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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영생불사 연구소

2010.11.27 01:0011.27


 “나, 아무래도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라고 선배 언니가 털어놓은 것은 두 달 전, 기념식 준비가 한창이던 무렵이었다. 사연인 즉슨 웬 남자가 연구소로 전화해서 자기는 아무개라고 하는 사람인데 언니와 동향 출신이라 무척 친한 사이이고 국회의원 후보라면서 언니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똑똑한 접수처 직원은 ‘무척 친한 사이’라면서 휴대전화 번호도 모르는 것부터가 수상쩍은데다 난데없이 국회의원 후보를 들먹이며 사기성이 다분히 짙어보이는 공약까지 읊어대자 지금 자리에 안 계시고 휴대전화 번호 같은 개인정보는 본인 허락 없이 알려드리기 곤란하다는 말로 딱 막아버렸다. 그래도 예의상 전하실 말씀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다시 걸겠다고 했는데 그 말만은 진담이라서 지금 수시로 ‘나중에 다시 걸어’ 언니의 거취를 묻는 통에 접수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는 것이다. 뭐 평소 같으면 사실 마비될 업무 자체가 별로 없고 한가하고 태평하기 그지없는 곳이 이 연구소, 그 중에서도 특히 접수처이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까 모두들 행사 준비로 바쁜데 모처럼 해야 될 업무라는 것이 있을 때 하필 이런 종류의 귀찮기 짝이 없는 전화가 끈질기게 걸려오면 곤란하단 말이지.
 우리 연구소가 뭐하는 곳이냐 하면 제목에 쓴 그대로 영생불사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한일강제병합 얼마 후인 1912년에 “일제가 망해도 우리만은 영생불사”라는, 일말의 진실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유치찬란해 보이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설립되어 올해 98주년을 맞이한 관계로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르게 되었다. 어째서 90주년도 95주년도 100주년도 아닌 98주년이라는 애매모호한 숫자에 맞추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고 선배들도 모르고 아마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한 이사님들도 잘 모르실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야 그저 기념식 한다면 하는 줄 알고 시키는 일이나 꾸역꾸역 하는 거지 말단이 별 수 있나.
 말단이긴 하지만 직급이 농간을 해서 그래도 직함만은 과장인데 알고보면 연구소 전체가 직급 뻥튀기가 돼버려서 맨 위가 이사님들이고 그 휘하에 부장이니 차장만 수두룩하니 과장인 내가 제일 막내라 내 밑으로는 일반 사원은 고사하고 대리도 한 명 없다. 게다가 연구소인데 어째서 선임 연구원이나 책임 연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일반 회사처럼 이사니 과장이니 부장이니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 역시 시키면 하는 거고 명함 파주면 받는 거지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뭐 거기까지는 좋은데, 특히 월급 받을 때 좋은데, 문제는 일반 사원이 하나도 없으니까 사원급에서 할 만한 온갖 잡일이 이름만은 과장이고 사실상 말단인 나한테 떨어진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진 첫 번째 잡일이 뭐였냐 하면 영화배우 ㅂ씨를 섭외해 오는 것이었다.
 이 영화배우 ㅂ씨는 누구냐 하면 사실은 얼굴도 잘 생기고 연기도 잘 해서 무슨무슨 상도 꽤 타고 이름도 많이 알려진 사람인데 우리 연구소나 98주년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 하면 아무 관계도 없다. 다만 까마득한 옛날에 배우로서 막 알려지기 시작하던 무렵에 불로장생에 관한 판타지 영화에 출연한 적이 한 번 있다는데 영화는 흔적도 없이 쫄딱 망해서 지금은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 제목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주연배우들에게도 아마 경력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오점으로 남아 있겠지만 어쨌든 불로장생이니까 기념식에 맨 무슨 의사니 박사니 교수라는 사람들만 오는 것보다는 영화배우 같은 유명인도 하나 껴 있는 쪽이 좀 덜 딱딱하고 연구소의 위상을 생각해서도 그럴 듯해 보이지 않겠나 하는 것이 ㅂ씨를 불러오자는 취지였다.
 취지는 좋았는데 이런 기획이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 나오자마자 만장일치로 통과될 리는 물론 없고 게다가 이사님들 휘하 부장님들 차장님들 모두 다 자기 나름대로는 영생불사 분야의 전문가이다 보니까 불로장생과 영생불사가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개념적인 차원에서 싸움이 한 번 붙었더라는 것이다. 불로장생은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고 영생불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인데 ‘오래’와 ‘영원히’는 과연 같은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당연히 ‘영원히’가 ‘오래’보다 훨씬 오래 지속된다. 그러므로 불로장생은 영생불사보다 저급하며 그러므로 저급한 불로장생 따위를 다룬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를 관계자 자격으로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 불러올 수는 없다는 것이 반대파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충실하여 엄격하게 ‘영생불사’만을 다룬 영화를 찾아봤더니 우리 나라에선 찾기 힘들고 다 미국영화밖에 없는데 할리우드에 연락해서 휴 잭맨 같은 사람을 부른다고 그 사람이 영생불사 연구소 98주년 같은 걸 기념해서 한국까지 와 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휴 잭맨이 출연한 영화가 과연 영생불사에 대한 영화인지 환생에 대한 영화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니고 평행우주에 대한 영화인지 거기에 대해서도 한동안 논란이 오갔는데 이 문제를 판별하기 위해서 영화를 틀었더니 이사님들 모두 십오 분쯤 보다가 코 골면서 잠들어 버려서 논쟁은 다분히 허무하게 일단락되었다.) 그럼 차선책으로 러시아 영화가 세 개짜린가 시리즈가 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뭐 흥행에도 대단히 성공하고 도저히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의 큰 상도 받았다지만 연구소에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 제안도 역시 물 건너 가 버렸다.
 그리하여 영화배우 ㅂ씨다. 차장님도 아니고 부장님도 아니고 심지어 이사님도 아니고 무려 소장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호출을 하시는 바람에 잔뜩 쫄아서 달달 떨면서 찾아갔더니 포스트잇에 대충 적은 메일 주소와 전화 번호를 불쑥 내밀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런 유명 영화배우 같은 사람은 일정이 빡빡할 테니까 미리미리 연락을 해서 못을 박아둬야 한다, 이미 한번 비서실에서 연락을 해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까지 들었으니 여기 그 유명 영화배우의 매니저 연락처로 자네가 한 번 더 연락해서 확답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연락할 때 읊어야 할 대사까지 지정을 해 주셨다. 가로되 모 “대형 제약회사” 부설 연구소의 아무개 “과장”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지난 번에 말씀드렸던 98주년 기념 행사에 꼭 좀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십사, 이렇게 공손하지만 확실하게 얘기를 하라는 명령이었고, 특히 “유명 대형 제약회사”인 본사 이름과 “과장”이라는 직함을 강조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래도 과장 정도 되는 사람이 전화를 했으면 어느 정도 예우는 해 주고 있다는 걸 그 쪽에서도 이해할 테고, 특히 대형 제약회사 이름을 거론하면 광고라도 한 번 출연시켜 주려니 하는 생각에 그쪽에서도 거절하진 못하리라는 설명이었다.
