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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혜 시간을 넘어도

2022.08.01 00:0008.01

시간을 넘어도

전삼혜

 

소년은 현관에 서서 소개장을 내밀고 잠시 기다렸다. 집사는 소년의 수수하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차려 입은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년이 손짓으로 ‘말을 못 한다’ 고 하자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개장을 가지고 들어갔다. 소년은 저택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잘 조경된 정원수와 제철 꽃이 저택흘 흐드러진 듯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젊은 귀부인의 취향 같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저택의 윗층 창문들을 바라보다 시선을 고정시켰다. 맨 끝쪽, 아주 살짝 열려 사이로 커튼이 부풀어올랐다 꺼지는 창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일할 곳이 그곳이라고 짐작했다. 사람들은 보통 와인드업, 태엽을 감아 주면 목소리를 듣고 받아쓰는 기계를 복도 끝 방에 두었다. 듣고 받아쓰는 것이 마치 이해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신의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불안한 것일까. 와인드업이 출시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신흥 귀족 사이의 유행이었다가 인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지도 일 년 정도는 되었다. 말을 할 수 없고 가진 기술이 와인드업의 수리 뿐인 소년에게는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집사가 다시 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소년은 부품이 든 가방만 꼭 쥐었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적다는 뜻이다. 빅토리아 여왕 폐하의 은혜로 아이들은 집안일을 돕지 않고 공립학교에 가서 기본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 은혜는 아직 말하거나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펼쳐지지 않았다. 그러니 소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감각을 웅크려야 했다. 다른 하인들처럼. 평범하게.

소년은 짐작대로 복도 끝 방으로 안내되었다. 집사는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문을 반쯤 열더니, 소년이 들어가자 곧 밖에서 문을 닫았다. 아직 낮 햇살이 생생한 오후, 서재도 응접실도 아닌 것 같은 방 안에서 오래된 잉크 냄새가 흘렀다. 커튼을 열어두는 편이 냄새가 덜할 것 같아 소년은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바람은 저택 안쪽을 향해 불고 커튼은 부풀어 순간 소년의 시야를 가렸다. 소년이 커튼을 걷자 바깥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뒤를 돌아본 소년은 흠칫 놀라 한 발자국 물러섰다. 금발의 긴 머리를 곱게 땋아 늘어뜨린 소녀가 소리도 없이 앉아 있던 탓이었다. 그러나 산 사람이라면 느껴질 법한 숨소리나 몸의 작은 떨림조차 소녀에게선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다시 발을 내디뎠다. 잉크로 엉망진창이 된 레이스 장갑과 장갑 끝을 뚫고 삐져나온 펜촉을 보고 소년은 긴 숨을 내쉬었다. 소녀라고 생각했던 것은 소녀처럼 꾸며진 와인드업이었다. 좀 더 가까이 가 보니 금발 머리카락 아래에는 와인드업에 소리가 입력될 때와 입력되지 않을 때를 나타내는 작은 전구가 있었다. 희한한 일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하인을 한껏 치장한 다음 일을 시키는 주인이 있을까? 있다면 괴짜라고 소문이 날 것이다. 그런데 이 와인드업은, 편지를 받아쓴다는 원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소녀처럼 꾸며져 있었다. 소년은 와인드업이 종이를 놓고 글씨를 쓸 수 있도록 제작된 책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와인드업의 손을 살폈다. 레이스 장갑도 펜촉이 뚫고 나갈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억지로 끼운 듯 손끝 부분이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뎌진 펜촉이 보였다. 그 다음은 펜에 묻은 잉크가 충분히 씻기지 않고 말라붙은 찌꺼기들이 보였다. 소년은 이 와인드업이 어쩌면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손을 많이 탄 것 같았다.

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주인이 지시한 다음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소년은 와인드업에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보기만 했다. 어디를 어떻게 손봐야 될지 머릿속에 그리는 동안, 뒤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나는 것도 몰랐다. 소년이 두 번째 기침 소리에 놀라 일어섰다. 뒤를 돌자 문 앞에 하녀 한 명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두꺼운 이동식 가림막이 세워져 있었다. 실루엣 하나 비치지 않는 천이었다. 아마 그 뒤에 의자가 있고, 귀부인은 그곳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보통 귀부인들은 그렇게 하니까. 커튼 뒤에 흔들의자가 있는 듯 앞뒤로 오가는 작은 끼익끼익 소리가 들렸다. 귀부인의 목소리가 커튼 너머로 들려왔다. 노파 같기도 하고 젊은 부인 같기도 했다. 심하게 쉬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소년은 부인의 나이에 대해 추론하는 것을 멈췄다.

