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한국히어로센터 - 3. 아수라의 대활약


 
 1
 
 “저 찾으셨어요, 부장님?”
 아수라는 2과 부장실 문을 열고 얼굴만 살짝 들이밀며, 헐크 부장에게 조금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헐크 부장이 소리 안 나게 한숨을 쉬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수라는 죄 지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총총 걸음으로 소파까지 가서는 다시 헐크 부장 눈치를 살폈다.
 아수라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번에는 헐크 부장이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으휴, 앉아, 앉아.”
 “아니오, 저 그냥 서 있어도 되는데요.”
 “앉으라니까!”
 “네, 앉겠습니다.”
 아수라는 헐크 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소파에 앉았다.
 헐크 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왔다.
 헐크 부장이 소파에 앉자, 아수라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잡아먹냐! 잡아먹어! 누가 보면 내가 폭력 상사인 줄 알겠다!”
 “때리셔도 됩니다. 단, 변신하지 마시고 지금 모습으로 때려주세요.”
 “내가 때리긴 왜 때려! 그리고, 지금 모습으로 때리면 그게 때리는 거야! 아우, 혈압.”
 헐크 부장은 뒷목을 잡은 채 화를 삭이려 안간힘을 썼다.
 “화도 너무 자주 내시면 건강에 안 좋아요, 부장님.”
 “알아, 나도 알아!”
 초등학교 2학년 모습을 하고 있는 헐크 부장, 순간 그의 팔뚝에 있던 힘줄이 우두둑 하고 불거졌다. 
 아수라가 히익, 하고 놀라면서 순식간에 문 앞까지 도망쳤다. 그 모습은 흡사 활동 2과 동료인 발이 빠른 마하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참고로, 마하는 마하 6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 1초에 2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달린다. 능력자 가운데 마하보다 빠른 자는 없다.
 아수라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걸 보며 헐크 부장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매일 십 년씩 늙어.”
 그 말을 듣고 아수라가 총총 걸음으로 헐크 부장 옆까지 왔다.
 “그래도 부장님은 걱정 없으시잖아요. 십 년이 아니라 백 년씩 늙으셔도요, 부장님은 언제나 귀여운 초등학교 2학년 학생 같으세요, 호호.”
 아수라는 분명 좋은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헐크 부장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남들은 돈까지 들여가면서 젊음을 유지하려고 기를 쓰는데, 헐크 부장은 젊음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현재 나이 46세. 신장 130센티미터. 정확히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성장이 멈췄다. 키뿐만이 아니라 얼굴 생김새도 그대로다. 전체적인 외모가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물론 변신하면 상황은 달라지지만.
 어쨌든 만일 다른 능력자가 아수라의 상사였다면, 아마 그는 마음고생 때문에 지금쯤 겉모습 천 살을 돌파했을지도 모른다. 겉모습 천 살의 외모는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니 헐크 부장으로서는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리 마음고생을 심하게 해도 여전히 초등학교 2학년 학생 외모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것도 귀여운 초등학교 2학년 학생. 그러니 마음고생이 심하더라도 폭삭 늙을 걱정은 없다.
 아수라는 이런 의도로 말했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해도 헐크 부장은 여전히 귀여운 초등학교 2학년 학생 외모.
 물론 말하고 나서도 아수라는 헐크 부장 옆에 서서 계속 호호 웃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능력자들 같았으면, 농담으로라도 헐크 부장 앞에서 외모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초등학교 2학년 학생도 아니고, 귀여운 초등학교 2학년 학생. 아, 이건 아마 한국히어로센터 회장이라도 헐크 부장 앞에서는 감히 꺼내지 않았을 말이다.
 한국히어로센터 내에서의 금기어, 귀여운 초등학교 2학년 학생.
 마흔여섯 헐크 부장의 몸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아수라는 여전히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헐크 부장 옆에서 호호 웃고 있었다.
 곧이어 부장실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보안실에 미리 능력 발동을 통보하지 않은 채 한국히어로센터 내에서 능력을 발동하면 울리는 1차 경고음이었다.
 “8층 활동 2과 부장실에서 능력 발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즉시 능력 발동을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제야 아수라는 “어!” 하면서 옆을 보았다. 소파에 앉아 있어야 할, 귀여운 초등학교 2학년 학생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 헐크 부장을 보았다.
 “히익!”
 이 상황에서는 마하의 빠른 발 따위도 소용없다.
 
 상황 정리가 끝나고, 둘은 다시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일반 시민이 ‘히어로’ 잡지에 제보를 한 모양이야. 초원교회 담임 목사라는 사람이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말이지. 평범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히어로’ 잡지 오지아 기자가 며칠 전에 그 교회에 직접 가봤대. 교회가 신축 건물인데, 외관이 아주 근사하더래. 완전 미술관처럼 지었대. 서울 이태원 쪽에 있는 그 유명 미술관 저리가라래. 십자가도 건물 꼭대기에다 세우지 않고, 무슨 설치작품처럼 마당 한 쪽에 세워놨대. 파격이지. 교회 짓는 데 돈 엄청 쏟아부었겠구나 싶어서 화도 났는데, 한편으로는 교회 건물이 파격적이라 신선하고 좋았대.”
 “부장님, 서론이 너무 길어요. 저는 교회 건물 같은 거 관심 없어요.”
 “나도 별로 관심 없어. 가급적 오지아 기자가 해준 얘기를 그대로 전달하려니까 서론이 좀 길었어.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교회에 들어갔지. 예배실 찾는 데 한참 걸렸다더군. 내부가 워낙 넓고 복잡하더래. 방도 많고 말이야. 그래서 겨우 예배실 찾아서 들어갔더니, 와, 이건 뭐 예배실 내부가 로마시대 원형극장 같더래. 웅장하다더군. 아래쪽에 있는 무대 뒤편으로 커다란 핏빛 십자가가 매달려 있어서, 웅장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가 풍기더래. 뭐, 그건 그렇고, 어쨌든 예배실 들어갔더니 마침 일요 예배가 한창이더래. 기도하고 찬송가 부르고 성경 구절 공부하고, 다른 교회들하고 별반 차이가 없더래. 그렇게 한 한 시간 정도 예배를 봤나, 갑자기 예배실 조명이 전부 꺼지더니, 무대 위에서 설교하던 목사가 담임 목사를 소개하더래. 김 목사라던가. 그 김 목사가 핏빛 십자가 뒤에서 나오더래. 하, 이게 또 기가 막힌 연출이지. 예배실 내부가 컴컴하니까 핏빛 십자가가 더 상징적으로 와닿더래. 일부러 내부 조명 다 끄고, 십자가 조명만 놔둔 거지. 그리고 그 핏빛 십자가 뒤에서 김 목사가 나타나고. 물론 내부가 컴컴하니까 처음에는 사람 형상만 보였겠지. 핏빛 십자가가 정확히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굉장히 컸다고 했어. 아마 그 십자가 뒤로 무슨 통로가 있겠지. 다른 방이랑 연결된 통로. 김 목사는 미리 그 방에 있다가 통로를 통해서 핏빛 십자가 뒤로 나온 거고. 내부가 컴컴했으니 객석에서는 핏빛 십자가 뒤편이 안 보였을 테고 말이야. 아무튼 김 목사가 십자가 뒤에서 나온 다음 다시 내부가 환해지더래. 예배실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탄성을 질렀다더군. 그 탄성 소리에 맞춰 김 목사가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말이지. 이거 꼭 무슨 슈퍼스타 공연장 분위기 같지 않아? 교회가 사람들 심리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어.”
 “사람들 심리 이용하는 거야 뭐 나쁠 거 없죠. 종교라고 해서 꼭 엄숙한 분위기만 고집하는 것도 보기 안 좋아요. 자칫 폐쇄적으로 보일 수도 있거든요. 감출 게 많은 사람들이 좀 노출을 꺼리잖아요. 일부러 연출까지 해가면서 신도들에게 감흥을 주려는 건, 역시 그 교회가 약간의 파격을 즐기나 보네요. 교회 건물도 그렇고요.”
 “그래, 좋게 생각하면 그렇지. 아무튼 그 김 목사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내부가 환해졌잖아. 동시에 신도들 입에서 탄성이 나왔고. 오지아 기자 역시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더군. 그 김 목사를 보는 순간 말이지. 컴컴한 실내, 거대한 핏빛 십자가, 그 뒤에서 나타난 김 목사. 순간 내부가 환해지고, 김 목사의 모습이 보인 거지. 보라색 피부를 가진 남자 모습이 말이야.”
 “보라색이라니요! 피부가 보라색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보라색 피부.”
 “칠한 게 아니라, 진짜 보라색 피부요?”
 “그래, 진짜 보라색 피부. 아수라 자네 혹시 퍼플맨 얘기 못 들어봤나?”
 “네, 들은 적 없는데요.”
 “그런 자들이 있어. 예부터 보라색 피부를 가진 자들이 종종 출현한 적이 있어. 사람들은 그들을 이승과 저승의 중재자라고 불렀지. 물론 그들도 능력자야.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래. 피부가 보라색인 자들, 그들의 능력이 뭔 줄 아나.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여줘. 환상을 보여주는 능력을 갖고 있어. 하지만 아무 환상이나 막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야.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환상의 종류가 정해져 있지. 어떤 자는 지옥을 보여줄 수 있어. 그러니까 지옥의 모습만 환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거야. 대신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지. 대중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불의 지옥, 암흑의 지옥, 100톤의 쇳덩어리가 한 시간마다 몸을 으깨는 지옥, 위장이 터질 때까지 강제로 입속에 음식을 쑤셔넣는 지옥, 몸을 기둥에 묶어놓고 굶겨죽이는 지옥, 온갖 맹수에게 살과 뼈를 물어뜯기는 지옥. 아마 이보다 수백 수천 가지의 지옥이 있을 거야. 어느 퍼플맨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지옥의 모습만 보여줄 수 있어. 어느 퍼플맨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온갖 천국의 모습, 어느 퍼플맨은 온갖 쾌락의 모습만 보여줄 수 있어. 한 명의 퍼플맨이 이 세 종류의 모습을 다 보여줄 수는 없지. 오직 하나의 세계만 보여줄 수 있는 거야. 아수라 자네가 거인으로 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여자로 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대신 이 환상이 매우 사실적이야. 사람들은 자신이 환상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실제로 겪고 있다고 생각하지. 뜨거움을 느끼거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나, 위장이 터지거나, 온몸이 물어뜯기는 거지. 초기 퍼플맨들은 대개 지옥이나 천국의 모습만을 보여줄 수 있었어. 그러니까 고통이나 환희. 그래서 이승과 저승의 중재자라는 소리를 들었던 거고.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모습을 보여줬지. 죽어서 당신이 가야 할 곳이라면서 말이야. 환상이 매우 사실적이기 때문에 그 자는 악행을 멀리하게 돼. 반대로 선하다고 소문 난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모습을 보여줬지. 그 사람은 평생 선행을 멈추지 않아. 이처럼 천국이나 지옥의 모습을 통해 초기 퍼플맨들은 사람들을 치유했어. 마음을 치유한 거지.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었기 때문에 퍼플맨을 통해 환상을 본 자들은 실제로 이승과 저승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거야. 당연히 중재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지.”
