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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추석이니까요

2022.09.01 00:0009.01

추석이니까요

빗물

 

조용한 추석이었다. 추석은 늘 그랬다. 여행을 가거나 귀향한 사람들이 사라진 서울의 골목들이 그러했고, 묘하게 새 글이 줄어든 인터넷 게시판이 그러했고, 지금 이 S대 병원 4층 복도가 그러했다. 물기가 적어 뻑뻑한 대걸레로 혈액 내과 병동 바닥을 미는 수진에게 그건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이렇게 조용한 날이면 그들이 내는 소리가 평소보다 잘 들렸다. 수진이 대걸레를 밀며 복도를 걷는 내내, 4112호는 자신이 생전 이곳에서 보냈던 추석 연휴를 이야기해주었다. 추석이라 다른 치료도 다 멈추고, 담당 전공의도 자주 오지 않은 채 그저 그림처럼 놓여 항암제 주사만 맞고 있었단다. 다른 환자들의 보호자가 병실을 찾았을 땐 또 얼마나 외로웠는지까지, 4112호는 끝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예를 들어 4112호가 저 병실에 누워있는 이들처럼 평범한 환자이고, 수진이 평범한 청소 용역이었다면 이 대화도 그저 평범한 넋두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4112호에서 투병하다 억울하게 죽었다고 설명하는 이 ‘4112호’는 말할 수 없이 낮은 음역대로 웅웅대며 화장실 칸막이 안까지 수진을 쫓아왔다.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리였다. 아주, 아주 낮은 음계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그런 적이 있다면 어쩌면 당신도 수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지도 모른다. 찢어질 듯 높은음이 고막을 긁는다면, 한없이 낮은 음은 머리와 가슴 어디쯤을 눈앞이 번쩍할 정도의 힘으로 타격한다. 그건 소름이 쭉 끼칠 만큼 낯설고 강렬한 통각이다. 그런데 수진이 듣는 소리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음역대였다. 그러니 고통이 오죽하겠는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수진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하자면... 수진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폭력 가정에서 뛰쳐 나왔지만 지병 때문에 평범한 직장인이 되기 어려웠을 뿐. 수진은 한 해가 지날수록 짧은 일자리를 찾았고, 그나마 용역업체를 통해 이 병원을 찾은 덕에 몇주 째 –겉으로는-무사히 근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수진에게 왜 이 4112호 같은 존재들이 자꾸 말을 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진아, 나... 귀신이 보여.

 

학창 시절, 종종 그런 말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귀신을 믿는 걸까, 어디가 아픈 걸까, 기가 허해진 걸까 했다. 그러니까 수진은 여기서 일하기 전까지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은 적이 없었다. 처음 말을 건 것은 5층 정신과 병동에서 만난 5124였다. 5124가 자신을, 5124호에서 퇴원하자마자 자살한 환자라 소개했기 때문에 수진은 그를 5124라고 불렀다. 몇 주 동안 하루걸러 이틀씩 같은 소리를 귀에, 아니 머리에 딱지가 앉도록 듣다 보면,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분류하게 되었다. 그건 썩 괜찮은 본능이었던 것 같다. 수진을 따라다니는 그들은 7층에도, 9층에도 있었다. 귀를 막아도, 쓰레기통 비우기에 집중해도 몰아치는 소음들은 그렇게 나름의 분류체계를 갖추고 나서야 한결 덜 어지러운 모양새가 되었다.

 

 

 

병동 복도를 지나 병실, 화장실, 외래 진료실과 전공의실... 몇 시간에 걸친 청소를 끝내고 수진은 옷을 갈아입었다. 병동을 청소하는 동안만 소리와 눈길을 꾹 참으면 되었다. 수진은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척, 들리지 않는 척 그저 대걸레가 지나가며 남기는 물줄기에 집중하며 걸으면 그만이었다. 휴게실이라 불리는 창고에 놓아둔 쇼핑백에서 옷을 꺼내, 여자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땀에 촉촉이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세면대 앞에 서서 질끈 묶었던 머리를 풀어 헤치던 수진은, 문득 손을 들어 가르마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거울을 향해 뇌쇄적인 눈빛을 보냈다.

 

“청소만 하기엔 아까운 얼굴이다...”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나와버려 수진은 화들짝 놀랐다. 4112호가 처음 말을 걸었을 때보다 더. 수진은 고개를 쭉 내밀어 사람이 들어 있는 칸막이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연휴 동안 외래진료를 쉬는 병원 화장실에, 산 사람은 자신밖에 없음을 확인한 후 수진은 경쾌하게 쇼핑백을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본관을 나와 후문 쪽으로 향했다. 가을이라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연휴였다. 어디서 은은한 원두 향이 풍겼다. 향기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자그만 테라스를 가진 병원 카페가 보였다. 정신없이 퇴근하느라 늘 지나치던 곳이었다. 오늘은 왠지 남들 놀 때 일한 자신에게 상 하나를 주고 싶었다. 후문 대신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딸기 바나나 주스 하나 주세요.”

 

“어머, 딸기 바나나요? 그거 맛없는데...”

 

“네...?”

 

당황한 수진 앞에서, 단발머리를 한 앳된 얼굴의 직원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지.

 

“저는 딸기 바나나 말고 더 맛있는 거 드리고 싶어요. 음... 아, 저 유자차 되게 잘 만드는데. 혹시 유자차는 어떠세요? 일하고 오셨으니 시원하게 냉침 해드릴게요.”

