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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반복 휴가 2: 아이

2012.05.25 22:4405.25

반복 휴가
    


   2. 아이

   밤의 골목길은 조용하고 시원했다. 그는 중현과 나란히 도장을 나와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도복과 호구를 도장 탈의실에 두고 나왔다. 죽도도 언제든 필요하면 쓸 수 있도록 검집 없이 그냥 들고 나왔다. 중현도 자기 죽도를 가지고 나왔다. 걸으면서 가끔 한 번씩 손목을 돌려 무심하게 죽도를 휘둘렀다.
   땅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서는 낮의 열기가 아직도 스며나오고 있었지만 바람이 살살 얼굴에 닿는 느낌은 무척 기분 좋았다. 중현과 함께 조용히 걷고 있노라니 선배의 전화를 받고 “이상한 서당”을 찾아갔던 일… 아니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 군대를 갔던 일도, 애초에 대학에 들어간 것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것도 전부 다 그저 길고 복잡한 꿈이었던 듯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계속 걸어가면 파출소가 나오고, 편의점이 나오고, 그래서 기분이 내키면 그 편의점에서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사서 중현과 나눠 들고, 골목을 하나 더 건너서 꼬치구이집 앞에서 중현과 헤어지고, 그렇게 군것질거리를 입에 문 채로 아파트 정문을 지나 단지 안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앞 복도가 어두워서 싫지만 좀 기다렸다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서 엄마가 문을 열어 주시면 그걸로 하루가 평범하게 끝날 듯한 기분이었고,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중학생 때부터 언제나 하루를 그렇게 마무리했으니까 벌써 그런 저녁들이 천번? 이천번? 셀 수도 없었다. 항상,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런 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변함없이 이어질 줄만 알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한 살 한 살 성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매일의 일상이 있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성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시간과 함께 삶이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삶은 바뀌어버렸다.
   사람은 언제 어른이 되는 것일까, 하고 그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중현을 돌아보았다. 친구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바로 앞에 편의점이 보였다. 그는 어쩐지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음료수 마실래, 라고 물어보려 했다. 그 때 중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게 꿈이래.”
   “뭐?”
   마치 자신의 생각에 대답하는 듯한 중현의 말에 그는 조금 놀랐다. 중현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 말이야. 지금 이게 전부 다 꿈이래.”
   “뭔 소리야?”
   그가 물었다. 중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너 무슨 일 있었던 거냐?”
   그가 다시 물었다.
   중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혼자 뭔가 다시 생각에 잠긴 것 같아서 그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중현은 또 다시 불쑥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덤벼드는 사람들에게 쫓겨서 처음에는 그저 정신없이 도망쳤다. 아이가 죽거나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자기 자신도 분명 험한 일을 당하게 되리라는 공포 때문에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급박했기 때문인지 자기도 상상하지 못했던 힘을 내서 아이를 옆구리에 끼다시피 하고 마구 달렸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뛰다가 어느 순간 아이를 놓쳤다. 아이는 넘어졌다. 사람들이 바로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큰일났다, 아이가 밟히겠다고 생각하고 중현은 겁에 질렸다.
   그런데 아이는 의외로 재빨리 발딱 일어서더니 이번에는 앞장서서 중현을 이끌고 뛰기 시작했다. 중현은 아이가 건물 내부를 자기보다는 잘 알 테니 도망칠 길을 찾는 것이라 생각하고 따라서 뛰었다. 아이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고 중현도 따라서 올라갔다. 그러나 조금 뒤에 아이는 복도를 돌아 계단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중현은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 아이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아이가 예상 외로 너무나 빨리 달렸기 때문에 일단은 그저 쫓아가기도 바빴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어둠침침한 복도 끝에 있는 어떤 방이었다. 아이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사라졌고, 그래서 중현도 따라서 들어갔다. 그 시점에는 이미 쫓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중현은 문을 잠갔다.
   방 안도 복도와 마찬가지로 침침하고 어두웠다. 공기는 축축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지독하게 배어 있었다. 중현은 숨을 고르면서 전기 스위치를 찾기 위해서 벽을 더듬었다. 그 때 뭔가 중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 아저씨.
   아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소리로 보아서 아이인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은데도 어쩐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방안은 완전히 깜깜한 것이 아니라 좀 어슴푸레하게 침침한 정도였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 아저씨.
