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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네 사람

2012.02.24 23:0702.24

 



 1
 
 초인종을 누르자 곧바로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하도 작아서 현관문에 귀를 갖다대고 들어야 할 정도였다.
 “백 실장님이신가요?”
 “네, 백 실장입니다.”
 곧이어 현관문을 열고 전임실장이 나왔다.
 딱 보기에도 며칠째 머리를 감지 않았다.
 차림새도 흉했다.
 무릎이 툭 튀어나온 파자마 바지에 누런 러닝셔츠 차림이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으리라.
 “이렇게 집으로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통 바깥출입을 안 해서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오히려 저한테 연락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그럼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집안을 좀 치웠어야 했는데, 마음이 망가지니까 집안 청소도 잘 안 하게 되네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전임실장은 현관문을 좀더 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백 실장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말한 뒤 집안으로 들어섰다.
 음식 냄새, 쓰레기 냄새, 화장실 냄새, 담배 냄새, 땀 냄새. 온갖 냄새가 뒤섞여서 한꺼번에 백 실장의 코로 들어왔다. 순간 백 실장은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집안에서 악취가 난다는 걸 표정에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백 실장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전임실장이 얼른 앞장을 서서 걸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잠시 여기 소파에 앉아계시겠어요?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백 실장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소파 있는 곳까지 갔다. 거실 바닥에 맥주라도 쏟았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에서 끈적끈적한 느낌이 전해졌다.
 소파 위에 있는 이불을 한쪽으로 치우고 살며시 앉았다.
 엉덩이에 온기가 느껴졌다.
 자신이 올 때까지 전임실장은 줄곧 소파에 누워 있었으리라.
 그 생각을 하니 왠지 좀 찝찝했다. 소파에 신문지라도 깔고 나서 앉고 싶었다.
 전임실장이 양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들고 왔다.
 한 손에는 투명한 컵, 한 손에는 캔맥주.
 투명한 컵에는 주스가 담겨 있었다.
 전임실장은 주스를 백 실장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캔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백 실장은 잠시 컵에 담긴 주스를 내려다보았다.
 마셔야 하나. 주스는 보나마나 냉장고에 보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싱크대 위에 대충 올려놨겠지. 뚜껑도 닫지 않은 채로. 어쩌면 유통기한이 지났을 수도 있다. 차라리 저 캔맥주가 나을 뻔했다.
 “우선 주스부터 한모금 드시죠. 목마르실 텐데.”
 “네, 감사합니다.”
 백 실장은 전임실장의 말에 그저 ‘감사합니다’란 말만 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대신 마지못해 상대의 요구에 응할 때에도 쓰인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역시 주스는 미지근했다. 하지만 상한 것 같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임실장이 다시 맥주를 한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실은 며칠 전에 용기를 내서 사장님한테 연락을 드렸습니다. 제 후임으로 오게 될 실장님한테 인수인계도 못 해드리고 갑자기 퇴사해서 죄송한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후임으로 오실 실장님한테 꼭 전해드려야 할 얘기도 있었고요. 그래서 사장님한테 일단 멋대로 퇴사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화내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하시더군요. 그때 눈치챘습니다. 벌써 후임실장을 뽑았구나, 하고요. 만일 아직 후임실장을 구하지 못했다면 화를 많이 내셨을 겁니다. 무책임하다고 욕도 하셨을 거고요. 욕먹을 각오 하고 전화드렸던 겁니다. 그 다음에 용건을 말씀드리려고 했지요. 다행히 후임실장을 구해서 욕은 먹지 않았습니다. 아니, 다행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뭣하지만, 그 회사 기획실이 좀 이상한 곳이라서요.”
 전임실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전임실장이 다시 입을 열 동안 백 실장은 여전히 불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주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사장님도 제가 왜 회사를 그만 뒀는지 모르고 계십니다. 물론 제가 아무 말씀도 안 드리고 갑자기 그만 둔 것도 있겠지만, 사장님은 그런 거 전혀 궁금해하지 않을 분이십니다. 저야 어떻게 되든 회사만 잘 돌아가면 상관없다고 여기실 겁니다. 그래서 평소 기획실 분위기에 대해서 사장님께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말씀드려 봐야 저만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테니까요. 그래서 쭉 참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결국 회사를 그만 둔 겁니다. 후후, 제가 불과 며칠 전까지 계속 잘 때 악몽을 꾸었습니다. 잠드는 게 무서울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래서 잠 안 자려고 버티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회사 그만 두고 며칠 지나니까 상태가 좀 나아지더군요. 오히려 요즘은 툭하면 졸리니 그게 더 문젭니다. 그리고 여전히 바깥출입이 좀 힘들기는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으로 봅니다. 어쨌든 사장님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후임실장은 정해졌냐고 말씀드렸더니,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까지도 사장님은 저한테 왜 회사 그만 둔 거냐고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좀 섭섭하기는 했습니다. 사장님도 제가 갑자기 회사 그만 둔 것 때문에 화가 나셨을 거고, 저 역시 사장님이 왜 회사를 그만 둔 거냐고 묻지 않으셔서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전화를 끊을까 하다가, 이왕 하기로 마음먹은 거니 다른 생각은 갖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그냥 전화를 끊으면, 제 후임으로 오는 실장은 저와 똑같은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솔직히 회사야 어떻게 돌아가든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사장님이 제 걱정을 안 하듯 저도 회사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요. 다만 제 후임으로 오게 될 실장님이 염려됐습니다. 제가 침묵하면 후임실장님도 저와 똑같은 일을 당하실 테니까요. 그건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말없이 회사를 그만 뒀으니, 조금이나마 책임을 지고 싶다고요. 후임실장한테 업무 인수인계를 해주고 싶다고요. 사장님은 그러라고 하시더군요. 목소리가 약간 밝아지셨습니다. 다행히 후임으로 오게 될 실장도 그동안 다른 회사에서 종교 행사 기획을 쭉 해온 사람이라 별 무리 없이 기획실을 이끌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 우리가 맡고 있는 기획에 대한 전체적인 진행 상황 정도는 제가 직접 알려주는 것도 나쁠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이나마 사장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을 덜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후임실장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사장님이 안 알려주시더군요. 제가 무슨 다른 마음이라도 먹고 있는 거 아닌가 의심하신 모양입니다. 아직 회사에 출근도 안 한 사람한테 회사 흉을 본다든지, 그 회사 안 좋으니까 나가지 말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니면 단지 자기가 비록 사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개인 연락처를 함부로 남한테 알려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연락처를 안 알려주시더군요. 대신 후임실장이 출근하는 날 저보고 회사에 나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시더군요. 직접 회사에 나와서 후임실장한테 업무 인수인계를 해주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그래서 그랬지요. 제가 지금 외출을 못할 만큼 몸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그러시더군요. 그럼 일단 후임실장 첫 출근하면 기획실로 직접 전화해 보라고요. 그러고 나서 후임실장이랑 어떻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면 좋을지 상의해 보라고요. 그래서 알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더 이상 사장님과는 할 얘기가 없었으니까요. 사장님도 마찬가지였을 거고요.”
 “그래서 오늘 저한테 전화를 주신 거군요.”
 “네. 연락처를 모르니 미리 연락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백 실장님 첫 출근하는 날 기획실장 직통 번호로 연락을 드린 겁니다. 조금 당황하셨을 겁니다.”
 “아닙니다. 실은 그 전에 사장님한테 연락을 받았습니다. 전임실장이 제가 출근하는 날 연락을 해올 거라고요. 그래서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비록 같은 계통 일을 쭉 해오긴 했지만, 그래도 당장 이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기획이 있을 텐데, 아무래도 기획실 직원들한테 보고를 받는 것보다 전임실장님한테 얘기를 듣는 게 훨씬 도움이 되지요. 직원들은 자기가 맡고 있는 부분만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걸 전체적으로 설명해 줄 사람이 없어서 좀 당황스럽기는 했습니다. 사장님도 잘 모르시더라고요.”
 “네. 실은 사장님이 회사 일을 잘 안 챙기세요. 아무리 보고를 드려도 그냥 그걸로 끝입니다. 전적으로 부서장한테 맡기는 타입이십니다. 그게 좀 편할 때도 있고 불편할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참, 그런데 어떻게 후임실장으로 오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혹 평소 사장님과 친분이라도 갖고 계셨던가요?”
 “아닙니다. 사장님과 친분 관계는 없습니다. 대신 명진기획 직원 중에 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명진기획 기획실 실장 자리가 공석이라고, 한번 명진기획 사장님과 통화를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직접 사장님께 연락을 드린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전임실장은 다시 맥주 캔을 집어들었다.
 맥주가 비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이번에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여섯 개짜리를 통째로 들고 왔다.
 “백 실장님도 주스 대신 맥주 한잔 하시겠어요?”
 “네, 좋습니다. 안 그래도 좀 목이 말라서 시원한 걸 마시고 싶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이번 감사 인사는 진심이었다.
 대신 전임실장이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맥주를 뺏어서 찡그린 건가, 아니면 왜 안 시원한 주스를 준 거냐는 말로 들려서 찡그린 건가.
 백 실장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캔맥주를 하나 집었다. 그러고는 시원하게 한모금 들이켰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악취도 적응이 된 것 같고, 불편했던 소파도 그나마 편히 앉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정말 외출을 못 하실 정도로 몸이 안 좋으신가요? 사장님한테 지금 전임실장이 몸이 많이 안 좋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전임실장님께서 당연히 회사로 오실 줄 알았거든요. 아니면 사장님 뵙기 껄끄럽다며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직접 집으로 와주면 안 되겠냐고 하시기에 좀 당황했습니다.”
 “네, 그러셨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말씀드리기까지 한참 망설였으니까요. 혹시라도 백 실장님이 집으로는 못 오겠다고 하시면 저로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회사에는 갈 수 없습니다. 당연히 회사 근처에도 갈 생각이 없고요. 그런데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하시니 당연히 제가 찾아뵈어야지요. 그런데 저기, 회사에 못 오시는 이유가 혹시 몸 안 좋으신 것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으신 겁니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좀 예리하시네요. 맞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실은 그것 때문에 몸이 안 좋아진 겁니다.”
 “그 다른 이유라는 게 업무 인수인계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습니까? 지금 진행하고 있는 기획에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기획은 전혀 문제없습니다. 사실 뭐 업무 인수인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쓰던 컴퓨터에 저장된 업무 관련 파일들만 꼼꼼히 읽어보셔도 지금 진행 중인 기획은 별 무리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뭣 때문에 저를 집까지 부르신 건지요? 실장님 얘기를 듣다 보니 좀 이해 안 가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백 실장님 보기에 지금 제 모습이 어때 보이세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상처 안 받습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일단 백 실장은 맥주부터 한모금 마신 뒤 잠시 뜸을 들여 입을 열었다.
 “뭐 그냥, 어쨌든 사장님께서도 전임실장이 지금 몸이 좀 안 좋다고 하셨으니까요. 실제로 실장님을 뵈니까 정상적인 컨디션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동안 외출도 안 하신 것 같고, 줄곧 집에 누워만 계신 것 같고, 그렇다고 약봉지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병원에 다니시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일종의 무기력증 같은 것에 빠지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아마 그동안 회사 일에만 너무 매달리셔서 심신이 좀 지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기력증이라, 글쎄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건 사실입니다.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실은 정신이 피폐해졌습니다. 사장님께는 몸이 안 좋다고 말씀드렸지만, 물론 결과적으로 몸도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만, 몸이 이렇게 망가진 건 결국 제 정신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전 이제 외출할 용기도 없고 음식을 먹을 의욕도 없고 몸을 치장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잠들 뿐입니다. 그나마 요즘은 잠이라도 푹 자니 다행입니다.”