 

너무 밝고 친절하게 말해서 수진도 순간 ‘와, 저 원래 유자차 짱 좋아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하고 답할 뻔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의젓한 사회인으로서 대답했다.

 

“아... 저는 딸기 바나나 먹으려고 했는데. 그럼 다음에 올게요...”

 

직원이 굳이 굳이 들이미는 메뉴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아는 수진이었다. 게다가 저 사람은 조금 이상하잖아!

 

“안 돼요, 손님! 유자차 드세요, 제발...! 제가, 그냥 해드릴게요.”

 

“예...?”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보건증도 있고, 이거 다 허가받은 가게예요. 어, 그니까... 저 믿고, 드셔보세요. 제발요.”

 

수진의 헝클어진 머리 아래서 동공이 흔들렸다.

 

“그... 돈을 안 받으시면... 유자차가 얼마죠?”

 

“아니에요. 정말 그냥 해드릴게요.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여자는 우당탕거리며 쇼케이스 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자그맣고 투명한 병 안에는 샛노란 유자청이 가득 담겨있었다.

 

‘와, 근데 정말 좋은 유자를 쓰긴 하나 보네. 어떻게 저렇게 색이 좋지?’

 

수진은 생각했다. 햇빛이 밝아서일까, 자그만 단지 속 유자청은 유난히 예쁘게 반짝였다. 직원은 병을 잡고 뒤집어 고루 흔들었다. 사르륵, 하얀 눈송이 같은 설탕 알갱이들이 출렁이는 노란 물결 위로 곱게 내려앉았다. 직원의 숟가락에 폭, 떠올려진 유자청은 김이 폴폴 올라오는 뜨거운 물 위로 퐁당 떨어졌다. 직원이 머들러로 차를 휘휘 젓는데 벌써 달큰한 냄새가 올라왔다. 잘그락, 빛나는 각얼음이 떨어지고 냉수가 부어진다. 수진은 유자차가 담긴 잔을 받아들었다.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차가, 목구멍을 적시고 흘러 배에 도착한다. 수진은 건네받은 유자차를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며 마셨다. 시원한 음료인데도 왠지 그렇게 하게 됐다. 그렇게 유리잔을 모두 비우고 나자, 정신없이 일하랴, 낯선 소리에 시달리랴 바짝 곤두서있던 온몸의 신경이 스르르 긴장을 푸는 듯했다. 잔을 내려놓은 수진은, 왠지 모르게 아주 편안하고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차를 마신다는 게 이런 거였지. 그게 냉침을 한 유자차여도 마찬가지구나. 다만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다. 아주, 아주 평온한 기분으로 수진은 입을 열었다.

 

“잘 마셨어요. 저... 계산 할게요. 유자차가 얼마죠?”

 

메뉴판을 아무리 훑어도 유자차는 보이지 않았다.

 

“맛있죠? 추석에도 일하느라 고생했어요!”

 

카페 직원은 눈썹을 찌푸리고 입을 비죽이며 엉뚱한 답을 했다. 수진은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손등으로 투두둑 눈물이 떨어지는데, 이상하게도 당황스럽거나 부끄럽지가 않았다.

 

“에구, 누가 괴롭혔어요? 우니까 마음이 아프네.”

 

그녀가 손을 내밀어 수진의 눈물을 닦아줬다.

 

“이 병원에 오고 나서... 자꾸 이상한 게 보이고 들려요. 저, 원래 귀신 보고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일하기도 힘들고 사는 것도 힘든데, 자꾸 무서운 소리까지 들으니까 미치겠어요.”

 

수진은 엉엉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친한 친구들과 술을 마셔도 울지 않는 수진이었다. 그런 수진이 울고 있었다. 울음에 섞여 흐린 발음으로 늘어놓는 수진의 말은 수진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런데 직원은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청소 일이 참 힘들죠... 서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 혼자 젊으니까 여사님들 사이에서도 눈치 보이고. 게다가 낯선 소리가 들리니까 얼마나 무섭겠어요.”

 

“네... 왜 저한테 그런 게 들리는지 모르겠어요. 점집을 가기는 싫고, 병원을 가기도 그렇고... 아니 여기가 병원인데 그니까 제 말은...”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건, 손님이 그 말을 들으려 하는 사람이라 그래요.”

 

“제가요? 저는 그런 소리 듣기 싫은데요...?”

 

“음... 있잖아요. 귀신들은요, 아주 작고 낮게 말해요.”

 

“어...어떻게 아셨어요?”

 

“헤헤. 눈 똥그래졌다. 작고 낮은 소리는, 들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들려요. 그분들요, 손님한테만 말을 거는 거 아니에요. 보는 사람마다 따라가서 말할걸요? 그런데 손님만 듣는 거죠.”

 

“정말요...? 그런데 저는 그게 무섭고 싫거든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척하면서 청소만 해요.”

 

“손님, 사람이든 동물이든요,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요. 그런데 귀신은 어떻겠어요?”

 

수진은 잠시 멀거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분들 소리... 정말 그만 듣고 싶으면, 먼저 제대로 들어줘야 해요. 그분들도 같은 말을 수없이 하느라 지쳤을 거예요. 그만 말하고 싶을 거예요, 분명히.”

 

“그러면... 대꾸를 하면 되나요? 으... 다른 환자들이나 간호사들이 이상하게 보면 어쩌죠? 안 그래도 청소 치고 젊은 사람이라 튀는데.”

 

“차를 드리면 돼요.”

 

“네? 차요?”

 

“네, 차요! 그분들한테, 무슨 차를 좋아하냐고 물어보세요.”

