅샅이 고하라 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장한 체격에 얼굴이 험상궂은 군졸들이 좌우에서 덤벼들어 붙잡으니 구사일생하여 고국에 돌아온 보람이 무엇이더냐. 양 팔을 등 뒤로 비틀어 올리고 칼 끝이 목 아래를 파고들어오니 몸의 고통과 마음의 처연함은 형용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장수의 칼이 나의 숨통을 끊기 전에 나는 그의 속에 깃들었던 시간의 구슬을 뽑아내었으니 장수는 이내 나이들어 백발이 사방에 흩어진 노인과도 같은 모양으로 곧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 곁에 주저앉아 사위를 망연히 둘러보았다. 급작스러운 변고에 놀란 군졸들이 잡았던 팔다리를 놓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그들도 멀리 가지 못하고 시간의 구슬을 모두 빼앗겨 백 세 노인과도 같이 무력하게 땅에 주저앉아 어린 아기와도 같은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볼 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장수와 그 군졸들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까지도 송두리째 나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후로는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망령든 노인으로 변한 장수를 대신하여 나는 아군의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이 되었다. 이미 적의 장수에게서 시간의 구슬을 빼앗아 내 안에 품었으므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꿰뚫은 바 되어 나의 군사들이 진격해 들어간 곳마다 승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적장의 목을 창끝에 꿰어 들고 백치 노인으로 변한 장수를 묶어 앞세우고 왕궁으로 향하였으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술과 고기를 내려 위로하매 이는 모두 국왕이 인재를 알아보고 나라의 운명을 구한 공을 높이 산 때문이었다. 왕에게 적들의 숫자와 배치와 전략을 세세히 고하자 왕은 또 한 번 기뻐 탄식하며 양 치는 사내와 실 잣는 여인의 아들에게 무장(武將)의 검을 하사하였다. 이후로 왕의 곁에서 그 시간의 구슬을 헤아려 읽으며 입의 혀처럼 받드는 한편 충언하는 바대로 군사를 운용하여 가는 곳마다 백전백승을 거두니 국왕의 신임이 두텁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예로부터 귀한 인재에게는 시기하는 자가 따르며 권력 있는 자의 주변에는 삿(邪)된 무리가 꾀는 법이다. 무능한 귀족의 무리가 근본 모르는 자가 국왕의 신임을 얻어 궁정에 머무름은 옳지 못하다 하여 국왕께 이리저리 고하기 시작하였다. 왕이 듣지 않자 일각에서는 심지어 흑마술을 쓰는 자가 궁에 틈입하여 왕의 정신을 흐리게 한다고까지 말하였으니, 아직도 이교도의 무리가 국토의 동서남북에 출몰하고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이 때에 전장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안락한 궁 안에서 세 치 혀만을 놀려 자신의 앞날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들 무리의 간악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신은 나를 위하여 앞날을 예비하시고 세상의 높은 곳에 나의 자리를 마련하심이 있으니 사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그 검은 속내를 아무리 숨기려 하여도 시간의 구슬이 모든 것을 비추며 흘러감은 막을 길이 없었다. 하여 이들 중 몇은 기억을 잃었고 또 몇은 정신을 잃었으며 가장 간악한 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나의 충정을 배신하고 간교한 무리와 은밀하게 내통하여 신이 내리신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왕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그 동생이 미치광이로 변하여 백발을 흩날리며 성 안을 헤매고 다니게 된 것을 마음아파 함은 일러 헤아리지 못할 바 아니나 국왕이 그 동생과 함께 간교한 술수를 꾸미지 않았던들 그들 모두에게서 시간의 구슬을 빼앗아 왕궁 밖에 목을 내걸고 그 머리의 왕관을 내어 이 머리에 쓰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은 무릇 하늘이 내리시는 것, 신의 뜻을 담을 그릇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왕좌에 앉았으니 어찌 만세의 번영을 바라겠는가.
