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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재 안나푸르나

2012.10.20 01:3210.20

닫힌 교문을 열며, 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벽에 가득 붙어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포스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포스터 속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인지, 나는 어른들의 속삭임 사이에서 그 의미를 엿들은 적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드러내어 말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리 학교 담벼락에 붙어있던 그 포스터를 몹쓸 에로영화 포스터를 뜯어내듯 거칠게 잡아뜯던 체육 선생님의 손길에서, 나는 일종의 함구령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 세기의 이야기였다.


“전교조 선생들이 또 문제 일으키는 거 아냐.”
학부모임에 틀림없는, 애 둘 딸린 과장이 술잔을 부서져라 움켜쥐며 언성을 높였다. 쌍눔들. 추임새처럼 욕이 따라붙었다. 선생 새끼들은 연금 있겠다, 정년도 지키겠다, 배부른 것들이 아주 지랄을 떤다니까. 아 애들이나 잘 가르치지, 원. 학교에 다닐 나이의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그 일을 두고 이래저래 한참을 더 떠들었다. 일제고사가 부활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부터, 어쨌건 시험 안 보고 가겠다는 애들만 안 보게 한 건데 처벌이 과하지 않느냐는 주저어린 목소리에, 그래도 선생이 그러면 안 된다는 말까지.
“과장새끼 전교조한테 웬수 진 것 있나.”
어떻게 술취한 과장에게서는 도망치긴 했는데, 집에 들어가려고 보니 차 시간도 끊어져 있었고. 그렇다고 한잔 또 걸치자니 일껏 과장에게서 도망친 보람이 없다. 그렇다고 시커먼 사내 둘이서 모텔 들어가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이런 날은 찜질방에서 뜨끈뜨끈하게 지지고 자는 것도 뭐, 나쁘지는 않았다. 누가 이 시간에 보는 사람도 없는 YTN을 틀어놓았는지, TV 화면에서는 계속 낮에 한 번 돌아갔음직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제고사 없앤 거 난 정말 잘한 일 같던데.”
“난 배 아프더라.”
“어?”
“우리 고생할 때는 저거 없애잔 사람 아무도 없었잖아.”
“애 태어나면. 결혼도 하고.”
“뭐야, 여자는 있고?”
늘 넥타이 차림으로만 보던 입사 동기 놈이 찜질방 반바지 차림으로 낄낄거리며 맥주를 깠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과장이랑 술자리가 싫어서 도망쳤던 것 같은데, 결국은 또 술이다. 웃으며 맥주캔을 집어들었다. 뜨끈뜨끈한 온돌바닥에, 한여름에나 어울릴 것 처럼 살얼음이 언 시원한 맥주가 기분좋았다.
“어이구, 뜨숩다.”
“혼자 사는 노총각 방에 들어가기도 쓸쓸하지?”
“방이 좀 추워서 그래. 지지니까 좋네.”
“옥매트라도 하나 사. 뜨끈하니 죽여.”
“뭘…. 결혼이나 해야지 뭐.”
싱거운 이야기가 오갔지만, 얼근히 술에 취해 있어서인지, 공연히 허공에 둥둥 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닥에 등을 지지며, 나는 안경 없이 보이는 세상을 취한 듯 바라보았다.
“음? 이거 언제 다친 거야?”
“응?”
“꽤 큰데…. 차 사고라도 났었어?”
그래, 그 잊고 있었던 흉터자국의 존재를 깨닫기 전 까지는.
“…기억이 안 나네.”
“에이, 설마. 이정도면 병원 입원하고 그랬겠는데 몰라?”
종아리 옆쪽에 난, 어른 손으로 한뼘 조금 넘는 긴 흉터.
“글쎄, 난 잘......”
그렇게 손으로 짚어 가리키기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는데, 생각보다 흉터는 컸다. 정말로 교통사고라도 당했던 것 처럼. 나는 내 기억에도 없는 그 흉터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등에 찬물이라도 쏟아부은 듯 술이 확 깨었다.



“그거 너 산에 갔다가 떨어져서 그렇잖아.”
“산?”
금시초문이었다.
“그래, 너 초등학교 때. 5학년때야, 그게 6학년때야?”