 

“그...그러고 나면요?”

 

“저한테 오세요. 제가, 차를 드릴게요.”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울음 멈췄다! 헤헤, 울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낫죠? 차를 마셔서 그래요.”

 

“유자차인데요...”

 

“유자차는 뭐, 차 아니에요? 차가 다 똑같은 차죠. 아무튼, 손님, 제 얘기 꼭 기억하시고 또 오세요!”

 

양손을 흔들고 보조개가 쏙 들어가도록 웃으며 배웅해주는 직원에게 수진도 얼결에 손을 흔들다 깜짝 놀라 그대로 허리를 굽혔다. 아, 쪽팔려. 이건 좀 이상한 몸짓이었다. 수진은, 유자차 값을 계산하지 않은 것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겨 카페를 떠났다.

 

 

 

여러 내과 환자들이 섞여 있는 9층 병동을 청소하는데, 거기서는 어김없이 9125호가 따라붙었다. 청소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 수진은 비상문 앞에 잠시 멈춰서 무언가를 고민했다. 그러다 묵직한 문을 열며,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9125호를 바라보았다. 무척 떨리는 일이었다. 수진의 눈과 마주치자, 9125호의 눈빛도 흔들렸다. 아주 야윈 얼굴에 뺨이 푹 패이고, 콧날이 동그랗고 쌍꺼풀 없는 큰 눈을 가진 수진 또래 여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천천히 문 너머 비상계단 앞 공간으로 함께 넘어갔다. 한참 눈을 맞추다 내려간 시선에, 가슴 아래 배가 있을 곳이 뻥 뚫린 것이 보였다. 수진은 다시 그의 눈에 시선을 옮기고 물었다.

 

“저... 저기요.”

 

“어머...”

 

9125는 뼈마디가 불거진 여윈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놀랐다.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그... 날씨가 참 좋죠... 음 그니까 병원에서도 창가에 서면 바람이 시원하잖아요. 갑자기 말 걸어서 놀라셨을 텐데. 어... 혹시, 차 좋아하세요...?”

 

아, 말해버렸다. 수진은 왠지 얼굴이 화끈해졌다.

 

“차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차... 좋아하죠. 엄청 좋아했어요. 못 먹은 지 오래됐는데...”

 

9125는 슬픈 눈으로 웃었다.

 

“차를 좋아했다는 걸 잊고 지냈어요. 그런 거 물어 봐주신 분은 생전, 아니 사후 처음이네요...”

 

“그러셨구나... 저도 차 좋아해요. 어제도 퇴근하는 길에 유자차 사먹었어요.”

 

말해놓고 수진은 아차, 싶었다.

 

“와... 부럽다. 저도 데리고 나가주시지.”

 

“예...?”

 

“농담이에요.”

 

“하하... 하하! 음, 그... 선생님은 무슨 차를 좋아하세요?”

 

“저요?”

 

9125의 눈이 반짝였다.

 

“와, 오래돼서 바로 기억이 안 나는데... 잠시만요. 아, 저 그거 좋아했어요. 루이보스티 라떼.”

 

“루이보스티 라떼요?”

 

“네. 옛날에 스타벅스에서 루이보스티 라떼라고 팔았거든요. 아프면서 커피도 못 먹고 우유도 못 먹었는데, 스타벅스는 우유를 두유로 바꿔주거든요. 입맛도 없고 밥도 소화 안 될 때 거기 가서 그거 한 잔 마시면 든든하고 고소하고... 그런데 걔네가 그걸 단종시켜 버린 거 있죠? 언제 다시 그 메뉴 살리지는 않을까 기다렸는데... 못 보고 죽어버렸어요. 그거 혹시 다시 메뉴에 들어오진 않았나요?”

 

“...제가, 한 번 알아볼게요.”

 

들뜬 목소리로 끝없이 고맙다고 말하는 9125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한 손엔 카트를, 한 손엔 대걸레를 끌고 수진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문득, 저 소리가 더는 낯설지 않았다. 수진은 갑자기 카트를 화장실 구석에 밀어놓고, 승강기에 올라타 1층을 눌렀다. 건물을 나서 카페로 달려갔다.

 

“어머, 손님!”

 

“루이보스티 라떼를 좋아한대요!”

 

“누가요?”

 

“그... 9125님이요.”

 

“어머? 이름이 되게 특이하네? 그 자꾸 말 건다는 분 말씀이죠?”

 

“네. 근데 뭐 스타벅스에서 두유로 만든 그런 거 좋아한다던데... 어쩌죠?”

 

그는 생긋 웃더니, 찬장 위 종이상자에서 세모난 티백 하나를 꺼내 수진의 눈앞에 흔들었다.

 

“짠! 루이보스티예요. 향이 되게 좋죠?”

 

알싸하게 향긋한 내음이 풍겼다. 직원은 금세 포트에 물을 끓이더니, 금박 꽃무늬가 그려진 머그잔에 물을 붓고 티백을 퐁당, 담갔다.

 

“두유가 안 들었어도 고소하고, 든든할 거예요. 배도 안 아프고요.”

 

그는 손으로 턱을 괴고 행복한 얼굴로 수진을 보며 웃었다. 수진은, 뚜껑이 덮인 머그잔을 조심스레 들고 9층으로 향했다. 수진에게 잔을 받아든 9125는, 올라오는 향기로운 연기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차를 마셨다. 차를 다 마시고 난 그의 얼굴에 편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저는, 정선아예요.”

 

9125, 아니 선아가 말했다.

