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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적절하게 우는 소리

2022.04.01 09:1004.01

 

적절하게 우는 소리

 


나는 멸종 위기에 놓인 북서태평양 지역의 고래 울음소리를 연구하는 과학자다. 잠깐. 쉽게 떠오르는 그 모습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떠오르는 그 사람. 그 사람과 나는 비슷하지 않다. 푸른 바다의 물결을 사랑하고, 생각이 깊어 보이는 해저의 거대한 동물을 동경하고, 오직 외로이 그 긴 고래의 노래소리를 따라 다니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생각하는 고귀한 학자.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빛나는 값비싼 자동차의 매끈한 굴곡을 사랑하고, 깨끗한 집의 싱그러운 넓이를 동경하고, 클럽마다 밤새 울리는 끈적거리면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노래들을 따라 다니고 싶어 한다. 당연히 내 주위에는 고래를 동경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숫자가 적지도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조금도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내가 왜 고래 울음소리 같은 것을 연구하면서 살게 되었느냐. 답은 별로 복잡하지 않다. 대학교 입학하면서 시험 칠 때, 취직 잘 된다는 과목을 골라서 시험을 쳤고, 그냥 성적에 맞춰서 표시되어 있는대로 진학하라는 대로 갔더니, 음향공학과인가 하는 학과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흘러흘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대학 전공을 그렇게 생각 없이 정하냐고들 하는데, 딱히 깊이 생각 했다고 해서 다른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어려서 경찰이나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음악이나 미술에도 소질은 없다. 인류를 구하고, 진리를 밝히고, 역사를 발전시키고, 뭐 그런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었다 한들, 내가 인류를 구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난세의 영웅이 될 수 있나? 세상을 구하는 데 보람찬 일을 할 수 있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내 삶의 방향을 어디에 맞춰야 했겠는가? 음향공학. 우리나라의 전자회사들은 TV, 휴대전화, 무선이어폰을 만들면서 소리에 관심이 많다고들 했다. 취직에 전망이 밝다고 되어 있었다. 그 정도면 좋은 설명이었다.

게다가 음향공학이란 것이, 막상 대학에 가서 배워 보면 재미도 있다. 소리를 잘 흡수하는 물체는 반사를 잘 못하고 통과시키는 성질이 크기 마련이고, 소리를 잘 통과시키지 않는 물체는 반사를 잘 하는 성질이 있기 마련이다. 교묘하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아주 딱딱한 물체로 방을 감싸면 방안은 온통 울려서 방안에 있는 사람은 시끄럽지만 방 바깥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신에 푹신한 물체로 방을 감싸면 소리를 벽이 잘 흡수하기 때문에 방안에 있는 사람은 시끄러움에 덜 시달리지만 방 바깥에서 소리가 잘 들리게 된다. 세상이 이렇게 쉽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그런 문제에 답을 음향공학에서 알아 내려면, 재료의 흡음 특성과 차음 특성을 살펴 보고 투과 계수를 도출해야 하는데, 그런 일에 재미를 붙이고 남보다 내가 조금은 잘하기도 하나 어떤가, 그러다 보면 조금은 음향공학에 빠져들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딘지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강하고 선명하게 귀에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알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할 때가 되었지만, 나는 취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해 초만 해도 음향공학 전공한 사람을 채용할 만한 회사가 세 군데인가 있기는 있었는데, 회사 한 곳은 연구소를 외국에 차리기로 했으므로 한국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사람을 채용하는데 돈을 다 썼고, 회사 한 곳에는 지원은 했지만 두 사람을 뽑는데 옆 학교의 더 똘똘하고 잘생긴 학생에 하나에게 밀려서 나는 세 번째 등수가 되는 바람에 떨어졌다. 나머지 한 회사는 금년에는 사람을 안 뽑고 내년에 사람을 뽑겠다고 했다. 그러니 그 회사는 한 해 뒤에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장 실업자가 되는 마당에 대책 없이 한 해를 버티기는 좀 겁이 났다. 한 해 기다린다고 그 회사에 합격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한 해 버틸 걸. 벌써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그 계단. 계단을 쉬지 않고 오르는 동안 꼭 내가 서 있어야 할 계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인생이 길들여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어디 다니는 곳 없이 한 해 놀고 있으면 큰일 난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한 해만 그냥 기다렸다가 곱게 취직할 걸. 아닌가? 하기야, 또 그 때, 괜히 한 해 쉬었으면, 갑자기 돈 떨어져서 어쩌고 살았을 지. 돈 떨어져서 급해져서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지내다 보면 더 망할 수도 있었겠지.

그래서 나는 대학원에 갔다.

