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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정령이 노래하는 곳

2011.12.31 00:1512.31

정령이 노래하는 곳


 


레치피세츠(lecipisec)는 정령이다. 하늘을 날며 그 날개로 허공에 흔적을 남긴다. 방향 없이 공중을 떠돌 때면 그 흔적은 투명한 물방울이 퍼져나가듯이 가볍게 대기를 물들이며 흩어져 사라진다고 한다. 그것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무척 아름다우나 투명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대로 한 방향으로 날아갈 때면 정령은 허공에 한 줄로 이어지며 불꽃처럼 타오르는 일련의 글을 남긴다. 특히 밤 하늘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흔적을 보았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는 불타는 글자가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오랜 세월동안 학자들은 이 글을 해석하려 노력해 왔다. 신의 뜻에 따라 벽에 불타는 글씨를 남겼던 손가락처럼, 레치피세츠가 허공에 남기는 글 또한 나라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여겨졌다. 레치피세츠가 인간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누구든 허공에 스며드는 신선한 물방울 같은 흔적을, 혹은 밤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타는 글자를 본 사람은 즉시 사제와 학자들을 찾아가 고하였다. 그러한 경우에는 여러 학식 있는 자와 믿음 있는 자들 사이에 그 불타는 흔적의 의미와 풀이를 놓고 종종 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하여 민중을 이끌어야 할 자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며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툼과 편가르기에 빠져들어 불안해진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곤 했다.


 


바보 같은 새끼들이다.


그들이 찾는 의미 따위는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나는 누워서 하늘을 쳐다본다. 이제 곧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혹은, 들려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나는 기다린다.


 


땅바닥에 벌렁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팔자가 좋기 때문이 아니고 씨바 뒤에서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길 가다가 뒤에서 기습당해 죽어본 사람이라면 욕이 절로 나오는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게다가 망할 자식들이 죽이려면 곱게 죽일 것이지 팔다리를 다 잘라서 만신창이를 만들어놓고 갈 건 또 뭐람. 몹시 한가했던 모양인데 그렇게 시간이 많으면 칼날이나 좀 더 갈아놓고 죽이러 오지 그랬어. 살은 그렇다쳐도 뼈는 아무리 내리찍어도 안 갈라지니까 칼등으로도 때려보고 발로 밟아도 보고 별 짓을 다 하는 통에 오른쪽 다리는 잘라낸 게 아니고 허벅다리 부근을 된통 짓이겨놓고 가 버렸다. 저건 나중에 다시 붙이려면 엄청나게 지저분하고 무시무시하게 아플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죽었으니까. 지금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노랫소리를 기다릴 뿐이다.


 


환란이 일어나면 민중은 언제나 현자를 찾고 지혜를 갈구하였다. 학자에게는 해답을, 사제에게는 마음의 위안을 구하였다.


답을 구하는 태도 자체는 잘못되었다 할 수 없으나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학자와 사제 또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화려한 옷을 입거나 두꺼운 책을 손에 들었을 뿐 그들도 한낱 인간이므로 아무리 학식이 높은 선생이라도, 아무리 신심이 깊은 사제라도, 근본적으로는 인생의 의미와 마음의 평안과 앞날의 해답을 물으러 오는 백성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화려한 옷과 두꺼운 책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평범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즉 인간에게는 이지(理智)와 함께 감각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에게는 오감이 존재한다. 생각은 두뇌의 작용이며 두뇌는 육체의 일부이므로 결국 사람이 몸에 의지하여 몸을 통해 살아간다는 사실만큼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은 존재의 중심인 몸을 통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이 방식이 가장 근본적이며 참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의 몸을 가장 참되며 근본적인 척도라 가정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은 그 몸의 감각을 벗어나는 세계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누구든 세상을 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탄생 전에 있는 것, 죽음 뒤에 오는 것, 영혼이 가는 곳은 고사하고 바로 한 치 앞의 세상조차도 인간의 오감으로는 예측할 수 없으므로 확실하게 알 방법은, 절대적으로, 없다.


