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정도경

2011.10.29 00:3210.29

이것은 미래에 다녀와서 신세를 망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는 미래에서 별 신통한 것은 보지 못했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병원에 감금당했기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남자는 돈도 없고 옷차림도 괴이하고 말도 수상하게 했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무작위로 해 댔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게다가 신분을 조회하려 해도 아무런 자료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런 자료도 없다는 것은 즉 범죄 기록도 없다는 뜻이었고, 이것 하나만은 꽤나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안전을 담당하는 여러 공식 기관에서 이리저리 담당자를 바꾸어 가며 계속 질문을 받은 끝에 남자는 비밀스럽게 자신이 과거에서 왔다는 사실을 자백했고, 이러한 자백의 비논리성과, 평범한 주민 기록과 범죄 기록을 포함하여 아무런 기록도 없다는 사실이 합쳐져서 남자가 논리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곳은 정신병원 뿐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병원에서 삼 년을 지냈다. 그 삼 년 동안 남자가 원래 수집하려 했던 정보에는 접근할 수 없었으나 미래의 의료기술에 대한 정보만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생생하고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다. 미래의 정신병원에서는 약물이나 수술 등의 치료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뇌를 재구성했다. 남자가 도착한 미래의 세계에서는 뇌세포를 포함하여 인체의 모든 세포와 조직을 재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구축되어 있었으며 또한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거의 빈틈없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의 다른 부분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는데 정신적인 병증만을 보이는 사람은 뇌를 검사하여 문제적인 부분에 새로운 세포를 주입하여 분열, 성장시켜 뇌의 나머지 부분과 융합시켰다. 한 마디로 뇌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하는 일은 이 뇌의 재생성 과정이 문제없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면서 환자가 새로운, 더 완벽한 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물론 남자의 뇌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하긴 시간여행을 해서 미래로 갔으니 뇌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100%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남자가 알고 있는 한 자신의 뇌는 멀쩡했다. 그러나 남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고 자신은 과거에서 왔다는 주장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남자에 대하여 해리성 기억장애와 망상증을 비롯하여 남자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병명으로 상당히 화려한 진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남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자신의 뇌가 새로 태어나 자라는 과정을 시작부터 완성까지 직접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자체로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고 남자는 지금도 생각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상당히 기분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뇌가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는 모든 상황에서 더 명료하게 이해하고 더 빨리 판단할 수 있었으며 더 오랫동안 더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상상력이나 어휘력도 더 풍부해졌고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단 한 가지 색채 감각만은 아무래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듯하여 여전히 초록색과 빨간색을 잘 구분할 수 없었다. (치료의 주된 방향이 그 쪽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갇힌 처지라 운전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친절했으며, 그가 공격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룹 치료 등의 사회화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처럼 뇌를 새로 생성시키는 중인 다른 미래의 정신병자들과 여러 가지로 접촉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은 남자가 미래에서 지내는 동안 무척이나 외로웠다는 것이다.
시간 여행이라는 임무는 남자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스스로 자원했으며, 그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하여 훈련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대비하지 못한, 예측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다른 상황들이 수없이 벌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이라고 각오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예측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실제로 겪는 것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완전히 다른 법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친절했고 치료의 과정도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지만 그곳은 어디까지나 정신병원이었고 남자는 자유를 빼앗긴 채 갇혀 있었다. 그리고 정신병원 바깥은 미지의 세계, 남자가 속하지 않으며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낯선 시공간이었다. 미래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남자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매 순간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 속에서도 도움을 청할 낯익은 얼굴은 없었다.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기묘한 침대와 의자 하나만이 놓인 자그마한 병실에서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것은 침대 옆의 흰 벽이었다. 남자가 떠나온 과거에도 사람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건물에는 벽이 있었다. 미래의 정신병원에 끌려와 갇혀 지내게 된 후로 남자에게 유일하게 친숙하다고 느껴진 것도 벽이었다. 기묘하게 생긴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 남자는 벽에 한껏 몸을 붙이고 과거에 두고 온 자신의 삶과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신과 의사들과는 달리 벽은 남자의 말에 반박하지도 않았고 심각한 얼굴로 컴퓨터에 뭔가 입력하지도 않았으며 간호사를 불러 치료실로 데려갈 것을 명령하지도 않았다. 벽은 침묵 속에 남자의 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들어주었고 대답 대신 무심한 냉기를 뿜어냈다. 그것 또한 과거 자신이 살던 시대에 언제나 보아왔던 희고 평범한 벽들과 같았기 때문에 남자는 오히려 안심할 수 있었다. 다시는 자신이 떠나온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며 다시는 가족과 친구와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와 절망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올 때마다 남자는 벽에 몸을 붙이고 그 시간을 견뎠다. 그리고 확실히 말하건대 그런 시간들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 절망과 어둠은 남자가 눈을 뜨고 있는 매 순간마다 엄습해 왔으며, 잠이 들어 무방비해진 남자의 꿈속을 지배하고 마음을 검고 무겁게 물들였다.


그렇게 이 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때 남자는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여자도 남자 자신처럼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였다.