물론 그 과장이라는 사람이 본 연구소에서는 최말단이니 알고보면 예우 따위 없고 그저 잔심부름일 뿐이며 우리는 본사가 아니고 본사 부설 연구소인데 당 연구소는 광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기념식에 오거나 말거나 광고를 주고 안 주고는 연구소와 전혀 별개로 본사 마음이라는 사실을 ㅂ씨가 알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시키는 일이니까 나는 열심히 연락을 했고 결과적으로 깨끗하게 씹혔다.
 전화를 서른 여덟 번 하고 문자 메시지를 스물 두 통 보내고 죽도록 공손한 메일도 열 다섯 통이나 써서 보냈는데 아무 답변도 없으니 처음에는 초조하다가 그 다음에는 화가 나다가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록 최말단이고 앞으로도 영생하고 불멸토록 승진 가능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날 이 때까지 어떻게든 근근이 버텨왔는데 이제 와서 회사 업무도 아니고 연구 실적도 아니고 난데없이 무슨 영화배우 매니저라는 사람이 전화를 안 받는다는 따위의 이유로 허무하게 전격 잘려버리면 앞날이 막막한 건 둘째치고 억울해서 어떡하냔 말이다.
 이런 걱정을 하면서 연구소 로비에 앉아서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그래도 한 번만 더 전화를 해 볼까 말까, 전화는 안 받으면 자존심 상하니까 대신 메시지라도 한 번만 더 보내볼까 말까 궁리하던 참이었다.
 “저기, 혹시 ㅈ부장님 사무실이 어딘지 아십니까?”
 남자는 말투도 깍듯하고 목소리도 점잖고 게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는지 당최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남자가 다시 물었다.
 “ㅈ부장님 사무실이 몇 층인지 혹시 아십니까? 저는 ㅈ부장님과 동향 출신으로 국회의원 후보인 박혁세라고 합니다만….”
 그 이름을 듣자마자 아하 네가 바로 그 스토커로구나,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꿀꺽 삼켰다. 그런데 올라오는 말을 한 번 그렇게 삼키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잠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으니까 남자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ㅈ부장님과는 고향에서 어린 시절부터 아주 친한 사이이고, 사실 저는 이 연구소와도 인연이 좀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서 나라의 발전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주신다면 국민 모두가 영생 불사하는 나라를 만들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영생불사 연구소 또한 이 나라 최고의 연구 기관으로….”
 국민 모두 영생 불사? 오래 살다 보니 별 해괴한 공약을 다 듣는다. 그러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까 허황된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귀가 쫑긋하여 끝까지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영생 불사를 실현하실 건데요?”
 저 허무맹랑한 공약에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관심을 보여준 사람은 아마 세기를 넘나든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겠지. 남자는 신이 나서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여 떠들기 시작했다.
 “21세기는 뭐니뭐니해도 과학 기술의 시대가 아니겠습니까? 발달된 과학 기술을 집약시켜 태양 광선을 응축해서 지구를 향해 발사하는 방법으로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부활시키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이 방안은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에서 연구되어진 방법인데 당시에는 실용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졌으나….”
 연구가 됐으면 된 거고 생각도 된 거면 된 거지 ‘되어진’은 또 뭐냐. 한국어 문법에도 맞지 않는 저런 이중 피동형을 남발하는 사람은 일단 신뢰하지 말자는 주의지만 남자는 말을 막을 새도 없이 계속해서 떠벌였다.
 “물론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 이미 백골화가 상당히 진행되어진 조상님들의 경우 부활이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최근에 돌아가셔서 시신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분들의 경우는 부활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어집니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부활시켜 영생 불사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도 조상을 숭배하고 전통을 소중히 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도 맞닿아 있을 뿐더러,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되살려서 함께 영생불사하는 것은 인구를 일정하게 유지 및 증가시키는 한 방안으로도 사용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의 심각한 저출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활용되어질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집니다….”
 공약의 황당무계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 문장에 두 번 꼴로 튀어나오는 저 ‘되어진’을 도저히 더 이상 참고 들어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이쯤에서 끼어들어 말을 막았다.
 “저기, 죄송하지만 저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ㅈ부장님께는 찾아 오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빠져나가려는 내 의도와는 관계 없이 ‘사무실’이라는 말을 듣자 남자는 갑자기 반색을 했다.
 “아, 사무실로 가시나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ㅈ부장님이 오늘은 자리에 계시나보죠?”
 “아뇨, 언니, 아니 참 ㅈ부장님은 지금 외근 나가고 안 계시는데….”
 남자의 얼굴이 반색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어두워졌다.
 “아, 오늘도 안 계십니까?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어딜 그렇게 다니시나요?”
 “그게요….”
 다급해진 김에 여기서부터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저희 연구소가 조금 있으면 창립 기념식을 하게 돼서요, 영화배우 ㅂ씨를 기념식에 섭외해야 되는데 영 연락이 안 돼서…. 그래서 지금 그 배우 소속사 사무실에 계속 찾아가서 협상하시는 중인데, 잘 안 되나봐요….”
 “아, 그렇습니까?”
 거짓말인데 남자의 얼굴이 쓸데없이 진지해졌기 때문에 나는 좀 겁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째서 협상이 잘 안 되어지는 겁니까? 돈 문제인가요? 아니면 일정?”
 “저기, 저도 잘은 모르지만….”
 사람이 점점 더 다급해지면 원래 입에서 터무니없는 소리가 튀어나오게 마련이지만, 이 경우는 저 얼토당토않은 위치에서 또 등장한 ‘되어진’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러니까 저기, 언니가 처음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요, 그 영화배우한테 ‘선생님’이라고 하질 않고 누구씨, 라고 했다나봐요…. 그래서….”
 “아니, 그런 당치 않은 문제로 기념식 초청을 거부한단 말입니까?”
 남자가 이번에는 쓸데없이 화난 표정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방금 했던 말을 주워담고 싶은 심정이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까 남자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보죠. 그럼 ㅈ부장님은 지금 그 배우의 소속사 사무실에 가 계시는 거죠?”
 “예….”
 물론 선배 언니는 현재 연구소 4층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서 영생불사와 상관없는 기념식 관련 업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배우의 소속사 사무실이 어딘지는 나도 모르고 연구소 관련자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내 대답을 듣고 남자가 만족하며 인사하고 가 버렸기 때문에 나도 한시름 놓았고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생각이 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선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국회의원 후보라면서 그 도저히 믿어줄 수 없는 공약을 내걸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선배 언니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던 그 남자가 실제로 국회의원 후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게도, 실제로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어진’ 것이다.