일찌기 사제이며 학자이던 어느 깨달은 자는 이러한 사실을 슬퍼하여 인간은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한 점 티끌처럼 우연히 태어나며, 과일 속에서 벌레가 살아가듯이 지구에 기생하여 살아간다고 탄식하였다. 그는 육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오감의 한계를 인정한 진정 지혜로운 자였다. 그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혔고 삼십 년간 고문과 협박과 회유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망가진 몸으로 토굴 속에서 늙어갔으되 그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 말할 수 없었다.


참된 학자란 이런 사람이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며,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그 한계를 인정함에 있어 거짓도 변명도 망설임도 없는 사람이다. 내가 언제나 너보다 잘났고 너는 항상 틀렸으며 나만 영원히 절대적으로 옳다고 아무 데서나 들이대는 인간은 학자가 아니고 정신병자다.


 


그러니까 요점이 뭐냐면 간단히 말해서 그 때나 지금이나 윗대가리라는 것들은 다 멍청한 새끼들이라는 말이다. 무지몽매한 니들이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고 나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 꽉 막힌 바보 자식들에게는 유일한 권력이기 때문에 거기에 죽자사자 매달리는 것이다. 레치피세츠만 해도 그렇다. 불타는 글자에 무슨 의미가 있네 나라의 앞날이 어쩌네 하면서 지금 몇 백년째 우려먹고 있는데 사실 그 새끼들 완전 다 틀렸다. 불타는 글자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다 해도 사람이 그 의미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애초에 사람이 알아보라고 쓴 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소리와 향기다. 인간에게 있어 시각만이 유일한 감각은 아니며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글자만이 아니다.


레치피세츠는 날아가면서 노래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레치피세츠라는 이름부터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날아가면서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날아가면서 노래하는 레치페베츠’(lecipewec)라고 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 따위 소소한 문제는 그런 거 가지고 따지기 좋아하는 멍청한 자식들한테 맡겨놓기로 하고, 여기서 핵심은 노랫소리가 들리냐는 것이다. 향기를 맡을 수 있냐는 것이다. 레치피세츠가 허공에 흩뿌리는 흔적을 보고, 노랫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고, 그 투명하고 신선한 물방울과도 같은 생명수가 온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는, 그 모든 것을 감각할 수 있고 그 감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존재들은 레치피세츠가 지나간 하늘 아래서 살아난다. 죽은 것과 죽어가던 것은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고 어리고 연약한 것들은 성장하여 강해지며 이미 성숙하고 강한 것들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짐승은 새끼를 배고 여자들은 아기를 갖는다.


 


그 때문에 수많은 여자들이 태어나지 못한 아기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노랫소리와 향기와 물방울과 함께 흩어진 몸에 잃어버렸던 생명은 되돌아왔으나 잃어버린 아기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다시 살아난 후로 나는 황폐해졌다. 내가 죽었어야만, 살아나지 말았어야만 아기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나의 의지로 살아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오래 전의 이야기다.


 


나는 사지가 흩어지고 짓이겨진 시체가 되어 땅에 누운 채로 하늘을 바라본다.


죽음 뒤에 무엇이 오는지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경험해서 아는 것은 오로지 평온한 무감각의 상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에 걸친 상태이며 어느 쪽으로 넘어갈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결정을 기다리는 상태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 뒤의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다가 나는 언제나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나를 쫓고 있다. 항상 같은 자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같은 무리에 속하는 자들임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언제나 똑같은 주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세계를 이루는 원리, 존재의 근본이 되는 진리는 단 하나이고, 그 단 하나의 진리는 그러니까 그들이 알고 믿고 떠받드는 진리이며, 나는 그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악마이고 인류의 적이고, 그러므로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제대로 죽이기나 하면서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면 최소한 비웃지는 않을 텐데 지금이 벌써 몇 번째냐고.


 


물론 처음에는 무서웠다. 참담하고 슬펐던 것 같다. 그다지 곱씹고 싶지는 않은 기억이다.


그리고 화가 났다. 두 번째, 세 번째가 지나면서 더더욱 화가 났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나는 싸웠다. 죽지 않는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열에 받쳐 간과한 사실은 나는 한 명이고 상대는 여럿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그냥 여럿이 아니고 엄청 많은 여럿이다. 싸우면 싸울수록 상대는 끊임없이 몰려왔고 계속 수가 불어났다. 나만 씨바 점점 힘들어졌다.