나는 기억도 못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어떻게 그런 것도 기억 못하느냐는 듯이 혀를 차셨다. 하긴, 대여섯살 때 일을 기억 못하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5, 6학년 때 일을 기억 못하는 것은 좀 문제다 싶긴 했다. 그것도 이렇게 흉이 지게 다쳤을 정도면 꽤 큰 사고였을텐데.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했잖아. 아니, 넌 어떻게 기억을 못 해도 그런 것을 기억을 못 하니?”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럴 수가 있긴. 아니, 너. 그거 얼마나 큰 사고였는지 알아? 너희 담임 아니었으면 정말….”
“그 정도야?”
“그렇대도. 아니, 얘가 사람 말을 뭘로 들어서 이래.”
엄마는 웃음을 거두고 혀를 끌끌 차셨다.
“다행히도 너희 담임이, 그래, 산에도 다니고 하던 사람이라서. 그래서 너, 벼랑에서 떨어진 거 암벽등반 하다시피해서 업고 내려왔다고. 정말 기억 안 나?”
기억이란 정말 믿을 수 없는 존재다. 그정도의 사건이 있었는데 이렇게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5학년 때면… 김용구?”
“아니, 말고. 있잖아, 그 여름방학때 전근 가시고.”
“전근을 갔어?”
“그래, 6학년 담임. 안경 쓰고 자그마하고. 앨범에 안 나와?”
앨범에 나와 있는 것은, 졸업식에 함께 했던 이순희 선생님 뿐. 연세 많으신 할머니 선생님이라서, 혈기왕성한 6학년들이 맨날 장난치고 놀리고 수업은 안 듣고 해서 엄마들이 불만이 많았었지. 그런데 그런 것은 오히려 자세히 기억하면서, 어째서 이런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까. 나는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어 한참 앨범을 이리저리 넘겨 보았다. 엄마가 말씀하신 그 전근갔다는 담임의 흔적은, 이상할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없는데?”
“없긴 왜 없어? 거기, 너 앨범 뒤에 꽂아놓은 사진 좀 봐.”
엄마가 앨범의 맨 뒷페이지를 펼쳤다. 무슨 행사만 있으면 사진 찍은 것 한 장씩 뽑으라고 돈까지 걷었던 단체사진, 봄소풍 갔던 날 온 반 애들이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 구석에, 그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자기보다도 더 키가 큰 아이들이 선생님과 키를 견주며 으쓱거리는데, 170cm쯤 될까 싶은 자그마한 남자가, 촌스럽게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하고 서 있었다. 안경알이 큼직해서 창문처럼 보이는 그런 안경을 쓰고, 그냥 사람좋게 웃고 있던 총각 선생님.
어째서 나는 이 사람이 이렇게 낯설게만 느껴지는 걸까.



주말 내내 집에서 뒹굴며 나는 그 사람을, 내 6학년 1학기 때 담임이었다는 남자를 떠올려보려 애썼다. 어떻게 웃는 얼굴까지는 기억나는데, 가끔씩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며 거칠게 욕을 하던 모습도 희미하게는 기억나는데, 그래도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 사람. 그래, 그 기억 속에서도 한 가지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다. 가끔씩 아침 조례도 없는 날 구깃구깃 초라한 회색 양복을 차려입고 나와서, 오늘 선보러 가시나 보다 하고 아이들의 놀림을 받으면 뺨이 발그레해지던, 그 총각 선생님의 초라한 양복 자켓의, 볼펜을 꽂아놓는 가슴 주머니에 매달려 있던 동그란 뱃지.
“참교육은 무슨 얼어죽을 참교육. 퉤엣.”
방학이라고, 그때는 아직 저쪽 동네의 낡은 한옥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바람이 시원하던 마루에 벌렁 드러누워, 엄마가 주방에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 그놈들 하는 소리 들을 가치도 없어요. 아니, 지들만 참교육 하고 우린 다 거짓말로 애들 가르친대? 건방진 놈들, 대갈빡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그렇게 설치니까, 나라 꼬라지고 교육이고 어디 제대로 굴러 가겠나, 원.”
“적당히 해 둬, 처남.”
“아니, 형님.”
“그래도 애들한테는 참 지성으로 하는 선생이던데, 젊은 사람이.”
“그게 다, 그 빨갱이 새끼들이 그렇게 애들 살살 꼬여서는. 그래서 결국 뭘 하겠다는 거요? 형님도, 모르고 계시면 좀 잠자코나 계시우! 지네들이 무슨 열사나 된 것 처럼, 아주 전라도 빨갱이 새끼들이 떼거지로 몰려 다니면서는!”