 물론 남자가 국회의원이거나 말거나 가만 생각해보면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하고도 상관이 있는 결과가 나타났으니, 바로 선거 끝나고 일주일 뒤에 영화배우 ㅂ씨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뜻밖에도 기념식에 기꺼이 참석하겠으니 장소와 일시를 알려달라는 이야기였다. 전화 건 사람은 아마도 내가 서른 여덟 번 전화해도 받지 않았던 그 문제의 매니저인 것 같은데 ‘기꺼이’ 참석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몹시도 기껍지 않은 목소리였다. 나는 왠지 절박해져서 전화기에 대고 이유없이 굽신거리며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고 찾아오시는 길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매니저는 나 같은 사람하고 그다지 길게 말 섞고 싶지 않다는 투로 그럼 그 날 뵙겠다고 하고는 딸깍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일방적인 전화 끊김을 당한 것이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도 어쩐지 꿈만 같아서 나는 전화가 끊어진 후에도 한참이나 수화기를 들여다보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국회의원으로 실제로 당선된 그 선배 언니의 스토커가 내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사실 따지고 보면 100%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오로지 언니를 위하는 마음에 국회의원 당선이 되자마자 영화배우 ㅂ씨부터 시작하여 그 매니저와 소속사 사무실과 심지어는 소속사 사장에게까지 스토커다운 근성을 발휘하고 국회의원으로서의 권력도 좀 행사하여 온갖 협박과 회유를 끈질기게 퍼부은 끝에 그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ㅂ씨만은 목숨 걸고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드리겠다는 맹세 비슷한 걸 받아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영문도 모르고 그 뻣뻣한 매니저한테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굽신거린 것이 좀 억울해지기는 했다. 서른 여덟 번 전화해서 씹힌 끝이었고 무엇보다 평생 처음 국회의원을 뒤에 업고 있었으니 좀 더 거만하게 나가도 됐었을 텐데.
 하여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삐그덕삐그덕하면서도 기념식 준비는 어떻게든 진행이 되어 갔다. 영화배우 섭외건이 무사히 마무리되었으니 그 다음으로 나한테 떨어진 일은 행사 초청장과 포스터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걸 내가 맡게 된 이유가 뭐였냐 하면 별다른 설명 없이 ‘너 글 좀 쓰게 생겼다’인데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뭐 새까만 말단 주제에 위엣 분들 하시는 말씀에 토 달 수 없어서 그냥 예, 하기는 했지만 나중에야 뼈저리게 깨달은 바 초청장이나 포스터는 외부에도 배포되는 상당히 중요한 자료인데다 종이에 찍힌 글자가 물증으로 남으니 잘 만들어봤자 본전이고 뭐 하나라도 틀어졌다가는 그야말로 개망신이 되는 골치아픈 작업이더라는 것이다. 권한이라곤 콩알만큼도 없는 처지에 그런 책임만 막중한 일을 떠맡았으니 이건 뭘 어떻게 해도 어디선가는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일거리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초대하는 글”을 써서 올리라고 해서 또 시키는 대로 끙끙거리면서 죽도록 공손하게 초대하는 글을 써서 올렸다. 올린 글은 이사님들 사이를 돌아돌아 소장님한테까지 올라갔다. 소장실에서 이런 지시가 떨어졌다.
 - 초대하는 “글”을 초대하는 “말씀”으로 바꿔라.
 그래서 바꿨다. 다시 올렸다. 그러자 A 이사님에게서 이런 지시가 떨어졌다.
 - “초대하는” 말씀을 “초대의” 말씀으로 바꿔라.
 그래서 바꿨다. 그러자 B 이사님에게서 이런 지시가 떨어졌다.
 - 초대의 “말씀”을 초대의 “글”로 바꿔라.
 이건 바꿀 수가 없었다.
 “이사님, 그건 소장님 지시대로 바꾼 건데요….”
 “아, 그래? 그럼 그대로 두게.”
 그리고 약 3분 20초 후에 이번에는 C 이사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초대의” 말씀을 “초대하는” 말씀으로 바꿔라.
 뭐 대충 이런 식이었다. 그리하여 초대하는 말씀인지 초대의 말씀인지 그거 가지고 이사님들 ABCDEFG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제목을 지나 본문까지 들어가는 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본문으로 넘어가서도 첫 줄부터 연구소 “설립”이냐 “창립”이냐를 가지고 논쟁이 오가다가 결국 소장실에서 “창설”로 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나서야 다음 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참고로 저 초대하는 말씀은 A4 용지 반 장 분량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좀 귀찮기는 해도 이사님 정도 되시는 분들이 나같은 새까만 말단이 하는 작업에 단어 하나까지 일일이 신경을 써서 응대를 해 주신다는 게 고맙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초대의”와 “초대하는”과 조사 혹은 동사어미 빼고 그냥 “초대”와 “초청의”와 “초청하는”과 기타등등 사이를 열댓 번쯤 오가고 나니까 나중에는 저 “초대하는 말씀”을 입에 물고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말단이라는 게 원래 상사 A는 하라고 하고 상사 B는 하지 말라고 하면 하면서 동시에 하지 말아야 하는 처지인 것을. 아무리 내 본업이 영생불사 연구하는 사람이고 초대의 글이 됐든 초청의 글이 됐든 글쓰는 건 전공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단 연구소에 직원으로 이름 걸고 월급 받아 먹고 사는 입장이니 시키는 건 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저 초대의 글만 해도, 이사님들 사이를 골백번 왔다갔다하긴 했지만 내가 직접 고치는 작업이라 귀찮기는 해도 마음은 편했다. 나중에 실제로 초청장과 포스터를 디자인해서 시안을 내서 통과가 돼서 인쇄를 해야 하는 단계가 왔을 때 정말로 죽어난 것은 디자이너였다.
