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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사랑해, 젤리피쉬

2010.08.28 02:4208.28

 장마철의 보충 수업 기간,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신발장 냄새가 진했다. 사복을 허용해주지 않았다면 보충 수업 따위 과감하게 쨌을 텐데 사복 입는 재미로 버티고들 있었다. 그러나 승권은 그마저도 전혀 흥미가 없는 편이었다. 승권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오직 하나다.
 혜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진학해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릿속이 투명하게 보인다고 해서, 별명이 해파리인 여자애였다. 그나마 순화해서 좀 귀여운 어감인 젤리피쉬로 불려서 다행이지, 해파리 같은 여자애를 좋아하는 나는 뭐가 되는 거냐, 승권은 늘 머리가 아팠다. 이 단순하고 모난 데 없는 사랑스러운 생물은, 불행히도 다른 사람한테서도 가장 좋은 부분만을 발견해서, 누가 고백하면 족족 다 사귀어왔다. 승권은 언제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고2였고,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고 마음먹자, 웬 농구부 주장이 오늘 혜현에게 고백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혜현이라면, 그놈한테서도 가장 긍정적이고 빛나는 어떤 부분을 찾아낼 게 뻔했다.
 너한테 필요한 건 키만 크고 얼굴이 여드름밭인 농구부 주장이 아니야. 매일 아침의 눈빛만 봐도 니가 매점의 서른여섯 가지 간식들 중 뭘 먹고 싶어하는지 아는 나라고. 승권은 농구부 주장보다 먼저, 혜현을 찾아야 했다. 농구부 애들이 저 질퍽한 운동장에 하트 모양으로 꽂을 초들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첫 교시가 끝나자마자 과학실로 향했다. 분명히 과학실에 있을 것이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혜현은 과학실 대리석 바닥의 냉기를 좋아해서 먼지 나는 커튼 아래에 늘어져 있는 습관이 있었다. 
 “조승권, 어디 가? 너 오늘 지각했지?”
 담임인 한문이 불러세웠지만, 승권은 못 들은 척 걸음을 빨리했다. 다리를 저는 사람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은 멈출 수가 없었다.
 “성혜현!”
 과학실 문을 열며, 혜현을 불렀다. 어째서 성까지 붙여서 이렇게 딱딱하게밖에 부르지 못하는가. 혜현은 없었다. 벌써 늦었나. 십대 소년이 느끼기엔 다소 짙은 절망, 그 절망의 단내가 입안에 돌았다.
 그때 뭔가 날카로운 것이, 따끔, 목 뒤에 박혔다.


 양호 선생이 핀셋을 들고 정체불명의 가시 같은 것을 빼냈다.
 “뭔가요?”
 이럴 시간이 없는데, 승권은 마음이 급했다. 목을 부여잡고 양호실로 오는 길에 농구부 1학년 애가 통기타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양호 선생은 승권의 목 뒤에서 빼낸 것을 잠시 확인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상처 자체가 큰 건 아니지만, 독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일단 소독을 해줄 테니, 조퇴해. 몇 반?”
 “2학년 1반이요.”
 “내가 너희 담임 선생님께 같이 가서 말씀드려줄게. 가자.”
 “아뇨, 그럴 거 없으세요. 저 지금 좀 급하게 볼 일이 있어서.”
 승권은 총알같이 양호실에서 튀어나갔다. 가시인지 뭔지를 뺏으니 되었다. 오늘은 선생들이 유난히 귀찮았다.  