그날따라 외삼촌은, 저기 경기도 어디에서 학교 선생님을 하고 계셨던 큰외삼촌은 아버지한테 막 화를 내고 계셨다. 아버지야 학교 선생님도 아니고 하셨으니까 학교 돌아가는 일을 놓고 외삼촌이 마구 흥분하시는 것에 맞장구 치기도 좀 그러셨겠지만, 외삼촌은 그날따라 유독 목소리를 높이며, 그 나쁜놈들, 그 빨갱이 놈들 하는 소리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외삼촌이 마구 화를 내던 그 참교육 뱃지 단 선생들 중에는 그, 총각 담임도 분명히 있었다.
나는 마룻바닥에 내려앉은, 눈이 커다란 파리를 보며 생각했다. 참교육이 나쁜 거면, 우리 담임도 나쁜 사람인가? 그거 달고 다니는 사람이 빨갱이라는데, 빨갱이는 다들 악당에 괴물들이라고 그러는데, 우리 담임은 그런 거 달고 다녀도 빨갱이같지는 않은데. 뭐, 그런 생각도 잠시긴 했다. 길 것 같았던 방학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일기는 몰아서 쓰는 게 보통이었고, 탐구생활은 그냥저냥 풀었다. 숙제는 뭐, 그림 그리기나 찰흙으로 만들기 같은 거야 대충대충 하는 것이고. 어차피 숙제 살뜰히 챙기는 거야 여자애들이나 하는 일이고. 그리고 개학을 했는데.
“…갑자기 담임이 바뀌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귀가 맞는다. 어른이 되어서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마도 우리들의 총각 담임 선생님은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문제가 생겨 다른 학교로 전근가게 되었을 것이고,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겠지. 그래도, 그렇게 떠난 선생님은 어째서 우리에게 편지 한 번 보내지 않았던 것일까. 앨범을 담아 둔 상자 속에서 같이 튀어나온, 손때묻은 쇠로 된 고리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자꾸만 생각을 반추했다.



산 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나비같이 훨훨 날아서


옛날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애들 부르는 노래가 자꾸 입에 붙는다. 산 할아버지, 꽃과 어린 왕자,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대학에 가서, 그 노래를 내가 언제 배웠더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때 그 선생님께 배웠던 노래들이었나 보다.
집이라고 해도 뭐, 서울 인천간이면 그렇게 먼 것은 아닌데, 어떻게 오다 보니 전철로 끝에서 끝이라. 그냥 그 김에 나와 살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혼자 살림이다 보니 뭘 하도 어설프고 한심하다. 그냥 냉장고를 뒤져 유통기한이 살짝 넘은 재료는 다 꺼내서 케첩 넣고 볶기 시작했다. 부엌에 온기가 돌더니, 대충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볶은 밥을 대충, 프라이팬 때 잡지 위에 올려놓고 TV를 켰다. 때가 뉴스 시간이어서 그런지, TV를 틀자마자 그 시험 거부했다고 시끄러운 전교조 선생들 소식부터 나왔다.
“답답하네......”
시험을 거부했다, 는 말의 뉘앙스만 들으면 정말 교사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 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고작 일제고사 한 번에 중징계를 받았다는 이야기에는 어이가 없었다. 공연히 패배의식 불태울 생각은 없지만, 어쨌건 나같이 대충대충 살다가 대충 대학 졸업하고, 어떻게 학교 선배 연줄로 취직했다가 회사 망하기 전에 얼른 이직해서는, 그렇게 그냥저냥 내일 일 깊게 생각하고 살 여건 안되는 녀석과 달리, 선생들이면 학교 다닐때도 새빠지게 공부만 했던 놈들이잖아. 그걸 단 한 번에.
어쨌건 나야, 이제와 다시 학교에 다닐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부모가 되려면...... 여자도 없는 지금 내 꼬라지를 생각해 보면 최소 10년은 있어야 할 텐데, 전교조가 어떻건 일제고사가 어떻게 되건, 그건 나와는 상관없다.
