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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반복 휴가 1: 선배

2012.04.27 23:4304.27

 


반복 휴가
 
 
 1. 선배
 
 전화기가 진동했다. 그는 건물 안으로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가방을 들고 다른 짐도 걸쳐 메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 순간 고민했다. 전화기는 오른쪽 바지 주머니 속에 구겨박혀 있었다. 오른손에는 가방을 들었다. 가방을 왼손으로 옮겨 들려는 순간 왼쪽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이 흘러내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어깨를 추스렸다. 전화 끊어지면 어떡하지? 누구지? 마음이 급했다. 그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지금 전화하는 건 대부분 술 마시자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 사람들이 하나하나 다 반가웠다.
 다행히 전화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끈질기게 부르르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한참이나 이 가방 저 가방을 이쪽 저쪽 손과 어깨로 옮겨 들고 추스른 끝에 바지 주머니를 뒤져서 힘들게 전화기를 꺼냈다.
 - 야, 이지섭!
 폴더를 열자마자 ‘여보세요’를 할 새도 없이 선배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아, 예, 선….”
 ‘선배’라는 단어를 다 끝내기도 전에 상대방이 다시 외쳤다.
 - 휴가 나왔다며? 자식아 나왔으면 나왔다고 형님한테 먼저 신고부터 해야 될 거 아냐!
 “아, 예, 그게요….”
 역시 상대방은 그가 말을 마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 너 나 좀 데리러 와라. 장소는 문자로 보낼게. 세 시간 있다가 와.
 뜻밖의 발언에 그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데리러 와요? 거기 어딘데….”
 - 세 시간이다. 딱 맞춰 와, 알았지? 꼭 와야 돼? 내가 거하게 쏠게!
 그리고 선배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든 채로 그는 건물 입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데리러 오라니, 어디로? 세 시간을 맞추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한 한 순간이 지나가자 짜증이 스멀스멀 솟아 올랐다. 황금 같은 휴가 첫날이다. 술 사주고 놀아주겠다는 사람은 모두 반갑지만, 세 시간 뒤에 데리러 오라니 이건 놀자는 게 아니고 심부름 아닌가. 이 선배는 학과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지만 이런 식으로 친구나 후배들을 가끔가다 한 번씩 몹시 귀찮게 하는 버릇이 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어딘데 세 시간 뒤에 오라는 거지? 이런 애매한 약속이 있나.
 원래 계획했던 대로 운동이나 하고, 상황 봐서 도장 사람들하고 관장님하고 한 잔 하고 집에 가야겠다. 선배한테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나중에 미안하다고 하면 되겠지. 휴가나온 군인보고 피 같은 세 시간을 길에다 버리라고 하는 건 범죄다.
 …라고 생각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가 다시 진동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폴더를 열었다.
 선배였다. 약속대로 장소를 문자로 보냈다. 번지수만 가지고는 얼른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동 이름으로 봐서는 바로 이 동네다. 그리고 선배는 이렇게 덧붙였다.
 ‘꼭 와라. 나 지금 좀 힘들다.’
 그는 전화기를 접었다.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데리러 가야 하는 곳이 이 동네고 주어진 시간이 세 시간이면 충분히 운동하고 씻고 나올 수 있다. 일단 운동부터 하고 나중에 생각하자.
 
 예상대로 관장님은 반가워했다. 그러나 관장님 뿐이었다. 성인부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말이 성인부지 거의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중학생이지만 체격도 실력도 어른 못지 않아서 유일하게 그의 상대가 되었던 동준이는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사정이 생겨서 요즘 못 나오고 있다는 관장님 말씀에 그는 실망했다.
 기초 동작을 끝내고 호구를 쓰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이 하나 더 나타났다. 중현이다. 몇 년이나 같이 운동했고, 학과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에 다닌다. 그리고 한 살 차이나긴 하지만 그의 또래 중에서 아직까지 충실하게 도장에 나오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가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눈으로만 인사했다. 중현도 눈으로 인사를 받은 뒤에 잠깐 몸을 풀고 빠른동작에 들어갔다. 그는 나머지 사람들과 연격을 시작했다.
 
 운동이 끝난 뒤에 관장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들 데려다주고 올 테니 도장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곤란해졌다. 선약이 있다고 말하자 관장님은 예상대로 야단을 쳤다.