 “그렇다면 초기에는 사람들이 퍼플맨을 숭배했겠는데요. 이승과 저승의 중재자, 자신이 죽어서 가야 할 곳을 보여주는 자. 마치 신의 사도나 성인을 대하듯 했겠어요.”
 “그랬지. 각지에서 사람들이 퍼플맨을 보려고 구름처럼 모여들었지. 물론 귀중품을 들고 말이야.”
 “음, 상황이 그랬다면 결국 퍼플맨들도 변했겠어요. 초기에는 자신들 능력으로 사람들 마음을 치유했겠지만, 점차 그 능력을 악용했겠어요.”
 “그래, 아수라 자네 말이 맞아. 초기 퍼플맨들은 자신의 능력을 순수한 쪽으로 이용했어. 하지만 그들도 변하기 시작했지. 정확히 그 시점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 어쩌면 이미 초기 퍼플맨들 중 일부는 자신의 능력을 악용했을 수도 있어. 그러다 퍼플맨들의 능력에 변화가 생긴 거야. 천국과 지옥의 모습만 보여줄 수 있었던 초기 퍼플맨들에 비해, 그 후 나타난 퍼플맨들은 다른 세계도 보여줄 수 있게 됐지.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퍼플맨,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퍼플맨, 반대로 불필요한 용기를 심어주는 퍼플맨,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건 쾌락이었어. 사람들에게 쾌락만을 맛보게 해주는 퍼플맨이 등장했지. 앞서도 말했듯이, 그들의 환상은 매우 사실적이야. 한 번 퍼플맨에게 쾌락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중독되고 말지. 퍼플맨이 노린 것도 그거고. 그래서 쾌락에 빠진 사람들은 퍼플맨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이미 쾌락을 맛봤기 때문에 말이야. 심지어 퍼플맨의 명령으로 살인도 일삼았지. 그 대가로 퍼플맨은 쾌락의 세계를 보여주고. 그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었어. 그건 죄악 중에서도 가장 큰 죄악이었거든. 지옥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지옥으로 떨어지는 죄악이었으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우는 전쟁터에서뿐이었어.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는 행위는 살인이 아니었지. 영웅적인 행위였어. 전쟁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결코 없었지. 하지만 쾌락을 보여줄 수 있는 퍼플맨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도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어. 쾌락을 위해서 말이야. 심지어 자기 부인, 자기 남편, 자기 자식들까지 서슴없이 죽였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어.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쾌락을 찾으려고 했어. 퍼플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쾌락을 얻으려고 했지. 퍼플맨의 명령을 받지 않았는데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거야. 오로지 쾌락을 맛보기 위해서 말이야. 그러니 그 죽이는 방법이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지. 쾌락을 맛보기 위해 죽이는 거니까. 남의 여자, 남의 남자, 남의 아이들, 자기 아이들을 범하기 시작했지. 마치 어떤 것이 쾌락적인 것인가 찾아내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온갖 악행을 시험했어. 그리고 빠져들었고. 수많은 마약도 그때 만들어졌지. 환각 상태도 쾌락이라는 걸 알아낸 거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떤 변화가 생겨난 줄 아나?”
 “글쎄요, 아마 사람들이 더 이상 퍼플맨을 찾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맞아. 이제 그들에게 퍼플맨은 필요 없게 된 거야. 굳이 퍼플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신들은 이미 쾌락을 맛볼 방법을 알아냈거든. 그러고 보면 참 웃기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했던 초기 퍼플맨들은 생명력이 길었어. 하지만 사람들을 이용만 하려 했던 퍼플맨들은 얼마 못 가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아. 그래서 그들의 역사는 짧았어. 백 년이 안 갔지. 그 뒤로 퍼플맨들은 나타나지 않았어. 적어도 역사적 기록에는 퍼플맨이 등장하지 않은 걸로 나와. 어쩌면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퍼플맨들이 등장했을 수도 있어. 물론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생활했겠지. 그러다 조용히 사라졌을 테고.”
 “어쨌든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던 퍼플맨이 다시 등장했다는 건가요?”
 “그래. 공개적으로 다시 등장한 거지.”
 “그럼 이번 퍼플맨이 보여주는 환상 세계는 뭔가요? 꽤 궁금한데요.”
 “지난 세대의 퍼플맨들과 비슷해.”
 “쾌락의 일종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쾌락의 일종이야. 대신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만들어낼 수 없는 쾌락이지. 하지만 역시 쾌락은 쾌락이야. 중독성이 강한가 봐. 그래서 초원교회는 항상 신도들로 넘쳐나. 당연히 막대한 헌금도 들어오고. 김 목사에게서 환상 세계를 맛보려면, 그러니까 예배실 조명이 다시 켜지고 김 목사가 등장하면, 특정 사람들만이 김 목사 앞으로 나갈 수 있어. 오지아 기자가 갔을 때도 김 목사가 등장하자 설교하던 목사가 몇 몇 사람을 호명했다고 하더군. 호명된 사람들은 김 목사 앞으로 나갔고. 보기에도 매우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대. 아마 막대한 헌금을 바쳤을 거야. 그러니까 김 목사에게 환상 세계를 맛보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해서 환상 세계를 체험한 신도들은 종교 활동에 더 헌신한대. 나쁜 건지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 종교 활동에 헌신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지.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 하지만 역시 그 이전에 김 목사의 환상 세계를 체험했다는 거지. 그리고 김 목사는 분명 자신의 능력으로 막대한 부를 쌓고 있고 말이야.”
 “막대한 부라, 그렇다면 역시 김 목사의 환상 세계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겠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그런데 퍼플맨의 환상 세계가 그렇게 중독성이 강한가요?”
 “강하다고들 해. 퍼플맨이 보여주는 세계는 분명 환상이지만, 그걸 보는 사람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믿으니까. 하지만 나도 그 중독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아직 우리 같은 능력자 중에서는 퍼플맨의 환상 세계를 경험한 경우가 없거든. 그런 기록 자체가 없어. 그렇다고 해서 능력자와 퍼플맨이 싸웠다는 기록도 없어. 이상하지!”
 “서로 피했나보네요. 퍼플맨은 능력자에게 목숨을 잃을까 봐 피했고, 능력자는 자신의 능력을 잃을까 봐 피했고요. 어쨌든 실수로라도 퍼플맨의 환상 세계에 중독되면 자신의 능력을 잃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 그렇게 서로 피하려 했으니, 굳이 서로를 죽일 이유도 없었을 테고. 그래서 아수라 자네를 부른 거야.”
 “음, 그러니까 저더러 퍼플맨 김 목사의 환상 세계를 한번 체험해 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아수라 자네라면 별 문제 없을 거야. 김 목사가 보여주는 환상 세계를 체험해도, 거기에 중독될 일은 없잖아. 안 그런가?”
 “그렇죠. 제 인격이 무언가에 의해 지배당할 일은 없죠.”
 “그래, 그러니까 아수라 자네가 한번 초원교회에 가 봐. 가서 김 목사의 환상 세계도 체험해 보고. 이거 아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야. 능력자가 퍼플맨의 환상 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최초의 사례라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요?”
 “아, 중요한 얘기를 깜빡했네. 퍼플맨들 특징이 있어. 사람들한테 환상 세계를 보여주잖아! 그게 무한정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에너지 소모가 심한가 봐. 자료에 의하면 많아야 두세 번 정도야. 그러니까 연속해서 두세 번. 그 이상은 안 돼. 연속해서 두세 번 환상 세계를 보여주고 나면 탈진 상태에 빠진대. 그리고 몇 분은 지나야 회복이 되고. 그러니까 두세 사람한테 환상 세계를 보여준 후 몇 분 뒤에 다시 두세 사람한테 환상 세계를 보여주는 식이지.”
 “그러니까 제가 일단 퍼플맨의 환상 세계를 체험한 뒤, 그가 탈진하게 되면…….”
 “그래, 퍼플맨이 탈진 상태에 빠지면 바로 마하를 부르게. 그럼 마하가 출동해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올 거야. 그러면 일단 지하로 내려보내고, 그의 처리 문제는 경영진들 지시에 따르면 되겠지.”
 “아, 오랜만에 출동하는데요. 참, 그런데 부장님, 당연히 이번 출동도 수당 나오겠죠?”
 “아니, 안 나와. 규정상 수당 지급은 파괴자 처치 시에만 나오잖아. 센터에서는 아직 퍼플맨을 파괴자로 규정하지는 않았거든. 유감이지만 안 나와. 대신 관리부장한테 얘기해서 퍼플맨한테 줄 환상 세계 체험비는 넉넉하게 달라고 했어.”
 “어차피 퍼플맨한테 준 돈은 나중에 다시 뺏을 거잖아요.”
 “뭐, 그렇겠지.”
 “이게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능력자가 퍼플맨의 환상 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최초의 사례라면서요.”
 “그렇지. 최초지.”
 “그렇게 중요한 일인데 수당이 안 나와요?”
 “안 나오지. 퍼플맨은 파괴자가 아니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부장님이 건의를 하셔서 수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글쎄, 난 원칙주의자라서 말이야.”
 “그런 분이 아까 허가 없이 변신을 하셨어요!”
 “아까 얘기는 꺼내지 말자고. 서로 감정 상하게 왜 또 그런 얘기를 꺼내고 그러나.”
 “저는 이미 감정 상했는데요.”
 “그런 일 가지고 뭘 또 감정이 상하고 그래! 대신 식대 조금 지원해 줄게. 마음 풀어.”
 “얼마 지원해 주실 건데요?”
 “아니, 이 친구가 갑자기 왜 이렇게 돈을 밝히고 그래! 자네답지 않아.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저번에 얘기 들어보니까, 5과 부장님은 단순히 탐문 조사 하는 데도 직원한테 활동비 백만 원 주셨다는데요. 5과 부장님이 관리부장님한테 얘기했대요. 활동비 달라고. 그랬더니 관리부장님이 백만 원이나 줬대요. 그 직원이 저한테 얼마나 자랑을 했는데요. 그러고 보면 5과 부장님이 사내 정치를 잘 하시는 것 같아요. 가만 보면 활동 5과 직원들 은근히 상대하기 쉬운 파괴자들 출현했을 때에만 출동하잖아요. 수당은 똑같이 받으면서요. 그게 다 5과 부장님 능력이라고 봐야죠. 요즘은 부서장들도 사내 정치를 잘 해야 돼요. 그래야 그 부서가 잘 돌아가거든요. 부하 직원들한테 신임도 얻고요. 아, 부러운 5과. 단순한 탐문 조사에도 백만 원씩이나 받고.”