남자는 여자의 이름도 나이도 병명도 알지 못했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환자의 신상 보호를 위해 다른 환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수 없었고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미술 치료 시간에 여자를 처음 보았다. 여자는 화면 위에서 손가락으로 여러 가지 색깔을 택하여 하얀 전자 공간에 이런저런 모양들을 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무심하고 자연스러워보였기 때문에, 정신병원의 미술치료 시간이라는 정황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서 남자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곧 남자는 여자가 그리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들을 알아보았다. 여자가 그리는 형체들은 미래의 세계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책과 연필, 펜 등의 필기도구였다.
그것을 알아본 순간 남자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저 여자는 누구이며, 대체 어째서 내가 떠나온 시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물건들을 그리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하여 그 모습, 그 순간은 남자의 새로 생성된 뇌 속에 영원히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남자는 가능한 한 자주 미술 치료를 신청했고, 미술 치료 시간이 아니라도 여자는 종종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발견하면 어째서인지 그 순간 바로 여자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정면으로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멋없이 흰 환자복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매번 여자는 우표와, 플로피 디스크와, 타자기와… 그가 살던 시대에도 사라져가던 물건들은 물론, 그가 어린 시절 사진 속에서나 보았던 물건들을 화면 위에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는 어느 날 여자 옆에 앉았다. 여자는 남자를 잠깐 돌아보고 언제나 그렇듯이 방긋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이번에 여자는 붓을 그리고 있었다. 그와 관련하여 남자는 뭔가 대화의 시작이 될 만한 사교적인 문장을 생각해내려 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새로 생성된 뇌조차 이런 상황에서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자가 아무래도 입을 열지 못하고 끙끙대는 동안에 여자는 붓을 다 그리고 옆에 뭔가 남자가 알지 못하는 물체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그 물체들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남자는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화면 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여자의 오른손 손목 안쪽에 나 있는 흉터를 보았다.
흉터는 짙은 갈색으로 가늘고 뚜렷했다. 하얀 피부 위에 길게 이어진 자국을 본 순간 남자는 흉터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쩐지 여자의 피부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다.
그 때 여자가, 여전히 화면을 내려다보며, 손목에 금이 간 오른손을 무심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여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또렷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스며드는 것처럼 확실하게 들렸다.
남자는 여기에 대하여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원래는 여자가 붓 옆에 그리고 있는 물체가 무엇인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여자의 흉터를 보았기 때문에 막혔다. 그리고 이제는 여자가 말을 했기 때문에 머릿속과 입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과 문장들이 완전히 엉겨 버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남자는 약간은 바보스러운 모습으로 입을 살짝 벌린 채 여자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면 나를 기억하세요.”
그리고 여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미술 치료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남자는 여자 곁에 앉아 있었다. 치료 시간이 끝나고 간호사들이 그림 파일들을 저장해서 치우기 시작할 무렵에 여자는 그림을 거의 완성했다. 남자는 책이 여러 권 꽂힌 나지막한 책장을 알아보았지만 그 위에 놓인 물병같이 생긴 길쭉한 물건은 무엇인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자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화면을 건드려 그림을 지워 버렸다.


정신병원에서 풀려난 뒤에 남자는 쓰레기를 분류하여 재활용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곳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으로, 실제적인 수요에 의해 기능하는 곳이라기보다는 교도소나 정신병원에서 풀려난 뒤에 갈 곳이 없게 된 사람들의 재활(과 감시)를 위한 기관에 더 가까웠다. 그러므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그다지 유쾌한 인물들이 아닐 것이라고 남자는 처음에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 뇌 재생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었고, 대부분은 치료 후에 범죄적 혹은 정신병적인 성향이 완전히 사라져 정상적인 상태로 변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치료 이전의 여러 가지 정황과 그들 스스로 저지른 행위, 그리고 그런 행위로 인해 뇌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인하여 사회의 다른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남자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같은 공장에서 일했다. 남자가 살던 과거에도 그곳을 떠나온 미래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생활 속에 사용했고, 그런 물건들이 망가지거나 수명이 다하면 쓰레기로 배출했다. 대부분의 쓰레기는 주거시설에서 기계가 자동 분류했지만, 서로 다른 재질이 섞인 물건이라든가 크기가 너무 작아서 기계로 분류할 수 없는 물건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물건들이 공장으로 보내져 왔고, 남자는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중간에 식사 시간 한 시간을 제외한 하루에 일곱 시간씩 위생복으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감싼 채 모양과 재질에 따라서 쓰레기를 분류하여 재활용 공정으로 보내는 작업에 종사했다. 일은 단순했고, 임금은 많지 않았으나 모자라지도 않았으며, 기본적인 의식주는 일괄 지급되는 작업복과 기숙사와 구내식당 덕에 무료로 해결되었다.
그래서 저녁 다섯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까지 남자는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또 다시 흰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정신병원의 병실과 유사하게 남자의 기숙사 방은 좁았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이제는 무슨 재질인지 알게 된 재료로 만들어진 기묘한 모양의 침대와 의자가 있었다. 그 외에 책상도 있다는 사실만이 병실과 달랐으며, 어찌 보면 일종의 발전이었으나,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는 침대 위만이 아니라 가끔은 의자에도 앉게 되었지만, 그렇게 앉아서 벽에 기대어 가족과 친구들과 두고 온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남자는 가끔 울었다.