 “야, 너는 첫 휴가 나와서 운동하러 왔으면 끝나고 관장님하고 한잔 할 생각은 안 하고 선약부터 만드냐?”
 “저기 관장님, 그런 게 아니라….”
 망설이다가 그는 전화기를 열었다. 관장님에게 문자를 보여드렸다.
 “꼭 오라고 힘들다고, 이렇게 보냈거든요. 선배가 말하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요. 원래 쫌 민폐 캐릭터긴 해도 후배한테 우는 소리 하는 사람은 아닌데….”
 관장님은 선배가 보낸 문자의 주소를 주의깊게 들여다보았다. 전화기를 꺼내서 주소를 검색했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혹시 그 이상한 서당 아냐?”
 “이상한 서당요?”
 그가 되물었다.
 “아, 맞다!”
 옆에서 중현이 끼어들었다.
 “형, 여기 거기잖아 왜, 그 한복 입고 무슨 시조 같은 거 외우고 다니는 사람들.”
 ‘한복 입고’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곧장 알아들었다. 유교와 불교와 도교 사상을 합쳐서 만든 무슨 한민족 고유의 전통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산천초목을 지배하는 신령님들한테 정성을 들여야 한반도가 통일이 되고 배달 민족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설명을 한없이 늘어놓는데 그도 몇 번 걸려서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신도가 꽤 많은지 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번듯한 건물을 짓고 ‘교육관’이라고 큼지막한 글씨를 박은 간판까지 달고 있었다. 한복을 입고 천자문인지 한시인지 그런 비슷한 걸 외우고 다녔기 때문에 관장님은 그 건물과 거기 속한 사람들을 ‘이상한 서당’이라고 통칭했다.
 선배가 그 ‘이상한 서당’한테 걸려들었단 말인가? 어째서? 선배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그 ‘이상한 서당’ 관련 동아리에 가입한 후배들을 보면 한심해 했고, 선배와 친한 다른 선배가 그곳에 가입하자 설득해서 탈퇴시키려다가 거의 주먹싸움을 벌일 뻔한 적도 있었다.
 “세 시간 뒤에 오래? 그게 언젠데?”
 관장님이 물었다. 그는 문자 받은 시각을 살펴보았다. 거의 시간이 됐다.
 관장님은 잠시 생각했다. 간단하게 말했다.
 “가 봐.”
 솔직히 그는 허락받아서 기뻐해야 할지 귀찮은 선배 때문에 탐탁치 않은 상황에 휘말리게 된 걸 싫어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관장님이 덧붙였다.
 “중현이 같이 가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예.”
 중현이 선뜻 대답했다. 그는 좀 고마웠다.
 
 도장을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공기는 시원했지만 땅에서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스며든 여름 한낮의 열기가 아직도 조금씩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도복과 호구를 넣은 가방을 오른손에 들고 죽도가 든 검집을 왼쪽 어깨에 멘 채 중현과 나란히 밤 거리를 걸어갔다.
 중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어.”
 그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중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군대 어때?”
 “군대가 군대지 뭐.”
 그가 대답했다.
 걱정했던 것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훈련소에 처음 들어가서 며칠 동안은 매 순간순간 모든 상황이 충격이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는 예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그래도 휴가 나와 있는 동안만큼은 군대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첫 휴가이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군생활 어떠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중현도 얼마 안 있으면 입대한다. 본인에게도 닥칠 일이기 때문에 궁금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좀더 성의 있게 대답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군대도 사람 사는 데야. 뭘 하든 튀지 말고 딱 중간만 가면 돼.”
 그가 말했다. 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덧붙였다.
 “근데 넌 공군 가니까 나하고는 좀 다를 걸.”
 중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중현은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다. 생각을 할 때는 말이 더 없어진다. 그도 여러 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걸었다.
 ‘이상한 서당’은 멀지 않았으므로 금방 도착했다. 그러나 건물은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그는 철제 대문으로 다가갔다. 문은 닫혀 있었다. 시험삼아 흔들어 보았다. 대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긴 것이 분명했다.
 “뭐냐?”
 그가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장난하나?”
 “전화 걸어 봐.”
 중현이 말했다. 그는 호구 가방을 내려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선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걸어 보았다. 여전히 무감정한 신호음만 반복될 뿐이다.
