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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은세 언니

2012.08.31 23:0608.31

은세 언니
 


 



 은세 언니가 죽었다. 그러니까 나도 건너건너 들은 얘기이긴 한데 죽었다고 한다. 향년 41세… 인가? 아니 42세였나? 언니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던가? 하지만 마흔은 죽기엔 너무 이른 나이다.
 은세 언니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나쁘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사실 언니의 죽음에 대해서 – 언니의 삶에 대해서 – 뭐라고 말해야 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죽었다는 게 잘 믿어지지도 않는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슬펐다기보다는 황당했다. 지금도 황당하다.
 솔직히 말하면 은세 언니는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데 말하자면 외골수라고 해야 하나, 좀 그런 성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아마 그래서 공부를 잘 했을 것이다. 어떤 주제에 한 번 꽂히면 아주 깊이 파고들어서 끝장을 볼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언니는 카이스트를 수석인지 차석인지 그렇게 입학했고, 수석인지 차석인지 그렇게 졸업했다.
 그것이 언니 인생에서 최대의 성취였다. 카이스트를 수석으로 (차석인가?) 들어갔다가 수석(혹은 차석)으로 나왔다는 거. 그 이후의 삶은 근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내리막길이었다. 천천히, 혹은 빨리.
 언니가 왜 하필 다른 나라도 아니고 폴란드로 왔는지 그것도 사실은 잘 이해할 수 없다. 언니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고 ‘계시’라던데 글쎄. 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언니 뿐만이 아니라 가족이 다 그랬던 것 같다. 언니 이름도 ‘은혜로운 세상’의 줄인 말이라고 처음 만났을 때 그랬다. 언니 자신이 은혜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인도할 지팡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오롯이 한 몸에 받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손 닿는 곳에 놓고 가장 아끼며 세상을 위해 크게 쓰실 도구. 그 믿음이 언니 인생의 기둥이자 주춧돌이었다. … 하지만 그 외에는 언니 인생에 뭐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니와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으니까.
 
 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출국자 모임에서였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를 가든지 유학을 가게 되면 보통은 출국자 모임이라는 것을 만든다. 학원을 같이 다니면서 어학시험이나 대학원 시험 등속을 함께 공부했던 사람 중에서 같이 지원해서 같이 붙은 사람들끼리 학교 정보나 생활 정보를 교환하고 실제로 떠날 때가 되면 출국 절차를 밟고 집 구하고 짐 부치는 문제 등등을 같이 해결하면서 일반적으로 현지 학생회나 특히 한인 교회에 연락을 해서 처음 도착한 직후 공항에 픽업을 나오는 일부터 생활에 좀 익숙해지기까지 여러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처리할 경우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러니까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특히 인맥 좋고 수완 좋은 사람이 모임에 껴 있으면 대단히 유용하고 또 보통은 출국자 모임에서 총무 노릇을 하는 그런 사람이 꼭 하나씩 있거나 처음에 없어도 지내다 보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경우가 좀 달랐다.
 폴란드가 한국에 그렇게 잘 알려진 나라도 아니고 정보가 많거나 사람들이 떼지어 유학가는 나라가 아니다 보니까 일단 모임이라는 것 자체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사람을 모으는 가장 쉬운 경로가 학원에 같이 다니는 것인데 폴란드어를 가르치는 학원이라는 것도 없고 십여 년 전에 내가 나갈 때는 외국인이 치러야 하는 폴란드어 어학시험도 대학원 입학 시험도 없었다. (지금은 폴란드 정부에서 시행하는 공식 어학시험이 단계별로 있긴 있는데 이 시험 자체가 내가 폴란드 가 있을 당시에 개발중이었다.) 그러므로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유일하게 좀 알아볼 수 있는 길이라면 한국외대 폴란드어과인데 내가 외대 출신도 아니고 그 쪽에 아는 사람도 없다 보니까 선뜻 물어보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같은 데다 소심하게 질문을 올려놓고 아무도 답변을 해 주지 않는 걸 매일매일 두세 번씩 들여다보며 슬퍼하던 와중에 누군가 답변을 해준 것이 아니라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던 것이다, 그 쪽도 폴란드 가시냐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람이 은세 언니가 아니고 그 때 그 질문을 했던 사람은 폴란드에서 룸메이트로 지냈고 지금도 친한 유진 언니인데 그 언니가 자기 유학가려고 알아보던 중에 또 두 다리쯤 건너건너 알게 되어 우리도 출국자 모임 비슷한 거 한 번 해 보자고 처음 만나기로 한 날에 꼽사리 껴서 나온 사람이 은세 언니였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은세 언니는 그냥 조용하고 얌전하고 별로 인상에 깊이 남지 않는 사람이었다. 벌써 십 년이 넘은 옛날이니까 그 때만 해도 언니도 젊어서 이십대 끝무렵 혹은 많아야 갓 서른이었을 텐데 통통하고 아줌마처럼 머리를 좀 세게 볶아서 나이보다 약간 더 들어보였다는 정도가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모임에서 언니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긴 서로에 대해서나 앞으로 갈 곳에 대해서나 뭐 아는 게 없으니 다들 할 말이 별로 없기도 했다.
