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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2011.09.30 22:4509.30






 백 년에 한 번 산은 거대한 안개 속에 잠겼다. 그 안개 속에서 두 거인이 춤추듯이 칼을 휘둘렀다.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한때 모두들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제는 잊혀버린 이야기다.
 백 년에 한 번 짙은 안개가 찾아오면 그 안에서 어렴풋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땅을 울리는 낮고 굵은 남자 목소리, 하늘을 찌르는 높고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 두 거인은 백 년에 한 번 만나 백일 밤낮으로 싸웠고, 그렇게 백 년이 백 번 지나 맺혔던 것이 모두 풀리면 비로소 함께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마을의 노인들은 모두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모두 그 이야기를 알고 이야기를 존중하고 후대에 전해주던 그런 때가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안개 속의 거인이 아닌 땅에 사는 인간이었던 것은 그보다 더 오래 전의 일이었다. 부족이 국가를 이루고 족장이 왕으로 추대되기 시작할 무렵, 역사가 시작될 무렵부터 양쪽 부족의 사람들은 칼을 쓸 줄 알았다. 굳은 쇠를 달구어 날카롭게 벼려서 허공을 가르고 적을 베는 법을 연마하면서 두 개의 국가로 발전해가던 두 부족은 한 해에 한 번 추수를 마친 후에 자기들 사이에서 가장 날랜 칼을 선별하여 대결을 벌였다.
 남자의 칼은 둥글고 넓으나 느리게 베었고, 여자의 칼은 짧고 좁으며 날카롭게 찔렀다. 여자의 칼날이 남자의 몸 중앙을 향해 곧바로 들어오면 남자의 칼은 여유롭게 곡선을 그리며 그 날을 흘렸고, 그러면 여자는 순간 칼이 엉킨 것 같았다가도 재빠르게 손목만 돌려 남자의 날 밑에 눌린 칼을 빼낸 후에 즉시 남자의 미간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남자는 그 칼날을 밀어내면서 둥글게 굽이치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넓고도 부드럽게 칼을 움직이며 여자를 공격해 들어갔고, 여자의 칼은 빠르고 세차게 위아래로 직선을 그으며 남자의 칼을 한 순간에 쳐 내고 남자의 가슴을 노렸다. 그렇게 두 검객은 수없이 상대의 머리를, 목을, 가슴을, 명치를, 손목과 허벅지를 겨누었으나 결코 베거나 찌르지 않았고, 설령 우연히 칼날이 살갗을 스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상처는 깊지 않았다. 남자의 칼에 밀려 여자가 쓰러지거나 여자의 칼끝에 놀라 남자가 넘어지면 그 때마다 부족의 사람들은 환호하며 술잔을 들어 원없이 마시고 고기와 과실을 마음껏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쓰러진 사람과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 웃으며 어울려 노래하였고 풍성한 햇살과 서늘한 바람과 빛나는 달빛 아래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으로 살아갈 모든 것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이처럼 한 해에 한 번 마주치는 남자와 여자의 칼은 서로의 목숨을 거두려는 칼, 빼앗는 칼이 아니었으므로 두 검객에게 매년 가을걷이의 겨룸은 이기는 자와 지는 자를 가르는 싸움이라기보다 칼로 추는 춤이었고 칼을 통한 이야기였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 자신의 부족에서 가장 날래고 강했으므로 두 검객은 해마다 만났고 해마다 칼을 겨루었다. 칼날과 칼날을 부딪쳐 지난 한 해의 회포를 풀면서 두 사람은 상대의 눈을 읽는 법, 칼을 타는 법, 거리를 재는 법, 들어오는 법과 나가는 법, 상대의 칼을 받아주며 유연하게 물러서는 법과 굳세게 자신의 칼을 내는 법을 새삼 다시 익혔다.
 백인백색(百人百色), 누구나 각자의 성격이 있듯이 칼을 쥐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각자의 칼이 있다. 어쩌면 그 칼날을 겨누어 합을 맞추어본 상대야말로 열 길 물속보다 깊이 가려진 한 길 사람 속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검객에게 있어 칼날이 맞닿았다가 떨어지고 다시 부딪치는 그 찰나에는 남녀의 정과 벗으로서의 사귐과 동료의 의를 모두 아우른, 혹은 그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이끄는 대로 남자와 여자가 백 년의 가약을 맺었더라면, 이제 막 두 개의 국가로 성장해 나가려는 두 개의 부족은 이후 하나의 강력한 왕국으로 번성하여 백년이 백 번 흐르도록 주변 수백 리의 땅과 바다를 지배하는 천하의 주인으로 자리잡았을 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토록 어리석지 않았더라면.
 남자의 국왕이자 족장은 여자의 나라가 차지한 비옥한 평야와 그 평야가 생산하는 곡식을 탐내었다. 여자의 부족이자 국가를 이끌어가는 장로들은 남자의 나라가 차지한 산의 나무와 그 산이 품고 있는 철과 광물을 탐내었다. 더 많은 부를 가져다줄 더 많은 곡식과 더 많은 칼을 생산할 더 많은 광물을 노리던 두 국가는 결국 서로 가진 것을 나누기보다 상대의 것을 빼앗기를 원하였고 그 탐욕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며 여자의 장수이자 아버지는 오랑캐와 손을 잡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전장으로 향하는 길에 남자는 이 전쟁의 원인과 목적에 관하여 자신이 전해 들은 바를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와 살육의 산야를 눈으로 보았을 때 그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을 타고 무장을 갖춘 채 침략자의 선두에 선 것은 바로 여자였다. 그녀는 이제까지 그러하였듯이 서로 나누고 함께 나아가기 위한 칼이 아닌
 - 죽이기 위한 칼을
 그에게 겨누고 있었다.
 남자의 둥글고 부드럽고 느린 칼은 분노와 배신감을 담아 빠르고 강하게 허공을 갈랐다. 남자는 여자의 투구에 가려진 눈물을 보지 못했다. 여자의 날카롭고 가벼운 칼은 남자를 상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는 순간에만 무겁고 둔하게 남자의 칼날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여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릴 기회를 얻기 전에, 칼을 내리고 투구를 벗어 젖은 눈을 드러내고 입을 열기 전에 – 남자의 등 뒤에서 칼을 꽂은 것은 오랑캐의 장수였다. 남자는 쓰러졌고, 그의 피가 한때 풍성했던 산야를 적셨다.