 이 디자이너는 본사 거래처에 내가 아는 사람의 언니의 남편의 사촌동생의 고등학교 동창이니까 사실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사이인데 포트폴리오도 보지 않고 무작정 묻지마 의뢰를 한 것은 일단 급했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영화배우 ㅂ씨를 섭외하느니 마느니, “초대의 글”인지 “초대하는 글”인지 “창립”인지 “설립”인지, 이런 쓸데없는 일로 이사님들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결론도 나지 않는 회의에만 불려다니다 보니까 어느덧 한 달이 훌렁 지나가 버렸고, 그리하여 어쨌든 간에 영화배우 ㅂ씨 문제만큼은 깔끔하게 해결이 되었고, 그러고 정신차려 보니까 기념식이 어느 새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관계로, 포스터는 몰라도 초청장만이라도 한시바삐 찍어다가 기념식에 초청해야 할 귀빈들에게 우선적으로 돌려서 공사다망하신 분들께 미리미리 오신다는 확답을 받아내야만 하는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사 거래처의 아는 사람이 자기 언니에게 연락하고 그 언니가 남편에게 말하고 그 남편이 사촌동생에게 물어보고 그 사촌동생이 오래 된 수첩이니 옛날에 쓰던 전화기의 전화번호부 같은 걸 싸그리 뒤져서 디자이너의 연락처를 알아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또 그렇게 해서 그 사촌동생이 다시 그 언니의 남편에게 연락해서 그 남편이 언니에게 말해서 그 언니가 거래처의 내 아는 사람에게 답을 해 주기까지도 시간이 그만큼 걸렸기 때문에 나는 금요일에 디자이너에게 전화해서 다음 주 월요일에는 죽어도 인쇄를 넘겨야만 하기 때문에 이번 주말 내로 시안을 완성해 주셔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 이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디자이너는 시안을 완성해 주었다. 그것도 금요일에 전화했는데 토요일에 완성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훌륭해서 이대로 인쇄 넘겨도 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소장님 및 이사님들에게 시안을 돌렸다. 그것이 토요일 저녁이었다.
 일요일 오후까지 아무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전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일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 이사님 F: 연구소 로고를 조금만 왼쪽으로 옮겨라.
 옮겼다.
 - 이사님 G: 연구소 로고를 조금만 위로 옮겨라.
 옮겼다.
 - 이사님 D: “초대의 말씀”을 왼쪽 정렬해라.
 정렬했다.
 - 이사님 A: “초대의 말씀”을 오른쪽 정렬하고 연구소 로고를 오른쪽으로 옮겨라.
 정렬하고 옮겼다.
 - 이사님 C: “초대의 말씀”을 “초대하는 글”로 고치랬는데 왜 안 고쳤냐.
 그 “말씀”은 소장님 선에서 지시를 받아 처리했다고 보고한 게 언제인데 이 사람은 왜 지금 와서 뒷북인가. 그러나 이사쯤 되는 사람에게 “너 뒷북”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또 구구절절이 설명을 드려야만 했다.
 - 이사님 E: 배경 그림을 없애라.
 없앴다.
 - 이사님 A: 배경 그림 좋은데 왜 없앴냐. 도로 넣어라.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다.
 연구소 로고 위치나 본문 정렬 같은 건 대충 포토샵 등으로 내가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배경 그림은 없애려고 했더니 본문과 로고까지 싸그리 사라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요일 저녁인데 디자이너에게 전화를 해야만 했다. 마음씨 착한 디자이너는 고쳐 달라는 대로 일일이 다 고쳐 주었는데 여섯 번째 전화했을 때 조심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제 생각에는 내일 인쇄소 가서 넘길 때까지 계속 이렇게 수정 요청이 들어올 것 같은데요…. 매번 이사님들 전화받고 다시 저한테 전화하시느니 아예 저희 작업실로 오시겠어요?”
 그래서 나는 오밤중에 디자이너의 작업실로 출동을 했다. 작업실은 아늑하고 향 좋은 원두커피도 있고 무엇보다 보들보들하고 애교 넘치는 고양이가 두 마리나 있어서 상당히 행복한 환경이었지만 불쌍한 디자이너는 삼 분에 한 번씩 걸려오는 전화를 쩔쩔 매면서 받는 나를 지켜보면서 또 삼 분에 한 번씩 로고를 왼쪽으로 옮겼다 오른쪽으로 옮겼다, 본문을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렸다 하는 삽질을 밤새도록 되풀이한 끝에 동이 터올 무렵에 창문으로 비쳐드는 희미한 햇살을 받으며 지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저기, 설마 연구소의 모든 업무가 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죠?”
 그렇게 묻는 디자이너의 창백한 얼굴과 벌겋게 핏발선 눈을 보면서, 나야 연구소에 밥줄을 건 죄로 무한정 노력봉사를 하고 있지만 디자이너만은 작업료를 두둑히 받아다 주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런 삽질은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고 덤으로 5대 일간지에 광고를 내자는 제안을 어느 부장님인가가 마지막 순간에 이사님들 결재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소장실에 올렸는데 그 제안이 전격 소장님 마음에 들어버린 관계로 월요일 새벽 세 시에 전화가 와서 아침 아홉 시까지 신문사에 광고를 보내기로 했으니 늦어도 여섯 시까지는 시안을 제출하라고 하는 바람에 잠자는 디자이너를 신새벽에 두드려 깨워서 세 시간 내로 광고를 만들어 보내달라고 했더니 진짜로 두 시간 사십 분만에 시안을 두 개나 만들어서 보내줘서 그 중 하나가 무사히 소장실 오케이를 받고 5대 일간지의 제 1면은 아니고 8면쯤에 실리기는 했는데 이따위 상세한 사정은 얘기해봤자 나만 속터지므로 이쯤에서 생략하겠다.
 내가 불쌍한 디자이너를 괴롭히면서 이런 삽질을 거듭하는 동안 다른 부장님과 차장님들은 그럼 마냥 놀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또 절대로 아니고 그 분들도 그 나름대로 눈물겨운 고생의 과정이 있었다. 뭐냐 하면 본사와 제휴해서 기념식 전후로 영생불사에 관한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인데 본사와 제휴하자는 발상은 물론 본사가 아니라 우리 연구소 측에서 나온 이야기이므로 본사에서는 행사 지원금 줬으면 됐지 뭘 또 귀찮게 구느냐는 투로 별 관심도 없었고 그래서 장소 섭외부터 시작해서 전시 물품 확보하고 그렇게 확보한 전시 물품을 짐 꾸려서 전시 장소로 옮겨서 다시 짐을 풀어서 일일이 진열을 해서 전시다운 전시를 완성하기까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산너머 산이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국내 유수의 대형 제약회사 부설 연구소의 부장이니 차장쯤 되는 사람들이 이런 막노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어이가 없지만 이 역시 어쩌랴,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연구소는 일반 사원급이 전혀 없는데다가 유일한 최말단인 나는 디자이너 작업실에 처박혀서 본문과 로고를 오르내리는 삽질에 매달려 있었고, 대형 제약회사 부설이기는 해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연구소이기 때문에 영업을 하거나 이익을 내는 기관이 아니다 보니까 본사에서 던져준 얼마 되지도 않는 행사 지원금을 쪼개 쓰는 서글픈 처지라서 용역 같은 걸 고용할 돈이 정말로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연구소 임직원 전원, 에다가 덧붙여서 괜히 말려든 디자이너까지 관계자 모두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기념식과 기념 전시회가 드디어 개최되는 날이 왔다. 초청장과 포스터와 5대 일간지에 낼 광고는 물론 기념식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다 완성되었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기념식 이틀 전에 있었던 전시회 개막 준비를 도우러 갔다가 ㅈ부장님, 그러니까 스토킹을 당하던 선배 언니를 만났다. 같은 연구소 4층에 있으면서도 각자 기념식 준비에 시달리느라 눈코뜰 새 없다가 오랜만에 마주쳐서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나는 가장 걱정되던 스토킹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의외로 언니는 이제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 그 사람 알고 보니까 우리 쪽 사람이었어.”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는 웃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구나?”