   
    ***
    이처럼 신이 내리신 지배자가 궁 안팎을 평정하니 이교도의 무리가 물러가고 하늘의 높으신 뜻에 따라 나라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홀연히 궁성의 문 앞에 나타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어린 시절 내게 글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일찍이 어린 나를 홀렸던 그 교활한 수법으로 왕을 지키고자 앞을 막아서는 나의 군사들을 제압하고 궁성 안으로 침입하여 신이 내리신 오라데아의 지배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군주 앞에서 양을 치는 아비와 실을 잣는 어미를 둔 미천한 태생으로 하늘이 정하여 주신 왕좌가 나의 것이 아님을 목청 높여 설(說)하니 주위에 늘어선 신하들과 시종들이 놀라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간악한 자의 술수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이 내리신 군주인 나 한 사람 뿐이었으니 그에게서 시간의 구슬을 거두었으나 오히려 내어줌이 없고 다만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언으로 주위에 늘어선 뭇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케 하고 정신을 흐리게 하였다. 그러한즉 목을 베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둠은 오히려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냐. 그 곳은 땅 밑이라 해를 보지 못하고 시간의 이어짐과 끊어짐을 알 수 없으니 간교한 자의 사악한 술수도 미치지 못하게 하려는 군주의 혜안이 아니냐. 연약하고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나라를 구하고 시간의 지배자로 등극한 것은 은혜로우신 구세주의 본을 받아 신민들의 육신과 영혼을 구원하려 함이거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군주의 자격을 논하며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바로 신의 뜻에 반기를 들고 적과 내통하는 자의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
    인간은 다른 인간과 함께 삶을 살아가며 시간은 혼자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함께 생을 지어올리매 인간이 시간의 존재를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자각되어 흘러가는 것이라 하였다. 시간은 인간의 정신에 새겨지고 그 몸에 흔적을 남기며 그러므로 시간의 구슬은 하나가 아니요 그 순간을 같이한 인간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삶의 순간을 공유한 자에게서 시간의 구슬을 거두면 함께 나누었던 시간의 구슬들도 모두 소멸하니 인간과 인간이 이처럼 이어져 서로 의지하는 것 또한 신의 뜻이다.
   
    여자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서 흰 머리가 어깨 위로 흩어지고 영혼을 빼앗긴 그 눈이 백치와도 같이 변했을 때에도 뺨 위로 흘러 떨어지는 눈물만은 그치지 않았다. 여인이 안고 있던 어린 소녀는 그 커다란 검은 눈을 더 크게 뜨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은 한 때 소녀였으며, 지금 눈물로 얼룩진 그 뺨은 희고 입술은 부드러웠다.
   
    군주를 음해하려는 자는 모름지기 영혼과 정신을 빼앗기고 황야로 내침을 당함이 마땅하다.
   
    여인의 백발이 어깨 위로 흩어지고 뺨으로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린 소녀는 검고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너무 어려 그 안에 시간의 구슬이 아직 몇 개 깃들이지 못하였다. 그 검은 눈에서 맑은 정신이 사라지고 백치와 같이 변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차마 이 눈으로 볼 수 없어 어린 아이에게는 왕의 관용을 보여 영혼을 잃은 그 어미와 함께 저희들의 갈 곳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녀의 그 검은 눈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며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면 사방에서 나타난다. 자비를 베푸소서. 어둠에서 구하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
    군주를 음해하려는 자는 모름지기 죽음으로써 처단함이 마땅하다.
   
    신의 뜻으로 왕을 세우시니 이승에서 순간의 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죄 많은 육신을 흐르는 혈통보다 고귀하지 않으랴. 왕가의 적손(嫡孫)이 아니라 양 치는 아비와 실 잣는 어미의 핏줄임을 내세워 신의 뜻으로 나라를 구하고 왕좌를 차지한 지배자에게 감히 대항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출몰하니 발본색원하여 그 뿌리부터 제거함이 군주의 혜안이다. 과거는 기억 속에 새겨지고 인간의 기억은 나의 손 아래 있다. 마을은 절멸하여 흔적마저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든 기억을 빼앗기고 눈동자에 광기와 어둠만이 가득한 채 뿔뿔이 흩어져 그 향한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둠과 함께 언제나 내게 돌아온다.