 우리의 조그만 출국자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 사람은 학부에서 폴란드어를 전공한 유진 언니였다. 모인 사람들마다 전공도 제각각이고 경력도 성향도 제각각이라 명색뿐인 ‘출국자 모임’은 결국 출국을 하자마자 자진 해산하다시피 했는데 그래도 느슨하게나마 여러 관련자들과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간 사람도 유진 언니고 건너건너 바람결에라도 누가 뭐 하고 사는지 – 은세 언니 같은 경우는 누가 뭐 하다 죽었는지 – 알게 된 것도 다 유진 언니 덕분이다. 유진 언니는 학부에서는 폴란드어를 전공했지만 이후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바꿔서 동유럽의 공산권 몰락과 사회체제 변혁 과정을 연구해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폴란드에 가서 같은 분야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계획이었다. 유진 언니와 대학원 동기인 세정 언니는 유럽사 중에서도 2차 대전 역사를 전공해서 폴란드에 가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구할 거라고 했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지명 ‘오슈비엥침’의 독일식 발음인데 우리가 가기로 되어 있던 도시에서 차 타고 이십 분쯤 가면 아우슈비츠였고 수용소 전체를 박물관으로 바꿔서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했다. 한편 유진 언니와 고등학교 동창인 경아 언니는 폴란드하고는 일생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소위 “저주받은 학번”이라 딱 졸업할 때 되니까 다들 “IMF”라는 잘못된 용어로 줄여 말하는 금융위기가 닥쳐서 얼떨결에 달랑 졸업장 하나 쥔 채로 백조가 돼 버렸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명퇴를 당해서 집안이 홀랑 기울었다. (말했듯이 십 년도 더 전 얘기다.) 그래도 온 집안 식구가 아득바득 노력해서 2-3년쯤은 그냥저냥 어떻게든 버텼는데 이건 뭐 도저히 앞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던 차에 바르샤바에서 사는 이모가 그렇게 어려우면 경아 너라도 폴란드 와서 같이 살자고 했다는 것이다. 제일 흔한 게 미국에 있는 친척이고 그 다음이 일본에 있는 친척인데 경아 언니네 집안은 그런 거 하나도 없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나 대략 뜬금없이 맨 처음 튀어나온 게 ‘바르샤바에 있는 이모’인 걸 보면 확실히 평범한 집안은 아닌 거 같고 거기다가 또 아주 자연스럽게 그럼 이렇게 된 이상 폴란드로 간다, 라고 결심한 걸 보면 경아 언니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경아 언니는 폴란드에서 나랑 같이 어학과정 마치고 한국계 회사에 취직하겠다고 고생 좀 하다가 (대우가 90년대 쯤에 폴란드에 크게 공장 차려서 잘 나갔으나 우리가 갔을 때 즈음에는 이미 망했다) 결국 한국하고도 폴란드하고도 상관없는 외국계 담배회사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만난 폴란드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해서 애도 셋이나 낳고 지금은 영국 가서 잘 산다는 해피 엔딩이다. 출국자 모임에 여자만 있었던 건 아니고 남자도 한 명 있었는데 첫 날 한 번 나오고 그 다음부터 사라져 버려서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고 나중에까지 살아남은 건 다 유진 언니 인맥이었다. 그 중에서도 학교나 공부랑 상관 없이 시집가서 자기 인생 잘 사는 건 경아 언니뿐이고 괜히 대학원에 목 매서 박사까지 따고야 만 의지의 한국인 삼인방 유진 언니와 세정 언니와 나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학위증 하나 달랑 손에 쥔 고학력 저임금 비정규직 시간강사가 되어 낼모레 마흔인 이날 이때까지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참 경아 언니가 현명했구나 싶기도 하고 그럼 경아 언니가 했듯이 이렇게 된 이상 (다시) 폴란드로 가서 나도 바르샤바에 음식점을 차려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그리고 은세 언니는 이 날 이 때까지 이러고 있다가 그냥 그렇게 가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폴란드는 유서 깊은 카톨릭 국가다. 966년에 처음 종교를 받아들인 이후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렇듯이 문학과 언어와 여타 학문은 성서를 중심으로, 건축과 음악과 미술은 성당과 미사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20세기 들어와서 공산혁명을 일으키면서 종교를 탄압했던 러시아 등 인접 국가와는 달리 폴란드의 카톨릭 전통은 2차 세계대전 끝나고 소련 때문에 강제로 공산화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뿌리깊이 남았고 체제가 바뀌고 난 지금은 길거리에 다니는 시내버스 안에 설치된 전광판에 이번 정류장, 다음 정류장, 그리고 그 다음에 해당 날짜의 성자들 이름이 표시될 정도로 카톨릭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화되었다. 바르샤바 같은 경우는 성당이고 유적이고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지독한 놈들이 일부러 몽땅 파괴해놓고 나간데다가 지금은 세계 어디 못지 않은 대도시라 분위기가 아주 많이 다르지만 내가 있었던 남쪽은 기적적으로 덜 손상된 지역이라 500년 600년 된 성당도 동네마다 있고 길에 가다 보면 수도사나 신부님들도 흔하게 보이는, 언뜻 보면 중세가 아직도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곳이라서 내가 일부러 찾아가기도 했고.
 이에 비해 은세 언니는 아주 독실한 개신교도였다. 딱히 종교를 안 믿는 내 입장에서는 그쪽이나 저쪽이나 다 똑같은 하나님이지 싶은데 개신교하고 카톨릭하고 종교개혁 때부터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책에서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식으로 얼마나 사이가 안 좋은 건지 은세 언니 덕분에 처음 알았다. 신앙은 각자 마음에 달린 문제이니 종교에 관련된 태클은 일체 사절하겠고 나의 개인적인 경험만 말하자면 이 개신교와 카톨릭 문제는 은세 언니가 약간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은세 언니가 이상한 사람이지 개신교도가 전부 이상하다는 건 절대 아니고 앞에서 이미 종교에 대한 항의는 사절한다고 말씀도 드렸으니 이후에 태클 걸 시에는 폴란드어 할 테다.
 은세 언니는 폴란드어를 못 했다. 이게 말하자면 언니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아주 길게 악영향을 미쳤던 좀 심각한 사안이었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니는 성격이 약간 외골수인 데가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어딘가에 관심이 생기면 무슨 일이 있어도 파고들어 끝장을 보는 반면에 자기가 관심 없는 건 끝장나게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언니의 전공은 수학이었다.
