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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프린세스가 될 예정이었다

 미로냥

: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 2" 배경이며, 공식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젠장.”

좋은 목소리였다. 은방울이 굴러가는 것 같은. 무언가를 설명하면 귀에 쏙쏙 들어올 것 같은. 과연 요즘 왕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무도회의 우승자이자, 각종 고난이도 근무처들의 희망, 각종 사교계 강사들의 물주…… 아니 총애받는 학생다운 신뢰감 가는 목소리. 그러나 그 어조와 내용물이 극히 놀라웠기에 큐브는 청소하던 손을 멈췄다.
설마, 꿈인가?

“뭐라고 하셨어요 아가씨?”
“젠장. 망했다고 했어. 큐브.”

맙소사. 꿈이 아니었다. 귀한 아가씨 입에서 젠장이라니. 큐브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아가씨 앞에 앉았다.

“왜 그런 말투를 쓰시는 거예요? 아가씨!”
“말투가 뭐! 지금 그게 중요해? 큐브. 난 지금 열 일곱 살이라고.”
“네. 구국의 영웅이며 마왕을 퇴치한 용사님은 우리 주인님! …의 무남독녀 외동따님이신 우리 아가씨. 아가씨께선 지금 열 일곱 살 이 개월 되셨죠. 그게 뭐 어쨌는데요?
“망했다고!”

용사의 양녀이자 천계에서 용사에게 특별히 내려 보낸 귀하디 귀한 아가씨가 더없이 방만한 자세로 주저앉아 있다가, 역시 조심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불량한 동작으로 벌떡 일어났다. 요즘 유행하는 얇고도 짧은 여름 튜닉 덕분에 가슴팍이 훤히 들여다 보였으므로 큐브는 아주 잠깐이지만 얼굴을 붉혔다.

“큐브 너는 산전수전 다 겪은 고위 마족 주제에 가슴 좀 보였다고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그 산전수전을 마계에서만 겪어서요.”
“쯧. 악마들은 육욕 정돈 가지고 놀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지고 놀긴 가지고 노는데, 그게…… 아무튼 아가씨. 대체 뭐가 망했다는 거예요?”
“난 열 일곱 살 이 개월이 됐어. 문제는 올해 수확제가 어제 끝났고 난 겨우 무도회의 첫 금상을 손에 넣었으며 내년 수확제 따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야. 지금 계산해 봤는데, 나는 수확제 직전에 열 여덟 살이 되더라고.”

아가씨는 한탄하며 큐브의 손에서 식기를 낚아채, 자신이 설렁설렁 닦기 시작했다. 큐브는 곁눈질로 스케줄을 확인했다. 그러고보니 가사일을 함께 하기로 배정된 시간이었다. 잔소리를 퍼부으며 애걸복걸 등 떠 밀기 전에 먼저 일정에 맞춰 움직이다니. 다행히도 아가씨의 감수성과 성품, 도덕심은 그럭저럭 균형을 이룬 상태인 듯했다.
다행이다.
큐브는 바로 얼마 전까지 아가씨의 드높은 감수성 덕에 겪어야만 했던, 무수한 가출과 반항과 태업을 떠올렸다. 기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졌다.

“프린세스가 되는 건 벌써 글렀어.”

한 번 닦아낸 식기를 건네며 아가씨가 말했다. 큐브는 접시와 소서와 잔이 한 벌로 이루어진 식기를 마른 수건으로 차례차례 닦았다. 은식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럭저럭 쓸만하다. 사실 이 집의 모든 것이 그랬다. 세상을 구한 용사라는 것은 구름 같은 명성에 불과해서, 이 집의 주인은 별로 가진 게 없었고 매사가 소박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아직 미래는 모르는 거라고요.”
“글렀어, 글렀어. 애초에 프린세스는 가출 같은 것도 안 한다고.”
“그럼 가출을 하지 말지 그러셨어요. 아가씨.”
“안 하고 싶었어. 하지만 참을 수 없었는걸.”
“그럼 후회를 하지 마세요.”
“후회도 안 할 수가 없다고. 하…… 난 프린세스가 목표잖아?”
“음, 그렇죠?”
“프린세스가 되기 위해 천계에서 내려온 거 아냐? 그런데 대체 난 왜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이 꼴이라뇨? 아가씨 어디가 어떤데요! 아가씬 기품 있고 아름다운 분이세요.”