    문 없는 벽에서 솟아나온 것은 양을 치던 아비의 얼굴이다. 그 곁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은 실을 잣던 어미의 검은 눈동자다. 그 수는 매일 밤 불어나니 이는 황무지를 떠돌던 자들이 드디어 명이 다하여 숨이 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매일 밤 몰려온다. 그들은 어둠을 몰고 온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움푹 파인 검은 눈을 크게 뜨고 침대 곁에 모여 서서 내려다볼 뿐이다. 죽은 자는 영원한 신의 시간에 속하니 살아 생전 간직했던 시간의 구슬은 더 이상 그들에게 깃들지 않으니 그들의 영혼은 검은 어둠 속에 잠겨 살아 있는 자가 감히 손댈 수 없고 단지 두려움에 떨며 바라볼 뿐이다. 핏기 없는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검은 눈이 다가온다. 그들이 다가온다. 그들이 신이여 어둠을 자비 [해독 불가]
   
    ***
    신은 언제나 공명정대하시다. 그의 뜻은 언제나 옳다. 인간의 힘으로는 신의 뜻으로 세운 왕에게 대항할 수 없으며 대항해서도 안 된다. 온 나라가 신의 뜻에 따라 왕을 받들었으나 지금 내가 몸을 숨긴 바로 이 땅 밑의 굴 속에서 한 때 나의 스승이었던 자만이 오히려 지상의 유일하며 영원한 군주인 내가 인간의 힘으로 신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왕좌를 떠나 남은 생을 속죄와 회개에 바침으로써만이 타락한 영혼을 구제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지하 동굴에 가두어 온갖 고문으로 군주의 권위를 보였으나 오히려 마음을 돌리지 않으니 이는 실로 악마의 현신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수법이 간교하여 시간의 구슬을 거두어도 빼앗기지 않고 과거의 기억뿐 아니라 미래의 시간까지 물 흐르듯 자유자재로 모으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므로 신께서 내리신 군주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영광을 돌리면 그 즉시로 지하 감옥의 고통에서 벗어나 가장 높은 대신의 자리를 맡아 국왕의 곁에서 신이 내리신 나라를 만세토록 다스릴 수 있음을 권하였으나 간악하고 교활한 자는 군주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신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백성은 군주가 아닌 신께 속하며 그 백성의 시간과 기억과 정신과 영혼 또한 궁극적이고 유일하신 신의 손 아래 있음을 거듭 설(說)하니 일견 신심 깊은 자가 신께 영광 돌리는 말씀으로 보이나 이는 기실 신의 뜻으로 과거와 현세와 미래를 지배하는 군주의 권위를 깎아내림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러한 연고로 가깝게는 궁성의 안팎으로부터 멀게는 변방까지 왕의 군사가 나라 구석구석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이러한 삿(邪)된 무리와 생각을 같이 하는 자를 색출하여 바람과도 같이 왕궁으로 몰아오니 한 때 나의 스승이라 일렀던 그 교활한 자가 보는 앞에서 이처럼 반역을 꾀하는 자들의 영혼을 가르고 정신을 헤집어 시간의 구슬을 그 발 밑에 떨어뜨렸은 즉 군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권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하지 않는 자 없었다. 어린 시절 스승이라 믿었던 그 간악한 자가 이들에게서 군주가 몸소 거두어들인 시간의 구슬을 그 반역의 머릿속에 다시 심어주지 않았던들, 사악한 무리들이 정신과 영혼을 잃었으나 육신의 생명만은 보전하여 신의 뜻으로 지배하는 군주의 명에 따라 황무지를 헤매는 광인으로나마 이승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었던들, 백성의 어버이된 자로서 이들의 영혼은 물론 목숨까지도 거두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주가 짊어진 짐은 그 권위만큼이나 무거우며 그의 빛나는 영광은 용기와 결단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누구든 미욱하여 이를 알지 못하고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려 군주의 자리를 깎아내리며 그를 통해 나타나는 신의 뜻을 의심하는 간악한 자는 그 죄를 뉘우치기 전에는 결코 영원한 휴식의 길로 보내지 않으리니 평생토록 땅 밑의 굴 속에서 흙을 먹고 바위를 베개삼아 잠 자더라도 국왕을 능멸한 죄보다는 오히려 가볍다 하겠다. 결코 죽지 않으며 결코 물러서지 않는 악의 화신에 대하여 끊임없는 전투로 나라와 왕권과 전지전능하신 신의 뜻을 지키는 것 또한 군주로서 나아갈 바이니 이십 년 간 반역의 무리와 싸우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왕좌를 지킨 것 또한 신의 도우심이다. 신께 영광을 돌리고 그 은총을 찬미하라.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
    그러나 신께서 마침내 당신이 선택하신 군주를 시험에 들게 하시었으니 이교도의 무리가 다시 한 번 국경을 침범함과 동시에 신의 뜻을 의심하는 간악한 자들이 마침내 무리를 지어 창과 칼을 들고 군주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궁성으로 향했음이다. 이는 즉 군주에게 대항하는 반역자의 무리가 이교도와 내통하여 마침내 신을 향해 반기를 들었음이니 신의 목소리를 듣고 그 뜻을 받드는 자로서 응징하지 않을 수 있으랴. 국경에서는 이교도의 무리가 날뛰고 궁성 밖에서는 반역자의 무리가 창궐하니 나라는 안팎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신음소리는 낮이나 밤이나 궁성의 돌벽 안까지 들려왔다. 신께서 보우하사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나라와 왕권을 이십 년만에 적들에게 내어준다 하면 억울함에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으니 남은 군사를 모아 목숨을 걸고 항전하였다.