 그리고 여자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남자의 부족은 나라를 잃었다. 그러나 그 산과 숲을 품은 드넓은 대지는 온전히 여자의 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중 북쪽으로 펼쳐진 가장 풍요로운 고원은 오랑캐의 차지가 되었으며, 여자 또한 장수인 아버지의 명에 의해 검객의 무장을 풀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채 억지로 칼을 놓은 손을 오랑캐의 우두머리에게 맡겨야만 하는 몸이 되었다. 감옥과도 같은 꽃가마에 갇혀 친숙한 고향의 평야를, 해마다 가을이 되면 찾아갔던 산천을, 이제는 남자의 피가 흩뿌린 한 서린 능선을 뒤로 하며 여자는 울었다. 그리고 오랑캐의 땅에 돌이킬 수 없이 발을 디디기 전에, 고국의 마지막 산을 넘기 전에, 빼앗겨버린 남자의 나라가 당한 것과 똑같은 수치를 당하기 전에 ――― 여자는 치마폭에 숨겨두었던 짧고 좁으며 날카로운 칼, 평생을 함께 해온 칼, 일 년에 한 번 추수한 뒤의 풍요와 활기와 즐거움을 남자와 함께 나누었던 그 칼을 눈물 가득한 가슴에 스스로 꽂았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의 피가 흩뿌려진 산에서 두 검객은 백 년에 한 번 전쟁의 그 날이 돌아오면 안개 속의 거인이 되어 다시 만났다. 그 날이 돌아오면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 땅을 울리는 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 하늘을 흔드는 여자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백일 밤낮으로 들려왔다.
 두 거인 중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은 더 이상 이기거나 지는 자를 가르는 겨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피 위에 슬픈 피를 뿌리면서, 땅에 매였던 생을 떠나면서 그들은 원(怨)도 한도 내려놓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칼을 쥐는 자, 타인의 목숨을 다루는 자가 항용 져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백 년에 한 번 이 세상 것이 아닌 안개를 두르고, 두 남녀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그러하였듯이 다시 한 번 칼날과 칼날을 마주대며, 칼날과 칼날을 섞어 춤추며, 못다 한 이야기를 영원토록 계속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시간이 흘렀다.
 빼앗긴 남자의 나라도, 빼앗은 여자의 나라도 꽃처럼 피어났다가 꽃이 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같은 땅 위에 남자의 부족과 여자의 나라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서로 돕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피를 먹고 또 다른 부족들이, 또 다른 나라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시들었다.
 세월이 흐르고 국호가 바뀌고 왕이 바뀌고 연호가 바뀌어도 산 아래 마을에는 사람들이 살았다. 백 년에 한 번 짙은 안개와 함께 나타나는 산 위의 두 거인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설로 전해져 내렸다.
 칼을 쓰는 두 거인의 산 아래 사는 마을 사람들이라 해서 특별히 무예에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산 밑 마을 사람들도 농사를 지었고, 그러나 그 중 손재주가 뛰어난 누군가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었으며, 또 그 중 재리(財利)에 밝은 누군가는 그 물건들을 사고 팔았다. 때때로 칼만큼이나 길고 무거운 막대를 잘 다루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고 가끔은 송아지를 들어올릴 만큼 힘센 사람이 태어나기도 했으며 호미나 낫의 가볍고 짧고 휘어진 날을 곧은 단검의 날만큼이나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 간혹 마을 사람들의 찬탄을 받기도 했지만 그 뿐이었다. 여자의 나라와 남자의 나라가 존재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이제 부족이 아닌 한 왕국의 평범한 백성이 된 마을 사람들은 칼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런 삶에 만족했다.
 그리고 안개 속의 남자와 여자는 정해진 날이 되면 여전히 백 년에 한 번 그 산에 나타났다. 산에 짙은 안개가 모여들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서로 산에 오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약초 캐는 노인도, 나물 캐는 아낙네도 바구니를 내려놓고 싸리울 안으로 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툇마루에 앉아 안개 낀 산기슭을 바라만 보았다. 마을 어른들은 머루 따러 가는 계집아이들과 나무 베러 가는 사내아이들이 보이면 이들을 말리며 동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집으로 돌아가도록 단속했다.
 밤이 되면 안개는 더욱 무거워지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칼날 부딪치는 소리, 굵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와 높고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마을의 조용한 밤 공기를 울렸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고, 그러면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아이들을 품에 안고 조용조용 목소리를 낮추어 오래 전 같은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과 춤과 노래와 전쟁과 피와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두 검객의 칼은 창이 되기도 하고 활이 되기도 했으며 두 거인은 형제가 되기도 하고 오랜 벗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흩뿌리다 뒤따라 저승길을 택하는 결말만은 누구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은 땅 위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살았고, 현재의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오래 전의 사람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기쁨과 슬픔이 있었고 삶과 죽음이 있었으며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엮이고 겹치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의 이야기로 형형색색 물들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