 그는 짜증이 나서 폴더를 접으려 했다. 그 순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전화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신호음이 돌연히 그치더니 심한 잡음과 함께 누군가의 갈라진 말소리 같은 것이 조각조각 흘러나왔다.
 - 야… 서…. 이…..
 “여보세요? 선배?”
 그는 시험삼아 불러 보았다.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슷한 잡음과 토막난 음절만 되풀이해 들려올 뿐이었다.
 - 무…. 에…. 는….. 어….
 “선배? 여보세요?”
 전화기에서는 계속 잡음만 흘러나왔다. 그는 끊고 다시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섭아! 살려줘!”
 선배의 목소리였다.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건물 안에서 들려왔다. 그 비명 소리는 고요한 밤 거리에 놀랄 만큼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중현이 옆에서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선배! 선배?”
 그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불 꺼진 건물 쪽으로 돌아서서 소리 질렀다. 그러나 건물은 여전히 불이 꺼진 채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전화기에서도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전화기를 그대로 귀에 댄 채 잠시 불 꺼진 건물을 훑어보았다. 소리도, 기척도, 불빛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전화기 화면을 쳐다보았다.
 전화는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통화 시간’이라는 글자 옆의 초 단위 숫자는 계속 1초씩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은 정적이었다. 완전한 정적.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보다도, 밤 공기를 울리던 선배의 비명 소리보다도, 불이 모두 꺼지고 철문이 잠긴 건물 앞에서 수화기를 통해 전해져오는 침묵이 그에게는 훨씬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그는 전화기를 접었다. 중현을 돌아다 보았다.
 “너도 들었지?”
 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떡하냐?”
 그가 물었다. 중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과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확고하게 말했다.
 “들어가자.”
 예상치 못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농담 아니지?”
 그가 되물었다. 중현의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 인터넷에서 봤어. 경찰 불러도 확실한 증거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해. 그리고 확실한 증거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간 선배가 위험해져.”
 그는 중현을 쳐다보았다. 중현도 마주 쳐다보았다.
 “가자.”
 그가 말했다.
 
 중현은 짐을 들지 않은 맨손이었으므로 먼저 철문을 넘어갔다. 그는 중현에게 호구 가방과 죽도집을 넘겨준 뒤에 철문을 넘었다. 별로 높지 않아서 쉽게 넘을 수 있었다. 그는 호구 가방을 도장에 놔두지 않고 굳이 여기까지 들고 온 것을 조금 후회했다.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칠흑같이 어두웠다. 어디가 건물 입구인지, 어디로 가야 선배를 찾을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의 불빛으로 여기저기 비추어 보았다.
 “저기다.”
 중현이 말했다. 그는 돌아보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에 현관문같이 생긴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호구 가방을 철문 옆 담벼락 아래 놓아두었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 죽도를 꺼내들고 검집도 호구 가방과 함께 남겨두었다. 왼손에는 죽도를, 오른손에 핸드폰을 들고 그는 중현을 따라서 마당을 가로질러 캄캄한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문은 그냥 평범한 철제 현관문이었다. 둥근 문고리가 달려 있을 뿐 아무런 특징도 없었다. 그는 양 손에 물건을 들고 있었으므로 우선 오른손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중현이 먼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앞으로 나서더니 문고리를 잡고 돌려서 확 당겼다.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일시에 김이 쭉 빠졌다. 중현이 다시 한 번 나섰다. 문고리를 돌려도 보고, 흔들어도 보고,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았지만 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쩌지?”
 중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라고 해서 알 리 없었다.
 “비켜 봐.”
 그가 말했다. 핸드폰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자유로워진 오른손을 문고리에 댔다.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등을 세게 떠밀었다. 두 사람은 내던져지다시피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철문이 쾅, 하고 닫혔다.