   아이가 다시 불렀다. 대답 대신 중현이 말했다.
   - 여기 어디야? 불 좀 켜 봐.
   의도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훨씬 날카롭게 나와서 중현은 말해놓고 제 풀에 조금 놀랐다. 중현은 물론 화가 나고 긴장해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쫓겨 다녔고, 방 안은 어둡고 냄새가 심하게 났고, 바로 코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묘하게 어두웠고, 아무리 벽을 더듬어도 전등불 스위치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 … 해야 돼.
   “뭐?”
   아이가 말한 것은 처음 듣는 단어라서 중현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가 중현의 소매를 당기면서 다시 말했다.
   - …. 해야 돼.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중현은 일단 무시했다. 소매를 당기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계속 벽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손끝에 뭔가 튀어나온 것이 걸렸다. 중현은 눌렀고, 그러자 방 안에 불이 들어왔다.
   그곳은 휑뎅그렁하고 커다란 공간이었다. 천장과 네 벽은 달걀껍질처럼 갈색이 도는 옅은 노란색으로 칠했고 바닥은 그냥 콘크리트였다. 벽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출입문 맞은편에는 높고 가느다란 탁자 위에 촛불 두 개를 켜서 세워두었다. 그 앞에는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의 초상화가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줄줄이 걸려 있었고, 각 초상화 아래에는 돌무더기 같은 것이 땅바닥부터 액자에 닿을 정도까지 높이 쌓여 있었다. 
   불이 켜지자 아이는 중현의 소매를 놓고 탁자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익숙한 몸짓으로 첫 번째 초상화 앞에 서서 양 팔을 치켜들고 천장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뭔가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외웠다. 한참 주문을 외우더니 땅에 엎드려 초상화에 대고 절했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돌덩어리를 꺼내 초상화 앞에 있는 돌무더기 위에 얹었다. 그런 뒤에 아이는 다음 초상화 앞으로 가서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팔을 한껏 치켜들고 카랑카랑하게 목소리를 높여 주문을 외우는 아이의 모습은 말 그대로 신들린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중현은 어쩐지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아이는 들리지 않는 듯 하던 동작만 반복했다.
   초상화는 얼른 봐도 열 개 가까이 걸려 있었다. 아이는 제정신이 아닌 듯 기묘한 주문을 외우며 알 수 없는 의식을 반복하고 있었다. 중현은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아까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면? 자신이나 아이를 또 공격하면? 이곳에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꼬마야.”
   중현이 불렀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하던 동작을 계속했다.
   “야.”
   중현이 좀 더 큰 소리로 불렀다. 아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현은 하늘을 향해 치켜든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 해.”
   중현이 말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여기서 나가야지. 아까 그 사람들 여기까지 찾아오면 어떡해.”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중현은 뭔가 다시 말하려 했다. 
   그 때, 붙잡은 아이의 팔이 중현의 손 안에서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의 몸이 긴장해서 굳어질 때의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보드라운 아이의 팔이 마치 손 안에서 플라스틱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단단하고 피가 통하지 않는 무생물의 느낌이었다.
   중현은 놀라서 아이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우려 했다.
   “야, 너 왜 이래?”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땅바닥에 그대로 박혀버린 것처럼 중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밖에는 나갈 수 없어.
   여전히 중현에게 등을 돌리고, 플라스틱 양 팔을 중현의 손에 잡힌 채로 아이가 말했다. 녹음된 기계음처럼 단조롭고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 여기만 세상이고, 밖은 전부 꿈이야. 여기 말고 세상은 없어.
   “무슨 소리야? 세상이 왜….”
   그 순간 중현은 아이 앞에 있던 초상화 속의 사람이 액자 밖으로 팔을 뻗는 것을 보았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시간은 괴기할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다. 초상화 속의 낯모를 사람은 중현이 지켜보는 앞에서 천천히 여유만만하게 손을 내밀어 초상화 바로 앞의 돌을 집어들더니 중현의 머리를 향해서 휘둘렀다. 1초가 안 되는 그 순간이 중현에게는 어쩐지 몇 년처럼 느껴졌고, 그 팔은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뻗어나왔다. 중현은 피하려다가 뒤로 넘어졌다. 초상화 속 사람이 휘두른 돌은 바로 앞에 서 있던 아이의 머리를 때렸다.
