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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옛적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 날이 저물었다. 몸도 지치고 허기도 졌던 나그네는 묵을 곳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침 불빛이 반짝이는 곳이 있어 찾아가 보니 산기슭의 주막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주막을 들어서서 보니 마루에 상을 받고 앉아 수저를 놀리고 술잔을 기울이는 길손이 대여섯이나 있었다. 사람이 많아보여서 나그네는 일단 걱정했으나, 우려와는 달리 말을 꺼내자마자 주모는 깨끗하게 치운 빈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하여 더운 국밥에 술까지 한 잔 걸치고 극락이 따로 없구나, 하면서 봉놋방을 혼자 차지하고 지친 몸을 뉘인 나그네는 그러나 밖이 별안간 떠들썩해져서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주모가 아까 유별나게 큰 소리로 웃으며 술을 마시던 사내 세 명과 무슨 이유인지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외상값 때문에 다툼이라도 벌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한 나그네는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그 때 주모의 목소리가 나그네의 귀청을 때렸다.


“해 지고 나서 저 고개 넘으면 귀신이 나와서 잡아간다니까!”


호기심에 귀가 솔깃해진 나그네는 다시 방문을 슬쩍 열었다. 귀신이라니 웃기지 마쇼, 말도 안 돼, 그까짓거 나와 보라고 하쇼, 어쩌고 하는 사내들의 농담 섞인 대꾸에 주모는 정말로 간절하게 말렸다.


“그 귀신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댁들처럼 까짓거 한 번 나와 보라고 큰소리 떵떵 치면서 해 지고 나서 고개 넘다가 놀라 죽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오. 제발 덕분에 내 말 들어요. 돈이 없으면 오늘 밤 공으로 재워줄 테니 내일 아침 해 뜨거든 나가요들.”


논일 밭일을 끝내고 목 축이러 들렀던 동리 농군들까지 귀신 고개를 외치는 주모 편에 가세해서 마당은 더더욱 왁자지껄해졌다. 그러나 사내 셋은 내일 새벽까지 장에 가야 한다면서 다투는 주모를 물리치고 나귀를 앞세워 떠나 버렸고, 그리하여 나그네의 싸움 구경은 싱겁게 끝이 났다. 나그네는 방문을 닫고 오랜만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워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나그네는 다시 밖이 시끌벅적해진 통에 잠이 깨 버렸다. 짜증을 내며 방문을 열자 마당에는 아까 저녁에 장에 가야 한다면서 귀신 따위 한 번 나와 보라지, 하고 코웃음을 치며 나귀를 앞세우고 떠났던 사내 중 하나가 자기가 몰고 떠났던 그 나귀의 등에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실려왔고, 그 앞에는 형님 가십시다, 하고 호기롭게 재촉했던 다른 사내가 부들부들 떨면서 앞뒤 없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년이 틀림 없어… 그 뺨에 점인지 사마귀인지… 분명히 그 년이야…. 틀림 없다니까…. 하지만 그게 벌써 언제 적인데…. 아냐 그래도 그 년이야….”


세 번째 사내가 어떻게 됐는지, 어디로 갔는지 사람들이 아무리 물어도 사내는 이 알 수 없는 소리만 주문 외듯이 되풀이해 내뱉을 뿐이었다. 어쨌든 나귀 등에 업혀온 사내부터 방에 들여 뉘이고 의원을 청해 왔다. 의원은 맥을 짚어보고 눈을 까뒤집어 보더니 이마와 정수리에 뜸을 뜨고 손과 발에 침을 놓았다. 허옇게 뒤집혔던 사내의 눈동자가 제 자리로 돌아오고 국수 가락처럼 맥 없이 늘어졌던 사지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의원과 함께 지켜보던 손님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원은 약을 처방해준 후 다른 사내가 굽신거리며 내민 무명 한 필을 흐뭇하게 받아들고 사라졌다.


점심때가 겨워 나귀에 실려왔던 사내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슬렀다. 그러나 해가 서쪽으로 뉘엿이 기울기 시작하자 갑자기 떠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미 오늘 장은 글렀으니 밤새 걸어 내일 이웃 장이라도 대지 않으면 이번 장도막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나귀에 고리짝을 실었다. 그와 함께 사내를 나귀에 실어 데리고 온 다른 사내도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꼴을 당하고 다 저녁에 또 어디를 가려는 거냐고 주모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내가 함께 가겠소.”