음향공학과 대학원. 어떤 교수한테는 밉보였고, 어떤 교수는 내가 보기에 너무 불편하고 힘들어 보였다. 그러다 보니 적당히 어찌저찌 맞는 교수 한 사람 밑에서 배우게 되었는데, 마침 그 교수는 과제 수주 실적을 쌓기 위해서 정부의 온갖 음향 관련 연구사업은 다 맡아 보려고 애처롭게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교수의 지도를 받다 보니, 인공지능 동물음 분석 연구 사업이라는 데 참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인공지능으로 동네 뒷산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분석해서, 철새가 몇 마리나 오는 지, 어떤 지, 자동으로 판단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식의 연구였다. 그렇게 하면, 기후변화로 안 오던 철새가 오는 지, 오던 철새가 안 오는 지도 알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고, 지구를 지킬 수 있고, 급변하는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고, 경제적 가치가 무궁무진하고, 세계를 선도하고, 양극화 문제를 개선하고, 4차 산업혁명이고, 메타버스고, 그런 연구였다.

다시 말해서, 대학원에서 내가 하던 연구는 새소리 분석하던 연구였다. 평생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보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까치 소리, 까마귀 소리, 박새 소리, 그런 것을 들으며 도시에도 깃들어 있는 자연의 싱그러움을 느껴보는 느린 삶의 태도. 그런 생각을 가져 보았던 적은 전혀 없다. 지금도 아니다. 유치원 때, 참새는 짹짹, 오리는 꽥꽥 하고 소리 쳤던 것이 새소리에 대해 내가 뭐라도 감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래도 대학원에 들어 온 이상 졸업은 해야 했고, 그나마 취직도 못하고 있는데 졸업도 못하면 안될 것 같아서 안간 힘을 쓰며 붙들고 있었다. 그랬더니 그럭저럭 결과는 나왔다. 그러고 보니 역시 조금은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삶이 한 쪽으로 빠져 들었던 것 같다. 취직해서 그냥 남들처럼 살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던 학생이 어쩌다 보니까 음향공학을 연구하는 학문의 길로 들어 섰고, 그러다가 새소리 전문가처럼 변해 갔다. 새소리 전문가가 뭘 할 수 있을까? 기후변화로 해충의 번성이 심각해지면 해충의 천적이 될 새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나는 어디 발표하러 가서 이야기 하기는 했다. 그런데, 날 뽑아서 돈 주며 일을 시킬 곳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채용하는 곳이 어디일까? 그런 곳에서 과연 누구를 채용할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허수아비?

결국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시원찮은 직장조차 얻지 못했다. 그 사이에 정이라면 정이 든 교수는 학교에 무슨 연구원 자리를 마련해 줄테니, 자기 심부름이라도 하면서 자취방 월세라도 벌어 보라는 이야기했지만, 학교에 오래 머물고 있으니 너무 도망치고 싶었다. 새해가 되어 신입생이 들어 오면, 딱 한 살 차이 나는 한 학년 위 선배에게 “무슨무슨 누나”니 “무슨무슨 형”이니 하면서 엄청 대단히 세상 많이 산 사람인 것처럼 부르고 그러지 않나? 한 살 차이에 그 정도 취급인데, 내가 학교에서 걸어 다니면 무슨 피라미드에서 미라가 산 채로 걸어 다니는 느낌처럼 보이지 않을까? 사실은 아무 신입생도 박사과정 대학원생에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때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 괴롭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또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때만 해도 나이도 별로 많지도 않았다. 그냥 한 몇 년 놀았다치고, 아예 새로운 진로를 설계해서 더 좋아 보이는 삶을 향해 나아가 보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학원에서 학위를 따는 동안 젊음에서 소중한 온갖 것들을 거기에 다 불살라 없앤 것 같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그걸 그냥 없던 셈 치자는 생각을 할 엄두가 안 났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 때, 다른 길을 생각해 봐도 되었을 텐데. 그때도 기회는 있었는데. 인생 100년에 비하면, 그때 20대의 몇 년이 뭐 그렇게 긴 시간이라고.

돌아 보면 그때 이미 나는 삶을 사는 태도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또 기회가 온 다고 해도, 새로운 결심을 하고 학교 다녔던 그 몇 년의 세월을 없었던 일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냥 비겁한 놈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직장인이라고 하면서 번듯한 모습으로 돈 벌고 사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나는 “대신에 나는 그 동안 이런 다른 가치 있는 일을 했다”라고 변명이라고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래서 그렇다. 나는 변명이 필요해서 고래 울음소리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공부한 분야와 들어 맞는 일을 하고 있다고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새소리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을 채용하는 곳은 없었지만, 그래도 범위를 넓혀 동물음에 대해서 연구하는 곳은 아주 없지 않았다. 수산물에 관한 연구에 돈을 투자하면서 어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몇몇 지방자치 단체 설립 기관 중에는 바다에 사는 생물과 소리의 관계에 대해 연구한다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육지에서 산 채로 뛰어다니는 동물을 잡아 먹는 일은 없다. 새를 잡아 먹는다고 해도 기르는 닭을 먹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바다에서는 야생에서 헤엄치는 동물을 그물로 잡아 올려 판매하는 수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야생의 동물과 소리의 관계를 따지는 연구가 필요하다면 그런 곳이 필요한 곳이다. 덕택에 날마다 힘 빠진 눈으로 컴퓨터 화면의 공고를 검색하고 또 검색하다 보니, 어느 도시에 내가 취직할 자리가 한 군데는 남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 왔다.