 
 그는 확 떠밀려 들어간 여파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잠시 비틀거렸다. 그리고 눈이 부셨다. 안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밖에서 봤을 때는 완전한 어둠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문이 잠겨 있다가 갑자기 열린 것도, 주위에 아무도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떠밀린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틈이 없었다. 몸이 중심을 잡고 눈이 빛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오른쪽에서 뭔가 날아왔다. 그는 고개만 왼쪽으로 기울여서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다시 똑바로 선 순간 몇 명인지 모를 사람들이 서로 목과 멱살을 움켜쥐고 한 덩어리가 된 채로 씩씩거리고 몸부림을 치면서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기보다는 굴러왔다. 그는 물러섰다. 싸우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자 이번에는 누군가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옆에 서 있던 중현을 향해 덤벼들었다. 창백한 얼굴에 입가는 침이 흐르고, 머리카락은 올올이 곤두선 채 눈에는 핏발이 서서 벌겋고 흰자위가 거의 뒤집혀 있었다. 그 귀신 같은 몰골을 보자 그는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면서 머릿속의 회로가 순간적으로 정지되었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기 전에 죽도가 먼저 나갔다. 상대는 정수리를 맞고 나뒹굴었다. 그러자 마치 신호라도 받은 듯이 사방에서 사람들이 덤볐다. 그는 피하고 막고 때렸다. 누군가 선혁을 잡아채려 했지만 그는 죽도를 살짝 휘돌려 손목을 때린 뒤에 상대가 움찔하는 틈을 타서 목을 찔러 밀어냈다. 중현의 뒤에서 누군가 덤벼드는 것을 보고 그는 중현이 목덜미를 잡히기 전에 얼른 돌아서서 머리를 쳤다. 죽도가 호면의 두랄루민 면금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직접 때려 살을 찢었다. 그 감각이 칼자루를 통해서 손으로 전해지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찡그렸다.
 패싸움은 평생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호구를 쓰지 않은 사람에게 죽도를 사용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왜 싸우는지, 뭣 때문에 싸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건물 안을 가득 채우고 무리를 지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해칠 목적으로 그에게 덤벼들었다.
 도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곳인가?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떼지어 싸우는 거지? 애초에 누가 누구와 싸우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선배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중현이는? 그는 죽도를 가져왔지만 중현은 빈손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숫자가 너무 많다. 가장 무서운 것은 모두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다들 아주 오랫동안 싸움만 하고 있었던 것처럼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다. 몇몇은 옷에 피가 묻어 있었고, 입에 거품을 물거나 눈이 뒤집힌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미국 드라마에서 보았던 좀비를 언뜻 떠올렸다.
 죽도를 휘두르고 있었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에 따라 어딘지도 모르면서 자동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중현은 덤벼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빈손으로 막아내려고 애쓰면서 점점 뒤로 밀렸다. 그는 방향을 돌려서 중현이 쪽으로 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덤벼드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좀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무기, 그가 가진 유일한 강점인 죽도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누군가 그의 왼손을 비틀어서 죽도를 빼내려 했기 때문에 그는 손을 잡아채면서 칼자루 끝으로 상대의 코를 가격했다. 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서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의 머리를 때리고 그 기세로 옆에서 덤비는 사람의 명치를 찔러 넘어뜨렸다. 칼을 들었는데 검도가 아니라 개싸움을 하고 있다는 씁쓸한 자각이 아주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쳤지만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그는 덤벼드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언뜻 중현을 보았다. 중현은 어린 남자아이를 껴안다시피하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주먹과 발길질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야!”
 그가 죽도를 휘두르며 불렀다.
 “중현아! 최중현!”
 그러나 중현은 듣지 못했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꽉 껴안은 채 웅크린 자세로 중현은 수없이 덤벼드는 사람들에게 밀려서 아래에 깔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위험하다. 저러다 맞아 죽는다. 그는 어떻게든 친구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이런 싸움판에 어째서 난데없는 어린 아이가 있는지, 뉘집 자손이고 뭐 하는 아이인지, 그런 이성적인 질문은 눈이 뒤집힌 채 싸우는 사람들 사이로 중현의 뒤통수나 등덜미가 잠깐잠깐 보일 때마다 머릿속에 반쯤 떠오르려다가 사라졌다.
 그 때 누군가 그의 왼팔을 붙잡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뿌리치고 병혁 끝으로 찌르려 했다.
 “지섭아.”
 그는 한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어, 선배!”
 “가자.”
 선배가 말했다. 그리고 그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그의 팔을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어, 저기, 중현이는….”