그것이 소년의 도리이기 때문이었다.

“귀는 들리니?”

소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귀부인이 다시 물었다.

“글자를 쓸 줄 아니?”

소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숨겨 봐야 어차피 탄로날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부인은 소리 죽여 웃고는 하나 더 질문을 던졌다.

“말만 못 하는 거야? 딱하네. 그렇지만 글자로라도 이 방의 일을 바깥 애들에게 떠들지 않아야 한다는 건 알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못 하는 거냐는 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개장에도 쓰여 있고, 중요한 것은 이 방에서 귀부인이 말하고 와인드업이 받아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알리지 않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는 커튼 뒤의 귀부인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더니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펜던트였다.

“열어보렴.”

펜던트 안에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젊은 귀부인이, 눈을 감고 잠든 듯한 대여섯 살의 여자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귀부인이 속삭였다.

“우리 리지야. 지금은 시골에서 요양 중이고.”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와인드업 쪽으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애써 사진에 고정시켰다.

“리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데, 저 기계가 들인 지 반 년도 안 된 게 망가졌지 뭐야. 잉크는 검은색이나 짙은 청색이면 충분해. 하루 정도 고칠 시간을 줄게. 리지는 일주일에 두 번은 편지를 받아야 하니까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어.”

귀부인의 말을 듣고 소년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아마 이 사진의 아기가 리지이고, 지금은 글을 능숙하게 읽을 만큼 자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시골로 요양을 가 있다니 튼튼한 아이는 아닐 것이다. 귀부인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겠구나. 소년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쓰는 편지에 등장할 만한 단어가 많은 천공 카드 묶음이 있던가, 잠시 생각했다. 귀부인은 약하게 기침을 하더니 종을 울려 하녀를 부르고, 방을 나갔다. 펜던트를 한 손에 꼭 쥔 채로. 흔들의자 앞에 혼자 남겨진 소년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와인드업을 들인 지 반 년인데 망가졌고, 하루의 시간 안에 수리를 해 내는 것이 소년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일 말고도 다른 부분이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령, 리지라는 아이가 지금 열댓 살쯤 되었다면 저 와인드업과 몸집이 비슷하겠구나 하는 생각. 소년은 가방을 열어 예비 부품, 펜촉, 잉크와 가장 중요한 천공 카드 뭉치를 꺼냈다. 천공 카드는 와인드업에게 입력하는 사전이고, 와인드업은 오직 천공 카드에 새겨진 단어만 쓸 수 있었다. 숨을 들이쉬어야 다시 내쉴 수 있는 것처럼. 어머니와 딸.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고아였던 소년에겐 머나먼 관계였다. 건강, 풍경, 날씨, 안부... 목적별로 묶인 천공 카드를 이리저리 정리하다 소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천공 카드의 구멍이 잘 안 보인다 싶더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소년은 정리한 카드를 가방 안에 차곡차곡 챙겨 넣고 하인들이 쓰는 숙소로 내려갔다.

새로운 하인이 오면 보통 이것저것 물어보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소년은 책이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배웠다. 설령 그 하인이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기술자라고 하더라도 그랬다. 하인들은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했다. 거창한 것을 알고 싶어 묻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거기는 어떤 곳인지, 가족은 있는지, 예전엔 어떤 집에서 일했는지. 그러나 소년은 아무 질문도 받지 않았다. 하인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구석 쪽 자리로 소년의 팔을 잡고 가 손짓으로 이부자리를 펴는 시늉을 했다. 소년은 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을 수는 있다는 표시였다. 그러자 왁자하게 웃음소리가 터졌다.

“앨런 형, 쟤 들을 줄 아는 모양인데요! 그냥 말로 해도 되겠네!”

앨런이라고 불린 나이 많은 하인이 제일 크게 웃은 아이에게 주먹을 쳐들어 보였다. 아이는 이제 열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소년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와 비슷한 나이였다. 앨런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소년의 어깨를 밀어 딱딱한 침대에 앉혔다.

“우린 새벽 네 시에 일어나지만 넌 그럴 필요 없다고 들었다. 침대 정리는 알아서 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나보다는 잭한테 말해라. 저기 건방진 꼬마가 잭이다. 난 물건 나르느라 바쁠 때가 많으니까.”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잭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

“형, 뭐라고 불러야 돼요?”