그 말에 아가씨가 설거지를 하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큐브 쪽을 바라보며, 그가 눈을 마주치기를 기다려 싱긋 웃었다. 아가씨는 인기가 많았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마족 집사가 노크 소리에 놀라 나가 보면,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꽃다발과 함께 낯선 남자가 서 있곤 했다.

“나도 알아. 무도회에서 우승도 했으니까…… 가 아닌가? 으음, 그건 혹시 인맥 덕이려나?”
“에이, 인맥만으로는 우승할 수 없어요.”
“그치?”

일을 마친 아가씨가 앞치마에 손을 툭툭 털어 닦았다. 그리고는 영차 소리를 내며 벽에 기대 놓은 검을 가져왔다. 대단히 고급 검이었지만 이 집에선 심상한 물건이었다.

“어휴, 이놈의 건 국왕 폐하가 주신 거라 팔지도 못하고. 감자나 썰어야지.”

아가씨가 투덜거리며 국왕 폐하의 검으로 감자를 잘랐다.

“아버지의 교육은 프린세스가 되기엔 어중간했어. 무투대회 우승을 노린 건 좋은데 실패하는 바람에 작년에 겨우 두 번째 우승을 했잖아? 하긴 아예 열 네 살까진 어디에서도 우승을 못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좀 애매한 능력만 가진 거 같아. 무투대회 때문에 무사수행을 다니느라 업보까지 이만큼 쌓여서는.”
“아가씨, 업보 같은 거 돈만 내면 뚝딱이에요. 걱정 마세요.”

큐브가 재빨리 달랬다. 아가씨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건 그래. ……하지만 실은 말야, 그 무사수행이라는 거 꽤 재미 있었어.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별로 무섭지 않았거든. 가끔은 걷다 걷다 지쳐서, 길에 푹 쓰러지고 싶은 거야. 아, 차라리 져버릴까 그럼 큐브가 데리러 오겠지 하고 생각하곤 했다니까?”
“어! 아가씨 설마 일부러 진 거 아니죠?”
“글쎄.”
“아가씨!”
“아니야. 아니야. 일부러 지긴. 현상범도 잡았는걸. 요정을 만나기도 하고…….”
“전 요정 싫어요.”
“어라, 왜? 마족이라서?”
“왜 거기서 눈을 빛내세요? 전 그냥 아가씨가 요정을 만나고 돌아오신 후에 가출하셔서 그 녀석들이 원망스러운 거예요. 주인님하고 저하고 얼마나 놀랐게요.”
“미안.”
“어쩔 수 없죠, 뭐. 지나간 일인걸요.”
“마족들은 다 그래? 지나간 일이니까 인간의 왕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어도, 이젠 뭐 아무렇지도 않은가?”
“글쎄요. 인간만큼 빨리 다 잊는 종족이 또 있을까요.”
“인간은 빨리 죽으니까.”
“그건 핑계가 못 되네요.”
“하긴 그래.”

아가씨는 이제 감자 껍질을 잘 벗겼고, 능숙한 솜씨로 썰어낼 줄도 알았다. 재작년의 아가씨는 감자 껍질을 벗길 줄 몰랐다. 더 어린 아가씨일 때는 감자가 뭔지도 잘 몰랐다. 큐브는 초롱초롱하던 그녀의 눈동자와, 사소한 일 하나에도 연신 터져 나오던 환호성과, 때로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를 악물던 옆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신은 왜 용사에게 여자아이를 주었을까?