나는 동해와 남해 먼 바다의 생물과 소리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부서에 소속되어 있다. 처음에는 배를 타고 직접 바다에 나가기도 했다. 정말 무슨 자연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사람처럼 튀는 파도 방울을 맞고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하는 일도 몇 번 했다. 몇 번 해보니 정말 하기 싫었다. 멀미도 싫었고, 바닷물 냄새도 싫었다. 무엇보다도 바다로 나가게 되면 꼭 같이 나서게 되는 김 박사라는 사람이 정말 정말 싫었다.

그래서 나는 취직을 하고 나서 거의 4년 쯤을 어떻게든 바다에 최대한 안 나가도 되는 일을 찾아 내는데 공을 들이며 보냈다. 그런 게 내 삶이었다. 어떤 사람은 인류를 구하고, 진리를 밝히고, 역사를 밝히는데 청춘을 보냈을 것이다. 하다 못해 누구인가는 푸른 바다의 물결을 사랑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김 박사를 피해서 바다에 안 나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인생을 보냈다.

다행히 그것은 뜻대로 되었다. 나는 고래 울음소리 사업 담당자가 되는 길을 찾아 냈다. 내가 일하는 연구소에서는 먼 바다 고래의 울음소리를 연구할 때에는 직접 녹음해 오지 않는다는 운영 방침이 있었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대한민국 영해를 넘어 가면, 해외 출장으로 처리를 하게 되어 있는데, 해외 출장이 너무 잦으면 감사에 걸린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소장이 먼 바다 고래 울음소리 연구는 직접 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려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래 울음소리 연구는 다른 연구소나, 다른 나라에서 녹음해 온 자료를 받아서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말은 커다란 고래를 찾아 시퍼런 대양의 한 가운데로 나아갈 필요 없이, 이메일의 대용량 첨부파일만 열어 보면 된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소설책이나 영화 같은 데 나오는 전형적인 고래 연구하는 사람들과 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고래 울음소리 연구를 한다고 하지만, 고래는 초음파를 사용해 의사 소통을 할 때가 많기 때문에 나는 실제로 무슨 소리를 들으며 연구하지도 않는다. 초음파는 원래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연구하는 고래 울음소리는 들을래야 들을 수도 없다. 나에게 고래 울음소리는 고래 울음소리를 측정한 결과를 표시한 끊없이 많아 보이는 숫자들의 나열이다. 그게 나한테는 고래 울음소리다. 고래가 내는 초음파 울음소리를 표현한 수 백만 개, 수 천 만 개의 숫자들. 그게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다.

그게 그때까지 내 삶의 업적이었다. 거기에 보람이 있는가? 멋이 있는가? 그 즈음 되고 나니, 나는 내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미지에 도전하는 꿈, 마음의 평화, 삶의 여유, 따뜻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 진솔한 사랑. 그런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북서태평양의 희귀 고래 울음소리를 연구하는 것이 직업이라도 해도, 그런 직업만으로 바로 고결한 영혼이 생기지는 않는다. 나는 그냥 21세기 초 대한민국의 평범한 한 사람이다. 연봉이 몇 천 만원을 넘었는지,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지, 내 집을 언제 어느 동네에서 처음 구입할 수 있는 지, 그런 게 내 삶에서는 중요한 과제였다.

자랑스럽다거나 내세우고 싶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누가 “나는 연봉 액수와 아파트 넓이에 연연하면서 산다”는 사실을 떠들며 자랑하는가? 그런데 그렇다고 그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나는 그게 내 삶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 박사는 배 위에서 작업을 하며 기다릴 때, 괜히 바다 생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뻔한 이야기를 너무 뻔해서 듣다 보면 뇌가 소금 덩어리로 변해 버릴 것 같은 내용으로 혼자서 두 시간씩 지껄이다가, 문득 서글픈 얼굴로 넓은 집에서 살고 연봉 액수 높이는 것만 신경 쓰는 보통 한국인들을 비난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그때마다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김 박사는 자기나 나나 같은 처지니까,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그런 세상 다른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심정인지 나는 그것이 평범한 보통 한국인들을 욕하며 자신은 특별하다고 뽐내려는 태도처럼 보였다. 아니, 대한민국 사람 절반 쯤은 그냥 연봉, 자동차, 집 이런 데 허덕이며 사는 것 같지 않은가? 그 보통 사람들과 비슷하게 사는 삶은 더럽고 추잡한 것에 불과하고 뭔가 더 귀족 같고 양반 같은 삶을 살아야만 옳은 삶이라는 건가? 그리고 자기는 그렇게 살기 때문에 초라하지만 착한 거라고? 누가 착한데? 왜?