    궁성 밖에서의 전투는 닷새 밤과 닷새 낮 동안 계속되었다. 신의 뜻을 받드는 왕의 군사는 그 칼끝이 날카롭기가 창공을 가르는 번개와 같고 사납기가 천둥과 같으며 전지전능하신 신 앞에 선 군주를 모시려는 의지가 바위처럼 굳으니 나무칼과 돌멩이로 무장하고 간악한 뜻으로 모인 오합지졸의 무리는 신의 뜻을 따르는 주군의 군사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였다. 하여 전란에 빠져 위태로운 나라를 더욱 더 소란스럽게 한 죄로 반역의 도당에 참예한 자는 모두 산 채로 그 몸을 큰 창에 꿰어 궁성 앞에 세워둠으로써 들짐승이 뜯어먹고 날짐승이 쪼아먹도록 하였으니 이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군주의 위엄이 서릿발과도 같으며 신의 뜻이 타는 불꽃과도 같음을 몸소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때에 이교도의 무리와 함께 잡혀온 반란군의 도당은 그 수가 백여 명을 헤아렸으되 두건을 벗겨 그 얼굴을 드러내니 무리를 이끄는 자는 여자였다. 이교도와 내통하여 신과 군주에게 반기를 든 마녀는 창 끝이 뱃속을 갈라 머리를 뚫고 나오는 순간까지도 간교한 거짓말과 사악한 저주의 주문을 외쳤다. 창 날이 몸을 가를 때 마녀의 외침 소리는 궁성의 성벽 위까지 울려 퍼졌고 그 사악한 흑마술에 분개한 나머지 군주의 위엄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녀의 검은 눈이 나에게 향했고 그 흰 뺨 위에 흘러내린 눈물을 보았다. 그와 같은 여자의 얼굴이 오래 전 그와 같은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와 같은 흰 뺨 위로 눈물을 떨구었다. 그와 같은 검은 눈으로 어린 소녀가 그 어미된 자의 백발 흩날리며 영혼과 정신을 모두 잃고 방황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무척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이미 창 끝은 마녀의 몸통을 가르고 그 정수리 밖으로 튀어나왔다. 창백한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은 이윽고 말라 사라졌으나 생명을 잃은 그 검은 눈동자만이 궁성 앞 광장에서 창 위에 꽂힌 채 그 때부터 나의 뒤를 밤낮으로 쫓는다. 그 육신은 주검의 썩은 살 냄새를 맡고 몰려든 짐승들의 주린 창자 속으로 사라지고 마침내 남은 백골도 무너져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자의 창백한 얼굴과 검은 눈은 돌로 지은 성벽도, 궁성을 지키는 군졸의 창칼도, 심지어 모든 어둠을 밝히는 태양의 빛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나의 곁에 있다. 그 뺨은 오래 전에 보았던 것처럼 언제나 눈물로 반짝인다. 나의 영혼 안에 깃들인 시간의 구슬은 여자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부서지고 녹아 흩어져 버리며 나에게 남은 것은 여자의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과 검은 눈동자와 그 하얀 뺨을 적시던 눈물 뿐이다. 그리고 여자는 언제나 내게 다가와 언제나 주위를 맴돌며 젖어서 빛나는 검은 눈을 들어 내 눈 속을 지그시 들여다볼 뿐 결코 떠나지 않는다. 금실 같은 머리카락과 맑은 하늘처럼 푸른 눈을 지닌 왕궁의 여인들은 모두 부귀와 권력만을 탐함을 알고 그 요망함을 벌하고자 군주의 명으로 처형되었으매 이후로 그 수많은 여인들 중 단 한 명도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농부의 아낙과도 같이 거친 옷을 입은 검은 눈의 정체모를 여인만이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 흩어지고 핏기없이 흰 뺨에 눈물자국을 반짝이며 밤낮으로 나를 쫓을 뿐이다. 신의 뜻으로 군주에게 처음 육신이 허락된 마을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밤의 어둠 속에서 하나 둘씩 솟아 오를 때면 여자는 그들의 무리 뒤에 외따로 서서 나를 바라본다. 그 검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신의 뜻을 받들어 망루의 첨탑과도 같이 높고 궁성의 철벽과도 같이 견고한 군주의 마음 속에 회한과 슬픔과 그리움이 폭풍과도 같이 휘몰아친다. 여인은 누구이며 대체 어찌된 연고로 죽음 뒤에도 나를 쫓는가. 어찌하여 하늘의 왕국에서 안식을 찾지 않고 고통으로 가득한 땅 위에 스스로 거하는가.