‘어쩌면 신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큐브는 공범의식이나, 함께 같은 것을 지켜본다는 동질감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인간과 닮아 버린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하세계의 광물로 만든 검을 들고 표정 없이 생물의 목숨을 거두던 시절의 큐브와, 단정한 집사 복장을 걸친 채 아가씨의 언동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지금의 큐브는 누가 봐도 다른 생물처럼 보일 터였으므로.

신은 왜 용사에게 여자아이를 내렸을까.
큐브는 왜 집사를 자처해 용사의 곁으로 왔을까.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의식일 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바로 그 날의 어둡고 우울한 하늘 아래 큐브가 얼핏 들은 어떤 ‘응답’의 연장선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아가씨는 빼뚤빼뚤 감자를 깎아, 남은 속살보다 껍질 쪽이 더 양이 많던 시절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매끄럽게 움직였다. 나름 편안한 자세로 척 다리를 꼬고 앉아선, 더러운 앞치마 위로 떨어진 감자 껍질을 맨손으로 양동이에 털어 넣기도 했다. 이럴 때의 아가씨는 어디를 봐도 이 세계의 인간. 하계의 평범한 인간 소녀였다.
큐브는 웃으며 아가씨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면 무신을 만났을 때 말야. 결국 작년엔 져 버렸지만, 만약 이겼다면 뭘 봤을까? 그 너머에 분명히 길이 있었어.”
“보고 싶으세요?”
“보고 싶기도 하고 안 보고 싶기도 해.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더 업보를 쌓으면 안 되신다면서요.”
“잘 피할 수 있거든. 네 말마따나 두둑하게 헌금하면…… 아, 젠장!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거야? 아버지더러 세계를 구한 용사라고 칭송만 하면서! 말뿐이고 비겁하다!”
“헉! 아가씨, 그러니까 그런 말투는…….”
“청년무관이라는 그 수상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남자를 만나는 것도 두 해나 건너 뛰었고!”
“그 시기에 앓아 눕거나 가출을 하셨잖아요.”
“으으! 어릴 땐 좀 비실거렸지! 농장 일 몇 번에 앓아 눕고 말야. 그때의 나는 그야말로 병약 미소녀! 하지만 지금이라면 날아다니니까.”

아가씨가 힘을 주며 팔을 들어 보였다. 탄탄한 근육이 붙은 맨 팔에 음식 소스며 거품이 묻어 있었다. 큐브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정말로 이제 일 년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해가 바뀌어 여름이 오면 열 여덟 살이 되어 버린다.

“어때? 큐브. 나 차라리, 귀비를 노릴까? 프린세스는 글러먹었고.”

국왕은 나이가 들었다. 전쟁으로 여러 자식을 잃고 남은 막내조차 아가씨보다는 연상이었다. 마왕이 이끄는 지하군의 장수 노릇을 할 때 빈약하게 펄럭이던 왕국의 깃발이며 당장 무너질 듯 홀로 지평선 앞에 서 있던 성벽을 떠올릴 때면, 큐브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장 언저리가 요동치는 듯한 그런 기분.

‘겨우 이런 왕국을 위해.’

그는 생각했고,

‘겨우 이런 것이기 때문에.’

고쳐 중얼거렸다.

“……아가씨. 그래도 귀비는 좀 아니에요.”
“그치? 나이가 너무 많은 건 둘째치고, 아직은 국왕 폐하를 존경하니까 그대로 남겨두고 싶다고 할까나? 아빠가 그러셨는데, 남편은 끝내 존경하기 어렵다는 거야. 손에 닿으니까.”
“주인님도 참 이상한 말씀을 하시고.”
“손에 안 닿아야 존경할 수 있다면 별이나 달이나 신 같은 것만 존경할 수 있을 텐데. ……아, 하지만 알 것 같아.”
“뭘요?”
“사람들은 아빠가 손에 닿으니까, 별로 존경하지 않는 거잖아. 만약에 아빠가 마왕군을 물리치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면, 커다란 동상을 세우고 매년 아빠를 우러러 보았을걸? 하지만 곁에 있으니까. 매일 거리를 걷고 밥을 먹고 낡아빠진 겉옷을 햇볕에 털기도 하니까 다들 아빠를 떠올리지 않는 거지.”
“그런 게 아니에요. 주인님은 그저 욕심이 없으신 거랍니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천제가 진노하여 지하군을 보내 토벌을 명 하였을 때의 인간들과 지금 번성하는 인간들은 결국 똑 같다.

