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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왕의 창녀

2009.09.25 23:4309.25

    왕은 독재자였다.
    그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왕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 돈도, 명예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나 자존심도 - 아낌없이 바쳤다. 왕은 이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여 그 왕국의 국경 안에 거하는 자 누구에게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왕의 명령 한 마디에 재산과 신분과 가족과,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겼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왕의 지하 감옥은 언제나 죄 없이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독한 고문 속에 천천히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감옥의 창문 밖으로 왕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행복해하며 기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왕은 그런 광경을 즐기기 위해 무작위로 사람들을 잡아와서 가둬두고, 괴롭히고, 죽였다.
    나는 그런 왕의 자문 위원이었다. 낮 동안, 공식적인 나의 임무는 내정에 관한 모든 사안에 있어 국왕을 보조하고, 질문에 답변하고, 때에 따라 필요한 조언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왕은 나를 침전으로 불렀다.
    그것은 욕정과 수치심으로 얼룩진 더러운 중독이었다. 왕의 곁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려오면, 몸과 마음은 머릿속의 의지와는 반대로 움직였다. 가슴이 뛰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마치 쇠가 자석에 끌리듯 그렇게 오감이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그러나 순간의 쾌락이 지나간 후 그가 배설한 욕정의 냄새를 온몸에 휘감고 침전을 나와 등 뒤로 문을 닫으면, 나에게 남는 것은 또 다시 그의 노리개가 되었다는 모멸감뿐이었다.
    물론 왕의 장난감은 나 하나가 아니었다. 나라 안 모든 여자들이 왕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모든 여자들 중에서 왕의 입맛에 맞을 만한 여자들을 골라 궁으로 데려오는 일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적어도 다른 여자들이 왕의 침전에 있을 때만은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끌림에 저항할 필요도 없었고, 욕정에 잡아먹히거나, 그 순간이 지나간 후의 자괴감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왕의 품에 다른 여자가 안겨 있는 모습을 보아야만 할 때는, 또 다른 종류의 모멸감이 찾아 들었다 ‐ 그것은, 나 또한 왕에게는 수많은 장난감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상기하고 싶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마음 한편으로 다음번에 왕이 침전으로 부를 때를, 나만을 부르는 그 때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렇게 기다리는 나 자신을 경멸했다.
    성년을 맞이하자마자 궁에 들어온 이후로 내 인생에서 자유로웠던 때는 단 한 번, 잠시 나라 밖으로 나가 해외의 문물을 수학하던 때였다.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왕의 기이한 힘은 국경 밖으로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단 한 번이라도 국경을 벗어나 생각과 행동의 참된 자유를 맛본 사람들은 언제나 그 때를 그리워했다.
    반역의 씨앗은 그런 자유의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오래 전, 외국에서 수학하던 그 시절에 만난 친구였다. 내 나라 사람도 아니고, 그곳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온 고관대작의 딸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진위를 알 수 없이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함께 정치와 외교를 공부했지만, 그녀는 무술과 군사학 쪽에 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 내 나라로 돌아와서 궁으로 들어온 지 몇 년이나 지난 뒤에, 나는 또 다시 바람결에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수소문했다. 그녀가 마침 이 나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 놀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숙소로 은밀히 찾아갔을 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왕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했다.
    “왜, 어려워?”
    내가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녀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머릿속으로 한동안 뭔가 헤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답했다.
    “해 볼게. 기한은?”
   
    그녀가 나를 만나러 궁으로 찾아오기로 했다. 왕은 새로운 여자가 눈앞에 나타나면 무조건 흥미를 보였으므로, 그녀를 접근시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왕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상냥하게 웃으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는 왕의 눈에는 전부터 익히 보았던 탐욕의 표정이 떠올랐다. 외국에서 수학하던 시절의 친구이며, 나를 만나기 위해 놀러 왔다는 말에 왕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었다.
    “그래? 과인이 총애하는 신하의 친우라면 또한 이 궁의 귀한 손님이기도 하다. 오래 오래 마음 편하게 쉬다 가도록 하라.”
    그녀는 다시 한 번 웃으면서 허리를 굽혔다.
    왕은 어전에서 물러나 숙소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런 왕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사라진 후, 왕은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외국 출신으로, 신분 높은 집안의 뛰어난 인재라는 소개를 듣고 왕은 말했다.
    “다시 한 번 궁으로 불러라.”
    그리고 왕은 잠시 생각한 후에 덧붙였다.
    “내 오래 전부터 외국의 언어와 문물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처럼 뛰어난 인재가 찾아왔다니 좋은 기회로구나. 궁에 머무르면서 내게 자기 나라의 말과 풍습을 가르쳐줄 수 있다면 융숭히 대접하겠노라고 전해라.”
    그렇게 말하며 나를 쳐다보는 왕의 눈빛이, 가시가 되어 마음에 박혔다.
   