하지만 자꾸 저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내 다리에 남은 흉터, 벼랑을 타고 내려와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사람. 초등학교 6학년이면, 뭐 요즘 남자애들은 기본으로 선생보다 키가 크던데. 그때도 6학년이면 빨리빨리 자랄 때다. 그때의 내 사진만 봐도, 담임보다 크진 않았어도 얼추 160cm는 가뿐하게 넘어 보였고. 그러니까, 키나 덩치나 거의 어른이나 마찬가지인 남자애를 업고서 말이지.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가 보니, 떠나버렸던.
“어어, 오랜만이다.”
자꾸만 그 생각에 골몰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나는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고등학교 동창 놈 중에, 나와 아마도 초등학교 같이 나왔을 녀석을 골라 전화를 걸었다. 그냥, 이름이 생각 안 나서 고민인거잖아. 죽었다 살아난 셈인데, 그런 고마운 선생님을.
“음, 너 알까 모르겠는데...... 너 나랑 같은 초등학교 나왔지.”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냐.”
“에이, 맞잖아. 근데 나, 그 이순희 할망구 반이었잖아.”
“이순희야 방학 지나고 왔지.”
“어, 그렇지? 그러니까 그 전에 말이야, 남자 담임.”
“이상구 선생님?”
“어, 맞아. 그래.”
담임 이름도 까먹고 있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얼른 얼버무렸다.
“이상구 선생님은 왜?”
“아니, 얼마전에 다리에 흉터 보니까 생각나서.”
“어, 너 그때 큰일 날 뻔 했지.”
“근데 대체 언제 다친 거야? 봄소풍때는 아니었지?”
“이게 그때 벼랑에서 떨어지더니 뇌세포가 맛이 갔나.”
“벼랑?”
“봄에, 계양산 갔잖아. 이새끼, 그것도 기억 못 하지? 너 그때, 위에는 바위고, 하여간 벼랑에서 까불다가 떨어졌잖아.”
“…그랬어?”
“그랬어가 뭐야, 이 새끼. 너 그때 선생님이 그렇게 저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그래서 다른 등산객한테 우리들 다 맡겨놓고, 너 구한다고 거기 바위에다가 자일 박고 내려갔잖아.”
“동네 뒷산 가는 데 그런 걸 가져와?”
“이거이거, 다 잊어버렸구만.”
전화 저 편에서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났다.
“담임이 좀 산 사나이였잖아. 하여간 그래서 너, 머리에 피 나고 다리 부러지고 한 거, 담임이 부목해서 응급처치 싹 하고는 등에 업고 다시 벼랑 타고 올라왔잖아. 거기 계곡 쪽으로는 앰뷸런스 진입 못 한다고.”
“그랬나….”
“이게 그때 머리까지 터지더니만 기억이 삐꾸가 났나. 하긴, 그러니 5학년 6학년 나란히 같은 반이었던 사람을 두고 너 나랑 같은 학교였냐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자빠지지. 끊어, 끊어.”
탁, 휴대전화 끊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한 가지는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결국은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동창들에게는. 그 선생님이 어디로 전학 가셨는지,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인천광역시 교육청 홈페이지, http://ice.go.kr.
20년 전 담임 선생님을 찾습니다, 하고 검색해보니, 네이버 지식인은 교육청에서 검색해 보라는 답을 남겼다. 20년 전에 이미 중년이었던 분이야 이미 은퇴하셨을 테니, 그렇게 찾아도 찾아질 리가 없겠지만. 생각해 봐도 그때 그 담임, 이상구라는 분은 아직 그냥 총각 선생님이었고, 아마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지금의 내 나이 쯤이나 되었을까.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야 정말, 남자가 서른 만 넘어도 노총각 소리를 들었으니까.
별 쓸모도 없어보이는 개인정보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주민번호 넣고 실명확인까지 하고서야 담임찾기를 실행할 수 있었다.
“1947년생......?”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라고 하면 1991년, 세계 잼보리가 열린다고 스카우트 하는 놈들이 우쭐대고 다니던 때의 일이다. 1991-1947이니까, 그때 이미 마흔 네 살. 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도 안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 모니터 불빛에 의지하여 어두운 방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왜 자꾸 이 사람에게 집착하는 걸까, 나는.
생각해 보면 그때는, 이제 졸업반이고 꽤 머리가 굵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생님이 아주 어른으로 보였는데. 아마도, 서른도 되지 않았을 그 사람이.
왜 나는 자꾸 그 사람을 생각하는 걸까. 내 힘으로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해내지 못해서, 사진을 찾고 동창에게 전화를 걸어보고서야 결국 누구인지 실마리라도 잡아볼 수 있었던 그 사람을.