일이 빨리 끝나지 않아, 깊은 밤 늦게 혼자 연구실에 앉아서 컴퓨터를 붙들고 고래 울음소리를 연구하고 있으면, 이 모든 생각의 방식이 좀 건강하지 못하다는 느낌은 든다. 지금 내 삶이 큰 불만을 품어야 하는 처지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무슨 대단한 부당한 일을 당했나? 그것도 아니다. 내가 누구를 탓할 자격이 있나? 그 질문의 답도 아니다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런 삶이 앞으로 영영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질 거라고 상상하는 것이, 기대되고 편안한 마음이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왜 이렇게 되었지? 어쩌면 정 박사에게 차인 후부터 인지도 모르겠다. 막 취직 할 때 즈음 우연히 무슨 학회에서 만나 친해져서 사귀게 된 정 박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 때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역시 정 박사를 붙잡아야 했을까. 고향도 아니고 와 본 적도 없었던 도시에 와서 일하며 산다는 것. 학교를 다녔던 곳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딱히 있는 곳도 아니었던, 이 낯선 도시의 외딴 연구소 건물에서 밤새 고래울음 소리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 한 명 없는 외로운 처지라는 생각만이 거대한 바다 물결처럼 주위에 가득 찬다.

한참 그렇게 살다가, 주식이라도 해 볼까, 코인이라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스며 들어 뇌가 눅눅해져 가고 있을 때, 나는 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반 박사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고래 울음소리 같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반 박사는 학제적 메타공학이란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무슨 은행과 IT회사가 반씩 출자해서 만든 회사의 발굴팀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러 기술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며, 사업 기회를 창출하며 미래의 가치를 발굴한다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반 박사는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을 만날 때 마다,

“항상 반 박자 틀리는 반 박사예요. 하하하하.”

하면서 농담도 칠 줄 알았다. 그리고 농담에 덧붙이는 그 웃음소리도 그런 농담에 딱 맞는 정도였다. 아주 거짓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웃음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그런 농담을 두고, 농담을 못하는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는 농담이라고 불렀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농담 못하는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는 그런 농담을 잘 하는 재주는 대단히 좋은 재주다. 세상에는 농담을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그런 농담은 효과가 좋다. 반 박사는 일을 벌이겠다고 이 도시에 나타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기술인, 연구원, 학자, 개발자, 전문가들과 빠르게 친해졌다.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다들 멋있어 보인다는 눈길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 박사는 그들 사이에서 사업을 만들어 낼 거라고 했다.

나도 반 박사가 멋지다고 생각하며 나타날 때 마다 넋이 빠진 것 같은 눈으로 쳐다 보던 얼뜨기 중의 한 명이었다. 반 박사는 내가 지금껏 어울리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훌륭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인지, 몇 년 동안이나 이 도시에 살면서도 그런 곳이 있는 지도 몰랐던 근사한 곳에 나를 안내해서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고, 최신가요 추천 목록이 아닌 노래를 트는 가게로 나를 데려가 술을 마시자고 했다. 말투부터 깨끗하고 청정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표정에는 항상 안정과 여유가 대양의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반 박사가  자기가 일하는 회사의 투자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는, 큰 가치가 있고, 잘 살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할 것 같은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연구기관 개발 기술을 스타트업 기업으로 만들어서 성공시킨다는 그의 막연한 설명 역시도 아주 즐겁고 신선하게 들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반 박사의 말에 빠져 들었다기 보다는, 그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완전히 매혹된 것은 맥주를 마시던 밤에 만났던 반 박사의 동료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던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반 박사는 무엇보다 그 주위의 친구들이 멋진 사람들이었다. 맥주집에 모여 있는 모습을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풍경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이 같이 모여 있는 모습은 완전히 맥주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내가 평소에 맥주를 마시던 장면에서는 결코 그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어딜 벌써 가냐고 괜히 사람 피곤하게 할 궁리만 하는 몇 살 나이 많은 동료와, 억지로 공통 화제를 짜내어 아무리 말을 걸어 봐도 도무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나이 적은 동료가 있고, 술에 취해서 연구원장 욕을 끝도 없이 주절거리는 팀장에, 세상이 얼마나 썩어 빠진 곳인지 귀가 썩도록 주절거리는 김 박사. 그런 사람들과 함께 몇 시간이고 음침한 곳에 앉아 간에 알콜을 들이 붓고 있는 행동을 두고 금요일 밤 노는 것이라고 부르는 게 나의 시간이었다. 그에 비해, 반 박사는 우아한 불빛 같았다. 불나방들이 왜 불에 달려 드는 지, 과학적인 것은 몰랐지만, 심정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비슷한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무슨 맛이 간 생각에 빠졌는 지 괜히 별 이유도 없이 정 박사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다가 전화를 받지 않았던 날이기도 했다. 그 직후에는 혼자 너무 부끄러워서 다 때려 치우고 그냥 아무데도 아닌 곳으로 아무렇게나 혼자 가 버릴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재미 없는 일들 보다도 내 자신이 제일 재미 없는 것 같아서, 늦은 밤까지 끝 없이 우두커니 술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쩌다 늦게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반 박사가 나를 보고 곁에 와 앉았다. 반 박사는 주정부리는 것도 멋져 보였다.