잔뜩 호기심에 차 있던 나그네가, 이때다 하고 주모에게 말했다.


“적당히 따라 가다가, 고갯길이 나오면 나귀 고삐를 잡아채 이리로 뛰어 오리다. 내다 팔 포목이 전부 저 나귀에 실려 있는데, 그걸 이리 데려오면 설마 맨손으로 장에 가겠소?”


주모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으나 나그네가 나서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듯,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아유 샌님 복 많이 받읍시사…. 우리 집 다녀간 손들은 모두 저 고개 넘어가다 죽는다고 소문이 나서 이제 조금만 있으면 장사 망하게 생겼어요…. 소문이 퍼지다 못해 원님 귀에까지 들어가서, 산적이랑 짜고 길손을 해친다고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포졸들이 잡으러 오질 않나….”


“그런데 그 귀신이라는 게 대체 어떻게 생겼소?”


나그네가 물었다. 주모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들은 말밖에 없어서 잘은 몰라요. 누구는 조그만 계집아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젊은 처자라고도 해서….”


“아니, 그럼 귀신이 하나가 아니란 말이오?”


나그네가 놀랐다. 주모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잘 몰라요. 요물이 둔갑을 하는 건지…. 하지만 그 귀신 본 사람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뺨에 큰 사마귀인지 점 같은 게 있답디다.”


나그네는 귀신이 어른인지 어린 아이인지, 어째서 하필 그 고개에 출몰하게 된 것인지 사연을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포목상을 한다는 두 사내가 나귀를 앞세우고 마치 뭔가에 홀린 듯이 쫓기는 듯이 서둘러 주막을 나섰기 때문에 나그네도 허둥지둥 따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름이 거의 되어가는 달은 아직 다 차지 않았으나 그 빛만은 한가위 달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설탕처럼 희고 달콤한 빛을 은빛 강물처럼 흘려 퍼뜨리는 너그럽고 어여쁜 달이 아니라, 얼굴을 찌푸린 듯한 누르스름한 달이었다. 보기 드물게 거대하고 침침하게 누른 달이 한 귀퉁이가 거무스름하게 파먹힌 채 칠흑 같은 밤 하늘에 기우뚱하게 걸린 모양새는 마치 목 매단 시체의 비뚜름하게 고개 꺾여 퉁퉁 부은 얼굴처럼 커다랗고 괴기하게 보였다. 그 기형적인 달 아래에는 눈송이를 뿌린 듯, 얼음가루를 뿌린 듯, 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이 핏기 없이 시체처럼 차갑고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나귀 주인인 사내는 앞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두 번째 사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흘깃흘깃 밤 하늘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어, 누구에게 향한 이야기인지 모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때도 꼭 이런 밤이었어.”


“무슨 소리야.”


나귀를 몰고 가는 첫 번째 사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나 두 번째 사내는 그 정도로 기가 죽지 않았다.


“꼭 저렇게 괴상하게 누리끼리한 달이 커다랗게 떠 있었단 말이야.”


첫 번째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랴, 하고 더 거칠게 나귀를 몰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날 밤은 전부 다 이상했어. 저 달도, 저 메밀밭도, 다 부정을 탄 거라고. 재수가 없었던 거야.”


두 번째 사내는 자신을 외면한 채 나귀의 고삐만 단단히 틀어쥐고 발을 재게 놀려 걸어가는 첫 번째 사내에게 되풀이해 말했다.


“재수가 없었던 거야. 부정을 탄 거라고. 우리 탓이 아냐. 내 탓이 아니란 말이야.”


“그만 하지 못해!”


첫 번째 사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돌아섰다. 고삐를 잡아채인 나귀가 키힝,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두 번째 사내가 지지 않고 외쳤다.


“이런 밤에, 저 달에…! 제 정신 박힌 여자가 어린애까지 달고 이런 고개를 넘을 리가 없어! 그 년이 요물이야! 내 탓이 아니란 말이야!”