 양호 선생 안은영은, 큰 사고 일어나지 않는 학교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오늘까지는.
 그녀는 2학년 남자애의 목에서 뽑아낸, 동물성 물질을 내려다보며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아이가 자지러질까 차마 말을 못했지만, 그것은 어떤 알 수 없는 동물의 손톱, 비늘, 뼈 중 하나로 보였다. 아까 남자애의 목 실핏줄을 타고 독이 퍼렇게 번져가는 걸 보았다. 분명 아주 나쁜 게 들러붙은 것일 테다. 소독이라도 했어야 하나. 하지만 어차피 알콜로 잡을 수 있는 보통 종류의 독은 아니었으니, 잠시는 괜찮겠지.
 이 학교에는 분명 뭔가가 있다. 발령 첫날부터 느낄 수 있었다. 안은영은 불행히도, 평범한 양호 교사가 아니었다. 그녀의 핸드백 속에는 항상 비비탄 총과, 무지개색 늘어나는 깔때기형 장난감 칼이 들어 있다. 어째서 멀쩡한 이십대 여성이 이런 걸 매일 가지고 다녀야 하나 속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안은영, 친구들에게는 늘 ‘아는 형’으로 불리곤 하는 털털한 성격의 사립 M고 양호 교사, 그녀에겐 이른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다.
 언제부터였나면, 원래 그랬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은영은 아주 일찍 그녀의 세계가 다른 사람의 세계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5학년 때던가, 엄마가 싼 값에 산 집을 리모델링한다고 좋아라 부엌 벽을 깨부수려 할 때, 힘껏 만류한 적이 있다. 이 구조 이대로가 좋다고, 리모델링을 하면 아빠 집에 가서 산다고 협박을 했다. 벽 속에는 아줌마가 있었다. 엄마가 알아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열두 살의 은영이 식탁에 앉아 콘플레이크를 말아먹을 때면, 벽 속의 아줌마는 조용히 웃으며 내려다보곤 했다.
 꼭 죽은 자들만 보는 건 아니다. 산 자들이 더 무서운 걸 많이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이 학교에 떠다니는, 공기 가득한 나체의 환영들. 아아, 정말 사춘기 애들은 싫어, 은영은 깔때기 칼로 휙휙, 아이들의 야한 상상을 휘저어 없앴다. 벌써부터 취향도 가지가지지. 그러니까 결국 은영이 보는 것을 일종의 엑토플라즘,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응집체다. 미색 젤리 같은 응집체. 죽은 것들은 의외로 잘 뭉치지 않는다. 산 것들이 문제다. 리비도가 넘치는 고등학생들, 지겨워.
 장난감 칼과 총에, 은영 본인의 에너지를 입히면 엑토플라즘 덩어리와 싸울 수 있었다. 비비탄 총은 하루에 스물두 발, 플라스틱 칼은 15분 정도 사용 가능하다. 이집트산 앙크 십자가와 터키의 이블 아이, 바티칸의 묵주와 부석사의 염주, 일본 사원의 건강 부적을 더하면 스물여덟 발, 19분까지 늘릴 수 있다. 양호 교사 안은영의 삶은 이토록 토테미즘적이다.
 몇 년 전까지는 대학병원에 있었다. 전문 퇴마사로 살지 않는 이상 돈을 벌어야 했고, 어쩌다보니 간호대에 붙어서 주욱 병원에 있었다. 참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병원이나 학교나, 사령과 생령들로 가장 골치 아픈 축인데 왜 하필 이런 직업을. 사회생활을 하며 느끼는 건데, 정말 사람이 직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직업이 사람을 고르는 거다. 사명이겠지 싶어 수긍한 지 오래지만. 어쨌든 3년차 간호사가 되자, 은영은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밤마다 병원 복도에서 기나긴 싸움을 하는 게 벅찼다. 그래서 대학 때 따놓은 양호 교사 자격증을 활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호러와 에로 중에 고르라면, 단연 에로다. 
 그런데 이 학교에, 에로에로 젤리들 말고, 학생들 목에 뭔가를 박는 사악한 무엇이 있다. 어쩐지 발을 들이는 순간 음습하더라니. 내 팔자야.
 가운 안에, 허리 뒤쪽으로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을 꼽고, 은영은 양호실을 나섰다.


 “그러니까, 마르고 안경을 쓰고 똑부러지게 생긴 남자애였어요. 걔를 조퇴시켜야 하는데.”
 2학년 1반 담임, 한문 과목, 홍인표는 지난 학기에 부임해 와서 아직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있는 양호 선생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직도 다른 층 선생님들은 양호 선생과 급식실 영양사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지난번 양호 선생은 너무 적응을 잘해서 양호실을 가십의 온상으로 만들었었는데, 이 젊은 선생은 주변머리가 너무 없다. 고2 남자애들이 다 마르고 안경 쓰고 그렇지, 누굴 찾는단 말인가.
 “불렀는데도 막 급하게 가버려서요.”
 아, 혹시 승권인가. 이 녀석. 평소엔 제법 성실한 놈이 오늘 왜 이러나.
 “걔가 많이 다쳤던가요?”
 “음, 많이 다친 건 아닌데, 뭐랄까, 뭐에 물린 거 같아서요, 좀 조심해야 할 거 같은데요. 집에, 큰 병원에 보냈으면 하고.”
 “뭐에 물렸는데요?”
 “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나빠 보여서……”
 이 여자, 영 미숙해 보이는데. 인표는 양호 선생에 대해 아버지한테 한마디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알았습니다. 제가 찾아서 보내지요.”
 그리고 돌아섰는데, 뒤에서 양호 선생이 불렀다.
 “한문 선생님, 다리, 다치셨어요? 제가 좀 봐드릴까요?”
 정말 하나도 모르는구나. 이 새로 온 양호 선생은 인표가 이사장의 아들인 것도, 어릴 때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저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끔찍한 사고였지만, 돌아보면 여러모로 운이 따랐던 것도 사실이다. 인표의 할아버지는 사립학교 재단뿐 아니라 큰 사업을 몇 개 굴리는 큰손이었고, 인표는 가장 사랑받는 손자였다. 그러다보니, 오토바이 한 대쯤은 몰래 살 수 있는 용돈을 받았고, 결국 큰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인표가 탔던 오토바이는 버스 아래 찌그러져 들어갔다. 그나마 버스가 전속력이 아니었던 게 다행이었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다가, 다시 짜맞춰졌다. 온몸에 철심을 꽂았다 뺐다 서른 번 정도 수술을 했고, 인생에서 1년 정도의 기억이 흐릿하다. 한쪽 다리가 사고 이후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아서, 지금처럼 되었다. 그래도 한쪽 다리를 저는 데에서 끝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몸은 물론 얼굴에도 흉터가 남긴 했지만, 수술이 잘되어서 다들 보조개인 줄 알았다.
 “가스파르 울리엘을 닮으셨네요!”
 어떤 정신 나간 맞선 상대 여자는, 웬 프랑스 배우를 가져다댈 정도였다. 검색해보니 꽤 잘생긴 배우라 기분은 좋았지만, 여튼, 흉터라고! 이런저런 상흔들을 되짚을 때면, 심란했다. 인표는 언젠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 용돈을 정말 조금 줘야지, 하고 늘 마음먹고 있었다.
 이사장 아들이면 보통 다들 아니꼽게 생각하고 재수 없어하기 마련이지만, 한적한 교과목을 맡은데다 다리를 저는 게 나이 든 선생님들의 모성애 및 부성애를 이끌어내서 교직 생활을 꽤 수월하게 하고 있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학교 건물 자체다. 인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오래된 도면을 펼쳐놓고 들여다보곤 했다. 해방 직후에 지어졌는데, 어째서 지하 3층까지나 있지? 게다가 쓰고 있는 건 지하 1층까지다. 창고 용도로 아주 일부만 쓰고 있다. 학생회에서 자꾸 지하층을 동아리 자치 공간으로 내달라고 조르는데, 인표는 어째선지 내키지가 않았다. 합당한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가 이사장이었을 때부터 지하층 입구를 동여매고 있는 저 쇠사슬들을 쉽사리 풀고 싶지가 않았다. 인표의 팔뚝만큼 굵은 쇠사슬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다른 재산 분배는 다 변호사에게 맡겨놓고 학교에 대해서만 인표와 인표의 아버지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학교를 계속 유지시켜라. 그 땅에는 학교 말고 다른 걸 세우면 안 된다. 건물도 다시 짓지 마라. 인표를 선생 시켜. 꼭 선생 해야 해.”
 그 유지를 받들어 선생이 되었건만,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신경을 써 지은 이 학교에선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아이들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십대 자살률이 워낙 높은 나라지만, 그래도 평균치를 웃돌았다. 폭력 사태와 가출, 임신도 너무 흔해서 어떻게 개선을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더 신경이 쓰였다. 승권이 녀석,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 몰라도 붙잡아 앉혀야겠다. 인표는 열심히 불편한 걸음을 옮겼다. 인표는 몰랐지만, 미혼 여선생들은 인표의 그런 걸음걸이가 왠지 유쾌하다고까지 생각했다. 마치 한쪽 다리가 짧은 게 아니라 다른 쪽이 더 길어서,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단순히 이사장 아들의 후광이면 어쩔 수 없고.