 폴란드어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언어라서 “일단 가서 몇 달 살아보면 다 하게 돼” 이런 종류가 절대 아닌 데다가 은세 언니한테는 쉽건 어렵건 외국어라면 전부 쥐약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현지에 떨어져서 처음에만 어리벙벙하다가 몇 달이 지나서 웬만하면 물정도 익히고 기본적인 생활은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게 됐을 때 즈음에도 언니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도착해서 어학연수를 받을 당시에 학교에 있다가 시내에 나가야 할 때면 혼자 나가지 못하고 항상 말이 통하는 사람한테 붙어 가야 했다. 그리고 학교가 산꼭대기에 있는데다가 (폴란드는 나라 이름 자체가 ‘벌판’이라는 뜻이다. 전국이 다 평평해서 산이라는 걸 찾기가 쉽지 않은데 하필 우리가 있었던 학교만 산꼭대기였고 하필 내가 어학과정 딱 마치고 나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학교가 접근성 좋은 시내의 평지로 이사를 했다.) 기숙사에서는 점심밥만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시내에 꽤 자주 나가야만 했다. 학교에 한국인이라고는 유진 언니를 주축으로 하는 우리 ‘출국자 모임’ 사람들 뿐이었고 은세 언니는 폴란드어가 됐건 영어가 됐건 하여간 외국어라곤 거의 못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한국인들끼리 같이 다니거나 돌아가면서 데리고 다녔던 것 같은데 그것도 차츰 사람들이 피하게 되니까 결국은 아무 것도 모르는 나한테 차례가 떨어진 것이다.
 나는 ‘출국자 모임’에서 막내라서 처음부터 언니들이 좀 귀여워했다. 도착해서도 어학 수업을 듣긴 들었지만 수업 없을 때나 주말에는 계속 혼자 시내를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언니들에게 별로 의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름길로 가는 버스 혹은 트람바이 노선, 맛있는 식당이나 싸고 분위기 좋은 커피 가게 등 유용할 법한 생활 정보를 알게 되면 가끔가끔 물어다 주었기 때문에 나머지 언니들과 느슨하지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크라쿠프 시내에 커피 가게만 수십 군데 있었고 스타벅스 같은 체인점이 들어오기 전이라서 각각 다 개성과 특색이 달랐다. 지금 생각해도 몹시 그립다.) 그래서 은세 언니가 식료품을 사야 하니 같이 시내에 나가자고 했을 때 나머지 언니들처럼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출발했을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산꼭대기 기숙사에서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굽이굽이 언덕길을 내려가서 말들이 밭을 갈던 시골길을 또 눈을 헤치며 좀 걸어가서 (서양에서는 소가 아니라 말이 밭일을 한다. 하긴 그 때는 겨울이라 말들이 다 들어가고 밭은 눈에 덮여 하얗게 버려져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 기다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서 은세 언니가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나면 내가 버스 정류장에 데려가서 버스 태워 도로 기숙사로 보내고 그 뒤로 내 갈 길 가자는 일정이었다. 때는 1월이라 한창 추웠고, 버스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시린 손발을 호호 불고 동동 구르면서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서 간신히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 때만 해도 기숙사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보통은 털털거리고 냄새 나는 고물차가 다니는데 그 날따라 정류장에 도착한 것은 전혀 안 어울리게 번쩍번쩍한 신형 버스였다. 새 차니까 난방이 잘 나오겠다고 좋아했지만 사실은 그게 불운이었다.
 난방은 잘 나왔다. 밖이 아주 추운데 버스 안이 아주 따뜻하니까 창에 수증기가 껴서 밖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어디쯤 왔는지 감을 잡기 위해 나는 운전석 위의 전광판에 나오는 정류장 이름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시내까지 가는 30-40분 동안 은세 언니와 거의 이야기 같은 것도 못 하고 전광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은세 언니랑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어학연수도 반이 달라서 수업을 따로 들었고 어학과정 이후에 들어갈 전공도 너무 달라서 별로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내릴 때가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폴란드 시내버스에서는 (신형 버스일 경우) 전광판에 그 날의 성자 이름이 나왔다. 날짜는 1월 15일이었고 그 날의 성자는 성 마우로, 그러니까 추위와 감기에서 보호해주는 수호 성자였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영하의 추위 속에 눈을 헤치고 돌아다녀야 하는 우리의 상황에 상당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버스에서 내려서 눈과 진흙탕으로 덮인 거리를 터덜터덜 걸어 은세 언니가 목적한 수퍼마켓으로 가면서 별 생각없이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나는 진짜 별 생각 없이 한 얘기였는데 은세 언니는 정색을 했다.
 “그런 건 다 미신이고 이단이야. 하나님은 한 분 뿐이야. 어떻게 옛날 옛적에 죽은 사람이 감기와 추위에서 보호를 해 주니?”
 이 때 빨리 눈치를 채고 입을 다물었어야 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은세 언니를 잘 몰랐기 때문에 사과조로 변명을 했다. 마침 수퍼마켓 앞의 전광판은 현재 기온 영하 20도를 나타내고 있었고 (시내 한복판의 대형 수퍼마켓 입구에 날짜나 시간이나 광고가 아니라 현재 기온을 표시하는 전광판이 붙어 있는 나라에는 되도록이면 가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그 영하 20도의 기온에 근 한 시간 동안 한길가에서 추위에 떨었기 때문에 전광판에 나타난 그 이름이 꽤나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은세 언니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너는 이단이다. 악마다. 버스 타고 오면서 내내 말도 한 번 안 걸고 쳐다보려고도 안 하는 걸 보니까 너도 나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 나는 은혜로운 세상의 지팡이다. 너는 이단이니까 은혜의 지팡이로 얻어맞아야 한다. 너는 죄인이라 벌을 받아야 정신을 차린다. 그렇게 살지 마라.
