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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반복휴가: 3. 불

2012.06.29 22:1106.29

반복 휴가
 
 3. 불
 
 두 사람은 철문 쪽으로 돌아섰다. 전처럼 철문은 굳게 닫힌 채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쇠사슬을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손이 닿는 순간 마법처럼 문이 덜컥 열릴 것이다 – 라고 예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실망해서 쇠사슬을 잡아당겨 보았다.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냈지만 당연히 열리지는 않았다.
 “그래가지고 문이 열리겠어?”
 뒤에서 중현이 한심하다는 듯이 논평했다. 그리고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철문 위로 기어오르더니 뛰어넘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
 그도 서둘러 중현을 따라 철문을 넘었다.
 
 마당은 여전히 깜깜했다. 둥근 문고리가 달린 철제 현관문은 이제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앞장서서 걸어간 중현이 먼저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중현이 다시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었다. 중현은 문고리를 이리저리 마구 돌리며 문을 흔들었다. 철제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야, 그만해라.”
 그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중현은 문고리를 놓고 신경질적으로 문을 걷어찼다.
 문이 안으로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안에는 사람이 서 있었다.
 여자였다. 조금 화려하다 싶은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긴 머리가 어깨 아래로 내려오고 붉은 립글로스가 유난히 번쩍여 보이는 20대 초중반의 날씬하고 예쁜 아가씨였다. 중현과 그는 멈칫했다.
 “누구세요? 무슨 일이시죠?”
 여자가 물었다. 두 사람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학교 선배를 찾아왔는데요…. 선배가 여기….”
 “여긴 지금 아무도 안 계세요.”
 여자가 그의 말을 중간에 끊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철문을 다시 닫으려고 했다. 그가 문을 붙잡았다.
 “아니, 저기, 잠깐만요. 선배가 여기 있다고, 데리러 와 달라고 그래서….”
 “여긴 아무도 없다니까요.”
 여자가 다시 쏘아붙였다.
 이런 식으로는 계속 같은 대화가 빙빙 돌다가 얼떨결에 쫓겨날 것 같았다. 그는 반격했다.
 “그런데 여긴 뭐 하는 데예요? 그리고 왜 여자분이 이 밤중에 이런 깜깜한 건물에 혼자 계세요?”
 그렇게 말했을 때 중현이 옆에 다가와서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꺼냈다. 그가 뭘 하느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긴 회원 아니면 들어오실 수 없어요. 당장 나가 주세요.”
 그리고 여자는 힘껏 현관문을 밀어서 이번에야말로 닫으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여자의 등 뒤, 텅 빈 캄캄한 복도였고, 그 복도에 울려서 벨소리는 괴기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여자는 당황하여 뒤돌아보았다. 그와 중현은 이 틈을 타서 문을 밀어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봐요, 지금 무슨….”
 여자가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 뭔가 거세게 항의하려 했을 때 중현이 전화기를 들어서 그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저거 형 선배 전화야. 내가 지금 걸어봤어.”
 그와 중현은 서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자가 다시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벨소리가 들려오는 복도 안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는 익숙하게 생긴 문이 있었다. 벨소리는 그 안쪽에서 끈질기게 울려 나왔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어쩐지 동굴 안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그렇게 공허하게 커다란 소리로 울렸다. 그 벨소리가 점점 더 기분나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는 문 앞에서 멈칫 망설였다. 중현이 따라와서 그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문을 확 열었다.
 전에도 보았던 방이었다. 그 때와 똑같이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초상화가 주욱 걸려있고 각각의 액자 앞에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문에서 가까운 벽 쪽에 촛불 두 개가 타오르는 탁자가 있었다.
 그의 선배는 그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아주 느긋한 자세로 탁자 다리에 기대 앉아서 끊임없이 기분 나쁘게 공허한 메아리를 울리는 전화기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전화했냐?”
 “예? 저, 아니….”
 선배의 사납게 치뜬 눈과 비아냥이 잔뜩 섞인 어조에 당황하여 그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중현이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서서 전화기를 접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전화기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전화를 끊은 뒤에도 선배의 전화기는 계속 기분 나쁜 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전화기 화면을 들여다보며 선배가 말했다.
 “그래서 뭐? 네가 날 구해주겠다고?”
 “그게 아니라…. 선배가 먼저 전화해서….”