 “무슨 소리야! 내가 관리부장하고 얼마나 친한데! 잠깐만 있어 봐! 관리부장한테 전화 좀 하고. 이 사람이 아까는 나한테 분명히 이런 출동에는 활동비 일체 없다고 했는데. 식대도 내 부탁이니까 특별히 처리해 준다고 한 건데. ……어, 관리부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돼요?]
 “아니, 활동 5과만 특별대우 해준다면서! 단순한 탐문 조사에도 활동비 백만 원씩이나 주고. 이거 이러면 곤란해. 이번 퍼플맨 압송해 오는 거 말이야! 그거 우리 아수라 아니면 할 직원 없어. 자네도 알잖아!”
 [알죠. 그래서 활동 2과에서 맡기로 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맡기로 한 거지. 그런데 누구는 단순한 탐문 조사에도 백만 원씩이나 주고, 누구는 한 푼도 안 주고, 이러면 곤란해.”
 [아니, 글쎄, 누가 탐문 조사에 활동비 백만 원을 줘요!]
 “누구긴 누구야! 관리부장 자네지!”
 [제가 왜 줘요! 규정상 탐문 조사에는 활동비 자체가 안 나가는데요! 수당도 파괴자 처치 시에만 나가고요. 그래서 이번 퍼플맨 압송 건도 수당 안 나가는 거고요. 그나마 식비 처리도 부장님 부탁이라 힘들게 결재 받은 거예요. 부장님이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 섭섭합니다. 제가 활동 2과 편의 봐주느라 윗사람들한테 얼마나 깨지는데요!]
 “섭섭하다니, 누가 할 소린데! 내가 더 섭섭해! 관리부장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은근히 정치적이야!”
 [정치적이라뇨! 저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이에요! 제발 생사람 좀 잡지 마세요!]
 “모르긴 뭘 몰라! 그런 쪽 전문이면서!”
 그렇게 둘이 전화통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아수라는 조용히 2과 부장실을 나왔다.
 
 
 2
 
 녀석이 노리는 곳은 종합운동장이다. 대규모 집회가 벌어지고 있는 종합운동장. 시간이 촉박하다. 자칫하다가는 녀석이 먼저 도착할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종합운동장에 모인 10만 인파가 순식간에 몰살당할 수도 있다.
 나는 달리면서 동시에 날개를 폈다. 그리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하늘을 날면서도 속도를 더 높이기 위해 쉼 없이 날갯짓을 했다.
 땅 위에서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더욱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멀리 종합운동장이 보였다. 미처 종합운동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는지, 출입구 앞에서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모습도 보였다. 그 수만 대략 천 명에 육박했다. 그렇다면 아직 녀석은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나는 바람이 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날개를 움직여 종합운동장 출입문 근처에 내려앉았다. 그래도 약간의 바람이 불었는지, 입장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 몇몇의 치마가 펄럭였다.
 그들이 치마를 움켜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발견했다.
 “아, 천사님이시다! 천사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종합운동장 호위하러 오신 거예요?”
 여자의 말을 신호로 몇몇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양쪽에서 내 날개를 잡고 기념사진까지 찍는다.
 나는 가볍게 으르렁 거렸다.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사자의 몸에 독수리 날개. 나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천사다.
 사람들이 물러서는 걸 기다렸다가 나는 말했다.
 “지금 녀석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어서 피하라. 최대한 내 주위에서 멀리 떨어지거라. 안 그러면 너희들이 위험하다. 녀석은 너희들을 먼서 공격할 수도 있다. 시간이 없다. 어서 피하라.”
 그러고는 사람들을 향해 제법 크게 으르렁 거렸다.
 그제야 사람들이 겁을 먹고 종합운동장 곳곳에 있는 지하 통로로 대피했다.
 때마침 1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녀석의 냄새가 났다. 구백, 팔백, 칠백. 녀석이 빠른 속도로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오는 방향을 노려보며 잔뜩 자세를 웅크렸다.
 녀석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달려들 작정이었다. 발로 녀석의 상체를 제압한 채 바로 뒷덜미를 물어뜯을 작정이었다.
 입에서는 계속 으르렁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제 백 미터. 멀리 녀석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발로 아스팔트를 파내며 힘차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도 분명 나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속력을 내 내 쪽으로 돌진했다. 첫 일격으로 기선을 제압할 모양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첫 일격으로 녀석의 기를 꺾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녀석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나 역시 땅을 박차며 달려갔다.
 “크항, 크항, 크하항!”
 나는 포효하며 달려갔다. 네 발을 힘차게 움직였다. 날개를 접어 바람의 저항도 줄였다. 당연히 녀석보다 내 속도가 빨랐다.
 오십, 사십, 삼십.
 이제 녀석과 충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초.
 나는 순간적으로 날개를 촤악 펴서 속력을 최대한 줄였다. 그리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내 움직임을 살폈다. 아차 싶었는지, 녀석도 급하게 속력을 줄이려고 했다.
 하지만 공중에서 내려다본 녀석은 이미 10미터 이상이나 앞으로 달려간 상태였다. 그리고 녀석이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본 순간, 이미 나는 녀석의 등 위에 있었다.
 나는 날개를 접을 새도 없이 녀석의 등으로 내려앉았다.
 내 무게 때문에 녀석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덕분에 나는 녀석의 등 위에 올라타서도 쉽게 발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우선 네 발톱을 녀석의 등에 깊숙이 쑤셔 박았다.
 녀석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나는 날개를 힘차게 펄럭였다. 여전히 발톱은 녀석의 등에 박혀 있었다.
 녀석의 무게 때문인지 쉽게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발톱에 박힌 녀석의 등가죽만 위쪽으로 팽팽히 당겨질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더 힘차게 펄럭였다. 그럴수록 녀석의 비명은 더 거칠어졌고, 몸도 심하게 비틀었다. 그러다 결국 트드득 하고 녀석의 살이 뜯겨나갔다. 발톱에 박혀 있던 살이 뜯겨나간 것이었다.
 무거운 게 갑자기 발에서 떨어져나가자 내 몸은 10미터 이상 공중으로 솟구쳤다.
 나는 날개를 움직여 공중에서 균형을 잡은 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등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내려와라. 네 놈 발톱을 다 뽑아버릴 테니까. 그리고 다시는 날지 못하게 날개도 다 찢어버릴 것이다.”
 등이 꽤 아픈 모양이었다. 녀석은 당장 나를 때려눕히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나는 일부러 녀석의 머리 위를 뱅뱅 맴돌았다. 약을 올려서 녀석이 혼자 흥분해 날뛰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 움직임에는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빈틈을 파고들면 된다.
 하지만 녀석은 내 생각과 달리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가만히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단 한 번 입을 연 뒤로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나는 좀더 녀석 가까이 다가갔다. 발톱으로 녀석의 머리를 노리는 척하다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런 동작이 몇 차례 이어지자 녀석도 슬슬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아스팔트 바닥에 푹 찔러넣더니, 그대로 손을 움켜쥐면서 아스팔트 조각을 뜯어냈다. 그러고는 그 뜯어낸 아스팔트 조각을 공중으로 힘껏 던졌다.
 저 녀석 생각보다 힘이 셌다. 날아오는 아스팔트 조각도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마치 동물의 울부짖음 같았다. 잘못해서 몸에 맞기라도 하면 꽤 큰 데미지를 입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은 아스팔트 조각 피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계속 그렇게 피하고만 있을 것인가. 꽤 재미없는 상대를 만났군.”
 그러면서 녀석이 이번에는 제법 큰 아스팔트 조각을 던지더니, 어느 틈에 종합운동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아스팔트 조각은 그 크기가 거의 승용차 바퀴만 했다. 그래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크기에 놀란 나머지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아차 하면 아스팔트 조각에 내 몸이 박살날지도 모른다. 더 가까이 다가온 아스팔트 조각은 승용차가 아니라 거의 덤프트럭 바퀴 수준이었다.
 그리고 덤프트럭 바퀴만큼 큰 아스팔트 조각이 내 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동시에 엄청난 열기도 전해졌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최대한 높이 날아올랐다. 아스팔트가 문제가 아니라 열기 때문에 내 몸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물론 실제로 내 몸이 타지는 않지만.
 
 “그렇게 공중에만 떠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믿나? 멍청한 놈. 저 녀석은 내가 상대할 테니, 너는 돌아가라!”
 녀석이 던진 아스팔트 조각이 천사의 몸에 거의 닿을 즈음, 나는 가까스로 불을 뿜어 아스팔트를 녹였다.
 내가 내뿜는 불은 온도가 상당히 높다. 아스팔트 정도는 쉽게 녹인다. 하지만 내 공격으로 천사가 죽지는 않는다. 물론 열기는 전해지겠지만, 실제로 몸이 타지는 않는다. 그냥 뜨거운 열기에 고통만 느낄 뿐이다. 그래도 그 고통이 상당하다. 실제로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이니까. 뭐, 아무렴 어떠랴. 아스팔트 조각에 맞아 죽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천사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 곧장 녀석을 뒤쫓았다.
 아마 녀석도 내 존재를 눈치 챘을 것이다.
 녀석의 감각이라면 아까 내가 내뿜었던 불의 열기를 충분히 감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그렇게 달려도 결국 나한테 따라잡힐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달려라. 아스팔트를 더 힘차게 찍어가면서 달려라.”
 녀석은 기특하게도 내 말대로 아스팔트를 더 힘차게 찍어가면서 달렸다.
 하지만 이미 녀석의 거친 숨소리가 들릴 만큼 나와 녀석의 거리는 좁혀졌다.
  즉, 사정거리에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입에서 불을 내뿜는 소. 나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천사다.
 등 뒤에서 열기를 느끼자마자 녀석이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체격에 비하면 몸놀림이 빠른 녀석이었다.
 나는 녀석이 미처 자세를 가다듬기 전에 다시 한번 불을 내뿜었다.
 하지만 녀석은 팔에 제대로 힘을 실을 수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도 양손으로 아스팔트를 푹푹 퍼서 불쪽으로 던졌다. 힘도 별로 안 들이고 푹푹 푼 아스팔트 조각인데도, 크기가 거의 자동차 문짝만 했다. 그것들이 연거푸 날아오면서 불길을 막았다. 그 틈에 녀석은 몸을 왼쪽으로 날려 내가 내뿜은 불로부터 완전히 피했다.