 “확실히 업무 인수인계 때문에 절 부르신 게 아니군요. 그렇다고 지금 실장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부르신 것도 아니고요. 왜 저를 오라고 하신 거죠? 제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업무 인수인계 때문에 백 실장님 오시라고 한 거 아닙니다.”
 전임실장은 다시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요즘은 밥 대신 맥주로 허기를 달랠 것이다. 그 모습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는데.
 “저기, 백 실장님, 혹시 명진기획 안 다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몇 백억 원을 준다고 해도 저는 안 갑니다. 제가 망가진 게 명진기획 기획실 때문이니까요. 지금 제가 외출을 마음 편히 못 합니다. 동네 슈퍼마켓 가는 것도 아주 힘듭니다. 한 번 갔다오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습니다. 제 상태가 이렇습니다. 이게 다 명진기획 기획실 때문입니다. 그냥 다른 회사 알아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백 실장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전임실장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분명 명진기획 기획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온갖 스트레스를 받았으리라.
 업무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원형탈모에 걸린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특히 기획실 업무는 타 부서보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더 심하다. 한 마디로 뜬구름 잡는 업무. 그게 기획실 업무다.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다.
 회사 성격에 맞는 기획을 정해야 하고, 그 기획안을 사장을 비롯해서 타 부서장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일일이 기획에 대한 취지와 이 기획으로 인해 얻게 될 득을 설명 혹은 설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통과가 됐다고 하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다. 기획을 추진시키려면 많은 외부 인사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들을 또 설득해야 한다. 온통 머리싸움이다. 누구 하나 이 기획으로 인해 피해 볼 것을 먼저 생각한다. 그런 그들을 설득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당연히 설득 과정에서 혹시 내 기획이 애초에 잘못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럼 나 자신까지도 설득해야 한다. 매번 피말리는 작업의 연속이다. 그러다 결과적으로 기획했던 게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면 그 상실감은 엄청나다. 사람들한테 욕먹는 건 둘째 문제다. 회사에 금전적인 손실과 이미지에 타격을 입힌 것도 둘째 문제다. 내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기획도 어디까지나 운이 따라줘야 하지만, 능력이 뒷받침 돼야 운도 따르는 법이다. 애초에 운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면 다음부터는 제대로 된 기획, 소신 있게 밀어붙일 수 있는 기획은 만들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은 낙오자가 돼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이 전쟁터다. 죽지 않으려면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딴 생각 할 겨를이 없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요구하는 게 뭔지 파악해야 한다. 그런 공부 정말 힘들다. 단 하루도 머리를 비우고 멍청하게 쉴 수 없다. 물론 매일 멍청하게 사는 기획실 직원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타 부서에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빼고 하는 얘기다.
 아마 전임실장은 기획에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자기 분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많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 대한 공부 이외에 더 중요한 게 있다. 강한 정신력까지 길러야 한다. 안 그러면 망가진다.
 기획에 목숨을 걸었다면, 그만큼 정신력도 강해야 한다. 몇 번의 실패에도 끄떡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강한 정신력까지 길러야 한다. 하지만 지금 전임실장의 행색을 보면 이미 어딘가 무너졌다.
 자기가 기획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 몇 번 좌절감을 맛봤을 것이다. 그걸 강한 정신력으로 현명하게 이겨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약한 정신력이 전임실장의 발목을 잡았다.
 외출할 용기도 없고 음식을 먹을 의욕도 없고 몸을 치장할 이유도 없다.
 전임실장은 연약한 사람이다. 애초에 최고를 꿈꾸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다.
 아마 명진기획이 다른 회사보다 좀더 업무 강도가 세겠지. 그래서 자신이 망가졌다고 생각하겠지. 본래 자신이 연약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업무 강도가 센 명진기획에서 일하게 되면 자칫 나도 자신처럼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 또한 전임실장의 나약함 때문에 나온 걱정이다. 본래 나약한 사람이 타인을 걱정한다. 타인도 자신처럼 나약하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백 실장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전임실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전임실장의 말 같은 건 들을 필요 없다. 자신한테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한마디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뿐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이 집을 나갈 수는 없다. 그냥 상황을 봐서 대충 전임실장의 말을 끊고 나가야 한다. 게다가 시원한 맥주가 참 맛이 좋다.
 “후후, 그 회사, 그러니까 그 회사 기획실 직원들, 좀 이상합니다. 다들 제 정신이 아닙니다.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얘기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장님한테도 말씀 못 드렸습니다. 하지만 백 실장님은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은 당신 같은데.
 이번에는 백 실장이 먼저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루 이틀에 끝날 얘기가 아니니까요. 다시 묻고 싶습니다. 명진기획 말고 다른 회사에 갈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 입사 첫 날부터 실장님한테 그런 얘기 들으니까 좀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사하자마자 다른 회사를 생각한다는 것도 좀 그러네요. 일단 실장님 얘기를 듣고 나서 판단해야겠지만, 그래도 저로서는 새 회사에 입사했으니까 몇 가지 기획 정도는 해보고 그만 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물론 그런 생각이실 겁니다. 아마 제가 지금까지 겪었던 걸 그대로 말씀드려도 백 실장님은 당장 회사 그만 둘 생각이 없으실 겁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래도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조금 일찍 깨닫게 되시겠지요. 그러면 저처럼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있으실 겁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임실장은 캔맥주 하나를 다 비운 뒤 손으로 입을 닦았다.
 본격적으로 말을 꺼낼 태세였다.
 “제가 멋대로 퇴사하기 전까지 명진기획에서 근무한 기간이 1년입니다. 명진기획 들어오기 전까지는 다른 회사 기획실 팀장이었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두 번째 회사였습니다. 두 군데 모두 3년 이상씩 근무했고요. 그러다 명진기획 사장님한테 직접 연락을 받았습니다. 자기 회사 기획실을 맡아달라고요. 그때 제 나이 서른일곱이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두 군데 모두 종교 관련 행사를 진행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진기획 사장님과도 안면이 있는 상태였고요. 사장님이 평소 절 좋게 보셨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제 나이가 아직 서른일곱밖에 안 됐기 때문에 한 회사의 기획실을 책임지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조금 더 일을 배운 뒤 그때에도 다시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요. 하지만 사장님은 쉽게 물러서지 않으시더군요. 끝까지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 팀장이든 실장이든 하는 일은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만 책임감만 조금 더 갖고 일에 임해주면 된다. 어차피 이쪽 계통 일은 이제 다 알지 않느냐. 팀장에 걸맞은 나이가 있고, 실장에 걸맞은 나이가 있고, 그런 게 어디 있느냐. 한 부서를 책임질 만한 능력이 되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마다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겁이 많은 건가, 아니면 일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건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평소 겁이 좀 많은 편이기는 합니다. 겁이 많다기보다는 조금 소심한 편이죠. 그래서 좀 뜨끔했습니다. 역시 사장은 괜히 사장이 아니구나. 한 사람을 보더라도 그 사람의 업무 능력뿐만이 아니라, 성향까지도 파악하고 있구나. 팀장이 돼서 배우는 것, 실장이 돼서 배우는 것, 사장이 돼서 배우는 것이 있구나. 그 위치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로서는 한 번 용기를 내본 겁니다. 기회가 올 때 잡을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시 제가 명진기획 기획실 실장으로 갔을 때, 기획실에 직원이 세 명 있었습니다. 원래 팀장도 한 명 있었는데, 갑자기 시골 본가로 내려가게 됐다면서 부서장 자리가 공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기획실 팀장이 부서장이었던 겁니다. 그 팀장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역시 같은 계통에서 일하다 보니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그 팀장도 기획실에 있겠거니 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보다 한 살 어렸거든요. 그래서 내심 이 친구한테 회사 돌아가는 정보도 얻고 하면 일하기에 좀 수월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그 팀장이 안 보여서 좀 당황했습니다. 그 팀장이 왜 본가로 내려갔는지 직원들한테 물어보니까, 그냥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내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려니 했습니다. 몸 안 사리고 일을 하던 친구라 내심 저러다 과로로 쓰러지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었거든요. 겉으로 보기에도 약골처럼 보였는데, 저렇게 몸 안 사리고 일하다가는 언제 한번 큰코다치지 하는 생각이 들던 친구였습니다. 그래도 그런 건 사장님께서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아마 제가 명진기획에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말씀을 드렸지요.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팀장 그만 뒀다는 얘기 하면 제가 안 올까 봐 말을 안 했다고요. 허탈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사표 쓰고 나왔는 걸요. 팀장 없이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있던 직원 세 명이 기무용 대리, 이연희, 서유나입니다. 백 실장님도 오늘 보셨을 겁니다.”
 백 실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세 사람은 아마 명진기획이 망하지 않는 한 회사 떠날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튼 직원이 그 세 사람이었고, 다들 명진기획에서 몇 년씩 일한 친구들이라, 아쉽지만 한동안은 이 친구들한테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달 정도는 특별히 힘든 일 안 시켰습니다. 가능하면 정시에 퇴근할 수 있도록 했지요. 기획실이라는 게 원래 정시 퇴근하기가 참 쉽지 않잖습니까. 그래도 두 달 동안은 정시 퇴근할 수 있게 배려해 줬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 몫까지 제가 다 일을 했고요. 그 사람들이 몇 번 술자리 같이 하자는 것도 마다하고, 그 사람들 몫까지 제가 다 했습니다. 그렇게 두 달 지내다 보니까 회사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역시 줄곧 해오던 일이라 큰 어려움은 없더군요. 책임감이 좀 커져서 심적인 부담 역시 조금 심해졌다는 거, 뭐 그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아주 작정을 하고 직원 셋이 저보고 ‘너무 실장님만 일하시고 저희는 정시 퇴근하고,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는 실장님 일 저희한테 나눠주세요. 저희도 염치라는 게 있습니다. 대신 오늘 술 한잔 사주세요! 이번에는 꼭 같이 가셔야 합니다!’ 그러더군요. 안 그래도 저 역시 이제는 직원들 업무를 좀 늘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갑자기 늘리기가 좀 그랬는데, 직원들이 알아서 그런 말을 해주니까 고마웠습니다. 흔쾌히 한잔 마시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회사 근처 맥줏집이었습니다. 제가 좀더 근사한 곳에 가도 된다고 했더니, 이곳 치킨이 엄청 맛있다고 하더군요. 자신들은 항상 이곳에서 술 마신다면서요. 좀 낡은 맥줏집이긴 했지만, 맛이 있으니까 이렇게 오래 장사를 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뭐 그럼 그러자고 했습니다. 대신 마음껏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 그 집 치킨 정말 맛있더군요. 닭다리를 집어서 한입 뜯는데, 진짜로 바삭 하고 소리가 납디다. 그런데 속은 또 굉장히 부드러워요. 그런데 그게 또 주인이 닭 튀기기 전에 미리 간을 했는지, 겉은 짭짤하고 속은 달콤합디다. 그 맛이 절묘해요. 게다가 아주 뜨겁지도 않고 먹기 좋을 만큼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이 직접 만든 소스도 아주 훌륭했고요. 치킨 얘기 하니까 갑자기 그 집 치킨 생각이 나네요.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백 실장의 입에도 살짝 침이 고였다. 그래서 맥주를 약간 마셔서 군침을 달랬다.
 전임실장 역시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아마 안주로 치킨 먹는 상상을 했으리라.