 백 년의 안개가 열 번째 되돌아오던 해의 일이다. 한 소녀가 낮의 안개를 뚫고 몰래 산에 올라 두 검객이 겨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녀는 궁금했다. 그리고 답답했다. 유일한 놀이터였던 마을 뒷산에 오르지 못하게 된지 벌써 석 달이 흘렀다. 그 석 달 동안 소녀는 안개가 걷히고 마을을 울리는 그 무시무시한 쇠 부딪는 소리와 고함치는 남녀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늘일까 내일일까 기다렸지만 한 밤을 자고 두 밤을 자고 세 밤을 자고…. 일어나 보아도 안개는 그대로 산을 가리고 밤이면 산을 울리는 소리는 더욱 더 무시무시하게 들려왔다. 백 날, 어른들은 백 날이라고 했지만 소녀에게 그것은 너무도 이해할 수 없이 큰 숫자였고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햇빛이 비교적 맑고 안개 속의 무시무시한 소리가 비교적 덜 들려오던 어느 날 어른들의 눈을 피해 집을 살짝 빠져나와 산기슭으로 향하는 동구 밖 오솔길을 내달렸던 것이다.


 산허리까지 올라가는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개가 짙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마하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소녀에게는 이 산이 고향이자 놀이터였고 그래서 산세를 자기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안개와 습기가 흘러 들어와 가슴이 답답했지만 어차피 목적지가 있어 가는 걸음은 아니었으므로 힘에 겨우면 멈추어 쉬면 되었다. 그렇게 소녀는 쉬엄쉬엄 발짐작으로 길을 찾으며 쇠 부딪는 소리와 사람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산을 올라갔다.
 안개는 올라갈수록 짙어져서 이제는 허공을 메운 물방울이 아니라 마치 두껍고 거대한 한 폭의 천이 되어 소녀의 얼굴을 가리는 듯, 그 습기의 무게는 굵은 동앗줄이 되어 목과 가슴을 조이는 듯 하였다. 힘에 겨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움직일 수 없으니 소녀는 더럭 겁이 났다. 산 밑에는 안개로 덮이지 않은 마을이 있었고, 부모와 할머니가 기다리는 집이 있었다. 지난 석 달 동안 그토록 지루했던 그곳이 소녀에게 갑자기 더할 수 없이 그립고 소중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소녀는 숨을 가다듬은 후 한 시라도 빨리 산을 내려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소녀가 몸을 돌렸을 때, 안개 속에서 남자의 고함소리와 함께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소녀는 아주 커다란 것이 등에 부딪쳤다고 느꼈다.