메일함에는 카드 결제대금 청구서가 도착해 있었다. 월급날이 되었지만 뭐, 딱히 통장을 열어보고 자시고 할 것은 없다. 저축을 하기에는 살기 빠듯하고, 그 달 그 달 카드값 연체 안 되고 방세 제 날짜에 낼 수 있으면 족하고, 운이 좋아 돈이 좀 모이거나 해도 금세 써버릴 곳이 생기고 마니까. 그냥, 당장은 결혼할 능력도 생각도 여자도 없으니까 조금은 여유를 부리지만, 그래도 자신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여기서 더 이상 어른이 될 생각도 없는, 그냥 그런 서른 살.
아마도 6학년 담임, 이상구라는 이름의, 그 흐릿한 사진 한 장으로밖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 남자는 그때 서른 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담임이 그때 딱 서른 살이었는데도 다들 노총각 노총각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6학년 담임에게는 그냥 총각 선생님이라고들 그랬지, 노총각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몇 살이었을까. 군대를 다녀왔으니 스물 일곱? 아니, 더 어릴 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선생들이 교육대학 나와서, 교사 시험 합격하면 군대 안 가고 바로 학교 선생님이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니까. 어쨌건, 서른도 되지 않았을 남자가, 벼랑에서 떨어진 학생을 구하겠다고 자일에 몸을 묶고 내려왔을 때에는, 알맹이는 어린애면서 덩치만 어른만한 제자놈을 등에 업고 그 벼랑을 다시 기어올라왔을 때에는, 그 사람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대체.



“바탕화면 뭐야, 소녀시대 배경화면 받아놓은 거 있는데 줘?”
“됐고, 이거 봐라. 쩔지 않냐?”
하긴, 소녀시대 애들 쫘라락 서 있는 것만 봐도 하루가 즐겁긴 해도, 여자 연예인이 좀 보기좋게 헐벗은 사진만 띄워놓아도 성희롱이니 뭐니 수군거릴 아줌마들 생각 하면 좀 짜증나기는 하지. 동기 놈은 또 어디서 저런 취향이 있었는지, 화면 가득 무슨 풍경 사진 같은 것을 잔뜩 꺼내놓고 있었다.
“그건 또 뭐야?”
“어, 히말라야.”
“웬 히말라야.”
“대학때 친구놈이 어디 사진기자거든.”
“잘 나가네.”
“그러게 말이야. 하여간 녀석이 찍어왔댄다.”
허리를 숙여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림 파일마다, 어쩐지 한번에 내리 발음하려다가는 혀가 꼬일 것처럼 낯선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칸첸중가, 로체, 마칼루, 초오유,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낭가파르밧, 마차푸라레, 그리고 안나푸르나.
“이거 좋네.”
“하나 줘?”
“어.”
메신저로 파일을 받았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우뚝 선 안나푸르나. 받아놓고 보니, 어디 출력을 해도 될 만큼 큼직한 사진이었다.
-안나푸르나는 풍요의 여신이라고 하지.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을까. 앨범과 함께 튀어나온 쇠고리를 툭 하고 건드려 보았다. 그냥 달고 다녔더니 누가 카라비너라고 말을 해 주었다. 카라비너. 자일줄에 거는 쇠로 된 클립 같은 것.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벼랑에서 떨어지고 나서 담임이 병원에 찾아와 주었던 것 같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나는, 안나푸르나 봉의 사진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머리가 쨍 하도록 파란 하늘. 그런 하늘의 이야기를 그때 들었던가.
나는 다음날 출근길에 드림디포에 들러 고광택지를 사다가,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그 사진을 회사 컬러 프린터로 말끔하게 출력했다. 벽에 붙여놓으니 생각보다는 크기가 작았지만 그래도 눈맛은 시원했다.
-요놈새끼들, 내가 언제 안나푸르나에 다녀올 거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언제였지. 여름방학 전이었으니까. 기말 시험도 보기 전이었으니까 6월 말쯤 되었나. 담임이 학교에 잘 안 나오고 했던 것이. 어째서인지 다른 반 선생님들이 우리 반 수업에 왔다갔다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우리는 다들, 선생님이 그 안나푸르나인지 하는 산에 가려고 학교에 안 오나보다 하고 소근거렸다. 방학식 날이었나. 선생님이 학교에 와서 그 연필 한 다스씩 선물로 주고 갔던 날이.