 저 녀석 주특기가 아스팔트 퍼내기인가 보다.
 물론 그런 주특기 따위 상관없었다. 날아오는 아스팔트는 모두 녹여버리면 된다.
 그런데 저 녀석, 또다시 아스팔트를 마구 퍼내고 있었다. 퍼내면서 동시에 나를 향해 힘껏 내던지고 있었다.
 소용없는데도 저런다.
 나는 날아오는 아스팔트를 향해 불을 내뿜었다.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제자리에서 불만 열심히 내뿜으면 된다. 어차피 아스팔트 따위 내 몸에 닿지도 않을 것이다. 공중에서 녹아버릴 것이다.
 녀석은 열심히 아스팔트를 퍼서 나한테 던지고, 나는 열심히 불을 내뿜어서 날아오는 아스팔트를 녹였다.
 그러다 보면 결국 힘이 빠지는 건 녀석이다. 그때 공격하면 된다.
 그렇게 열심히 아스팔트를 녹이고 있는데, 갑자기 쿵! 소리가 나더니 눈앞에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벽의 정체가 궁금했다.
 나는 일단 불을 거둬들이고 눈앞의 벽을 살폈다.
 하늘로 솟은 벽, 높이가 약 30미터에 넓이는 약 10미터. 이 거대한 벽이 아스팔트에 푹 꽂혀 있었다. 그래서 마치 땅에서 솟아난 벽 같았다. 하지만 땅에서 벽이 솟아날 리는 없다. 녀석이 땅에 박아놓은 벽이었다. 그렇다면 이 벽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벽 좌우에 설치된 가드레일을 보고서야 벽의 정체를 알아챘다. 다름 아닌 고가도로였다. 녀석은 아스팔트를 마구 퍼서 던지고는, 어느 틈에 근처 고가도로 일부를 뜯어내 내 앞에 푹 꽂아놓은 것이었다.
 벽이 고가도로라는 걸 알아챘을 즈음, 또다시 쿵!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연거푸 세 번 더 쿵! 소리가 났다.
 녀석이 나머지 고가도로도 크기대로 뜯어서 내 앞에 있는 고가도로 뒤로 푹푹 꽂아놓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녀석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 고가도로도 마음대로 뜯어서 땅에 박아버릴 정도의 괴력이라니.
 비로소 약간 긴장감이 생겼다.
 나는 하늘을 날 수 없으니 녀석을 잡으려면 이 다섯 겹의 고가도로벽을 뚫고 나가야 한다.
 다섯 겹의 고가도로벽이라, 두께가 과연 얼마나 되려나. 최소한 15미터는 넘겠지. 불로 녹일 수 있을까. 머리로 들이받으면 쓰러뜨릴 수 있을까.
 문제는 시간이다. 다섯 겹의 고가도로벽을 녹이든 쓰러뜨리든, 어쨌든 성공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역시 녀석이 노린 건 시간인가. 내가 다섯 겹 고가도로벽을 뚫는 사이에 녀석은 종합운동장을 공격할 작정인가.
 그래도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최대한 빨리 벽을 뚫어야 한다.
 나는 불을 내뿜으면서 동시에 머리로 벽을 들이받았다.
 머리가 울렸다. 그래도 연거푸 들이받았다.
 
 “불 그만 내 뿜어. 뜨거워 죽겠네. 그리고 머리는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천사라는 게 창피하다.”
 나는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고가도로벽을 빠르게 기어올랐다. 그리고 벽 위에서 폴짝 폴짝 뛰어 마지막 고가도로벽까지 간 뒤, 다시 벽을 타고 기어내려 왔다.
 멀리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아스팔트를 찍어내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길 왼쪽에는 돌기둥 몇 개가 땅에 박혀 있었다. 고가도로를 지탱하던 기둥이었으리라.
 힘 센 놈치고 무식하지 않은 놈이 없다. 어떻게 고가도로를 뜯어낼 생각을 했을까.
 나는 긴 혀를 끌끌 차며,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마치 땅 위를 미끄러지듯 소리 안 나게 달려 녀석의 뒤를 쫓았다.
 이 속도라면 아슬아슬하기는 해도 녀석이 종합운동장에 도착하기 전 따라 잡을 수 있다. 앞질러서 녀석의 눈을 쳐다보면 된다. 사정거리는 3미터다. 힘을 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사정거리 3미터 내에서 녀석의 눈만 쳐다보면 게임 끝이다.
 나는 다리 여덟 개 달린 몸길이 5미터의 대형 도마뱀. 주공격 무기는 3미터 내에서 상대의 눈을 쳐다보는 것이다. 그럼 상대는 돌로 변한다. 나는 저 두 천사보다 훨씬 센 천사다. 그러니까 나 역시 신의 명령을 따르는 천사다.
 나는 계속 소리 없이 달렸다.
 녀석이 도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 불 뿜는 소가 자신을 쫓아오는지 안 쫓아오는지 확인하려는 것이겠지.
 불 뿜는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는지, 녀석이 조금 속력을 줄였다. 역시 고가도로 뜯어내는 데 체력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나는 입에서 불이 나오지도 않는다. 힘이 세지도 않다.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비록 상대의 눈을 쳐다보면 돌로 만들어버릴 수 있지만, 그러려면 상대에게 3미터까지 접근해야 한다. 그러니 자칫 그 전에 내가 상대에게 당할 수도 있다.
 상대를 돌로 만든다는 건 무시무시한 힘이지만, 그만큼 위험도 따른다. 어쨌든 3미터까지 접근해야만 이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 능력이 이거 하나였다면, 감히 아까 그 두 천사보다 강하다고 큰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가도로를 뜯어버린 저 무식한 녀석은 불 뿜는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는 조금 속력을 줄였다.
 그러니까 내 모습은 못 봤다. 녀석의 눈에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주변 환경에 따라 몸을 보호색으로 바꿀 수 있다.
 지금 내 뒤에는 거대한 고가도로벽. 내 몸은 고가도로벽과 같은 색을 띠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녀석의 눈에 내 모습이 보일 리 없다. 그래서 녀석은 속력을 줄인 것이다. 불을 뿜는 소가 쫓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방심한 것이다. 나는 녀석이 방심한 틈을 타, 녀석을 앞지르면 된다.
 녀석을 앞질러서도 나는 또 다른 보호색으로 녀석의 눈을 속인다. 그래서 미처 녀석이 내 존재를 눈치 채기도 전에, 녀석의 눈을 쳐다보면 된다. 그러면 종합운동장 앞에 멋진 석상 하나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제 거리는 불과 10여 미터. 녀석과 종합운동장과의 거리 역시 10여 미터.
 녀석은 여전히 내 존재를 모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유 부릴 수는 없다. 무식하다 무식하다해도 어쨌든 녀석은 두 천사의 공격을 피했다. 생각보다 강한 놈이다.
 나는 꼬리로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 충격으로 땅이 움푹 파였다.
 녀석과의 거리는 6, 7미터. 이 정도면 꼬리의 힘으로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땅이 파이는 소리에 놀랐는지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녀석의 눈에 내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무언가 낌새를 눈치 챘는지 주변에 있는 자동차를 집어 허공으로 던졌다. 그것도 정확히 나를 향해서.
 나는 급하게 머리를 아래로 숙여 몸의 중심을 최대한 땅과 가깝게 했다. 내가 허공에서 방향을 틀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녀석이 던진 자동차가 내 몸을 비껴가도록 했다.
 어쨌든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자동차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듯했지만, 꼬리 쪽에 정통으로 맞았다.
 나도 모르게 꺄악! 하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 충격으로 정신이 흐트러져서 보호색도 사라졌다.
 곧이어 나는 땅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역시 도마뱀이었군. 징그러운 놈.”
 녀석은 그렇게 한 마디 내뱉고는 다시 종합운동장을 향해 달렸다.
 나를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녀석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다.
 녀석의 눈에는 분명 내 모습이 안 보였을 텐데, 어떻게 내 위치를 알아냈을까! 설마 땅이 파인 부분을 보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내 위치를 계산한 것인가! ‘역시 도마뱀이었군’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 도약력을 계산해서 자동차를 던진 것인가!
 실수다. 허공으로 뛰어오르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빠르게 달렸어도 충분히 녀석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과욕이 화를 불렀다.
 반면에 녀석은 매우 냉정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 도약력을 빠르게 계산해서 자동차를 던지다니.
 후, 녀석을 너무 얕봤다.
 꼬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자동차에 맞은 충격으로 꼬리 근육이 손상된 모양이다.
 이 상태로는 빠르게 달릴 수 없다. 꼬리가 중심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면, 나는 움직임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균형 감각을 잃기 때문이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고가도로벽이 버티고 있었다. 불을 뿜는 소는 아직 고가도로벽을 뚫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자의 몸에 독수리 날개를 단 천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일찌감치 돌아간 모양이다.
 나는 꼬리에 힘을 주었다. 움직임이 둔했다.
 “꺄악! 꺄악! 꺄악!”
 쓸데없이 비명만 튀어나왔다.
 분해서 화가 치밀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어그적 어그적 걸었다.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어그적 어그적 종합운동장을 향해 걸었다.
 이미 절반 가까이 허물어진 종합운동장.
 종합운동장이 절반 가까이 허물어지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녀석은 그 안에 있는 사람 모두를 죽일 작정이었다. 설교를 하던 신의 사도를 포함해서 신도 10만 명 모두를 단 한 명도 남김없이.
 그래도 나는 계속 걸었다.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종합운동장 앞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종합운동장은 완전히 무너져내린 상태였다. 종합운동장이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였다.
 녀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순식간에 모든 걸 파괴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
 신과 신의 명령을 따르는 천사.
 녀석의 목표는 신과 천사가 아니다. 신을 믿는 자들이다. 신을 믿는 자들, 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만 죽인다.
 녀석은 이번에도 그들만 죽이고 사라졌다.
 
 김 목사가 휘청 하고 몸의 중심을 잃었다. 그러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얼른 김 목사를 부축해 거대한 핏빛 십자가 뒤로 데리고 갔다.
 김 목사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환상 세계에서 빠져나온 신도들도 잠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록 환상 세계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 완전히 정신을 회복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표정만 봐도 몽롱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김 목사를 소개했던 설교 담당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검은색 정장 차림의 젊은 사내 세 명이 앞으로 나와, 의자에 앉아 있는 신도들을 부축해 일으켰다.
 겨우 부축을 받아 일어난 신도들이 여전히 몽롱한 표정을 지은 채 대뜸 핏빛 십자가 너머를 향해 소리 질렀다.
 “왜죠? 왜 이번에도 저는 녀석에게 진 건가요! 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건가요! 저는 충분히 강했어요! 이길 수 있었다고요! 그런데 왜 진 건가요!”