   아이는 플라스틱 인형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중현은 넋이 나가서 부서진 아이의 잔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팔을 붙잡았던 중현의 손에 남은 것은 피부 색깔의 단단한 조각이었다. 그러나 그 조각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아이의 잔해는 피 웅덩이 속을 떠 다니며 이리저리 흩어졌고, 그 웅덩이는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 피 웅덩이 속에서 절반만 남은 아이의 얼굴 조각이 중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 세상은 없어. 여기 이 안은 꿈이야. 꿈이 진짜 세상이야. 나가면 안 돼. 나갈 수 없어.
   중현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돌덩이를 움켜쥔 초상화 속의 팔이 다시 뻗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돌덩이가 머리를 때릴 뻔한 순간 중현은 옆으로 굴렀다. 돌은 콘크리트 바닥을 때리며 쩡, 하고 귀가 찢어질 듯 큰 소리를 냈다. 중현은 일어섰다. 그 순간 초상화의 팔이 다시 돌덩이를 휘둘렀다. 중현은 주저앉았고, 돌은 이번에는 콘크리트 천장을 때리며 다시 쩌렁쩌렁하게 무너질 듯한 굉음을 냈다. 
   그 소리를 신호로 중현은 문 밖에서 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들었다. 밖에 몰려선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쾅, 소리와 함께 문짝이 흔들거렸다. 거기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가 중현은 초상화 속 팔이 휘두르는 돌덩이가 정면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이젠 죽는구나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떠 보니까 도장 탈의실이었어.”
   중현이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정말로 꿈을 꾼 것 같아… 그 꼬마 말이 맞는 걸까?”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어쩐지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동의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며 걷는 사이에 두 사람은 문제의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닫혀서 쇠사슬로 잠겼던 철문이 이번에는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듯한 그 모습이 어쩐지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가지 말까?”
   그가 말했다.
   “그냥 경찰에 신고해 버리고 우리는 들어가지 말자.”
   “아냐.”
   뜻밖에 중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겠어. 그리고 형 선배도 데리고 나와야 될 거 아냐.”
   그리고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중현은 성큼성큼 걸어서 철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중현은 한번 마음을 먹으면 설득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친구가 혼자 들어가게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야, 같이 가.”
    
   깜깜한 마당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번처럼 둥근 문고리가 달린 아무 특징 없는 철문 앞에 섰다. 그리고 지난 번처럼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중현이 먼저 나서더니 문고리를 휙 돌렸다.
   지난 번처럼 문이 잠겨 있을 줄 알았는데, 삐거덕 소리를 내더니 문은 너무 쉽게 열렸다. 안은 평범한 복도였고, 평범한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달걀껍질 같은 옅은 황토색으로 칠해진 안쪽은 어쩐지 평화롭고 안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더럭 겁이 났다.
   “뭐야, 이거?”
   그는 중현과 복도 안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대로 온 거 맞아?”
   중현은 문고리를 잡고 선 채로 건물 바깥과 캄캄한 마당을 한 번 휘둘러 보았다.
   “꿈이라잖아.”
   이렇게 내뱉고 중현은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그도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철문이 등 뒤에서 다시 삐거덕, 하고 불길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닫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고요한 복도를 자박자박 울렸다. 형광등의 불빛이나 벽의 색깔이나 모든 것이 마치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현관에서 교실로 가는 복도처럼 평범하고 안전해 보였다. 눈이 뒤집힌 채로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들의 무리를 기대했던 그는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정적이 어쩐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어째서 그렇게 불안한 느낌이 드는지 그는 잠시 걸어가다가 깨달았다. 복도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중현에게 그 사실을 말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마치 벽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두 사람 앞에 문제의 아이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어 아이에게 각자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가 먼저 말했다.
   “아저씨, 그 형 찾으러 왔지?”
   아이는 딱히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팔짝팔짝 뛰어 앞장서기 시작했다.
   “형 어디 있는지 알아. 저기, 저기, 저기.”
   중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혼자서 뭔가 중얼거리기도 하고 노래 같은 것을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한없이 걸어갔다. 복도가 비현실적으로 길다고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 아이는 한옆으로 꺾어져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올라가서 또 복도를 걷다가 다시 내려가기도 했다.