 평소에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고 그저 사람 대하는 것이 조금 서투른 듯 했던 은세 언니의 첫인상과 이 광란의 기습 공격은 너무나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화도 못 내고 항의나 변명도 못 하고 그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당하기만 했다. 그곳은 시내였고, 수퍼마켓 앞이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폴란드인이었고, 우리 둘은 외모부터 눈에 딱 띄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멈춰 서서 둘러싸고 구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직까지 크라쿠프 시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속사포 같은 비난의 포효를 한동안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여 나는 언니를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려고 했으나 뭐라고 말하면 할수록 언니는 더욱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언니는 제 성질을 못 이겨 발을 구르더니 너 같은 애하고 말도 하기 싫고 꼴도 보기 싫다고 씩씩거리면서 수퍼마켓 안으로 휭하니 사라져 버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후로 나는 그 수퍼마켓에 몇 달 동안 가지 못했고 먹을 것이 필요하면 대충 사 먹든지 아니면 재래시장에 가서 빵은 빵가게, 야채는 야채노점, 이런 식으로 헤매고 돌아다녔다.
 알고 보니 나뿐이 아니고 기숙사의 한국인들은 모두 한 번씩 은세 언니에게 그런 식으로 당한 경험이 있었다. 내 경우에는 그나마 뭔가 내가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했구나, 라고 앞뒤 정황을 이해할 수나 있었지만 꼭 그렇게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이유가 있어야만 했던 것도 아니고 같은 종류의 도발에 대해서 항상 같은 종류의 반응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수업 끝나고 도서실 가다가 복도에서 마주쳐서 인사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그 순간 폭발해서 옴팡 뒤집어쓴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자판기 앞에서 마주쳐서 긴장했는데 은세 언니가 갑자기 커피를 사 줘서 별 내용은 없지만 평화로운 잡담을 꽤 긴 시간 나누고 온화하게 헤어진 경우도 있었다. 요컨대 은세 언니는 어떤 구체적인 외부 요인에 합리적으로 반응한다기보다 그냥 자기 세계에 골몰하는 타입이었고 우연히 그 골몰하는 일이 잘 안 풀리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불운한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는 시스템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폭발을 하고 안 하고는 순전히 은세 언니의 그 때 기분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러면서도 어학 실력이 몹시 딸려서 학과 수업이나 숙제 등의 문제도 그렇고 기숙사비를 내거나 침대 시트나 화장실 휴지 등의 비품을 새로 받거나 식료품을 구하는 등 일상 생활의 모든 시시콜콜한 측면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은세 언니는 한 마디로 민폐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민폐도 아니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성 민폐였던 것이다.
 그러나 민폐가 됐건 뭐가 됐건 간에 인간이 기본적으로 갈구하는 것은 모두 똑같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친구를 만들고 동료를 만들고 결혼을 해서 배우자와 자녀로 새 가족을 만들어 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다른 존재들로 구성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한다. 낯선 나라에 혼자 떨어지면 고국에서 평생 구축했던 그런 사회적 안전망이 일시에 사라지기 때문에 누구나 외롭다.
 은세 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6월 말에 정규과정 어학연수가 끝나고 우리는 일종의 종강 기념 파티를 했다. 꼭 한국인끼리만 한 게 아니고 수업을 같이 들었거나 기숙사 안에서 조금이라도 친했던 사람은 모두 어울려서 먹고 마셨기 때문에 ‘출국자 모임’의 유진 언니, 경아 언니, 세정 언니와 나 뿐만 아니라 은세 언니도 한구석에 껴 있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고 술에 많이 취하니까 같은 방 안에서도 역시 언어가 서로 편한 사람들끼리 저절로 뭉쳐서 이 구석 저 구석으로 헤쳐모여 하게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방 한 구석에 모여 앉아서 맥주 마시고 호밀빵을 뜯어서 먹으면서 (남은 먹을 거리가 그것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경아 언니는 예정대로 이모와 함께 살기 위해 바르샤바로 떠날 예정이었다. 나는 자료를 모을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여름 방학 동안 북쪽 지역의 다른 도시에 가 있다가 가을 학기에 돌아와서 전공 과정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유진 언니와 세정 언니는 여름 동안 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들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은세 언니가 갑자기 바닥에 앉은 채로 다리를 쫙 찢더니 일종의 요가 동작 비슷한 걸 했다.
 “나 봐라, 다리가 180도 넘게 벌어진다. 꽤 유연하지 않니?”