 뭐가 기억이 안 난다는 건데? 내 표정을 보고 언니가 설명해 주었다.
 “그 사람 옛날에 우리 연구소에서 잠깐 일했었어.”
 설마?
 “진짜야. 아마 너 들어올 무렵에 그만뒀던 거 같은데, 그래도 한두 달 정도는 같이 다녔을 걸. 정말로 기억 안 나?”
 내가 들어올 무렵이면 정말로 오래 전 얘기다. 하지만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얼마 안 돼서 그만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렇게 얼굴이 낯익어 보였던 걸까?
 “그러면 언니하고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것도 사실이에요? 스토킹은 왜 했대요?”
 “응, 정말로 동향 출신이야. 가만 생각해 보니까 아주 어렸을 때 산도 같이 오르고 그러다가 호랑이도 만나고 그랬어.”
 “그럼 그 황당무계한 선거공약은 뭔데요?”
 내가 여전히 미심쩍어하면서 묻자 언니는 웃으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거 19세기 후반에 러시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론이야.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무슨 철학자라는 사람이 주장해서 당시에는 상당히 센세이션이었나봐. 지금도 러시아에 그 철학자를 숭배하는 사람이 꽤 많대.”
 태양 광선을 응축해서 죽은 조상 부활시켜 영생불사라니, 그런 허황한 이론을 그냥 믿는 것도 아니고 숭배 씩이나 한다는 게 사실이라면 러시아라는 나라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내 표정을 보고 언니는 다시 웃었다.
 “그 사람, 연구소 다닐 때부터 좀 코메디같은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생불사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거든. 다만 그걸 연구 차원이 아니고 현실 수준에 적용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우리랑 좀 갈린 거지. 그래도 이번에 98주년이라 기념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나봐, 이 참에 찾아와서 오랜만에 아는 사람들도 좀 만나고 자기가 혹시 뭐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해서 들렀다는 거야.”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를 할 것이지, 꼭 이 선배 언니 한 명을 지정해서 그렇게 집요하게 따라다닐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언니는 아무래도 마음이 완전히 풀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도움이 됐잖아? 그 문제의 영화배우도 결국 그 사람이 섭외해줬고, 이번에 전시회 하면서 외부 강사 초빙했는데 그것도 그 사람이 주선해줬어.”
 “외부 강사는 뭐하러 초빙해요?”
 “의학, 종교, 철학의 관점에서 본 영생불사에 대해서 3부작으로 특강을 한다나 봐.”
 그 정도면 우리 연구소에 있는 부장님이나 차장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또 다시 생각해 보니까 따로 돈도 안 주면서 특강을 세 번이나 시키면 귀찮으니까 외부 강사 부르는 쪽이 훨씬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선배 언니가 안심한 것 같았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은 걱정하지 않기로 했고, 마침 점심 시간도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충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또 이틀이 별 탈 없이 흘러서 마침내 기념식 당일이 되었다.


 기념식은 저녁 여섯 시였지만 행사장에는 아침부터 사람이 북적거렸다. 전시회장 겸 기념식장으로 쓰려고 본사 지하에 있는 전시실을 빌렸는데 평소에는 해가 잘 안 들어서 어둠침침하고 왠지 기분나쁜 곳이었지만 전시 관계로 조명을 환하게 켜놓고 여러 사람이 와글거리니까 그런 대로 활기찬 분위기가 되었다. 특히나 영화배우 ㅂ씨가 나타났을 때는 과연 기념식장 분위기가 일변했다. ㅂ씨 자신은 별로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선배 언니의 스토커이자 현직 국회의원인 박혁세씨가 나타나 악수를 청했을 때 뭐 씹은 표정으로 손을 내미는 그 얼굴을 보자 어쩐지 기념 행사를 준비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행사장에서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가 인상적인 늘씬한 미녀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ㅂ씨처럼 영화배우이거나 연예계 관계자인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국회의원 박혁세씨가 초빙한 특강 강사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국회의원 박씨는 강사 선생님 옆에 가서 말도 걸고 어떻게든 편하게 해 주려는 것 같았지만, 정작 강사 선생님 본인은 행사가 지루하고 모르는 사람들만 우글거리는 것이 불편한 것 같았다. 전시장 안을 왔다갔다 하기는 했지만, 전시회에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전시 자체는 상당히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전시를 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영생불사 관련 품목으로 저 넓은 전시실을 다 채울만한 물건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했으나 막상 전시 준비가 끝나고 나서 보니까 그림이라든가 사진, 책, 영화 DVD 등 전시 품목은 의외로 다양했다. 물론 무명 화가의 그림으로 제목만 ‘불멸’이라고 붙여놓고 대체 뭘 그린 건지 알 수 없는 추상화 같은 것도 몇 점 있었지만, 종교적인 영생이나 부활 등을 모티브로 한 미술품이나 조각품부터 진시황과 불로초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DVD까지 (불로장생이나 영생불사나 그게 그거니까 영화배우 ㅂ씨를 불러오자고 주장했던 모 이사님의 개인 소장품이다) 제법 화려하게 전시실을 채운 진열품들을 둘러보자니 생명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런 집착이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 새삼 숙연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 불쌍하기도 하고 뭐라 말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책이나 CD, DVD 등은 전시장 한쪽에 책장을 따로 설치해서 공개해 두었고, 나는 그 옆에서 연구소 로고를 예쁘게 박은 한정판매 약병에 “불사약”을 담아서 기념품 삼아 한 병에 오천 원 받고 판매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돈이 없는 관계로 기념품 판매까지 우리가 직접 했다.)
 “이거 설마 진짜 불사약은 아니죠?”
 내가 묻자 옆에 함께 앉아서 기념품을 팔던 차장님이 웃었다.
 “전체 천 오백 병 중에서 두 병 정도는 진짜일 걸.”
 “그래도 사람들이 이거 진짜 불사약이라고 믿고 사는 건 아니겠죠?”
 “요즘 세상에 불사약 같은 거 믿겠냐? 다들 본사 관계자 아니면 거래처 사람들이니까 예의상 사 주는 거지.”
 ‘예의상’이라고는 해도 약병에 붙은 기념행사 로고가 꽤나 귀여웠던 덕분인지 (불쌍한 디자이너는 로고를 상하좌우로 옮기면서 또 다시 사흘 밤을 샜다) 행사 당일 아침부터 팔린 약병만 삼십만 원 어치 정도 되었다.