소년은 모르기에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에게 이름이 있긴 할까. 앨런이 소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소개장엔 잭이라고 써 있던데, 저기 이미 작은 잭이 있으니까 넌 큰 잭이다.”

그런 소개장이었구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옷을 벗고 자리에 눕자 남아있던 등불을 누군가 불어 껐다. 어둠 속에서 소년은 허공에 ‘잭’이라는 이름을 써 보았다. 평범한 사람들도 이름은 남이 붙여 주겠지.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소년에겐 목소리가 없었다. 소년이 일할 수 있는 곳은 몇 군데 없었다. 기계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몸집 작고 날쌘 아이들이 하는 공장 허드렛일을 했다. 일자리를 옮길 때마다 주인이 부르기 편한 대로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다가 ‘말을 받아쓰는 기계’ 와인드업 기술자인 매그넘의 눈에 띈 지도 오 년 가까이 흘렀다. 이곳저곳 가서 기계를 고치고 천공 카드를 갈아주었다. 한 곳에 일주일을 머물기도 했고 일 년 넘게 머물기도 했다. 소년의 세계는 천공 카드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르스 부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길고 짧게 두드리는 소리가 알파벳에 대응되고, 그걸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고 했다. 소년이 다루는 천공 카드의 구멍과 비슷했다.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구멍이 잔뜩 뚫린 종이에 불과하지만, 카드 한 장마다 단어가, 문장이 들어 있었다. 그 규칙을 이해하도록 설계된 기계가 와인드업이었다. 듣고, 천공 카드에 대입하고, 알파벳으로 받아 적는 것.

코 고는 소리가 침실 안을 채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와인드업의 시대는 언제까지 갈까. 화려한 색깔의 글씨로 그림처럼 편지를 쓰는 게 유행이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다양한 잉크를 팔지 않는다. 소년이 어른이 되면 지금처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일을 하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와인드업이 편지를 쓰는 동안 계속 옆에서 지켜보아야 정확히 어디가 고장났는지 알 수 있는데, 비밀스런 이야기를 듣도록 내버려두기에 너무 커 버리면 방 밖으로 내쫓길 수도 있었다. 아니, 와인드업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소년은 눈을 꽉 감았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유일한 존재인 와인드업이 사라진다면, 그 세상에서 자신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두려웠다. 미래가 무엇인지 소년에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미래를 두려워할 처지가 된 자신이 배가 불렀다고 생각했다. 당장 하루하루가 먹고 살기 급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내일도 모레도 아닌 먼 훗날을 두려워하다니. 소년은 하, 하고 작게 한숨을 쉬고 얇아빠진 이불 안으로 소리 없이 몸을 웅크렸다. 곧 새벽이 오고, 하인들은 일찍 깨야 하니까 소년은 되도록 조용히 잠들고 싶었다.

눈을 뜨자 부엌 쪽에서 큰 목소리와 냄비들이 카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들은 먼저 일어나 방은 텅 비었지만 아직 썩 늦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제 귀부인에게도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가림막 뒤의 귀부인 마님과 잠시 이 저택에 고용된 수리공인 자신이 정중한 인사를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년은 옷을 갖춰 입었다. 작은 잭이 문 틈으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형, 아침 식사는 부엌에서! 어제 갔던 방이랑 그 옆방은 들어가도 된대요!”

일이 바쁜지 잭은 그 말만 남기고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아. 와인드업을 고쳐야 했지. 소년은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으면 나가기로 했다. 그때까지 뭘 한다. 빛이 비쳐드는 곳에 소년은 다시 천공 카드를 펼쳐놓았다. 필요 없는 카드를 골라내고 나자 눈앞이 가물거렸다. 조심스레 부엌으로 가니 하인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소년도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었다. 누군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글은 읽고 쓸 줄 알아?”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마님 앞에서도 고개 끄덕이고 젓고 그래?”

소년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소리가 퍼졌다. 사용인이 공손하게 대답하지 않고 몸짓으로 이야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게 계급사회의 규칙이었다. 개가 사람의 말을 들어야지, 사람이 개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듯이.

“마님을 봤어?”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년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손에 쥔 식기를 보았다. 길거리에서 빌어먹을 때는 식기 따위 필요치 않았다. 소년이 가진 기술, 와인드업을 고치는 것과 비밀을 지키는 두 가지만으로 식기를 쥐고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소년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식사 후 소년은 기름때 묻은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갔다. 와인드업을 고치는 데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일단 이미 찢어시다시피 한 레이스 장갑을 벗겨야 펜촉을 교체할 수 있었다. 내부 부품도 살펴보려면… 와인드업의 드레스를 벗겨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소년이 대한 여자라곤 하인과 귀부인뿐이었고, 누구도 드레스와 장갑을 벗기고 입히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소년은 어찌할 줄 몰라 복도를 서성거리다 어린 하녀에게 손직했다.