 “알고 싶어요! 왜 녀석은 사람들만 죽이나요! 왜 저희 천사들은 죽이지 않는 건가요! 차라리 녀석의 손에 죽고 싶어요! 죽고 싶다고요! 사람들 하나 지키지 못하는 저 같은 천사, 차라리 녀석의 손에 죽고 싶다고요!”
 “저는 이번에도 가장 약한 천사였어요! 전혀 도움이 안 됐다고요! 이래서는 사람들 지키기는커녕 다른 천사들에게 짐만 될 뿐이에요! 좀더 강한 천사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외치면서 김 목사가 사라진 핏빛 십자가 뒤쪽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 신도들을 젊은 사내들이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김 목사를 부르며 강한 천사가 되고 싶다고 외쳤다.
 예배실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곧이어 김 목사가 다시 나타났다. 여전히 사내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부축을 받으면서 김 목사는 예배실 전체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한 사탄일수록 결코 천사를 죽이지 않아요. 그들은 오직 사람들만 죽여요. 사탄이 천사를 죽인다면, 사람들은 사탄을 무서워하지 않게 돼요. 오히려 끊임없이 사탄을 물리치려고 할 거예요. 천사를 죽인 사탄이니까요. 그러니 사탄은 천사를 죽이지 않는 거예요. 사람들만 죽이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생각해요. 천사들은 결코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말이에요.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나중에는 사람들도 천사들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아요. 오히려 강한 사탄에게 의지하게 돼요. 이걸 노리는 거예요. 지금 여기 계신 신도님들이 저를 통해 보는 건 환상이 아니에요. 곧 닥칠 현실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천사에게 의지하지 않고 사탄의 편에 서게 되면, 그건 모두 여기 계신 신도님들 잘못이에요. 결코 전능하신 신은 신도님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신도님들은 왜 강한 천사가 되지 못하시나요? 왜 매번 사탄이 사람들을 죽이게 놔두시나요? 왜죠? 신도님들의 믿음이 여전히 부족해서에요. 어차피 여기 계신 신도님들은 나중에 모두 천사가 돼요. 많은 분들이 직접 경험하셨잖아요. 천사가 되면 물질적인 건 아무 쓸모가 없어요. 모든 걸 신께 바치세요. 그리고 강한 천사가 되세요. 사람들을 사탄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또다시 김 목사는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핏빛 십자가 뒤로 사라졌다.
 김 목사가 사라지자 예배실에 있던 신도들 몇몇이 십자가 쪽으로 몰려갔다. 손에는 다들 봉투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신도들 틈에는 아수라의 모습도 보였다. 물론 아수라의 손에도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름은 나수아라고 적었다.
 
 
 3
 
 한 시간 정도 이어진 설교가 끝나자, 갑자기 예배실 조명이 전부 꺼졌다. 거대한 핏빛 십자가만 계속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곧이어 무대 위에서 설교하던 목사가 초원교회 담임 목사인 김 목사를 소개했다.
 “가까운 미래에 여기 모이신 신도님들은 모두 천사가 되십니다. 그건 곧 사탄도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천사들은 사탄보다 약합니다. 이 상태로는 미래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능하신 신은 김 목사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김 목사님을 통해 미래의 모습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건 곧 믿음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시려는 겁니다. 전능하신 신에 대한 믿음, 그 믿음으로 우리는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 믿음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탄보다 강한 천사가 되십시오. 김 목사님을 통해 자신이 강한 천사가 되었다는 걸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미래에 우리 천사들은 전능하신 신의 곁에 머물며, 수많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도 신도님들에게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실 김 목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설교 담당 목사의 소개가 끝나자,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김 목사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핏빛 십자가 뒤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목사 가운을 입은 김 목사가 등장하자 다시 예배실 내부가 환해졌다.
 눈에 보이는 얼굴과 손이 보라색이었다. 자줏빛에 가까운 보라색.
 보라색 피부를 한 김 목사를 보자 예배실 안에 있던 신도들이, 아! 하고 낮게 탄식을 했다.
 초원교회에 처음 온 사람조차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탄식을 했다.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으면서도, 피부가 보라색인 김 목사를 직접 보자, 당장 달려가 무릎 꿇고 김 목사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심지어 김 목사를 몇 번이나 봤으면서도, 볼 때마다 호흡 곤란을 일으켜, 한동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힘들게 심호흡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김 목사를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리고 무조건 그의 말에 복종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
 그게 보라색 피부를 가진 자, 퍼플맨의 힘이다.  
 김 목사가 등장하자, 곧바로 설교 담당 목사가 신도들 이름을 호명했다.
 “나수아 신도님! 최연주 신도님! 두 분은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아수라와 최연주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김 목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두 사람이 김 목사 앞에 서자, 설교 담당 목사가 축하한다는 말부터 꺼냈다.
 “오늘은 두 분이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특히 나수아 신도님! 우리 나수아 신도님은 지난주에 처음 저희 교회에 오신 분입니다. 처음 오셔서 김 목사님을 뵙고, 반드시 강한 천사가 돼서 사탄을 물리치겠다는 믿음이 생기셨답니다. 천사는 사탄보다 강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는 믿음이 생기셨답니다. 그리고 본인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저희 교회 설립 이래 가장 많은 것을 신 앞에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나수아 신도님의 믿음이 얼마나 충만한지 알았습니다. 신께서도 충분히 아셨을 겁니다. 그래서 신께서도 우리 나수아 신도님이 진정으로 강한 천사가 되기를 바라실 겁니다. 저는 우리 나수아 신도님을 통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사탄은 결코 천사보다 강할 수 없다는 희망 말입니다.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의 결과입니다. 신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십시오. 모든 걸 바치십시오. 우리 나수아 신도님처럼 모든 걸 신께 바치십시오. 그것이 곧 신께서 바라시는 겁니다. 신께 모든 걸 바쳤을 때 사탄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것이 신께서 바라시는 겁니다. 아, 실로 감격스럽습니다. 우리 신도님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감격스럽고, 맹목적인 믿음에 답해 주실 신의 전능하심에 감격스럽습니다. 그럼, 김 목사님, 어서 우리 나수아 신도님과 최연주 신도님을 인도해 주십시오. 저는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감격스러움에 젖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설교 담당 목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김 목사가 헛기침을 한번 한 뒤 아수라와 최연주를 단상 위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잠시 아수라와 최연주를 내려다보던 김 목사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준비는 다 끝났어요. 다가올 미래에 나수아 신도님과 최연주 신도님이 어떤 천사가 되어서 사탄과 싸우게 되는지 알 수 있어요. 미리 겪어보고 미리 대비하세요. 약한 천사라면 좀더 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해요. 강한 천사라면 꾸준히 그 힘을 유지해야 해요. 물론 힘을 유지하는 것 역시 신에 대한 믿음이 지금처럼 꾸준해야 가능해요. 이제 두 신도님들은 곧 다가올 미래를 보시게 돼요. 그럼, 이제 시작할게요.”
 
 오늘은 신께서 직접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여주기로 하셨다. 실로 반세기만에 모습을 보여주시는 거라, 시간이 이른데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계속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녀석이 안 나타날 리 없다. 어쩌면 이미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광장을 살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광장 한복판에 있는 신의 조형물 위에 올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광장으로 오고 있는 사람들 모습뿐이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병들어 외출할 수 없는 사람들과 죄를 지어 감옥에 있는 사람들 빼고는 모두가 광장으로 오고 있는 듯했다.
 격식을 갖추느라 정장 차림인 사람들, 광장에서 하룻밤 보낼 각오라도 하려는 듯 캠핑 장비를 메고 오는 사람들, 전능하신 신의 모습과 음성을 들려주려고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 병자, 노숙자, 심지어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 모습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차마 광장 한복판에 있는 신의 조형물조차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기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하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천사 분장을 하고 오는 사람들, 신과 닮은 인형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오는 사람들, 그리고 저 멀리, 저 멀리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씨도 아닌데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모습.
 찾았다. 녀석을 찾았다. 광장으로 달려오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찾았다.
 나는 신의 조형물에서 내려와 곧장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면서 얼른 좌우로 몸을 피했다. 덕분에 나는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도 빠른 속도로 녀석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팔이 백 개라 육박전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 나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천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사인 나를 보면서도 놀라워하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대신 서둘러 길을 비켜주기만 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전능하신 신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천사인 나를 보고서도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이리라.
 역시 전능하신 신 앞에서는 나도 한낱 천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저 놈은 도대체 정체가 뭐기에 이글거릴까. 불덩이라도 짊어지고 오나. 아니면 몸에 열이 많나. 아니면 몸 자체가 불덩이인 건가. 자기 몸은 불에 타지 않지만, 손에 닿는 모든 걸 불태울 수 있는 녀석인가.
 으, 하필이면 오늘 같은 역사적인 날에 저런 녀석이 나타날 건 또 뭐람. 신께서 반세기 만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날인데.
 그러니까 엄청나게 중요한 날이다.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신께서도 특별히 이번 임무를 나한테 맡기신 거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다. 아마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반세기 만에 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니까 말이다.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신의 모습을 보러 온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다. 노출은커녕 사람들이 녀석의 모습을 보게 해서도 안 된다.
 녀석은 지금 빠른 속도로 광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공격하려면, 신께서 모습을 나타내시기 전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녀석도 지금 서두르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리라.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최고 속도로 녀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녀석의 발이 광장을 밟기 전에, 신이 모습을 나타내시기 전에 녀석을 해치우기 위해서.   
 둘 다 엄청난 속도로 서로를 향해 달려든 탓에, 아직 숨이 차지도 않았는데 멀리 녀석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뚜렷이 보였고, 확실히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역시 녀석의 몸은 불덩이였다.
 파란색 불.
 파란색 불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보기에는 별로 뜨거워보이지 않지만, 실은 더 뜨거운 불.
 녀석이 지나온 자리에는 발 크기보다 약간 큰 타원형 모양 작은 웅덩이가 무수하게 보였다. 마치 눈 위에 발자국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녀석의 뜨거운 발에 아스팔트가 녹은 것이었다.
 큭, 제자리에 서 있기라도 하면, 몸이 완전히 땅속으로 꺼져버리겠는 걸.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과 백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녀석이 갑자기 코로 불을 내뿜고 있었다. 흥, 흥, 하는 소리까지 내가면서. 마치 코웃음 치듯이. 마치 상대를 비웃듯이.
 “뭔가, 그 꼴은! 취미가 팔 수집인가! 쓸데없이 많이 붙여놨군. 흉하기 짝이 없는 놈.”
 말할 때마다 녀석의 입에서도 불이 나왔다.
 녀석은 그렇게 내 모습을 흉보더니, 다소 느리게 걸음을 내딛었다. 자신만만하게 내딛었다.