  혜현은 옥상에서 땡땡이를 치고 있었다. 며칠 말린 옷에서도 장마철의 큼큼한 냄새가 나서 간만에 교복을 입고 왔더니, 신축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합성 섬유라 기분이 더 불쾌했다.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옥상에 올라오니 그래도 바람이 불어 다행이었다. 학교에서는 안전을 이유로 옥상 전체에다가 높은 철조망을 쳐서, 풍경은 조금 흉물스러웠지만 철조망 사이로도 바람은 불었다. 옥상을 아예 봉쇄했을 때는 애들이 자물쇠를 깨고, 또 깼었다. 학교도 결국 포기하고 개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휴식공간이 이렇게나 부족한걸, 비록 직접 자물쇠를 깨지는 않았지만 혜현은 엷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언니, 아까 승권이 오빠가 언니 찾던데요?”
 동아리 후배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뭐 때문에?”
 “글쎄요.”
 또 나도 모르게 승권이 시디를 꿀꺽했나. 아니, 만화책인가. 만화책은 며칠 전에 조금 늦긴 했지만 다 반납했는데. 혜현은 잠시 스스로의 혐의점을 찾았다.
 “알았어. 고마워!”
 후배가 내려간 후 한참이 지나서도, 옥상을 내려가기가 싫었다. 습기가 가득한 건물 내부가 감옥처럼 느껴졌다. 숨을 못 쉴 정도잖아. 이 정도라면 아가미가 필요하다고.
 1층에서 농구부 주장이 손을 흔들었다. 혜현은 별생각 없이 마주 흔들어주었다.


 양호 선생 안은영은 아까의 한문 선생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에너지 장막에 감탄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매우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서도 강력한 의지를 남겼음이 틀림없었다. 그런 보호를 받고 있는데 왜 다리를 다쳤지? 희한한 일이다. 까칠해 보이는 남자였지만, 만약 사태가 심각해지면 도움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건 거의 걸어다니는 행운의 부적이잖아. 
 역시 처녀 귀신일까? 남자애의 목에 박혀 있었던 것은 손톱일지도 모른다. 하도 예상 외의 것들이 튀어나오는 세상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뭐든 간에 지하에 묻혀 있을 확률이 제일 높았다. 허리 뒤에 꽂아놓은 플라스틱 총칼을 확인하고, 은영은 중앙계단으로 향했다. 지하실 입구엔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학생회 애들이 지하 공간을 탐내고 있어서 일부러 막아둔 모양이었다. 은영은 수위실에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저씨, 저 지하 가는 열쇠 좀.”
 수위 아저씨가 허리춤의 열쇠 뭉치에 손을 얹으면서 물었다.
 “지하는 왜요?”
 “음, 애기들이 자꾸 곰팡이성 피부병이 생겨서요. 뭐 위험한 게 있나 확인을 좀 하려고요. 기왕, 랜턴도 빌려주시면 안 돼요?”
 “같이 가죠.”
 “아니에요, 바쁘신데. 문만 좀 열어주세요.”
 은영은 되도 않는 눈웃음을 쳤다. 곧 녹슨 사슬이 풀렸고, 오래 갇혀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나왔다. 은영은 이러다 자기야말로 병에 걸리겠다고 생각했다. 흡, 숨을 참고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지하 1층부터 쉽지 않았다. 졸업생들이 버리고 간 사념들이 좀 있었다. 폭력성과 경쟁심의 덩어리들, 오래된 반목과 불명예와 수치의 잔여물들이. 은영은 길게 한숨을 쉬곤, 손목 스냅으로 장난감 칼을 길게 폈다. 그리고 더러운 덩어리들을 베기 시작했다.
 