    왕의 명을 전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왕을 조심해야 한다. 그의 눈앞에 서면, 의지를 빼앗기게 된다. 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은 자는 이제까지 모두 그와 사랑에 빠져 꼭두각시가 되었다….
    “너도?”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하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특별히 너를 찾은 것은, 네가 외지인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사람들 중 왕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은 자, 아무도 없었다. 외지인은 뭔가 다를 지도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일단 국경 안으로 들어온 이상 그것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간단히 꾸린 짐을 챙겨 들었다.
    “가자.”
    그렇게 그녀는 궁에 들어갔다.
   
    그녀가 왕과 ‘수업’을 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내가 통역 자격으로 동석했다. 정해진 수업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왕은 심심할 때면 그녀를 불러 무슨 핑계를 대서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도 별달리 꺼리지 않고 왕의 명을 잘 따랐다.
    왕의 곁에 있는 그녀는 다른 사람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건조하고 감정 표현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왕의 앞에서 그녀는 웃었다. 언제나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자세를 무너뜨려, 옆구리에서 허리를 거쳐 골반과 허벅지로 이어지는 선이 뚜렷이 보이도록 몸을 살짝 비틀고 다리를 깊이 꼬고 앉았다. 고개를 한쪽으로 살며시 기울이고 눈웃음 섞인 시선으로 왕을 쳐다보면서 긴 머리를 천천히 하얀 목 뒤로 쓸어 넘겼다.
    어렵사리 그녀와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나는 경고했다.
    “그의 수작에 걸려들면 위험하다고 했지.”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한쪽 끝만 조금 올려 피식 웃었다.
    “알아서 할게.”
   
    …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은 나에게, 이제 통역은 필요하지 않다고 통보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후 한 달 동안, 왕은 거의 매일 그녀와 밤낮으로 함께 지냈다. 왕을 찾으러 가보면 언제나 그녀가 곁에 있었고, 매번 왕과 그녀가 앉은 자리의 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마침내,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와 둘만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진행 상황을 물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건조하게 내뱉었다.
    “알아서 한다니까.”
    뭐라고 더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그리고 왕의 침전이 있는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더 지난 후에 왕이 어전으로 나를 불렀다. 집무를 위해 내가 왕을 찾아다닌 적은 있었지만, 왕이 먼저 나를 부르는 것은 그녀가 궁에 들어온 이후 처음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왕이 짧게 명령했다.
    “문.”
    나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왕은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손가락만 움직여 가까이 오라고 신호했다. 나는 가까이 갔다.
    거대한 집무용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앞에 선 나를 향해 왕이 다시 손가락만 움직였다. 이번에는 책상을 돌아서 오라는 신호였다.
    나는 책상 옆으로 돌아서 왕의 바로 앞으로 갔다.
    왕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조금씩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내 표정을 보면서 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뻗어 내 허리를 잡았다. 옷 아래로 손을 넣어, 배꼽 주변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배에서부터 시작하여 허리 주변을 거쳐 갈비뼈 부근까지 천천히 여유 있게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결코 지나치게 힘을 주지 않고, 살살…. 여자의 몸이 녹을 정도로만.
    엄지손가락으로 젖꼭지 주변을 둥글게 둥글게 쓰다듬으면서, 그가 내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가 속삭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귓가가 아니라 몸 전체를 울렸다.
    “… 그 여자를 꺾고 싶다.”
    이 말을 듣자, 이제까지 하얗게 폭발하던 머릿속에 한 줄기 이성이 되돌아왔다. 꺾고 싶다고? 꺾고 싶다…. 그렇다면, 아직 침대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왕과 그녀, 침대까지는….
    “… 그녀는 외국인이지만, 귀족의 딸입니다….”
    내가 숨을 헐떡이며 속삭였다.
    “함부로 건드리면, 문제가 커집니다….”
    왕이 내 목에 입술을 대고 역시 가볍게 살살 비볐다. 가슴을 만지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치마를 들추고,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한참이나 속옷 위로 살그머니 돌아다니던 손가락이 마침내 속옷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자문’을 구하는 거다.”
    왕은 나를 책상 위에 앉혔다. 질펀하게 젖은 속옷을 완전히 벗겨서 바닥에 던졌다.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방법을 생각해 내거라….”
    그리고 그가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
    절정에 이를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은 후에, 그가 한숨을 쉬며 몸을 빼냈을 때, 왕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를 반역죄로 체포하십시오….”
   
