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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소원의 정복자

2022.09.30 00:0309.30

소원의 정복자


호성은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분수대에서 영화를 처음 만났다. 

영화가 던진 동전이 잘못 맞아 튀면서 호성의 머리에 맞았다. 영화는 호성에게 사과했고, 호성은 당황해 하다가 괜찮다고 인사했다. 그게 그냥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떠나려는 영화에게 호성이 말을 걸었다.

“혹시, 별로 안 바쁘시면, 제가 근처에 식당 맛집 아는데 거기서 점심이나 같이 드시면 어떨까요? 꼭 동전으로 사람 맞혔다고 같이 식사를 해 줘야 되는 게 당연하다, 뭐 그런 것은 아니고요. 싫으시면 그냥 가셔도 괜찮고요. 괜히 이런 걸로 사람에게 들러 붙는 것도 좀 나쁜 짓이니까요. 그런데 그런게 아니라 오늘 딱히 할 일이 없으셔서 그냥 놀고 싶다, 그런데 그냥 건실한 어떤 남자랑 같이 식사를 해도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같이 점심을 드셔도 되기는 되지 않겠나,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물론 그 정도로까지 제가 건실해 보이지는 않을 수는 있죠...... 그런데 그건 아까 동전에 맞은 것 때문에 건실성이 조금 떨어져 보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런 것이다, 라고 감안을 해 주시면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말을 한 직후, 호성은 앞으로 20년 간 다시 기억이 떠오를 때 마다 부끄러워할 만한 문장을 입으로 발음하고 말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화는 웃으며 호성을 9초 정도 바라 보다가, “오늘은 사실 바로 다음 일정이 있어서 어렵겠다”고 말했다. 호성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러시냐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그런데 곧 영화는 더 큰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일 저녁은 괜찮아요. 제가 잘 아는 식당 맛집으로 오시라고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해서 호성은 영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호성은 멋있어 보이려고 갖가지로 준비했다. 항상 호성은 틈만 나면 영화에게 더 멋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위해 연습했다. 예를 들어, 멋있는 말을 하는 것도 연습했다. “제가 원래 그렇게 막 자신 있게 누구한테 말 걸고 그러지를 못하는데요. 그때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면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정말 소원을 빌고 눈을 뜨자 마자 영화씨가 던진 동전이 딱 날아 오더라고요.” 이렇게 말을 하면 뭔가 멋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자기 혼자 멋있다고 생각한 말을 녹음해서 다시 들어 보면 엄청 웃기게 들릴 때가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렇게 녹음해서 들어 보니까 정말 우습게 들렸다. 그래서 여러 번 녹음과 재생을 반복해 가며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멋있게 들릴 때까지 연습해 보기도 했다.

저녁에 다시 만난 영화는 기절할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마땅히 이어져야 하는 대로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준비한 말을 할 기회는 없었다. 대신에 부드럽게 이야기가 흘러 가서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다.

“어제 분수대에서 바쁘다고 하신 것,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 봐도 돼요?”
“벌써 물어 본 것 아닌가요?”
“물어 봐도 되는 지, 까지만 물어 본 거죠.”
“그럼, 물어 봐도 된다고 대답할게요. 물어 봐도 됩니다.”
“......”
“물어봐도 된다고 했으니까, 이제 물어 봐야죠?”
“어제 분수대에서 바쁘다고 하신 것, 무슨 일 때문이었나요?”

대화가 재미 없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호성은 걱정했다. 호성은 영화와 만나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영화의 대답이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저는 소원을 들어 준다는 분수대나 연못이나 뭐 그런 게 있으면, 항상 찾아 가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항상 소원을 빌어요. 그런 데를 최대한 다니는 게, 제가 시간나면 하는 일이에요.”
“그렇게 간절히 빌고 싶은 소원이 있어요? 무슨 시험 같은 걸 준비하시나요?”