 승권은 어지러웠다. 양호 선생 말이 맞긴 맞았나보다. 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자꾸 초점이 맞지 않았다. 몇 번 안경을 뺏다가 다시 꼈다. 원래도 간지러운 고백 같은 건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상태라면 정말 앞뒤 다 자르고 좋아한다고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혜현이 옥상에 있다고 했다. 계단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세 배는 높은 것같이 여겨졌다.


 인표는 승권을 찾으러 체육관으로 가고 있었다. 항상 거기 있는 멤버는 아니지만, 가끔 머리를 식히러 운동을 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 파악이 아주 나쁘지는 않군, 스스로 흐뭇해하던 참이었다.
 중앙 계단을 지나치는데 지하실 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인표는 리드미컬한 걸음을 멈추었다. 저거, 누가 열라고 승인했지? 정비도 안 된 상태일 텐데. 안에 흔들리는 랜턴 불빛이 보였다. 수위 양반인가?
 ……양호 선생이었다. 웬 무지개색 깔때기를 들고 허공에 정신없이 젓고 있었다. 이상한 여자. 슬슬 불쾌할 정도다.
 “안 선생님, 뭐하세요?”
 은영이 깜짝 놀라며 돌아봤다. 그래, 놀라야 정상이지.
 “엇…… 운동요?”
 스스로도 저 말을 하면서 확신이 없는 게 분명했다.
 “무슨 운동을 지하실에서 하세요. 건강 안 좋게.”
 “보시다시피 신종 에어로빅인데, 학생들 볼까봐 민망해서요.”
 “그럼 댁에서 하셔야죠.”
 은영은 그러나 선뜻 지하실 밖으로 나올 기세가 아니었다. 인표는, 문득 은영의 진지한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어두운 곳에서 봐서 그런지 몰라도, 단호한 표정이 정신 나간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실에서 뭘 찾나요?”
 인표가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스스로도 짐작 못 하면서 물었다.
 “설명드리긴 어렵지만, 찾는 게 있어요.”
 은영이 웃음기 없이 대답했다. 직장이고 나발이고, 억지로 웃는 건 이제 질렸다고 생각하면서. 자르라면 잘라. 퇴마까지 할 수 있는 양호 선생이 흔한 줄 알아?
 “그럼 같이 찾읍시다.”
 인표는 어째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인표는 학교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왜 할아버지가 이 학교에 대해, 명문 사립도 아닌데다 부동산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부지에 대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이해하질 못했다. 어쩌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저 땅밑에 뭔가 특별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할아버지 댁에 가면 보물찾기를 종종 했었지. 할아버지는 인표가 가장 갖고 싶어하는 장난감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하게 맞춰 숨겨두곤 하셨었다.
 아무것도 안 나오면 저 정신 나간 양호 선생을 잘라야지. 


 혜현의 가는 손가락이 철망에 살짝 걸려 있었다. 투명 매니큐어가 반짝하고 그 끝에서 빛났다. 손톱 밑의 부드러운, 건강한 분홍색. 훈풍에 플레어 스커트가 살짝 부풀어올랐다 내려앉았다. 본인은 교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승권이 보기에는 하복의 플레어 스커트가 혜현만큼 어울리는 여자애는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애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어지러워졌다.
 저 즐거워 보이는 생물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안으로 삼키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아무도 모를 거라고, 승권은 다시금 확신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시는 이 타이밍이 오지 않을 거라고.
 “해파리.”
 혜현이 돌아보았다.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해파리라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정작 혜현은 돌아보는 순간, 어느 때보다 시원하게 웃었다.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을 때는 무표정했는데, 승권을 보자마자 그렇게나 풍부한 표정이 솟아났다. 승권은 그 눈만 봐도 혜현이 얼마나 자신을 반가워하는지 언제나 알 수 있었다.
 “나 또 뭐 까먹었어?”
 “아니, 그런 거 아냐.”
 “근데 왜 찾으러 다녔어?”
 “할 말이 있어서.”
 “헉, 너 얼굴이 왜 그래? 완전히 엉망이다. 아파?”
 승권은 손이 아주 차가운 걸 느끼면서, 엉망인 얼굴을 잠시 감쌌다. 차마 눈을 똑바로 보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혜현의 눈에 떠오른 반가움이 다른 감정으로 바뀌는 걸 목격하게 된다면……
 “누나! 주장 형이 잠시 운동장에 내려오시래요.”
 옥상 문이 벌컥 열리면서 1학년 농구부 애가 외쳤다. 혜현은 운동장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진창이 된 운동장에 하트 모양으로 초가 박혀 있었다. 아, 하고 긍정도 부정도 실리지 않은 가벼운 탄성을 내더니 혜현은 승권을 지나쳐 계단으로 갔다.
 “가지 마.”
 승권이 말했다.
 “괜찮아, 여기 있어. 금방 올게.”
 혜현이 건성으로 손을 흔들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괜찮기는, 대체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승권은 화가 나서 난간의 철망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목 뒤에 아주 강렬한 통증이 왔다.