 

“설사가 심했어요. 쉬는 시간 10분 빼고는 교실을 나갈 수 없는 고등학교 시절이 힘들었어요. 시험을 볼 때는 얼마나 괴로웠게요?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엄살 부리지 말라는 거예요. 내시경에 이상이 없다고 신경성이라는 거 있죠. 사실 병 맞았는데...”

 

선아는 물에 젖은 눈으로 수진을 보았다.

 

“병을 늦게 진단받아서 많은 걸 잃었어요. 연애도 하고 싶고, 대학도 다니고 싶고, 일도 하고 싶었는데.”

 

수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선아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나보고 예민하다고 짜증 내고 돌려보낸 교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해요. 고은정 교수... 그 사람도 언젠가 아파서 도움이 필요할 날이 오겠지, 생각했는데 내가 이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네.”

 

수진은 선아를 꼭 안아주었다.

 

 

 

7117의 이름은 김진경이었다. 그는 우롱차를 좋아했다. 우롱차만큼 좋아하던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던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 위반 차량에 치였다. 사고에 비해 크게 다치진 않은 채 고관절과 다리 수술을 했다. 문제는 수술 후 꽂은 소변줄이었다. 진경의 다리 아래에 연결된 호스를 따라 통에 떨어지는 소변에 피가 섞여 나왔다. 진경은 아랫배가 아팠고, 열이 올랐다. 회진 때마다, 처치를 하러 간호사가 올 때마다 진경은 그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수술 후 소변줄을 꽂으면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진경은 갑작스레 쇼크사했다. 병원은 진경이 큰 수술을 견디지 못하는 몸이었다고 말했다. 진경의 가족들은 병원을 고소하려 했지만, 그런 싸움은 이기기 힘든 법이었다. 백만원 남짓한 돈이 그들에게 갔다.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소변줄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아플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이... 창피하다는 거였어요. 남자친구가 간호를 해주는데, 때가 되면 소변통이 차고 거기 피가 섞이는 게 창피했어요.”

 

수진은 한참 만에야 말을 찾았다.

 

“...속상하셨죠. 아프다는 건, 사람을 너무 슬프게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파서 그런 건데, 창피한 일은 아닌데 말이에요.”

 

오래 망설이다, 진경의 남자친구에 관해 물었다. 그는 생각 외로 기쁜 표정과 함께 여러 이야기를 했다. 애인이 중국 여행을 다녀오며 사다 준 찻잎을 우려먹은 후로, 우롱차가 참 맛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진경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진경의 이름과 남자친구에 대해 듣기 전, 수진은 카페에 가 우롱차를 주문했다. 카페 직원은 찻주전자를 열고, 다관에 둥글게 말린 찻잎을 넣었다. 꼴꼴꼴, 끓는 물이 부어지고 싱그러운 내음이 퍼진다.

 

“꼭 사과 향 같지 않아요?”

 

“그러네요.”

 

수진은 문득, 카페 직원의 뺨이 사과처럼 붉다는 생각을 했다. 참 귀여운 얼굴이었다.

 

“저...기요.”

 

“네?”

 

“그런데, 정말 돈 안 드려도 괜찮아요?”

 

그녀가 쿡쿡 웃었다.

 

“이거 돈 받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수진은 잠시 턱을 괴고 그녀를 보았다. 수진이 갖지 못한 것이지만, 그래서인지 수진이 미치도록 사랑하고야 마는 몸짓이었다. 그랬던 몸짓이 있었다.

 

“저... 혹시, 성함 여쭤봐도 돼요?”

 

“앗, 제 이름이요?”

 

“네.”

 

“음...”

 

그는 뜸을 들이는 동안, 양 볼이 쏙 들어가도록 미소를 지었다.

 

“아직 비밀인데.”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 앞에서, 수진도 웃음이 터졌다.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데, 어느새 아주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그렇게 우롱차를 들고 본관 7층에서 진경과 이야기를 나눈 뒤, 6층을 청소하고 다시 5층을 청소했다. 그리고, 5124에게 좋아하는 차를 물었다. 카페 직원은 동그란 종이상자를 뽕, 소리 나게 열어 국화 꽃잎들을 우수수 꺼내어 우렸다. 자그맣게 말라붙었던 꽃잎들은, 작고 투명한 유리 주전자 안에서 하나둘 환하게 피어났다.

 

“제일 친하던 친구가 자살하고 저도 우울증이 심하게 왔어요. 그래서 약 먹고 자살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정신과에 입원했어요. 그런데 5월에, 의과대학생들이 실습을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실습 나온 학부생은 영은에게 호감을 표했다. 비교적 증세가 가벼워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하얗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또래 환자에게. 외롭고 마음이 지쳐있던 영은 역시, 멀끔한 의대생이 나쁘지 않았다. 실습생이어도 치료진이 환자와 만나면 안 된다든가, 그런 건 알지 못했다.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그는 영은이 산책을 가는 길에 따라 나왔다. 손을 슬며시 잡은 것까지는 좋았다. 뺨을 만지면서 입을 맞춘 건, 많이 당혹스러웠다. 다 떠나서, 너무 빠르지 않나. 영은은 주치의에게 그 사실을 말했고, 일이 커지자 실습생은 영은에게 색정 망상이 있는 것 같다고 증언했다. 영은이 ‘성별이 남자인 친구의 죽음에 과하게 반응해 자살 시도까지 한 것’은 그 증거로 채택됐다. 실습생의 실책은 다만 환자의 산책길에 동행한 과도한 열정뿐이었다. 영은은 심리학도였다. 치료진들의 다정한 질문 뒤에 숨은 의도와 시선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퇴원을 했고, 분노 뒤엔 큰 슬픔이 밀려왔다. 그 후로 다시는 국화차를 먹지 못했다. 투신했고,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4112호를 찾아간 것은 다음날이었다. 세 번이나 카페를 오가며 일을 했으니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이 4112호에게 차를 건네는 일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을, 수진은 알고 있었다. 암 투병을 하다 가족 없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람... 선아와 진경과 영은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수진은, 방화는 중범죄라는 사실을 되뇌어야 했다.