임무는 실패했고, 그는 돌아갈 수 없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그가 떠나온 시대와 사람들은 이제 기억 속에서조차 희미해져버렸지만, 때로 그 기억은 너무나 견딜 수 없이 생생하게 돌아와 그를 괴롭히곤 했다. 일어나서 기숙사의 방 문을 열면 자신이 떠나온 세상이 그곳에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고, 그래서 밖으로 나가면 곧장 소중한 사람들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세상은 이 시대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소중한 사람들은 시간 속에 묻혀 이제는 후손들의 기억에서조차 잊혔을 것이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그런 사실과 가슴 속에 떠오르는 선명한 기억과의 괴리 사이에서 그의 마음은 수천 갈래로 찢어졌으며, 그럴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심하게 차가운 하얀 벽에 얼굴을 파묻고 무력한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견디기 힘들 때면 그는 정신병원으로 여자를 만나러 갔다.
여자는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흰 환자복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하얀 화면 위에 손가락으로 색색가지 모양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찾아가도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면회 시간 내내 곁에 앉아서 여자가 손목에 어두운 갈색의 가느다란 금이 간 하얀 오른손을 움직여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그리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가끔 여자는 그가 알 수 없는 물건들을 그렸지만, 물어보아도 대답해주지 않았으므로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기했다. 말없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그저 머릿속으로만 여자가 그리는 물체들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것이 남자에게는 일종의 놀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정신병원에서 3년을 지내고 남자는 쓰레기 재활용 공장에서 5년간 일했다. 도합 8년이 지난 후에 남자는 과거로 돌아왔다.
정확히 어떻게 해서 귀환하게 되었는지는 남자 자신도 알지 못했다. 작업 중에 갑자기 반장이 찾으러 왔다. 반장을 따라 들어간 공장 사무실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공무원들이 와 있었다. (과거나 미래나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검은 정장을 입는구나, 라고 남자는 생각하며 어째서인지 속으로 조금 웃었다.) 검은 정장 공무원들의 명령에 따라 남자는 위생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공무원들이 시키는 대로 차에 탔다. 차는 공중으로 떠올라 꽤 오랜 시간을 날아서 남자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남자는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대부분의 질문들은 정신병원에서 3년간 수천 번, 수만 번이나 들었던 질문들과 거의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아니라 검은 정장을 입은 딱딱해보이는 공무원이었으며, 공무원은 그에게 ‘당신이 과거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처음부터 못을 박았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정직하게 사실대로 최대한 명료하게 답변했다. 취조가 끝난 뒤에 그는 어떤 방으로 안내되었고,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남자 자신의 적응을 위하여 그가 떠나온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 그보다 약간 더 시간이 흐른 시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역시나 검은 정장을 입은 딱딱한 얼굴의 공무원이 말했다.
남자는 정신을 잃었다. 미래에서 보낸 8년의 세월이 그렇게 사라졌다.
깨어났을 때는 병원이었다. 처음에 남자는 정신병원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침대 곁에 앉아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난 사람은 이제 얼굴조차 가물가물해져버린 그의 직장 상사였다. 직장 상사는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손짓으로 막고는 어딘가에 격렬하게 전화했다. 그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공무원들이 몰려왔다.
그렇게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미래를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차에 태워져 (차는 땅을 달렸다) 어딘가로 실려갔으며 검은 정장을 입은 딱딱한 표정의 공무원들 앞에서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또한 흰 가운을 입은 여러 의사들에게 이런저런 검사도 받아야 했다. 그는 미래의 세상에 대하여 자신이 보고 듣고 겪고 알아낸 사실들을 가능한 한 자세히,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다만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미래를 떠나 자신의 시대로 돌아오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여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에게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전과 똑같이, 책이 여러 권 꽂혀 있는 나지막한 책장 위에 물병처럼 생긴 길쭉한 물체가 놓여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면회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 여자는 그림을 사라지게 한 후에 갑자기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잘 가요.”
그는 기뻤다. 그래서 대답했다.
“또 올게요.”
다시 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떠나온 시대로 돌아왔지만 그의 임무는 여전히 실패였다. 그는 본래 알아내려던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윗선에서는 일단 그가 살아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과, 뭐가 됐든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얼마간 병원에서 머무르며 검사를 받고 휴식을 취한 뒤에 그는 이전의 직장에 복귀했다. 돌아왔다고 해서 영웅이 되지도 못했지만, 임무에 실패한 것 때문에 징계나 어떤 불이익을 받지도 않았다. 다만 시간 여행과 그의 임무는 극비이므로 직장 안에서든 밖에서든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남자는 별 저항 없이 수긍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그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만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떠나간 시점으로부터 1년이 지나 있었다. 공식적으로 그 1년간 그는 해외에 파견을 나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방은 떠날 때보다 조금 더 깨끗하게 청소된 채 그대로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그 자신만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며칠동안 방에서 나가지 못했다. 나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가지 못했다.
그는 두려웠다. 무엇이 두려우냐고 누군가 물어보았다면 대답하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정신병원의 병실에서 했듯이, 그리고 이후에는 공장 기숙사의 자기 방에서 했듯이, 침대 위에 앉아서 벽에 몸을 기대고 사흘 밤낮을 지냈다.