술 취한 대화였지만, 반 박사는 거기에서도 대단히 유용한 것을 이끌어 냈다. 그때 껏 내 인생에서 가장 유용한 대화였다. 나는 내 삶에 대해서 늘어 놓다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내가 고래에 대해 연구한다는 것, 고래의 울음 소리를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 분야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한국에서는 몇 안 되는 전문가라고 할 수는 있다는 것도 고백했다. 그리고 그런 울음 소리와 연결된 주제들이 무엇이 있는 지도 주절주절 늘어 놓았다.

“멋져요. 굉장해요. 와우.”

반 박사가 말했다. “와우”라고 말하는 것 조차도, 내가 머리 속에서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 보다도 훨씬 자연스러웠다.

“고래는 인기가 있어요. 사람들은 고래를 좋아해. 고래라고 하면, 사람들은 꿈, 자연, 이상, 위대함, 멀리 있는 고귀함, 그런 걸 떠올리잖아요. 고래에 대해서 뭘 한다고 하면 다들 관심을 가져요. 고래를 모르는 사람도 없고. 고래는 세상에 가치를 줄 수 있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어선들이 작업하는 그물에 허무하게 걸려 죽는 고래들이 우리 나라에도, 세계적으로도 엄청 많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고래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아니. 사람들은 고래를 사랑? 사랑하죠.”
“그렇습니까?”
“고래는 먹혀요. 고래에 대한 일이라면 일단 모든 사람의 마음 속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반 박사의 말을 듣고 있고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단 좋았다. 반 박사가 말했다.

“만약에 고래를 어선의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과학이, 기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뭘 생각할 수 있을까요?”
“뭐,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고래 울음소리를 연구하는데, 고래는 초음파로 의사소통을 하잖습니까?”
“흠.”
“그러니까, 고래들에게 이쪽으로 오지 말라, 여기로 오면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울음소리 같은 초음파를 발산하는 기계를 어선에 설치해 놓는 겁니다. 그런 초음파 소리를 어선에서 계속 내도록 하면, 그 어선 근처로는 고래가 오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고래도 그물에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런 생각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반 박사는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던 반 박사의 안팎에 있던 그 모든 멋진 것들이 반 박사의 두 눈을 통해 모조리 다 펼쳐져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이 잠깐 들었다.

“그거예요. 오늘, 참 운이 좋은 밤이네요. 달콤하네요.”

내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으니, 반 박사는 이어서 설명했다.

“박사님, 정말로 그렇게 고래를 쫓는 울음소리에 해당하는 초음파를 만들 수 있겠죠? 그러면 그것으로 시제품 장치를 만드는 거예요. 작동만 잘 되면, 우리는, 우리는.”

반 박사는 우리라고 세 번이나 겹쳐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어. 사람들이 고래에는 관심을 갖거든요.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투자자들, 주요 몇 명만 정확히 움직이면, 결국 전 세계의 표준 공통 규약을 만들 수 있어요.”
“공통 규약이 무슨 뜻입니까?”
“잘만하면, 모든 바다에서 일하는 어선들을 대상으로 해서,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고래 쫓는 울음소리 초음파 장치를 저마다 모두 부착한 채로 일하라는 규제를 국제 조약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고래를 좀 더 구할 수 있게... 되는 겁니까?”
“전 세계의 모든 어선들이 무조건 박사님 장치를 사서 달아야만 하는 세상이 오는 거에요. 어선 열 척, 백 척이 아니고, 전 세계의 모든 어선들이 다들 박사님 장치를 하나 씩 사게 될 거라고요. 박사님의 고래 울음 소리 장치가 윈도우처럼 되는 거에요. 구글 검색처럼 되는 거야.”

반 박사는 자신의 회사에서 초기 투자금을 가져 올 테니, 정말로 회사를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갖고 있는 고래 쫓는 장치라는 생각을 실제 제품으로 만들면 될 거라고 했다. 자신은 그 기술이 성공할 거라고 믿는다고도 말했다.

반 박사가 믿는다고 이야기 하면, 나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성공한 창업자, 차세대 CEO, 세계 시장의 지배자, 기술 기업의 경영인, 자연을 지키는 사람, 고래의 친구, 싱그러운 바다의 생명력으로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사람, 세상을 바꾸는 사람, 역사를 진보시키는 사람, 잘 살고 있는 사람, 멋진 사람. 내 인생을 그런 것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다음 날 술이 깨자 마자 나는 정말로 그런 연구가 가능한 지 살펴 보았다. 생각해 보니 해 볼만한 일이기는 했다. 반 박사도 술이 깨고 나서, 구체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투자를 받아 키울 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나는 구체적으로 살펴 본 결과를 반 박사에게 이야기했다.

“공개 기술을 많이 이용할 거기 때문에, 법적인 독점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그래도 박사님 기술이 제일 먼저 나올 거잖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때문에 어차피 박사님 기술이 1등이니까, 성능이나 품질은 제일 좋을 거 잖아. 다른 회사에서 따라해도 어차피 후발주자 밖에 안 되는 거라고요. 박사님이 1등인데, 뭘.”
“그렇겠습니까?”
“그렇죠. 박사님, 저는 박사님 덕분에 이번엔 살았어요.”