 다들 술에 취해 당시엔 아무도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동의해 주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술에 취해서 그랬다면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은세 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은세 언니가 어학 과정을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여름 방학 동안 추가로 수업을 듣고 그 뒤에도 어쩌면 1년 더 어학 연수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였다는 것은 나중에 가을 학기 시작한 뒤에도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다. 은세 언니에게도 자존심이 있었고, 한국 기준에서는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학력이나 다른 스펙도 한참 떨어지는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후배들이 다 통과한 어학 과정의 기본 단계를 자기만 통과하지 못해서 유급을 했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여러 가지를 돌이켜보면 은세 언니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이후로 은세 언니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속한 과정이 달라도 어쨌든 조그만 도시에 있는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근 십 년 동안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마주친 적이 없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봐도 좀 놀라운 일이다. 유진 언니를 통해서 소식만 가끔씩, 그러니까 일년에 한 번 정도 전해 들었다. 은세 언니는 결국 다음 해에 어학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했고, 여름 학기까지 추가로 들은 뒤에야 간신히 어떻게 수료를 해서 정규 전공 과정에 들어가긴 들어갔다고 했다. 잘 모르는 내 생각에는 수학이라는 건 말이 별로 필요없으니까 일단 기본적인 어학과정만 수료했으면 그냥 박사 들어가서 수식만 열심히 풀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동유럽이 대부분 그렇듯이 폴란드도 학기말 시험이나 졸업시험처럼 좀 중요한 시험은 모두 구술 형태로 시험을 치렀고 그러므로 전공이 수학이 됐든 어학이 됐든 졸업을 하고 학위를 받으려면 언어를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세 언니가 굉장히 여러 가지 문제를 겪었고 나이 서른이 넘어 입학했다는 곳이 박사과정이 아니고 석사로 아마 도로 내려간 것 같다는데 유진 언니가 곤란한 표정으로 여기까지 얘기하다가 말끝을 흐려버렸기 때문에 정확한 건 나도 잘 모르겠다. 말 설고 물 선 남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 악전고투를 했지만 은세 언니는 어떤 한 방면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인데 비해서 일상적인 삶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관장하는 능력이 아주 크게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더 심하게, 고생해야 했다. 언어만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교류에 대한 감각이 남들과는 많이 달랐고, 자신이 “은혜로운 세상의 지팡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 남다른 감각이나 여러 가지 결여된 부분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점을 파악하거나 어딘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를 증명해주는 일화를 (역시 유진 언니를 통해) 들은 적이 있다. 은세 언니가 남들보다 두 배의 시간과 몇 배의 노력을 들여서 결국 박사학위의 최종 과정인 논문 집필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언니의 지도교수님께서는 언어가 심하게 딸리는 언니의 약점을 꿰뚫어보고 논문을 쓰기 시작한 그 날부터 끝내는 날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서 그 주에 진행한 연구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하라고 시켰다. 이렇게 하면 논문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오는 얘기를 한 번씩은 다 말로 하고 넘어가게 되니까 구술 발표 형태로 진행되는 최종 심사를 위해서도 연습이 되고 남들 앞에서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은세 언니는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3년 동안 방학을 제외한 학기 중에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교수님을 찾아갔건만 그 3년 동안 어학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고 말을 하다 막히면 언제나 내놓는 자신이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은혜로운 세상”은 단어가 두 개라서 “하나님” 한 단어로 줄였던 모양이다.) 은세 언니의 지도교수님은 은퇴를 눈앞에 둔 노교수님으로서 공산주의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절에 단련된 철저한 합리주의의 신봉자였고 현재의 폴란드에서 보기 드물게 본인 스스로 인정한 공개적인 무신론자였다. 게다가 이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수학을 연구하는 학자였으므로 교수님 입장에서는 제자인 은세 언니가 몇 년이나 얼굴 마주칠 때마다 신앙심을 설파하는 것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은 폴란드어 단어에서 보기 드물게 발음이 굉장히 쉬운데 그 유명한 “지팡이”에 관한 한 은세 언니는 어쩐 일인지 발음이 비슷하게 쉽고 평범한 다른 단어를 두고 하필 “trzcina”라는, 그러니까 딱 보기에도 뭐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단어를 선택했기 때문에 말을 할 때마다 더듬거리게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3년이 지나자 참을성 많으신 노교수님께서도 마침내는 견딜 수가 없었는지 그 “하나님의 지팡이” 좀 그만 하라고 일갈하셨다는 것이었다.
 유진 언니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며 웃었던 때가 그래도 좋을 때였다고, 지금 돌이켜보며 생각한다.
 
 ‘출국자 모임’ 중에서 유진 언니가 가장 먼저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 다음에 내가 일 년쯤 더 지나서 학위 과정을 마쳤다. 세정 언니가 가장 늦었는데, 2차 대전 연구를 하다 보니 폴란드에 있다가 독일까지 건너가서 거기서 몇 년 더 고생하고 결국은 독일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바로 얼마 전에야 들어왔다. 셋 다 교수가 못 된 강사로 떠돌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강의를 맡게 된 것은 당연히 먼저 들어온 유진 언니였다. 세정 언니는 학위를 하는 과정에서 독일에 유학중이던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지금은 애 키우면서 학교 나가느라 바쁘지만 그래도 남편이 먼저 자리를 잡아서 다행이다. 셋 중에서 가장 불안한 것이 나다. 도대체 중세 연대기 전공이란 한국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 전공자 중에서도 외국어 전공자가 단 하나 내세울 수 있는 기술이란 그 외국어라서 여차하면 어디 가서 어학 수업이라도 하게 마련인데 외대 출신이 아니다 보니 폴란드어 쪽은 희망이 없고 그렇다고 한국에서 라틴어 가르치는 학교는 애초에 없다고 보는 쪽이 편했다. 그래도 당장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이렇게 학위만 있고 수요가 전혀 없는 박사급 연구자들 (중에서도 운 좋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연구원”이라는 제도에 일단은 목을 매게 되었다. 일 년씩 계약을 하니까 내년부터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생활을 벌써 3년째 하고 있으며 프로훼서 같은 것이 되어 자리를 잡을 가능성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운이 좋으면 가끔 들어오는 교양수업 역사 강의 같은 것도 하고 주로 본래 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술지 편집 같은 허드렛일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끔은 폴란드로 도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세 연대기 전공은 어디를 가나 수요가 많지 않지만 최소한 그곳에 있을 때는 학교에 내가 전공하는 분야의 학과가 있었고 적은 숫자나마 동료도 있었으며 어디 가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일반인조차도 연대기가 뭔지 중고등학교 때 배워서 대충 희미하게나마 알고는 있었다. 