어머니는 방으로 음식을 갖다 주면서 어째서 이전에 하지 않던 짓을 하느냐고 타박했다. 남동생은 호기심에 찬 얼굴로 그의 방을 계속 기웃거렸다. 한때는 이 모든 사람들을 몹시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는 남동생을 반갑게 맞아들여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남동생은 주로 자신이 지난 1년간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왔는지를 토로하면서 “해외에 파견”나가 있었던 그의 생활은 화려하고 즐거웠을 것으로 전제하고 자신을 즐겁게 해줄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늘어놓아주기를 기대했다. 그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해줄 에피소드가 없었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서 남동생을 즐겁게 해줄 정신적인 여력도 없었다.
결혼해서 멀리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이 전화했다. 어린 아기 때문에 만나러 올 수 없지만 여동생은 오빠가 해외에서 돌아온 것을 무척 반기는 목소리였다.
“고생 안 했어? 힘들었지?”
예상치 못하게 이런 말을 듣고 그는 하마터면 소리내어 울 뻔했다.
이렇게 물어본 사람은 그의 주변에서 여동생이 유일했다. 부모와 남동생과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은 모두 그가 해외에 이름만 좋은 “파견”을 나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일 년간 신선 놀음을 하다 왔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거짓 정보였기 때문에 그는 여기에 대하여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동생은 이렇게 물었다.
“집 나가면 고생인데… 아프진 않았어?”
“응… 괜찮았어.”
그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오빠 오니까 좋네, 전화도 할 수 있고.”
여동생은 말했다.
전화를 끊은 뒤에 그는 전화기를 움켜잡고 침대 곁의 벽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없이 흐느꼈다.


그가 돌아온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죽었다. 뇌졸중이었다. 아버지는 수술을 받은 뒤에 죽기 전까지 37일간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 37일 동안 그는 매일 병원에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와는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그와 그의 형제들이 자라나면서 아버지는 점점 가족들과 멀어졌고, 최근 몇 년간은 거의 집을 나가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쨌든 아버지였다. 가족들과 멀어진 것은 그와 형제들이 모두 성인이 된 이후의 일이었으며, 그렇게 멀어진 이유 또한 한 마디로 요약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거나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특별히 자상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 보통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보통의 아들이 보통의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그도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그 37일간 그는 무척 괴로웠다.
어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찾아와서 아버지의 몸을 씻겨주고 환자를 돌보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채워놓고 갔다. 친척들, 아버지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가족도 다들 한 번씩은 찾아왔다. 입원한지 한 달이 지나고 의사가 가망이 없으니 준비를 하셔야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살던 여동생도 어린 아기를 업고 어렵게 병원에 찾아와 의식이 없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울었다.
남동생만은 37일간 한 번도 병원에 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 자신도 장례식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아버지는 새벽에 혼자서 운명했다. 병원에서 전화를 받고 그와 어머니와 남동생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운전을 하지 못했고, 남동생은 이런 상태로 운전을 할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그는 초록색과 빨간색을 잘 구분하지 못했으므로, 셋은 택시를 탔다.
택시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아직 동이 다 트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첫 손님으로 태워주려는 기사는 없었다. 남동생과 그가 집 앞 큰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닌 끝에 간신히 한 대를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을 태워준 택시 기사는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애초에 신새벽부터 상복 입은 사람들을 태워준 이유도 그것이 종교적인 의미의 선행이라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가 앞에 타고 어머니와 남동생이 뒤에 타서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 기사는 차를 몰면서 은혜와 은총, 감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태워준 것은 사실 감사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와 그의 어머니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사의 종교와 관련하여 잡담을 시작한 것은 남동생이었다.
남동생은 친구 누군가에게서 얻어 들었다는 어떤 종교 단체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우연인지 아니면 남동생이 알고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택시 기사는 바로 그 종교 단체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듣기에도 얼토당토 않은 남동생의 주장을 들으면서 택시 기사는 당연한 일이지만 점차 눈에 띄게 불쾌해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택시 기사가 반박하자 남동생은 웃으면서 자기는 친구에게 분명히 들었다고 주장하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택시 기사는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가 느낀 바 남동생은 이 논박을 즐기고 있었다.
택시 기사와 남동생의 논쟁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남동생에게 입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어머니를 고려하여 참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가면서 도중에 별 관련도 없는 종교 단체에 대하여 택시 기사와 쓰잘데 없는 논쟁을 즐기는 것은 남동생 나름대로의 방어 기제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그 자신으로서는 견딜 수 없이 괴상한 종류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장례식은 괴로웠다. 그는 아버지를 ‘고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도 아버지는 살아 있었고, 비록 병원에 누워 있었지만 분명 혈압도 있고 맥박도 뛰었으며, 그는 모니터에 나타난 숫자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아버지를 ‘고인’이라고 말할 때마다 그는 아버지가 아직도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생각하고 어디서 재수없게, 라고 벌컥 화를 내려다가 현실을 깨닫고 분노를 눌러야 했다.