 

“그리고 병원에 불을 지르면... 환자들은 어떡해! 미쳤어! 그런 생각 하지 마!” 화장실에서 수진은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저요? 차를 마셔본 적이 별로 없는데...”

 

가슴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린 4112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고개를 숙였다. 수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귀신에게 좋아하는 차 이름을 쥐어짜게 시켜야 하는 운명이라니.

 

“음, 저... 보리차를 제일 많이 마신 것 같아요.”

 

“보리차요!”

 

그 순간 수진은 보리차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내려 카페로 갔다. 주전자 안에 와르르 쏟아 부어진 볶은 보리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차로 끓어올랐다. 보리차를 마신 4112호의 눈에서 똑, 똑 눈물이 떨어졌다. 수진은 미리 준비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줬다.

 

“제가요, 항암 치료하러 일주일 입원했던 게 마지막이거든요. 그때, 항암제가 무리가 돼서 하루 쉬고 영양주사를 맞기로 했어요. 암 환자들은 비타민 섞은 주사를 원래 많이 맞거든요. 근데 어떤 미친 새끼가 혈당 내리는 약을 처방했다는 거 있죠? 더 미친 건 그게 그냥 저한테 왔다는 거예요!”

 

당뇨가 없던 다경의 정맥에 주사된 혈당강하제는 다경을 순식간에 저혈당 쇼크 상태에 빠뜨렸다. 다경은, 그렇게 암과 싸우다 잘못 처방된 약 때문에 뇌가 손상돼 사망했다. 병원 측과 연락이 닿은 가장 가까운 친척은 의료사고 관련 법정 싸움이 노력 대비 소득이 적다는 이야기들을 주워들은 후, 적은 보상금을 챙기고 다경을 화장했다. 다경은 오롯이 조모의 손에 컸다. 어린 다경이 탈이 나거나 감기에 걸리면, 할머니는 보리차를 끓였다. 다경이 여러 번 마셔보고 이름을 기억하는 유일한 차였다. 다경은 병에 걸리기 전까지, 공장에서 핸드폰 부품 조립 라인을 잡았다. 그 전에는, 떡볶이보다 떡꼬치를 좋아하고, 키워보진 못했지만 강아지를 유독 귀여워하는 학생이었다. 수진과 다경은, 강아지들의 발바닥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꼭 보리차 냄새 같기도 했다. 강아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사람의 웃음과 같은 의미일지도 토론했다. 수진은 마지막으로 다경을 꼭 안아주었다. 돌아서는 수진에게, 다경은 병원 지하에 있는 의료기구 상점에 가 허리보호대를 꼭 알아보라고 말했다. 내내 앉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일하는 수진의 허리를 걱정하던 다경의 그 말을 들으며, 수진은 주머니를 뒤졌다. 라이터가 손에 잡혔다. 씨발... 불 지르는 것보다는 담배 피는 게 낫겠지. 퇴근 후 병원을 벗어나면 꼭 담배를 피리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걸레로 복도에 긴 흔적을 남겼다. 세면대를 벅벅 닦고, 전공의들이 코를 푼 휴지통을 비웠다. 그날 퇴근 길엔 머리를 풀고 뇌새적인 눈빛으로 거울을 보지 않았다. 대신 씩씩거리며 카페로 갔다.

 

“또, 어떤 분 얘기를 들었어요? 그분은 무슨 차 좋아한대요?”

 

“아뇨. 이제 저한테 말 거는 목소리들 다 찾아가서 좋아한다는 차 몽땅 드렸어요.”

 

“엥,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누가 차 맛없다고 던지기라도 했어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 좋아한다는 차들 마시게 해주고, 이름이랑 이야기 들어주고, 그러긴 했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어요. 다들 개 같은 일을 겪었는데 이렇게 어영부영 위로해주면 뭐, 성불이라도 하려나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바리스타는 갑자기 그라인더에 와르르 원두를 부었다.

 

“커피 한 잔 하셔야겠네.”

 

“커피요? 저 커피 못 마셔요. 아... 주문 해야 되면, 다른 거 시킬게요.”

 

“드세요. 이거, 드셔야돼요. 카페인은 없지만, 그래도 커피는 커피니까요.”

 

말을 잃은 수진 앞에서 그는 원두를 꾹꾹 눌러 스탬핑하고 있었다. 별수 없이 커피를 마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똑, 똑. 여과지에 걸러진 원두가 잔에 담긴다. 거기 맑은 물을 부어 완성된 커피가, 바리스타의 손을 떠나 수진에게 전해진다. 사람들은 커피를 왜 마시더라. 카페인이 받지 않아 커피를 마시지 않은 지 오래된 수진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대며 커피를 천천히 머금었다, 목으로 넘겼다. 은은한 산미와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찼다.

 

 

 

쌉쌀하고도 향긋한 커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넘겼을 때, 수진은 일을 하느라 늘어진 몸에 피가 새로 도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긴 잠에서 깨어 집을 나설 때처럼.