나는 반 박사와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나도 반 쯤은, 아니 한 4분의 1쯤은 반 박사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에 빠지고 있었다. 이틀 밤을 새 가며 그 동안 분석해 온 고래 울음소리를 자료를 다시 정리해 보니, 고래가 싫어하게 하는 소리를 추출해서 재구성하면, 인공적으로 그런 초음파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짜는 것도 시간을 조금만 더 들이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희망이 보였다. 희망이 보이자, 나는 거기에 매달리게 되었다. 정말 모든 것을 바쳐서 매달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고래 쫓는 장치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보니, 점차, 이 모든 것이 나를 결국 이쪽으로, 그러니까 반 박사가 있는 곳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오묘한 숙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닌게 아니라, 모든 것이 지금의 이 일을 위해 준비되어 아귀가 맞아 드는 것 같았다. 내가 동물 울음 소리를 연구하게 된 것부터 운명이었고, 하필 김 박사를 미워하게 되어 다른 여러 동물과 관련된 소리 대신에 고래 울음소리를 살피게 된 것도 운명이었다. 예전에 새소리를 연구하느라 인공지능에 대해 익혀 두었던 기법이 고래를 쫓는 초음파를 분석하는 데 마침 꼭 맞게 쓰일 수 있다는 것도 운명 같았다. 음향공학과에서 내가 졸업할 때 하필 취업하기가 어려워 이 일을 연구하는 쪽으로 빠지게 된 것도 절묘한 우연의 인도였다. 하물며, 정 박사에게 차였던 것 조차, 그 날 밤 내가 서글퍼서 오래 술자리에 남아 있다가 반 박사를 만나게 하기 위한, 내 운명의 길이었던 것만 같았다.

내 장비는 정말로 제대로 작동할 것처럼 완성되어 갔다. 그럴 수록 나는 점차 흥분했다. 나는 몇 시간씩 숫자만 가득한 자료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서도 혼자서 기분이 좋아 바들바들 떨었다가, 그러다가 일이 꽉 막힐 때는 갑자기 머리를 싸매고 안절부절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살다 보니,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의 모습을 동경하고, 고래의 거대한 몸짓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할 정도였다.

김 박사가 원래 하던 연구는 내팽개치고 이런 일만 해도 되냐고 넌지시 걱정의 말을 건냈을 때, 나는 너무 몰두해 정신이 없던 나머지, 김 박사에게 약간 화를 내며 따지기까지 했다. 이런 중요한 일을 하는데, 귀찮게 하지 말라고! 짜증난다고! 정말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냅다 확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내가 처음 그런 모습을 보이니, 김 박사는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 박사가 투자자에 대한 준비가 완료되어 간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왔을 때, 내 긴장은 최고에 달해 있었다. 어딘지 모를 무엇인가가 아슬아슬하게 어긋나서, 완벽한 성능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어떻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뭔가 조금 부족해서 완벽한 고래 쫓는 울음소리는 못 만들겠습니다. 한 30% 정도 효과만 있는 정도까지는 왔습니다만.”
“30%요? 30%는 되는 거죠?”
“30% 정도는 됩니다.”
 “그러면 돼. 그거면 충분해. 충분해. 걱정마. 어선들의 그물에 걸려서 죽는 고래의 숫자가 만 마리다라고 해 봐요. 그러면 30%만 해도, 3천 마리의 고래를 구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고래 3천 마리라면, 미국 유력 정치인 3명, 프랑스, 독일 쪽 유력 정치인 3명 씩은 움직일 수 있는 어감이라고요. 그것만 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술이에요.”

반 박사는 지금껏 내가 사람의 얼굴에서 본 것 중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미소로 사업의 미래를 확인해 주었다. 반 박사는 자신이 만든 서류를 소개하고 설명해 주면서 이야기했다.

“다시 한 번 깨끗하게 태그라인을 정리해 보자고요. 우리 사업의 핵심 원천 기술이 뭐죠?”
“고래에게 적당한 초음파 울음소리를 들려 주어서, 고래가 걸릴 어선 그물 근처에 오지 않게 쫓는 기술.”
“적당한 울음소리란 말이 약간 뉘앙스가 좀, 그런데.”
“적당한 울음소리라는 말이 듣기 안 좋습니까?”
“슬라이틀리. 아주 슬라이틀리.”
“그럼 뭐라고 해야하겠습니까?”
“음-”

반 박사는 긴 호흡의 숨결을 섞어 그런 소리를 길게 냈다. 나는 반 박사가 가끔 내는 그 소리도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반 박사가 한참 그러다 말했다.