그의 남동생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모인 친척들에게 허리의 통증을 호소했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요통으로 고통받았는지, 병원을 몇 군데나 돌았지만 의사들이 아무도 병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심지어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까지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고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길게 늘어놓으며 남동생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사촌들에게 좋은 의사를 알면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로 그는 남은 가족들과 자기 자신 사이의 괴리를 더 확실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남동생을 그다지도 괴롭혔다던 허리의 통증은 장례식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자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리고 남동생은 멀리 다른 도시로 시집간 여동생의 어린 아기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만으로 두 살인 조카는 이제 곧 세 돌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남동생은 그 생일 잔치에 같이 가자고 그에게 권유했고, 그가 직장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하자 그럼 선물을 함께 사서 보내자고 끈질기게 졸랐다. 남동생은 전에 없이 여동생과 자주 통화했고, 아기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여러 장 받아서 그에게도 보여주며 예쁘다고 칭찬을 거듭했다.
조카에 대해서라면 그는 이미 장례식장에서 여동생과 이야기했다. 여동생은 아버지 상을 치른 뒤에 아기의 생일이 시기적으로 너무 가까운데다 백일도 아니고 첫 돌도 아닌 세 살 생일 잔치라서 크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카의 생일 선물 정도는 그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남동생과 어떤 식으로든 함께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동생이 예정도 없는 조카의 세 살 생일잔치에 갑자기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아버지를 돌보았듯이, 자신도 가족 중의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고 생색을 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여동생의 딸은 아버지와는 달리 남동생이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조카는 어디까지나 조카였으므로, 그저 핸드폰 사진 같은 걸 보면서 예쁘다고 호들갑을 떨고, 뭣하면 돈을 좀 들여서 작은 물건이라도 보내주면 삼촌으로서의 도리는 적당히 하게 되는 것이다. 죽어가는 아버지보다는 곧 세 살이 될 여자 아기가 훨씬 더 보기에도 귀엽고 대하기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형이 병원에 있는 아버지를 돌보고 돌아가신 후에는 상주로서 장례식과 이후의 여러 가지를 책임졌듯이, 자신도 그에 상당하는 뭔가를 하고 있다고 남동생은 시위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그의 해석이었다. 지나치게 비뚤어진 해석이었을 수도 있지만 병원에 다니던 37일 동안, 그리고 이후 장례식 등을 겪으면서 그는 여러 가지를 너그럽게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카에 대한 남동생의 호들갑을 무시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놓고 싸움을 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가 동생에게 못되게 군다고 화를 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형제가 다 서른이 넘었는데 어째서 이 날 이 때까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같이 화를 내려는 그에게 어머니는 동생이 허리도 아프고 예민하니 부드럽게 대해줘야 한다고 타일렀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을 들은 순간 그는 남동생이 아버지가 입원해서 사망하기까지 37일간 한 번도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갑자기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머니와 남동생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같이 깨달을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의 남동생은 언제나 연약하고 예민하여 어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으며 한 마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 누군가를 돌보아주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 대상에게 절대적인 존재라는 느낌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자존감과 정서적 충족감의 원천이며 그러므로 상당히 중요한 감각이다. 그러나 남자의 어머니의 경우, 다분히 무뚝뚝하고 가정보다는 일을 우선시하는 성격이었던 아버지로 인하여 결혼한 성인 여성이 배우자이며 동반자인 남편에게서 얻어야 할 정서적 위안을 얻지 못했고, 그리하여 그 결핍된 부분을 어머니는 작은 아들을 보살피면서 채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나치게 돌보아주고 지나친 애정을 퍼부은 끝에 그의 남동생은 신체적 연령적으로 어른이 된 뒤에도 정서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독립하지 못했고 아마도 독립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남동생이 필요했고, 남동생은 자신을 돌보아주는 어머니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상호의존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상호의존’이라는 단어를 그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아냈는데 상당히 적절한 단어라고 여겼다.
남동생은 서른 살이 되기까지 특정한 직업 없이 이런저런 자격증 학원 등을 떠돌고 있었고 부정기적인 아르바이트를 가끔 할 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미래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동생은 갑자기 자신의 직업과 경력에 대해서 매우 걱정스러워하며 그의 방을 기웃거리면서 틈만 나면 직업 상담을 하고 싶어했다. 그는 고무적인 현상이라 여기고 상담에 응해주었는데, 맥주 일곱 깡통을 비우며 새벽 세 시까지 이어진 상담의 요점은 남동생이 그가 일하는 기관에 자리를 알아보고 싶으니 추천서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일하는 기관에 취직하기 위해서 추천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시험을 치러서 합격하여 지금의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그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대학 시절, 특히 후반 2년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지금도 그 기관에서 일하기 위해서 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학원을 다니며 공부해 보라고 조언했다.
다음날 저녁 어머니는 그를 조용히 불러서는 어째서 동생을 도와주려 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기 전에 어머니는 동생이 ‘형이 자신을 싫어해서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라고 슬퍼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동생에게 못되게 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못되게 군 적이 없었다. 동생과 대화한 내용을 가능한 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요약해서 전달하며 그는 자신이 일하는 기관에 취업하려면 시험을 치러 합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고 그렇게 합격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도 응당한 노력을 했음을 강조했다. 물론 한 번에 시험에 합격한 것은 남들보다 운이 좋은 경우였지만 그는 분명히 시간과 공을 들였고 애를 썼으며 그래서 정당하게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너무 뭐든지 잘 하니까, 걔가 항상 네 그늘에 가려서….”