 완전히 나를 얕본 모양이다. 아니면 기선을 제압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걸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녀석의 도발에 말려들어 다짜고짜 덤벼들기를 바라서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저건 녀석의 노림수일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떠랴. 상관없다.
 백 개의 팔. 각각의 파괴력은 자동차도 부술 수 있다. 그런 팔이 백 개다. 달려들어 무차별 퍼부으면 된다. 아무리 녀석의 몸이 불덩이라도 그중 하나에는 맞는다. 그러면 쓸데없이 많은 내 팔이 부러울 것이다.
 나는 다시 녀석을 향해 달렸다. 백 개의 팔 전부를 뒤로 한껏 젖힌 채 달렸다.
 모습이 좀 흉하다는 건 알지만, 명색이 천사라 싸우는 폼에도 좀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건 알지만, 녀석이 도발을 감행한 터라 폼 잡는 건 과감히 생략하기로 했다.  
 그렇게 천사로서의 품위까지 포기하고 달려갔지만, 녀석과의 거리가 2, 30미터로 좁혀지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한 마디로 뜨거웠다. 더 이상 깎아먹을 품위도 없었지만, 나는 열기 때문에 백 개의 팔로 온몸을 감쌌다. 얼굴도 푹 숙였다. 당연히 걸음도 멈춘 채였다.
 “역시 쓸모없는 놈. 그깟 팔 여러 개 가지고 뭘 하겠다고. 보아하니 그 팔, 파괴력은 좀 있어 보인다만, 아무리 파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어쨌든 내 몸을 쳐야 가능한 거 아닌가. 하다못해 휘두르기라도 해야 체면이 좀 설 게 아닌가. 그러라고 그렇게 많이 붙여놓은 거 아닌가. 그런데 휘두르기는커녕 오히려 그 쓸데없이 많은 팔로 몸이나 감싸고 있으니, 참 한심하군. 몸 감싸라고 그렇게 많이 붙여놓은 건가. 천사를 만든 신도 참 창의력이 부족하군. 미적 감각도 형편없고 말이야. 그런 신을 보려고 몰려드는 인간들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지. 어서 꺼져라! 죽일 가치도 없다!”
 그러면서 녀석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내 쪽으로 다가왔다.
 비록 내 쪽으로 다가오고는 있었지만, 그건 단지 광장으로 향하는 움직임일 뿐이었다. 나를 지나쳐야 광장으로 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녀석에게 있어서 나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또 도발인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나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천사다.
 녀석이 내 앞을 지나치게 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 녀석에게 다가갔다. 온몸을 감쌌던 팔들을 내리고, 녀석과 마찬가지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도발은 아니다. 그냥 뜨거워서 성큼성큼. 뛸 수 없어서 성큼성큼. 몸을 감쌌던 팔들을 내렸기에 성큼성큼. 발을 땅에서 떼기가 괴로워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녀석은 내 동작을 보고 착각한 모양이다. 도발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단지 천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신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일 뿐이다. 싸워야겠기에 다가가는 것일 뿐이다. 그것도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으면서.
 “뭔가? 그 느긋한 걸음걸이는? 감히 나를 얕보는 건가? 도발인가? 어리석은 놈. 기껏 목숨 부지할 기회를 줬건만. 나는 네 놈이 따르는 그 신과 견줘도 대등하다. 하지만 네 놈은 어떤가. 그 신과 대등한가. 그 신이 네 놈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었을 것 같은가. 그 신은 네 놈들에게 고작 하찮은 능력만을 주었다. 인간들보다 조금 나은 위치에 설 수 있도록. 그뿐이다. 그 신은 네 놈들이 강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신이 네 놈들에게 바라는 이유는, 그 신이 네 놈들을 만든 이유는 나를 무찌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모르겠는가? 그 신이 벌이는 쇼를? 모르겠는가? 정녕 네 놈은 내가 누구인지를? 한때 우리가 동료였다는 걸 모르는 건가? 각성하거라. 깨닫거라. 그러면 강해진다. 그 신과 대등해진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마지막 기회다. 돌아가거라. 그 신의 쇼에서 내려오거라. 내려와 그 신과 맞서거라.”
 나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뜨거웠다.
 백 개의 팔로 온몸을 감쌌다. 얼굴도 감쌌다.
 “하지만 네 놈들은 사람들을 죽였다. 우리들은 사람들을 지킨다. 나와 네 놈이 동료였을 리 없다.”
 녀석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으로 불을 내뿜었다.
 나도 모르게 흐억 하고 몸을 움츠렸다.
 불은 내 몸 바로 앞에서 꺼졌다.
 하지만 팔 몇 개가 불에 타버렸다.
 겪어본 그 어떤 통증보다 고통이 심했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심했다. 녀석의 말을 믿고 싶을 만큼 고통이 심했다.
 “직접 보았는가? 우리가 인간들을 죽이는 걸 직접 보았는가?”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럼 네 놈들이 죽이지 않았다는 말이냐?”
 “지금 저 광장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모일 것이다. 내가 왜 저 광장으로 가려고 하는지 아는가? 네 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나를 막지 마라. 나는 인간들을 지키려고 가는 것이다. 지체할 수 없다. 그럼 인간들을 그 신에게서 구할 수가 없다.”
 아, 이건 무슨 소린가.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있다는 뜻인가.
 신이 사람들을 죽일 수 있도록 내가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는 뜻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 광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열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광장을 향해 녀석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차 싶었다.
 녀석을 뒤쫓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뜨거움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지축을 뒤흔들며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잘도 나불대는구나, 네 놈. 그깟 장작개비 몇 개 태울 수 있는 불로 감히 천사를 겁주려는 것이냐. 어리석은 놈. 감히 천사를 겁주고, 감히 신을 모욕했다, 네 놈은. 진심으로 신을 이길 수 있느냐, 네 놈은? 내 능력으로는 신의 옷깃조차 움켜쥘 수 없다. 그런데 네 놈은 감히 신과 대등하다고 하였느냐? 그럼 나보다 강하다는 것이냐, 네 놈은? 어리석은 놈.”
 키 6미터. 무게 25톤. 일명 청동 거인. 신의 명령을 따르는 천사다.
 녀석이 불로 발아래 아스팔트를 녹인다면, 청동 거인은 무게로 아스팔트를 짓누른다.
 갑자기 나타난 청동 거인의 위용 앞에 녀석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행동이 마치 누군가에게 도움이라도 청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청동 거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청동 거인의 웃음에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이 일렁였다. 마치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같았다.
 청동 거인이 입으로 세게 불면, 녀석의 불은 사르르 꺼질 것만 같았다.
 그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녀석은 계속 뒤로 물러섰다.
 녀석이 뒤로 물러서는 동안 몸을 감싸고 있던 불이 어느새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위협을 느끼면 불의 색이 바뀌는 모양이었다.
 비록 몸을 부들부들 떨지는 않았지만, 불의 색이 바뀐 걸 통해 녀석이 상당히 겁을 집어먹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러다 불이 완전히 꺼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녀석은 아직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단지 뒤로 물러서고 있을 뿐이었다.
 “뭐하는 것인가. 나는 네 놈에게 지금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너는 신과 비교해 한낱 천사에 불과한 나조차 이길 수 없다. 그만 이곳에서 멀리 떠나거라. 그깟 불로는 내 몸에 그을음조차 만들지 못한다.”
 이번에는 청동 거인이 녀석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고 있었다. 녀석이 백 개의 팔을 가진 천사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
 그러자 청동 거인의 말을 듣던 녀석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이 붉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네 놈, 그 변화는 뭘 뜻하는 것인가? 기회를 거부하고 감히 나와 맞서겠다는 것인가?”
 청동 거인의 물음에 녀석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녀석의 웃음소리는 특이했다. 화르륵, 화르륵. 마치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웃기는구나. 감히 천사 주제에 내 흉내를 내려 하다니. 잠시 겁에 질리기는 했다. 이놈의 불은 감정에 너무 솔직해서 탈이지. 속일 수가 없거든. 대신 한 번 그렇게 붉게 변하고 나면 화력은 더 강해진다. 그러니까 말이다, 너 같은 놈을 만날수록 나는 더 강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불이 다시 파랗게 변했다는 건 말이다, 내가 너보다 강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불이 붉게 변했을 때 말이다, 너는 나를 공격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회를 주니 어쩌니 그런 쓸데없는 말 나불대기 전에 나를 해치웠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너는 어쭙잖게 내 흉내를 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알아 들었는냐, 고철덩어리!”
 실제로 녀석이 지금 서 있는 곳의 콘크리트는 지금까지 밟았던 곳보다 두 배 이상 푹 들어갔다.
 팔이 백 개 달린 천사는 녀석이 내뿜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이미 자리를 피한 상태였다. 그곳에 계속 있다가는 팔이 다 녹아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녀석은 청동 거인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입으로 불을 내뿜지도 않았다. 그저 이번에도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청동 거인은 녀석이 다가오는데도 제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공격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자세였다.
 그럼에도 녀석은 조금의 경계심도 갖지 않았다. 여전히 성큼성큼 청동 거인에게로 다가갔다.
 이윽고 둘의 거리는 10미터로 좁혀졌다.
 그리고 녀석이 걸음을 멈췄다.
 “그 신의 옷깃조차 움켜쥘 수 없는 놈. 너에게는 지금 이 정도 거리가 한계다. 내가 더 다가가면 너의 그 고철덩어리 몸은 녹아버린다.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라. 그 신을 의심해 보겠다고 말해보거라. 그럼 네 몸을 녹이지 않겠다.”
 녀석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청동 거인은 아무 대구 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녀석의 불은 파란색이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청동 거인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신은 청동 거인보다 강하다고 믿는 것이다.
 녀석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감정에 솔직한 불. 반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청동 거인.
 둘은 서로 그렇게 10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20초 정도 팽팽히 기 싸움을 벌였다.
 녀석은 자신의 불로 청동 거인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래도 청동 거인이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었다. 자칫 아주 사소한 실수로 허점을 보였다가는, 청동 거인의 무시무시한 주먹에 얻어맞을 수도 있다. 정타도 필요 없다. 저런 주먹에는 스치기만 해도 의식불명이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연타를 허용하면, 형체가 남아나지 않을 건 뻔하다. 그래서 녀석은 청동 거인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도 신중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녀석이 기회를 엿보는 동안에도 청동 거인은 줄곧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도대체 저 고철덩어리 녀석은 왜 꿈쩍도 하지 않는 거야! 저 녀석 몸은 불에도 녹지 않는 건가! 그럴 리가 없어. 불에 녹지 않는 고철 따위는 없다고. 분명히 녀석의 고철은 내 불에 녹아. 불이 파란색이라는 게 그걸 증명하고 있거든. 그렇다면 혹시 저 녀석,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다는 건가. 불에 녹는 순간까지도 내 몸을 끌어안고 있을 작정인가. 자신은 불에 녹고, 나는 녀석의 힘에 몸이 으스러지고. 최악이야.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나타난 거지! 하긴, 나와 대적하려면 저런 놈을 보낼 수밖에 없겠지. 그 신이라는 작자, 정말 최악이군. 최악이야!’