그렇게 열 몇 번째로 죽었다가 되살아났을 때쯤 나는 지쳐버렸던 것 같다.


 


밤이었고, 언덕길을 가고 있었다. 올라가고 있었는지 내려가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올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 명이었다. 불쑥 나타나서 언제나 하던 소리를 되풀이했다. 악마의 자식이고, 나도 악마고, 신의 진리에 위배되고, 거짓을 퍼뜨리고 다니고 기타등등.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길 가다가 얼떨결에 처단당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는 응전의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씨바 한참 싸우다가 힘들어 죽겠는데 헐떡헐떡 하면서 잘 보니까 그 자식 뒤에서 슬금슬금 셋 정도가 더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둘. 그 옆에서 또 둘. 합이 일곱이냐? 여자 하나 죽이려고 일곱 명이나 보내다니 참으로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새끼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왔다. 싸우고, 또 싸우고, 이길 때까지 계속 싸울 생각을 하니까 정말로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아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냥 죽었다.


 


상대방 손에 죽은 게 아니다. 싸우다 져서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다. 사실은 싸우다가 중간에 휴전 상태였다. 상대는 일곱이 슬금슬금 한데 모이는 중이었고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숨 좀 돌리는 중이었고 서로 마주 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말 그대로 픽 쓰러져서 그냥죽었다. 나도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완전 귀찮으니 이대로 죽어버릴까 생각했더니만 진짜로 그냥 죽어버렸다.


나야 이미 죽었으니까 별로 안 놀랐는데 나보다는 상대방이 더 놀랐다. 한창 싸울 때는 멀쩡하다가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죽어버리니 황당했겠지. 일곱이 슬슬 몰려와서 찔러도 보고 건드려도 보다가 진짜로 죽은 걸 확인하고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일 끝났다고 신나게 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한참동안 더 누워 있었다. 이대로 진짜 죽어도 크게 아쉬울 건 없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살아난들 내 앞에 남은 것은 또 쫓기고, 또 싸우고, 또 죽고그리고 또 살아나서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죽었으니까 만사에 무감각했으므로 딱히 귀찮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까 꼭 다시 살아나고 싶은 욕망도 그다지 없었다. 안 죽었다면 땅이 차갑고 바닥이 딱딱하다는 생각 정도는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만사 무감각해지니 그런 것도 없었다. 누워서 하늘 쳐다보고 있으니 그저 편했다.


그 때 물방울이 내려 몸에 스며들어왔고, 그러자 귀에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리고 투명한 레치피세츠의 날개가 보였다.


별 수 있나. 다시 살아나야지.


 


살아나는 것은 쉽지 않다. 태어난 채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죽었다가 다시살아나는 것은 정말로 힘든 과정이다. 그나마 곱게 그냥죽었다가 되살아나면 좀 덜 아프기라도 하지. 지금처럼 사지가 찢기거나 배가 갈라지거나 하면 다시 살아나는 순간 그 감각, 그 고통을 온몸으로 다 견뎌야만 한다.


그리고 죽은 채로 몸이 훼손당하는 일을 나는 점점 더 자주 겪고 있다. 그냥 뒀더니 되살아나더라는 걸 그들도 눈치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멍청한 놈들이지만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인지 그 때 죽였던 그 여자가 딴 데서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다니더라는 걸 자기들끼리도 알아보고 윗선에 보고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주 바보는 아니더라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라서 어떻게 해야 완전히 죽는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마주칠 때마다 팔다리도 잘라보고 목도 베어보고 배도 갈라보고 자기들 딴에는 상상할 수 있는 별별 방법을 다 써먹어 보는 것이다.


그래봤자 멍청한 놈들이니까 그런 방법이 먹힐 리가 없다. 한 번은 목을 베어서 따로 가져가버린 적도 있지만 중간에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물방울이 내려오자 내 목은 녹아 사라졌고 나는 다시 살아났다. 상자 속에 잘린 목이 들어 있으려니 하고 마음 턱 놓고 갔던 놈들은 아마 자기네 대장 앞에서 뚜껑을 열어보고 기겁을 했을 것이다. 바보 자식들이 똑같이 멍청한 윗대가리한테 신나게 깨졌을 걸 상상하면 그냥 그대로 목만 살아나서 그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게 상당히 아쉽다.