이 말을 듣고 그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포함하여 그의 부모가 이제까지 그가 ‘뭐든지 잘’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한국의 보통 부모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가 무엇이든지 더 잘 하고 최고로 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지적하여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 특히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인물이었으며 자식들에게도 자기 힘으로 세상을 개척하기를 종용했고, 그래서 그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지금 일하는 기관에 성공적으로 취업하자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반대로 남동생에 대해서 아버지는 뭔가 책임 있게 행동을 해 볼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때로 마찰을 빚기도 했다.
딱히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해서 노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모든 자식들이 그러하듯이 부모의 이런 가치관을 좋든 싫든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자기 또래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눈에 띄게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아주 뒤떨어지지는 않은 삶을 일구어냈다. 이제 와서 단지 동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 ‘너무 뭐든지 잘’ 하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한 예일 뿐이었다.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어처구니 없는 마찰이 빚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가 점점 참을성이 없어지고 덜 너그러워졌기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과의 갈등이 더 잦아지고 심해졌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들인데, 낯선 시공간에 홀로 떨어져서 그토록 외로워하며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이 사람들을 그리워했는데, 막상 돌아오고 나니 어째서 상황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알 수도 없었고 더 이상 견딜 수도 없었다. 그래서, 미래에서 배워온 방식으로, 그는 상담 치료를 받으러 갔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상담 치료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첫 번째 찾아간 상담사는 그에게 추근덕거렸다. 두 번째 찾아간 상담사는 초등학생 딸을 둔 중년 여성이었는데 상담 시간 50분 중 10분 이상을 딸과 통화하는 데 사용했다. 자리에 앉아서 말을 꺼내려 하면 언제나 전화벨이 울렸고, 그러면 상담사는 전화를 받고는 “응, 그래, 피아노 연습했어? 그럼 숙제 해야지” 혹은 “응, 그래, 숙제했어? 그럼 피아노 연습해야지” 등속의 대화를 이어갔으며, 그가 뭔가 불만을 표시하려 하면 전화기를 한쪽 귀에 댄 채 단호한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래서 그는 별다른 방법 없이 이런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고 나면 상담사는 엄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비난했다.
“대인 관계에 문제가 있는 이유는 본인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느껴집니다.”
상담사는 이렇게 말하며 그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들여다보았다.
“지금도 저를 쳐다보실 때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눈을 마주치면 상당히 불편해요.”
그는 상담사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판단한 적이 없었다. 상담사가 그의 소중한 상담 시간을 딸과 통화하는 데 소비하지 않고 좀 더 내담자에게 집중했다면 아마 눈을 마주치더라도 덜 불편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심리 치료를 포기하고 상담사 대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그가 미래의 정신병원에서 겪었던 의사들과 비슷하게 흰 가운을 입고 친절하게 웃었으며 그의 이야기를 별다른 비판 없이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는 안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상담부터 정신과 의사는 그가 하는 말의 내용보다도 선택하는 어휘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미칠 것 같다’는 좀 과격한 표현이지 않습니까? 본인의 상태를 더 정확하게 표현할 다른 말도 많이 있을 텐데, ‘미칠 것 같다’는 좀 심하지요.”
그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것은 언어 교정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어 선택이 부적절하다고 두 번쯤 야단맞은 뒤에 그는 정신과 치료도 그만두었다.
이런 상담사 혹은 의사들이 어째서 자신을 야단치는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다 자란 성인이었으며,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판단해서 인식했기 때문에 정당하게 치료비를 지불하고 도움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전문가로서 환자에게 합당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쳐다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단어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환자가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것이 치료에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는 미래에서 자신이 갇혀 있던 정신병원을 그리워했다. 자신이 그곳을 그리워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이 그리웠다.
그리웠지만, 갈 수 없었다. 그곳에 있을 때 다시는 과거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그리워했다. 이제 그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미래를 갈망하며 괴로워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상담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싫어했다. 상담소나 정신과는 ‘미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며 맏아들이 ‘그런 곳’을 드나든다는 것은 집안의 수치라고 여겼다. 그래서 상담소도 아닌 본격적인 정신과를 가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청소를 한다거나 과일 등속의 간식을 갖다준다는 명목으로 마음 내킬 때마다 그의 방에 드나들었고, 그러다가 그의 책상 위에서 정신과용 심리 검사 용지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냈다. 상담소도 아닌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것은 의료 기록을 남김으로써 자신이 ‘금치산자’임을 만방에 공표하는 짓이며 동시에 가족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이 망신스러운 행위라고 펄펄 뛰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어째서 이제까지 하지 않던 행동을 하면서 어머니를 이토록 괴롭히는지 물었다.
어머니가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진지하게 물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바라던 상황은 아니지만 어쨌든 솔직한 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정신과에 치료받으러 다니는 것이 어머니를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하는 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더불어 다른 여러 상황에 대한 자신의 입장도 해명하기 위해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했다.
“네 아버지는 때가 돼서 가신 거야.”
어머니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남들도 다 살다 보면 겪는 일인데 왜 그걸 가지고 정신과까지 가야 되니?”
이후의 대화를 그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있어 아버지는 지나치게 오래 지속된 괴로운 결혼생활 동안 여러 가지로 실망만 안겨준 사람이었고 최근 몇 년간은 그나마 어머니의 일상적인 생활 반경에서 아예 멀어져버린 인물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자식인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도 특별히 살가운 아버지는 아니었으며 어머니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자식들에게서도 멀어졌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그가 입은 상처나 충격은 어머니가 보기에는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일탈 행동 정도로 느껴졌던 것이다.