 “아 이거, 치킨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닌데, 말하다보니까 갑자기 그쪽으로 이야기가 샜습니다. 아무튼 그만큼 그 집 치킨은 맛있습니다. 덕분에 그 날 좀 과음을 했습니다. 원래 술을 그렇게 즐기지도 않고, 또 많이 마시지도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그놈의 치킨 때문에 생전 처음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술이 취하니까 기분이 아주 좋더군요. 그래서 그 집 치킨 몇 마리 포장해 달라고 해서 직원 셋 데리고 저희 집으로 갔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친구들을 한두 번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집에 누구를 데리고 오는 걸 싫어합니다. 집만큼은 완벽하게 제 공간이어야 하니까요. 심지어 가족들이 집에 오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사회생활 하면서 누구를 집에 초대한 적 한 번도 없었고요. 그런데 그 날 처음 직원들을 집에 데리고 온 겁니다. 그놈의 치킨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이 자리네요. 여기 테이블에 치킨을 놓고 각자 소파에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맥주를 마셨습니다. 하, 배가 불러도 그놈의 치킨은 계속 들어가더군요. 맥주도 마찬가지고요. 무슨 조화인지 참. 아무튼 이 자리에서 그렇게 맥주와 치킨을 마구 먹고 마시던 것까지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는 아마 뻗었나 봅니다. 제대로 필름이 끊긴 거죠. 머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난생 처음 그렇게 술을 퍼마셨으니 당연했을 겁니다. 그래서 눈을 떴습니다. 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더군요. 여기가 어디지, 그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눈감고 생각했습니다. 거실에서 술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럼 여긴 거실 소판가. 양팔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소파는 아니었습니다. 제 방 침대였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어디에 있지!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나! 다시 눈을 떴습니다. 그새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이더군요. 머리도 아프고 갈증도 났습니다. 직원들 잠자리도 걱정됐고요. 그래서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거실로 가보려고요. 그때 침대 오른쪽에 무언가 시커먼 물체가 얼핏 보였습니다. 아직 시야가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있다는 건 확실했습니다. 살짝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누워 실눈을 뜨고 살폈습니다. 실눈을 뜨고 살피다 보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덜덜덜, 벅벅벅, 따각따각따각. 크게 들리지 않았기에 더욱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덜덜덜, 벅벅벅, 따각따각따각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물 쪽에서요. 꽤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였습니다. 마치 누가 자신의 살을 긁는 소리 같았거든요. 긁는다기보다 파낸다는 쪽이 맞을 겁니다. 그만큼 세게 살을 긁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 벅벅벅이라는 소리가 말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 소리의 정체는 감도 안 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겁도 났고 짜증도 났습니다. 소리가 워낙 작으니까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신경을 막 간질이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홧김에, 그러니까 아마 술기운을 빌렸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 같았다면 그런 용기는 안 났을 테니까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미 시야는 어둠에 거의 적응을 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물을 봤습니다. 기무용 대리, 이연희, 서유나. 후후, 기획실 직원들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저와 함께 거실에서 치킨과 맥주를 먹던 자들이었습니다. ‘다들 안 자고 지금 뭐하는 거죠?’ 하고 물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순간 목이 잠겼습니다. 그들의 행동, 그들의 표정을 봤거든요. 보였거든요. 보는 순간 목이 잠겨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손과 발, 엉덩이를 움직여서 뒤로 물러났습니다. 제가 뒤로 물러나자, 세 사람의 시선도 저를 쫒아왔습니다. 기무용 대리는 오른쪽 다리를 덜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침대에 무릎을 부딪쳐 가면서 말입니다. 침도 질질 흘리고 있었고요. 얼굴은 웃고 있었습니다. 소리 안 나는 웃음이었습니다. 이연희는 치마를 들어올려 입으로 치마 끝을 물고는 양 손으로 자신의 양쪽 허벅지를 긁고 있었습니다. 벅벅벅 소리는 이연희한테서 나던 소리였습니다. 벅벅벅, 그건 그냥 허벅지가 간지러워서 긁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허벅지 살을 파내고 있었습니다. 양쪽 손톱으로 말입니다. 어둠 속이었지만, 양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피가 보였거든요. 검붉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벅벅벅 긁어댔습니다. 얼굴은 기무용 대리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고요. 끔찍했습니다. 끔찍하기로는 서유나가 가장 심했습니다. 따각따각따각, 그 소리는 서유나가 자신의 손톱을 이로 깨무는 소리였습니다. 아주 빠르게요. 천천히 깨무는 것도 아니고 아주 빠른 속도로 손톱을 깨무는 소리였습니다. 뭐, 초조하면 저도 가끔 손톱을 깨뭅니다. 하지만 피가 날 정도로 깨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살에 붙어 있는 손톱을 깨물어서 뜯어내지는 않습니다. 그런 건 고문할 때나 쓰는 방법입니다. 손톱을 강제로 뽑아내는 것만큼 끔찍한 고통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서유나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손톱 사이에 깊숙이 밀어넣어서 깨물고 있었습니다. 팔뚝과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손톱 틈으로 피가 나는데도 서유나는 계속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역시 기무용 대리나 이연희처럼 웃고 있었고요. 셋은 나란히 침대 옆에 서서 그렇게 끔찍한 행동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웃는 얼굴로 말입니다. 저를 쳐다보면서 말입니다. 머리 아픈 건 사라졌습니다. 술기운도 사라졌습니다. 어둠도 사라졌습니다. 그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침대 끝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눈동자만 치켜 떠 계속 저를 노려봤습니다. ‘이봐, 그러지들 마! 지금 대체 뭣들 하는 거야!’ 하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당장 나가! 지금 당장 내 집에서 나가!’ 하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려고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제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저조차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습니다. 저는 제가 우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울음 때문에 웅얼 웅얼 웅얼, 그런 소리만 튀어나왔습니다. 눈물, 콧물, 침을 질질 흘리고, 얼굴, 어깨, 다리를 덜덜 떨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각자 괴이한 행동들을 하면서 웃고 있었고요. 당연히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방문은 그들 등 뒤에 있었습니다. 도저히 뛰쳐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들이 저를 확 덮칠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제 다리를 흔들고, 입을 벌려 혀를 빼내서 침을 질질 흘리게 하고, 양쪽 허벅지를 피가 나도록 긁고, 제 손톱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소리쳐도 그들은 저를 죽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제 애원을 무시하고 계속 제 다리를 흔들고, 침을 질질 흘리게 하고, 허벅지를 피가 나도록 긁고, 손톱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기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침대 끝에 웅크리고 앉아 엉엉 울기만 했습니다. 그들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양쪽 무릎에 파묻고 울기만 했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요. 날이 밝을 때까지 똑같은 자세로 앉아서 울기만 했습니다. 그 자세로 오줌도 누고 똥도 누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습니다. 제가 평소 일어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알람 소리에 맞춰 덜덜덜, 벅벅벅, 따각따각따각 소리가 멈췄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방을 나가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곧이어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도 났습니다. 그제야 저는 울음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서 있던 곳에는 침과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침대도 조금 틀어져 있었고요.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갔습니다. 거실은 깨끗했습니다. 말끔히 치워놨더군요. 그게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곧장 사장님한테 전화를 드렸습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오늘 하루 쉬어야겠다고요. 사장님이 뭐라고 말하려는 듯했지만, 그냥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임실장은 말을 멈추고 나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파에 두 다리를 올려 양손으로 다리를 감쌌다. 허리와 목을 굽혀 몸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런 자세로는 맞은편에 앉은 백 실장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테이블에 있는 캔맥주조차 보이지 않는 자세였다.
 백 실장은 그런 전임실장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임실장이 손을 뻗어 테이블을 더듬었다. 캔맥주를 찾고 있었다.
 백 실장은 얼른 캔맥주를 집어 전임실장 손에 쥐어주었다.
 전임실장은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캔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 입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임실장은 심하게 손을 떨고 있었다. 손에 들린 캔맥주가 덩달아 흔들리면서, 캔에 담긴 맥주가 거실에 쏟아졌다. 아마 절반 가까이는 입으로 가져가기도 전에 쏟아졌으리라. 게다가 전임실장은 머리를 양쪽 무릎 사이에 파묻은 상태였다. 그러니 맥주를 마시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상태로 캔맥주를 무릎 사이로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캔을 기울였다. 당연히 맥주는 소파 위로 주르륵 쏟아졌다. 그래도 전임실장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캔에 담긴 맥주가 다 쏟아지고 나서야 전임실장은 덜덜 떠는 손으로 빈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전임실장의 모습을 보면서 백 실장은 자기 앞에 놓인 캔맥주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한모금 마시려다 그냥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틀을 집에서 쉬었습니다.”
 전임실장은 여전히 몸을 웅크린 자세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백 실장의 귀에는 그가 하는 말이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웅얼 웅얼 웅얼.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줄곧 거실에서 지냈습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이렇게 소파에 앉아서 지냈습니다.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방 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침대도 치워야 했습니다. 침과 피와 오줌과 똥으로 범벅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방문을 열면 그들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습니다. 덜덜덜, 벅벅벅, 따각따각따각 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또다시 엉엉 울면서 오줌을 싸고 똥을 싸겠지요. 그래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장님한테 몇 번 전화가 왔습니다. 아직도 몸이 안 좋냐고요. 병원에는 다녀왔냐고요. 그렇다고 했습니다. 가능하면 내일은 회사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진행할 행사가 코앞이었거든요. 알겠다고 했습니다. 이틀째 되던 날 저녁에 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받았습니다. 기무용 대리였습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제 바지가 젖었습니다. ‘실장님, 몸 많이 안 좋으세요? 걱정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나올 수 있으시겠어요? 이번 행사 진행 때문에 저쪽에서 사무총장이 내일 꼭 좀 실장님 뵙고 싶어 하시는데요.’ 기무용 대리의 목소리는 예전과 똑같았습니다. 마치 제 방에서 한 행동을 기억 못 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실장님, 듣고 계세요? 실장님, 아직도 몸 많이 편찮으신 거예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내일은 출근하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습니다. 기무용 대리가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세 사람 다 기억을 못 하는 건가. 그저 일종의 술버릇인 건가. 셋 다 그런 끔찍한 술버릇을 갖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해서가 아닙니다. 수화기를 통해 들린 건 기무용 대리의 목소리만이 아니었습니다. 덜덜덜, 벅벅벅, 따각따각따각. 희미하게나마 그 소리도 들렸습니다. 분명히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출근하겠다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서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침과 피와 오줌과 똥이 묻은 침대보를 둘둘 말아 쓰레기봉투에 담았습니다. 입고 있던 옷도 함께 담았습니다. 매트리스와 나머지 침대 구조물도 아파트 현관 앞에 내다놨습니다. 방바닥에 묻은 핏자국은 약국에서 과산화수소를 왕창 사와 닦았습니다. 피가 응고돼 깨끗하게 닦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위가 상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면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웃기지요! 오줌 싸고 똥까지 싸면서 벌벌 떨었습니다. 제가 도망치면 그들은 제 다리를 흔들고, 침을 질질 흘리게 하고, 허벅지를 피가 나도록 긁고, 손톱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을 것 같다고 했지요! 차라리 죽여달라고 소리쳐도 그들은 저를 죽이지 않을 것 같다고 했지요! 거짓말입니다. 오줌 싸고 똥까지 싸가면서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기만 했습니다. 감히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죽일까 봐서요. 실은 그들이 저를 죽일까 봐 무서웠습니다. 그게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기무용 대리의 전화를 받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물론 집에서 쉬는 이틀 동안 줄곧 한 가지 생각만 했습니다. 결론을 못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기무용 대리의 전화를 받고서야 비로소 확신이 든 겁니다. 그들은 나를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자주 내 집에 찾아올 것이다. 맥주와 치킨을 사들고 찾아올 것이다. 즐겁게 맥주와 치킨을 먹자. 그리고 나는 방에 가서 잠을 자자. 자는 척을 하자. 그럼 그들은 거실을 말끔히 치우고 내 방에 와서 덜덜덜, 벅벅벅, 따각따각따각을 할 것이다. 소변이 마려워도 참자. 똥이 마려워도 참자. 화장실에 가려고 침대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그들은 나를 덮칠 것이다. 다리를 부러뜨리고, 허벅지 살을 모두 파내버리고, 열 손가락의 손톱을 모두 뽑아버릴 것이다. 그러고는 내가 죽을 때까지 나란히 앞에 서서 히죽히죽 웃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눈을 감고 혹은 눈을 뜬 채로 기다리자. 휴대폰 알람이 울릴 때까지 기다리자. 그럼 나는 산다. 그리고 실제로 며칠 뒤 그들은 저희 집에 왔습니다.”