“적절한 울음소리. 적절한 울음소리, 어때요?”
“적절한 울음소리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 정도 수준의 초음파 장치를 만들어서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직장을 그만 두었고, 당연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김 박사와도 영원히 만나지 않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김 박사는 연구소를 떠나는 나를 어쩐지 걱정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위선이란 뻔한 것 아니겠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막상 정말로 내 회사를 만들어 사업을 시작하자 반 박사와 어울리는 것은 조금 줄어 들기는 했다. 그게 이상하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이 진행되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나는 그해 말에, “지역 핵심 스타트업”이라는 것에 선정되기도 했고, “어스 프렌들리 스타트업”이라고 하는 무슨 목록에 선정되어 언론사 인터뷰도 해 보았다. 어차피, 요즘 사람들은 SNS나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도는 소식을 보지, 신문이나 잡지를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 보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사에서 나를 알고 찾아 온다는 사실이 사업을 하는 느낌으로 가슴이 부풀게 해 주었다. 내가 회사를 갖고 있다는 느낌, CEO가 되었다는 기분 좋은 느낌을 살려 주는 일이었다. 그런 일들이 많이 생겼다.

자금을 구하는 것도 잘 진행되었다. 반 박사는 사업의 모양을 갖출 수 있는 자금을 빌릴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주었다. 좋은 자금줄 들이었다. 사채나 부동산 담보 대출이 아니라, 국가 기관이 기술을 평가해서 돈을 빌려 주는 멀쩡한 절차 대로였다. 나는 그것도 통과했다.

난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꽤 많은 돈을 빌릴 수 있는 기관의 기술 심사에서는 현장 실험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내 기계가 고래를 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고래 쫓는 기계를 어떻게 실험할까? 만약 반대로 고래를 불러 모으는 기계를 실험하는 거라면, 기계를 돌리고, 고래가 오는 지 안 오는 지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고래를 쫓는 기계를 어떻게 실험하겠는가? 그냥 아무 바다에서 기계를 돌리면 원래 고래가 아예 없는데, 아예 없는 것보다 더 고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골치 아픈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반 박사는 조금 더 돈을 빌릴 수 있도록 나를 다른 기관에 소개해 주었고, 그 돈으로 호주의 어느 대형 수족관에서 기르고 있던 돌고래를 잠깐 빌려서 겨우겨우 우리 장치로 실험을 해낼 수 있다. 500미터 둘레의 고등어 잡이 그물로 둘러친 바다의 구역에 돌고래 다섯 마리를 풀어 놓고, 내 장치로 소리를 들려 주었더니, 그것들은 물러 갔다. 머나먼 남의 나라에 가서 그 모든 실험을 때에 맞춰 진행한다는 것은 홀로 처음 사업을 시작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대단히 피곤한 일이었긴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실험조차 기대한 대로 잘 마무리되었다.

한 번 난관을 넘어 서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일이 더 잘 풀렸다. 곧 국제적인 투자 심사도 진행될 거라고 했고, 그 말대로 투자 심사 작업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며 진행되었다.

그러다 어쩌다 분위기를 잘 타게 되니, 일은 삽시간에 커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냥 어떤 은행 같은 곳에서 주식을 몇 주를 얼마에 파느냐 하는 정도의 문제였는데, 갑자기, 반 박사 말대로라면 “빅 가이”들의 판이 되어 버렸다. 구글, 아마존, 애플, 테슬라가 동시에 투자를 한다나, 만다나 뭐 그런 이야로 변해 버렸다.

최종 투자 심사에는 실연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실제로 바다에 나가서 기계를 작동시켜 보는 것을 억만장자들의 대리인들 앞에서 보여 주어야 하나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실제로 고래를 쫓거나 하는 것까지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그냥 부둣가, 눈에 잘 보이는 위치에 배를 띄우고 기계를 조작하는 모습만 보여 주면 된다고 했다.

실연을 얼마 앞 두고, 반 박사는 가장 멋진 파티에 나를 초대한 후에 내가 가장 달콤한 환상에 가장 깊게 빠져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약간, 껄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해야될 것 같은데요. 박사님. 이게 스케일 업이 너무 크게 되다 보니까, 저희 회사에서 인터널로 처리해야 한다는 쪽으로 정해져버렸어요. 그래서, 박사님은 박사님 대로 사업을 하시고, 그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저희 회사에서 직접 설립한 회사에서도 따로 경쟁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회사에서 따로 회사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회사에서도 고래 울음소리로 고래 쫓는 장치를 만들 거라는 거에요. 투자 심사에도 같이 나갈 거고.”
“그러면, 그 회사랑, 제 회사랑 서로 겨루어야 한다는 뜻 입니까?”
“형식상으로 그렇기는 해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실 건 없을 거에요. 박사님 기술이 더 앞서잖아요. 최고 선도 업체고. 오리지널이고. 원조고. 저희 회사에서 흉내낸 회사를 설립한 건 뒤따라 가는 역할이니까. 사실 기술도 떨어질 것이고. 조금 떨어지는 콩고물 먹으려는 들러리 역할이라고 보시면 되죠 뭘. 그치만, 미안해요.”

들뜬 마음과 불안함이 겹쳐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심사를 받으러 갔다.