   
    ***
    어린 시절 한 때 나의 스승이라 받들었던 자가 신의 뜻을 거부하여 그 간악한 육신을 유폐당한 지하의 감옥으로 다시 찾아간 것은 여인의 검은 눈 때문이었다. 그 검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나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은 두려움도 아니요 분노도 아니었으니 기도와 단식으로도 그 눈길과 뺨에 반짝이는 눈물 자국만은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마을은 이미 오래 전에 절멸하였으매 신의 뜻으로 왕궁에 입성하여 그 영광을 받아 군주의 자리에 앉기 전, 내가 다스리는 백성들과도 같이 미약하고 어리석은 한 인간이었을 때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언젠가 내가 스승이라 믿었던 그 교활한 자 외에 세상에 단 한 목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하의 감옥은 그 수인(囚人)의 영혼과도 같이 어둠 속에 잠겨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조그만 기름 등잔을 한껏 치켜들고 사위를 비추었으나 보이는 것은 어두운 벽과 어두운 천정과 어두운 바닥뿐이었다. 그러한 때에 문득 등 뒤에서 한 목소리가 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아들아, 너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기름 등잔이 손에서 떨어지니 바닥에 부딪쳐 깨지면서 연약한 불빛은 꺼져 버렸다. 곧 사방을 짓누른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상이 떠오르며 나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 너는 나에게 육신의 아들은 아니로되 정신의 아들로 삼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돌보아 가르쳤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고 오직 신의 시간만이 영원하므로 아들아, 내 너에게 마지막으로 이르노니 너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간교한 자는 과연 뉘우침이 없다. 그 입을 닥치라는 군주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악하고 무도한 자는 신의 뜻으로 세우신 군주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함부로 입을 놀리기를 계속하였다.
    - 보잘 것 없는 네 한 몸의 영달을 위하여 목숨을 빼앗긴 희생자들의 영혼 앞에 속죄하고 전지전능하시며 언제나 정의로우신 신 앞에 그 뜻을 어겼음을 고하며 눈물로 회개하여 신의 자비를 구하면 육신이 죽어 스러진 후에도 영혼이 끝없는 어둠 속에 떠돌지는 않을 것이다. 네 태생이 어리석고 마음이 좁은 것은 너의 탓이 아니며, 어리석은 자에게 분에 넘치는 재능을 내리신 것도 신의 뜻이니 지금이라도 인간의 생은 미천하기 짝이 없으며 오직 신만이 유일하고 영원하심을 깨닫고 그 권능 앞에 고개를 숙여 영혼의 구원을 구하여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간악한 자가 그 요사스러운 입으로 신의 뜻을 곡해하고 그 권능을 더럽힘에 의분을 참을 수 없어 나는 다시 한 번 그 입을 닥칠 것을 명하면서 허리에 찬 칼을 뽑아 휘둘렀다. 그러나 희끄무레한 형상은 귓가에 속삭이고 눈 앞에 떠올라 칼날이 미치는 곳에 머무르면서도 검이 스치고 지나감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손에 잡은 검 또한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한 공기만을 베어 그 자리에 다시 암흑이 흘러들 뿐이었다.
    - 불쌍하고 불쌍한 나의 아들아.
    희끄무레한 형상이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 무릇 군왕의 위엄은 백성의 공포에서 비롯됨이 아니며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백성의 목숨을 보란 듯이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것과 같지 않다. 네가 너의 그릇에 넘치는 재능을 하사받았으니 그것이 너의 잘못이겠느냐. 모두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나의 큰 탓이다.
    나는 칼을 쥐고 돌아섰다. 그러나 희끄무레한 형상은 어느 새 사라지고 목소리만이 반대쪽 귓가로 옮겨가서 속삭였다.
    - 불쌍한 나의 아들아, 덕이 없고 모자람을 스스로 받아들여 뉘우침은 결코 잘못이 아니며 또한 치욕도 아니다. 아들아, 너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네게 희생된 자들의 영혼을 위해 참회하라. 오로지 신의 시간만이 영원하며 인간의 시간은 그 얕은 지혜로 보기에 끝이 없어 보여도 기실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다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부딪쳐 탕, 소리를 내며 무언가 바닥으로 넘어져 뒹굴었으나, 검이 벤 그것은 딱딱하여 사람의 살과 같지 아니하였다.