 전임실장은 말을 하다 말고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백 실장을 쳐다보았다.
 “혹시 배 안 고프세요? 저는 오랜만에 누구와 얘기를 나눴더니 배가 좀 고프네요.”
 얘기를 나눠서가 아니라 혼자 떠들었으니 배가 고픈 거겠지.
 “저는 괜찮지만, 배고프시면 제가 나가서 뭐 간단한 거라도 사올까요?”
 “아닙니다. 이곳 지리도 잘 모르시잖아요.”
 “오다가 보니까 요 앞에 분식집 있던데요. 마트도 있고요. 간단한 거라면 사올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실은 얘기하다 보니까 그 맥줏집에서 먹던 치킨이 생각나서요. 그 집 치킨 정말 맛있거든요. 퇴사하고 나서는 한 번도 못 먹었습니다.”
 “그러셨겠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꼭 그 맥줏집에서 파는 치킨 사들고 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직원들이 맛있는 치킨 파는 맥줏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 첫 출근이고 해서 환영식을 그곳에서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미안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신 내일 가자고 했지요. 전임실장님 말씀을 들으니까 은근히 저도 그 집 치킨이 먹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백 실장은 살짝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보던 전임실장이 갑자기 테이블에 있던 빈 맥주캔을 집어서 거실 바닥에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역시 내 말을 안 믿는군.”
 전임실장의 갑작스레 변한 거친 말투에 백 실장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초면에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불쾌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실이잖습니까. 백 실장님은 제 말을 안 믿으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한테 벌어진 끔찍한 일들의 시작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맥줏집입니다. 그 빌어먹을 맥줏집에 가는 바람에 제 인생이 이렇게 뒤틀린 겁니다. 물론 그 집 치킨은 정말 맛있습니다. 아직도 그 집 치킨만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입안에 침이 고이지만, 이제 두 번 다시 그 집 치킨은 먹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그 집 치킨이 더럽게 맛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원래 술을 즐기지 않습니다. 어쩌다 마시더라도 맥주 한두 잔이면 끝입니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의 제가 아니었습니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습니다.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그게 다 그 집에서 파는 맛있는 치킨 때문입니다. 그 치킨 때문에 제가 필름이 끊긴 겁니다. 그래서 직원들을 집까지 데리고 온 거고요. 만약 그 집 치킨이 더럽게 맛이 없었다면, 저는 평소대로 맥주 한두 잔만 마셨을 겁니다. 당연히 직원들을 집으로 데려 오지도 않았을 거고요. 저는 누가 제 집에 오는 걸 싫어합니다.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저는 아직 명진기획 실장으로 있었겠지요. 백 실장님이 제 후임으로 오실 일은 없었을 겁니다. 물론 직원들의 정체도 몰랐겠지만요. 아니, 언젠가는 알았을까요. 아무튼 그런데도 내일 직원들하고 그 맥줏집엘 간다니요. 그 집 치킨을 드시겠다니요. 그럼 어떻게 되는 줄 모르시는 건가요. 백 실장님도 필름이 끊기실 겁니다. 그 집 치킨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그럼 백 실장님은 당연히 직원들을 집으로 데려가시겠지요. 집에서 직원들과 함께 또다시 맥주와 그 빌어먹을 치킨을 먹을 겁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갈증 때문에 눈을 뜨게 될 겁니다. 당연히 눈앞에는 시커먼 그림자 세 개가 보일 거고요. 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집 치킨을 드시겠다니요, 도대체 제 말을 듣기나 하신 겁니까! 그 직원들이 사이코라는 걸 안 믿으시는 겁니까! 제가 당한 일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상상이 안 가시는 겁니까! 아니면, 백 실장님은 그게 다 제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가 괴롭힘 당하기 딱 좋은 먹잇감 같아서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그 사이코 같은 것들이 저를 괴롭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1년 가까이 그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왜 저항하지 못했냐고 흉보시는 겁니까! 경찰에는 왜 신고하지 않았냐고 탓하시는 겁니까! 설혹 제 말이 사실이더라도 백 실장님은 그것들한테 안 당할 자신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들을 윽박지르고, 내쫓고, 신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제가 휴일에 집에 있을 때도 찾아왔습니다. 현관문 앞에서 낄낄거리며 문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겁에 질려 문을 열어줬고요. 백 실장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오. 절대 그렇게 못 합니다. 저항하지 못합니다. 경찰에 신고하지 못합니다. 윽박지르지도 못하고, 내쫓지도 못합니다. 백 실장님도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현관문을 열어주실 겁니다. 왼줄 아세요? 그게 공포라는 겁니다. 자기가 오줌을 싸는지 똥을 싸는지도 모른 채 바닥에 누워서 파닥거리기만 합니다. 공포에 질려 몸을 떤다, 그건 다 거짓말입니다. 그들을 아직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공포에 질려 몸이 파닥거립니다. 물고기가 뭍에 나와서 파닥거리듯이 제 몸이 파닥거립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파닥거리다 문을 열게 됩니다. 그들은 제가 문을 열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의 행동은 제 신경을 망가뜨렸으니까요. 그게 공폽니다. 벗어날 수 있다, 뿌리칠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그런 건 공포가 아닙니다. 백 실장님은 이런 제 말도 안 믿으시겠지요. 그럼 지금은 어떻게 그들에게서 벗어났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물론 추측입니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이 사람 앞에서는 자신들의 본 모습을 보여줘도 된다는 생각이 들면, 그러니까 경계심이 사라진 사람 앞에서는 서슴없이 괴이한 동작을 벌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괴이한 동작이 오히려 편하니까요. 그래서 제 앞에서 덜덜덜, 벅벅벅, 따각따각따각. 함께 그 맥줏집에 가고 함께 집에서 술을 마신 덕분에 그들은 저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진 겁니다. 물론 경계심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괴이한 동작도 사라지겠죠. 그럼 이제 그 사람 앞에서는 더 이상 자신들의 본래 모습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사표를 썼을 때 그들은 제게 다시 경계심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그들과 완전히 타인이 되는 거니까요. 대신 한 번 경계심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면 전과는 다르게 사람을 아주 차갑게 대합니다. 물론 그 이유는 모릅니다. 어느 날 제가 무심코 이면지에다 사표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걸 우연히 서유나한테 들켰고요. 그때부터 그들은 저한테 차갑게 대했습니다. 평소 그들은 회사 사무실에서는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한테 아주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회사 출근하면 항상 책상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심지어 사무실에서는 제 눈치까지 봤습니다. 기무용 대리는 툭하면, ‘저기, 실장님, 옥상 가서 담배 좀 피고 와도 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휴대폰이 울리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얼른 사무실 밖으로 나가서 통화를 했습니다. 다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유나가 제가 쓴 사표를 보더니, 그들의 행동이 변했습니다. 책상은 지저분했고, 커피는 자기들끼리만 마셨습니다. 기무용 대리는 걸핏하면 말없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휴대폰이 울리면 사무실에서 큰소리로 통화를 했습니다. 같이 맥줏집 가자는 말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신경이 하나 끊기면, 반대로 사소한 것에 예민해지나 봅니다. 딱 이틀 만에 그들의 행동이 이상해졌다는 걸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사표 때문이라는 것도 눈치챘고요.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여기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퇴사한 이상 그들과 저는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요. 경계심이 생기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 말고 그들의 행동에 대해 몇 가지 더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원할 때 아무 때나 괴이한 동작을 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말입니다. 아니면 그런 괴이한 동작을 하고 있을 때가 오히려 평소 그들의 모습이고, 그런 동작을 하지 않을 때는 단지 연기를 하고 있는 것뿐일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이도록 어색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괴이한 동작을 하고 있을 때가 그들에게는 편한 거죠. 아니면 그들이 괴이한 동작을 벌이는 이유가 딱히 없을 수도 있고요. 단지 본능적으로 괴이한 동작을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본능적으로 그런 괴이한 동작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는 얘기입니다. 제 본심을 말씀드리까요. 사실 그들은 사이코도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괴물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그들이 언제 왜 괴이한 동작을 보이는지 알아내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 혹은 왜 따위가 아예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괴물일 뿐이니까요. 인간도 사이코도 아니니까요. 물론 백 실장님도 나중에는 제 말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늦은 겁니다. 이미 몸과 마음은 무너져버렸을 테니까요. 괴물들에게 몸과 마음을 먹힌 뒤니까요.”
 전임실장은 말을 멈추고 나서 백 실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백 실장은 딱히 전임실장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전임실장의 눈을 보니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없느냐고 묻는 것 같았지만, 백 실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기다리다 지친 전임실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알겠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괜한 얘기를 했네요. 백 실장님을 괜히 이곳까지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제 딴에는 더 이상 그 괴물들에게 피해 입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더 이상 저처럼 망가지는 사람이 안 생기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백 실장님께 말씀드린 겁니다. 하지만 제가 괜한 짓을 했네요. 어리석었습니다. 이런 얘기,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지요, 백 실장님! 백 실장님은 오히려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저를 괴물로 보시는 거죠! 그러고 보면 역시 저는 좀 모자란가 봅니다. 시골 내려갔다던 그 팀장이 옳았습니다. 그 팀장도 아마 제가 자신의 후임으로 명진기획 기획실에 가게 됐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팀장은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팀장을 원망했습니다. 제게 미리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요. 하지만 그 팀장이 제게 아무 말 안 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말해 봐야 당시에는 제가 그 팀장 말을 믿지 않았을 테니까요. 오히려 그 팀장을 이상하게 봤을 겁니다. 괴물 같다고 말입니다.”
 전임실장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맥주는 마시지 않았다.