    반역자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이 나라의 법에 따라 엄히 처단한다. 혹여 외교 문제로 비화되더라도, 죄가 있는 것은 그녀 쪽이므로 칼자루는 우리가 쥐게 된다. 확실한 증거만 있다면, 이 나라에서 그녀는 신분과 지위를 모두 빼앗기고 왕의 죄수가 된다. 확실한 증거만 찾는다면, 그녀의 목숨은 왕의 손안에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왕은 관용을 베푼 셈이 된다.
    그 ‘확실한 증거’를 찾는 일은, 물론 나에게 맡겨졌다.
   
    왕의 경비병들과 함께 그녀를 체포하러 갔을 때 그녀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하 감옥으로 걸어가면서도 역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섰을 때도, 지하에서 풍겨 나오는 눅눅한 악취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을 뿐,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나의 명령에 따라 경비병들은 그녀를 벽에 쇠사슬로 묶은 후 모두 물러갔다. 지하실에는 그녀와 나만 남았다.
    “말로 할 때 곱게 자백하는 게 좋을 거다.”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국법에 따라 널 고문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겠다.”
    그녀는 내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그랬듯이 입술을 한쪽 끝만 올리며 피식 웃었다.
    “네가 날 불러놓고, 뭘 자백하라는 거야?”
    나는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벽에 수갑으로 고정시킨 그녀의 팔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오른쪽 벽에 줄지어 걸린 고문 기구들을 바라보았다. 끝이 날카로운, 길고 굵은 쐐기 못을 집어 들었다. 그녀 앞에 바짝 다가서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못을 그녀의 손바닥에 대고 양손으로 꽉 눌렀다. 못의 반대쪽 끝이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꽉 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두 달이다.”
    내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두 달 동안, 네가 한 일이라곤 그의 앞에서 교태를 부리고, 그와 희롱하고…, 애를 태워 감질을 낸 것밖에 없다.”
    나는 못을 누르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턱 근육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너에게 자백을 받고 왕에게 넘겨주면, 나는 그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신하가 된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솟아난 피가 하얀 팔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깨까지 드러난 팔에는, 흰 피부보다 더 하얗게 빛바랜 오래된 흉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핏줄기가 그런 흉터를 가로지르며 흘러내려 어깨를 적셨다.
    “왕이 너를 데리고 놀다가 언젠가 지겨워지면 버리겠지만, 반역자를 처단한 나만은 결단코 평생토록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조금 웃었다.
    “… 고작 그거냐.”
    나는 못을 누르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너, 왜 이렇게 됐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감옥을 나왔다.
   