 그는 전화벨 소리를 이기기 위해서 고함을 질렀다. 선배가 말을 잘랐다.
 “네가 날 구해주겠다고? 네 눈엔 내가 그렇게 한심해 보였냐?”
 그런 게 아니라 선배가 먼저 전화하지 않았냐고 그는 항의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연 순간 선배가 전화기를 그에게 던졌다.
 그는 몸을 움츠려 간신히 피했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중현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몸을 움츠리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화기는 그의 귀 옆을 스쳐 날아가서 뒤쪽 벽에 맞고 본체와 건전지와 건전지 뚜껑과  또 어느 한 부분이 조각조각 분해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부서져 바닥에 널부러진 전화기와 선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선배는 여전히 두 다리를 쭉펴고 바닥에 편하게 기대 앉은 자세로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
 “선배, 도대체 왜….”
 그러나 선배는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네 눈엔 내가 한심해 보이지? 너는 평생 가도 절대로 나처럼은 안 될 거 같지?”
 “선배, 그게 무슨….”
 “당장 제대만 해 봐라. 그 때 가서 내가 알바 하자고 그랬는데 네가 안 따라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동창이 갑자기 연락하면 받지 말라는 이야기는 친구들에게도 들었고 인터넷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졸업하고 어디서 뭐 하는지 모르다가 갑자기 속이 뻔히 보이는 연락을 하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니라 거의 매일같이 학교에서 마주치던 선배가 그런 말을 하니 마음 속에서 뭔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선배는 그의 표정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초상화 앞의 돌무더기에서 돌멩이를 집어 냅다 그에게 던졌다.
 뒤에 서 있던 중현이 그의 머리를 눌렀기 때문에 그는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하려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일어서려는 그를 향해 선배가 다시 돌멩이를 던졌다. 돌이 바로 눈앞에서 바닥에 튀었기 때문에 그는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부서진 돌멩이 파편이 팔뚝을 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느낌은 기묘하게 느리고 부드러웠다.
 그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선배가 또 돌을 던졌다. 그는 피했다. 선배가 다시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돌이 눈 앞으로 날아온 순간 그는 죽도를 야구방망이처럼 휘둘렀다. 돌멩이는 죽도에 맞아 벽 쪽으로 날아가서 빠악,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선배가 이것 봐라, 하고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다시 팔을 뻗어 돌무더기에서 돌멩이를 집었다. 이리 던질까 저리 던질까 방향을 바꿔가며 놀리다가 갑자기 돌을 던졌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죽도로 쳐냈다. 돌멩이는 다시 죽도에 맞고 벽으로 날아가서 깨졌다.
 선배는 다시 돌무더기 쪽으로 팔을 뻗었지만 이제 더 이상 돌멩이를 집어들지는 않았다. 선배는 그대로 돌무더기를 향해 팔을 뻗은 채로, 그는 죽도를 야구방망이처럼 들고 엉거주춤 선 채로 두 사람은 잠시 눈싸움을 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저는 정말로….”
 그 순간 선배가 반대쪽 손을 뻗어 탁자 위의 불 붙은 초를 집어들었다. 그에게 던졌다. 그는 얼떨결에 죽도로 막았다.
 죽도에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화르르 타올랐다.
 그는 깜짝 놀라 죽도를 던져 버렸다. 선배가 남아있는 다른 촛불도 집어서 던졌다. 중현이 옆에서 그를 확 잡아 당겼기 때문에 불 붙은 초는 그의 머리 위를 지나서 벽에 맞았다.
 그리고 벽에도 화르륵 불길이 번졌다.
 불은 무서운 속도로 퍼졌다. 벽을 잡아먹은 불길과 바닥에 뒹구는 죽도를 태우는 불길이 곧 합쳐졌다. 중현이 뒤에서 그를 잡아 끌었다.
 “형, 나가자.”
 중현이 연기 때문에 눈을 찡그리고 팔로 입과 코를 가리며 말했다.
 그는 선배를 돌아보았다. 선배는 촛불을 세워놓았던 탁자 아래 다시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선배는 웃었다.
 “가라.”
 선배가 고갯짓을 했다. 그가 망설이자 선배는 다시 웃음지었다.
 “아니면 다 같이 죽든지.”