 “백 실장님, 저는 아직도 제 방에서 잠을 못 잡니다. 아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곳에서도 방에서는 잠을 못 잘 겁니다. 잠은 늘 소파에서 잡니다. 그리고 이제는 물 대신 맥주를 마십니다. 기껏 서너 잔이면 끝이었던 제가 이제는 물 대신 맥주를 마십니다. 처음 백 실장님한테 드렸던 주스는 언제 산 건지도 잘 모르겠네요. 백 실장님, 제가 이렇게 변했습니다. 설마 이렇게 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일부러 이런 삶을 택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제 백 실장님이 제 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내일 백 실장님이 그들하고 맥줏집에 가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백 실장님이 계속 명진기획 기획실에 근무하든 안 하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백 실장님이 제 말을 안 믿으신다면, 백 실장님이 내일 그들하고 맥줏집에 가신다면, 백 실장님이 계속 명진기획에 근무하신다면,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방을 깨끗하게 치우셔야 합니다. 침과 피와 오줌과 똥으로 더럽혀질 테니까요. 혹시 물 대신 맥주를 드시나요. 언젠가는 그렇게 되실 겁니다. 주말이면 가끔 외출을 즐기시나요. 앞으로는 불가능하실 겁니다. 직원들에게 복수를 하시겠다고요! 그럴 거면 내일 당장 회사 가서 직원들을 칼로 찌르십시오. 그러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이제 직원들 얼굴을 못 봅니다. 목소리도 못 듣습니다. 지금 찾아가서 칼로 찌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경찰에 신고하시겠다고요. 실제로 그들은 제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몸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CCTV로 촬영해서, 그걸 증거 자료로 제출하시겠다고요. 한 사람은 다리를 덜덜 떨면서 침을 흘립니다. 한 사람은 허벅지를 피가 나도록 벅벅 긁습니다. 한 사람은 피가 나도록 손톱을 따각따각따각 물어뜯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바닥에 누워 물고기처럼 몸을 파닥파닥거립니다. 오줌과 똥을 싸면서 말입니다. 경찰이 보기에 어떨까요. 네 사람 다 괴물로 볼 겁니다. 뭐, 이런 거 저런 거 다 필요 없습니다. 실은 경찰에 신고할 용기도 없습니다. 그저 더 이상 그 괴물들과 엮이는 게 무섭습니다.”
 그때 백 실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잠시 통화 좀 하겠습니다.”
 백 실장은 고개를 돌려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네, 여보세요.”
 [실장님, 저 연희에요.]
 “아, 연희씨. 다들 즐겁게 술 마시고 있나요?”
 [네. 그런데 실장님, 혹시나 해서 전화 드렸어요. 회사하고 멀지 않은 곳이면, 말씀 끝나는 대로 오시면 안 될까요? 한껏 분위기가 고조됐는데, 실장님이 안 계셔서 조금 섭섭해요.]
 “아, 미안합니다. 오늘은 그냥 세 분이서 드세요. 대신 제가 내일 거하게 쏠게요.”
 이연희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옆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백 실장은 여전히 휴대폰을 귀에 갖다댄 채 고개를 살짝 돌려, 움직이고 있는 게 뭔지 살폈다.
 ‘연희, 이연희다. 이연희다. 이연희다…….’
 전임실장이 소파에 앉은 자세로 몸을 파닥거렸다. 눈동자를 너무 추켜올려서 눈이 뒤집힌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뒤집힌 눈을 한 채로 계속 파닥거렸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옆으로 픽 쓰러졌다. 쓰러져서도 여전히 파닥거렸다.
 전임실장이 앉아 있던 자리는 젖어 있었다.
 곧이어 지독한 냄새가 거실 안에 풍겼다.
 
 
 2
 
 갑자기 알람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리가 꽤 컸다.
 그 소리에 놀란 건 백 실장뿐이었다.
 “아, 뭔가요, 여긴 퇴근 시간이 되면 알람이 울리나요? 잠시 제가 고등학생으로 되돌아간 줄 알았습니다. 수업 끝났다고 알리는 종소리.”
 “와, 백 실장님 센스 있으시네요!”
 서유나가 휴대폰 알람을 끄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실장님 놀라게 해드리는 데 실패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준비했던 건데, 아쉬워요. 대신 오늘 환영식은 실장님이 쏘세요.”
 이유나가 가볍게 책상을 치며 말했다.
 “제가 쏘다니요. 실은 저 놀랐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에요. 성공하신 겁니다.”
 “와, 연희 언니, 우리 실장님 진짜 센스 있으시다, 그치?”
 “그러게. 앞으로 실장님한테 술 얻어먹긴 힘들 거 같은데. 큰일이네.”
 “그런가요. 저로서는 다행이네요. 앞으로는 좀더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해오셔야 할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좀처럼 제 지갑은 열리지 않을 거예요. 아, 이참에 적금이나 하나 더 들어야 할까 봅니다. 돈 좀 굳겠는데요.”
 “유나씨, 우리 내일부터 한 시간 일찍 출근하자. 아이디어 회의를 해야겠어.”
 “알았어요, 언니. 난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을게요.”
 서유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서유나의 등을 이연희가 토닥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백 실장이 피식 웃었다.
 “두 분 참 재밌네요. 두 분 덕분에 회사 생활이 아주 즐거울 것 같습니다. 기대됩니다. 저도 두 분을 응원하겠습니다.”
 “아니오. 응원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다 괜히 실장님만 지치실 겁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리 없거든요.”
 기무용 대리가 서유나와 이연희를 노려보면서 힘없이 말했다.
 “내가 그 알람 소리로는 안 될 거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어우, 저 답답이들.”
 “어머, 또 우리 기 대리님 주특기 나오셨다.”
 “그래, 또 나오셨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 대리님.”
 “주특기라니요? 그게 무슨 소린데요?”
 백 실장이 궁금하다는 듯 기무용 대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기무용 대리 대신 서유나가 입을 열었다.
 “알람 소리요. 실은 이거 기 대리님 아이디어였거든요. 성공하면 자기 덕, 실패하면 남 탓. 기 대리님 주특기십니다.”
 “아아, 그게 기 대리 주특기군요. 잘 알겠습니다.”
 “실장님, 이건 모함입니다. 억울합니다.”
 “그러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 문다. 이어서 한 마디 한다.”
 이연희의 말대로 기무용 대리는 이를 악 문 채 웅얼거렸다.
 “밝혀내고야 말겠어. 내가 결백하다는 걸.”
 곧장 서유나가 한숨을 쉬었다.
 “후, 어쩜 저렇게 레퍼토리가 매번 똑같으실까. 지겨워지려고 해.”
 “유나씨, 난 이미 지겨워졌어. 후.”
 이연희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기무용 대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쨌든 이번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다 기 대리님 탓이지요. 기 대리님을 믿은 우리 잘못도 있긴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기 대리님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있을 백 실장님 환영식 술값은 기 대리님이 내실 겁니다. 자, 그럼, 백 실장님의 다음 지시만이 남았습니다. 백 실장님, 이제 퇴근 시간도 지나고 했으니, 이만 환영식장으로 가시지요. 출발! 하고 외쳐주십시오.”
 서유나와 이연희가 백 실장을 쳐다보았다.
 기무용 대리만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아, 오늘 환영식을 해야 하는군요.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요. 제가 오늘 선약이 있어서요. 환영식 생각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아는 분이 갑작스레 오늘 꼭 좀 봤으면 싶다고 해서요. 정말 미안해요. 환영식은 내일로 연기하면 안 될까요. 대신 내일 환영식은 제가 쏘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백 실장의 말에 다들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회사 근처에 진짜 맛있는 치킨 파는 집 있거든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요. 처음에는 짭짤한 맛이 나다가 씹을수록 달콤해집니다. 게다가 그곳 사장님이 직접 만든 특제 양념 소스를 콕 찍어서 먹으면, 히, 그냥 실없이 웃음이 나와버립니다. 너무 맛있어서 그냥 웃음이 나와요. 오늘 실장님 모시고 그 집 가려고 했거든요. 하루라도 빨리 그 집 치킨을 맛보게 해드려야 하는데요. 아쉬워요.”
 그러면서 이연희는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 집 치킨이 그 정도로 맛있나요? 저도 치킨 참 좋아하는데, 아쉽네요. 대신 내일 꼭 갑시다. 그리고 정 아쉬우면 오늘은 세 분이 가시고요, 내일 또 가도록 합시다. 오늘 술값도 제가 드리겠습니다. 대신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내일 또 먹어야 하니까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백 실장은 카드를 꺼내 기무용 대리에게 주었다.
 기무용 대리가 카드를 받아서 지갑에 넣는 것까지 확인한 서유나와 이연희는 그제야 손을 들어올려 마주잡았다.
 “뭔가요, 그 하이파이브 비슷한 동작의 의미는요?”
 백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실장님한테서 카드를 받아냈잖아요. 승리의 세리머니입니다. 오늘 어떻게든 실장님에게 ‘좋습니다. 갑시다. 오늘 술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고 결의를 다졌거든요. 비록 실장님은 못 가시게 됐지만, 그래도 카드를 받았으니 성공한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역시 정면 승부가 먹힌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봐서 위기다 싶으면 단골 맥줏집의 치킨 맛을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자고 했거든요. 그럼 실장님도 가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 더 커질 테니까요. 일단 마음이 그쪽으로 기운다면 게임은 끝이죠. ‘도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좋다. 무조건 간다. 당연히 술값은 내가 낸다.’ 애초 계획은 이걸 노렸던 겁니다. 하지만 이미 실장님은 가실 수 없는 상황. 그렇다고 해서 저희까지 안 갈 수는 없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잔뜩 벼르고 있었거든요. 문제는 술값이었습니다. 원래 오늘 술값은 실장님한테 떠넘기려고 했었는데, 못 가신다니 이걸 어쩌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술값만이라도 받아내자. 지금이 정면 승부를 걸 때다. 치킨 맛을 설명하자.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후후.”
 “주도면밀에 용의주도하신 분들이군요. 두 분은 그렇다 쳐도 기 대리까지 이토록 빈틈이 없으시다니, 조금 의외입니다.”
 “아, 실장님, 저희 둘이서 짠 계획입니다.”
 
 퇴근 시간인데도 술집에는 세 사람뿐이었다.
 테이블 다섯 개가 고작인 작은 술집. 실내는 어두웠고, 닭을 튀기는 곳은 온통 기름때투성이였다.
 날아다니던 파리가 끈적끈적한 기름때 위로 내려앉는 바람에 날개를 파닥거렸다. 닭을 튀기는 곳 주위에는 그렇게 해서 죽은 파리 또한 수없이 많았다.
 술집 바닥은 개업 이래 단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기름때와 먼지가 달라붙어서 울퉁불퉁했다.  
 가게 주인이 맥주와 치킨을 가지고 왔다.
 세 사람 앞에 놓인 치킨은 여러 번 사용한 기름으로 튀겼는지, 색이 시커멨다. 게다가 치킨을 담은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 본 주인의 손톱은 두껍게 때가 껴 있었다.
 가게 주인은 세 사람에게 맥주와 치킨을 갖다준 뒤 카운터로 돌아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주인이 치킨을 테이블에 내려놓기 무섭게 세 사람은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주문한 치킨 두 마리가 금세 동이 났다.
 “역시 이 집 치킨은 맛있어. 아무리 먹어도 안 질려.”
 기무용 대리가 손가락을 빨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정말 비결이 궁금해요. 연희 언니가 한번 주인아저씨 유혹해서 비결을 알아내 보세요.”
 “그럴까. 그래서 나중에 우리도 치킨 장사 할까. 돈 많이 벌 거 같은데. 기 대리님도 동참하시겠어요?”
 “글쎄, 고민되네. 이 집 치킨이 워낙 맛있어서, 장사는 뒷전이고 튀기는 족족 우리가 다 먹을 거 같거든. 돈 별로 못 벌 거 같아. 그냥 연희씨가 비결을 알아내서 다시 나한테 알려줘. 그럼 내가 가게를 열어서 장사를 하고, 연희씨하고 유나씨가 손님으로 오면 되지. 그쪽이 나을 거 같아. 연희씨하고 유나씨가 시킨 닭을 내가 같이 먹으면 되니까. 그럼 나 돈 많이 벌 거야.”
 “그거 좋은 생각이시네요. 이제 보니까, 기 대리님 장사 수완 끝내주신다. 우리랑은 생각의 차원이 달라. 유나씨, 장사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
 “아쉬워라. 괜찮은 아이디어였는데.”
 “아쉬우면 닭 더 시키자. 맥주도 더 마시고.”