    - 아들아, 이제 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흙먼지 가득한 이 땅 위에 홀로 서서 홀로 죽어갈 너를 위해 마음을 한 톨이라도 기울여줄 이가 그 누구이더란 말이냐….
    목소리가 귓가에서 한숨처럼 속삭였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사위를 둘러보아도 어둠 뿐이었고, 희끄무레한 형상도 속삭이던 목소리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문득 감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감방 안처럼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 찬 좁은 복도를 한참이나 달린 끝에야 벽에 걸려 타오르는 횃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횃불을 빼어 들고 돌아서서 다시 달렸다. 감방 안에 들어서서 사방을 비추며 한참이나 휘둘러본 후에야, 나의 검이 부딪쳐 반으로 쪼개진 나무 탁자 밑에 이미 살은 모두 썩어 사라지고 백골로 화(化)하여 뒹구는 스승의 주검을 보았다.
    이제 군왕의 금갑을 두르기 전 한낱 미천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던 나의 모습을 알고도 사랑하여 자신의 피와 살처럼 여겼던 유일한 이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흙먼지 가득한 이 땅 위에 홀로 남아 홀로 죽어갈 나를 위해 마음을 한 톨이라도 써 줄 자 그 누구더란 말이냐.
    백골을 무릎 위에 뉘이고 망연자실하여 넋을 잃고 앉았을 때 또 다시 사방 벽에서 그들이 솟아 나왔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과 지옥처럼 깊이 뚫려 바닥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이 차례차례 나타나서 나를 향한다. 그들의 무리는 점점 불어나 좁디 좁은 지하 감방을 채운다.
    그 중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여자가 앞으로 나선다. 꿰뚫는 듯한 검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 왕궁은 이교도들에게 점령당했다.
    여자의 뺨에 더 이상 눈물이 반짝이지 않음을 나는 알았다.
    - 너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처음으로 붉은 입술을 벌려 미소 지었다.
   
    ***
    신의 뜻으로 시간의 구슬을 지배하여 오라데아의 마지막 지배자로 군림한 뒤로 이십 이 년이 지났다. 한 때 번성했던 나라는 이교도들의 차지가 되었으며 한 때 나의 스승이 이승의 마지막 시간을 흘려 보냈던 지하의 감방이 나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깨진 기름 등잔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이 기록을 남긴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 기억을 지배하고, 인간의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전지전능하시며 언제나 정의로우신 하늘의 뜻으로 그 태생은 미천하였으나 위업은 창대하였으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유일하고 진정하며 영원한 군주는 육신의 시간이 다하였다 해도 신의 뜻으로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신의 시간은 절대적이니 시간을 지배하는 자야말로 궁극적인 세상의 지배자이다. 나의 육신은 죽어도 죽지 않으니 어둠 속에 잠겼던 이들이 다시 돌아오듯이 나 또한 어둠에서 살아나 이 땅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의 창백한 손이 나의 팔다리를 당기고 나의 목을 조르며 그들의 검은 눈동자가 사방에서 나를 덮쳐 온다. 그러나 신의 뜻으로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신이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
    원고는 여기서 끝난다.
    르네상스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원고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다만 오라데아 성채의 무너진 지하실에서 인골이 한 구 발견되어 성당 밖에 안치했다고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행에 따라 기록에는 발굴 당시 유골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해골의 정수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 기록에는 그 구멍을 사망 원인으로 추정하였으나 어떠한 흉기로 인해 구멍이 뚫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mirror
댓글 2
  • No Profile
    강태규 10.07.22 17:05 댓글 수정 삭제
    고고학적 adventure 에 서사적 분위기와 거침 없는 상상력의 제공....무척 땡기는 "아우라"...
  • No Profile
    보라 10.07.23 00:00 댓글 수정 삭제
    헉 이런 과찬의 말씀을;;;; 감사합니다;;;;
분류 제목 날짜
정도경 완전한 행복8 2010.08.28
정도경 타인의 친절 - 본문 삭제 -4 2010.07.30
미로냥 동백(冬柏) - 본문삭제 -2 2010.07.30
양원영 일발 - 본문 삭제 -1 201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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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16 2010.05.28
곽재식 지진기(地震記)6 2010.05.28
양원영 성채 - 본문 삭제 -4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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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내 친구 좀비16 2010.05.28
정도경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2 201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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