   “꼬마야, 지금 우리 어디로 가냐?”
   그가 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랫말 같은 것을 흥얼거리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야, 왜 우리는 아저씨고 그 형은 형이냐? 그 형이 우리보다 나이 많아.”
   중현이 말했다. 그러나 꼬마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팔짝팔짝 뛰면서 종종걸음을 칠 뿐이었다. 그는 좀 어이가 없어서 중현에게 속삭였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기분 나쁘잖아. 형은 군인이니까 아저씨지만 난 아직 아니란 말이야.”
   중현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가 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복도 끝에 문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둥근 문고리가 달린 평범한 나무 문이었다. 아이는 문고리에 매달려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아이를 불렀다.
   “꼬마야.”
   아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 문고리에 매달려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야, 꼬마. 우리가 찾는 형이 그 안에 있니?”
   그는 좀 더 큰 소리로 조금 더 심각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문고리에만 매달려 있었다.
   “어떡하지?”
   중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가서 문을 열어볼까?”
   “애가 계속 돌려도 안 열리는 거 보면 잠긴 거 아냐?”
   그가 대답했다.
   그 때 아이가 문고리를 비틀었다. 문은 두 사람의 눈앞에서 소리없이 천천히 열렸다.
   안은 넓은 방이었다. 대학의 강의실같이 생겼다. 실제로 가장 안쪽에는 벽 한 면을 차지하는 거대한 화이트보드 앞에 누군가 서서 강의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강의실을 가득 채운 정장 입은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그와 중현은 긴장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그 몸짓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잔뜩 겁먹은 사람이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놀라는 모습에 더 가까웠다. 일어선 사람은 황급히 그와 중현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기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의 눈밑에 퀭하게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은 교육 중입니다. 나가 주세요.”
   젊은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높고 말이 너무 빠르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람 좀 찾으러 왔습니다. 제 선배가 여기 있다고, 데리러 와 달라고 해서요. 이름이 김….”
   “지금은 교육중입니다. 나가 주세요.”
   짙은 다크서클이 있는 젊은 남자가 그의 말을 중간에 끊고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그가 항의했다.
   “아니, 감옥도 아닌데 교육중이라고 나가겠다는 사람을 못 나가게 합니까?”
   “지금은 교육중입니다. 나가 주세요.”
   젊은 남자는 똑같이 부자연스럽게 높은 목소리로 똑같은 문장을 빠르게 반복했다. 그렇게 매번 말할 때마다 뭔가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재빨리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중현이 나섰다.
   “무슨 교육인데요? 여기 대체 뭐 하는 뎁니까?”
   “여기 소속이 아닌 분들한테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교육중이니 나가 주세요.”
   젊은 남자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문장이었지만 말이 점점 빨라졌다.
   “글쎄 무슨 교육이냐고요?”
   중현이 다시 물었다. 그 때 강의실처럼 생긴 방 안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괜찮아, 들어오시라고 그래!”
   그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활짝 웃으며 손짓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선배?”
    
   두 사람은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진, 정장 입은 젊은 남자에게 안내되어 강의실 가장 앞쪽 자리에 앉았다. 학교에서도 맨 앞자리에 앉은 적은 없었는데, 하고 중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선배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마이크를 손에 든 채 활짝 웃어 보였다.
   “선배, 어떻게 된 거예요?”
   그가 서둘러 물었다. 그러나 선배는 손짓으로 그를 막았다.
   “지금 교육중이니까 하던 강의 마저 하고,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쉬는 시간에 하자.”
   그리고 선배는 마이크를 들었다. 그러나 강의를 계속하기 전에 중현이 큰 소리로 물었다.
   “무슨 교육인데요?”
   선배는 중현을 바라보았다.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그는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웃는 선배의 눈은 플라스틱에 검은 물감으로 칠한 것 같았다. 광채도, 생기도, 초점도 없었다.
   선배는 얼른 시선을 돌려 방안에 가득한 청중을 향했다.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하는 게 무슨 교육이죠?”
   “시스템 마케팅입니다!”
   방안에 있던 정장 입은 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천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게 뭔데요?”
   중현이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선배는 마치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다시 마이크에 대고 중현의 질문을 반복했다.