“뭐가 문제… 아! 너 말 못하는 걔구나!”

어린 하녀는 손뼉을 짝짝 치며 즐거워했다. 소년이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손에 장갑을 낀 모습, 그리고 벗은 모습. 쇼윈도우에서나 본 치렁치렁한 치마, 그 다음엔 그냥 밋밋한 목각인형. 종이를 하녀에게 건넨 뒤에는 와인드업을 계속 가리키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하녀는 빠르게 상황을 눈치채고 웃으며 소년에게 말했다.

“옷을 벗겨야 하는 거야? 방법을 모르는 거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가 대답했다.

“마님께 전해 드릴게. 아, 하지만 알몸인 채로 남자와 두기는… 음… 알아서 해 볼게.”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소년은 멍하니 인형을 보았다.

알몸인 채로 남자와 둔다고? 그래봐야 와인드업일 뿐인데?

비싼 드레스와 장갑으로 치장해도 본질은 그저 글씨 쓰는 기계일 뿐인데.

귀부인의 허락을 받았는지 어린 하녀가 달려왔다.

“장갑이랑 드레스는 내가 벗겨줄 거야. 그 대신 주위에 마님을 대하는 것처럼, 그… 가림막을 설치하고, 그…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랬어. 엘리자베스는 숙녀니까. 너는 왕진 의사 선생님이고, 엘리자베스의 알몸을 되도록 보지 마. 고칠 곳을 다 치료하면 드레스를 입힐 거야.”

어린 하녀가 다시 방 밖으로 나가자 곧 더 나이 먹은 하녀들이 들어와 인형 주위에 가림막을 설치했다. 흘끗 문 쪽을 보니, 다시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긴장한 소년에게 귀부인의 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엘리자베스를 잘 치료해 주십시오.”

하녀들이 가림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자 소년에게는 더 익숙한, ‘기계’ 그대로의 와인드업이 있었다. 소년은 세심하게 와인드업의 등 부분 판을 떼어내고 안의 톱니바퀴를 살펴보았다.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야 와인드업은 작동할 수 있다.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받아쓰는 것도, 때로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도 모두 태엽의 힘이었다. 와인드업은 반 년도 되지 않았다기엔 톱니바퀴가 너무 많이 닳아 있었다. 소년은 일 주일에 두 번 편지를 쓴다는 귀부인의 말을 떠올리며 얼마나 긴 편지를 쓰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소년은 말을 해 본적이 없었으니 말을 얼마나 많이 해야 톱니바퀴가 이렇게 닳을지 알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소년은 임시 조치를 하고 종이에 ‘추가 수리가 필요하다’는 글을 적고 와인드업 사무소의 주인인 매그넘의 카드를 가방에서 꺼냈다. 소년이 가림막 밖으로 나가자 하녀들이 들어가 와인드업에게 새 옷을 입히는지 바스락거리는 천 소리가 났다.

소년은 자신이 쓴 글씨와 카드를 어린 하녀에게 건넸다. 어린 하녀는 종이를 보자 얼굴을 찡그렸다. 소년이 종이를 다시 보니 종이에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소년은 그것 때문에 어린 하녀가 화났다고 생각했지만, 어린 하녀는 ‘수리’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나, 글 읽을 줄 알아. 이건 ‘수리’라는 거지? 기계한테 쓰는 단어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린 하녀가 더 목소리를 작게 낮춰 속삭였다.

“주인 마님은 엘리자베스를 사람처럼 대하길 원해. 사람에게 쓰는 단어로 바꿔야 할 거야. 예를 들면… ‘약’이라거나.”

어린 하녀는 그 단어를 생각해낸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소년은 끄덕이며 ‘다시 써오겠다’고 종이에 적어 보여준 후 종이를 접어 자신의 옷 안으로 감추었다. 엘리자베스를 가린 가림막이 치워지고 아까와 다른 옷을 입은 와인드업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은 종종걸음으로 나가려는 어린 하녀에게 허겁지겁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장갑 끝을 잘라 줘.’

계속 펜촉을 갈아대려면 와인드업에게 장갑을 씌운 채로 놔둘 수는 없었다.