 소녀가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와 동리 어귀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소녀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싸리울 안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졌다. 애태우던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소녀를 껴안았다. 찢어진 옷을 벗기고 피를 닦아냈으나 소녀의 몸에는 나뭇가지와 풀 잎사귀에 조금 긁힌 팔다리의 상처 외에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소녀는 그 길로 병석에 누워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열흘 밤낮으로 앓았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숨이 넘어가게 되었다고 여긴 부모는 조급해졌다. 용하다는 의원이 이웃 마을에 살고 있었으나 의원을 청하기 위해 안개에 뒤덮인 산을 넘어 이웃 마을로 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다 못해 소녀의 아버지가 직접 나서려 했으나 그러다가 그마저 변을 당하게 되면 어쩌냐고 소녀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울며 매달렸다. 그러는 사이 소녀는 이불 속에서 눈을 까뒤집고 헛소리를 하며 하루하루 쇠약해져 갔다. 안개는 여전히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그 안개가 걷힐 때를 기다리다가는 소녀가 죽을 것이 분명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절망했다.
 그 때 마을의 한 노인이 소문을 듣고 소녀의 용태를 살피기 위해 찾아왔다. 맥을 짚고 소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본 노인은 한숨을 푹 쉬고는 방을 나와서 마당에 넋을 놓고 서 있는 소녀의 아버지를 조용히 불러내었다.
 “내 어렸을 적 조부께서 해 주시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조부님의 어린 시절 동무 하나가 이처럼 안개 낀 날에 몰래 산에 올랐다가 사흘이나 소식이 끊긴 끝에 머리를 풀고 반 실성한 채로 내려와서 보름 동안 밤낮으로 앓았다고 하셨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녀의 아버지가 다급하게 물었다.
 “치료할 방법이 아주 없었습니까?”
 “방법이야 있지. 있기는 있되….”
 여기까지 말하고 촌로는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더욱 절박해졌다.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제 딸아이와 저까지 두 목숨 살린다 생각하시고 제발 알려 주십시오.”
 “글쎄….”
 그리고 촌로는 소녀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자정 무렵에 산기슭으로 가 보면 안개의 끝자락이 적신 땅 위에 기이한 것이 자라난다고 하네. 안개로 인해 얻은 병은 그 기이한 것을 뽑아다가 달여 먹여야만 낫는다고 들었어.”
 “감사합니다!”
 소녀의 아버지가 외쳤다. 당장 마당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려는 소녀의 아버지를 만류하며 촌로가 경고했다.
 “그 기이한 것은 무엇인지 몰라도 아주 독한 것이야. 자칫하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미치광이가 된다고 들었네. 맨손으로 다루어서는 절대로 안 되고, 그 곁에서는 숨조차 깊이 들이쉬지 말아야 해.”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소녀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은 위험을 알리는 경고가 아니라 딸의 목숨을 살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충고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녀의 아버지는 자정을 기다려 산기슭으로 떠났다.
 그 날 밤은 비가 내렸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소녀의 아버지는 빗물에 젖어가며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 구덩이를 헤치고 가끔은 넘어져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기이한 것’을 찾아 산기슭을 헤매었다. 비와 어둠 때문에 안개의 끝자락은커녕 자신이 지금 산의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땅의 경사를 발로 짐작해가며 너무 깊이 올라가지도, 아예 내려가지도 않고 낮에 보았던 안개가 땅 속으로 사라져가던 바로 그 곳일 듯한 부근을 헤맬 따름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는 보았다. 저 앞의 나무 밑둥 근처에서 뭔가 빛나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그것은 버섯이었다. 가느다란 버섯 한 줄기가 나무 밑둥에서 솟아나와 빗줄기와 안개와 어둠 속에서 노르스름한 빛을 강렬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무심코 손을 뻗어 버섯을 따려다가 소녀의 아버지는 촌로의 말을 떠올렸다. 저고리를 벗어 손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입을 막은 뒤에 조심스럽게 숨을 멈추고 버섯의 줄기를 꺾었다. 버섯의 갓이 흔들리면서 역시 노르스름한 색으로 빛나는 가루를 사방에 뿌렸다.
 그리고 순간, 휘잉, 쩡, 하고 바람을 가르는 칼 소리와 함께 여자의 고함 소리가 산을 울렸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이기에는 너무 높고 크고 날카로웠다. 땅에 인간이 거주하기 전, 인간을 닮은 동물조차 살아가기 전, 날개 한쪽만으로도 끝에서 끝까지 펼치면 반도를 뒤덮고 대륙까지 닿는다는 전설의 새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며 지를 법한 그런 비명과도 같은 소리,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단 천을 찢는 듯한 소리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버섯을 감싸쥐고 다른 한 손으로 여전히 입을 막은 채 집을 향해 달음질쳤다.
 부엌에서는 이미 소녀의 어머니가 물을 끓이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비에 젖고 흙투성이인 채로 빛나는 버섯을 손에 들고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어찌된 일인지, ‘기이한 것’은 찾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려는 소녀의 어머니를 손사래를 쳐서 제지하며 소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빛나는 버섯을 끓는 물에 던져넣었다. 가마솥의 뚜껑을 덮고 소녀의 어머니를 서둘러 밖으로 끌어낸 뒤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한밤의 마당에 서서 소녀의 아버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소리 죽여 이야기했다.