 불길이 문 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중현이 그를 잡아끌고 뛰기 시작했다. 그는 끌려가면서 선배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선배는 입가에 살벌한 미소를 띤 채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불길이 옮겨붙은 돌무더기 쪽으로 팔을 뻗고 있었다. 그는 한 팔로 머리를 가리고 다른 팔로는 자신을 잡아 끄는 중현의 팔을 잡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선배가 던진 돌이 문에 부딪쳐 따악, 하고 기분 나쁘게 공허한 소리를 냈다.
 
 복도는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한참 뛰다가 그는 어쩐지 안 뛰어도 되는데 괜히 도망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멈추어 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형, 뭐 해?”
 중현이 다급하게 돌아보았다.
 “잠깐만.”
 그는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며 속삭였다. 휘어진 복도 저쪽에서 타닥, 타닥, 하고 누군가 뛰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중현이 다시 그를 잡아끌었고, 그는 중현을 막았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뭐가 쫓아오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이 확인하기 전에 코가 먼저 알았다. 불길한 타닥, 타닥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 냄새가 복도를 채웠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잡아끌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깜깜한 마당을 달려서 가로질러 초인적인 힘으로 철문을 뛰어넘었다. 밖에 나와 길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서 안전 거리를 확보한 뒤에 돌아보니 건물 한 구석에 불그스름한 빛이 점점 커지면서 짙은 회색 연기가 밤 하늘을 향해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야.”
 그가 헐떡거리며 중혁에게 말했다.
 “119에 신고 좀 해 줘.”
 “왜?”
 “왜라니, 불 꺼야지.”
 중혁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형이 해. 난 저 자식들 폭삭 타서 주저앉았으면 좋겠어.”
 “안 돼. 나 군인이잖아. 이런 이상한 일에 엮인 거 부대에서 알면 큰일난단 말이야.”
 그가 애원했다.
 “그러지 말고 신고 좀 해라, 응? 저거 불길 옆 건물로 옮겨붙으면 온 동네 다 난리 난다.”
 중현은 마지못해 바지 주머니에서 자기 전화기를 꺼냈다. 소방서에 전화해서 철문 옆에 붙어 있는 도로명 주소를 대충 불러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5분 내로 도착한대.”
 그가 안도했다. 중현을 보고 씩 웃었다.
 “그럼 우린 튀자.”
 
 가장 가까운 소방서가 어디에 있는지, 소방차가 어느 방향에서 올지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부근을 한 바퀴 돌아 검도장 뒤편으로 걸어가면서 중현이 말했다.
 “나 그 여자 본 적 있어.”
 “어느 여자?”
 그가 되물었다. 중현이 조용히 대답했다.
 “문 열어준 여자.”
 그는 놀랐다. 중현이 말을 이었다.
 “저쪽 농협 옆에 있는 커피숍에서. 중간고사 때 여자친구랑 거기 열자마자 들어가서 과제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이상한 애들 왔었거든. 걔들이 불렀어.”
 중현의 말로는 아침 여덟 시가 채 안 된 시각이었는데 자기 또래의 남자애들 둘이 들어오더라는 것이었다. 그 중 한 명은 여행가방을 끌고 있었다.
 “빈손으로 들어온 애가 여행가방 끌고 온 애 데려다 앉히고 커피 사주더니 뭐라고 뭐라고 계속 떠드는 거야. 커피숍 안에 나랑 여친하고 그 자식들하고 딱 두 팀밖에 없었는데 뭐라고 말하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쉬지도 않고 뭐라뭐라 하는 건 다 들렸어.”
 빈손의 남자는 속사포같이 말을 뱉어냈다. 그에 비해 여행가방을 끌고 온 남자는 그다지 탐탁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고 어떻게든 대화를 끝맺고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빈손의 남자가 일어나서 중현과 여자친구가 앉아있던 쪽으로 왔다. 중현이나 여자친구에게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딱 내 등 뒤에 서서 전화를 하는데, 무슨 기선제압이 잘 안 된다고 어쩌고 그러는 거야. 그러더니 10분? 아냐, 5분도 안 돼서 그 여자가 왔어. 막 되게 자신만만하게 들어와서 앉자마자 남자애 둘한테 뭐라고 말하니까 둘 다 따라 나가더라.”
 그는 방금 들은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해보려 했다. 그 때 바지 주머니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전화기를 꺼냈다.
 “야, 너 어떻게 된 거냐? 운동 끝나고 전화한다며?”