 그는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선배는 엄청난 힘으로 인정사정 없이 그의 팔을 뽑을 듯이 잡아끌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채로 붙잡혀 끌려서 같이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뛰어가는 길에도 역시 눈이 뒤집히고 입가에 거품을 문 사람들이 그와 선배에게 덤벼들었다. 처음에는 선배가 그를 이끌고 뛰었지만 사람이 덤벼들면 죽도를 든 그가 앞으로 나서고 맨손인 선배는 뒤로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배는 건물 안 구조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떼로 몰려오면 그를 이끌고 옆으로 살짝 빠져서 복도 모퉁이 뒤에 숨었고, 갈 길이 막히면 뒷길로 돌아서 비상계단을 내려갔다. 그 계단으로 사람들이 몰려 올라왔기 때문에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뛰어 올라갔다. 그러다가 선배가 뒤쫓아 올라오던 사람들에게 등덜미를 잡혔기 때문에 그는 붙잡은 사람들을 죽도로 때려 쓰러뜨리고 선배를 빼냈다. 계단 위에 서서 아래쪽을 향해 죽도를 높이 들어 도끼질하듯 기계적으로 내리치면서 그는 중단보다 상단이 확실히 유리하다고 아무 맥락 없이 잠깐 생각했다.
 선배가 층계참에서 어떤 문을 열었다. 그가 빠져나가자 선배도 같이 빠져나온 뒤에 얼른 문을 닫고 자물쇠를 돌려 잠갔다. 쫓아오던 사람들이 문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문을 밀고 두드렸다. 그와 선배는 문에 등을 대고 버텼다. 사람들은 잠시 그렇게 문을 부술 듯이 위협하다가 우르르 어디론가 몰려서 가 버렸다.
 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한 순간 기운이 빠져서 주저앉았다. 선배도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어스름한 형광불빛이 비추는 복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채로 두 사람은 가쁜 숨을 골랐다.
 
 그가 먼저 제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가 물었다.
 “여기 어디예요? 저 사람들 누구예요? 왜 쫓아오는 거예요?”
 “나도 몰라.”
 선배가 여전히 헐떡거리면서 대답했다.
 예상치 못했던 한심한 대답에 그는 다시 기운이 쭉 빠졌다. 괜히 이런 일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하니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서 전화기를 꺼냈다.
 “뭐 하냐?”
 선배가 옆에서 물었다.
 “경찰 불러야죠.”
 그가 대답했다. 선배가 고개를 힘없이 다른 쪽으로 젖혔다.
 “소용 없어.”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그는 전화기 화면 한구석에 뜬 조그만 x를 보았다. 통화 불가능이다. 믿을 수가 없어서 그는 폴더를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여전히 x다. 막대기는 하나도 뜨지 않았다.
 “여기선 전화가 안 돼. 핸드폰 신호 차단기인지 뭔지 그거 쓰나봐.”
 선배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는 전화기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그럼 아까 내가 전화했을 때 어떻게 받았어요?”
 “무슨 전화?”
 선배가 돌아보았다. 그가 설명했다.
 “아까 나 여기 도착해서 전화했을 때 선배가 전화받고 지섭아 살려줘, 그랬잖아요.”
 “나 그런 적 없는데?”
 선배가 몸을 조금 일으켜서 고쳐 앉았다.
 “그리고 나 지금 전화기 없어. 아까 잃었어.”
 “그럼 전화 받은 사람은 누구예요?”
 그가 물었다. 점점 좋지 않은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몰라. 하여간 나는 아냐.”
 선배가 말했다.
 그는 죽도를 내려다보았다. 딱히 무기를 점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데 달리 쳐다볼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그렇게 수없이 무작정 두들겨 팼는데도 죽도는 망가지지 않고 멀쩡했다. 다만 대나무 양 옆부분이 조금씩 깨져서 거스러미가 일어난 정도였다.
 그리고 선혁에 피가 묻어 있었다. 흰 가죽과 대나무에 얼룩진 지저분한 붉은빛이 눈에 들어오자 죽도가 사람의 머리를 때려 두피를 찢었을 때의 느낌이 손에서 되살아났다. 뱃속이 뭉근하게 뒤틀렸다.
 피묻은 선혁을 보지 않기 위해서 그는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화기는 어디서 잃어버렸는데요?”
 선배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몹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잃어버린 게 아냐. 잃었어.”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둘이 똑같은 말인데 무슨 소리야?