   “시스템 마케팅이 뭐죠?”
   “인생에서 승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다시 천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중현을 팔꿈치로 건드렸다.
   “큰일났다. 다단계야.”
   그러나 그 말도 선배에게 들켜버린 것 같았다. 선배가 다시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시스템 마케팅은 다단계가 아닙니다!”
   “인간과 소통하는 혁신적인 휴먼 마케팅 전략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온 방안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소리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선배는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고 조용히 말했다.
   “가입 안 해도 되니까 그냥 강의만 들어둬. 우린 광고 전공이니까 마케팅도 어차피 다 관련 있잖아. 실제 시장에서 먹히는 이런 파워 마케팅 전략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배우는 거야.”
   “선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힘들다고, 세 시간 있다가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더니….”
   그는 반쯤은 화가 나고 반쯤은 정말로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러나 선배는 자기가 듣고 싶은 단어만 골라서 들은 것 같았다.
   “그래, 세 시간만 너를 위해서 투자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이제 무한 자유경쟁의 시대에 살아남아야 돼. 이런 강의 들어두면 평생 도움이 될 거야.”
   “선배, 지금 그 얘기가 아니라….”
   그러나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어린 아이의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디서 소리가 났는지 보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화이트보드 바로 아래로 아이의 얼굴이 쏙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아이는 선배의 등 뒤로 강단을 가로질러 앞문으로 달려가서 문고리에 매달리더니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비집고 뛰어나갔다.
   그는 아이를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를 따라가야 했다. 지금 강단에 서 있는, 플라스틱처럼 텅 빈 눈에 싸구려 정장을 입은 남자는 그의 선배가 아니었다. 아이를 따라가서 붙잡아야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진짜 전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중현에게 눈짓했다. 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고 그는 펄쩍 뛰어 일어나서 아이가 사라진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중현이 옆에서 함께 뛰었다.
   “어? 야!”
   선배가 강의를 하다 말고 마이크를 잡은 채로 소리쳤다.
   “야, 거기 서! 저 자식들 잡아!”
   그러자 방안을 가득 채웠던 정장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두 사람을 쫓아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두 사람은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그는 중현과 함께 뛰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에서 팔딱팔딱 장난치며 달려가는 아이를 따라잡기 위해서 뛰었다. 아이는 놀랄 정도로 빨랐고, 그는 아이가 달리는 속도에 비해서 어쩐지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은 뭐라고 계속 소리를 지르며 위협을 해 댔지만 역시나 추격하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여유만만하게 조깅하듯이 복도를 따라 달려갔다.
   “왜 또 이렇게 됐어?”
   중현이 옆에서 뛰면서 불평했다.
   그는 미안해서 뭔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앞서 가던 아이가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아 휙 사라졌기 때문에 대답할 순간을 놓쳤다.
   두 사람은 아이를 따라서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을 보았다. 아이가 그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기 때문에 두 사람도 따라서 들어갔다.
   방은 꽤 컸다. 안은 비어 있었다. 문 맞은편의 탁자 위에 촛불 두개가 타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 벽을 따라 한 줄로 초상화가 쭉 걸려 있었다. 그는 뒤따라 들어온 중현이 작게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초상화 아래 사람이 누워 있었다.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대뜸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도 따라갔다.
   피투성이가 된 선배가 콘크리트 바닥에 큰 대자로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아이가 선배 옆에 서서 두 사람을 보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아저씨들이 찾던 그 형 맞지?”
   “선배!”
   그가 외쳤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는 선배에게 다가갔다.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어떻게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배는 엉망진창이었다. 옷은 흙투성이, 먼지투성이에 여기저기 찢기고 피가 묻어서 넝마가 돼 있었다. 얼굴도 몇 달쯤 제대로 먹지 못한 것처럼 핼쑥했고 입술은 말라서 부르터 있었으며 광대뼈와 눈 주위에 선명하게 멍이 들어 흉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선배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힘겹게 눈을 뜨려 했지만 멍들고 부어올라서 왼쪽 눈은 거의 떠지지 않는 것 같았다.
   “지섭아….”
   선배가 속삭였다. 그는 뭔가 말하려 했으나 선배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죽었나? 설마? 그는 중현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업혀 봐.”
   그가 중현에게 말했다.
   “빨리 데리고 나가자.”