 낡은 청소도구들이 몇 개 있던 지하 1층을 지나, 지하 2층으로 가자 온 바닥에 새끼줄이 널려 있었다.
 “운동회 때 쓰던 밧줄인가?”
 인표의 중얼거림에, 은영은 실소하고 말았다. 저건 어딜 봐도 금줄이잖아, 이 남자 정말 이런 쪽엔 감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군. 은영은 끊어진 금줄들을 실내화로 가볍게 걷어찼다. 누군가 이곳을 지키던 이가, 몇 년 전에 떠났다. 아주 방치된 상태로군.
 지하 3층 문을 열자, 엄청난 압력이 은영을 덮쳤다. 은영은 자기도 모르게 인표 뒤로 숨었다. 정확히는 인표를 감싸고 있는 보호의 기운 뒤에 숨은 건데, 인표는 은영이 무서워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픽 하고 비웃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바닥으로 내려섰다.
 가장자리는 시멘트였지만, 놀랍게도 중앙엔 흙바닥이 그대로 있었다. 오래된 흙 냄새가 났다. 흙바닥 가운데에는 납작한 돌이 하나 있었다. 인표가 은영의 손에서 랜턴을 빼앗아 돌을 비추었다.
 ‘압지석(壓池石)’이라고 해서로 새겨져 있었다.
 “흠? 땅 지(地)가 아니라 못 지(池)네. 여기 연못이었나?”
 인표가 잠시 기억을 되짚었지만 들은 바가 없었다. 연못이라는 말에, 은영은 흠칫하며 칼과 총을 더 단단히 쥐었다. 연못이 나와서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표가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저예요. 예…… 밥은 잘 먹었고요. 다른 게 아니라, 학교 부지 말인데요, 예전에 연못이었어요? 아, 큰아버지가 아신다고요…… 아버지는 모르세요? 큰아버지한테 문안 전화 드린 게 너무 오래되어서 이런 걸로 전화드리기 좀 민망한데…… 예, 알았어요.”
 인표는 다시 투덜거리며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여기 못이 있었다면서요. 다른 건 아니고 학교 설비가 워낙 낡아서 보수를 하려는데 지반을 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요…… 관련 자료가 있으시다고요? 옛날 지방지요? 그거라면 좋죠. 팩스 번호 넣어드릴게요. 예예, 큰아버지. 예, 건강하시고요.”
 은영은 숨이 막혔다. 탁하다 못해 몇백 년은 발효된 것 같은 엑토플라즘이 점점 두 사람을 향해 좁혀들어왔다. 뭐가 아래에 있는지 몰라도 은영 선에서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올라가는 게 좋겠어요.”
 “그러죠.”
 은영이 앞서 올라가고, 인표가 뒤따르는 듯싶더니 갑자기 뒤돌아섰다.
 “잠깐만요, 저런 돌은 꼭 뒷면에 뭐가 더 있던데.”
 은영이 말릴 새도 없었다. 인표가 으랏차, 하고 압지석을 뒤집었고 두 사람은 다음 순간 호흡을 빼앗길 정도의 광풍에 뒤로 나자빠졌다. 랜턴이 떨어지며 빛을 잃었다. 


 짧은 비명과 함께, 복도에서 아이들이 쓰러졌다. 맨살에 뭔가가 박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공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많은 아이들이 받긴 했지만, 모두는 아니었다. 잠시 쓰러졌다 일어난 아이들은 일제히 옥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말을 걸어도 전혀 듣지 않았다. 공격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이 심상치 않은 사태에 놀라, 그 아이들을 말려가며 옥상으로 따라가야 했다.
 이미 옥상에 있던 승권은 철망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운동장에서 그걸 목격한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혜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실내화를 벗어던진 양호 선생이 스타킹 바람으로 복도를 달려가는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쏜살같은 은영을 놓친 인표는, 일단 교무실로 향했다. 학교는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음 영역을 벗어나 내지르는 소리 속에서 뭔가 쓸모 있는 정보를 얻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상황이 아주 나쁜 것만은 확실했다. 지하에서, 뭔가 실수를 했다. 돌을 뒤집으면 안 되는 거였나? 그 정체불명의 양호 선생이 미리 경고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호봉은 낮지만 언젠가 이 학교는 인표의 학교가 될 것이고, 이미 많은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인표는 팩스 머신으로 다가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비록 영감 따위 하나도 없는 운 좋은 축이었으나, 동양 고전에 정통한 남자라면 기이한 현상을 맞닥뜨렸을 때 생각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법이다. 독촉 전화를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성격이 칼 같은 큰아버지는 벌써 팩스를 보내오고 있었다. 느린 팩스 머신에 분통이 터졌다. 이 사태가 해결되고 나면 팩스부터 바꿔야지.
 큰아버지의 친필로 간략하게 설명된 바에 따르면, 그 자료는 18세기의 지방지였다. 학교 부지에 대한 부분은 몇 줄 되지 않았지만, 옛 문서가 그렇듯이 마침표 하나 없는데다 팩스를 거치면서 흐릿해지는 바람에 맞게 읽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옛부터 이 연못은 정인을 잃은 젊은이들이 몸을 던지던 곳이었으나,
  (自古是池 夫失情人少者 以所投身)
 