 “그래도 잘 팔려서 다행이네요.”
 “잘 팔려야지, 이거 팔아서 기념품 제작 원가 막고 디자이너 작업비까지 줘야 되는데.”
 나는 놀랐다.
 “디자이너 작업비를 아직까지 안 줬어요?”
 차장님은 대답 대신 기념식장 바깥쪽을 가리켰다. 지하 전시실로 들어오는 입구에 케이터링 회사 직원들이 분주하게 행사 만찬 세팅을 하고 있었다.
“본사에서 나온 얼마 되지도 않는 지원금 다 먹어 없앨 기세다. 이 약병 이거 재고 남는 동안은 계속 팔 테니까 디자이너한테는 그 때 그 때 돈 모이는 대로 작업비 분납한다고 그래.”
 그리고 차장님은 주섬주섬 판매수익 모아놓은 봉투를 열더니 천원짜리와 오천원짜리를 세기 시작했다.
 “자, 여기 이십 구만 팔천원 있으니까 일단 입금해주고, 나머지는 또 내일 팔리는 대로 계산해서 줄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차장님은 진지했다. 살면서 그 때만큼 난감했던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더구나 약병 값은 하나에 오천원인데 이십구만 ‘팔천원’은 어디서 나온 숫자인지 차장님은 끝내 설명해주지 않았고, 나도 무서워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흘러 저녁이 되었고, 그리하여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식은 예상대로 지루했다. 본사 관계자 및 전 소장님들이 줄줄이 단상에 올라와서 “우리 연구소 가족 여러분….” 어쩌고 하면서 정말로 영생불멸토록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축사를 한도 끝도 없이 읊어댔고, 그런 본사 관계자나 소장님들한테 꿀리지 않을 정도 짬밥이 되는 소위 ‘귀빈’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졸았다.
 마침내 이사님들의 인삿말까지 차례로 끝나고 나자 현직 소장님이 듣던 중 반가운, ‘자 이제 로비로 자리를 옮겨서 만찬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선언을 했고, 졸고 있던 내외 귀빈들은 전원 일시에 벌떡 일어나서 우르르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부장님과 차장님들까지 모두 나간 뒤에 내가 행사장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문은 닫기만 하고 잠그지는 않았는데, 전시장 열쇠를 가진 사람이 나 하나였기 때문이다. 기념식 관계로 연구소 직원들이 전부 행사장에 동원되었고, 그렇게 동원된 직원들의 소지품은 행사장 구석에 한 군데 모아 놓았다. 이럴 때 문을 잠그고 가면 누군가 자기 소지품이 필요해졌을 경우 내가 밥 먹다 말고 일일이 따라가서 문을 열어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도 만찬회장에 가서 눈치껏 얻어먹었다. 음식은 본사 지원금을 다 쏟아부은 만큼 꽤나 훌륭했고, 제법 질 좋은 와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술이 있다고 해서 나 같은 막내가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잔 따라다가 구석에 숨어서 몰래 홀짝거리고 있었다.
 “자네가 초청장 맡았던 김과장인가?”
 뒤에서 누군가 불쑥 묻는 바람에 나는 입안에 머금었던 와인을 그대로 뿜을 뻔했다.
 “예? 아, 예….”
 “초청장 참 잘 나왔더군. 수고 많이 했네.”
 나는 조금 으쓱해졌다.
 “아, 그거야 제가 한 게 아니고 디자이너가….”
 “그런데 말이야.”
 A 이사님은 내가 끝까지 문장을 마치기도 전에 주위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초대의 말’씀’인데, 말’쑴’으로 잘못 나왔더군.”
 “예?”
 이사님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초대장을 꺼내 펼쳐서 문제의 오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모르는 내 얼굴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눈에 잘 안 띄니까 괜찮아, 어쨌든 초청장은 예쁘게 잘 나왔으니까…. 애썼네.”
 그리고 A 이사님은 다른 귀빈들을 접객하기 위해서 가 버렸다.
 이후 나머지 이사님들 중 다섯 명이 차례로 구석에 서 있는 내게 다가와서 똑같은 순서로 똑같은 말을 내용만 바꿔서 되풀이했다. 자네가 초청장 맡았던 김과장인가? 초청장 참 잘 나왔더군.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창’설’이 창’선’으로 잘못 나왔어. ‘왕림하시어’가 ‘왕립하시어’로 잘못 나왔네. 자리를 ‘빛내’가 ‘빚내’로 잘못 나왔던데. 그래도 눈에 잘 안 띄니까 괜찮아, 어쨌든 초청장은 예쁘게 잘 나왔으니까….
 그리하여 이 위로인지 욕인지 모를 오타 지적을 여섯 번에 걸쳐서 들은 끝에 마지막으로 D 이사님이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 다가왔을 무렵에는 완전히 주눅이 들어 버려서, D 이사님이 김과장 너 나 좀 따라와, 라고 했을 때는 드디어 짤리는구나, 라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한 뒤에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따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D 이사님은 전시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 앞에서 내게 물었다.
 “열쇠 있나? 문 좀 열어봐.”
 “아, 저기, 안 잠겼는데요….”
 “그래? 그럼 좀 따라와 봐.”
 그러자 D 이사님은 문을 덜컥 열더니 또 성큼성큼 걸어서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불을 켜려고 하자 D 이사님은 필요 없다고 말리더니 깜깜한 전시실을 그대로 가로질러 가장 안쪽 구석으로 들어가서 책장 앞에 서서는 말했다.
 “김과장 너 나 좀 엄호해.”
 “예?”
 엄호를 하다니 지하 전시실에서 사격이라도 하실 예정인 건가, 라고 생각했으나 되물을 틈도 없이 D 이사님은 서류 가방을 열더니 진시황과 불로초에 관련된 DVD 시리즈를 아무렇지도 않게 책장에서 꺼내서 가방에다 쑤셔넣었다.
 “F 이사 이 xxx, 불로장생하고 영생불사하고 같은 거라고 헛소리나 지껄이고 말이야…. 방송국 같은 데 얼굴이나 팔고 돈이나 받아 챙겨먹는 데 재미나 붙이고, 그러고도 네가 연구자냐…. 디비디가 나왔으면 나한테도 증정본 하나쯤은 줘야 될 거 아냐….”
 D 이사님이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가운데 등 뒤에서 왠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나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버렸다. 이사님은 DVD 다섯 장을 순서대로 집어서 서류 가방에다 꽉꽉 채워넣더니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예의 그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 깜깜한 전시실을 가로질러 빠져나갔다. 나도 그 뒤를 허겁지겁 따라 나갔고. 그리고 전시회장을 나가서 로비에 들어선 순간 만찬회장에 괴한이 침입했기 때문에 기념식은 아수라장이 되면서 끝났다.