내가 살아나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향기가 퍼져나가고 물방울이 내려오면 나는 살아나야 한다. 찢어진 몸뚱아리를 다시 붙이고 끊어진 목숨을 돌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라리 그대로 완전히 죽어버리기를 바란 적도 많이 있지만 사실은 매번 그렇지만 나의 몸은 내 자신의 감각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방울을 빨아들이고 노랫소리를 빨아들이고 생명의 향을 빨아들이며 도로 살아난다.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기는 쉽지 않지만, 산 것이 완전히 죽어버리기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는 몸으로 겪고서야 알았다.


언젠가는 다시 살아나지 않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생명 있는 인간이 모두 그러하듯이 나 또한 완전히 죽어서 이승에 태어나기 전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날 - 혹은 어딘지 모를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었듯이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는 것도 내 의지대로는 되지 않는다. 그런 날이 언젠가 올지도 알 수 없지만, 만약에 그 날이 정해져 있다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 나는 죽어도 죽지 못하고 정해진 시간만큼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인간이다. 악마가 아니다.


단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뿐이다.


 


어머니는 레치피세츠의 노래를 듣고 나를 잉태하였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와 함께 언제나 길 위에서,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것이 삶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조금 더 자라고 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집이라는 곳에서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람과 형제 혹은 자매라고 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걸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앞날을 점쳐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렇게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하는 일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모든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하듯이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


어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이 있는 거야.”


나는 수긍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하늘을 가리켰다.


정령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지? 우리를 부르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가야 하는 거란다.”


나는 여전히 수긍하지 못했다. ?


어머니가 설명했다.


어딘가 여기보다 더 좋은 곳, 더 평온한 곳이 있을 테니까.”


거기가 어딘데?”


정령이 노래하는 곳.”


어머니의 대답은 좀 더 자란 뒤에 생각해보니 순환논리였으며, 아직 어렸던 그 때 생각에도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그곳으로 가지 않는 거지?


듣지 못하니까.”


듣지 못하다니? 어째서? 그렇게 뚜렷하게 들리는데? 그렇게 아름다운데? 서로의 목소리와 세상의 다른 모든 소리는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 있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낭랑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거지?


이렇게 캐물으려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내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단다. 모든 사람이 다 달라.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볼 수는 있지만 들을 수 없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래. 그래서 그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자신과 같다고, 같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같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나를 끌어당겨 꽉 껴안았다. 너무 꽉 안았기 때문에,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마침내 나를 놓아주었을 때 나는 물었다.


그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냄새도 못 맡고, 물도 못 마시는 거야?”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냄새? ?”


내가 설명했다.


정령이 날고 노랫소리가 들리면 좋은 냄새가 나잖아. 그리고 하늘에서 물방울도 떨어지고.”


나는 어머니가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덧붙였다.


물방울 맛있어. 차가운데 춥지 않고 시원해.”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넌 그게 다 느껴지니? 향기도, 맛도? 시원한 감촉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나를 끌어당겨 꽉 안았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참았다. 그러나 기다려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버둥거렸다. 품에서 풀려나와 얼굴을 보았을 때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 날 밤 짐을 꾸려 다시 한 번 길을 떠났다.


 


나의 존재에 어떤 커다란 우주적 의미 같은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뭔가 의미나 의도 같은 게 실제로 있었다면 어머니나 나의 존재는 아마도 일종의 실수였을 것이다.


정령의 흔적은 사람이 알아보라고 쓴 글씨가 아니었으되 그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끔 가다 나타난다. 말하자면 잘못 배달된 편지 같은 것이다. 뜯어봤더니 생전 처음 보는 외국어로 쓰여 있는데, 그런데 읽어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는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 걸 뭐하러 꾸역꾸역 읽어봤는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어머니나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레치피세츠는 땅 위의 인간을 위해 노래하지 않는다. 그저 새가 지저귀듯이 그렇게 마음 내키면 노래하고, 꽃이 피면 향기를 피우듯이 향을 풍기고, 구름이 끼면 비가 오듯이 물방울을 내릴 뿐이다. 그 노랫소리를 실제로 듣고, 향기를 실제로 맡고, 물방울의 감촉과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말하자면 돌연변이다.