 버섯 달인 물은 버섯과 마찬가지로 노르스름하게 빛났다.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의 아버지가 일러주는 대로 두꺼운 천으로 입과 손을 가리고 대접 속의 버섯 달인 물을 혹여라도 흘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소녀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다. 천천히 쉬엄쉬엄 한 대접을 다 마신 소녀는 크게 한숨을 쉬었고, 그대로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소녀는 하루 밤낮을 잤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소녀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지금 소녀의 집은 산기슭의 마을이었으나 어른이 된 소녀의 집은 바닷가에 있었다. 소녀는 그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까맣게 뒤덮은 적들의 배가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적들은 검은 갑옷을 입고 뿔과 같은 괴상한 것이 달린 투구를 썼다. 그들은 칼과 활을 들었으며 또한 불과 연기를 토해내는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사람들은 그 막대기가 토하는 불꽃을 맞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시체가 산같이 쌓였고 피가 바다처럼 흘러 땅을 붉게 물들였다.
 공포와 슬픔 속에 비명을 지르다가 소녀는 깨어났다.
 안개는 걷혔고, 산 위의 두 거인은 백일 밤낮의 겨룸을 마친 뒤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는 자신이 본 것을 부모에게 이야기했으나 물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단지 어른들의 말을 거스르고 안개가 덮였을 때 산에 올랐다는 사실 때문에 꾸중을 들었을 뿐이었다. 곧 나라에 큰 난리가 날 것이며 적들의 신묘한 무기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정경을 생생히 보았노라 몇 번이고 힘주어 이야기해도 모두 꿈 이야기로만 치부할 뿐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적들의 배가 바다를 까맣게 뒤덮고 그들의 손에 죽어간 시신이 산같이 쌓여 흐른 피가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붉게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광경은 시간이 흘러도 소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그 공포와 슬픔에 땅을 울리던 남자의 굵고 낮은 고함 소리와 아주 커다란 것이 등을 후려치는 것을 느꼈을 때의 두려움이 묘하게 겹쳐졌다.
 귀기울여 들어주는 이도 없고 해결할 방도를 보여주는 이도 없었으므로 떨쳐낼 길이 없어진 그 공포와 두려움과 슬픔은 소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병이 되었다. 소녀는 나물을 캐다가도, 머루를 따다가도, 빨래를 하다가도, 혹은 툇마루에 앉아 맑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도 문득문득 그 산같이 쌓인 시체와 살려달라 비명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눈에 보이는 땅을 모두 붉게 적시는 피를 떠올렸다. 그리고 몸서리치며 울었다.
 소녀는 자라 처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의 두려움과 공포와 슬픔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깊어졌다. 동리에는 일찌감치 소녀가 안개 낀 날 산을 올랐다가 실성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녀의 부모는 걱정했다. 산을 덮은 안개가 보이고 칼 부딪는 소리와 남녀의 고함소리에 대해 알려진 사방 수십 리 안에 굳이 실성한 처녀를 데려가 아내로 며느리로 삼으려는 집안은 없었다. 매파를 찾아보아도 등을 돌리거나 잘 해야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처녀의 부모가 간신히 찾아낸 혼처는 처녀의 고향 마을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산의 안개도 칼 부딪는 소리도 남자와 여자의 고함 소리도 미치지 못하는,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혼사를 준비하며 처녀는 울었다. 부모와 고향을 떠나 멀리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슬픔 때문에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기를 빌었던 무서운 일들이 조금씩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공포와 절망감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아주 오래 전 칼을 다루던 부족의 여자가 그러했듯이 처녀도 울면서 대례복을 입고 울면서 꽃가마에 올라 울면서 산 밑의 고향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그 때의 여자에게는 칼이 있었으되 처녀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부모가 싸 준 이불 한 채와 은수저 한 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이불 속에서 처녀의 남편이 된 총각은 처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물었고, 처녀가 그 이유를 이야기했을 때 귀기울여 들어준 후에 처녀를 정성껏 달래려 했다. 그러나 처녀의 남편 된 사람 역시 모두 그러했듯이 처녀의 예감을 한갓 어린 시절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던 소녀가 꾼 무서운 꿈으로 치부하였고, 그래서 이제 아낙이 된 처녀는 더욱 더 끝없는 절망과 공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처녀가 머루 따고 나물 캐는 산골의 여인이 아니라 칼을 쓰는 사람이었더라면, 혹은 촌의 아낙이 아니라 도성의 높은 집 자제였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랬더라도 모든 것은 지금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전쟁은 나라와 나라 간의 일이고, 한갓 촌부이든 도성의 명문 귀족이든, 한 사람의 힘으로 그 소용돌이를 막을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날 소녀가 산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마을 어른들의 말에 따라 집안에 머물렀더라면, 안개 속의 거인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려 하는 대신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들로 만족했더라면….
 그러하였더라면 소녀는 피할 수 없는 앞날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파국의 순간까지 남은 생을 두려움과 눈물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는 것, 사람의 머리로 알아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은 결국 보고 알았을 때 괴로움만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역이 아닌 곳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소녀는 웃고 뛰놀며 자라나 처녀가 되어 이웃 마을의 탄탄하고 마음씨 좋은 총각에게 시집가서 그 자신이 그랬듯이 호기심에 찬 눈망울을 굴리는 동글동글한 딸들과 남편을 닮아 어깨가 딱 벌어지고 그 어깨만큼이나 마음도 넓은 아들들을 낳아 기르며 보통의 촌 아낙이 겪는 평범한 기쁨과 슬픔, 평범한 눈물과 미소와 한숨과 웃음 속에 죽는 그 날까지는 평온한 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녀가 그러한 생을 원했을 지는 알 수 없으나….


 아낙이 된 처녀는 이제 머루를 따고 나물을 캐는 대신 생선을 말리고 소금을 구웠다. 그리고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그 하늘이 맞닿은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날 병든 꿈 속에서 보았던 그 바닷가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바다가 분명하다고 아낙은 날이 갈수록 마음 속으로 확신했다. 그리하여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어주려 하지 않는 남편과 시부모에게 의존하기를 그만두고 아낙은 혼자서 피난의 방편을 꾸렸다. 말린 생선과 주먹밥을 숨겨두고, 입고 갈 옷가지를 고이 개어두고,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서 수평선 너머를 살피며 그 불길한 검은 배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난리를 피해 멀리 도망칠 수 있도록 빈틈없이 준비했다.
 그러나 아낙의 말과 행동을 언제나 수상히 여기던 시모가 어느 날 아낙이 바닷가로 나간 틈에 방을 뒤졌고 언제라도 먼 길 떠날 수 있도록 차비해둔 옷가지와 먹을거리를 찾아냈다. 아낙이 행실이 단정치 못하여 외간 남자와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고 여긴 시모는 아낙의 남편에게 알렸으며, 그리하여 노발대발한 남편과 그 부모는 아낙을 집에서 쫓아내었다.