“큐브, 자꾸 딴 생각 할래? 이거 화덕에 넣어 뒀으니까 잘 봐. 난 이제 다음 일정 가야 하니까.”
“네. 아가씨. 걱정 마세요.”
“걱정은 안 하지! ……근데, 큐브. 사막지대에서 본 그 용은 어때? 종족은 다르지만 어떻게 잘 꾀면.”
“프린세스가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서 자포자기하시면 안 돼요, 아가씨.”
“청혼하러 와 주면 좋을 텐데.”
“엑! 용인데요!”
“용인게 뭐 어때서. 드래곤 프린세스도 괜찮지 않아?”
“그러다 진짜로 청혼하러 오면 어떡해요? 승낙하실 거예요? 주인님은 분명 싫어하실 걸요?”
“어머나! 큐브, 질투해?”
“안 하거든요!”
“아, 너무해. 그래도 말야, 내가 없어지면 쓸쓸해 할거지? 응?”
“네. 네. 쓸쓸하겠죠, 그야. 주인님이 말이에요!”
“어머.”

농을 걸어오다가 아가씨는 허를 찔린 듯이 반대쪽 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란히 걸린 주방도구들 사이 어딘가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씨익 웃었다.

“……그렇구나. 아빠가.”

가사일을 마치고 그렇게나 어른스러운 얼굴로 다녀올게, 하고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간 아가씨였는데. 그런데.
정말로 그런데, 였다.
어떻게 아가씨가 나한테 이럴수가!
라고 큐브는 생각하고 말았다.

“미안, 큐브! 그만 나도 모르게!”

나가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제 일 년도 안 남았다니’ 하고 조금이나마 찡 했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이 천방지축 아가씨는 자유행동 휴가를 얻자마자 뒷골목 양아치와 어울려 놀고 돌아왔던 것이다. 어두컴컴한 골목을 누비며 비밀주점 아르바이트로 단련된 주량을 자랑하던 아가씨를 찾아낸 것도, 데려온 것도, 결국 큐브였다. 한숨을 푹 내쉬다 못해 조금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집사 앞에서 아가씨는 풍성하게 기른 다갈색 머리카락을 마구 뒤섞었다.

“미안하다니까? 아아아, 대체 어디서 또 감수성이……아니 도덕성이 문제이려나?”
“말로만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가씨 정말 이러실 거예요? 또 계속 가사일만 해 보실래요?”
“뭘 가르치려면 또 아르바이트 해야 하니까, 그럴 수 없을걸? 아빠 연금만으로는 우리 셋이 먹고 살 수가 없어.”
“전 빼 주세요.”
“그래 그럼 나랑 아빠. 큐브만 살고 인간 둘은 굶어 죽는다구.”
“제가.”

제가 돈을 마련해 드릴까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 큐브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자신이 정한 규칙이 있었다.
‘용사의 가사일을 착실히 돌보고 천제가 보낸 여자아이를 조용히 지켜본다.’ 라는.
‘그 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라는.

“이러다간 또 힘든 아르바이트를 연달아 해야 할지도 몰라. 공부할 돈이 없거든.”
“아가씨는 지금도 훌륭하니까 더 배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큐브의 말은 고맙지만, 수치로 분명하게 보이니까.”