 

“어때요?”

 

그녀가 씩 웃으며 묻는다.

 

“뭔가... 힘이 나네요. 모든 게 또릿또릿 해졌어요. 당장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진은 계속 만지작거리던 라이터를 들고 번쩍 일어섰다.

 

“안 돼요...!”

 

카페 직원은 수진의 어깨를 눌러 다시 의자에 앉혔다.

 

“이래서 사람들이 출근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들고 다니나 봐요. 패션 아이템이 아니었구만.”

 

“꼭, 잠에서 깨어난 것 같지 않아요?”

 

“어! 네, 네! 딱 그거예요.”

 

“산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죠.”

 

그가 한 손으로 자기 뺨을 구겨 못생기게 만들곤, 빈 커피잔을 다른 손 검지로 죽 훑어내리며 말했다.

 

“수진씨, 그 얘기 알아요? 동양 사람들은, 차를 마셨대요. 그래서 느긋하고 평화롭고 마음과 생각이 깊었대요. 그런데 바다 건너 사람들은, 커피를 마셨대요. 빠르고, 잠들지 않고, 경쟁적이고. 싸울 때는 누가 더 좋았게요?”

 

“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요?”

 

무심결에 대답해놓고 수진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디가 이상한 거지?

 

“헤헤. 맞아요. 늘어져라 쉬고 싶을 때는 차를 때리고, 이제 좀 깨어나서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는 아메리카노 때리는 거죠.”

 

그렇구나... 쉬고 싶을 때는 차를 때리고... 잠깐, 그런데 저 사람 아까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저, 근데 혹시 아까 제 이름 부르지 않으셨어요?”

 

“네? 제가 언제 수진씨 이름을 불렀어요?”

 

“어머머!”

 

수진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아, 라이터부터 좀 주머니에 넣으세요! 무서워죽겠네!”

 

“제 이름, 어떻게 아셨어요?”

 

그가 커피잔을 훑던 손가락을 쭉, 뻗어 수진의 가슴을 가리킨다.

 

“어, 어딜 가리키시는 거예요?”

 

“거기 써있잖아요.”

 

수진은 당황한 눈으로 가슴을 내려다봤다. 정, 수, 진. 이름 세 글자가 은빛 색실로 카디건에 수놓아져 있었다.

 

“꺄아악!”

 

“뭘 그렇게 놀라요?”

 

“아...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럴 일은 아니네요. 그런데 이런 게 왜...”

 

“병원 직원들은, 원래 다 이름표 달고 다니고 그러지 않아요?”

 

“저는 병원 직원이 아닌데요?”

 

“병원에서 청소하잖아요!”

 

듣고 보니 그렇기도 했다. 아무튼,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귀신이랑 얘기하는 게 제일 이상하긴 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세요?”

 

수진은 그 질문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환자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아 큰 병의 치료 시기를 놓치게 하고도 환자를 비난한 교수, 잘못된 처치로 감염을 일으켜놓고 환자의 호소를 묵살한 간호사와 전공의들, 예비 의료인으로서의 윤리를 저버린 데다 추행까지 하고 환자를 모함한 의대생, 그리고 마찬가지로 의료사고를 낸 전공의... 이들의 공통점은,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환자를 탓했다는 점이다. 병원에 불을 지르는 대신, 이들이 책임을 지게 해야 했다. 수진은, 병원이란 거대한 하나의 조직임을 상기했다. 병원의 모든 노동자는 서로 얽히고 얽혀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는다. 누구는, 썩은 물을 보고도 조직에 충성한다. 누구는 어설프게 걸쳐 있다. 누구는 버티지 못하고 떠난다. 수진은, 손가락으로 가슴에 수 놓인 제 이름 세 글자를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바리스타를 향해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저, 청소 노동자 정수진.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는 수진을 향해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수진씨, 화이팅!”

 

며칠 후, 수진은 퇴근을 하지 않았다. 병원이란 숨어있기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이리저리 몸을 옮겨가며 모두가 퇴근하고 밤이 되어 출입문에 셔터가 내려질 때까지 병원에 머문 수진은, 청소 용구 칸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보안의 눈을 피해 원무팀으로 향했다. 카페 직원이 비장하게 건네준, 고운 한지 포장 찻잎 세트를 최고참 김여사님께 선물했다. 그의 정보력과, 며칠 간 과외 어플을 통해 접촉한 해커로부터 전수 받은 능력의 도움으로 원무팀에 무사히 진입했고, 이제부터 할 일도 두렵지 않았다. 불법 아니냐고? 이건 싸움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수진은 손가락을 한 번 우두둑, 꺾고는 전산망을 뚫어 쓸만한 입원 기록지, 간호 기록지, 진료 기록, 사망진단서를 모조리 긁어모았다.

 

 

 

병원 운영과 관련된 기록들을 찾고, 오랜 시간 병원 구석구석을 청소했으며 귀가 밝은 김 여사님과 차 선물 이후 부쩍 친해지면서 수진은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비상구에서 율무차를 나눠 마시며 김 여사는, 병원에 의료사고가 일어났을 때 환자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 간호사와 전공의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무리한 업무 스케쥴을 배당받고, 작은 실수에 가혹한 처벌을 받았으며, 교묘한 괴롭힘에 시달렸다. 혹은 그런 것 없이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병원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데 수진씨, 조용한 것 같더니 병원 일에 관심이 많네?”

 

“...”