 “어머, 기 대리님, 유나씨가 아쉽다고 한 건, 그게 아닌 거 같은데요.”
 “어, 그런가. 아쉽다는 말을 들으니까 순간 딴 생각이 나서 그랬어.”
 “딴 생각이라니요? 무슨 생각이요?”
 서유나와 이연희가 동시에 물었다.
 “아 뭐, 별 건 아니고. 얼마 전에 퇴근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학교 선배 만났다고 했잖아. 반가워서 같이 맥주 한잔 했거든. 한 한두 시간 앉아 있었나. 선배가 그만 일어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무심코 ‘아, 아쉽네.’ 이랬거든. 그러니까 그 선배가 그러더라고. ‘아쉬워? 그럼 딴 데 가서 한잔 더 할래?’ 그 말이 생각나서.”
 “참, 그래서 어디에 가셨어요? 나중에 말씀해 주신다고 해놓고서는 안 해주신 거 같은데요. 유나씨도 못 들었지?”
 “네, 저도 못 들었어요. 아무튼 굉장히 좋은 데 갔다고만 하셨는데.”
 “그럼 생각난 김에 얘기해 줄까. 진짜 그 술집 끝내줬어. 원래 그 선배가 가는 단골 술집이 있는데, 그날 그 술집에 가려던 참이었대. 그러다 나 만나서 맥주 한잔 한 거고. 그래서 내가 ‘아, 그러셨어요. 그럼 처음부터 그 술집 갈 걸 그랬네요.’ 그랬더니, 선배가 ‘그 술집 가려면 택시 타고 가야 하거든. 무용이 네가 귀찮아할까 봐 그냥 그 술집은 내일 가고 오늘은 너랑 근처에서 가볍게 한잔 하고 끝내려고 했지.’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럼 그냥 근처에서 한잔만 더 마시고 끝낼까요? 그 술집은 다음에 선배님 혼자 가시고요.’ 그랬더니, 그 선배가 ‘아니야, 이왕 말 나온 김에 그냥 가지 뭐. 택시 타고 가도 돼지? 그렇게 멀지는 않아.’ 그러시잖아. 그래서 나야 괜찮다고 했지. 그런데 택시 타고 한 30분은 갔어. 멀더라. 괜히 따라왔나 싶은 생각이 막 들기 시작했는데, 선배가 다 왔다면서 내리자는 거야. 택시에 내려서도 한 5분 걸었어. 눈앞에 술집이 보였는데, 보기만 해도 주눅 들더라. 말로만 듣던 하루 술값 사오 백 깨지는 곳 있잖아? 완전 그런 곳이더라니까. 최고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강남 고급 룸살롱이야. 내가 그 앞에서 쭈뼛거리니까 선배가 내 팔 잡고 얼른 들어가자고 재촉하더라. 그래서 나도 못 이기는 척 들어갔지. 출입문도 엄청 컸어. 게다가 문 전체가 금색이었고. 문 미는 것도 버겁겠더라고. 그런데 우리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문이 저절로 열리더라. 안에서 어떤 남자가 문을 열어주더라고. 그 남자가 선배를 보고는 거의 90도로 인사하더라. ‘사장님 오셨어요.’ 이러면서. 괜히 나까지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가더라니까. 선배는 또 그 남자더러 ‘어, 잘 있었냐’ 하면서 지갑에서 얼마 꺼내서 주더라. 그러니까 그 남자가 더 깍듯해져서는 우리를 가게 안쪽 룸으로 안내를 하더라. 도중에 그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몇 명하고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아가씨들이 선배한테 아는 체를 하는 거야. ‘어머, 사장님 오셨어요.’ 이러면서 말이지. 그러고 나서 선배랑 내가 룸에 들어갔는데, 와, 이건 뭐, 룸이 엄청 넓어. 한 50명이 모여서 술 마셔도 되겠더라니까. 테이블은 완전 대리석에다 소파는 완전 명품 가죽 소파. 조명이며 벽지며 아무튼 죄다 최고급이야. 룸에 들어와서도 또 나는 쭈뼛거렸지. 그랬더니 선배가 ‘무용아, 그냥 아무 데나 편히 앉아.’ 그래서 소파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더니, 우리를 안내해 준 남자가 선배더러 ‘사장님, 그럼 일단 저희 매니저님부터 오라고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가지십시오’ 하면서 또 90도 인사를 하더라. 조금 있다가 매니저란 사람이 들어왔는데, 여자였어.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지. 내가 또 태어나서 치마 정장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봤네.”
 “하여튼 남자들은 다 똑같아. 돈 좀 있다 싶으면 다들 그런 데 가서 왕 대접 받기를 원한단 말이야. 문제야, 문제. 사회 문제.”
 이연희가 기무용 대리의 말을 자르면서 투덜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생각했던 술집은 그런 데가 아니었지. 단골 술집이라고 하기에, 어디 그냥 조용한 바 같은 델 생각했지.”
 “그래도 어쨌든 대리님도 거기에서 왕 대접 받으셨을 거 아니에요. 여자들이 엄청 달라붙었을 걸요. 그 선배란 사람, 얘기만 들어도 거기에서 그동안 돈 좀 꽤 썼을 거 같은데, 그럼 함께 온 대리님한테도 당연히 여자들이 아양을 떨었을 거고요. 어휴, 도대체 술값이 얼마나 나왔을까. 연희 언니, 정말 그런 데서 마시면 하루 술값 사오 백 나올까요?”
 “나야 모르지. 대리님, 그날 술값 얼마나 나왔던가요?”
 “나도 몰라. 실은 그날 소파에 잠깐 앉아 있다가 선배한테 화장실 간다고 하고 나왔어. 그냥 바로 집으로 갔어. 무서워서 거기 못 있겠더라. 아무래도 그런 덴 나하고 안 어울려서 말이지.”
 “진짜요! 와, 우리 대리님 멋져. 그래서 내가 대리님을 좋아한다니까. 우리 대리님은 결코 타락하지 않아. 사회 문제를 일으키실 분이 아니야.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런 델 좋아해도, 우리 대리님만큼은 예외야. 와, 멋져. 저기, 사장님! 저희 치킨 두 마리하고 맥주 좀 더 갖다주세요!”
 이연희가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는 주인한테 소리를 질렀다.
 “아니, 뭐, 그 정도 가지고 뭘. 별로 대단한 일 한 것도 아닌데 뭐.”
 “그럼, 다음 날 그 선배한테 연락 안 왔어요? 대리님이 그냥 말없이 나오셔서 좀 섭섭해하셨을 거 같은데요.”
 서유나가 남은 맥주를 비우면서 물었다.
 “서로 연락처도 몰라. 그리고 나중에 또 길에서 마주치면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뭐. 선배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거야. 나도 크게 신경은 안 써.”
 “와, 우리 대리님 쿨하셔. 몇 백만 원짜리 술자리를 거부하고 나오신 분, 게다가 나중에 선배가 뭐라고 그러든 말든 신경 안 쓴다는 저 태도. 거기에는 ‘비싼 술집에 다니는 선배의 생활 방식이 문제다. 나는 그게 싫다. 그래서 그냥 나온 거다’ 하는 소신이 담겨 있는 거지. 쿨하시다.”
 이연희가 연거푸 기무용 대리를 추켜세웠다.
 옆에서 서유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아, 쿨하신 우리 대리님을 보니까 또 그 사람이 떠오르네요. 그 사람도 참 쿨했는데요.”
 “어머, 누구요? 연희 언니, 혹시 누구랑 선봤어요?”
 “선은 무슨. 그게 아니고, 실은 우리집 근처에 아주 작은 술집이 있거든. 그 술집 엄청 작아. 한 다섯 평 되려나. 거긴 테이블도 없어. 그냥 주인이 있는 곳하고 손님이 있는 곳에 마치 경계선처럼 바만 있어. 그래서 손님들도 두세 명 이렇게 무리지어서 오지 않고, 혼자 오는 경우가 많아. 혼자 와서 조용히 술 마시거나, 아니면 다른 손님이나 주인하고 사소한 얘기 주고받으면서 술 마시는 곳이야. 아늑하지. 꽤 마음에 드는 술집이야. 그래서 가끔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 술집 들러서 맥주 한잔 마시거든. 그날도 집에 가기 전에 그 작은 술집에 들렀지. 남자 손님이 한 명 앉아 있더라고. 주인하고 말도 안 하고 혼자 술 마시고 있어. 내가 그 옆에 앉았지. 조금 쓸쓸해 보여서 같이 얘기나 하려고. 내가 그 손님 옆에 앉으니까 주인도 우리 쪽으로 오더라고. 그제야 그 남자 손님도 나한테 눈길을 주더라. 셋이서 서로 건배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 나눴어. 그 남자 손님 직업은 어느 잡지사 사진기자래.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생계를 위한 거고, 실은 사진작가라는 거야. 전시회도 여러 번 가졌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사진집 꺼내서 보여주더라. 자기가 찍은 사진들이라면서. 와, 엄청 충격이었어. 전부 얼음 조각품을 찍었거든. 실제로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는 캐릭터 인형이나 가전제품 같은 것들을 얼음으로 조각한 건데, 그 얼음 조각품들이 진짜 정교하더라. 완제품을 그냥 그대로 얼린 것 같았어. 그걸 사진으로 보니까 더 신비롭더라고. 완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거야. 얼음 조각품이 너무 진짜 같으니까, 오히려 이 세상에 없는 걸 찍은 느낌이 들더라고.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그 얼음 조각품을 직접 조각했다는 거지. 조각해서 사진으로 찍은 뒤 그 얼음 조각은 바로 없애버리고 말이야.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어. 자기만이 찍을 수 있는 걸 확실하게 갖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서도 한 번 물어봤어. 사진 대신 그 얼음 조각품을 전시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얼음을 조각하는 거래. 사진을 더 잘 찍기 위해서 얼음을 더 정교하게 조각하는 거래. 그러니까 얼음 조각하는 건 전혀 즐거운 작업이 아니래. 만일 사진을 찍지 않을 거면 자신은 얼음 조각을 하지 않을 거래. 즐겁지 않으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무슨 예술가만의 고집 같지 않니? 멋있더라. 그날 그 사람한테 완전히 빠져버렸잖아. 처음 봤는데 말이지. 그래서 용기를 냈지. 연락처 좀 알려달라고. 그 사람 표정이 순간 차가워지더라. 완전 얼음 조각이야. 괜히 사진으로 찍고 싶더라. 그 사람 기분을 알겠더라니까. 아주 근사한 얼음 조각품이 눈앞에 있으면, 그걸 사진으로 찍고 싶더라니까. 아무튼 연락처 알려달라니까 그냥 나가더라. 찬바람이 쌩 불더라고. 그 사람 완전 쿨하지 않니? 대리님, 그 사람 너무 쿨한 것 같지 않아요?”
 이연희는 말을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 그 남자를 떠올렸는지 계속 미소를 지었다.
 이연희의 말에 기무용 대리와 서유나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다 용기를 내 서유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 연희 언니, 정말 미안한데요, 그건 저기, 쿨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응,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그건 그 사람이 쿨한 게 아니라요, 그냥 연희 언니가 싫었던 거 같은데요. 그래서 그냥 나간 거고요. 그걸 왜 쿨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의문입니다.”
 “하하하, 유나씨가 몰라서 그래. 그거 쿨한 거야. 쿨하게 끝내버리잖아. 뒤끝 없이 쿨하게.”
 “아니, 그러니까요, 언니하고 그 사람하고 무슨 관계를 맺었던 것도 아닌데 끝내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어, 잠깐만, 나 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그러면서 서유나가 손가락으로 술집 출입문 쪽을 가리켰다. 출입문 너머로는 퇴근길에 맞춰 많은 사람들이 길을 지나고 있었다.