  최근 그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而近者其數逐日增加)
 
  자살을 위장한 타살 시체가 버려지는 등의 폐단이 있다.
  (見打尸以自決僞飾 委棄於此 其弊已甚) 


  게다가 그 시신을 뜯어먹은
  민물고기와 두꺼비, 도마뱀 등이 살이 올라 극성이다.
  (又鮀魚蟾蜥 嘬其死體 肉附漸滋 其勢劇矣)


  그래서 관에서 명을 내려 흙으로 못을 메우게 했다. 
  (故 官府下命 使土沙塡其淵)


 아, 한문 선생이라서 다행이다. 동년배의 다른 과목 선생이라면 하나도 못 읽었을 거야. 역사 선생님 정도 읽었으려나? 인표는 전공 선택에 대한 뒤늦은 만족감에 잠시 빠졌다가, 다시 양호 선생을 찾으러 나섰다. 그 여자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사태를 막으려 뛰어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정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승권아, 그러지 마! 승권아, 승권아!”
 혜현이 외치기 시작했지만, 승권은 못 듣는 것 같았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예 혜현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갈게, 거기 있어, 내가 갈 때까지만 제발 거기 있어!”
 그러나 이미 승권은 일반 철망을 지나 가시가 있는 부분까지 이르고 있었다. 맨손으로 잡을 수 없을 텐데, 역시 크게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혜현은 운동장에서 계속 말을 걸어야 할지, 옥상으로 뛰어올라가야 할지 판단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2차로 땅울림이 있었다. 운동장의 하트 초가 한꺼번에 쓰러져 꺼졌다. 운동장 일부가, 학교 건물에서 가장 가까운 쪽의 땅이 아래로 푹 꺼졌다. 아니, 아래로 꺼진 게 아닌지도 모른다. 위로 솟구쳤나? 흙이 튀었다.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혜현은 승권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늦었다고, 눈이라도 감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난데없이 웬 막대기가 나타나 승권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승권이 뒤로 떨어졌다. 옥상 가장자리에 나타난 것은 신임 양호 선생이었다. 양호 선생은 철망을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다른 아이들도 열심히 후려쳐 기절시켰다. 고맙긴 한데, 애들을 저렇게 기절시켜도 되는지 좀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혜현은 얼른 옥상으로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은영은 참담한 심정으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흙을 헤집고 머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뭐의 머리인지는 여전히 잘 판단할 수 없었다. 물고기인 것도 같고, 개구리인 것도 같고, 뱀인 것 같기도 한 머리였다. 남자애 목에 박혔던 건 역시 비늘이었던 모양이다. 아주 흉측한 생물을 삶아서 더 흉측하게 만든 것 같은, 특히 눈이 구운 생선의 그것처럼 열에 익어서 변색되어버린 것 같은 형상이었다. 뭐야, 처녀 귀신은 전혀 아니었잖아. 그보다 훨씬 심각하고 거대한 무엇인데……
 칼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했다. 이제 7분도 채 남지 않았다. 총은 열 발도 채 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에게서 저 찐득한 덩어리를 일일이 털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체를 공격해야 한다.
 “꽉 붙잡아. 기어오르려는 애들, 붙잡고 있어!”
 정신이 나간 친구를 쫓아올라온 노멀한 상태의 아이들에게 은영이 당부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곧 죽자 사자 친구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철망 사이로 비비탄 총을 겨누었다.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재능을 타고나는 바람에 상당히 피곤한 삶을 유지해왔지만, 이제 그것도 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커다랗고 오래된 것과 싸워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대한 머리가 입을 벌렸다. 마치 옥상에서 떨어지는 아이들을 받아먹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은영이 첫 발을 쏘았다. 가벼운 비비탄총인데도, 어깨가 밀렸다. 왼쪽 눈을 겨냥했으나 살짝 빗나갔다. 거대한 머리의 아가미 부분이 터졌지만 그뿐이었다.