“잡놈의 새끼…. 그 아가리 닥치지 못해!”


첫 번째 사내가 위협적으로 으르댔다.


나그네는 첫 번째 사내가 나귀의 고삐를 놓는 순간을 엿보고 있었다. 싸움을 말릴 만한 완력은 없지만, 나귀의 고삐를 잡아채어 도망친다면 사내들은 다툼을 잊고 소중한 포목을 좇아 자신을 따라올 것이라 확신했다. 사내들은 거의 고갯마루까지 올라왔으니,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뛰기도 쉬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장면은 나그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두 번째 사내가 느닷없이 땅바닥에서 돌을 집어들어 첫 번째 사내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첫 번째 사내는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두 번째 사내는 피 묻은 돌을 손에 든 채로 첫 번째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첫 번째 사내가 두 번째 사내의 발목을 잡아챘다. 두 번째 사내는 쓰러지면서 땅바닥에 뒤통수를 짓찧었다. 첫 번째 사내가 두 번째 사내 위에 올라탔다. 두 번째 사내가 밀어내고 위에 올라탔다.


두 사내가 하나로 엉켜 싸우는 동안 나그네는 나귀의 고삐를 잡은 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네가 하자고 했잖아! 밤길 혼자 가는 여자 하나쯤 어떻게 하든 이쪽 마음이라고!”


“내가 아냐! 네가 하자고 했잖아! 네가 먼저 덤볐잖아!”


“네가 먼저 쓰러뜨렸어! 그 년은 네가 먼저 깔아 눕혔단 말이야!”


“그 년 목은 네가 졸랐잖아! 죽이지 말자고 했는데, 네가 목을 졸랐잖아!”


“난 조른 적 없어! 네가 돌로 내리쳤잖아! 내가 봤어!”


두 사내는 뒤엉켜 서로 목을 조르고 턱주가리와 뺨따귀에 주먹을 날리며 컥컥, 억억 소리를 내며 목청껏 서로를 탓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번째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 내가 돌로 내리쳤다!”


그리고 두 번째 사내는 첫 번째 사내 위에 올라타 양손으로 커다란 돌을 잡고 한껏 들어올렸다가 있는 힘껏 첫 번째 사내의 얼굴을 내리 찍었다. 또 한 번, 다시 한 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첫 번째 사내의 얼굴을 내리찍으며 두 번째 사내는 울부짖었다.


“죽이지 말자고 했는데, 죽이진 않으려고 했는데! 그냥 재미 좀 보려는 것 뿐이었어…. 죽일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야! 하지만 그 딸년이, 그 딸년이 그 새까만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그 계집애가 도망도 안 가고 울지도 않고 제 엄마 머리 으깨진 시체 옆에 서서 그렇게 쳐다보지만 않았어도… 그러지만 않았어도…!”


첫 번째 사내의 얼굴이 원래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게 뭉그러진 뒤에도 두 번째 사내는 몇 번이나 기계적으로 돌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리 찍으며 중얼거렸다.


“내 탓이 아냐, 내가 나쁜 게 아냐…. 난 그냥 재미 좀 보려고 했던 것 뿐이야…. 재수가 없었어…. 부정을 탄 거야….”


한동안 그렇게 팔을 움직이다 마침내 지쳤는지 두 번째 사내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입속말로 뭔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그네는 얼어붙은 듯 나귀의 고삐를 잡고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지켜보았다.


문득 나귀가 입술을 투르러거리며 조금 옆으로 물러섰다. 나그네는 그 쪽을 쳐다보았다. 어스름한 밤길, 나귀 옆에 어렴풋이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나그네는 고개를 기울이고 자세히 보았다. 그것은 열 살 정도 된 어린 소녀였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투성이에, 어디서 다쳤는지 정수리에서도 피가 흘러내려 볼을 따라 턱에서 방울져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몰골로 소녀는 부어터진 입술을 벌려 히죽히죽 웃으며 두 번째 사내를 바라보면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그네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생각은 정지되고 몸은 마치 자기 몸이 아닌 것처럼 혼자서 저절로 움직였다. 그렇게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반쯤은 공포심에, 반쯤은 무시무시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나그네는 소녀가 중얼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까지… 길 걷…, 달… ㅂ… 거야….”