 선배가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카드 하다가 잃었어. 새 전화기라 기계값만 구십만원짜린데. 뺏겼어. 돈 될 만한 게 그거밖에 없었거든.”
 “카드?”
 그가 되물었다.
 “포커.”
 선배는 아주 잠깐 그를 향해 대답하고는 곧 고개를 돌렸다.
 “선배, 도박해요?”
 그가 놀라서 물었다.
 “도박 하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야.”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선배는 다른 도시 출신으로 학교 앞에 방을 구해서 자취를 했다. 집안 사정상 부모님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라 선배가 학자금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했다. 이름 있는 사립 대학의 학생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내킬 때마다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잔고는 언제나 빠듯했고, 돈이 들어오는 시기와 나가는 시기가 한 번이라도 어긋나면 생활비에 구멍이 났다. 그러면 그 구멍은 카드로 메웠다. 그리고 그 카드빚을 갚기 위해서 다른 카드로 돌려 막았다.
 도박을 하거나 사치를 하거나 크게 유흥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고정된 수입이 없는 대학생이다 보니 기본적인 생활만 유지하는데도 조금씩 마이너스 잔고가 쌓여갔던 것이다. 생활비는 작은 빚이었고, 몇 백만원, 몇 천만원 단위로 불어가는 학자금 대출은 큰 빚이었다.
 “대학 들어온 순간부터 인생이 다 빚이더라고.”
 선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수수료와 이자가 붙으면서 그 빚은 조금씩 조금씩 불어나 조금씩 조금씩 더 목을 조여왔다. 학자금 대출은 상환을 미룰 수 있었지만 카드빚은 그럴 수 없었다. 선배는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휴학하거나 아예 그만두는 것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멀쩡한 대졸자도 취업하기 힘든 마당에 중퇴 학력으로 구할 수 있는 일자리란 뻔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휴학을 한다면 언젠가는 복학해야 하고, 그러면 다시 등록금을 내야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빚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도리가 없었다.
 이도저도 선택할 수 없이 완전히 궁지에 몰렸을 때 선배는 꽤나 솔깃한 일거리를 제안받았다. 신간 서적의 홍보물과 보도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전공이 광고 쪽이고 그래픽도 할 줄 알기 때문에 시급이 아니라 제대로 월급을 주겠다고 회사 측에서 제안했다. 직원 대우로 4대 보험도 들어주고, 당장의 돈벌이는 물론 경력에도 도움이 되고 어쩌면 졸업 후의 일자리까지 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암시에 선배는 당장 수락했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하러 가서 보니 출판사는 수상한 철학을 설파하는 미심쩍은 단체에 속한 명목상의 회사였고 신간 서적이라는 것은 그 단체의 선전 책자였다.
 선배는 망설였다. 출판사 측에서는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라고 쿨하게 말했다. 그러나 일하고 싶으면 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권유했다. 그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문제의 단체에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정직원 중에도 실제로 가입한 사람은 절반, 아닌 사람이 절반이라고 했다. 일은 일이고 돈은 돈이었다. 그래서 선배는 고민 끝에 방학 동안만, 두 달 정도만, 일해 보겠다고 말했다. 회사 측에서는 역시나 쿨하게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선배는 두 달간 일했다. 회사에서는 월급을 주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으니 월급을 달라고 하자 한 달만 더 일하면 한꺼번에 주겠다고 말했다.
 “믿은 내가 바보지.”
 선배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한 달 더 일한 뒤에 다시 월급을 달라고 요구했다. 돈을 줄 테니 따라오라고 팀장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선배는 팀장을 따라서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실에 갇혔다.
 “갇혀요?”
 그가 긴장해서 물었다. 선배가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거기서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어.”
 지하실은 도박장이었다. 거대한 홀을 담배연기로 가득 채운 채 사람들이 모여서 온갖 종류의 도박을 하고 있었다. 팀장은 선배를 그곳에 밀어넣은 뒤에 세 시간 줄 테니까 네 돈 받고 싶으면 여기서 따 가지고 나가라고 말한 뒤에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세 시간이라고 한 거예요?”
 그가 물었다.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팀장이 아주 확실하게 딱 세 시간이라고 그랬거든.”