한편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8년간 낯선 시간과 공간에 홀로 남겨진 채 좁은 방안에 갇혀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그 중 가족이라는 항목에는 아버지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그리워한 끝에 간신히 돌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죽었다. 돌이킬 수 없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이제는 아무리 그리워해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미래에서 8년을 지내고 돌아와서 맞이한 혈육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시간은 고작 1년이 지났을 뿐이었고, 그 1년간 사람들도, 그들의 삶도 그다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1년간 서로 언제나 그랬듯이 데면데면하고 냉담하게 살아왔다. 그의 남동생과 아버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으며, 여동생은 멀리 시집가서 아기를 돌보는 데 바빴고, 꼭 결혼 생활이나 아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역시나 여동생에게도 아주 따뜻한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겪었던 극단적인 외로움, 절박한 그리움, 두려움과 절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으며,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평생 겪을 필요가 없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해도 아마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천륜이었고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그의 권리였다. 어머니의 기분을 맞추어주기 위해서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고민했다. 깊이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는 방을 구해서 집을 나왔다.


그가 구한 방은 희고 좁고 길쭉했다. 방을 구할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그 방에서 살면서 깨달은 바, 미래에서 그가 살았던 정신병원 병실 혹은 쓰레기 공장의 기숙사 방과 상당히 비슷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방을 구할 당시에 그가 그 방을 선택한 이유는 하얀 벽 위쪽, 천장 가까운 곳에 길고 가느다랗게 세로로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벽에 금이 갔네요.”
그가 이렇게 말하자 방을 보여주던 부동산의 여자 사장님은 몹시 당황해 했다.
“어머, 그런가요? 전에는 몰랐는데….”
부동산 사장님은 벽으로 다가가서 팔을 뻗어 금을 만져보았다.
“그냥 표면에 난 금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건물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구요, 정 불안하시면 집주인한테 말씀드려서 수리를….”
“아뇨, 그냥 두세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 방을 계약했다.


그가 ‘직장 가까운 곳에 방을 구하겠다’고 말을 꺼내자 어머니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러 가지 협박과 회유에도 그가 뜻을 굽히지 않고 이미 계약을 마쳤으며 다음 주에 이사하겠다고 선언하자 어머니는 증오에 가득 찬 얼굴로 내뱉었다.
“너는 가족을 버렸어.”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이 가족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꼈지만 그는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설명하거나 설득할 여지가 남지 않았으므로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짐을 챙겨서 조용히 집을 나왔다.
이사한 방에서 짐을 풀고 가구를 새로 들이고 살림살이를 정리하느라 그는 한동안 바빴고 그래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짐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뒤에 그는 방에 누워서 벽의 금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벽에 난 가느다란 금은 짙고 깊은 갈색이었다. 그 금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는 정신병원의 여자와 그녀의 하얀 손목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그리웠다.
기억과 실제의 경계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그는 벽의 금을 쳐다보며 생각하곤 했다. 미래의 정신병원에 있었을 때, 혹은 쓰레기 공장의 기숙사에서 살았을 때, 그는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던 지금 현재의 시간을,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했다. 이제 미래의 정신병원 병실과 기숙사 방,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여자의 얼굴은 그의 머릿속에 똑같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오랫동안 살았던 부모님의 집이 아닌 새로운 환경으로 옮겨온 지금, 또 다시 문만 열면 그 시간과 그 사람들이 문밖에 그대로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이, 그런 확신이 그를 휩쌌다. 그러나 그가 그리워하는 미래의 시간들, 그 사람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과거의 시간과 사람들과는 달리 돌아가서 다시 만나게 될 가망이 아예 없었다. 현재의 시간 속에서는 세상 전체에서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기억이었고, 그에게만 생생했던 현실이었다. 저쪽에 있었을 때는 이쪽을 그리워했듯이, 이쪽으로 돌아와서 그는 저쪽을 그리워했고, 그리하여 마음은 다시 갈래갈래 찢어졌다.
이번에도 그에게 의존할 곳은 벽뿐이었다. 그러나 그 벽은 무심하게 희지 않았고, 여자의 손목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짙은 갈색 금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쓰레기 공장에서 일할 때 정신병원으로 여자를 찾아가 위안을 얻었듯이, 방에 누워 천정 아래 벽에 난 금을 쳐다보면서 조금은 위안을 얻었다.