 

“내가 살아봤더니, 아픈 게 죄야, 죄. 남편 쓰러지고, 병원이랑 여기저기 일 다니면서 보니까 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어도 그저 깩 하고 비명도 못 내겠더라. 누가 들어주겠어. 근데 돼먹지 못한 놈들은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김 여사는 종이컵을 구겨 카트에 던져넣었다.

 

“에이, 더럽다 더러워.”

 

그리고는 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버리게.

 

“아, 제가...”

 

여사는 말없이 수진이 입을 댄 종이컵을 가져가 카트 안에 묻었다. 티 타임은 그렇게 끝났다. 수진은 반나절 동안 병원의 온갖 오물을 처리했다. 그리고 각 층에 머물 때마다 선아, 진경, 영은, 다경에게 자료들을 보여주며 그들과 함께 사건의 퍼즐을 맞추어나갔다.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은 여전히 병원에 남아있었고, 그 후로도 부주의와 오만으로 다른 환자들에게 거듭 아픔을 안겨주었다. 수진은 퇴근길에 두툼한 자료가 담긴 쇼핑백을 들며, 꽤 무겁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언론사에 보낼 글을 타이핑 하는데,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가락과 어울리지 않게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한 채로 멈춰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 일 때문에 내가 이렇게 승산 없고 위험한 싸움을 해야 하나. 대학병원이 얼마나 큰 목소리를 가졌는데. 천장을 향해 한숨을 쉬다, 잠시 책상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수진은, 죽음이 무서웠다. 무섭다 못해 미웠다. 대학병원보다 더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번 울기 시작하니 흐느낌이 계속 터져 나왔다. 수진은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일찍 수진 곁을 떠나간 이들이 떠올랐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무슨 말을 하며 떠돌고 있을까. 그 말은 누가 들어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흐를 만큼 흐른 눈물이 멈추었다. 수진은 벌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십 년 전 떠난 친구가 있었다.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친구의 부모는 장례식에 딸의 학우들이 오지 않기를 원했다. 반에는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모가 어린 자식 죽음을 숨기는 건, 그래서라고. 수진은, 그때 울지 못한 울음을 이제야 운 기분이었다. 슬픔이 빠져나간 눈은 모니터를 노려봤다. 수진은 익명으로 여러 언론사에 S대 병원의 뿌리 깊은 폐단과 그들이 묻은 중대한 의료사고에 대해 제보했다. 방대한 양이었다. S대 의과대학에서 실습을 나와 문제를 일으킨 이가 누군지도 파악해, 그 이야기도 첨부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부고발로 인해 불이익을 본 이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많은 고통을 받고 밀려난 그들이 혹시라도 자신 대신 익명의 제보자로 의심받아 다시 피해를 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자료의 양이 워낙 많고 일관되어서일까. 사안은 뉴스에서 수진의 생각보다 큰 자리를 차지했다. 일종의 스캔들처럼 기획보도가 연달아 나갔고, 병원의 비리부터 많은 영역에 조사가 들어갔다. 선아, 진경, 영은, 다경이 언급한 이름들은 윤리위원회에 회부 되거나 조사 끝에 징계를 받았다. 누구도 일자리를 잃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책임은 져야 했다. 화를 내며 선아를 돌려보낸 고교수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병이 났다. 식사를 걸러도 끝없이 탈이 났고, 환자를 보기도 연구를 하기도 힘들어 휴직을 해야 했다. 진경을 부주의하게 처치한 간호사는 사건이 주목 받으며 애인과 헤어졌고, 친구들의 비난을 받았다. 자신의 잘못을 몰랐기에, 그저 한없이 수치스러웠다. 몸까지 아플 정도로. 영은을 추행한 의대생은 타 병원에서 수련 중이었다. 그는 그 병원에서도 젊은 여 환자에게 비슷한 일을 행하던 중이었는데, 뉴스를 본 환자는 주치의의 언행이 더는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정신 나간 의사의 추근댐일 뿐. 그녀의 폭로로 그 남자는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었고, 부풀려진 소문이 돌았다. 다경에게 잘못된 오더를 한 전공의는 전임의 생활을 하던 중 다경과의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용케도 뒤늦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조사를 받아야 했고, 조사가 끝나도 매일밤 꿈에서 쇼크에 빠져 몸을 뒤트는 다경을 만났다. 사건을 덮은 병원 관계자는 병원 운영 관련 비리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진은 모든 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병원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기꺼이 증인이 되었다. 병원 안에서 밀려난 이들은 윤리위원회에서 자신을 밀어낸 이들을 처분했다. 명예는 느리고 불완전하게나마 회복되어갔다. 그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수진은 카페를 찾았다.

 

“수진씨이!”

 

직원은 노래하듯 수진을 반겨주었다.

 

“저, 뉴스 다 봤어요! 수진씨 완전 완전 멋져요!”

 

수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다 된 걸까요?”

 

“뭐가요?”

 

“...그러게요. 뭐가 다 되길 기다린 거지.”

 

수진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나름 책임을 지도록 만들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아파요. 그 분들은... 죽었잖아요?”

 

“죽었죠.”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잖아요? 그랬는데 그렇게 만든 사람들은 아직도 의사를 하고, 간호사를 하고, 억울하다고 술을 마시고 남은 친구들을 만나요. 가족 품에도 안길 거고요.”

 

“죽으면 못 그러는데, 그쵸?”