 갈 곳을 잃은 아낙은 빈 손으로 바닷가를 떠돌았다. 파도와 갈매기를 바라보며, 평온하기 그지없는 수평선을 지켜보면서 아낙이 된 소녀는 자신이 진정 실성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낙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했고 그녀에게는 노잣돈도, 여행길의 허기를 달래줄 음식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낙이 된 소녀는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꿈이 사실이라면 적들이 처음 다가오는 곳, 큰 난리가 시작되는 곳은 바로 이 바닷가였다. 소녀는 그것을 보아야만 했다. 자신이 헛된 꿈을 믿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매달려 부모와 남편에게 걱정과 시름을 끼치고 결국 자기 자신의 탓으로 시부모의 노여움을 사 소박을 맞게 된 것이 아님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소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삶의 이유였고, 실상 대단히 절박한 이유였다.
 그래서 아낙이 된 소녀는 밤낮으로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낙을 동정한 마을 사람들이 가끔 물과 먹을 것을 주었다.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돌과 나뭇가지를 던졌다. 아낙이 외간 남자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남편이 찾아와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시부모는 그런 남편을 야단치며 아낙에게 악다구니를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아낙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까지 흘러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날 것이었다. 그래서 아낙은 바닷가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날이 가고 밤이 오고 다시 날이 밝았다. 아낙은 먹기도 하고 먹지 않기도 했으나 먹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낮에는 초봄의 찌르는 듯한 햇살 아래, 밤에는 얼어붙는 듯한 이슬 아래 아낙은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나날이 쇠약해졌다. 그러나 아낙은 바닷가에 머무르며 수평선을 지켜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허기와 추위에 지친 아낙의 머릿속과 눈앞에는 마치 안개 속에 싸인 꿈을 꾸듯이 여러 가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유독 자주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안개에 묻힌 고향의 산이었다. 아낙은 칼이 부딪치는 소리, 땅을 울리던 남자의 낮고 굵은 목소리, 하늘을 가르던 여자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기억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두 장수는 죽어 산신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키는 고향의 산을 잊지 않고 백 년에 한 번씩 찾아와 마을을 돌보아 주었다. 이제 바다 위에 적들이 나타난다면, 적들이 바닷가를 뒤덮고 평야를 가로질러 고향 마을의 산까지 침입한다면, 두 장수가 나타나서 지켜줄까.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 채로 까무룩히 정신을 놓은 사이 이승과 저승을 몇 번씩 넘나들면서 아낙은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그 두 장수가 돌아오기를, 부모와 고향을 지켜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다가 아낙은 마침내 쓰러졌다.
 아낙의 숨이 끊어진 것은 동틀 무렵이었다.
 아낙의 죽은 몸이 채 식기도 전에 적들의 배가 수평선을 까맣게 뒤덮었다.


***

 안개 속의 두 거인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낙은 알지 못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의 생을 떠났다. 백 년에 한 번 돌아올 산이 존재하는 한, 그들이 오래 전 한때 차지했던 땅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벌이든 그것은 그들의 영역 밖에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안개 속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거인 또한 안개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의 세계는 오로지 산 위의 안개 속에 있었다.


 그리고 백 년이 열 다섯 번째 돌아오던 해에 산이 깎였다.


***

 훗날 바닷가의 아낙이 된 산 아래 마을의 소녀가 살았던 것도, 아낙이 시집간 바닷가에 적들의 배가 새까맣게 뒤덮인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아낙을 비롯하여 산과 바다와 평야에서 땅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으며 칼을 모르는 삶을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채, 그 누구도 기억해주기를 바라지 않은 채 그 나름대로 살아갔고 죽어갔다. 오로지 불을 토하는 막대를 든 적군의 침략만이 역사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다. 그보다 더 이전에 칼을 쓰던 남자와 여자의 부족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제 시간 속에 묻혀 완전히 잊혔다.
 산 아래 마을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백 년에 한 번 산을 뒤덮는 안개와 그 안개 속의 두 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알지 못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칼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는 만질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칼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고 지극히 날카로운 양날의 칼을 하나씩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갔다. 산에 올라 머루를 따고 나물을 캐고 밭에 나가 땅을 일구는 대신 그들은 큰 기계를 타고 도시로 나가 작은 기계를 다루며 일을 하다가 다시 큰 기계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기계의 값어치가 각각 얼마나 되며 또한 자신이 사는 집과 그 집이 뿌리 박고 선 땅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지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주의 깊게 셈하고 기억했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기계와 집과 땅의 값어치와 비교했다.
 그들은 기억하고 셈하고 비교해야만 했다. 그것은 소리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그 전쟁터에 던져졌고 그리하여 살아남기 위해 깨어 있을 때는 물론 잠들어 있을 때까지도 몸부림쳤다. 그렇게 변해버린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오래 전에 살았던 것, 지금도 때때로 돌아오는 것, 그리하여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넘나들며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양날의 칼을 품은 세상에서 찔려 죽지 않기 위해 허우적대는 그들은 그러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이처럼 절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때인가 특출나게 어리석은 지도자가 나타났다. 지도자는 생각이 얕고 짧았으며 가진 재주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 재리(財利)에 밝았으며 특히 땅의 값어치와 집의 값어치, 흙과 자갈과 모래와 돌과 물의 값어치를 기가 막히게 셈하는 한 가지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얕은 재주로 사람들을 홀려 그들 위에 군림했다. 지도자와 그의 백성 모두, 땅과 산과 강과 흙과 나무와 모래와 물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한낱 사람이 소유할 수 없으며 값어치를 매길 수는 더더욱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지도자와 그 때문에 눈 멀고 귀먹어 함께 어리석어진 백성들이 땅과 산과 강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단 한 가지, 강산과 대지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 존재하므로 그 값어치도 변하지 않고 오래 갈 것이며, 그러므로 자신들이 살아 존재할 때 그 값어치를 한껏 올려놓아야만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땅에 빌붙어 부와 권력을 빨아먹으며 해충이 창궐하듯 번성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도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어리석은 방식으로 땅과 물의 값어치를 올리기 위해서 강바닥을 파내고 산을 깎으려 했다. 그의 계획은 땅에 본래 존재하던 요철(凹凸)을 뒤바꾸는 장대한 것이었다. 즉 산이 있었던 곳을 깎아내어 움푹하게 만들고, 그곳으로 물을 흘려보내 강을 만들어 배가 지나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사람들은 다른 기계를 타고 쉽고 빠르게 산 위를 달리는데, 어째서 멀쩡한 산을 깎아야 하며 왜 그곳으로 하필 배가 지나가야만 하는지 수긍하지 못하는 현명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종종 고집이 세기 때문에 더욱 어리석은 법이다. 지도자는 십 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을 그 절반의 세월 안에 완전히 뒤바꾸기를 원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셈한 땅과 강과 산의 값어치를 높일 뿐만 아니라 그 강산에 영구히 변하지 않을 자신의 업적을 새겨놓기를 갈망했다.
 그리하여 장맛비에 홍수가 나서 산자락이 조금 무너져내려 산 아래 마을의 집들을 덮쳤을 때, 지도자는 다른 산이 아닌 바로 이 산이야말로 깎아서 평지를 만들어야 하며, 지금이야말로 그 일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결정을 내렸다. 산이 평지가 되면 다시는 무너져내려 마을의 집들을 덮치지 못할 것이었고, 강 대신 그 곁으로 내(川)를 파서 내리는 빗물을 모두 모아 강으로 바다로 흘려보내자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큰 삽이 달린 거대한 기계가 올라가던 날, 산은 아침부터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