용사는 적은 연금 외에는 어떤 것도 받지 않았다. 세상은 어느새 마왕 같은 건 잊어버린 듯 천연덕스럽게 번화하였다. 그 거대하고 절망적인 전쟁에 참가했던 큐브조차 그때의 일이 마치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졌다. 용사여, 너는 왜 싸우는 것인가?]

이를 테면.

‘이를 테면 아가씨 아가씨는 그때의 질문에 대한 긴 응답 같은 것일 거다.’

큐브는 다음 달의 스케줄 표를 받아 들었다.
용사는 딸을 교육기관에 보내는 것을 포기한 대신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연달아 시키는 것도 포기한 듯 보였다. 적어도 그 다음 한 달은.

“나 자신의 감수성과 사투를 벌이고 있어.”

아가씨는 근엄하게 선언했다. 그 선언이 유효했던 걸까. 아가씨는 무사수행 같은 건 은퇴하고 기품과 매력을 올리는 데 한참 치중해 왔지만, 그러는 사이 밸런스가 깨졌던지 감수성이 끝 모르고 치솟고 도덕심이 반 토막 났다. 반쯤 그 결과에 자포자기한 것인지 아니면 일 년도 안 남았다는 사실에 느슨해 진 건지 몰라도, 용사는 딸과 함께 가을 산을 보러 다녀와선 오랜만에 무사수행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아악, 또 업보 쌓이겠네!”
“아가씨, 업보 같은 거 돈만 내면 뚝딱이에요. 걱정 마세요.”
“그 돈이란 게 없잖아!”

아가씨는 씩 웃었다.
이 아가씨는 역시 무사수행 쪽이 성미에 맞는 모양이었다. 큐브는 고삐 풀린 말처럼 신나서 펄쩍펄쩍 뛰어 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큐브. 보물 상자 털어 올게.”

그런 표정?
큐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산 소풍에 이어 또 산이야.”

큐브는 여느 때처럼 아가씨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원지대의 험준한 비탈을 밟아 오르며, 그녀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감수성 풍부하고 다혈질에 묘하게 흉포한 점이 용사를 닮은 그 소녀가, 용사가 어둠에 뒤덮인 왕국의 멸망 앞에서 지었던 것 같은 표정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큐브, 큐브는 왜 아빠를 모시게 됐어?]

아가씨는 가끔 물었다.
하긴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큐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마족 집사란 ‘이 집’에 한해서는 굉장히 균형이 잘 맞는 존재였다.

천계에서 온 작은 소녀와,
인간의 세계를 구원한 용사와,
그리고 마왕군을 떠난 집사.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그는 본디 지하군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던 고위 마족이었다. 아가씨는 서쪽 사막지대에 나가 악마와 마주치는 일을 썩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으므로 큐브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상세하게 털어 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아가씨는 가끔 큐브가 마족이란 걸 잊은 양 ‘악마 따위 성가셨다’ 고 투덜거리는 편이었다.

머지 않은 옛날.
지나치게 익은 과일이 썩어 뭉그러지듯 인간의 왕국은 나태와 죄악에 물들었다.
하늘은 진노했고, 천제는 마왕을 불러 인간을 벌하라 명했다 전한다.
마왕은 지하군을 이끌고 인간을 토벌했다. 그야말로 상한 과일이 매달린 가지를 꺾어 나가듯 손쉽게, 검은 빛났고 창날은 살을 꿰뚫었으며 강들은 피로 물들었다. 어느 보름 밤, 이제 성이 붕괴하는 것만 남았을 때 큐브는 그 사람을 처음 보았다.

훗날 용사라고 불리게 될 남자.
그때는 그저 떠돌이 검사에 불과했던, 지금껏 죽어 넘어진 인간들과 별 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보초들의 눈을 피해 어떻게 마족의 본진까지 들어온 걸까. 겨우 인간 주제에. 큐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방적인 살육에 질린 탓일까, 아니면 마족의 본성이 본디 그러한 잔혹에 익숙하여 대상이 동족이든 아니든 관계없었던 탓일까.
여하간에 그는 그때 몹시 단순한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큐브는 그 용사가 지나는 길을 방해하지 않았다.
용사는 몇 번이나 무너질 듯 일어서면서 마지막 남은 경비들을 꺾었고, 놀랍게도 마왕 앞에 단신으로 섰다.