   중현이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선배의 몸통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던 찰나에 선배가 다시 눈을 떴다.
   “지섭… 아….”
   선배가 희미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는 등을 돌리고 업을 준비를 하다가 선배를 돌아보았다.
   “예?”
   그러나 선배는 하려던 말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 얻어맞지 않은 오른쪽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선배는 흐읍, 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선배? 왜 그래요?”
   그는 선배가 쳐다보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가 중현 옆에 서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선배?”
   그는 다시 선배를 돌아보았다.
   선배는 입을 움직여 뭔가 말하려 했다. 팔을 뻗었다. 중현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선배의 몸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가상의 줄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배의 상체 위에서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아이는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 여기는 꿈이고 바깥은 저승이다. 여기는 꿈이고 바깥은 저승이다.
   아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와 중현은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아이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선배의 몸통을 짓밟으며 뛰는 동안 그와 중현은 아이가 노래하는 목소리로 되풀이하는 소리를 들으며 얼빠진 것처럼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 여기는 꿈이고 바깥은 저승이다. 여기는 꿈이고 바깥은 저승이다.
    
   밖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선배의 몸 위에서 위아래로 뛰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
   그는 꽥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며 선배의 몸에서 달려내려와 방 한 구석으로 도망쳐 숨어 버렸다.
   그는 선배를 살펴보았다.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부어오르지 않은 오른쪽 눈을 초점 없이 천장으로 향한 모습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선배를 데리고 나가기 위해서 양 팔 밑으로 손을 넣었다.
   피부 아래로 딱딱하게 갈비뼈가 만져져야 할 옆구리가 묘하게 물렁물렁했다. 처음에 그는 그 끔찍한 감촉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배를 끌고 나가려고 손에 힘을 주자 선배는 컥, 하고 발작적으로 피를 토했다. 
   중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선배를 놓아주었다. 선배의 몸은 기운 없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는 손에 잔뜩 묻은 선배의 피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의 피 – 그것도 아는 사람의 피를 보자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다리가 풀려서 그도 함께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때 문에서 쾅, 소리가 났다. 그와 중현은 동시에 돌아보았다.
   싸구려 정장을 입은 선배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선배는 싱긋 웃었다. 아까처럼 속이 텅 빈, 플라스틱처럼 무감정하고 건조한 웃음이었다. 그 뒤로 똑같이 싸구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그는 일어섰다. 발치에 쓰러진 선배와 정장을 입고 무미건조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는 선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선배가 다시 싱긋 웃었다.
   “천지신명의 영험을 입어 깨달음을 얻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면 그런 유약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과거의 모습 따위는 돌아볼 필요조차 없게 돼.”
   “뭐?”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대답에 그는 입이 딱 벌어졌다. 선배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기계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업은 신용이고 신용은 사람이야. 타고난 정신력을 극대화해서 사람을 휘어잡으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돼. 그렇게 하면 이 우주에 못 할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 천지신명의 영험을 입고 그 사상을 배워서 난 비법을 깨달은 거야.”
   “선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가 애원했다. 그러나 옆에서 중현이 그의 팔을 건드렸다.
   “선배가 아냐.”
   중현이 속삭였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돼.”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바닥에 쓰러진 선배의 시체와 정장을 입은 선배와 중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가자.”
   중현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나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선배가 그 말에 대답하듯 다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뛰어!”
   중현이 속삭였다.
   “잡아!”
   선배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이 떼를 지어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자신이 죽도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복도와 강의실을 거쳐 다시 복도를 뛰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딘가에서 놓쳤거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갑자기 죽도가 나타나 손에 쥐어져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덤벼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죽도를 휘두르면서도 그는 어쩐지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 괴상한 꿈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굉장히 크게 소리를 질렀으나 느리게 덤벼들었고, 그는 왠지 평소보다 두 배쯤 무거워진 죽도를 평소의 세 배쯤 느린 속도로 휘둘렀다. 꿈이 아니라면 어딘가 렉이 걸린 컴퓨터 게임 화면 같다고 그는 주춤주춤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때 중현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는 중현을 돌아보았다. 
   아이가 중현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작은 동물처럼 중현의 어깨를 붙잡고 기어올라 눈을 가리고 뺨을 할퀴고 있었다.