외국인이 이 먼 나라까지 찾아와서 자기 나라 사람에게도 어려운 역사적인 문건을 연구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대체로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꼭 남한테 뻐기고 싶다기보다도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인을 받고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게 자존감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외국인인 나는 언어로 보나 정서로 보나 문화로 보나 완전한 폴란드 사람은 될 수 없다. 그나마 비자나 영주권 같은 걸 신경쓸 필요가 없는 내 나라가 취업제한이라도 없으니 편하다. 여차하면 어딜 가서 접시를 닦더라도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접시를 닦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무시할지는 몰라도 그 일 자체의 존재를 말살하지는 않는다. 중세 동유럽 연대기를 연구한다고 솔직히 말하는 우를 범했더니 학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가 무슨 온라인 게임이나 영화 이야기를 하며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 쪽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내가 속한 분야가 딱 잘라 문학도 아니고 역사학도 아니고 문헌학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걸 다 합쳐 섞어놓은 분야라서 한국에 돌아오니 소속될 학과도 가입할 학회도 불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전부 다 섞어놓은 괴상한 전공으로 학위 받아온 정체불명의 신출내기가 자기들 모르는 언어도 좀 하고 자기들이 안 건드리는 분야를 공부한다고 하니 학계 사람들은 불쾌해하면서 경계했다. 유학하면서 근 십 년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최소한 내 연구 자체의 가치를 의심받은 적은 없었고 그런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한국에 오니 주위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분야를 깊이 파고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라는 인간이 밑바닥까지 깨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폴란드를 그리워한다면 다른 이유가 아닌 그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출국자 모임’ 중에서 폴란드와는 언어도 문화도 정서도 가장 맞지 않아 보였던 은세 언니가 폴란드에 끝까지 남았다. 지도교수를 비롯하여 교수진 전체가 불안불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여러 가지로 좌충우돌 하면서도 끝끝내 학위를 받았다는 것까지는 유진 언니가 확실하게 얘기해줬는데 그 뒤로 이 년 정도 폴란드에서 뭘 했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졸업한 학교에서 시범적으로 강의를 맡기긴 맡겼는데 은세 언니가 어학이 워낙 딸리고 폴란드인들이 외국인에게 그렇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나라 말 잘 못 하는 걸 참아주는 사람들도 아니라서 간신히 한 학기나 채웠는지 중간에 짤렸는지 어쨌든 강의는 얼마 못 가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폴란드에서 혼자 어떻게 살았고 뭘 해서 생계를 유지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시신은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첫 학기에 강의 맡았을 때는 외국인이고 독신이고 하니까 학교에서 배려해서 기숙사에 그냥 남게 해줬던 모양인데 강의를 그만두고 나서는 학교에 계속 머무를 수 없으니까 지낼 곳을 구해서 시내에 나와 있었나보다. 돌봐주는 사람 없이 방을 어떻게 구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국 교민이 개입한 곳이 아니라 그냥 전형적인 폴란드식 오래된 석조건물에 있는 아파트였고 집주인도 폴란드인 아저씨였다. 그래서 언니와 의사소통이 잘 안 되니까 집세가 밀렸는데도 집주인이 곧장 찾아가지 않고 한두 달쯤 기다리며 내버려뒀고, 그래서 시신을 발견하는 게 많이 늦어졌던 모양이다. 그러니 정확히 언제 죽었고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집주인이 폴란드 사람이니까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 세입자의 신원을 밝혀서 어딘지도 모를 외국에 있는 유족을 찾아내서 친절하게 연락까지 해줄 엄두가 안 났던지 시신을 무조건 경찰에 떠넘겨버렸고 폴란드 경찰에서는 언니를 무연고자로 취급해서 자기네 절차대로 처리해 매장했다. 어디에 매장됐는지를 추적해서 시신을 찾아내서 한국으로 도로 데리고 오려면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과정이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언니의 가족들은 자초지종을 대충 듣고 나서 지레 포기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은세 언니는 낯선 나라의 어딘지 모를 땅에 그렇게 홀로 묻히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물론 언니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까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은세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체코에 있는 어떤 중세 성당에서 새로 발견된 기록을 한시적으로 공개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연구소에 경비 지원을 신청했는데 아시다시피 지금 정부의 모든 예산은 강바닥에 파묻혔기 때문에 연구예산도 전격 삭감되어 나 같은 떨거지를 유럽까지 보내서 한가하게 성당 관광이나 다니게 해 줄만한 돈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것이 내가 스스로 지원을 한 것도 아니고 연구소 책임 맡은 교수님이 마치 크게 가능성 있는 것처럼 그런 기회가 있으니 빨리 지원하라고 옆에서 찔러서 신청서를 넣은 건데 비행기표까지 예약 다 해 놓고 경비지원을 못 해 주겠다는 최종 통고를 듣고 보니 기운이 쭉 빠졌다. 그래서 여행사에 가서 비행기표랑 숙소 예약이랑 전부 다 취소하고 이미 낸 돈을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을지 좀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종로로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간 김에 십여 년 전 ‘출국자 모임’에서 자주 모이던 그 카페가 생각나서 한 번 가 보았다. 물론 그 때 그 커피전문점은 없어지고 지금은 다른 체인이 들어와 있었지만 어쨌든 그 때 그 자리에 커피 파는 가게가 있었으므로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쓸모 없어진 여권과 취소된 지원신청 서류들을 앞에 놓고 괜히 들여다보며 아이스 커피를 허망하게 홀짝이고 있는데 은세 언니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은세 언니가 너무 조용하고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언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작고 통통하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인상이었다. 언제나 좀 아줌마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파마를 세게 말아서 머리가 꼬불꼬불했다. 그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가끔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버릇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아직 안 왔어?”
 언니가 예의 그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리고 통통한 손목에 차고 있던 조그만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 아직 십 분 남았네?”
 “뭐가 십 분이 남아요?”
 내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물었다. 어리둥절해서 반사적으로 묻기는 했지만 또 언니가 폭발해서 와르르 쏟아낼까봐 말을 뱉어놓고 순간 아차, 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언니는 지금 누구한테 퍼부을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서 모이기로 했잖아. 너도 그래서 나온 거 아냐?”
 모이기로 했던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어쩐지 그 말이 당연한 사실처럼 여겨졌다. 생각해 보니 나는 우연히 나왔는데 진짜로 여기서 모인다면 그것도 좋은 일일 것 같았다. 언니들도 나도 모두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데 오랜만에 만나 회포라도 풀면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만 빼고 모두 모이기로 했다니 좀 섭섭하기도 하고 내가 뭘 잘못했나, 끼어들면 안 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 정도로 은세 언니는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상대가 은세 언니이기 때문에 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 예…. 좀 일찍 왔어요.”