    상황을 보고하자 왕은 화를 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내지 말라고 명령했다.
    손바닥에 박힌 못을 뽑을 때도,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도 감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들고 못을 뽑는 경비병의 손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못을 뽑아낸 후에 경비병은 그녀의 상처 난 손에 알코올을 들이부었다. 알코올이 닿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모두 수축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자백해라.”
    내가 말했다.
    “왕의 자비는 여기까지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나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 어쩌라는 거야.”
    나는 경비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병이 그녀 앞으로 가서 불시에 명치를 가격했다. 그녀가 입을 조금 벌리고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잠시 그대로 정지했다가, 호흡을 되찾기 위해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장난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경비병이 다시 그녀 앞으로 가서 섰다. 주먹을 치켜들었다.
    “… 알았다.”
    그녀가 기침 사이로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자백한 걸로 치자.”
    나는 경비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병이 다시 그녀의 아랫배로 주먹을 날렸다.
    그녀가 아윽, 하고 목 안으로 비명을 질렀다. 경비병이 주먹을 거두고 몸을 바로 세우자 그녀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장난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감고, 얕고 빠르게 호흡했다. 그리고 이 사이로 내뱉었다.
    “자백한다.”
    그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왕을 암살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
    나는 경비병에게 눈짓했다. 경비병이 물러섰다.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서, 나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누가 시켰지?”
    그녀가 한 순간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싱긋 웃었다.
    “가서 너의 왕을 불러와라.”
    그녀가 속삭였다.
    “직접 말하겠다.”
    “누가 시켰지?”
    내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아까처럼 싱긋 웃었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경비병에게 다시 고갯짓을 했다.
    경비병이 와서 세 번째로 그녀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도 명치였다.
    그녀는 처음에 그랬듯이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이어서 고개가 앞으로 축 처졌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왕에게로 갔다.
   
    그녀가 자백했다는 말에 왕은 웃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왼쪽 허리춤에 찬 단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앞장서라.”
   
    지하 감옥의 문을 들어서서 왕은 고갯짓으로 경비병들을 내보냈다. 나도 나가려 했으나, 왕의 손짓을 보고 멈추어 섰다.
    왕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왕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그녀의 턱 아래 대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후에도, 왕은 오랫동안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한 손에는 든 단검으로 그녀의 턱 밑을 받치고, 다른 한 손을 그녀의 옷 아래로 넣어 왕은 그녀의 허리께를 더듬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러 왔다고?”
    왕이 그녀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물었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단검을 든 손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칼날이 그녀의 허벅다리를 그었다. 바짓단이 스르륵 잘라지면서 희고 가늘고 단단한 맨다리가 드러났다. 피부 표면에서 바알간 피가 한 줄로 가느다랗게 배어나왔다.
    왕이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던 손으로 목을 잡았다.
    “누가 시켰지?”
    나는 긴장하여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멍하니 왕을 쳐다보았다. 홀린 듯한 표정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왕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쥔 단검의 칼날 끝으로 그녀의 윗옷을 살짝 들어올렸다. 칼끝이 피부에 닿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누가 시켰지?”
    단검 끝이 그녀의 배에서 가슴까지 천천히 기어 올라가면서 피부에 빨갛게 가느다란 줄을 그었다. 팔이 그랬듯이, 윗옷이 밀려 올라가며 드러난 그녀의 배에도 하얗게 빛이 바랜 흉터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팔의 흉터보다 훨씬 크고, 길고, 굵었다.
    단검 끝이 그런 흉터를 지나 가슴까지 줄을 그으며 올라갔다. 그리고 젖꼭지 바로 아래에서 멈췄다.
    그녀는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왕의 얼굴을 들여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왕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좀 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그녀도 그 입맞춤에 화답했다. 마치 현실의 모든 상황을 잊은 듯, 정열적으로 그의 입술을 갈구했다.
    고개를 돌리면서 나는 지금 내 표정이 아까 손의 상처에 알코올이 닿았을 때 그녀의 표정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왕이 그녀에게서 얼굴을 떼었다. 여전히 미소를 띠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입술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하긴, 여기서 곧장 대답해 버리면 재미가 없지.”
    그리고 왕은 내게 손짓했다.
    벽에 걸린 고리에서 그녀의 수갑을 벗겨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왕이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전부 털어놓게 되겠지….”
   