검 두 자루가 맞부딪쳤다.
검과 검이 일으키는 불꽃이 세계 전부를 뒤덮은 겁화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지하군은 침묵했고 인간들은 두려움 속에 숨을 죽였다.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았고 불길은 맹렬하게 질주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폐허는 세를 넓혔다.

그리고 그 멸망의 코 앞에서,
마왕이 패배했다.
큐브는 자신의 군주이자 지하군의 수장인 마왕이 오묘한 표정을 짓는 걸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마왕은 어쩌면 천계의 뜻을 묻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진노하여 멸망을 명해 놓고는 갑자기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양, 인간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는 그 알량한 천계의 자비가 가소롭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그럴 지도 몰랐다.
그러나 답할 리 없는 하늘에 묻는 대신 마왕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 용사라는 이름을 내건 그 선량한 사내 한 사람에게 물었다.

[내가 졌다. 용사여, 너는 왜 싸우는 것인가? 성이 함락되는 것은 하늘의 뜻. 너와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저 우둔한 자들이 소멸하는 것일 뿐.]

그 질문에 용사가 어떤 대답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왕이 듣고, 죽은 악마들이 듣고, 인간과 악마의 피로 물든 대지가 듣고, 언제나 제멋대로인 하늘의 신들이 들었다.
그리고 기둥 뒤에 몸을 감춘 큐브가 들었다.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용사의 대답은 불길을 밀어내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별이 아름답던 어느 밤, 긴 꼬리를 매단 유성이 용사를 향해 여자아이를 데려왔을 때 큐브는 깨달았다. 하늘도, 땅도, 지하의 거대한 왕도, 용사의 응답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그 날로부터 한 명의 소녀를 통해, 용사는 긴 응답을 지속하고 있음을.

“……브, 큐브!”

큐브는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미끄러졌다. 용사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큐브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 지금 가겠습니다! 아가씨!”

눈에 파묻힌 채 아가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무신을 거의 꺾을 만큼 강한 그녀였지만 피로가 쌓였든지 아니면 방심했던 모양이었다. 큐브는 딴 생각을 하느라 그녀가 다치는 순간을 놓쳤다는 사실에 땀을 뻘뻘 흘릴 만큼 당황했다.

“눈에 묻혀 얼어 죽는 줄 알았네. 큐브, 늦었잖아!”
“죄송해요, 아가씨.”
“괜찮아. 나도 이렇게 빨리 다리가 부러질 줄은 몰랐거든. 제대로 뛰어내렸는데, 그 직후에 은늑대를 만날 줄은 몰랐어.”
“은늑대 정도는 가뿐하시잖아요.”
“그 바로 직전에 전투를 몇 번 치렀더니…… 아, 보내 줬어야 하는데 말야. 욕심 부렸지 뭐야? 은늑대 가죽을 팔 수 있다는 생각에.”
“엑! 그런 자세로 마구 사냥한 거예요? 아가씨 업보 엄청 쌓인다구요.”
“이미 버린…… 아니 업보 쌓인 몸이니까. 돈으로 그걸 좀 어떻게.”
“아가씨…….”
“돈으로 뚝딱! 이라고 한 건 너였잖아, 큐브.”
“저였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구요.”