 어쨌든 선배는 어이가 없었다. 나가려고 했지만 체격이 건장하고 험상궂은 사람들이 문을 막고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선배는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으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사무실에서는 컴퓨터로 뭔가 찾아보더니 액수를 확인했다. 선배는 조금 희망에 들떴다. 그러나 사무실에서는 선배의 밀린 월급 액수만큼 칩을 주었다.
 “무슨 칩을 줘요?”
 그가 물었다. ‘칩’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맥주 안주로 먹는 감자칩이었지만 도박장에서 그런 걸 줄 리가 없었다.
 “이거야.”
 선배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오백원짜리보다 조금 큰, 둥근 플라스틱 동전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러나 도박장 안에서나 현금 대용이지 밖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정말로 월급만큼 돈을 따지 않으면 빈손으로 나가야 하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선배는 어쩔 수 없이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서, 다 잃었어요?”
 그가 물었다. 선배는 기묘한 표정으로 손에 든 칩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땄어.”
 처음에는 내리 잃었다. 거의 다 잃을 뻔해서 전화기도 그 때 뺏겼다. 마지막 한 판에 걸 칩은 아껴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남은 칩을 몽땅 걸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두 번 연속으로 딴 것이다. 액수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패가 돌아갔을 때 선배의 손에는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쥐어져 있었다.
 “그게 뭐예요?”
 “좋은 패야.”
 선배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는 어이가 없어져서 다시 물었다.
 “선배는 포커 같은 걸 어디서 배웠어요?”
 “이모랑 누나한테.”
 그는 더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뭐라고 논평하기 전에 선배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좋은 패’를 손에 쥐고 이만하면 석 달치 월급에 이자까지 붙여서 찾아갈 수 있겠다고 선배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딜러가 테이블을 엎었다. 그리고 양옆에 있던 사람들에 선배에게 덤벼들었다.
 “왜 덤벼요? 좋은 패 뺏으려구요?”
 그가 의아해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선배가 말했다.
 패와 칩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선배는 목숨 걸고 싸웠다. 석 달치 노동의 대가를 눈 뜨고 그냥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런데 테이블에 둘러앉았던 사람들 밑에 깔려서 몸부림치다가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선배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박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테이블을 엎고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칩은 물론이고 좋은 패, 나쁜 패, 심지어 전화기나 담배, 종이컵이나 휴지까지 가릴 것 없이 다른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빼앗았다. 그리고 빼앗긴 사람은 잃은 물건을 벌충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자기가 당한 대로 남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기 위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그럼 아까 그 사람들이 다 도박하던 사람들이에요?”
 그가 다시 물었다.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선배는 거대한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광란하는 모습을 보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 빨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로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방에서 덤벼드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그 중 몇 명은 본의 아니게 때리거나 걷어차서 밀어내면서, 선배는 어떻게든 출구를 찾기 위해서 헤맸다. 그러다가 홀 뒤쪽, 사무실 옆에 좁은 계단으로 통하는 조그만 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배는 서둘러 그 계단으로 올라갔고, 건물 로비나 혹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서 선배가 도착한 곳은 아까 그가 처음에 떠밀려 들어갔던 그 난장판이었다. 지하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건물 전체를 몰려다니면서 서로 목적 없이 쫓고 쫓기고 맞고 때리고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쫓겨다닌 거야. 너 올 때까지.”
 선배가 말을 맺었다.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도 따라서 한숨을 쉬었다. 입대 후 대망의 첫 휴가를 나온 바로 첫날에 이런 괴상한 사건에 발목 잡히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못 나가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하자 여러 가지 걱정들이 머릿속에서 차례차례 피어나기 시작했다. 부대에 복귀 못 하면 어떡하지? 탈영병이 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짧은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나 감옥에 가는 건가?
 그는 다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폴더를 열어서 이리저리 버튼을 누르는 그에게 선배가 말했다.
 “소용 없어. 여기선 전화가 안 된다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죠.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말하면서 전화기를 들여다보다가 그는 문득 선배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선배.”
 “응?”
 그의 어조를 듣고 선배도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물었다.
 “여기 건물 전체 다 전화 안 돼요?”
 “응, 아마 다 안 될 걸.”
 “그럼 나한테 전화는 어떻게 하고, 문자는 어떻게 보냈어요?”