 달려 올라가는 혜현을 인표가 붙잡았다.
 “어디 가니? 무슨 일이니?”
 “옥상에요, 애들이, 단체로 뛰어내리려 했어요.”
 “혹시 양호 선생님은 못 봤니?”
 “옥상에 있어요. 양호 선생님이 애들을 막았어요.”
 인표가 혜현의 뒤를 따라 불안정한 걸음으로나마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간만에 충격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뛴 게 언제였더라.
 옥상은 학교의 다른 층보다 더 지옥이었다. 아이들이 기절해 있었고, 기절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다시 옥상 가장자리로 가려 하고 있어서 다른 아이들이 잡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철망 사이로, 양호 선생은 뭔가를 향해 장난감 총을 격하게 쏘고 있었다. 인표가 서둘러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엄청난 격발음이 들리긴 했다.
 “저,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원래 여기 있던 연못에 사람들이 뛰어들었었대요.”
 “알 거 같네요.”
 은영이 건성으로 대답해, 인표는 조금 민망해졌다.
 “귀신들을 쏘고 계신 건가요?”
 “아뇨, 알 수 없는 생물의 머리요…… 그보다 제 손 좀 잡아주세요.”
 “네?”
 “총알이 떨어졌어요.”
 은영의 입술은 거의 파란색이었고, 이미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인표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일단 총을 쥔 은영의 양손에 한 손을 포갰다.
 “양손 다요.”
 인표가 군말 없이 다른 한 손도 더했다. 은영은 아주 강력한 기운이 함께함을 느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이거라면 50발도 더 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50 발이 아니면, 아주 커다란 한 발.
 장난감 대포라도 샀어야 했나. 핸드백에 안 들어가는 건 싫은데. 뭐, 원리는 총이나 대포나 똑같으니까.
 “이 못생긴 새끼, 죽어!!!!!!!!”
 제정신인 아이들도, 아닌 아이들도 모두 귀를 막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폭발을 일으켰다. 젖은 흙이, 운동장이 통째로 터져 학교 밖으로 날아갔다.


 뉴스에는 M고 운동장에 매설되어 있던 가스관이 터졌으나,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보도가 나갔다. 머리가 죽을 때 가스관도 터지긴 터졌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날 보충 수업이 있었던 아이들, 특히 옥상에 있었던 아이들은 뭔가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인표는 학부모들이 항의해올 경우, 계절풍을 타고 강 건너 공단에서 환각 유발 물질이 날라왔다고 변명할 생각이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하긴, 고등학생들만큼 비이성적인 상황에 잘 견디는 존재들은 없다. 진정 국면을 맞고 나서, 은영과 인표는 왜 일부의 아이들에게만 모종의 현상이 일어났나 조용히 알아보았는데, 공격을 받은 아이들은 모두 최근에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실연을 경험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방학이 끝났을 때, 승권은 혜현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다. 제대로 된 고백은 결국 하지 못했는데도, 보충 수업 마지막 날 집에 가는 버스에서 혜현이 가만히 머리를 기대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냥 졸렸을지도 모르지만, 승권은 철망에 찢어진 손바닥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양호 선생 안은영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의 기행을 더 해야 했는데, 옥상에 있던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는 나쁜 소문이 따르고 말았다. 은영이 약간 맛이 갔는데, 이사장 아들인 한문 선생의 여자라 다들 봐준다는 소문이었다. 악의적인 소문이었지만, 은영이 싸우고 잡으러 다니는 나쁜 덩어리들은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자신도 그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점점 헷갈리게 되었다. 커다란 걸 잡아야 할 때면 어쩔 수 없이 한문 선생의 손을, 말 그대로 손 자체를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손을 잡는 사이가 되었으니, 점점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인표로 말하자면, 은영보다 훨씬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지하 3층이나 되는 공간 전부를 시멘트로 메워버렸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건물이 노후화되어 기반을 재보강한다는 것이었지만, 학생회 측에서는 자치 공간 관리가 귀찮아서 그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고 받아들였다. 독단적 이사장 아들로 소문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인표는 할아버지가 학교를 맡긴 이유를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할아버지가 알던 사람이 못에 몸을 던지기라도 했나 수소문해봤지만 별로 소득은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할아버지는 좋은 파수꾼이었고, 인표는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인표와 은영은 뭘 굳이 잡지 않아도 되는 날에도 가끔 옥상에 올라갔다.
 “엄청나게 나쁜 터를, 학교를 세워 누르려고 하셨던 걸까요?”
 인표가 진지하게 물었다.
 “에로에로 에너지는 생각보다 대단하니까요.”
 은영이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습관적으로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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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6
  • No Profile
    오오, 감격의 1등. 정세랑 샘 이번 소설도 잘 읽고 갑니다.
    간만에 탐이 나는 능력을 발견했네욤. 에로에로 에너지!
    양호 슨생님도 좋고 엄친아 아닌 엄친아 스타일일 것 같은 승권이도 좋지만
    특히나 소녀 혜현에게 푹 빠져버렸어요. ^^* 움하하.
  • No Profile
    SK 10.08.31 02:16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잘 봤어요 누나 ㅋ
  • No Profile
    정세랑 10.08.31 09:47 댓글 수정 삭제
    둘리님/ 오늘도 힘내서 에로에로 에너지, 하세요!!

    SK님/ 이름과 이미지를 빌려줘서 고마워요 : )


    여름 내내 호러물을 쓰고 싶어서 열심히 붙잡고 썼는데,

    늦여름에 거울에 짜잔, 하고 내야지 하고 썼는데,

    .............하나도 안 무서워요ㅠ_ㅜ
  • No Profile
    달로가자 10.08.31 10:35 댓글 수정 삭제
    호러 대신 단연코 에로라니! 캬하하. 적극 동의해요.
    양호 교사 캐릭터 넘 매력적인데요? 다른 작품에서 또 보고 싶은 인물이에요:D
  • No Profile
    벼리 10.08.31 10:45 댓글 수정 삭제
    아니! 습관적으로 손을 잡다니!
    공포소설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재밌을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게 상상하며 봤네요 ㅋㅋㅋ
  • No Profile
    Y 10.08.31 14:37 댓글 수정 삭제
    블록버스터 액션 판타지 호러 대러브로망 학원 청춘 괴수물! 다행이야 세랑이 영화감독이 아니라 소설가여서 ㅋㅋㅋ 재밌게 읽고 가~ :)
  • No Profile
    정세랑 10.08.31 15:29 댓글 수정 삭제
    달로가자 님/ 속편 쓰고 싶어요ㅎㅎㅎ 감사합니다.