    내가 그녀의 수갑을 벽에서 벗겨낸 후에, 왕은 그녀에게 다가가 상처 난 손을 불시에 꽉 쥐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넋 나간 듯 멍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그녀의 발목에 채운 족쇄를 푸는 동안, 왕은 계속 양손으로 그녀의 수갑 찬 손을 꽉 쥐고 상처 난 오른손을 주물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발목의 족쇄가 풀어지자, 왕이 여전히 그녀의 상처 난 손을 힘주어 쥔 채로 말했다.
    “얌전히 따라오면, 이 손을 놓아 주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다시 속삭였다.
    “얌전히 따라올 거지?”
    그녀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문 그대로 고개만 끄덕였다.
    왕이 천천히 손의 힘을 뺐다. 그러나 손을 놓는 척하다가 돌연히 그녀의 오른손을 다시 힘주어 비틀었다.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왕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오른손 손등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왕은 그녀의 손을 놓고, 대신 수갑에 달린 쇠사슬을 잡아끌면서 지하 감옥을 나섰다.
    나도 서둘러 따라 나갔다.
   
    미리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려 두었기 때문에, 지하 감옥에서 왕의 침전까지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이 그녀를 끌고 앞서 갔고, 나는 뒤에서 따라갔다. 그녀는 말없이 왕이 끄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걸었다.
    침전 문 앞에 이르러 왕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수갑의 쇠사슬을 놓아준 후에 팔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그녀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몸짓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침전으로 들어가는 대신 갑자기 돌아서서 나에게 말했다.
    “이거, 풀어 줘.”
    그리고 그녀는 수갑 찬 양손을 내밀었다.
    나는 왕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이거 풀어 줘.”
    왕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건 안 되겠는데.”
    왕이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그걸 풀어주면 재미가 없….”
    그 때 그녀가 갑자기 양손을 모아 쥐고, 왼쪽 팔꿈치로 등 뒤에 서 있는 왕의 명치를 가격했다. 왕은 순간적으로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며 몸을 반으로 접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그대로 양손을 모아 쥔 채 오른쪽 팔꿈치로 그의 아래턱을 후려쳤다. 왕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그녀는 얼른 왕을 타고 앉아 그의 허리에 찬 단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왕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왕은 가슴에 단검이 꽂힌 채로 경련했다. 그러나 곧 조용해졌다.
    왕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후에 그녀는 왕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박을 확인했다. 그리고 가슴에 꽂혔던 단검을 도로 뽑더니 왕의 시체에 쓱쓱 문질러 피를 닦아냈다. 일어서서 왕의 죽은 얼굴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변태 새끼….”
    그녀가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단검을 양손으로 모아 쥐고 돌아서서 나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어..., 어쩔 생각이야?”
    본의 아니게 더듬거리면서, 내가 물었다.
    “날, 주, 주, 죽일 건가?”
    “아니.”
    그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의뢰받은 적이 없으니까.”
    “의, 의뢰?”
    내가 되물었다.
    “내, 내가 부탁한 걸, 지, 지킨 거야?”
    “네 부탁?”
    그녀가 다시 피식 웃었다.
    “왕을 죽여 달라고 찾아온 사람이 너 하나뿐이었다고 생각해?”
    “뭐?”
    내 표정을 보고 그녀가 전처럼 입 끝을 한쪽만 올려 미소 지었다.
    “애초에 내가 볼일도 없이 이런 나라에 왜 와 있었겠어?”
    말하면서 그녀는 칼끝을 내게 겨눈 채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뒤로 밀리다가 발이 엉켜서 넘어졌다.
    그녀가 넘어진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단검을 들고 그대로 나에게 칼끝을 겨눈 채, 오른손으로 내 주머니를 뒤져 수갑 열쇠를 꺼냈다.
    “그럼, 이, 이젠, 어떻게 되는 거지?”
    그녀가 일어서서 수갑을 한 쪽씩 푸는 것을 올려다보면서 내가 물었다.
    “글쎄.”
    그녀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수갑을 풀어서 왕의 시체 쪽으로 내던졌다.
    시선이 수갑을 따라 왕의 시체로 향했다.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영혼을 옭아매었던 끈이 드디어 끊어진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순간 느낀 감정은 자유나 환희가 아니었다. 허탈함, 배신감, 그리고 가슴을 저미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이 나를 덮쳤다.
    그녀가 손목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저걸 의뢰한 사람들이, 너도 알아서 처리하겠지.”
    그리고 덧붙였다.
    “그 전에 너도 네 사람들을 부르는 게 좋을 걸.”
    말을 마치고, 그녀는 단검을 쥔 채로 가 버리려 했다.
    “자, 잠깐만.”