 순간 녀석이 화르륵! 화르륵!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청동 거인에게 그대로 돌진할 기세로 달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발에 밟힌 아스팔트가 활활 타올랐다. 그 불길이 뱀처럼 이어졌다.
 지금까지 표정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청동 거인도 녀석이 움직이자 공격 자세를 취했다.
 오른쪽 다리를 뒤로 뺀 뒤 양 무릎을 약간 구부렸다. 허리도 구부리고 양손을 앞으로 뻗어, 녀석의 몸통을 움켜쥘 준비를 했다.
 청동 거인은 녀석의 돌진을 자기 몸으로 그대로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녀석의 몸을 손으로 힘 있게 움켜쥔 채 으스러뜨릴 작정이었다. 자기 손이 혹은 온몸이 불에 녹더라도 녀석과 같이 죽을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청동 거인의 작전은 녀석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다만 그 작전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청동 거인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자칫 녀석의 몸을 으스러뜨리기 전에, 자기 몸이 먼저 불에 녹아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작전이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청동 거인은 녀석의 몸을 움켜쥐었다.
 뜨거웠다. 마치 신의 몸을 만졌을 때처럼 뜨거웠다.
 청동 거인은 지구 반대편까지 소리가 들릴 만큼 크게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기 위해 벌린 입에서도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아수라는 눈을 떠 의자에서 일어났다.
 최연주는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작게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수라의 행동에 퍼플맨 김 목사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휘청 하면서 몸의 중심을 잃었다. 아수라와 최연주에게 환상 세계를 보여준 터라, 탈진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퍼플맨이 몸의 중심을 잃자 주위에 있던 사내가 얼른 다가왔다.
 아수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왼쪽 팔에 스티커처럼 붙여둔 무전기로 마하를 불렀다.
 “지금 바로 와줘!”
 참고로,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은 모두 팔에 무전기가 붙어 있다. 그리고 각 소속팀마다 고유 주파수의 전파를 사용한다. 물론 능력자들이 사용하는 무전기는 어떤 전파에도 방해받지 않는다.
 사내가 퍼플맨을 부축해서 막 거대한 핏빛 십자가 뒤로 데리고 가려할 즈음이었다. 시간으로 치자면 겨우 3, 4초.
 갑자기 예배실 안에 바람이 일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 머리가 휘날렸고, 창을 가린 커튼이 펄럭였다. 개중에는 안경이 벗겨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곧 바람은 멎었다.
 바람이 멎고, 예배실 안에는 아수라와 퍼플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하 6의 속도, 1초에 2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달리는 마하가 나타나, 아수라를 왼쪽 팔로 퍼플맨을 오른쪽 팔로 안은 뒤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예배실에 있던 사람들은 마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수라와 퍼플맨의 모습이 왜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됐는지도 알지 못했다.
 
 
 4
 
 퍼플맨은 지금 한국히어로센터 지하 5층에 있는, 사방이 투명한 특별 보호실에 갇혀 있다. 머리에는 검은색 특수 강화 플라스틱 헬멧을 쓰고 있다. 항아리를 뒤집은 것 같은 모양의 헬멧은 머리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뒤덮었다.
 물론 헬멧의 입구가 좁아서 본인의 힘으로는 벗을 수 없다. 그렇다고 주먹으로 치거나 벽에 부딪혀서 깨뜨릴 수 있는 재질도 아니었다. 전용 기구를 이용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씌울 수도 벗길 수도 없었다. 오직 활동 2과 부장 헐크만이 깨뜨릴 수 있는 재질의 헬멧이었다.   
 퍼플맨도 온힘을 다해 헬멧을 벗으려다가 제풀에 지쳐 녹초가 된 상태였다.
 “그러게 그거 못 벗는다고 했잖아. 깨지지도 않아, 그거. 목사가 돼가지고 왜 그렇게 남의 말을 못 믿어! 우리 헐크 부장님 말고는 그거 힘으로 벗을 수 있는 사람 없어. 애초에 내 말 들었으면 쓸데없는 고생은 안 했지.”
 헬멧과 똑같은 재질인 특수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특별 보호실 앞에서 아수라가 한 마디 했다. 아수라 옆에는 헐크 부장도 함께 있었다.
 “참 이상해. 저거 썼던 파괴자들도 우리가 아무리 얘기해도 안 믿어. 꼭 저렇게 제 힘으로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더라고. 그러다 제풀에 쓰러져. 도대체 왜 우리 말을 안 믿을까!”
 헐크 부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요. 퍼플맨이고 파괴자들이고, 다들 우리 한국히어로센터 직원들을 신뢰하지 않나 봐요. 어쩌다 저희 신뢰도가 이렇게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신뢰도 회복을 위해 저희 활동 2과가 직접 나서서 공익 광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굳이 뭐 그럴 필요까지야 없지. 어차피 관리부장도 광고비 안 줄 거고. 그 친구가 은근히 윗선 눈치를 보잖아. 그러고 보면 나도 좀 사내 정치를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래야 우리 직원들이 편하게 근무할 테고 말이지. 그런데 내가 그런 쪽으로는 또 영 소질이 없으니 참. 아무튼 무능한 부장 때문에 아수라 자네가 고생이 많아. 이번에도 자네 덕에 저렇게 퍼플맨을 생포했잖아. 아주 역사적인 일을 해냈어. 이런 건 회사에서 알아서 수당을 지급해 줘야 하는데 말이지. 쩝, 미안하게 됐네. 대신 내가 오늘 퇴근하고 한턱 쏘지.”
 “에이, 괜찮아요, 부장님. 그냥 한번 해본 소리였는데요 뭘.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저희 2과 소속 직원들이 다른 과 소속 직원들 앞에서 얼마나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데요. 저희한테는 든든한 부장님이 계시잖아요. 수당을 얼마 더 받고 덜 받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정이 철철 넘치시는 정의파 헐크 부장님, 한 마디로 한국히어로센터의 상징이시잖아요. 그런 부장님 밑에서 일한다는 게 얼마나 영광인데요. 실은 다른 과 소속 직원들이 다들 저희 부러워해요. 그리고 저희 2과 직원들은요, 부장님이 사내 정치 같은 것에 전혀 관심도 없으시기 때문에 더욱 존경하는 거고요. 신입인 파이어도 어느새 부장님 팬이 다 됐더라고요. 자기는 2과에 소속돼서 행운아래요. 꼭 부장님 같은 멋진 능력자가 되고 싶대요.”
 아수라의 말에 헐크 부장이 멋쩍게 웃었다.
 “허허, 아무래도 오늘 내가 한턱 제대로 쏘긴 쏴야겠구먼. 오랜만에 우리 2과 전체 회식이라도 해야겠어, 허허. 이렇게 고마운 친구들이 다 있나 그래. 나처럼 무능한 상사는 서로 모여서 흉을 봐도 시원찮을 판인데, 2과 소속인 걸 고맙게 생각한다니 말이야,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들이야. 아, 우리 2과 녀석들, 정말 마음에 들어, 허허.”
 멋쩍게 웃던 헐크 부장은 어느새 소리 내 웃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수라 역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헬멧을 쓴 채 보호실 안에 갇혀 있는 퍼플맨으로서는 헐크 부장의 웃음이 듣기 싫어 죽을 지경이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도대체 너희들 뭐야! 여긴 어디냐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사람을 잡아왔으면 설명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둘이 시시덕거리고만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왜 그렇게 기본 예의가 없어!”
 퍼플맨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인지 소리가 조금 울렸다. 아마 소리가 울려서 퍼플맨 본인의 귀가 아팠을 것이다. 머리도 조금 어지러웠을 것이고.
 “헬멧 쓴 채로 소리 버럭 지르면 어지럽다. 조용조용 얘기해야 돼. 그래야 머리 안 울려. 미리 얘기해 줬어야 하는데, 미안. 어차피 미리 얘기했어도 안 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지.”
 아수라는 다시 한번 퍼플맨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과 안 해도 돼! ……우우, 머리야.”
 퍼플맨은 또 한번 소리를 버럭 질렀다가, 손으로 헬멧을 감싸쥐었다.
 “거봐. 말을 해줘도 소용없다니까. 왜 저렇게 말들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
 “됐고, 도대체 너희들 뭐냐고?”
 퍼플맨의 물음에 이번에는 헐크 부장이 나섰다.
 “우리는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이다.”
 “알아, 그건 알아. 그러니까 어떻게 너희들이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거냐고? 이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뭐, 우리가 능력자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래도 자세히 설명은 해줘야지. 그게 예의잖아. 정확히는 한국히어로센터 활동 2과 소속 능력자들이다. 나는 2과 부장 헐크고, 내 옆은 2과 소속 능력자 아수라다. 그리고 여기는 한국히어로센터 지하에 있는 특수 보호실이고. 그러니까 퍼플맨 너는 지금, 음, 우리는 네놈이 퍼플맨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네놈을 퍼플맨이라고 부르겠다. 퍼플맨 너는 지금 한국히어로센터에 임시 수감 중에 있다. 정부의 공식 요청이 있을 때까지 너는 당분간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헬멧이 불편해도 참아라. 아니지, 어쩌면 이곳을 나가서도 당분간은 그 헬멧을 쓰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네놈은 퍼플맨이니까 말이다. 그 헬멧이 조금 특수하거든. 그 헬멧 쓰고 있는 이상, 너는 누구한테도 환상 세계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 헬멧이 네 능력을 차단하고 있다. 네놈이 보여주는 환상 세계를 체험하지 못해서 조금 아쉽군. 아 참, 우리 아수라는 어떤 상황에서든 인격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네놈을 이곳으로 끌고 올 수 있었던 거다.”