 포크레인 작업은 녹록치 않았다. 안개가 너무 짙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희미하지만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쨍, 텅, 하고 쇠 부딪치는 소리와 이상하게 사람의 외침 소리처럼 들리는 소음 때문에 때로는 공간 감각과 방향 감각이 전부 마비될 지경이었다.
 어쨌든 기사는 계속 땅을 팠다. 공사에는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두 가지, 즉 예산과 마감 기한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자리를 잃는 것만은 원치 않았다.
 다시 텅, 하고 쇠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개 속 허공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니었다. 삽끝에 전해진 충격으로 보아 뭔가 실제로 부딪친 것이었다.
 그러나 안개 때문에 운전석 앞창문으로 내다보는 것만으로는 뭐가 걸렸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기사는 기계를 끄고 내려서 삽 쪽으로 다가갔다.
 땅에 뭔가 쇠로 된 것이 불쑥 솟아나와 있었다.
 기사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쇠는 무척 컸다. 둥근 고리 모양이었는데 굉장히 두꺼웠다. 철근이나 쇠말뚝이라면 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생긴 물건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사는 산 아래에 연락했다.
 ‘뭔가’가 나왔다는 말에 공사 책임자는 짜증을 냈다.
 “뽑아버리고 계속 파면 될 거 아냐? 일 처음 시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런 걸 일일이 물어보고 그래?”
 “그게, 이런 걸 뽑아버려도 되는 건지 잘 몰라서요….”
 기사는 물건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한쪽 끝만 튀어나와 있는데, 두껍고 둥그런 게 꼭 고리같이 생겼거든요. 반만 튀어나와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함부로 뽑아냈다가 유적이면 어떡합니까?”
 유적이 발견됐다고 하면 공사는 당장 중지될 것이 뻔했다. 공사 책임자가 말했다.
 “그 산에 무슨 유적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까, 일단 뽑아서 뭔지 보고 나서 얘기해. 유적이라고 공사 중지시키고 난리쳐서 뽑아놓고 봤더니 쇠말뚝 같은 거면 어떡할 거야?”
 쇠말뚝이라도 일제 시대에 박아놓은 물건이라면 유적으로 취급해서 독립기념관으로 보내야 되는 게 아닌가, 라고 기사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공사 책임자가 이어서 고함을 질렀기 때문에 기사의 상념은 중지되었다.
 “그러니까 일단 파! 유적인지 아닌지는 파서 뽑아놓으면 알 거 아냐. 작업 계속하라고!”
 그래서 기사는 다시 운전석에 올라 기계의 시동을 걸었다. 삽 끝이 쇠에 걸리지 않도록 그 주위를 돌아가면서 파내기 시작했다.
 흙이 무너지면서 쇠로 된 물건의 모습이 점점 드러났다. 기사가 짐작한 대로 고리였다. 고리 아래로는 쇠 기둥이 이어져 있었다. 기사는 쇠말뚝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크기가 지나치게 크고 모양새도 이전에 보았던 쇠말뚝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땅 위에 드러난 손잡이 고리 아래 말뚝이 박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뽑아야 했다. 그래서 기사는 계속 파 들어갔다.
 솟아오른 쇠를 빙 둘러 파낸 구덩이가 어느 정도 깊어진 것을 보고 기사는 삽을 움직여 그 끝을 쇠고리에 걸었다. 처음에는 삽으로 쇠고리를 밀었다가, 삽끝을 고리에 걸고 당겨 보았다.
움직인다.
 그 순간, 기사는 산 전체를 울리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혼비백산한 기사는 기계의 운전석 밖으로 뛰어나왔다. 안개 속을 둘러보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기사가 소리쳤다.
 “있으면 대답해요. 누구 다쳤어요?”
 - 으으으으….
 대답 대신 우릉우릉한 신음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기사는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산을 온통 뒤덮은 짙은 안개 속에 하늘까지 닿을 듯한 사람 모양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신음소리와 함께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 서슬에 다시 한 번 산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기사는 겁에 질렸다. 산에서 내려가기 위해 서둘러 기계의 운전석에 올랐다. 기계를 후진시켜 방향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땅에서 솟아나온 쇠고리에 삽끝이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밀어내기도 하고 당겨보기도 하고 위로 들어올려 보기도 했지만 삽은 마치 쇠고리에 붙잡히기라도 한 듯, 아무리 움직여도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다.
 기사는 계속 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때마다 삽끝에 걸린 쇠고리와 그 아래 이어진 기둥도 함께 흔들렸다. 삽을 빼내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에 기사는 쇠를 빙 둘러 파낸 구덩이에서 검붉은 액체가 스며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삽끝을 크게 밀었을 때, 마침내 쇠가 확 기울어졌다. 기사가 삽을 들어올리자 그와 함께 삽 끝에 걸린, 기사가 쇠말뚝이라 생각했던 거대한 무언가가 함께 뽑혀 나왔다.
 그러나 삽 끝에 고리가 걸린 채 포크레인이 그 물건을 들어올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한 순간, 기사는 저건 절대로 쇠말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둥근 고리 아래는 손잡이가 있고, 그 아래 긴 날이 이어져 있다.
 저 물건은….
 …. 칼, 이라고 생각한 순간, 하늘과 땅을 꿰뚫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산 전체를 흔들었다.
 천둥과도 같은 소리에 포크레인 아래의 땅이 진동했다. 칼이 뽑혀나온 구멍에서 비린내를 풍기는 검붉은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 주변의 흙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사는 기계를 후진시키려 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땅이 무너지는 속도는 기계가 움직일 수 있는 최고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그래서 기사는 기계에서 뛰어내렸다. 걸음아 날 살려라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의 등 뒤에서 피 구덩이가 삽 끝에 매달린 칼날을 빨아들였다. 거대한 칼에 끌려들어가듯 포크레인이 피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기사는 뭔가 커다란 것이 거세게 등을 후려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기사는 의식을 잃은 채로 피 구덩이 속에 삼켜졌다.