 이 괴한은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면서 한 손에는 다리미를, 다른 한 손에는 어쩐지 의류용 탈취제로 보이는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만찬회장에 난입하여 행사장에 있던 사람들을 마구 밀치면서 뛰어 다녔는데, 기념 행사가 거행된 것이 하필 금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본사 경비원들이 모두 퇴근하거나 식사하러 가고 없어서 제압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본사 지원금을 전부 쏟아부은 귀중한 음식들이 모조리 쏟아지고 흩어지는 가운데 (행사 준비 때문에 그 날 아침부터 본사 지하에 갇혀서 제대로 밥을 못 먹은 관계로 내 눈에는 이런 것만 보였다) 괴한은 잘 들어보면 ‘하고 싶어어어어!!!’처럼 들리는 말과 함께 사람 이름 같은 것을 외치면서 날뛰었는데, 그 이름이 또 가만 들어보아하니 국회의원 박혁세씨가 초빙해온 외부 강사 선생님 이름 같았기 때문에 모두들 강사 선생님을 찾기 시작했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이에 한편 본사와 우리 연구소 직원 중에서 용자들이 나서서 제압을 시도했으나 괴한이 워낙 천방지축이라 쉽지 않았다. 누군가가 경찰을 불렀지만 도착한 것은 한참 뒤였고, 그 사이에 본사 직원 하나가 기지를 발휘하여 위층에 올라가서 마취제와 주사기를 들고 왔고 (본사는 어쨌든 제약회사였던 거다), 약병과 주사기를 본 괴한은 더욱 흥분하여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들고 있던 탈취제까지 마구잡이로 뿌리며 뛰어 돌아다녔고, 문제의 본사 직원은 어찌저찌하다가 괴한에게 붙잡혀서 거꾸로 번쩍 들린 채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한 상황에서도 정말 요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각도로 마취약이 든 주사기를 괴한의 엉덩이에 꽂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경찰이 왔을 때쯤 괴한은 전시장 로비에 대자로 쓰러져서 코를 골고 있었다. 경찰 다섯 명이 달려들어 인사불성이 된 괴한을 (들고 있던 다리미와 의류용 탈취제와 엉덩이에 꽂힌 주사기까지 포함) 끙끙거리며 끌고 나갔고, 기념식이고 뭐고 만장하신 귀빈들은 다 뿔뿔이 흩어져서 서둘러 집에 갔고, 괴한이 나타난 건 불운이었지만 덕분에 행사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났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은근히 만족했는데, 다음날인 토요일 아침에 참고인 진술을 하라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말 내내 경찰서에 들락거려야만 해서 몹시 불행했다.
 괴한이 주장하기를 자신은 국회의원 박혁세씨가 초빙했던 그 외부 강사 선생님의 남자친구인데 최근에 자기 여자친구가 ‘키 크고 잘 생긴 남자’와 바람이 난 것으로 의심되어 수상쩍게 여기던 차에 요 며칠 행사 특강을 빌미로 연락도 잘 안 되고 하여 미행을 하다가 문제의 ‘키 크고 잘 생긴 남자’와 함께 어떤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만 눈이 뒤집혀서 따라 들어와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강사 선생님은 처음에는 괴한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가 점차 둘이 아는 사이라는 증거가 드러나자 전 남자친구라고 정정했지만 괴한이 입만 열면 ‘하고 싶다’고 들이대는 바람에 헤어져서 현재는 만나지 않는다고 해명하면서 다만 문제의 다리미와 의류용 탈취제는 자기 소유이니 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증거물이라서 돌려받을 수 없었다. 한편 강사 선생님을 초빙해온 국회의원 박혁세씨 측에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는데, 참고로 국회의원 박혁세씨는 그런대로 잘 생기기는 했으나 특별히 키가 큰 편은 아니며 무엇보다도 괴한 측에서 얼굴을 보고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문제의 ‘키 크고 잘 생긴 남자’가 과연 누구인지는 미궁 속에 묻혔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가고 월요일이 되었고, 연구소 창설 98주년 기념 전시도 철수해야 했고, 그리하여 연구소 직원 모두 동원되어 본사 지하실에서 짐을 싸다가 마침내 F 이사님의 DVD 시리즈가 홀랑 사라졌다는 사실이 발각이 된 것이다.
 괴한이 난입한 사건에 필적할 만한 대소동이 벌어졌다. 전시 품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풀어헤쳐 다 뒤졌고, 그러는 데 한나절이 소요되었다. 그 한나절이 지나고 전시품목을 싸그리 뒤집었는데도 DVD 시리즈가 발견되지 않자 CCTV를 확인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본사 지하실 같은 데 CCTV가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혼비백산하여 결사반대했으나 DVD는 비록 무료 배포한 증정품이기는 해도 굳이 가격을 따지자면 한 장에 근 이만원 꼴로 다섯 장짜리 시리즈면 합계 십만원 수준의 고가품이었고 이것을 도난당한 F 이사님께서 지금은 다시 구할 수도 없는 귀중품이라고 펄펄 뛰면서 워낙 강경하게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셨기 때문에 본사 보안실의 고압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서 결국 테이프를 가져다가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테이프에는 화면 가득 내 얼굴이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D 이사님이 F 이사님의 DVD를 훔치는 걸 뒤에 서서 망보고 있던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천장에 붙어서 깜빡깜빡하는 조그만 빨간 불꽃이 사실은 CCTV였던 것이다. 전시장 내부 조명을 전부 꺼놨다고는 하지만 지하층 로비는 만찬 관계로 불이 환하게 밝혀진 데다 전시장 입구 문이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로비의 불빛이 새어 들어와서 흐릿하기는 해도 안이 전부 보였다. 게다가 나는 멋도 모르고 깜빡이는 불빛을 따라 감시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으니 꼼짝없이 증거가 남아 버린 것이다. 아래에서 카메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데다가 주위가 어둠침침해서 얼굴의 잡티가 하나도 안 보였기 때문에 하필 이런 화면에 소위 ‘얼짱각도’로 찍혀버린 것이 곤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흐뭇해서, CCTV 화면을 보면서 나는 어쩐지 웃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F 이사님을 비롯하여 부장님과 차장님들의 눈총을 받아 가면서도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한편 정작 남의 소장품을 훔친 D 이사님은 내 어깨에 가린 데다 움직이는 중이라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불운이라면 나한테는 불운이었지만 또 어찌 보면 다행이었고, 나는 이사님들끼리 싸움 붙여봤자 나 자신을 위해서나 연구소 전체를 위해서나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등 뒤에서 DVD를 훔치는 사람이 누구인지 끝까지 불지 않았다.