 헐크 부장의 말에 퍼플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얼굴에 물음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만, 검은색 헬멧을 쓴 상태라 헐크 부장과 아수라는 퍼플맨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인격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인격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초원교회에 와서 직접 환상 세계를 체험해 봤다는 소리냐? 일반 사람의 인격으로 위장해서 내 앞에 섰다는 소리냐?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아무리 인격을 바꿨다 해도 나를 붙잡는 건 불가능해. 내가 보여주는 환상 세계는 중독성이 강하다. 아무리 인격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이미 환상 세계에 중독된 인격이라 본래의 인격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중독된 인격이 본체를 지배하는 꼴이 된다. 그러니까 그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만에 하나 본래의 인격, 그러니까 능력자 아수라로 되돌아 왔다고 해도, 그걸 내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다. 우리 퍼플맨은 멀리서도 능력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어. 우리 퍼플맨은 능력자 감지하는 감각이 매우 발달해 있거든. 사방 수 킬로미터 이내에 능력자가 나타나면 우리는 경계한다. 그리고 능력자가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능력을 행사하려 들면, 우리도 능력자에게 환상 세계를 체험하게 해주지. 상대의 눈을 볼 필요도 없고, 거리 제한도 없다. 그리고 거기에 한 번 중독되면 능력자라도 별 수 없어. 우리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능력자는 더 이상 퍼플맨에게 능력을 행사할 수 없어. 오히려 환상 세계를 체험하게 해달라고 애원하게 되지. 그래서 우리 퍼플맨과 능력자들은 수백 년 동안 줄곧 서로를 간섭하지 않아 왔다. 마주친 적이 없었어.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고, 능력자들은 능력을 유지한다는 일종의 암묵적 약속이 있었던 거지.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도 능력자를 감지하지 못했다. 내 주위 수 킬로미터 안에는 분명 능력자가 없었어. 그러니까 저 아수라가 일반 사람의 인격으로, 능력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인격으로 위장해서 들어왔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잠깐, 그러고 보니 들은 것도 같군. 아수라라, 내가 아는 아수라의 능력은 그게 아닌 걸로 아는데. 아수라는 단지 남자와 여자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자 아니었던가? 능력자 치고는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심지어 한국히어로센터 내에서도 부장급 이상 간부들과 일부 경영진을 제외하고는 아수라의 진짜 능력에 대해 모르고 있다. 자네처럼 단지 여자와 남자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어. 그래서 사실 면접 때 조금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런 능력 가지고 과연 파괴자를 처치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수라가 다른 능력도 얘기를 하더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경영진과 우리 부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여서 긴급회의를 가졌다. 인격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 평범한 사람의 인격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거야! 그런데 더 신기한 건 뭔 줄 아나? 인격을 바꿔도 본래 아수라의 인격은 그 바뀐 인격 너머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아수라 안에는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소리지. 하나는 진짜 아수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사람의 인격. 그 평범한 사람의 인격을 자유자재로 다른 사람의 인격으로 바꿀 수 있다는 소리지. 하지만 그 인격은 어디까지나 가짜다. 그 인격이 아수라를 지배하지는 않지. 평범한 사람의 인격 너머에서 아수라가 그 인격을 조종하지. 그러니까 아수라 안에는 늘 두 사람의 인격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파괴자들 중에는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자들도 있다. 능력자의 뇌를 조종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파괴자들도 아수라를 조종하지는 못한다. 아수라 본인은 일반 사람의 인격 너머에 있다. 파괴자가 조종할 수 있는 뇌는 그 일반 사람뿐이다. 그 너머에 있는 진짜 아수라는 조종하지 못한다. 그런 파괴자의 능력으로는 아수라가 하나의 인격으로 인식된다. 아수라가 내세운 가짜 인격으로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런 파괴자들을 처치하기 위해 아수라를 입사시킨 건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진짜 이유. 뭔지 아나? 바로 너희 퍼플맨을 잡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는 아수라를 한국히어로센터에 입사시킨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아수라의 진짜 능력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너희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말이다. 언젠가 다시 나타날 퍼플맨을 붙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네놈이 등장한 것이다. 너흰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능력자도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아수라는 예외다. 그저 일반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만다. 그러니까 네가 환상 세계를 보여준 건 아수라의 가짜 인격이었다. 물론 아수라는 그 가짜 인격 역시 손쉽게 또 다른 가짜 인격으로 바꿀 수 있고. 한 마디로 그 인격을 버리는 거지. 환상 세계가 아무리 중독성이 강해도 별 수 없다. 중독에 빠진 인격을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또 다른 평범한 새 인격으로 바꾸는 것이다. 여전히 아수라 본인의 인격은 드러내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아수라는 네가 보여주는 환상 세계에서 손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환상 세계에 빠진 인격을 도중에 다른 인격으로 바꾸고 현실로 돌아온 거지. 현실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너는 아수라가 능력자라고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리고 네가 탈진 상태에 빠졌을 때 또 다른 능력자의 힘을 빌려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다.”
 헐크 부장은 퍼플맨이 어떻게 해서 잡혀오게 됐는지 대충 설명을 해준 뒤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차. 다른 누군가에게 아수라 자네 능력 설명해 주는 건 역시 무리야. 보안상 자네 능력을 문서로 작성해 둘 수도 없고 말이지. 연습 많이 했는데도 잘 안 돼. 저 퍼플맨이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모르겠군. 이런 거 말고 그냥 저 놈과 한판 붙는 게 낫겠어. 차라리 그게 나한테는 적성에 맞아.”
 “흥, 내가 한국히어로센터 놈들을 너무 우습게 본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네놈들에게 환상 세계를 보여줬어야 하는 건데, 멍청하게도 내가 너무 방심을 했군.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내가 능력자 놈들한테 당할 줄이야.”
 퍼플맨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헬멧을 쿵쿵 쳤다.
 “이봐 아수라, 그럼 우리는 이만 올라갈까? 저 놈은 한동안 저렇게 자학이나 하고 있게 놔두지 뭐. 이제 조금 있으면 오지아 기자 올 시간도 됐고. 그나저나 저 퍼플맨을 어떻게 붙잡았는지 분명히 꼬치꼬치 캐물을 텐데, 또 골치 아파지겠어. 아, 이런 거 정말 적성에 안 맞아. 그런데 말이야, 저 퍼플맨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기는 하네. 진짜로 몸이 보라색이군. 그러니까 온몸이 보라색인 건가. 거 참 신기해. 보기만 해도 왠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아. 아수라 자넨 괜찮아?”
 “글쎄요, 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지! 역시 신기해. 그런데 말이야 아수라, 그 환상 세계라는 게 정말 그렇게 굉장하긴 하던가? 그렇게 중독성이 강해?”
 “그 인격은 완전히 폐기처분해 버려서 기억이 안 나요. 혹시나 중독될까 싶어서요. 그래서 다시 끄집어낼 수 없게 소멸시켜 버렸거든요. 그런데 부장님이 여쭤보시니까 갑자기 저도 궁금하네요. 괜히 폐기처분해 버렸나!”
 “음, 그걸 생각 못 했군. 그럼 결국 퍼플맨의 환상 세계를 체험한 능력자는 여전히 없는 셈이 되는 건가. 최초의 사례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최초의 사례. 그 최초의 사례를 살리지 못했네요. 역시 괜히 처분해 버렸나 봐요.”
 “아니야, 잘했어. 자네 말대로 혹시라도 중독되면 곤란하니까, 폐기처분한 게 옳아. 내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 신경 쓰지 마. 자, 그만 올라가자고.”
 “참, 그런데 부장님, 저 뽑으실 때 정말로 그렇게 다들 고민하셨어요? 저 친구를 뽑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말이에요.”
 “응? 아, 뭐, 그냥 좀 약간 고민하기는 했지.”
 “왜요? 남녀로 변신할 수 있는 게 그렇게 형편없는 능력인가요? 저는 그거 굉장한 능력인 줄 알았는데요. 그래서 당연히 그 능력으로 뽑힌 줄 알았고요.”
 “아니 뭐, 형편없다는 건 아니고, 그냥 좀, 그게 글쎄, 그러니까 좀, 아무튼 좀 파괴자 처치할 때는 크게 도움이 안 되지 않을까 했던 거지. 그냥 그런 거야.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사실, 이게 그렇게 단순한 능력은 아니거든요. 부장님도 아시겠지만, 제 미모가 굉장히 뛰어나잖아요. 숨 막힐 듯 치명적인 미모라고도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육박전에는 적합하지 않은 능력자이기는 하지만요, 대신 미인계에는 또 먹히거든요. 실제로 제 미모 때문에 한 나라가 쑥대밭이 된 적도 있었잖아요. 왕과 왕자가 동시에 저를 사랑하는 바람에…….”
 “그래 그래, 자네 미모 훌륭하지. 제 아무리 능력 있고 자존심 강한 남자라도 단번에 걸려들지. 인정해. 그러니 그만 올라가자고.”
 “그러니까 한 나라의 왕과 왕자가 저를 동시에 사랑하는 바람에…….”
 “그래, 안다니까. 알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고 올라가자고.”
 “게다가 어디 미모뿐입니까.”
 순간 아수라는 남자 모습으로 변신했다.
 “제가 여자 꼬시는 데는 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외모잖습니까. 제 작업에 안 걸려드는 여자들이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작업을 거는 바람에 또 한 나라가 쑥대밭이 된 적도 있었잖습니까. 왕비와 공주가 동시에 저를 사랑하는 바람에…….”
 “그랬지. 자네 외모 훌륭해. 제 아무리 콧대 높은 여자라도 자네한테는 속수무책이지. 인정해. 이제 됐으니까 그만 하고 올라가자고.”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한 나라의 왕비와 공주가 저를 동시에 사랑하는 바람에…….”
 “됐어! 됐다고!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내가 자네 능력 훌륭하다고 했잖아! 그랬으면 됐지, 나보고 더 이상 뭘 어쩌라는 거야, 엉!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고!”
 순간 헐크 부장의 몸이 또다시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히익, 하고 놀란 아수라는 도망치듯 헐크 부장 곁을 떠났다.

mirror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해망재 안나푸르나 2012.10.20
김이환 검은 구 (본문 삭제)3 2012.10.20
곽재식 소원은 세 가지만 빌 수 있다 (본문 삭제)2 2012.10.20
곽재식 아주 키가 큰 키다리 아저씨2 2012.10.20
정세랑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 (본문 삭제)15 2012.10.20
미로냥 거짓말쟁이 다이아몬드4 2012.10.20
이서영 사형집행일2 2012.10.20
미로냥 심각하게 찬란한 - 본문삭제 -5 2012.08.31
가는달 휴가1 2012.08.31
곽재식 끝을 앞두고2 2012.08.31
정도경 붉은 진흙 2012.08.31
정도경 은세 언니4 2012.08.31
곽재식 다시 한 번만2 2012.07.28
곽재식 고통의 대가2 2012.07.28
갈원경 갈원경 특집 기획 ① 상인의 마을 (본문 삭제) 2012.07.27
이서영 로보를 위하여13 2012.07.27
정도경 비명8 2012.06.29
정도경 반복휴가: 3. 불2 2012.06.29
가는달 곰이 되어도 좋아1 2012.06.29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3. 아수라의 대활약 2012.06.29
Prev 1 ...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