영화는 고개를 저었다. 꽤 오래 동안 세게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저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비는 소원은 딱 하나예요. ‘앞으로는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이곳에서 더 이상 소원을 들어 주는 힘이 사라지게 해 주세요’라고 빌어요.”
“네? 왜요?”
“그 소원을 비는 곳에 진짜 소원을 들어 주는 힘이 있다면 정말로 그 다음부터는 소원을 들어 주지 못하는 곳으로 변하겠죠. 그렇게 해서 소원을 들어 주는 곳이 없어지는 거죠.”
“만약에 그 소원을 안 들어 주면?”
“그러면 어차피 거기는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 주는 곳은 아니었던 거죠. 가짜 소원 장소였던 거예요. 그런 곳에는 처음부터 소원을 들어주는 힘은 없다고 봐야겠죠.”
“그런 일을 왜하죠?”
“전국 방방곡곡, 세계 각지를 돌아 다니면서 이런 일을 하고 다니면서, 소원을 들어 주는 곳을 모두 다 없애는 거에요. 그게 제 목표예요. 소원을 들어 주는 바로 그 힘을 이용해서.”

그리고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더 밝게 웃었다. 

호성은 어쩌다 보니까 따라 웃게 되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저런 세상의 다른 이야기나 인생 살다가 고생한 이야기나 오늘 낮에 겪었던 웃긴 이야기를 했고, 또한 이런 말 하면 다 망칠 것 같고 너무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 봐서 아무 감흥도 못 드리고 지겨운 느낌만 드리겠지만 처음 보았을 때부터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나 등등의 대화를 하다 보니 더 친해지게 되었다.

호성은 영화를 따라 주말 마다, 휴일 마다, 혹은 잠깐 씩 저녁에 여유가 생길 때 마다 곳곳의 소원 빌어 주는 곳을 찾아 다녔다. 재미있는 여행이었고, 즐거운 모험이었다. 가기 힘든 곳도 많았지만, 그런 곳일 수록 색다른 일이 생겨 더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았다.

“아니, 망할, 왜 우리나라에는 뭐 소원을 들어 준다는 데가 다 이렇게 산꼭대기에 무슨 봉우리 같은데가 이렇게 많아? 무슨 할머니 바위, 산신령 바위, 이딴 게 다 죽자고 산을 올라가야 있어? 유럽처럼 그냥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에 소원 비는 곳이 있으면 좀 좋아.”
“좀 그만 좀 투덜거려라.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올라 와야 소원을 빌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게 확실히 드라마틱하잖아.”
“아니, 램프의 지니도 그냥 그릇을 손으로 문지르기만 하면 나와서 소원을 들어 주잖아. 왜 이 동네에서는 소원을 빌려면 해발 1231미터까지 산을 올라가야 하는 건데?”

호성은 소원을 비는 곳에 와서도 따로 빌 것이 없어서 그냥 머뭇거리며 있었다. 보통은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영화를 쳐다 보기만 했다. 언제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가 많은 영화였지만, 그렇게 소원을 비는 모습은 자뭇 경건했다. 정말로 천사가 어떤 신비한 힘을 세상에 발휘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작정을 하고 살펴 보니 세상에 소원을 비는 곳은 생각보다 굉장히 많았다. 세상에 그만큼 간절한 사람들이 많은 건가 싶기도 했다.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암초 위의 형상, 시골 마을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돌로 된 장승, 천 살이 넘었다는 어느 동산의 큰 나무, 무슨 이상한 종교의 교주가 만들어 놓은 조각상 같은 곳에 가 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소원을 빌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고, 그냥 그러고 싶어서 한참 둘은 끌어 안고 서 있었던 적도 있었다. SNS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나서, 어느 수족관에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상어가 눈을 마주칠 때 소원을 빌면 소원을 들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때문에 상어 앞에서 몇 시간이나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눈을 마주쳐 주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의 즐거운 시간은 흘러 갈 곳이 많은 지라, 시간이 흐르자 결국 두 사람은 멀어지게 되었고 어느날에인가는 서로 헤어지자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어떻게 마지막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호성은 끝끝내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아무 쓸데 없는 이야기만 했는데, 그러다가 영화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그냥 정해진 원리 대로 이치에 맞게 돌아 가는 거잖아. 소원을 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소원이 그냥 이루어진다면 그건 굉장히 이상한 거야. 세상이 돌아 가는 걸 망가뜨리는 특별 예외 규칙 같은 게 있다는 얘기잖아. 그러면 세상의 원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거나 다름 없다고. 그런 건 똑바로 된 세상이 아니지. 그래서 그런 소원을 비는 곳이 없어지도록 항상 소원을 비는 곳이 없어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어야 돼. 이런 것은 꼭 필요한 임무야. 여러 사람이 긴 세월에 걸쳐서라도 수행해야 되는 거라고.”
“그게 갑자기 무슨 황당한 소리야? 네가 무슨 대대로 소원을 없애는 가문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거야? 네가 무슨 소원 없애기 비밀 조직 대원이야? 왜 지금 그런 말을 해?”