이사한 방에서 지낸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그는 직장에서 대대적인 감사와 인사 이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가 일하는 곳을 포함한 전체 부서의 장이 새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운 상사는 미래로 시간 여행을 다녀왔던 그의 임무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며 그 임무 자체뿐 아니라 특히 그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몹시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도, 그의 동료들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새 상사가 대규모의 감사와 인사 이동을 실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정부 기관의 성격상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한 쫓겨나는 일은 없겠지만 한직으로 떨어져서 오랫동안, 혹은 평생, 주변부만 맴돌게 되는 상황은 충분히 가능했다. 혹은 본래 목적했던 군사 관계의 정보를 전혀 수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실수’일지 그는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쫓겨나기 전에 떠나야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희미하게 마음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의 직장을 싫어하지 않았고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나 일과 동료들에 대한 감정적인 애착 등은 미래의 정신병원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쓰레기 재활용 공장에서 5년간 일하는 동안 거의 희석되어 사라졌다. 그는 직장에서 사람들이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거나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지 않고 일반 쓰레기와 함께 아무 쓰레기통에나 함부로 집어넣는 것이 몹시 거슬렸으며 자신이 이런 사소한 사실들을 거슬려한다는 점을 혼자 속으로만 재미있어했다. 다시 쓰레기 재활용 공장에서 평생 일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직장에서 쫓겨난다면 그다지 큰 충격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고, 그것은 그저 오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다만 직장을 그만두면 모처럼 구한 방의 월세를 낼 수 없게 된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얀 벽에 짙은 갈색의 가느다란 금이 있는 이 방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취방 벽에 간 금에 마음을 의지해서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견뎌야 하는 삶이라고 생각하면 … 정신병원의 병실이나 쓰레기 재활용 공장의 기숙사 방에 갇혀 있을 때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감사와 인사 이동은 소문만 돌 뿐 실제로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벽의 금을 쳐다보고, 밤에 자기 전에 다시 한 번 벽의 금을 쳐다보았다. 출근길에 만원 버스에서 흔들리면서, 혹은 직장의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일거리를 처리하면서도 그는 때때로 여자의 하얀 손목과 자취방 하얀 벽의 갈색 금을 떠올리며 마음에 위안을 삼았다.


길고 골치 아팠던 감사가 끝나고 공식적인 인사 이동 발표가 나기 전에 그가 일하는 부서에서 팀 회식이 있었다. 쫓겨나갈 사람들을 위한 암묵적인 송별회라고 하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팀장의 취향에 따라 삼겹살에 마늘을 곁들여 구워먹고 그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간신히 눈을 떠서 정신을 차리고 그는 전날 입었던 옷에서 고기 냄새와 여러 가지 역겨운 냄새들이 심하게 풍기는 것을 알았다. 자취방은 좁았고 베란다가 따로 없었으므로 그는 일단 창문을 열고 옷에는 탈취제를 뿌려서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탈취제를 제 자리에 내려놓고 해장을 위해 라면을 끓여 먹은 후에 그는 다시 방바닥에 큰 대자로 뻗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하얀 벽 위쪽의 갈색 금을 쳐다보다가 그는 문득 깨달았다.
금이 간 하얀 벽 아래 그는 조립식 책장을 사서 책을 꽂아두었다. 조립식 책장은 상자형으로 이루어져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구성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나지막하고 길게 정리했다.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잡동사니와 함께 방금 사용했던 탈취제 병을 놓아두었다.
정신병원에서 여자가 되풀이해 그렸던 그림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정체를 알 수 없던, 물병처럼 생긴 길쭉한 물체는 의류용 탈취제 병이었다.
그는 일어섰다. 책장으로 다가갔다. 책장과 탈취제와 천장 아래 흰 벽에 세로로 난 갈색 금을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갈색 금을 만져보았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여자가 나타났다.


“그곳이 그리운가요?”
여자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그의 얼굴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지금 떠나면, 이번엔 정말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요.”
여자가 천천히 말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에서 그는 8년을 잃었고, 돌아왔을 때는 이전의 삶을 모두 잃었다. 그는 이미 이곳에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는 그 어디에도, 어느 시간과 장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같이 있어줄 거예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 아마도.
그래서 여자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그 손을 잡았다.
여자의 손목에는 이전에 보았던 가느다란 짙은 갈색 금이 있었다. 그는 그 금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보고 싶었어요.”
그가 말했다. 여자는 웃었다.
흰 벽의 갈색 금이 조금씩 길어지고 깊어졌다. 금이 바닥까지 내려오며 벽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는 여자의 손을 잡고 시간과 공간의 균열을 통과하여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상처투성이의 불완전한 현재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 어떤 시공간에도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시공간도 그에게 속하지 않았다. 주어진 육신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는 언제 어디서나 다른 곳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기댈 흰 벽 대신 이제 그의 곁에는 손목에 금이 간 여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아마도.

mirror
댓글 6
분류 제목 날짜
이서영 왕자와 거지4 2012.01.27
이서영 종의 기원 (본문 삭제)5 2012.01.27
이서영 성문 너머 코끼리 (본문 삭제)5 2012.01.27
아이 허기 2012.01.27
아이 쭈글 할머니의 칼1 2012.01.27
아이 칼로 푹1 2011.12.31
정도경 정령이 노래하는 곳3 2011.12.31
정세랑 즐거운 수컷의 즐거운 미술관 (본문 삭제)10 2011.12.30
곽재식 8월과 도로의 끝6 2011.12.30
pilza2 네거티브 퀄리아(Negative Qualia) - 본문 삭제 -1 2011.11.26
아이 미행1 2011.11.25
이서영 악어의 맛6 2011.11.25
곽재식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 (확장판)6 2011.11.25
곽재식 천사의 옆얼굴 (확장판)6 2011.10.29
정도경 6 2011.10.29
정도경 NCESP-I4 2011.10.29
정세랑 지렁이력 100년 인류 해방사23 2011.10.01
양원영 백일의 회고록1 2011.09.30
정도경 백(百)의 그림자4 2011.09.30
정도경 4 2011.09.30
Prev 1 ...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