 그리고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다시 입을 연 것은 역시 은세 언니였다.
 “그거 네 입학 서류야?”
 “예?”
 나는 언니의 시선을 따라갔다. 언니는 취소된 지원 신청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건, 저기….”
 설명을 하려다가 나는 곤란해졌다. 은세 언니하고 길게 얘기해서 좋게 끝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나는 이 상황 전체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원 신청 서류는 한국어로 되어 있었다. 신명조체에 글자크기 20으로 “연구원 해외연수 경비지원 신청서”라고 서류 앞면 꼭대기에 굵다랗게 찍혀 있는데 바로 코앞에 앉아서 읽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은세 언니는 어딘지 멍한 눈길로 서류를 곧장 들여다보면서 여전히 딴 소리를 했다.
 “넌 전공이 뭐라고 그랬더라? 폴란드 가면 뭐 할 거야?”
 “예? 아, 그게….”
 나는 더욱 곤란해졌다. 중세 수도사들이 기록했던 연대기가 라틴어에서 현지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에 나타난 언어학적 문화적 변화를 연구한다고 얘기해봤자 내가 만난 일반적인 한국인은 물론 폴란드인이라도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 치고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평생 아무도 없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다시 한번 더 심각하게 궁리하는 한편 은세 언니는 어째서 십 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질문을 당연하다는 듯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인지 열심히 생각하다가 나는 갑자기 떠올렸다. 아니 잠깐만, 은세 언니는 폴란드에서….
 그 순간 은세 언니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야, 폴란드 가면 거기서 박사 마저 끝내고 교수 할 거야. 카이스트에 폴란드에서 온 연구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 말이 폴란드가 학자 대우를 잘 해 줘서 연구하기엔 아주 좋대.”
 그럼 그 연구원은 왜 돌아돌아 하필 한국까지 찾아왔대요? 라고 나는 묻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그 말은 순 거짓부렁이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어차피 돈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순수 기초학문을 하는 사람도 정부 지원으로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받으면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나서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러하듯이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전공들은 모두 망했다. 그래서 공산권 몰락 직후에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들고 생계 지원을 찾아 다른 나라로 대거 떠나는 바람에 두뇌 유출이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카이스트에 와 있다던 그 폴란드 연구원도 아마 그래서 떠나온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폴란드가 이제 곧 유럽연합에도 가입할 거라서 폴란드 대학에서 딴 학위가 있으면 유럽 어디를 가든 다 대접받고 원하는 곳 어느 나라에서든 교수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랬어.”
 정체 모를 폴란드인 연구자에게 저주 있으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순진한 은세 언니의 머릿속에 이런 헛된 꿈을 심어주었단 말인가. 폴란드는 언니 말대로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그리하여 언니 말대로 유럽의 취업시장이 열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폴란드 국적을 가진 폴란드인일 경우에 한정된 얘기다. 한국인이 폴란드 대학에서 학위를 따서 유럽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폴란드가 EU에 가입한 게 2003년 6월의 일이다. 그 일 년 전에 유럽연합에 가입할지 말지 국민투표를 하는 과정부터 가입하는 순간까지 전부 현지에서 지켜본 사람이 폴란드가 “이제 곧” 유럽연합에 가입할 거라니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것인가.
 “나는 카이스트에서 석사 하다 말고 나와 버렸거든.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줘야 말이지. 날 자꾸 무시하더라고. 처음에는 잘 대해주던 사람들도 시간이 좀 지나면 날 피해다니고 자기들끼리만 뒤에 모여서 숙덕거리고 그랬어. 나는 그 사람들이 뭐가 잘못됐는지 좋은 말로 잘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아무도 내 말은 들으려고도 안 하고 어느 순간 보니까 나만 왕따가 돼 있었어.”
 나는 은세 언니를 쳐다보았다. 은세 언니의 인생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언니는 예의 그 약간 멍한 눈빛으로 취소된 연구여행 경비지원 신청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다른 학교 대학원으로 옮겼는데 거긴 더하더라고. 실력이 나보다 훨씬 못한 애들인데 교수님한테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면서 본교 출신이 아니라고 나만 따돌리잖아. 그래서 다 때려치우고 미국으로 유학가려고 했는데 그쪽 교수님이 추천서를 안 써 주시겠다는 거야.”
 결국 추천서는 이전 학교의 교수님들에게서 받아냈지만 역시 어학 시험 성적이 너무 모자라서 미국 유학 계획은 돈과 시간만 한참 낭비한 채 실패로 돌아갔다. 궁지에 몰려서 여러 가지로 고민한 끝에 카이스트로 돌아갈 생각까지 해 보았지만 뛰쳐나온 상황이 상황이었던만큼 그 쪽에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느 학교로 가든 이제는 대학원 생활을 정상적으로 이어갈 수 없겠다고 판단한 은세 언니는 전격적으로 취직을 했다. 회사를 2년 좀 넘게 다녔다고 했다. 언니 같은 성격에 대체 어느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던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언니도 그 부분은 말해 주지 않았다. 입사한 첫날부터 그만두고 싶었다니 아마 직장 생활이 무척이나 언니하고 안 맞았던 것이리라. 가족들은 이런 경우에 처한 “나이 꽉 찬” 여자들에게 항용 하듯이 결혼을 권했다. 언니는 가족에 대해 무척 따뜻하게 묘사했으며 그러므로 기대나 권유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언니도 여자이고 젊은 나이였으니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꿈을 꾸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언니는 이미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미국 유학을 시도했을 때처럼 상대가 자신을 받아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자신이 내키는 곳으로 일단 떠날 생각이었고 그러려면 그만큼 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언니는 항상 그렇듯이 다른 쪽으로는 눈 돌리지 않고 이를 악물고 오로지 회사를 다녔다. 그러면서 세계 지도를 사다가 자기 방 침대 위 천장에 붙여두고 밤마다 쳐다보면서 어딘가로 탈출할 날을 꿈꾸었다.