-그럼 뉴스에도 나오는 거예요?
-그치, 그러면 이제 우리 6학년 3반 파이팅 한번 해 주고.
그동안에는 잊고 살았고, 지금은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과연 그 산에 올라갔을까.
안나푸르나.
나는, 선생님은 안나푸르나에 갔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6학년의 내가 아니라 서른 살의 나에게는, 그 작은 믿음도 어느 새 희망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선생님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시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기억하는 것은, 그냥 버스 타고 30분이면 가는 가까운 산에 소풍 가면서도, 가방 한켠에는 자일을 넣고 다녔던 젊은 남자의 모습. 이른 아침 빈 교실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홀로 자일을, 카라비너를 만지작거리던, 그 웃음짓던 얼굴.
그때 방학이라고 좋아라하며 집으로 달려가는 우리들을 바라보던 선생님의 가슴에는 아마도 저런 시린 하늘이, 희고 뾰족한 봉우리가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봄도 끝나가고 벌써 6월이었다. 돈은 지지리도 못 버는 회사가 또 노는 것은 좋아하는 사장 덕분에 야유회라고 사람들이나 끌고 다니고. 차라리 이렇게 끌고 다닐 거면 휴가를 달란 말이다. 차라리 평일에 끌고 나가는 것이면 또 몰라도, 황금같은 남의 쉬는 날 파먹어가면서. 나는 약속장소인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오다 말고, 지난 주에 사저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한, 어제 그를 눈물로 보내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영영 이 세상을 떠나간 전직 대통령의 간이 분향소에 들러 향을 살랐다. 뭐,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고, 하물며 정치가, 그 중에서도 대통령의 삶이란 더욱 모순이 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안다. 몇 년 전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했을 때에는 정말 새로운 세상이 올 줄 알았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조금은 실망했고, 조금은 그를 잊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퇴임해서 고향에 돌아가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는 대통령이 될 줄 알았다. 향 연기에 조금 눈이 시렸다.
“…제 부모가 죽으면 저렇게 하겠어? 미친 것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 사람이 과장이라는 사실을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뭐, 하루하루를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서른 살과 달리, 그는 술도 잘 마시고 영업도 잘 뛰었으며, 가끔은 접대를 핑계로 여자들과 놀기도 잘 놀았다. 죽이 맞는 이들을 줄줄이 이끌고 다니며 골프를 쳤고, 가끔 신도시 쪽의 성인 나이트에 가서 어떻게 부킹을 했고 어떻게 질펀하게 놀았는지 남자의 무용담을 떠벌리곤 했다. 신도시 쪽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프리미엄을 붙이고 팔았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어디의 대학 앞에 상가가 딸린 원룸 건물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어쨌건 꿈과 희망이 넘치는 쪽은 아무리 봐도 저 과장 쪽이었지,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라는 이 서른 살 쪽이 아니었다. 그래, 뭐. 이제는 그 새파랗게 젊어서 좋다는 그 밑천도 떨어져 간다고 어느 웹툰 작가는 자조어린 소리를 했고, 어느 시인은 서른살을 두고 잔치는 끝났다는 말까지 했다지. 발이 꼬였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제야 나는, 내 종아리에 난 깊게 패인 그 상처를 실감했다. 상처는 무섭게 쑤시기 시작했다.
“으아악!”
나는, 서른이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꿈과 희망은 더욱 익어 완숙해지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똑바로 발을 딛고 설 수 있을 줄 알았다. 택도 없는 소리. 서른이 되어도 달라진 것은 없다. 이대로 낙오할 수도 있고, 학연 지연이 딸리면 영어실력이라도 어떻게 갈고 닦아 더 나은 회사로 옮겨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착같이 안 쓰고 모아서 한 15년 뒤에, 저 과장처럼 부동산 굴리는 재미로 인생을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라도, 꿈꾸었던 모습과는 너무나 멀었다. 애초에 꾸었던 꿈이 무엇인지조차 가물가물한 지금에는 의미가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지금 생각한다. 그때, 벼랑에서 구른 나를 구하러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한 담임이 벼랑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던 힘. 가방 속에 얌전히 자리잡은 자일 한 뭉치는, 그 사람에게는 버리지 못할 꿈과 같았던 것일까.
그 시린 하늘 아래 안나푸르나 봉과 같이.