그러나 그 돌연변이 중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그렇기 때문에 힘을 갖게 되었으며, 그 권력 구조 안에서는 볼 수 있는 사람 중에서는 극소수에 속하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최상위층에 속하게 되었다.


내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그저 운이다. 보고 읽는 사람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반응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운이 나빠서 이런 몸으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읽지 못한다. 정령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흔적의 향기를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으되 하늘에 불타는 자국에서 의미를 찾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나는 악마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그저 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보 자식들이라고 경멸하는 그 사람들이 정말로 내가 모르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삶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중심에 놓고 돌아가는 어떤 거대한 섭리의 한 조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거대한 섭리 자체가 존재하는지부터 한낱 인간인 나로서는 알 수 없거니와, 만약에 존재한다 해도 그 섭리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간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한 점 티끌처럼 우연히 태어나며, 과일 속에서 벌레가 살아가듯이 지구에 기생하여 살아간다.”


자기 자신이 우주적 원리의 핵심이며 신의 섭리의 중심이라 믿는 것은 신심이 아니라 자만이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벌레가 벌레로 태어난 것만큼이나 우연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다. 어떤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형이상학적인 계획에 따라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수많은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냥 태어나서 자기 할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면 되는 것이다.


레치피세츠의 존재가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우주의 원리는 나라는 한 사람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주의 한 점 티끌이기 때문에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향을 맡을 수 있고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고 삶은 풍요롭다. 그래야 한다.


어째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바보 새끼들.


 


깜깜한 밤 하늘 한 구석에 황금빛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별빛처럼 보이지만 별빛과는 다르다.


아름답다.


곧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나의 온 몸이 정령의 물방울에 젖을 것이다.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난다면 말이다.


 


정령의 모습을 보고, 노랫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고, 정령이 내리는 물방울의 맛과 감촉을 느끼는 존재는 생명을 얻는다.


바꾸어 말한다면, 완전히 죽이고 싶다면 들을 수 없게, 향도 맛도 감촉도 느낄 수 없게 하면 될 것이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허벅다리가 아니고 머리통을 짓이긴다든가, 정령이 다시 내려오기 전에 얼른 태워버린다든가.


물론 저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알 수 없을 것이다. 보고 듣는 것 이외에 다른 감각으로도 정령을 느끼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듣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저들도 알고 있다. 보는 자와 읽는 자들은 오랫동안 듣는 자들의 존재를 감추고 억누르기 위해서 애써 왔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다른 감각이 전면에 등장하면 그 순간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평생 나를 데리고 도망쳐 다녔다. 그리고 화살에 귀를 꿰뚫렸을 때 완전히 죽었다.


 


정령이 노래하는 곳.


어머니가 늘 하던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나를 안심시키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마음의 위안을 주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발견했다. 생의 아주 짧은 동안 어머니와 나는 그곳에서 지냈다. 나는 그곳에서 빠르게 성장하여 성년을 맞이하였다.


 


떠도는 삶을 살면서 배운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사람은 이미 모두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규율에는 정말로 여러 가지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단 하나의 신에게 영혼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불문율로 정한 곳도 있었고, 반대로 여러 신을 번갈아 경배하는 곳도 있었다. 여러 신 중에서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 모셔야 하는 곳도 있었고, 신이 아닌 귀() 혹은 죽은 조상의 혼백을 숭배하는 곳도 있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져 둘이 다 죽을 때까지 한 사람과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곳도 있었고, 한 남자와 여러 여자, 혹은 한 여자와 여러 남자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곳도 있었다. 노인보다 아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곳도 있었고, 반대로 아이는 물건처럼 다루면서 노인은 신처럼 떠받드는 곳도 있었다. 대대로 한 곳에 머무르며 땅에 붙박여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축이 물과 풀을 찾아 떠돌면 따라다니면서 함께 떠도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각각의 삶의 방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며 절대적으로 좋다 혹은 나쁘다고 단정지을 수 없었다. 각각의 관습은 인간이 만든 것이었으므로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었다. 또한 어느 곳에나 관습과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언제나 존재했다.