 그는 깜짝 놀랐다.
 “선배? 지금 어디예요?”
 “너네 검도장 앞에 와 있는데 여기 아무도 없어, 불도 다 꺼졌고….”
 그는 중현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황급히 전화기에 대고 당부했다.
 “거기 계세요. 우리 지금 갈게요. 1분이면 가요.”
 
 선배는 불 꺼진 검도장 건물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반가워했다.
 “어, 왔냐? 어떻게 된 거야?”
 그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선배야말로 어떻게 된 거예요?”
 “나? 내가 뭐?”
 선배가 되묻자 그는 불쑥 화가 났다.
 “제 정신이에요? 무슨 일에 엮인 거냐구요? 사실대로 말해요.”
 “야, 너 왜 그래? 무섭게….”
 선배는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거짓말을 하거나 그를 떠 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도 어리둥절해져서 멀뚱하니 선배와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중현이었다.
 “형, 일단 어디 들어가서 앉자.”
 “아… 그래.”
 
 세 사람은 검도장 길 건너편의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선배에게 중현을 인사시켰다.
 “선배, 얘도 우리 학교 다녀요, 과는 다르지만….”
 “아, 그래? 반갑다.”
 선배가 건성으로 악수를 했다. 모임이 두 명에서 세 명이 되어 술값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중현이 재빨리 말했다.
 “저 그냥 잠깐 앉아 있다가 갈게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가 먼저 나왔다. 세 남자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떠돌았다. 선배가 먼저 가장 안전한 화제로 물꼬를 트려 했으나 그가 막았다.
 “그래서 지섭이 너는 군생활….”
 “저 군생활 괜찮아요. 선배야말로 무슨 일 있죠? 그죠?”
 선배는 흠칫 놀랐다.
 “너 아까부터 내가 무슨 일 있어 보이냐?”
 그가 따졌다.
 “힘들다고, 데리러 와 달라고 문자 보냈잖아요. 뭐가 힘든 거예요? 어디 가 있었어요?”
 “내가? 언제?”
 선배가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해진 채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전화기를 꺼냈다.
 “선배가 여기 분명히 문자로 주소도 보내고….”
 그러나 그가 몇 번이나 보았던 문자는 전화기를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같은 시각에 받은 문자에는 ‘나왔으니 얼굴 한 번 보자’ ‘그럼 운동 끝나고 전화해라’라는 내용 뿐이었다.
 “어? 어…. 이상하다?”
 선배는 어리둥절한 표정에서 점차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이 되어 받은 문자 메시지를 위아래로 뒤지는 그를 쳐다보았다. 맥주를 한 모금 넘기고 무심코 호프집 벽에 걸린 텔레비전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 야, 지섭아, 저거 너 아니냐?”
 “예?”
 그는 선배가 화급히 팔을 때리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그가 화면을 바라보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건물이 불에 타는 광경이었다. 화면 아래쪽에는 ‘이상한 서당’의 본래 단체 이름과 함께 어제 저녁에 원인 모를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어 몇십 억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중현을 바라보았다. 중현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선배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분명히 꼭 너처럼 생긴 사람이 저기서 뛰어나왔는데….”
 “저거 어제 저녁에 불 난 거잖아요.”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중현이 대답했다.
 “형 오늘 나왔잖아? 어제까진 군대에 있었을 거 아냐?”
 “그러네? 어제 저 시간에 너 부대에 있었지?”
 “저 오늘 아침에 나왔어요.”
 그가 대답했다. 선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선배가 보낸 문자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다시 한 번 진상 규명에 나섰다.
 “그래서 선배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사채 썼어요?”
 “뭐? 아냐!”
 “그럼 다단계예요?”
 “아니라니까! 너 뭐 잘못 먹었냐?”
 “진짜 아니죠?”
 “진짜 아냐, 짜샤.”
 “그럼 뭐예요?”
 “아 정말 왜 그래, 아무 일 없다니까! 휴가 나온 후배 술 사주는 것도 죄냐?”
 그는 선배의 얼굴을 살폈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어딘가 찜찜했지만 선배는 처음 보는 중현 앞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세히 털어놓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중현이 눈치 빠르게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그는 어쩐지 뭔가 해결이 안 된 채로 중현을 쫓아보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찜찜했지만 중현은 더 앉아있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전화해, 형.”