 “어느 날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불도 다 껐으니까 방안이 깜깜하잖아? 그런데 창 밖에서 불빛이 비치더니 머리 위의 세계지도 한 군데를 딱 비추는 거야. 보니까 폴란드더라고. 그걸 보니까 카이스트 있을 때 그 연구원이 해준 얘기가 생각이 났어. 아, 헨릭 말이 맞았구나. 내가 갈 곳이 저기구나. 하나님이 나를 크게 쓰시려고 이렇게 보여주시는구나.”
 그럼 그렇지, 그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언니는 언제나 되풀이하던 예측 가능한 주장을 다시 한 번 펼쳐놓았다.
 “큰 세상으로 나갈 거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이끌 지팡이니까. 폴란드 가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거야. 학위도 마치고, 자리도 잡고, 나에게 알맞은 짝도 하나님이 내려주실 거야. 거기서는 유럽도 갈 수 있을 거고,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곳이 내가 가야 할 곳이야.”
 말하면서 은세 언니는 행복하게 웃었다.
 그리고 언니는 사라져 버렸다.
 
 중세의 연대기 작성자들은 주로 수도사들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주로 성서에 바탕을 두고 시작되었기 때문에 학문의 가장 기초가 되는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사람도 거의 대부분 수도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수도사가 아니다. 연대기를 쓰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연대기를 읽는 사람이다. 연대기는 한 해 한 해를 요약한 역사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한 민족의 과거가, 집단으로서 인간의 삶이 단계별로 차곡차곡 담겨 있다. 나는 그 삶을 관조하고 기억하는 사람이다.
 은세 언니가 하필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나를 찾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개인적인 연대기를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과 함께 삶도 그대로 사라져 잊혀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왜?
 
 언니는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그렇게 행동했다. 그리고 죽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언니는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돌아가 그곳에 멈추어 있었다. 꿈과 희망에 가득했던 시기, 출국을 눈앞에 두고 아직 힘든 일은 하나도 겪지 않았고 미래의 좋은 일만을 기대하던 시기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죽었으니 아마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왜….?
 
 내가 알던 은세 언니는 살아 생전에 그다지 대하기 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위의 친구와 후배들에게 민폐도 많이 끼쳤고 좋은 기억만큼이나 안 좋은 기억도 많이 남겼다. 똑똑한 사람이긴 했지만 학문적으로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좋은 학벌”을 가졌고 박사 학위도 결국 따냈으니 일차적인 소망은 이루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끝내 교수가 되지도 못했고, 연구자로서 굉장한 논문을 쓰거나 가치 있는 연구서를 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낯선 외국 땅에서 마음 써주는 사람 하나 없이 불법체류에 가까운 신분으로 혼자 고생하다 혼자 죽어 혼자 아무렇게나 묻혀버려도 괜찮을 정도로 언니가 뭘 그렇게까지 크게 잘못했던 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주고 그의 삶을 기억해주는 것은 가족이고 그 중에서도 후손이다. 은세 언니는 결혼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후손도 없었다. 언니 자신은 가족에 대해 무척 다정하고 애틋하게 생각했던 것 같지만 남은 가족은 은세 언니의 시신을 되찾으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고 언니가 어디 묻혔는지도 알지 못한다.
 언니는 한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법한 사람이었지만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떠났다. 은세 언니가 남긴 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꿈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경쟁하고 소유하는 삶의 방식에 찌들어버린 내 편견일지도 모른다.
 
 나는 은세 언니가 앉았던 자리로 건너가서 살펴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흔히 이런 이야기에는 죽은 사람이 꽂았던 머리핀이라든가 늘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 같은 게 난데없이 떨어져 있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다녀갔다는 걸 증명하곤 하던데 그런 것도 하나 없었다. 은세 언니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은세 언니의 흔적은 그 이야기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야기 속에서 언니는 보통 사람처럼 자기 삶을 살았다. 자기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지닌 인간으로서 웃고 울고 화내고 고생하고 꿈꾸고 희망을 가졌고 그 꿈과 희망을 위해 (좀 뜬금없는 방향이긴 하지만 하여간) 노력했다. 노력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고 아무 것도 남긴 것 없이 죽었다 해서 그 삶이 의미 없었다고 단정지을 자격이 내게는 없었다. 애초에 은세 언니가 무슨 의미를 위해서 태어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세 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언니도 남들과 똑같이,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이 그냥 태어나서 자기가 아는 한 최선을 다해 살다가 때가 되어 그냥 죽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개인적인 삶의 연대기를 후대에 길이길이 남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조차도, 은세 언니와 마찬가지로 울고 웃고 꿈꾸면서 뭔가를 위해 노력하고 몸부림치다가 때가 되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허망하고 깨끗하게.
 그 때가 되면 나를 알았던 타인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똑똑한 사람? 좋은 사람? 이상한 사람? 불쾌한 사람?
 그러나 애초에 내가 태어나 살아온 이유가 타인의 기억에 남기 위함이었던가….
 탁자 위에 늘어놓았던 서류를 챙기고 다 마신 커피 컵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은 뒤에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은세 언니의 죽음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이다.
 굳이 명복은 빌지 않겠다. 언니가 좋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건 확실히 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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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가는달 12.09.11 19:52 댓글 수정 삭제
    으어, 은세언니... 행복하시길...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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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2.09.11 23:25 댓글 수정 삭제
    ㅠ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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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le 12.10.15 10:10 댓글 수정 삭제
    제 전공도 수학이고(하지만 저는 무신론자 입니다), 외국(폴란드는 아니지만)에서 공부하고 있다보니 화자와 은세언니 양쪽에 공감하고 말았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No Profile
    정도경 12.10.19 12:33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외국에선 항상 건강과 안전 조심하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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