다친 몸으로 돌아온 아가씨는 새끼 새처럼 응석을 부렸다. 그렇게 며칠. 남은 일정을 보란 듯이 침대에 누워 보내더니 다음 일정으로 주어진 자유행동 때는 멋대로 ‘선물’ 이라면서 소품을 사 왔다.
큐브는 용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딸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데 질린 것 같았지만, 결국엔 ‘어쩔 수 없는 애’라며 웃었다. 가출을 해도, 기껏 돈을 들여 얻은 기술을 깎아 먹어도, 앓아 눕거나 심한 말을 퍼부어도, 용사는 결국엔 ‘어쩔 수 없는 애라니까’ 라고 중얼거렸다.
다치고, 실패하고,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아이는 살이 쪘고, 멋대로 떠들었고, 몰래 도망을 쳤으며, 한 점 쓸모도 없는 사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다른 대회에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잘난 척하고, 속상해 하고, 그리고 아주 자주 주저 앉았다.
하늘이 내렸어도 아가씨는 그저 인간 아이였다. 용사의 딸이어도 아가씨는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큐브는 긴 응답을 들었다.
듣고 있었다.

[용사여, 너는 왜 싸우는 것인가?]

용사는 답했다.

“……망했어. 젠장, 망했어.”
“아가씨 또 왜 그러시는데요? 그리고요, 그런 말투 쓰지 마시라니까요.”
“망한 걸 망했다고 하지 뭐라고 해? 큐브, 봐 봐. 이제 해가 바뀌었잖아? 몇 달 후면 내가 열 여덟 살이 된단 말야. 프린세스 물 건너 갔어. 끝장이라니까?”
“아가씨 제발 그 말투…….”
“너는 고위 마족이었다는 애가 욕도 안 했는데 겨우 이런 말투 가지고 그래? 너 요즘 젊은 애를 안 만나보고 집에서 아빠하고 틀어박혀 있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저도 나름대로 바쁘거든요?”
“누가 안 바쁘대? 내일 모레 자유행동일 때 같이 놀아 줄까? 내가 요즘 노는 애들 소개해 줄게.”
“아가씨 꿈 깨세요. 자유행동이고 뭐고 없이 당분간은 집안일 시키실 거랬어요, 주인님이.”
“우와! 진짜? 아빠 완전 치사해! 세상에 나 그럼 노는 시간도 없어? 진짜? 나 앓아 누울 거야. 큐브 네가 가서 말 좀 해 줘. 이대로라면 아가씨의 스트레스 수치가 위험하다고.”
“먹을 걸로 처리하신 댔어요.”
“찐 살은!”
“여름 내내 바다에서 살 준비하세요.”
“돈은!”
“그건…… 음…….”
“국왕 폐하의 검 쳐다보는 거 그만 둬, 큐브. 지난 번에도 눈 딱 감고 팔아 넘겼다가 한 번 철창 신세 졌잖아.”
“어휴, 국왕이 뭐라고 저걸 못 팔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치? 그치? 큐브도 그렇게 생각하지! 치사하게 한 번 줬으면 끝인 거지 시시콜콜 감시나 하고 말야!”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인간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방만하고, 오만하고, 연약하다.
쉽게 죽듯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주저앉듯 쉽게 일어선다.
무너진 성벽은 금세 다시 섰고 인간은 전과 같이 교활하고, 대범하고, 그리고 하늘의 뜻 따위는 잊어버렸다.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양 그들은 무수히 번성하였다. 큐브는 피에 물들어 풀 뿌리 하나 남지 않았던 대지를 떠올리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반듯한 돌이 깔린 거리와 오가는 사람들. 웃으며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 너머로 노을이 졌다.
찢어져 펄럭이던 왕국의 문장은 위풍당당하게 나부끼고 병사들은 으스대며 걸어갔다.
아가씨는 프린세스가 되고 싶어했지만 어쩌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지도 몰랐다. 용사는 그녀가 가출하고, 앓아 눕고, 평판을 떨어뜨리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벌써 깨달았던 것 같았다. 땀을 흘리며 돈을 벌어오고 무사수행을 나가 몬스터들에게 패배하고, 앓아 누워 며칠 동안을 허비하며 아가씨는 자랐다.
더는 천계의 순수한 존재가 아닌, 평범한 인간 여성으로.
수확제에 잔뜩 설레며 출전해 등수 안에 들지도 못했을 때 눈물을 쏟고, 금상을 확신하던 작품으로 3위를 하고, 이길 줄 알았던 상대에게 패배하면서 그녀는 자랐다.