 … 그리고 내 어깨 너머, DVD를 훔치는 중인 D 이사님 옆, 화면 구석에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또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 얼굴 같았는데, 그 자리에 모인 관계자들은 도난 사건의 공범일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 희끄무레한 형체가 공범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실 관계를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F 이사님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본사 보안실에 의뢰하여 당해 화면을 확대했더니 (미국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이런 최신 기술이 본사 사무실에 구비되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 화면 한구석에는 손을 꼭 잡고 겁에 질린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영화배우 ㅂ씨와 문제의 미녀 외부 강사 선생님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영생불사 연구소의 98주년 기념 행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F 이사님의 DVD 시리즈를 훔친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나만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실컷 욕을 먹었다. 문제의 DVD 시리즈는 방송국에서 한정품으로 만들어서 제작 관계자들에게만 무료로 배포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F 이사님 말씀대로 어디 가서 돈 주고 구해올 수도 없는 품목이라서 그냥 욕만 잔뜩 먹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그 뒤로 F 이사님은 나랑 마주칠 때마다 표정이 구겨졌지만 그렇다고 뭐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국회의원 박혁세 씨도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다. 내 생각에는 아마 그 미녀 강사 선생님과 어떻게든 잘 해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하필이면 자기가 직접 섭외한 영화배우 ㅂ씨와 예상치 못하게 다리만 놓아준 셈이 되고 보니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미녀 강사 선생님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배우 ㅂ씨는 요즘 어쩐지 활동이 부쩍 뜸해진 느낌이다.
그 외에도 인터넷에서 언뜻 본 어떤 기사에 의하면 ㅂ씨의 집 앞에 예의 다리미와 이번에는 어쩐 이유에선지 usb 케이블로 보이는 물건을 든 괴한이 나타나서 대문을 두드리고 발로 차면서 ‘키 크고 잘 생긴 놈들은 다 죽어야 해’ 혹은 ‘하고 싶어’ 등속의 의미 없는 내용을 목청껏 외치다가 경찰이 나타나자 도망쳤다고 한다. 괴한은 검거되지 않았지만 대문이 찌그러진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고 ㅂ씨 측에서도 그다지 강력하게 검거해줄 것을 요망하지는 않는 듯해서 사건은 이후로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나도 여전히 흐지부지 영생불사 연구소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새까만 말단이 무려 이사님의 소장품을 훔치는 데 공범이 되는, 대담하다면 대담하고 멍청하다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실책을 저지르고도 잘리지 않는 이유는 연구소라는 곳이 원래 철밥통이라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연구소 사람들은 모두 다 비밀을 안다. 그 비밀이 뭐냐 하면 우리는 진짜로 영생불사한다는 사실이다.
 1914년에 태어나서 만 스무 살 되던 1934년에 영생불사 연구소, 당시에는 ‘장생약방’에 막내로 입사하여 어쩌다가 실수로 불사약을 먹고 영생불사의 몸이 된 이래 나는 이제까지 쭉 이 연구소에 몸담아 왔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연구소를 나가서 달리 갈 곳도 없고, 무엇보다도 늙지 않고 죽지 않는데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떠나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자신도 없다. 소장님을 위시하여 연구소의 모든 임직원이 나와 똑같은 이유로 어떻게든 연구소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소장님이 했던 축사대로 모두 가족이다. 회사는 그만두면 끝이고 친구는 절교하거나 연락이 끊어질 수도 있지만, 가족은 그만두거나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설립 당시에 주장했던 대로 일제가 망해도 우리는 영생불사했고, 아마 세상이 망해도 우리는, 우리만은 언제나 서로 단단히 얽힌 채 계속해서 영상불사할 것이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서 위안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관계가 생계와 연결될 때는 더더욱 안정적으로 느껴지겠지. 그러나 연구소 로비에 잠시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일하러 올라가기 전에 나는 어쩐지 무섭고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지고 가야 할 먹고 사는 걱정, 밥줄에 대한 집착이 무섭고, 그 집착이 앞으로 198주년, 298주년, 398주년…이 지나도록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하여 나는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연구소라는 곳에 발목 잡힌 채 끝없이 허덕여야 하리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슬프고 무서웠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영생불사를 하건 안 하건, 자기 생계를 자기 손으로 벌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와 같은 처지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딱히 위안이 되는 건 아니지만.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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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0.11.29 13:46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이중피동 쓰는 사람 싫어요! ㅋㅋㅋ 그런데 두 개 들어 있는 진짜 영생불사약은 누가 먹었는지 궁금해지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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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10.11.29 16:05 댓글 수정 삭제
    저도 궁금해요;;; 그리하여 2020년쯤에는 주인공도 드디어 (근 백년만에) 막내 신세를 벗어나 후임이 들어오지 않을까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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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1.29 17:11 댓글 수정 삭제
    영원히 막내...인건가요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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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10.11.29 23:10 댓글 수정 삭제
    그래도 영생불사하다 보면 언젠가는 막내신세 벗어나지 않겠습니까... 아아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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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영 10.12.14 00:11 댓글 수정 삭제
    그나저나 거울 덧글에 답글 기능 좀 달아주세요.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연수 작가의 캐비닛이 생각나더군요. 똑같이 연구소고 뭔가 특이한 곳이고 하는 소재가 비슷해서 그런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정말로 영생불사를 한다는데, 왜 그런 약을 내놓지 않는 거죠? 내놓으면 대박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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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10.12.14 18:41 댓글 수정 삭제
    그게 말입니다 영생불사약을 물론 내놓으면 대박이겠지만 한 번 먹어서 영생불사하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어떤 약도 전혀 팔리지 않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본사인 제약회사로서는 엄청난 타격..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게 될 테니까 함부로 내놓을 수가 없겠죠.

    김연수 작가님 그 작품은 모르는 작품인데 그런 유사점이 있다니 재미있네요. 기회 되면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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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영 10.12.17 09:57 댓글 수정 삭제
    실수... 김연수 작가님이 아니라 김언수 작가의 캐비닛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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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10.12.22 16:32 댓글 수정 삭제
    이사님 ABCDEFG ... .... 다 어디 몰아넣고 발차기 한 번 날려드리고 싶네요. 100년간 말단에 밥줄집착이라니 끄윽끄윽... 엉엉엉...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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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10.12.23 00:17 댓글 수정 삭제
    앗 이다님 읽어주시다니 막 감사합니다;;; 근데 울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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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라 10.12.24 13:57 댓글 수정 삭제
    - '팔천원'은 진짜 영생불사약 DC해서 파셨나...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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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10.12.24 23:26 댓글 수정 삭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치만 연구소 자금인데 맘대로 DC해서 팔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흥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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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생각 10.12.27 04:44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읽었습니다. 디자이너에게 잔금이 온전히 지급되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읽으면서는 과장과 디자이너가 정분나는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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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10.12.27 14:10 댓글 수정 삭제
    과장과 디자이너가 정분이라니 진정한 치정을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_+ 그래도 잔금은 어떻게든 제대로 지급되었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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