와인드업, 엘리자베스가 ‘나았다’는 말을 듣자 귀부인은 하녀를 통해 오늘 오후부터 편지를 쓰겠다고 소년에게 전했다. 소년은 세 시 정각에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가림막이 쳐졌다. 하녀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가림막 옆에 서 있다가 귀부인이 종을 두 번 울리자 나갔다. 귀부인은 가림막 뒤에서 아, 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신호를 주자 와인드업의 램프에 파란 불이 켜졌다. 받아쓸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귀부인의 편지가 시작되었다.

<리지, 잘 지내니? 아직도 기침을 많이 하는지 걱정이 되는구나. 가족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단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역 때문에 바쁘시지만, 늘 너를 사랑한다는 편지와 작은 선물을 보내오곤 하셔. 거기 생활은 어떠니? 너는 이제 글을 읽을 줄 알겠지. 머리가 좋으니까 말야. 나의 리지! 너에게 맞는 가정교사를 꼭 찾아 보내고 싶었는데 유모가 그런 사람 없어도 너는 잘 배울 수 있다며 반대했지. 숙녀답게 자라는 교양은 그곳의 하인들이 충분히 가르쳐 줄 거라고 그랬어. 나도 그 생각에 반대는 하지 않았단다. 혹시 아직도 가정교사가 오지 않아서 네가 초조해할까 봐 이렇게 편지를 보내. 지난 달 편지에는 하루라도 빨리 네게 맞는 가정교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은 어떤 게 좋을지 요새 유모에게 물어보고 있어. 아, 너를 안고 내가 동화를 들려주며 재울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너는 너무 커버렸다며 토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즐겁기도 하구나. 너는 정말 작게 태어났단다. 그러던 네가 걷고 뛰고 자라다가 기침이 다시 심해져 별장으로 가게 되었을 때 정말 슬펐지. 오, 이 얘기는 몇 번이나 다시 하게 되네. 이해해 주렴. 네가 스스로 펜을 들고 나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게. 이쪽 걱정은 하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유모나 다른 하인들을 통해 연락하렴.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하고. 사랑한다. 나의 작은 천사.>

귀부인이 다시 목소리로 정해진 신호를 보내자 와인드업이 멈췄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와인드업의 오른손을 들고 편지를 꺼냈다. 잘못된 글자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소년은 하녀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소년은 혼날 각오를 하고 귀부인을 가린 막을 등지고 뒷걸음질로 걸어갔다. 그리고 똑, 문을 한 번 노크했다.

귀부인이 있는 가림막 뒤에서 딸랑, 종이 한 번 울렸다. 하녀가 무표정하게 들어와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다 쓴 편지를 하녀에게 건넸다. 하녀가 다시 그것을 가림막 뒤 귀부인에게 건네자 귀부인은 침묵했다. 편지를 읽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소년에게 말했다.

“다음부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을 때는 장갑을 끼도록 해. 숙녀답게 대해야지.”

소년에게 뒤로 돌라고 한 뒤, 가림막이 치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다시 들어와 소년에게 이제 방 밖으로 나가도 된다고 말했다.

소년은 방금 자신이 무슨 상황을 겪은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어머니가 딸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지는 대체 몇 살일까? 글을 읽을 줄 아는 건 몇 살부터일까? 공립학교에는 여덟 살이면 충분히 들어간다고 했는데, 머리가 좋다면 여섯 살 쯤 되었을까? 그 나이의 아이에게 숙녀라는 말을 쓰긴 하는 걸까? 귀족이나 젠트리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소년이 알 수는 없었지만 귀부인의 편지에는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대할 때는 장갑을 끼라고? 귀부인은 마치 와인드업이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그런 특이한 귀족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숙녀답게 대하라’는 지시며 ‘낫다’는 표현이며, 이 저택은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할 수 없이 소년은 심부름을 다녀오는 어린 하녀에게 종이를 건넸다. 하녀는 ‘딸’ ‘몇 살?’이라는 두 단어를 보고 눈매를 찡그리더니 종이를 찢어서 날려버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뒤 말했다.

“내 이름은 메리야. 그리고 마님의 딸 이야기는 이 집에서 하면 안 돼. 마님을 보려고 해서도 안 돼.”