 서유나는 곧장 술집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서유나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면서 중얼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낯이 익었는데.”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본 거야?”
 이연희가 치킨을 먹으면서 서유나에게 물었다.
 “네. 방금 아는 사람이 지나간 거 같아서요.”
 “남자였어?”
 기무용 대리가 그제야 술집 출입문 쪽을 한번 쳐다보면서 서유나에게 물었다.
 “네.”
 “그럼 뭐, 옛날 남자친구였겠네. 유나씨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잘 나갔다면서.”
 이연희가 서유나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아, 맞다. 걔구나. 그런데 걔네 집이 이쪽이었던가! 아닌 걸로 아는데. 이쪽으로 이사왔나!”
 “역시 남자친구였구나. 얼마나 많았으면 누가 누군지 기억도 못 하냐. 대단해.”
 기무용 대리가 짐짓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면 뭐, 회사가 이 근천가 보지.”
 이연희가 그렇게 말하면서 맥주잔을 집어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 근처 어디에서 근무하나 보네요. 고등학교 때 쟤 정말 웃겼거든요. 완전 바보 병신 같은 애였어요.”
 “고등학교 때 사귀던 남자친구였어?”
 기무용 대리가 약간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에이, 아니에요. 완전 바보 병신 같은 애였다니까요. 저런 애랑 미쳤다고 사귀어요!”
 “그럼 누군데?”
 이연희가 서유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고등학교 때 사귀던 남자친구의 같은 학교 친구였어요. 제가 그 남자친구 만날 때면 꼭 쟤도 따라왔거든요. 그래서 늘 셋이서 놀았어요. 아니, 놀았다기보다는 그냥 같이 놀아줬죠. 처음에 남자친구가 쟤 데리고 왔을 때는 좀 짜증났었거든요. 그렇잖아요. 저야 남자친구랑 둘이서 노는 게 더 좋은데, 남자친구가 자기 같은 학교 친구라면서 이상한 애를 데리고 오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쟤한테 막 대놓고 짜증냈거든요. 그런데도 쟤가 매번 우리 만날 때면 따라 나오더라고요. 참 한심한 애였어요. 아마 쟤는 우리가 자기를 되게 좋아한다고 착각했을 거예요. 절대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죠. 아무튼 그런 애였어요. 그런데도 매번 우리들 앞에서 막 장난감 노릇하고 그랬어요. 우리 즐겁게 해주려고요. 정말 바보 같죠! 어우, 지금 생각해도 쟤 참 한심해요.”
 “그래! 음, 혹시 저 친구가 유나씨 좋아했던 거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데. 친구의 여자친구라 말은 못하고, 그래도 얼굴은 보고 싶으니까 둘이 만날 때 자기도 끼어든 거고. 대리님 생각에는 어떠세요?”
 이연희가 기무용 대리에게 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는데. 유나씨 얼굴 보고 싶어서 매번 둘이 만나는 데 따라간 거 같은데. 그리고 어쩌면 저 친구도 알고 있었을 거야. 유나씨하고 유나씨 남자친구가 자기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걸 말이지. 하지만 별 수 있나. 유나씨 보려면 모르는 척 행동하는 수밖에. 완전 순정남이네. 그런데 또 저런 순정남이 의외로 무섭지. 여자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게 있을지 몰라. 그래서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복수심으로 엉뚱한 여자를 막 죽이는 경우도 있어. 그게 복수심인지 대리만족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엉뚱한 여자를 죽임으로 해서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자도 얼마든지 자기 걸로 만들 수 있다고 여기는 거지. 으하하, 이거 좀 무서운 얘기잖아.”
 기무용 대리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좀 기분이 이상했는지 웃음으로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다.
 “어우, 대리님은 소설 쓰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가끔 가다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시더라. 의외로 무서워.”
 서유나가 일부러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대리님이 가끔 그러실 때가 있지. 그게 대리님 본심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도 조심해야 돼. 대리님 의외로 순정파시잖아. 참,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실장님한테 전화 한번 드려볼까요? 혹시 여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을 곳에 계시면, 늦게라도 오실 수 있나 여쭤보게요.”
 이연희가 휴대폰을 꺼내면서 말했다. 그리고 어느새 백 실장의 휴대폰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백 실장이었다.
 [네, 여보세요.]
 “실장님, 저 연희에요.”
 [아, 연희씨. 다들 즐겁게 술 마시고 있나요?]
 “네. 그런데 실장님, 혹시나 해서 전화 드렸어요. 회사하고 멀지 않은 곳이면, 말씀 끝나는 대로 오시면 안 될까요? 한껏 분위기가 고조됐는데, 실장님이 안 계셔서 조금 섭섭해요.”
 [아, 미안합니다. 오늘은 그냥 세 분이서 드세요. 대신 제가 내일 거하게 쏠게요.]
 그러고는 백 실장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연희는 지금 백 실장이 중요한 대화라도 나누고 있나보다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다.
 “실장님이 뭐라세요? 못 오신데요?”
 서유나가 이연희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응, 못 오신대. 중요한 얘기라도 나누시나 봐. 실장님하고는 어쩔 수 없이 내일 마셔야겠다. 대리님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러면서 이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언니, 저도 같이 가요. 마침 저도 화장실 가려던 참이었는데.”
 서유나도 이연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남은 기무용 대리는 잠시 화장실 쪽을 쳐다보다, 시선을 테이블 어딘가에 고정시켰다. 딱히 무언가를 쳐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선을 한 군데 고정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곧이어 기무용 대리의 입술 양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입술이 조금 벌어지면서 동시에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기무용 대리는 웃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 안 나는 웃음이었다.
 침을 흘리면서 소리 안 나게 웃고 있었다.
 기무용 대리는 계속 침을 흘리면서 소리 안 나게 웃고 있었다.
 곧이어 기무용 대리의 다리가 움직였다.
 덜덜덜, 덜덜덜, 덜덜덜…….
 다리를 떤다기보다 위아래로 힘차게 움직인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동작이 컸다.
 동작이 커서 무릎이 테이블을 탁탁탁 쳤다.
 계속 탁탁탁 쳤다.
 그 탓에 테이블 위에 있던 맥주잔이 흔들렸다.
 흔들리다가 기어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잔에 담긴 맥주가 테이블 바닥으로 쏟아졌다.
 계속 쏟아졌다.
 쏟아진 맥주는 테이블을 타고 흐르다 가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계속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고, 기무용 대리의 무릎 위로도 떨어졌다.
 기무용 대리의 바지가 맥주에 젖어 축축해졌다.
 축축한 부위가 점점 넓어졌다.
 치킨이 담긴 접시도 덜커덕 덜커덕거렸다.
 계속 덜커덕 덜커덕거렸다.
 결국 접시에 담긴 치킨도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치킨은 테이블 위로 떨어져서도 계속 통통통 튀었다.
 통통통 튀다 가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중 몇 개는 기무용 대리의 다리에 맞고 튕겨나갔다.
 계속 가게 바닥으로 떨어지고, 기무용 대리의 다리에 맞고 튕겨나갔다.
 덜덜덜, 덜덜덜, 덜덜덜…….
 그러면서 기무용 대리는 소리 안 나는 웃음도 계속 짓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테이블 어딘가에 고정시켰다.
 
 이연희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치마를 올리고 팬티를 내려 변기 위에 앉았다.
 곧이어 이연희의 입술 양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입술이 조금 벌어지면서 동시에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이연희는 웃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 안 나는 웃음이었다.
 곧이어 이연희는 양 손으로 양쪽 허벅지를 긁었다.
 벅벅벅, 벅벅벅, 계속 긁었다.
 곧이어 양쪽 허벅지에서 피가 났다.
 피가 허벅지를 타고 화장실 바닥으로 똑똑똑 떨어졌다.
 그래도 이연희는 계속 양쪽 허벅지를 긁었다.
 피는 이제 똑똑똑이 아니라, 주르륵 주르륵 흘렀다.
 이연희의 양 손톱은 피로 물들었다.
 손가락 전체도 피로 물들었다.
 이연희의 양쪽 허벅지는 상처투성이였다.
 온통 손톱으로 긁어서 생긴 상처였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연희는 상처 부위를 다시 손톱으로 긁었다.
 그래서 몇 번 긁지도 않았는데 허벅지에서 피가 났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금세 벌어지면서 피가 났다.
 벌어진 상처 사이를 손톱이 다시 파고들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많은 피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피가 팬티를 더럽히고, 신발을 더럽히고, 화장실 바닥을 더럽혔다.
 그래도 이연희는 계속 허벅지를 긁었다.
 허벅지를 긁으면서 소리 안 나게 웃고 있었다.
 
 서유나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변기 위에 앉자마자 서유나의 입술 양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입술이 조금 벌어지면서 동시에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서유나는 웃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 안 나는 웃음이었다.
 곧이어 서유나는 오른손 엄지손톱을 이로 물어뜯었다.
 이를 손톱 사이로 악착같이 밀어넣으면서 물어뜯었다.
 손톱을 물어뜯을 때마다 따각따각따각 하는 소리가 났다.
 따각따각따각, 따각따각따각, 따각따각따각…….
 서유나는 계속 웃으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을 물어뜯다가 잘못해서 손톱 밑에 달라붙은 살점을 뜯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손톱 사이에서 피가 났다.
 살점을 물어뜯는 바람에 피가 났고, 살과 붙어 있는 손톱 사이로 이를 악착같이 밀어넣는 바람에 피가 났다.
 피는 팔뚝을 따라 흘러내리다 팔꿈치 부위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계속 떨어졌다.
 허벅지 위로 떨어진 피는 다시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다가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계속 떨어졌다.
 서유나의 오른손 엄지손톱은 절반밖에 없었다.
 미처 손톱이 자랄 새도 없이 이로 물어뜯는 바람에 길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왼손 엄지손톱은 이제 겨우 끝부분이 눈에 보일 만큼 자랐다.
 얼마 전까지 서유나는 왼손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물어뜯었다.
 이로 손톱을 물어뜯지 못하게 될 때까지 물어뜯었다.
 서유나는 오른손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왼손 엄지손톱을 쳐다보았다.
 곧이어 오른손을 잠시 내리고는 왼손 엄지손톱을 이로 가져갔다.
 겨우 눈에 보일 정도로 자란 왼손 엄지손톱을 이로 뜯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손톱이 너무 조금밖에 자라지 않아서 이로 물어뜯을 수가 없었다.
 대신 살점만 자꾸 뜯겨나갔다.
 왼손 엄지손톱에서도 금세 피가 났다.
 서유나는 왼손 엄지손톱 물어뜯는 걸 포기하고 다시 오른손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소리 안 나게 웃고 있었다.
 
 
 3
 
 백 실장은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 자기 벌써 온 거야?”
 백 실장은 신발을 벗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방금 왔어. 그렇게 빨리 온 것도 아닌데 뭐. 당신이 좀 늦었네. 얘기가 많이 길어졌나 봐?”
 “어우, 그 사람, 은근히 말이 많더라고. 지루해서 혼났어. 그나저나 자기, 배는 안 고파? 배고프면 내가 얼른 밥 차려줄까?”
 “아니야, 별로 생각 없어. 당신은 어떻게, 저녁은 먹었지?”
 “아니, 안 먹었어.”
 “뭐야, 저녁도 거르고 지금까지 있었던 거야? 꽤 중요한 얘기였나 보네.”
 “중요하긴 개뿔, 하나도 안 중요해. 괜히 만났어. 시간만 낭비했지 뭐.”