 중현은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하고는 시원시원하게 가 버렸다.
 둘만 남은 뒤에도 선배는 한동안 말없이 맥주잔만 비웠다. 그리고 치킨이 나왔다. 그래서 그는 치킨을 먹었다. 양념한 닭고기가 입에 들어오니 지금 이 순간만은 선배가 다시 ‘이상한 서당’에 잡혀가서 구조 요청을 한다고 해도 치킨부터 다 먹고 가겠다고 할 것 같았다.
 걸신들린 듯이 먹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선배가 말했다.
 “나 사실 저기 가려고 했었어.”
 그는 입에 닭날개를 쑤셔넣는 와중에 선배를 잠깐 쳐다보았다. 그런 거 벌써 다 알아요,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닭날개를 씹기 시작했다. 선배가 말을 이었다.
 “진짜 어이가 없는 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그는 씹다 말고 선배를 쳐다보았다. 뭔가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데 입에서 닭날개가 비어져나오고 있어서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선배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구십 육 세까지 사셨으니까 오래 사셨지. 되게 정정하셨는데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어. 어디 병을 앓으신 것도 아니고. 사실 우리 아버지도 호상이라고 그러셨어. 돌아가신 건 슬프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는 닭날개를 꿀꺽 삼킨 후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난 할아버지 재산이래봤자 계시던 집만 딱 있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 집도 할아버지가 맨날 큰아버지 주신다고 그랬거든. 그래서 장례 치르고 나면 끝인 줄 알았어. 근데 돌아가시고 보니까 산이 있었던 거야. 그것 때문에 완전 난리가 났어.”
 “왜요? 그거 되게 큰 재산 아녜요?”
 선배는 웃는 것도 같고 찡그린 것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큰 재산이야. 세금만 이억 칠천이 나왔으니까 아주 큰 재산이지.”
 이억…? 그는 닭다리를 입에 문 채로 선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선배가 맥주를 들이켰다.
 “그것 때문에 지금 큰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작은 아버지하고 몇 달째 싸운다. 이러다가 집안이 전부 다 콩가루 되게 생겼어.”
 “세금 낼 돈이 없으면, 팔아야 되는 거 아녜요?”
 그가 물었다.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선배는 맥주를 들이켰다.
 “세금이 밀렸고,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나봐. 공시지가니 개발제한이니 용도변경이 어쩌고, 나는 잘 모르겠는데 진짜 죽겠다. 큰아버지랑 작은 아버지랑 우리 아버지랑 싸우고, 아버지랑 어머니랑 싸우고…. 이억 칠천이면 세 집이 나눠도 구천만원이란 말이야. 내가 당장 어디 대기업 같은 데 취직해서 돈을 벌면 모르겠지만 그런 돈이 갑자기 어디서 나오냐. 카드빚하고 학자금 대출 땜에 지금 내 한 몸만 해도 답이 안 나오는데….”
 선배는 이제 예능 프로그램이 한창 방영중인 화면 쪽으로 별 의미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근데 내가 얼마 전에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붙잡더니 그러는 거야. 조상이 가시면서 우환을 남겨주셨다고, 가족끼리 싸움이 났는데 오래 싸우겠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내 얼굴 이렇게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휙 던지는데 와,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더라.”
 선배는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나 진짜 그런 거 안 믿거든? 너도 알잖아. 나 그런 소리 하는 놈들 다 사기꾼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완전 바닥을 쳤을 때 모르는 사람이 길 가다 그런 소리를 하니까 그게 순간 귀에 딱 날아와서 꽂히는 거야. 막 나도 모르게, 그러면 어떡하면 좋냐고 그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나와 버렸어.”
 어떡하면 좋겠냐는 선배의 그 질문에 길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이 가르쳐준 곳이 바로 ‘이상한 서당’의 주소였다. 몇 월 며칠 몇 시까지 오라고 날짜와 시간까지 지정해주었다는 것이었다.
 “와서 뭘 하라는 거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안 가르쳐주고 일단 와서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다 잘 풀린다는 거야. 근데 안 오면 절대로 안 풀린대, 집안 다 망하고… 부모님이 홧병으로 돌아가신대. 그런 소릴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
 그래서 선배는 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짜가 오늘이었거든. 갔으면 아까 저녁 때 갔어야 했는데….”
 선배는 다시 한 번 허무한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떡하냐. 불이 나서 전소됐으면 이제 못 가잖아.”