소년이 물음을 표하기도 전에 메리는 부엌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날 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온 소년은 마당에서 흔들리는 흰 그림자를 보았다. 열린 창문 안쪽에서도 바깥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유령일까? 소년은 귀를 기울였다. 작은 흥얼거림이 들렸다. 자장가였다. 귀부인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소년은 자장가를 들으며 잠든 적은 없었지만, 길거리에서 지낼 때 집 안이나 집 밖에서 여자들이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재우는 것을 들은 적은 있었다. 낮고 조용하게 부르는 콧노래를 듣고 있자니 유령이라 해도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년은 열려 있던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쓸쓸함이 느껴지는 가락을 따라 해보려 했지만 소년의 목에서는 음색 없는 소리만 그르륵대며 나왔다. 밤중에 나서 좋을 소리는 아니었다. 콧노래로 해 보려 해도 꽉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장가를 부르고 듣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소년은 조금 씁쓸해졌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마님의 딸’ 이야기를 다른 하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식사 시간이었다. 작은 잭이 낄낄거리며 ‘일해보니 어떠냐’고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이 대답하지 않자 작은 잭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큰 잭은 기술이 있으니 어디 가서라도 먹고 살겠지만, 마님처럼 이상한 사람들 시중 들려면 힘들겠어. 우리 중에도 마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녀들, 그것도 서너 명 뿐이라고!”

소년은 소설가의 와인드업도 고쳐봤고, 색색의 잉크로 편지를 쓰는 사람의 와인드업도 고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신의 언어를 쓰는 것뿐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작은 잭이 말한 ‘이상한’ 사람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하는데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하인이 작은 잭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너 그 말 새어나가면 이 집에서 잘린다. 마님이 아이만 안 잃었어도.”

“아아아. 응. 응.”

하인들은 빠르게 아침을 먹고 나가버렸고, 소년은 혼자 아침 식기를 주방에 나르며 주어진 조각들을 천천히 끼워맞췄다. 귀부인은 이상한 사람이고, 아이를 잃었고, 아이에게 편지를 쓰고, 아이 이야기는 저택에서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은 리지고 와인드업의 이름은 엘리자베스이다. 그리고 마님을 보려고 해선 안 된다.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자 소년의 마음 속에는 외로움과 슬픔이 뒤섞인 무언가가 빠르게 밀려오고 다시 쓸려나갔다. 자신이야 소중한 사람이 있어본 적이 별로 없으니 잃어본 적도 적지만,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마음의 힘을 많이 쓰게 했다. 아이를 잃은 여자가 미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거리에서 여자는 아이 이름을 부르며 울거나 인형을 안고 아이인 것처럼 쓰다듬곤 했다. 다만 귀부인은 편지를 쓸 뿐,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이라는 건… 어쩌면 비슷하지 않을까. 자신에게는 그런 부모가 없었고,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소년은 그 여자나 가림막 뒤 귀부인에게 같은 감정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후마다 소년은 천공 카드를 뒤적거렸다. 엄마가 아이에게 보낼 만한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지는 노을 같은 쓸쓸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땅처럼 아름다운.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놀라도록 그리운. 네 생각만 해도 마음에 햇살이 드는. 와인드업의 역할 중에는 사람들이 부르는 말을 더 아름답게 받아쓰는 것도 있었다. 소년이 천공 카드를 펼쳐놓고 집중하고, 귀부인의 편지를 받아쓰는 동안 두 주가 흘렀다. 여전히 부인의 편지 속 시간은 널을 뛰었다. 두 주가 흐른 화요일, 소년이 쉬는 날 저녁 시간이었다. 작은 잭이 다가와 소년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소년은 꺽꺽대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작은 잭이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일러바쳤지! 내가 죽은 애 이야기를 했다고!”

소년은 작은 잭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글을 쓸 수는 있지만, 그걸 왜 굳이 소년이 일러바친단 말인가? 소년은 시간이 지나면 떠날 떠돌이 수리공이었고 하인을 내쫓아서 이익을 볼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하인들이 눈치챈 듯 작은 잭을 말려도 작은 잭은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었다. 천공 카드에 없는 단어들이 소년의 귀로 밀려들어왔다. 작은 잭이 씩씩거리며 짐을 싸러 가자 다른 하인들이 와서 소년의 얼굴에 차가운 천을 대 주었다.

“...정말로 네가 안 일렀어?”

