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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왕자와 거지

2012.01.27 23:3801.27

왕자와 거지



  남자는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아내는 신문을 집어 들고 있었다. 신문을 들고 반갑게 남자를 돌아보는 순간, 아내는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경호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남자는 당황해서 경호원들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계속 소리 지르는 아내를 붙들려……고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경호원들은 제지하는 남자의 손목을 덥썩 붙들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가시죠.”
  경호원들은 양쪽 팔을 단단히 꿰어들었다. 여기서 제일 추한 짓은 버둥거리는 거겠지. 간밤에 혹시 쿠데타라도 일어난 것인가. 혹시 내가 약을 먹고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나. 그 사이에……
  “이보게,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2012년 1월 1일입니다.”
  약을 먹고 오래 잠들어버린 건 아닌 듯도 한데. 역시 하룻밤 사이의 쿠데타가 가장 설득력이 있나. 아니, 대체 그렇다면 저 아내의 반응은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남자는 팔이 아팠다. 내 발로 걸어갈 수 있다고 경호원들에게 말했지만, 무시당했다. 아무리 쿠데타라고 해도, 이 정도의 아량도 베풀지 않다니. 대체 누구일까. 남자는 숙적이라고 칭해질만한 사람들을 머리에 몇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교적’ 남자는 잘 지내고 있었다. 임기가 끝으로 치닫으면서 점점 바닥이 엷어지고 있긴 했지만, 대체 이런 대통령을 엎어서 얻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정원으로 나가기 직전에, 남자는 고개를 돌리다가 거울을 봤다.
  ……어?
  잠깐?
  남자는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은 더 굳건하게 팔을 붙들었다. 이건, 이건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뭘 잘못 본 거겠지? 정원 반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경호원들은 단단히 남자의 팔을 붙든 상태로도 경례를 붙였다. 손을 설렁설렁 흔들면서 다가온 건, 누가 봐도 남자 자신이었다.
  “아니, 이 분은…….”
  남자는 남자를 보고 싱끗 웃었다. 그 순간 남자는 모든 사태를 파악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남자가 되어 있는 이 남자야 말로, 바로 그였다. 몸통만 남겨두고 인격이 싹 바뀌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니야! 이놈이 바로 그 미친놈이라고!”
  “풀어드리게. 아무리 그래도, 대선후보였던 분한테 예의를 차려야지.”
  경호원들은 바로 팔을 풀었다.
  “대통령님의 사저에 침입했습니다.”
  “아니, 어느 새 내 잠옷까지 입으시고는.”
  허경영, 아니 이명박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경호원들에게 다시 손짓을 했다.
  “무사히 돌아가시도록 앞까지 배웅해드리게.”
  이명박, 아니 허경영은 뭐라고 말해봤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손을 내저었다.
  “혼자 나갈 수 있어.”
  나가기 직전에 남자는 또 다른 자신을 돌아다보았다. 그는 빤히 남자를 보고는 입을 조그맣게 오물거렸다. 허경영, 허경영, 허경영.
  남자는 잠옷바람으로 도로 앞까지 나와서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을 노력해서 얻은 자리를 빼앗긴 것도, 빼앗긴 거지만. 대체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이란 말인가. 대선 때 그의 공약들이 어땠던가. 결혼시 남녀 각 50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유엔 본부를 판문점으로 실현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허경영 산삼 뉴딜정책인가, 전 국민을 심마니로 만들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대선 때 남자는 그 공약들을 자세히 읽지도 않았었다. 세간에 화제라는 보좌관의 이야기만 듣고 껄껄 웃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 계획들은 이제 곧 현실이 될 것이었다. 밀어붙이면서 살아온 남자는 추진력이 가지는 힘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청와대 도로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먹였다. 날씨 좋은 토요일, 북악스카이웨이로 올라가는 차들이 남자 앞에서 잠깐 주저하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났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이명박, 아니 허경영은 어쩔 수 없이 허경영의 집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한 달 동안 밥을 먹었고, 똥을 쌌고, 숨을 쉬었다. 남자의 주변에는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놀랍게도 있었다. 남자는 한 온라인 게임 모델로 섭외도 받아놓은 상태였다. 남자는 살아야 했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게임 홍보 사진 스케줄을 잡는 전화를 막 끊고, 남자는 밥솥에서 밥을 떴다. 대충 냉장고에서 반찬 두 개를 꺼내서 밥술을 뜨면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켰다.
  허경영, 아니 이명박은 뉴스에 당연히 매일같이 나왔다. 김정일이 사망했으니 도발에 강력대응하라고 충고도 하고, 3월에 할 핵안보정상회의 준비도 성실하게 했다. 한중 FTA에 대한 얘기도 잊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명박, 아니 허경영이 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그는 너무도 잘 해내고 있었다. 남자가 먹어야 했고, 먹을 걸 각오했던 모든 욕들을 그는 너무도 잘 먹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혹시, 남자가 생각했던 그 모든 게 다 환상이었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와 나는 분명히 바뀌었다. 어째서 이렇게도 세상은 평화로운가. 그는 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저토록 잘 수행하고 있단 말인가.
  텔레비전 속의 그는 명절의 재래시장에서 안경 너머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는 보좌관이 인상이 부드러워질테니 안경을 쓰라고 권했던 걸 떠올렸다. 보좌관은 이제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조언을 하는 모양이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남자는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는 조심스럽게 한쪽 발을 들어보았다.
 
  둥실
 
  남자의 몸이 떠올랐다. 텔레비전도, 밥상도 함께 떠올랐다. 지구의 중력이 조금 흐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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