살았다.

[그저 우둔한 자들이 소멸하는 것일 뿐이거늘. 용사여. 저 풍요에 젖어 간교하며, 저 위세를 누리며 천박한 인간들을 위해 그대는 왜 싸우는 것인가?]

그는 답했다.

[살기를 바란다.]

라고.

이 비천한,
이 잔혹한,
이 어리석은,
그러나 경이로운 생명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천제는 물었다.
‘과연 그러한가?’
지하의 마왕은 냉소하였다.
‘과연 그러할 것인가?’
인간은 잊었다.
용사는 소녀를 거두어 들였고 그리하여.

“……와, 빨래 다 찢어진 거 보여? 큐브. 나 팔 힘이 너무 센가?”
“무투대회 우승자인데 어련하시려고요. 연약한 저 대신 이것도 마저 해주세요.”
“어머,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마족보다 세다고? 마족 그렇게 약하니?”
“진군하다가 용사 한 사람에게 막혀 후퇴했잖아요.”

큐브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가씨는 제 쪽에서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게 우리 아빠야.”

자랑스러운 듯이 웃는 그 얼굴을 큐브는 언제나처럼 지켜보았다. 소녀의 아홉 살이. 열 살이. 열 한 살이…… 여덟 해가 그 웃는 얼굴 안에 다 있었다.

“그래요. 그게 주인님이세요.”

큐브는 때때로 생각했다.
‘겨우 이런 것을 위해.’
그리고 이내 고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에.’

“아, 진짜 프린세스는 물 건너 갔거든.”
“계속 그렇게 불평하실 거면 다른 거 뭐 장래희망 없으세요?”
“프린세스!”
“그럼 가출부터 안 하셨어야 한다니까요.”
“하…… 그러면 큐브, 나한테 좋은 생각 하나 있는데.”
“뭔데요?”
“화 안 낸다고 약속해. 아빠한테도 비밀.”
“약속할게요.”
“있잖아, 큐브. 사막지대에 갔을 때 마왕을 만났을 때 생각한 건데.”
“혹시 아가씨, 마왕과 손잡으시려는 건 아니죠? 전 절대 반대예요. 전 아가씨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요!”
“너도 마족이면서 뭘…… 이 아니라, 마왕은 내 취향 아니거든. 내가 결혼할까? 한 건 큐브야.”
“네. 그럼 다행이…… 지…… 네? 응? 네에에에에? 아가씨!”
“큐브, 있지. 나랑 결혼해서 마왕을 꺾어 주지 않을래? 여기선 망했지만 마계 프린세스는 될 수도 있을 거 같아!”
“아가씨! 제가! 세간 팔아 볼 테니까! 당장! 업보 깎으러 가요! 당장!”

[어느 때고 부모의 응답은 아이이게 마련이므로.]

그 조용한 목소리가 언제고 큐브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살기를 바란다.]

다만 살기를.
별것 아닌 삶을. 때로는 후회스럽고 혹은 진정으로 치졸하여 그 어떤 가치도 없는 듯 보인다 하여도 바로 그 시시한 삶을, 끝내 살아가기를 바란다.

천제는 물었다.
‘과연 그러한가?’
지하의 마왕은 냉소하였다.
‘과연 그러할 것인가?’
인간은 잊었다.
용사는 소녀를 거두어 들였고 그리하여,

그리하여 그 날로부터 긴 응답이 시작되었다.


(end)

 

** 2014년 프린세스메이커 합작으로 초고 작성.

** 본문의 [내가 졌다. 용사여, 너는 왜 싸우는 것인가? 성이 함락되는 것은 하늘의 뜻. 너와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저 우둔한 자들이 소멸하는 것일 뿐.] 부분은 만트라 판 프린세스 메이커 오프닝 대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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