“… 때까지… 이 길 걷… 달 볼 거야….”


“… 을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거야….”


나귀가 다시 입술을 투르러거리며 꼬리를 휘저었다. 깜짝 놀란 나그네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물러섰다. 발밑의 풀이 부스럭, 하는 소리를 냈다.


소녀가 나그네를 돌아보았다. 피에 젖어 만신창이가 된 얼굴의 왼쪽 볼에 난 크고 푸른 보석 같은 사마귀가 누렇게 기울어진 달빛을 받아 확연히 눈에 띄었다. 소녀의 죽은 얼굴에서 생명을 가지고 빛나는 부분은 그 푸른 사마귀 뿐이었다. 그 사마귀 때문에, 누르스름한 달빛이 비친 소녀의 얼굴은,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소녀가 나그네를 돌아보았다. 찢어지고 부어터진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 미소를 지었다. 소녀가 속삭였다.


“모두 다 죽을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거야.”


두 번째 사내가 천천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점 없는 눈이 나그네와 마주쳤다. 두 번째 사내는 마치 나그네도, 나그네가 고삐를 틀어쥐고 있는 나귀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몸을 돌려 고개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고갯마루를 넘어 내리막으로 사라지는 두 번째 사내의 곁에는 죽은 소녀의 조그만 형상이 나란히 서서 걷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와 딸처럼 사이좋게 고개를 내려가며 두 번째 사내와 죽은 소녀가 함께 중얼거리는 소리를 나그네는 들었다.


“다 죽을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거야…. 다 죽을 때까지….”




동이 튼 후에도 나그네가 돌아오지 않자 주모가 동리 사람들을 앞세워 찾으러 왔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고갯마루에서 나귀의 고삐를 목숨줄처럼 손에 꽉 감아쥔 채 넋을 잃고 얼어붙은 듯이 서 있는 나그네 뿐이었다. 한참이나 어르고 달래도 나그네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고, 눈에 초점이 돌아온 후 주모의 얼굴을 보고 나그네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전날 두 번째 사내가 첫 번째 사내에게 했듯이, 주모와 동리 사람들은 나그네를 나귀에 실었다.


고개를 내려오려다가 나귀가 서 있던 자리 뒤의 덤불 속에서 사람의 발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동리 사람들은 보았다. 덤불을 헤치자 첫 번째 사내와 똑같은 모습으로 머리가 으깨져 죽어 있는 세 번째 사내의 시신이 드러났다.




나그네는 주막에서 한참이나 앓은 후에야 제 정신을 차렸다. 두 번째 사내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나귀와 나귀 등에 실린 고리짝의 포목은 주모에게 넘기려 했으나, 주모는 몹시 겁을 내며 부정 탄다고 받지 않았다. 결국 나귀 째로 원님에게 바쳤고, 주막에는 한동안 포졸이 드나들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그네는 몸을 추스른 후 햇볕이 쨍쨍한 한낮에 주막을 떠나 이번에는 고개를 넘지 않고 길을 멀리 돌아서 갔다.




여름 한낮의 뙤약볕을 그대로 맞으며 걸어가는 나그네는 그러나 마음 속이 얼어붙어 땀을 한 방울도 흘리지 못했다. 나그네의 귓가에는 ‘다 죽을 때까지…’를 되풀이해 중얼거리던 소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울렸고, 한낮의 햇살 아래 고갯길이 아닌 메밀밭 밭두렁 사이를 걸으면서도 나그네의 시선은 그날 밤 고갯마루의 어둠과 소녀의 창백하고 비뚤어진 미소, 그리고 뺨에 돋아난 기묘하게 아름다운 푸른 사마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걸어가다가 나그네의 발에 뭔가 축축하고 단단한 것이 걸렸고, 발치를 내려다본 나그네는 벌판을 온통 뒤덮은 메밀의 흰 꽃과 붉은 대궁 사이에서 흔적없이 사라졌던 두 번째 사나이의 허연 얼굴과 잡아뜯긴 목에서 쏟아진 붉은 피를 보았으며, 그리하여 나그네의 비명소리가 하늘과 땅과 메밀로 가득한 벌판과 무심하게 푸른 산천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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