 “가지 마세요.”
 그가 불쑥 말했다.
 “그 사람들 사기꾼 미친놈 맞아요. 절대 가지 마세요.”
 선배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덧붙였다.
 “세금이잖아요. 사채나 다단계 같은 거 아니니까, 세금이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선배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차츰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럴까? … 그렇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채나 다단계나 이상한 사이비 종교, 그런 거 절대로 하지 마세요. 그런 것만 아니면 나머지는 다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예요, 젊으니까.”
 마지막 말은 원래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해놓고 나서 그도 놀랐다. 선배는 피식 웃었다.
 “너 군대 가더니 이상해졌다?”
 “치맥 흡입을 못 했더니 힘들어서 그렇게 됐어요.”
 그가 대답하고 마지막 남은 닭다리를 집어들었다.
 
 선배와 헤어져 집에 돌아오는 길에 중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가 뭐래? 거기 가입했대?”
 “아니. 하려다가 말았어, 불이 나서.”
 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잘 됐네.”
 중현은 안심한 것 같았다. 끊으려는 중현에게 그가 투덜거렸다.
 “난 이게 뭐냐? 휴가 첫날을 이렇게 이상하게 보낸 경우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아무도 없을 거다.”
 “왜, 좋잖아, 형.”
 중현이 태평하게 대꾸했다.
 “휴가 첫날을 되풀이하는 거, 그거 모든 휴가 나온 군인의 꿈 아냐? 형은 휴가 첫날 저녁만 지금이 세 번째잖아?”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중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러네.”
 그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중현은 웃었다.
 “나 군대 가서 첫 휴가 나오면 그 때도 이번처럼 같이 반복 좀 해 주라. 여친이랑 데이트 좀 오래 하게.”
 “싫어 인마.”
 전화를 끊고 그는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은 청명했고, 자정 지난 달이 새벽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선배에게 무심결에 내놓았던 젊으니까 – 라는 위안은 어쩐지 너무 성의없게 느껴졌다. 동네 커피숍에서 마주치는 다단계 바람잡이들, 동네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사이비 종교 회원들…. 절박한 사람들, 이유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절박했기 때문에 구원을, 해결책을 찾다가 불행해진 사람들은 일상 생활 속 어디에나 존재했다. 너무 많고 너무 흔해서, 그들도 누군가에게 끌려들어간 피해자이고 그렇게 해서 자기 본래 의지와는 정반대로 완전히 희망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오히려 간과하기 쉬웠다.
 그들도 대부분 젊었다. 젊기 때문에, 젊고 절박하기 때문에 가진 것의 전부인 젊음을 담보로 삼아 얼마가 될지 모를 이후의 삶을 어떻게든 지탱하려 한 것이다. 그들의 사탕발림이나 공갈에 넘어가서는 안 되지만, 안전한 거리를 두고 생각한다면 약간의 동정을 해줄 여지는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또래 중에서 그렇게 어둠의 저편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꿈꾸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직한 취업을 원했다가 속은 경우가 더 많았다.
 그는 익숙한 골목길을 걸어 익숙한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어른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할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사채와 다단계와 이단 종교만 피하면 된다. 그 셋은 본질적으로 같았고, 그러므로 하나를 파악하면 나머지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배의 집안처럼 느닷없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존재를 알지도 못했던 유산 때문에 세금폭탄이 떨어지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인생에 덫은 참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도, 젊으니까....
 그에게는 아직 휴가 기간의 짧은 자유가 더 남아 있었고, 군 생활이 한참 더 남아 있었고, 그 뒤로 이후의 인생이 전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해답을 찾는 데 골몰하는 대신 최선의 선택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맞이했던 친숙하게 어두운 복도를 걸어 친숙하게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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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미카 12.07.01 23:35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이론과 실전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외국에서 누가 뜬금없이 말 걸거든 함부로 대답하지 말라던가....
  • No Profile
    정도경 12.07.02 01:33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외국에서 뜬금없이 말 거는 사람은 주로 사기꾼이죠. (파생상품: 인신매매범, 성추행범, 장기밀매범) 저는 대답 안 하고 가만히 쳐다보는 방법을 주로 썼는데 (절반 정도는 뭔 소리 하는지 못 알아들어서) 그러면 좀 이상한 앤가보다 하고 가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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