 선배는 입을 약간 벌린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의 눈과 얼굴에서 모든 인간적인 감정과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보는 앞에서 선배의 얼굴은 서서히 로봇처럼 메마르게 변해갔다.
 그는 선배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몸을 조금씩 일으켰다. 선배가 눈치채지 않도록 주의 깊게 살그머니 움직였지만 선배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움찔움찔 따라서 일어섰다.
 그는 똑바로 섰다. 죽도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한 번 물었다.
 “선배.”
 그러나 그렇게 부른 순간, 선배가 등을 기대고 있던 나무 문짝을 통해서 뭔가 길고 날카로운 금속 막대 같은 것이 뚫고 나왔다. 선배는 명치를 정통으로 꿰뚫렸다.
 한 순간 선배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입을 벌렸다. 입가에서 핏줄기가 흘러 나왔다. 선배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선배의 몸은 천천히 늘어졌다. 그 무게 때문에 문에 박힌 금속 막대가 서서히 휘어졌고, 선배의 몸은 명치를 관통한 막대를 타고 스르르 앞으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입을 약간 벌린 채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 모습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전혀 아무 것도 절대로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굳어진 채 그대로 서서 바닥에 쓰러진 선배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선배의 가슴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와 복도로 구불구불 퍼져나가는 동안 시간은 그를 둘러싼 채로 얼어붙었다.
 문이 탕, 소리를 내며 열렸기 때문에 그는 퍼뜩 쇼크 상태에서 깨어났다. 부러진 의자 다리, 깨진 형광등, 대걸레 자루 등, 위협적인 물건들을 손에 손에 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 몰려 서 있었다.
 한 순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앞에 서서 부러진 의자 다리를 든 사람이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고, 그것을 신호로 모여 섰던 사람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죽도를 들어올렸다. 그 때 양손에 커다란 충격이 전달되면서 머리 위에서 죽도가 뭔가 무시무시하게 딱딱한 것에 부딪쳐 쪼개지는 소리를 들었다….
 
 “형.”
 … 오른쪽 바지 주머니 안에서 전화기가 진동했다.
 “형!”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도장 탈의실 안이었다. 중현이 옆에 서 있었다.
 “전화 왔어, 형.”
 중현이 기묘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는 더듬거렸다.
 “어? 어….”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 야, 이지섭!
 폴더를 열자마자 ‘여보세요’를 할 새도 없이 선배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아, 예, 선….”
 ‘선배’라는 단어를 다 끝내기도 전에 상대방이 다시 외쳤다.
 - 휴가 나왔다며? 자식아 나왔으면 나왔다고 형님한테 먼저 신고부터 해야 될 거 아냐!
 “예? 저기, 선배….”
 역시 상대방은 그가 말을 이어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 너 나 좀 데리러 와라. 장소는 문자로 보낼게. 세 시간 있다가 와.
 그는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선배는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 세 시간이다. 딱 맞춰 와, 알았지? 꼭 와야 돼? 내가 거하게 쏠게!
 그리고 선배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그는 한참이나 전화기를 손에 들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은 통화 종료 후 대기화면의 사진으로 돌아갔다가 설정한 시간이 지나자 까맣게 죽어버렸다.
 “형.”
 옆에서 중현이 다시 불렀다.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중현이 여전히 그 기묘하게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형 선배지?”
 “어? 어….”
 중현이 다시 물었다.
 “상운동 **번지로 데리러 오래? 그 ‘이상한 서당’으로, 세 시간 뒤에?”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전화기가 다시 진동했다. 그가 폴더를 열기 전에 중현이 빠르게 말했다.
 “힘들다고, 꼭 오래?”
 그는 폴더를 열었다. 화면의 문자를 확인했다. 문자를 받은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세 번, 네 번 확인했다.
 그는 중현을 돌아보았다. 한참이나 더듬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뭐냐,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중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물었다.
 “우리, 거기 갔었지?”
 중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너도 같이 갔지? 그치? 철문 넘어서, 들어갔잖아? 맞지?”
 중현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양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그는 중현의 손을 내려다보고 다시 한 번 목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다.
 중현의 양 손바닥에는 붉고 지저분하고 기분나쁜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이가 죽었어.”
 중현이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그러더니 여기로 돌아왔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와 중현은 겁에 질려 서로 말없이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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