영화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냥 한 방울씩 눈물만 흘렸다. 호성은 소리를 내어 엉엉 따라서 울고 싶었는데, 그래 봐야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온 힘을 다해서 참다가 집에 돌아 와서는 어두운 방 천장만 보면서 다섯 시간인가, 여섯 시간인가, 밤새 한숨만 쉬었다던가.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성은 힘든 일, 웃긴 일, 골치 아픈 일, 재미 있는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러면서 세상이 얼마나 멍청하고 바보 같은 곳인지, 얼마나 한심하고 별 것 아닌 일들 뿐인지 알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종종 무섭고 두려우며 또한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에 시달렸다. 그 모든 것을 거쳐 호성은 결국 자기가 어떤 것을 바라며 무엇이 필요한 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호성은 시간이 날 때 마다 혼자서 소원을 들어 준다는 곳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가끔 호성과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어서, “호성씨는 취미가 등산이에요?” 라고 물으면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목적지는 매번 달라졌다. 그렇지만 한번 정한 목적지가 있으면, 도중에 다른 구경거리가 있어도 들르지 않았고, 빡빡한 일정이라면 서두르기도 하면서 놓치는 적 없이 매번 정확히 소원 빌어 주는 곳으로 향했다. 매번 도망치는 것처럼 찾아 갔고, 돌아 오면서는 무엇인가를 잃어 버린 것처럼 쓸쓸해 하면서 돌아 왔다.

그런 일이 한참 반복되었다.

그러다 한번은 호성이 소원을 들어 준다는 어느 산기슭의 무슨 바위를 찾아 갔을 때였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산길 주변은 온통 안개로 휩싸여 있었다. 바위를 향해서, 호성은 지난 수십 번 동안 했던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소원을 빌고 고개를 들었는데, 영화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 표정도 없는 몇 천 번이고 쳐다 보던 사진인가 싶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조금씩 웃음을 지었다.

영화는 호성의 놀란 눈을 한 번 바라 보더니, 바위를 한 번 쳐다 보았다. 그리고 곁눈으로 호성을 다시 보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원 비는 바위에, 이렇게 새벽 같이 이른 시간에 오는 사람이 다 있나?”

호성이 대답했다.

“혹시라도 누가 소원 없애 버리는 걸 빌기 전에 내가 먼저 소원을 빌려고 제일 먼저 일찍 오는 거지.”

영화는 호성을 다시 바라 보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바위를 보았다. 울먹이는 소리가 아침 안개에 녹아들었다. 영화가 다시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비는데?”

호성은 말을 하려고 했다.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 한번만이라도 더 만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습도 하지 않은 말이라, 입을 열고 멋있게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갑자기 우는 목소리가 나와서 몇 번이고 망설이기만 했다.


- 2022년, 목동에서

댓글 2
  • No Profile
    윤새턴 22.10.09 13:05 댓글

    제 사는 곳에서 이렇게 달달한 이야기를 생각하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신기하게도 등장인물들과 동명인 커플도 알고 있어 더 놀랐습니다. 그와 별개로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2.10.31 16:26 댓글

    재미난 우연이네요. 이번에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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