   “얘 좀! 어떻게 해 봐! 형!”
   아이가 눈을 가렸기 때문에 중현이 허공에 죽도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소리쳤다.
   “빨리 어떻게 좀 해! 내 눈! 으아아악!”
   그 때 누군가의 주먹이 그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그가 잠깐 중현에게 눈을 돌리면서 빈틈을 보인 짧은 순간에 다크 서클이 짙게 낀 젊은 남자가 그의 옆에서 다가와 한 방 먹인 것이다. 
   그는 화가 나서 죽도를 휘둘러 쫓아버리려 했다. 그 때 중현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모든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그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죽도를 들어 내리쳤고, 내리치면서 중현의 비명을 듣고 돌아보았고, 그의 몸이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들고 있던 죽도 역시 중현 쪽을 향했고, 중현은 머리에 달라붙은 아이를 떼어내기 위해 비틀거리며 옆으로 돌았고, 그래서 그의 죽도는 중현의 등 뒤에 매달린 아이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따악, 하는 낭랑한 소리가 온 방 안에 커다랗게 울렸다. 아이는 피를 뿜으며 조각조각 부서졌다.
    
   아이의 잔해가 사방으로 튀며 날아가는 동안 그는 마치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멈추어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 순간이 몇 년처럼 느껴졌다. 몇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제로 그 한 순간 안에 몇 시간쯤은 응결된 채로 흘러가버렸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놀란 표정, 겁먹은 표정, 화난 표정도 있었지만 그는 뒤에 따라온 사람들 대다수가 지친 표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두들 그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남녀였다. 옷의 색깔이 조금씩 다를 뿐 전부 하나같이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남자들은 가슴 주머니에 포켓치프까지 꽂았고, 여자들은 화장을 깔끔하게 하고 하이힐을 신은 세련된 차림새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교육’을 받거나, ‘교육생’에게 ‘강의’를 하거나, 외부의 일반 사람을 ‘교육생’으로 꼬이기 위해서 일부러 친절하고 활기찬 태도를 지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얼어붙어버린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다음 순간 부서진 아이의 잔해와 함께 핏방울이 그의 눈으로 튀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이상한 서당” 건물의 철문 앞에 서 있었다.
   오른쪽 눈 주위가 간질간질하고 느낌이 이상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볐다. 
   손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은 전처럼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밤 하늘을 배경으로 철문과 그 안의 건물은 불길할 정도로 새까맣게 보였다. 건너편에 불이 밝혀진 가로등이 희미한 빛을 여기까지 비춰주고 있었다.
   “형, 괜찮아?”
   옆에서 중현이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눈꺼풀이 계속 간질간질했다.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형, 여기.”
   중현이 손가락으로 그의 눈썹 부근을 가리켰다.
   “왜?”
   그는 중현이 가리킨 곳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물었다. 중현이 짧게 대답했다.
   “피.”
   그는 얼른 손을 내렸다. 길 건너 가로등의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팔 전체에 피가 튀어 있었다.
   그는 진저리를 치며 양팔을 옷에 아무렇게나 마구 문질렀다. 윗옷 자락으로 얼굴도 대충 닦아냈다. 그리고 중현에게 물었다.
   “넌 괜찮아?”
   중현은 살짝 찡그리며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뺨과 눈썹 위에 할퀸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별 거 아냐. 괜찮아.”
   중현이 말하고 조금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둠 속에 우뚝 솟은 불 꺼진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긴 대체 뭘까?”
   그가 중얼거렸다.
   “선배는 정말로 어떻게 된 걸까?”
   중현이 대답했다.
   “다시 들어가 보자.”
   그는 중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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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미카 12.06.21 02:5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그래도 들어가기 전이 세이브 포인트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No Profile
    정도경 12.06.28 23:28 댓글 수정 삭제
    앗 감사합니다;;
    사실은 삼부작이라서 다음호에 마지막 결말이 나갑니다. *^^* 업데이트가 내일이네요.
분류 제목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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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부모를 위한 나라는 없다1 2012.05.25
갈원경 스물 세 번째의 부족 - 본문 삭제 - 2012.05.25
정도경 반복 휴가 2: 아이2 2012.05.25
이서영 너의 낡은 캐주얼화8 2012.05.25
곽재식 공중부양4 201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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