***

 안개가 비로 변했다.
 비가 피로 변했다.


***

 칼의 손잡이가 흔들렸을 때 안개 속의 남자는 기운을 잃고 무너졌다. 칼이 뽑혀 나온 순간 남자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땅으로도 돌아가지 못한 채 그 존재 자체가 안개 속으로 녹아 사라져 버렸다.
 두 번째로, 그리고 영원히 짝을 잃은 여자의 비명소리가 산과 하늘을 찢었다.


***

 안개로 몸을 감싼 채 여자는 남자의 피로 가득한 구덩이 앞에 서 있었다. 남자가 사라지면서 두 사람만이 존재했던 안개 속의 세계도, 백 년이 백 번 돌아오기를 바라보던 약속도, 그 세월 동안 못다 한 이야기도 모두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여자는 천천히 그 피의 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의 피가 오랫동안 두 사람을 감쌌던 안개를 적셨다.


***

 여자가 걸어들어가자 피의 구덩이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커졌다. 주변의 흙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땅이 흔들리면서 조각조각 부서져 피 웅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산의 나무도, 풀도, 동물도 함께 피 구덩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산 아래 마을에는 난데없는 지진 경보가 내렸다. 이전에 지진이란 것이 일어난 적이 없었으므로 주민들 대부분은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림이 커져만 갔고, 산 전체를 울린 여자의 비명 소리는 근방의 모두가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 둘씩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구덩이는 산 전체를 집어삼킬 때까지 무너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피가 휩쓸어 삼킨 곳에는 오로지 검붉은 액체로 가득한 움푹 파인 공간 외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곳에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을 것이었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 단 한 군데 발 붙이고 마음 붙일 곳이었으며 이제는 허물어져 죽은 자들의 피로 가득 차 버린 땅은 생명을 잃고 그 자체로 죽음이 되었다. 앞으로도 백 년이 백 번 지날 동안 그 땅은 물론 피로 가득한 구덩이의 가장자리에도 살아있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지조차 못할 것이었다. 단지 그 피에 젖은 흙이 끝없이 부식하고 검붉게 물들어버린 돌과 바위가 조각조각 부스러져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땅이 무너지기를 멈추고 구덩이가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되었을 때 구덩이 한가운데에서 피에 젖은 하얀 팔이 튀어나왔다. 그 팔은 손잡이에 고리가 달린 거대한 칼을 손에 쥐고 허공에 세 번 휘둘렀다. 칼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하늘이 진동하는 웅웅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손에 칼을 쥔 채로 하얀 팔은 구덩이를 가득 채운 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남자와 여자가 사라진 후에 산도 그렇게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어리석은 지도자가 꿈꾸었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인공의 평야와 냇물 대신 피로 가득한 호수가 남았다.
 호수는 백일 밤낮으로 근방 백 리 안에 피비린내를 피워 올렸다. 그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혹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혹은 눈물과 슬픔 속에 잠기기도 했다. 우연히 해가 진 뒤에 피의 호수 주변에 다가갔던 사람들은 검고 추악한 것이 구덩이 가장자리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했다.
 땅의 값어치를 중시하는 지도자는 이 소식을 듣고 몹시 걱정했다. 그리하여 거대한 구덩이에 가득한 피를 퍼내고 바닥을 드러낸 뒤에 구덩이를 평평하게 고르겠다는 계획을 내어 놓았다.
 그러나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을 때 그곳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 풍요로운 산이었던 구덩이 안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사막과도 같이 메마른 모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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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김진영 11.10.03 00:15 댓글 수정 삭제
    슬프네요. 그리고 무섭습니다. 뭔가 전설의 고향 같달까요?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구멍. 그 구멍을 매울 수 없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구멍을 평평하게 만들 수도 없는 것일지도.
  • No Profile
    정도경 11.10.03 09:58 댓글 수정 삭제
    제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교조적인 이야기가 돼 버린 거 같네요;;; 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앤윈 12.04.02 13:10 댓글 수정 삭제
    전 교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름답습니다.
  • No Profile
    정도경 12.04.02 23:22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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