전에 작은 잭을 말린 하인이 와서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톰이라는 이름의 하인은 갑자기 집사가 작은 잭을 내쫓았다고 말했다. 작은 잭은 좀 입이 가볍고 산만하지만 일을 잘릴 정도는 되지 않았고, 그렇다면 마님에 대해 떠든 걸 누군가 일러바친 게 아니냐는 게 톰의 이야기었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마님의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이 들키면 자신이 쫓겨나리라고, 소년은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소년이 기계 옆에 서 있을 때는 기계의 일부처럼 보다가도, 간혹 자신의 비밀이 밝혀질까 두려워 소년을 사람으로 본다고. 자신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게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글로 쓴다 해도 톰은 읽을 수 없을 거였다. 대부분의 하인들은 글을 유려하게 읽을 필요가 없었다. 사랑, 기계, 비밀, 삶, 그리움, 외로움 같은 단어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선 단어여서 하인들에게는 쓸모 없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러나 그 이후로 하인들은 눈에 띄게 소년을 따돌렸다. 빈정거리는 투로 ‘유일한 잭’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년은 작은 잭에게 맞았던 자리를 문지르면서 자신이 왜 그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 하인들은 왜 소년을 싫어하는지, 왜 자신이 마님에게 가까이 간다는 이유로 자신이 마님에게 무언가 일러바쳤다고 생각하는지,  왜 자신이… 유일해지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지. 말을 할 수 없어서 자꾸만 유일해지는 것이 소년의 고민임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은 소년이 특별해지길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년은 하녀에게 ‘귀부인이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말을 듣고 다시 와인드업 옆에 섰다. 가림막 뒤에서 귀부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리지의 나이가 훌쩍 뛰어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리지. 네가 벌써 데뷔탕트를 할 나이가 되다니! 너도 이제 어엿한 숙녀로구나. 더이상 나의 꼬마 리지가 아닌 거야. 사교계에 데뷔하면 너는 얼마나 큰 주목을 받을까?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너에게 반해 밤을 새울까? 네가 조금만 더 건강해지면 이곳으로 불러오려고 해. 너에게 맞는 드레스가 어떤 걸지 매일매일 재단사를 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단다. 너의 금발 머리카락에는 어떤 색이 가장 어울릴까? 눈동자와 비슷한 하늘색이어도 좋겠고, 봄의 꽃잎을 닮은 연한 노랑도 어울리겠지. 네가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날 모든 아가씨와 신사들은 널 보며 탄성을 내뱉을 거야. 조금이라도 빨리 너를 만나고 싶어 나는 매일 조바심을 내고 있단다. 하인들도 돌아온 너를 보면 감탄하겠지. 파리했던 네 볼엔 복숭아빛 생기가, 가늘고 흰 팔다리에는 조금은 살이 붙어 있겠지? 이제 키가 엄마와 비슷해졌을지도 모르겠구나. 숙녀다운 교양은 잘 쌓고 있니? 숙녀라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줄 알아야 하는데, 네가 있는 시골엔 제대로 된 악기 하나도 없겠지!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네가 여기 오면 엄마가 가장 좋은 선생을…>

소년의 눈이 무심코 와인드업이 아닌 가림막을 향했다. 가림막 뒤에서는 억눌린 울음 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없는 공간. 가림막만이 귀부인과 소년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훌쩍이는 소리 사이를 와인드업이 유려한 단어로 채우는 펜촉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가림막 안에서 헉, 숨 들이쉬는 소리와 함께 신경질적으로 종 한 번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인드업은 ‘눈물 소리 가운데를 어머니의 종소리가 채웠습니다.’ 라고 유려하게 받아썼다. 하녀가 오자 귀부인은 신호를 보내 와인드업을 껐다. 그리고 간신히 들릴 정도로 말했다.

“어지러워. 오늘은 쉬어야겠어.”

소년은 중간에 끊긴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마음이 벅차 말을 잇지 못하겠구나’ 라고 부인의 말투를 학습한 구절로 편지는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귀부인은 방을 나간 후였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종이에서 펜촉을 떼어내고 와인드업의 닳아버린 펜촉을 바꾸었다. 종이는 그냥 두어도 될 것 같았다. 귀부인은 아마도 ‘리지’ 에게 편지를 쓰러 다시 찾아올 것 같았다. 그 편지를 받은 리지가 몇 살일지는 모르지만. 문득 소년은 자신이 리지의 진짜 나이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가림막이 치워진 곳, 늘 부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던 펜던트를 발견했다. 첫날 부인이 차고 있던 펜던트였다. 안에는 갓난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소년은 펜던트 안의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으레 조금은 흔들리기 마련인 사진에서 오직 아이만이 미동도 하지 않고 찍혔음을 알아차렸다.

아아.

소년은 소리내지 않고 입을 벙긋거렸다. 이 사진을 찍을 때 아이는 이미 살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부인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죽은 아이를 안고, 혹은 죽은 친지와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은 흔한 관습이었다. 소년은 왜 이 저택에서 ‘리지’의 이야기가 금기였는지 깨달았다. 거리의 여자가 안고 다니는 낡은 천뭉치처럼, 리지는 귀부인의 상상 속에서만 살아 나이를 먹고 있었던 거였다.