심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진 높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의심스럽게 쳐다 본다고 해도, 내가 만든 기계는 잘 작동할 수 밖에 없었다. 30% 정도의 성능이기는 했지만, 그 성능까지 잘 작동했다. 그래야만 했다. 내 모든 희망을 전부 건 심사였기에, 간밤에 여덟번 씩이나 확인하고 시험해 본 기계였다. 이제 와서 갑자기 결과가 달라질 까닭이 없었다.

컴퓨터를 철로 만든 선반에 고정시켜서 만든 장치는 투박했다. 그러나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는 배 위에서도 이상 없이 잘 돌아 갔다. 초음파가 잘 울려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화면에 명확하게 숫자로 표시되었다. 사람 귀로 들리지 않는 초음파 소리였기에, 숫자로 자료를 표시할 수 밖에 없으니, 그 장치의 수준도 오히려 수치로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실제로 고래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래들이 물러 나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이 30% 정도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결과임에는 분명했다. 기대한 대로였다. 꿈꾸었던 대로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그 다음에 내가 본 광경이었다.

반 박사는 다른 회사의 참여자로 모방 제품을 들고 심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원리 설명을 들으니 내 회사의 제품을 대놓고 베낀 구조였다. 그리고 그 회사의 CTO라는 사람으로, 빌어먹을 김 박사가 배에 같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장비도 그럭저럭 잘 작동하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내 제품을 베꼈으니까.

그러나 미리 공개해 놓은 사전 측정 수치만 봐도 내 장비에 비해 성능은 떨어졌다. 예상해 보자면 25% 정도? 나로서는 안심이었다. 반 박사 말은 역시 맞았다. 애초에 급하게 흉내낸 그들의 장비는 내가 갖고 있던 다양한 기술들을 다 갖추지 못한 제품일 뿐이었다.

한 가지, 처음부터 마음에 걸렸던 것이 있다면, 김 박사가 조작하는 장비가 매끈한 곡선을 갖춘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초음파 하면 생각나는 병원에서 건강검진할 때 쓰는 그런 초음파 장비와 비슷한 겉모양을 갖고 있었다. 그 겉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게 더 근사하고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점점 불길한 느낌이 커져 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반 박사와 김 박사가 그 장치를 작동시키자, 나는 정신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기계에서는 귀에 들리는 고래 울음소리가 났다!

코미디언들이 고래 소리를 흉내낸다면서 내는 그 비슷한 소리를 어디서 녹음해 왔는 지 기계에서 그 소리가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다. 고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고래가 울음소리를 낸다면 꼭 이럴 것 같다고 막연히 상상하곤 하는 바로 그 소리를 꾸며서 들려 주고 있었다. 실제로 기능을 위해 뿜어져 나오는 초음파는 어차피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니 기능과는 아무 상관 없는 소리였지만, 너무나 멋졌다! 자기는 고래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사랑할 만한 소리였다. 희망을 갖고 있는 기계였다. 행복한 꼴을 갖춘 기계였다! 성능이야 30%면 어떻고 25%면 어떤가? 어차피 100%가 아니기로는 꼭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쪽 기계에서는 고래 울음소리가 나온다니까!

누가 들러리가 되니 어쩌니 했던 것 같은데, 심사가 끝나 보니, 정작 나는 들러리조차 되지 못한 형편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저쪽 회사가 완벽하게 모든 투자를 받았다. 내 회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일이 끝났는데도. 해괴하게도 그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제 아무래도 반 박사와 어울리기는 어렵겠지, 하는 멍청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생각이었다.

사무실까지 돌아 가는 동안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변에서 계속 소용돌이 치는 것 같았다.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정말 뭘 할 수 있을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이 생각이 나지 않는데, 도대체 빚이 얼마나 쌓여 있나 하는 계산만이 머리 속을 핑핑 돌았다. 고래 쫓는 기계를 작동시켰는데 괜히 쓸데 없이 고래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사람 귀에 들리게 나오는 장치라면, 막상 어선에 달아 놓고 작업할 때는 시끄럽고 정신 사납기만 하지 않을까? 그런 부질 없는 생각만 괜히 자꾸 들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이제는 끝이었다. 다 끝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돌아 와 그 한 가운데에 혼자 앉아 있으니, 컴퓨터 화면에 어제 밤 늦도록 점검했던 고래의 울음소리를 표시한 숫자들이 그대로 나와 있었던 것이 보였다. 372 532 426 882 426 232 443 132 592 102 그런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숫자들을 나는 멍하니 계속 읽어 보았다. 문득 고래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귀에서 점차 들려 오기 시작했다. 밤 새도록이라도 울 수 있을 것 같은 소리였다.


- 2022년, 종로에서

 

댓글 2
  • No Profile
    윤새턴 22.04.07 05:43 댓글

    과장되거나 희화화된 현실은 보면서 꽤 즐거울 수 있는데, 너무 현실같은 현실은 구역질이 나오네요. 사실은 반 박자 빠른 사람이었군요, 우웩. 잘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2.04.07 12:38 댓글

    관심 갖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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