    내가 그녀를 불렀다.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목소리가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내 사람들 따위는 없다는 걸 그녀가 이해할 리 없었다. 왕이 죽었으니, 남은 것은 나로 인해 왕에게 딸을 빼앗긴 아버지들, 아내를 빼앗긴 남편들, 그리고 어머니를 빼앗긴 아이들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왕의 죽음과 함께 그 마술도 사라졌으므로, 그들에게 남은 것 또한 상실감과 분노뿐일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보았다.
    “나, 나도 데려가 줘.”
    그녀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널? 왜?”
    “와, 왕이 없으면…, 난, 여, 여기 있을 이, 이유가 없어…. 여, 여기엔, 더,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그래?”
    그리고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가 버리려 했다.
    “자, 잠깐만!”
    내가 다시 불렀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돌아보았다.
    “또, 왜?”
    “… 아, 안 데려갈 거면, 나, 나도, 주, 주, 죽이고 가.”
    내가 뱃속에 남은 용기를 모두 쥐어짜서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치, 친구로서, 마,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거야…. 날, 이, 이대로 두고 가지 마.”
    그녀가 싱긋 웃었다.
    “친구?”
    그리고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달렸다.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살짝 몸을 비켜서 피했다. 나는 복도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또, 뭐?”
    그녀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네, 네 탓이야. 너, 너 때문에, 저, 전부 망쳤어.”
    내가 소리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어쩐지 울먹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되물었다.
    “내가 뭘?”
    “내, 내가 해 달라는 기한 안에 해 줬으면, 그랬으면…, 그랬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냐! 시, 시간만 끌면서,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중으로 의뢰를 받아서, 내 뒤통수를 치고….”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의뢰는 저쪽이 먼저 했어. 그리고 네가 석 달 줬잖아. 알아낼 것도 있고 해서, 시간 좀 끌어도 되는 줄 알았지.”
    “아, 알아내다니, 뭐, 뭘 알아내! 겨, 결국 넌, 내, 내 부탁을 받고도 뒤로 따, 딴 짓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소리쳤다.
    그녀가 조금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어차피 같은 의뢰였어. 그리고 저쪽은 돈을 많이 줬거든. 넌 나한테 돈 안 줬잖아?”
    그 말을 듣자, 가슴 속에서 뭔가 불끈 치솟았다. 나는 외쳤다.
    “이런, 창녀!”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나, 창녀 아냐. 용병이지.”
    “그거나 저거나, 다를 게 뭐야? 돈에 팔리긴 마찬가지 아냐?”
    내가 다시 소리 질렀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갯짓으로 왕의 시체를 가리켰다.
    “뭐가 다른지, 방금 봤잖아.”
    그리고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목청껏 고함쳤다.
    “넌, 내가 지난 십 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
    그녀가 멈춰 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나를 보았다.
    그 얼굴에 나타난 몹시 딱하다는 표정 때문에, 나는 더욱 더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내가 저 남자 노리개로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뭘 참아가면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넌 전혀 모르지! 그러면서 무슨 자격으로 날 경멸해! 네가 뭔데, 네까짓 게 뭐라고 날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가 있어! 네가 뭔데!”
    그녀는 내가 악 쓰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울부짖음이 지나가고 흐느낌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넌 지난 십 년을 왕의 침실에서 보낸 모양이구나.”
    그 어조가 조금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그 세월을 전쟁터에서 보냈어.”
    그녀가 왼손에 든 단검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긴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다시 대꾸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단검을 조금 이상하게 들고 있었다. 손잡이가 엄지손가락 쪽을 향하고, 칼날은 새끼손가락 바깥쪽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단검을 쥐고 그녀는 왼손 손목을 움직여 칼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잘 벼린 쇠가 복도의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칼을 쥐고, 그렇게 움직여 사용하는 것이 편하고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방금 사람을 죽인 칼을 들고 있는 그녀는, 낯선 타인이었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단검을 쥔 손을 내렸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 잘 있어.”
    낯선 그녀가, 조금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한 손에 칼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져 버렸다.
    침전 앞 복도에 쓰러진 시체 곁에, 나는 왕을 잃은 왕의 창녀가 되어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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