그리하여 내가 깨달은 것은 이 모든 삶의 방식과 형태와 제도와 관습은 어느 하나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한 곳에서 불법인 행동이 다른 곳에서는 합법이기도 했고, 한 쪽에서 절대적으로 그르다고 하는 삶의 방식이 다른 쪽에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모든 사회, 모든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한 가지 규율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다른 인간을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한 가지만 지킨다면, 사회 전체로 봤을 때 어떤 관습과 어떤 생활 방식을 따르든지간에 사람들은 망하거나 죽지 않고 잘 살았다.


인간이 언제나 동족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세상을 좀 더 널리 떠돌았다면 같은 인간이 만든 관습과 규율을 절대적인 것이라 무조건 믿지 않고 스스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삶의 방식을 찾아내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정령이 노래하는 곳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물론 정령이 그곳에서만 노래했던 것은 아니다. 정령의 노래는 달빛과도 같아서 일단 노래가 시작되면 세상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소리를 감지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소수의 멍청한 새끼들이 노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그곳에 모여 살던 우리들은 모두 그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대부분 읽으면서 들을 수 있거나, 들으면서 향을 맡을 수 있거나, 보면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감각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관습이고 불문율이었다.


그 외에 우리는 평범했다. 나는 어머니가 실을 자아 천을 짜서 색색으로 물들여 옷을 지을 줄 안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누군가는 땅을 일구어 작물을 키웠고 누군가는 동물을 돌보았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물건을 사고 팔았다. 사람이므로 각자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으며,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잘 될 때도 있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정령의 노래를 듣고 향을 맡고 생명의 흔적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매일의 일상에 아무런 직접적인 이익이 되지 않았고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어머니와 나는, 평생 처음으로, 평범했다.


정령이 찾아오면 마음 내키는 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이 감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존재를 즐겼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령이 우리를 신경쓰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도 정령에게 굳이 예를 갖추거나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정령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운 노랫소리가 들리고 좋은 향이 풍기고 신선한 물방울을 맛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무가 열매를 맺고 어린 동물들이 자라나고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고 가축이 새끼를 배고 여자들이 아이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굳이 정령이 오지 않아도 자연히 다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즐거운 방식으로 힘차고 왕성하게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르게 살았다. 정령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었고 그저 달랐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다름이라는 개념을, 어떤 사람들은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바보 새끼들.


 


남자는 손이 빛나는 사람이었다. 뱃속의 아이가 남자에 의해서 잉태되었는지 아니면 정령에 의해서 잉태되었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나도 남자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그러했듯이 남자도 정령에 의해 잉태되었다. 나도 남자도 그 때문에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도망쳐 다녔다. 나도 남자도 더 이상은 도망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남자의 어머니는 듣고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와 함께 천을 널어 물들이다가 정령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함께 귀를 기울였다. 허공의 흔적을 읽고 가끔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들. 인간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들.


남자는 정령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단지 손이 빛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 빛나는 손으로 만지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염색해서 널어 말리던 천을 빛나는 손으로 건드리자 천에 꽃이 피었다. 이웃의 아픈 강아지를 쓰다듬어주자 병이 나으면서 등에 날개가 돋아난 적도 있었다. 썩어가던 나무가 되살아나 황금 열매를 맺기도 했고 얼어붙은 강물이 갈라지면서 물고기들이 줄지어 하늘로 날아올라 허공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남자가 종종 빛나는 손으로 아기가 자라나는 나의 배를 만져주었기 때문에,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지 나는 무척 기대되었다.


남자도 나도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한낱 인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지도 자라나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남자도 나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군대가 마을을 침략하여 사람들을 도륙했다. 그 때 정령은 노래하지 않았다. 묶여서 끌려가기 전에 남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배가 갈라진 채 피 웅덩이 속에 죽어 쓰러진 나와 목 잘린 아기의 시체였다.


 


죽었으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은 지금도 가끔 보인다.


잠이 들 때와 잠에서 깨어날 때.