가림막 뒤 귀부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것도, 어쩌면 리지가 죽은 그 때 귀부인은 자신을 멈춰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년은 펜던트를 부인이 떨어뜨렸던 그대로 되돌려놓았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커튼이 날리고, 와인드업의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살았더라면 저 나이였을까. 아니면 더 어릴까. 더 나이를 먹었을까. 아무 것도 소년은 물을 수 없었다. 다만 구빈원에서 죽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모아 무덤에 묻을 때 ‘하늘의 천사가 되었다’고 한 것을 기억했다. 소년은 무심결에 종이 한 장을 꺼내 ‘리지는 천사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써서 와인드업의 편지 위에 얹어 놓았다. 자신은 방에서 나가야 했으므로.

두어 시간 뒤, 귀부인은 하녀를 보내  다시 자신을 방으로 불렀다. 편지를 이어 쓰려는 것일까. 소년은 자신의 글이 귀부인에게 읽혔을지, 그냥 버려졌을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년을 맞이한 것은 자신을 붙잡은 하녀와 가림막이었다.

가림막의 틈새 사이.

그 사이로 주름진 손이 나왔다. 하녀는 무릎을 세우라며 소년을 앉혔다. 귀부인의 손바닥이 소년의 뺨에 닿기 알맞은 위치였다.

그리고 다음에 소년이 마주한 것은  뺨으로 날아온 귀부인의 손바닥이었다. 하인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매질을 할 때조차, 귀부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년은 비명 대신 끅 소리를 냈다가, 하녀의 엄한 눈치에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나 귀부인의 손에는 분노가 아닌 슬픔이 고여 있었기에 소년은 그것을 묵묵히 받아냈다. 흘끔 와인드업을 돌아보니, 편지 위에 자신이 쓴 종이만 구겨져 있었다.

가림막 뒤에서 귀부인이 종을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때마다 하녀는 소년의 자세를 바꾸었다. 귀부인은 가림막 틈새로 소년의 뺨을 때리다가, 머리를 때리다가, 온 몸을 손으로 매질했다. 귀부인의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었다. 귀부인은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소년의 몸이 맞으며 내는 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다. 오직 매질을 당하느라 가림막 틈새에 귀를 대다시피 한 소년만이 방 안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네가, 감히 네가, 감히, 감히, 감히… 감히…”

무엇이 생략된 말일까.

소년은 묵묵히 아픔을 받아냈다. 아마도 이 일로 자신은 이 집에서 나가야 하리라. 혹은 하인들이 자신을 무시했듯, 귀부인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리지에게 편지를 쓰겠다며 자신을 부를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쓰라림, 얼얼함, 볼 수는 없지만 귀부인의 눈에 고였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눈물.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을 조용히 지켜보는 방 안의 와인드업과 무표정한 하녀뿐이었다.

“감히…”

주름진 손이 가림막 사이로 들어갔다. 하녀는 가림막 안으로 들어가 다시 틈새를 단단히 여몄다. 소년은 어쩐지, 가림막 뒤의 귀부인의 행동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귀부인은 의자에 기대듯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을 것 같았다. 의자와 슬픔이 동시에 있는 자들이 그러하듯이. 소년은 귀부인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한낱 고용인이었으므로. 위로는 건방진 일이었다. 반항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년은 묵묵히 와인드업의 옆으로 가 구겨진 종이를 집어 찢은 후 언제나 와인드업 옆에 두던 가방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유일한 잭.

귀부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두려워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어버린 사람.

귀부인이 종을 두 번 울리자 하녀가 나갔다. 가림막 안에서는 억누른 흐느낌만 들려왔다. 소년은 이 자리가 ‘편지를 쓰는 자리’가 되도록 와인드업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시간을 넘어도 자라지 않는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 엄마가,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 편히 울 수 있도록. 비록 한 방울의 눈물도 소년에게 보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해도.

그 긴 시간을 넘고 넘어도 소년의 입이 단 한 마디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간에서 유리된 둘이 가만히, 한낮의 방안에 머물러 있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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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새턴 22.08.02 20:22 댓글

    엘리자베스의 애칭이 리즈라는 걸 알고 신기해 했던 적이 있었지요. 늘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는 자세와 보안에 철두철미할 것이 좋은 개발자의 요건이라고들 하는데, 소년은 그렇게 되지는 못하겠군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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