 “그래! 아무튼 그럼 배고프겠다. 얼른 씻어. 내가 대신 저녁 차려줄 테니까.”
 “아니야, 생각 없어. 그 사람하고 같이 얘기하면서 이것저것 뭐 주워먹기는 했거든. 그냥 씻고 나서 과일이나 먹지 뭐. 자기도 먹을 거지?”
 “좋지. 아 참, 그리고 여기 카드. 잘 썼어.”
 샤워를 마치고 나온 백 실장은 곧장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과일 몇 가지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과일 접시를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능숙한 솜씨로 과일을 깎았다.
 “뭐야, 이 시간에 스포츠가 하네.”
 “아니, 녹화해 둔 거야. 중요한 경기거든.”
 “그럼 나중에 봐도 되겠네. 그냥 드라마 보면 안 될까? 나 지금 볼 거 있는데.”
 “그렇게 해. 나야 이따 밤에 봐도 되니까.”
 “밤은 무슨, 또 새벽에 몰래 나와서 보려고. 그냥 일찍 자고 내일 봐. 아니다, 내일 늦겠구나. 모레 봐. 하여튼 자기는 가만 보면 스포츠에 아주 목을 매더라.”
 “이게 진짜 중요한 경기라서 그러지. 이런 건 봐줘야 돼.”
 “봐줘야 되기는 개뿔, 그런 정성으로 내 얼굴이나 한번 더 봐주지 그래!”
 “당신 얼굴이야 내가 매일 보고 있지.”
 “매일 보기야 하지. 그런데 스포츠 경기 볼 때랑 눈빛이 다르다는 게 문제지. 스포츠 경기 볼 때는 아주 눈에서 불이 나요. 대신 나 쳐다볼 때는 흐리멍덩하고.”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 볼 때는 아주 눈도 깜빡거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집중력이 정말 대단하죠. 드라마 작가가 그 드라마 쓸 때도 그렇게 집중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여튼, 남자가 그냥 자기 마누라한테 한마디도 안 지고. 얼른 과일이나 먹어!”
 그러면서 백 실장은 남편한테 과일을 건넨 뒤, 자기도 한 조각 집어서 입에 넣었다.
 덜거덕, 덜거덕, 덜거덕…….
 둘이 과일 먹는 동안에도 거실 테이블은 계속 덜거덕거렸다.
 그 탓에 접시가 흔들렸고, 접시에 담겨 있던 과일 몇 조각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거실 테이블은 계속 덜거덕거렸다.
 테이블 위로 떨어진 과일 조각이 파닥거렸다. 마치 물고기가 뭍에 나와서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기무용 대리는 접시에서 벗어난 과일을 포크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에서는 계속 침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오늘 만났던 사람이 누구라고 했지? 전임실장이라고 했던가?”
 기무용 대리가 여전히 침을 흘리고 다리를 떨면서 백 실장에게 물었다.
 “응. 전임실장.”
 “갑자기 왜 퇴사한 거래?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가!”
 “그런가 봐. 보기에도 좀 안 좋아 보이더라. 요즘은 외출도 거의 못 한대. 가끔 식료품 사러 집 앞 마트에 가는 게 고작이래. 그런데 마트 가서도 정작 사는 건 맥주뿐이라네. 입맛이 없으니까 밥 대신 맥주만 마시나 봐. 내가 보기에는 그 전임실장이라는 사람 아무래도 무기력증에 빠진 거 같더라. 사람이 무기력증에 빠지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잖아. 입맛도 없고. 그 사람이 딱 그렇더라고. 아무튼 그렇게 외출을 잘 못 하니까 나보고도 집으로 오라고 했나 봐.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좀 이상하게 생각했잖아. 아무리 인수인계도 좋지만, 어떻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을 집으로 오라고 하냐, 그런 생각 들었잖아. 게다가 난 여자고 말이야. 그래도 사장님한테 얘기 듣기로는 그 전임실장이라는 사람 책임감도 있고 성실했다고 하셨거든. 그래서 일단 용기를 내서 갔던 거잖아. 에이, 뭔 일이야 생기겠어! 그러면서 말이지. 그런데 가보니까 알겠더라고. 상태가 그러니 본인이 회사 근처로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 같더라고. 그런데도 어쨌든 그렇게 몸도 안 좋은데 인수인계까지 해주려는 거 보면 확실히 책임감은 있는 사람 같더라. 와, 그런데 그 사람 집 정말 지저분했어. 청소를 너무 안 했어. 이상한 냄새도 나고. 그 정도면 차라리 책임감 없는 게 나을 뻔했어.”
 “그 정도였어?”
 “응, 정말 심했어.”
 “그런데 전임실장은 왜 무기력증에 빠졌을까! 갑자기 삶에 회의라도 느꼈나! 몸이 왜 갑자기 안 좋아졌는지는 얘기 안 했어?”
 기무용 대리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침을 흘렸다. 테이블은 계속 덜거덕거렸고, 접시는 계속 흔들렸고, 과일은 계속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테이블 위로 떨어진 과일은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계속 파닥거렸다.
 “책임감이 강했던 만큼 한편으로는 업무에 대한 불안감이나 중압감도 컸던가 봐. 자꾸 악몽에 시달리고 그랬대. 사람들이 자기를 내려다보면서 실실 웃더래. 그것도 아는 사람들이 말이야. 무섭더래. 그래서 요즘은 방에서 잠도 못 잔대. 방에서 자면 꼭 악몽을 꾸니까. 잠도 그냥 소파에서 대충 자나 봐. 아무튼 악몽에 시달리다보니까 자기가 어느새 달라져 있더래. 일상적인 모든 의욕이 싹 사라진 거지. 그런데 그런 얘길 사장님한테 하기는 좀 그렇잖아. 할 용기도 안 났고. 그래서 말없이 회사 안 나간 거래. 그동안 업무에 좀 짓눌려 살았나 봐. 매사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실은 일상에서는 빈틈투성이이듯이, 책임감 강해 보이던 그 사람도 실은 그 책임감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거야.”
 “안 됐네. 그나저나 그러면 업무 인수인계는 제대로 받고 온 거야?”
 “그게 좀 웃겨. 정작 업무 인수인계해 준다면서 불러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나보고 회사 다니지 말래.”
 “왜?”
 “왜는, 본인처럼 될까봐 그런 거지. 본인처럼 갑자기 나도 무기력증에 빠져버릴까 봐. 한 부서의 장이라는 자리가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겠지. 이왕 다닐 거면 각오 단단히 하라는 얘기겠지. 그래서 처음에는 좀 웃겼는데, 듣고 보니까 또 그게 아니더라고. 그 사람 말이 업무 인수인계보다 더 중요한 말이더라고. 업무 인수인계야 뭐, 사실 회사 며칠 다니다보면 이래저래 알게 되는 거니까. 참, 그런데 그 전임실장이라는 사람, 밥 대신 계속 술만 마셔서 그런가, 캔맥주 몇 개 마시더니 나중에는 갑자기 정신을 잃더라. 완전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더라고. 앉은자리에서 막 파닥파닥 뛰고 그랬어. 나중에는 오줌까지 지리더라니까. 그 사람 그러다 큰일 나겠더라. 몸이 많이 망가진 거 같아.”
 “그래! 큰일이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는데? 그냥 나왔어? 119에라도 연락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래야 나중에라도 전문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을 텐데. 본인은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모를 거 아냐!”
 “응.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그래서 일단 그 전임실장부터 좀 안정을 시키려고 했거든.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머리에 또 벌레가 기어들어 왔지 뭐야. 그래서 그 벌레 잡느라 한동안 전임실장 살필 겨를이 없었어. 나는 벌레 잡고 있었지, 전임실장은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막 난리를 치지,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 나중에는 똥까지 바지에 싸더라니까. 어우, 냄새 지독하더라. 똥까지 싸면서 거실 구석으로 막 숨는 거야. 그런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안정을 시키겠어. 그래서 나는 그냥 벌레 잡고 나서 나왔지. 다음에라도 다시 한번 가볼까? 어찌됐든 병원에는 데려가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하자. 나중에 나랑 같이 가보지 뭐. 그런데 벌레는 제대로 잡긴 잡은 거야?”
 “응, 힘들게 힘들게 잡았지. 잡긴 잡았어. 이놈이 어찌나 요리 조리 도망을 치던지, 잡느라 아주 혼났네. 시간 꽤 걸렸어.”
 그러면서 백 실장은 과일을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윽!”
 백 실장이 과일을 우물거리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왜! 또 들어간 거야! 아까 잡았다면서!”
 “아, 몰라. 분명히 아까 잡았는데. 다른 놈이 또 들어왔나. 이제는 이놈들이 하루에 두 번씩 들어올 때도 있네. 아우, 짜증나.”
 그러면서 백 실장은 긴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손에 쥔 가발을 소파 위로 던지고는 과도를 집었다.
 과도 끝으로 정수리 부근을 푹푹 찔렀다.
 “아, 이놈, 진짜 잘 피해. 혹시 아까 그놈인가. 분명히 잡았었는데. 아무튼 이놈들은 한 방에 찔리는 법이 없다니까.”
 백 실장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정수리 부근부터 시작해서 머리 이곳저곳을 과도 끝으로 계속 푹푹 찔렀다. 푹푹 찌르기도 하고, 과도 끝으로 머리를 북북 긁어대기도 했다. 북북 긁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잠시 동작을 멈춘 뒤, 과도를 곧추 세워 빙글빙글 돌렸다. 손에 힘을 줘가면서 빙글빙글 돌렸다. 그런 뒤 다시 위치를 옮겨 과도를 빙글빙글 돌렸다.
 과도로 머리를 푹푹 찌르고 북북 긁고 빙글빙글 돌릴 때마다 피가 머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기를 20여 분.
 백 실장이 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 과도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벌레를 잡기 위해 가발을 벗은 백 실장의 머리는 완전히 삭발을 한 상태였다.
 삭발을 한 탓에 머리 이곳저곳에서 흐르는 피가 한눈에 보였다.
 과도로 더 이상 머리를 후비지 않는데도 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백 실장이 화장실에서 수건을 가져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수건은 금세 백 실장이 흘린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백 실장은 빨갛게 물든 수건을 화장실 쪽으로 휙 던졌다.
 피를 닦아낸 백 실장의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전부 과도로 찌르고 긁고 빙글빙글 돌려서 난 상처들이었다.
 마치 수많은 실핏줄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모양 같았다.
 그런 실핏줄 사이로 군데군데 움푹 파인 곳도 있었고, 새끼손톱만 한 딱지가 져 있는 곳도 있었다.
 “겨우 잡았네. 아, 개운해.”
 그러고 나서 백 실장은 소파에 있던 가발을 집어 다시 자기 머리에 씌었다.
 윤기가 흐르는 긴 갈색 머리 가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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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No Profile
    진아 12.03.30 20:25 댓글 수정 삭제
    굉장히 무서운 소설이었습니다. 공포소설처럼 무섭다기 보다는... 뭔가 근원, 본질적인 공포를 건드리는 데가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앤윈 12.04.05 05:00 댓글 수정 삭제
    서유나는 '칼로 푹'에 나온 서씨군요 +ㅅ+ 반가워라!
  • No Profile
    아이 12.04.06 12:34 댓글 수정 삭제
    어, 늦게 봤습니다.
    제가 요즘 술병이 심하게 나서요.
    진아님이야 늘 응원해 주시니까, 그냥 감사하다는 마음 안고 갑니다.
    앤윈님 고맙습니다. 그 서씨 맞아요. 알아봐 주셔서 다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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