죽을 때와 다시 살아날 때.


아기의 얼굴은 피로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


 


황금의 선이 어두운 밤 하늘을 가르며 춤을 춘다.


때가 왔다.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달콤한 물방울이 몸을 적신다. 갓 피어난 꽃과 같은 향기가 풍겨온다.


그와 함께 온몸이 짓이겨지는 고통이 나를 덮친다.


 


정말로 죽을 수 있다면, 이대로 완전히 죽어버릴 수 있다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 ….!!! …


 


나는 눈을 깜빡인다. 누운 채로 손발을 움직여 본다.


허벅다리가 어떻게든 빨리 아물었으면 좋겠다. 미쳐버릴 것 같다. 빌어먹을 새끼들. 망할 개자식들.


 


효율적인 공격은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것이다. 실제 싸움에서 정말 효율적으로 빈틈을 찌르려면 엄청난 무기도 필요없고 대단한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된다.


나는 약자다. 저들은 여럿이고 나는 하나다.


그러나 나는 저들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죽어버리고,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저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다시 살아난다.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최대의 무기다.


나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수십 번의 삶을 그렇게 버텨왔다. 하늘에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형의 흔적에 의지하는 저들의 권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저들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고 저들의 위협은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가능한 한 똑바로 앉는다. 허벅다리가 아직도 아프다.


아픔이 사라질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살아나긴 했지만 완전히 살아날 수 있을지 결단코 장담할 수 없다.


두렵다.


이럴 때면 나는 도망치고 싶다. 먼 곳으로 가서 몸을 숨기고 저들과는 상관 없는 평온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나는 저들보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더 낫지도 못하지도 않다. 단지 다를 뿐이다. 그렇게 다른 채로 존재해도 되는 곳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령이 노래하는 곳.


살면서 이미 한 번 찾아내었으니, 계속 살다 보면 다시 한 번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간신히 일어선다. 허벅다리에 아직도 둔중한 통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곧 사라질 것이다. 이제는 안심할 수 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본다.


정령은 무심하게 하늘을 가로지른다. 그 흔적은 이제 색채를 바꾸어 은빛의 비가 천상과 지상을 적시는 것만 같다. 나는 멈추어 선 채로 그 흔적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온 몸의 감각을 통해 한껏 빨아들인다. 나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비를 감각할 수 있는 생물이라면 땅의 풀과 나무와 밤의 짐승들까지 모두 다 정령의 흔적을 빨아들여 꽃피고 되살아난다.


한 순간이지만, 세상은 아름답다….


 


선 채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나무가 열매를 맺고 짐승이 새끼를 배는 것은 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히 이루어지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이를 배고 낳아 기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아 기른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내가 나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기의 얼굴은 피로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


개자식들, 이라고 나는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며 수십만번째 중얼거린다. 처음에는 목이 쉬고 입술이 갈라지고 눈물이 말라붙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소리치고 고함치다 쓰러질 때까지 외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소리는 조금씩 작아졌다.


그러니까 나는 저들을 마주치면 계속 죽어버리고, 저들이 나의 죽음을 확인하고 안심할 때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되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계속 되살아나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의 의지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한다.


정령이 노래하는 곳. 하늘을 가로지른 곳. 우연히 태어나 자연스럽게 살아가다 완전하게 죽을 수 있는 곳.


방향을 잡기 위해 나는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그러나 정령은 사라졌고, 이제 그 마지막 향기도 공중으로 흩어졌다.


무심하고 아름답고 황량한 밤 하늘 아래 나는 죽어도 죽지 못한 채 홀로 서서, 정령이 사라져간 곳을 찾기 위해 캄캄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mirror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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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12.01.09 22:35 댓글 수정 삭제
    읽는 내내 불편하기도 하고 신비로운 기분에 감싸이기도 하는 드문 경험을 했습니다. 이런 느낌을 주는 글은 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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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2.01.10 12:02 댓글 수정 삭제
    솔직히 제가 써놓고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었는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ㅜ
  • No Profile
    가연 12.01.12 23:53 댓글 수정 삭제
    정령이 노래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고, 정령을 본다고 해도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폭력까지... 좋은 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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