“괜찮아?! 정신 들어?”
“으으….”
발이 꼬였나 했는데, 눈을 떠 보니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산은 체질에 안 맞는 모양이다. 인수봉 올라가는 길은 녹록치는 않았다. 사장이 등산 매니아라고 전직원이 산을 타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나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괜찮겠어?”
“먼저 올라가세요. 못 올라가겠으면 먼저 내려가 있죠, 뭐.”
“올라가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거 아냐?”
“과장님, 이 친구 제대로 굴렀어요.”
동기 녀석이 내가 걷어올린 다리를 들여다보며 한 마디 했다.
“봐요, 벌써 막 붓는데요. 내려가야 하는 거 아냐?”
“아냐, 됐어.”
“같이 갈까?”
“그러다 댁도 찍히려고? 여기서 쉬든가 내려가든가 할 테니까, 갈때 놓고 가지나 말어.”
피가 나거나, 다리가 꺾여 부러지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제법 아팠다. 얼룩덜룩하게 멍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 했겠구나 싶었다. 재수가 없어 옆으로 굴렀거나 넘어지면서 바위에 머리를 찍기라도 했으면 아마 사고도 대형 사고가 되었겠지만, 악운에 강한 것인지 초등학교 때도 그렇고 지금도, 아프긴 아파도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리에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고 앉아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 속에는 반쯤 얼고 반쯤 녹은 생수와, 아까 산 밑에서 나누어 준 오이와 오렌지와 초코바가 들어 있었다. 먼저들 산에 올라가는, 매일 얼굴을 보지만 멀고 낯선 사람들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그제서야 제대로 휴일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는 것이 실감나지는 않았지만, 이 길 꼬라지를 보아하니 나 말고도 다리 부러질 뻔 한 사람이 적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덥구나......”
mp3를 귀에 꽂았다. 바람이라도 좀 불어 오면 좋겠는데. 그늘은 졌지만, 바람이 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때도 이렇게 더웠다. 지긋지긋하도록.



“조회 서라니까! 안 나가는 사람 이름 적을 거야!”
안경을 낀, 반팔 티셔츠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올려 묶은 자그마한 키의 반장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할머니 선생님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그 팔팔한 아이들이 겨우 꼬마 반장의 말을 그렇게 순순히 따라줄 리 없다. 반장은 잔뜩 울상을 지으며 칠판을 탕탕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조회시간이란 말야, 우리가 제일 늦잖아아!”
“그럼 너나 나가라, 베에~!”
“야아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다들 지긋지긋한 관절염 어쩌고 하는 광고를 흉내내며 놀려대기나 하던, 늘 우리를 웬수, 애물단지 취급이나 하던 그 할망구 담임이 왜 이지경이 되도록 교실에 올라와 소리 한 번 지르지 않는지, 어째서 옆 반 선생님들이 지나가다 말고 한번씩 우리 반 창문을 들여다보곤 했는지, 그때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침울한 어른들 표정, 쉬쉬하는 그 분위기를 읽기에 6학년은 너무 어렸던 걸까. 교실 뒤쪽에서 여자애들 몇몇이 모여 이야기하다가 안색이 창백해지고,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리는데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평소같으면 월요일에 노는 날이래도 화요일에 조회를 서는 일은 없었는데, 왜 갑작스레 추석연휴 끝난 화요일에 아침 조회를 서는지, 그런 이유같은 것을 생각할 만큼 사려깊은 6학년 사내아이는 지금 생각해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 뭐, 철 들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거시기에 털만 돋기 시작하면 다 자란 줄 알아서는. 나는, 사람들이 사라져간, 꽤 험해 보이는 산길을 올려다보다, 갑자기 손을 뻗어 바위를 만져보았다. 돌보다 차고, 쇠 냄새, 어쩌면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등을 기댄 바위의 싸늘함 속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촉감을 향해서.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조회에 나온 이유는......”
투덜거리며 운동장에 나와서야 보았다. 그 마귀할망구같이 빽빽 소리나 질러대며, 걸핏하면 우리들을 매구새끼들이라 불러대는 그 할머니 담임이 운동장 스탠드에 탈진한 듯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것을.