    벼리 님/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Y 님/ 선배... 업데이트 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닌 거 너무 티나잖아요ㅋㅋㅋ


    하지만 전 신인이니까 트위터에도 계속 올리고 계속 여기저기 자랑하려고요!!
  • No Profile
    10.08.31 17:49 댓글 수정 삭제
    이런 재미있는 글은 맘껏 자랑하고 다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 이미 세랑님 팬
  • No Profile
    정세랑 10.08.31 22:48 댓글 수정 삭제
    권님, 전 신나면 마구 오버해버리는 단순한 성격이니까 칭찬해주시면 안 돼요 >ㅂ<
  • No Profile
    보라 10.09.01 02:18 댓글 수정 삭제
    와아 에로에로 에너지다 ^O^/

    게다가 습관적으로 손 잡아서 넘 좋아요 *_*
  • No Profile
    정세랑 10.09.01 10:48 댓글 수정 삭제
    보라님, 보라님처럼 강렬한 걸 쓰고 싶었는데 말예요ㅋㅋ 에잇, 에로에로ㅋㅋㅋ
  • No Profile
    임태운 10.09.06 19:02 댓글 수정 삭제
    아이고, 재밌네요. 청량캔디를 입에 삼켰을 때처럼 즐겁게 읽었습니다. 단물을 빨다보니 다 녹아버렸네요.
  • No Profile
    정세랑 10.09.07 13:20 댓글 수정 삭제
    청량캔디라니, 정말 멋진 말씀 해주셔서 기뻐요!! 다음번에는 더 오래가는 사탕 맛으로 뵐게요!!
  • No Profile
    울라리 10.09.09 16:13 댓글 수정 삭제
    악!! 재밌어요!!
  • No Profile
    fx? 10.09.09 16:14 댓글 수정 삭제
    에로에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어요~
  • No Profile
    정세랑 10.09.10 10:48 댓글 수정 삭제
    울라리님/ 악!! 감사해요!!

    fx?님/ 에로에로!!! 비 오는 날 힘내세요!!
  • No Profile
    날개 11.01.10 07:21 댓글 수정 삭제
    와, 오컬트에, 달달한 로맨스에, 멋진 구성까지. 제가 좋아하는 요소들을 모두 갖춘 단편이네요. 정말 멋집니다. 감동해서 눈물이 날 지경. 잘 읽고 갑니다!!
  • No Profile
    초록 11.01.11 20:12 댓글 수정 삭제
    읽은 건 예전인데 다시 읽고 뒤늦게 덧글 답니다:)
    아유, 다시 봐도 정말 좋아요. 재미있고 유쾌하고 경쾌하고 즐겁습니다!ㅎㅎ
  • No Profile
    정세랑 11.02.09 13:33 댓글 수정 삭제
    날개 님/ ㅋㅋㅋ이거 장편으로 다시 쓸려고요!!!! 히히히히. 올해 정진하여, 날개 님이 좋아하시는 풍의 좀더 긴 이야기로 뵐게요!!

    초록 님/ 캄사합니다!!! 해를 지나서 달리는 리플이라니 저도 엄청 즐거워요!!!!
  • No Profile
    11.02.15 19:12 댓글 수정 삭제
    재밌네요. 그거 하나면 충분하죠? 정말 잘 쓰셨네요.

    한 번 영화같은 걸로 만들어도 될 지도?

    정말 재밌어요!
  • 님께
    No Profile
    찰리 20.09.15 14:25 댓글

    그게 사실이 되었습니다 ㅋㅋ 2020년 9월 25일 넷플릭스 첫 방송

  • No Profile
    정세랑 11.02.24 17:28 댓글 수정 삭제
    우왕 캄사해요!! 영화계 분들에게 좀 찔러주세요ㅋㅋㅋㅋ
  • No Profile
    소심이 11.05.09 20:37 댓글 수정 삭제
    맙소사...
    치즈달님이 이렇게 등장하다니ㅋㅋㅋ

    잠깐, 그러면
    손가락 자르기, 이빨 뽑기보다 위험한 일도 당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 No Profile
    정세랑 11.05.18 09:11 댓글 수정 삭제
    음.... 치즈달이는 꽤 성했잖아요!!

    주인공이 된다는 건 여러 위험을 감수하는 거지, 뭘!!

    각오를 다져라!!
  • No Profile
    aydks 11.10.26 13:37 댓글 수정 삭제
    이거 정말 좋네요... 뭐가 좋은지 잘 설명을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읽고 나서 마음이 훈훈하고 포근해졌다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
  • No Profile
    정세랑 11.10.27 16:19 댓글 수정 삭제
    aydks님, 감사해요! ㅎㅎㅎ 살폿 말씀드리자면, 장편으로 다시 쓰고 있어요ㅎㅎ 언젠가는 좀더 긴 이야기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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