“무슨 일이래?”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불안한 침묵으로 바뀌어 간 것이, 아마 그 때쯤이었을 거다.  담임이 죽었대.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마 그럴 리가. 담임은 수퍼맨이잖아. 벼랑에서도 뛰어내리는. 누군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더는 수퍼맨이나 육백만 불의 사나이가 달려와 구해줄 것을 믿지 않을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여러분에게 슬픈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6학년 3반 담임이셨던 이상구 선생님께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안나푸르나에 오르시다가, 그만 눈사태에 휩쓸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반 벗겨진 교장은, 늘 월요일 훈화를 하던 그 톤에서 요만큼도 변한 것 없는 목소리를 하고 말했다. 가슴에 동그란 플라스틱 뱃지를 달고 다니던, 남자는 용기를 갖고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한다고 말하던, 내가 발을 헛디뎌 벼랑에서 떨어졌을 때 끈을 묶고 주저없이 벼랑을 타고 내려오던 그 수퍼맨이, 전에도 몇 번이나 우리들을 붙잡고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던 그 산에 오르다가 죽었다고. 여자애들은 울었고, 남자애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몇은 엉엉 소리내어 울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훈화에는 추석 인사가 빠지지 않았고, 시작에는 국민의례가 있었듯이 조회 마무리를 지으면서는 몇년이 지나도록 가사를 못 외어 우물거리며 따라부르는 애들이 반이 넘는 인천 교육의 노래를 불러야 했고, 그리고는 담임이 이건 쌍두 독수리 깃발 아래라는 곡이라고 가르쳐 주었던 그 조회시간 행진곡에 맞추어 반별로 발 맞추어 퇴장까지 했다.
그게 다였다. 다들 좋아하는 담임이었는데, 어느새 담임의 이야기는 큰 목소리로 떠들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너희 담임 이야기 하지 마라, 엄마들은 목소리 낮추며 아이들에게 그리 일렀다. 너희 담임은 전교조 빨갱이라서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건 어떤 일종의 상처, 혹은 낙인이 되어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금기, 잊어야만 하는 추억. 졸업사진에도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은 더이상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든 선생님이 구하러 와 줄게. 그런 말을 하면서,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운 제자의 병실에 꽃이나 음료수나 뭐 그런게 아니라, 커다란 뻥튀기 과자와 아이큐 점프 한 권을 들고 와서는, 그때 나와 선생님과 함께 자일에 매달려 있던 바로 그 카라비너를 쥐어주고 간 그 다정한 선생님을, 상자 속에 안 보이게 감추어 둔 카라비너와 함께 잊었다. 잊어야 했다.
“선생님......”
그래서 이럴 때는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또다시 산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친 주제에, 그때 선생님의 등에 업혔듯이 이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겨우 찾아내었다는 것이.
“선생니임......”
그래서 까맣게 잊어버린, 당신이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났는지도, 아니,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진 제자의 다리와 몸을 나무로 고정시켜 묶고는 벼랑을 기어오른,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버린 내 앞에, 벼락처럼 나타난 네모반듯한 금속판 하나.
나는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그 금속판을 문질러 닦았다. 1991년 9월 19일, 안나푸르나. 이상구(28), 이석주(26) 대원.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면 보인다고 해도, 한여름 초목 아래 그늘져 숨어 있던 글씨 한 자 한 자를 손가락에 새기려는 듯이. 몇 번을 더듬고서야 나는, 이번에도 내가 산에서 넘어져 죽을 운이 있었나보다 하고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겠다. 이번에도 나를 업고, 다시 벼랑을 오르고 산길을 달렸을, 죽을 만큼 무섭고 겁이 났겠지만 그래도 그래야만 했을,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내 선생님이 나를 붙잡아 주었다는 것을. 손가락이 닿은 곳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그 금속 판을 붙들고, 나는 엉엉 울었다. 살랑, 이파리 넓은 나뭇가지가 가볍게 흔들리더니, 온 산이 가만히 숨을 내쉬듯 바람이 불었다. 나는 햇살 아래 어둡게 보이는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문득 바람이 멈추고,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이 쏟아질 듯 다가왔다. 어디선가 까르르 하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구름을 등 뒤에 감춘 듯 맑은 하늘 아래 온 몸을 드러내고 있는 산봉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아마도 나와는 인연이 없을, 평생 가볼 일 없을지도 모르는, 꿈을 품고 살다 허망하게 떠난 돈키호테와 같던 한 남자가 결국은 여신의 품에서 안식을 찾았을 그 새하얀 봉우리 하나를 그 위에 가만히 겹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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