 

수진이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툭 던지는 그녀의 맑은 목소리에서, 이상하게도 무신경 대신 사려 깊음을 느꼈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친구라 하기도 애매한 사이지만, 지금까지 수진이 바라본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수진씨. 아주 깊은 슬픔이 생겨나면요, 절대 완전히는 사라지지 않아요. 그냥 슬픔은 슬픔대로 두고 죽은 이는 죽음으로, 산 사람은 삶으로 서로 위로하다 각자 갈 길 가는 거죠.”

 

수진은 말없이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철학적이네요.”

 

“저, 실은 되게 철학적인 사람이에요.”

 

그도 웃었다. 해맑은 입매 위로 왠지 슬픈 눈빛이 비쳤다. 수진은 문득, 그가 자신에게 좋아하는 차는 무엇인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 물으면서도 왜 젊은 나이에 청소 일을 하는지, 가족은 있는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저기요. 그런데 저 말이에요... 아직 젊은데 왜 청소 일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글쎄요. 청소 일을 하시게 됐으니까 하겠죠? 말하고 싶으세요?”

 

“중학교 때, 반 친구가 죽었어요.”

 

수진은 엉뚱한 답을 했다.

 

“아주 친하진 않고, 그냥 적당히 친한 친구였어요. 어느 날 결석을 했더라고요. 문자를 보냈어요. 어디 아프냐고. 답이 없었어요. 다음날도 오지 않았어요. 아무도 소식을 몰랐어요.”

 

수진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삼 일이 지나고 나서야, 종례 시간에 담임이 말했어요. 은주가 죽었다고요. 그래서요...”

 

수진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직원이 수진의 등을 말없이 쓸어주었다.

 

“장례식엘 못 갔어요. 애들 말로는 자살... 했을 거라고 했어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몰라요. 아직까지도... 저는... 아직도요... 은주를...”

 

수진이 울 만큼 울 때까지, 그는 수진의 손을 토닥이고 등을 만져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꺽꺽대던 수진의 울음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그가 물었다.

 

“수진씨, 나... 음료 하나 만들어줄래요?”

 

수진은 멍한 눈으로, 직원이 내민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군말 없이 음료 제조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서 딸기 향이 났다. 고개를 돌리니, 소담한 바구니에 빨간 딸기가 한가득 담긴 것이 보였다. 그 옆에는 바나나가 한 송이 있었다. 수진은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딸기와 바나나를 함께 갈아먹으면 맛있다는 걸 알려주던 앳된 목소리가 떠올랐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물었다.

 

“딸기가 있네요. 딸기 바나나 주스 해드릴까요...?”

 

“좋아요! 사실은, 저도 그거 좋아해요. 저는 잘 못 만들어도 수진씨는 왠지 맛있게 만들어줄 것 같아요.”

 

헤헤, 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수진은 믹서기 뚜껑을 열었다. 딸기와 바나나를 넣기 전 손질하려고 보니, 어느새 바나나는 껍질이 벗겨져 곱게 잘려있고, 딸기도 자그맣게 손질되어 있었다. 카페 일을 오래 했나 보네. 손도 빠르셔라. 얼음과 함께 과일들을 믹서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위잉,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 찼다. 그 시간 동안 수진은 말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애들은, 자꾸 귀신을 본다는 거예요.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어요. 은주가, 은주가 왜 귀신이 돼?! 고등학교 가서, 은주를 모르는 애들이 그런 말을 해도 미웠어요. 그냥, 죽을 만큼 미웠어요.”

 

기계 소음 틈에서 수진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작게 들렸다. 수진의 마음은 곱게 갈려 믹서 안에 가라앉을 딸기 씨앗만큼 낮게 내려앉았다. 수진은, 병원에서 듣던 아주 무거운 저음을 언제부터 길게 견딜 수 있었나 생각해보았다.

 

 

 

딸기에 바나나가 섞여 조금은 어두워진 분홍빛 액체를, 수진이 컵에 따른다.

 

“다 됐어요.”

 

눈앞의 직원처럼 통통 튀듯 말해보고 싶었는데, 역시 수진에겐 무리였다. 서비스직을 오래 했어도 어쩔 수 없구나, 수진은 생각했다.

 

“우와, 고마워요! 완전 맛있겠다! 저... 근데, 여기 찻잎 좀 얹어줄래요?”

 

“찻잎이요? 여기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선반을 쳐다보았다. 로즈힙도, 레몬그라스도, 캐모마일도, 진피도 볶은 녹찻잎도 없었다. 대신 오랫동안 카페 일을 하며 보지 못한 잎사귀 뭉치가, 아까 놓친 작은 바구니에 담겨있었다. 동글게 말린 잎사귀에서 처음 보는 빛이 났다.

 

“이...거요?”

 

그가 또 끄덕이기에, 수진은 그것을 집어 유리잔 위 뭉클한 분홍빛 주스에 살포시 얹었다. 손가락에 은은한 유자 향이 뱄다.

 

“고마워요...”

 

그는 유리잔을 꼭 쥐고, 고개를 가까이 숙였다. 수진은, 은은하던 유자 향이 공간에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잠시 향을 맡던 직원은, 잔을 들어 한 모금, 한 모금, 차를 마시듯 그것을 마셨다. 잔이 비었다. 그가 수진을 바라보았다. 젖은 눈이었다.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은, 어느새 뺨을 타고 툭, 흘렀다.

 

“정수진...”

 

목소리가, 수진의 머리와 가슴을 때렸다.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수진은 그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수진의 기억은, 더듬더듬 그 얼굴에 안경을 씌웠다. 통통한 젖살도 흐릿하게 붙였다.

 

“너... 이름, 뭐야?”

 

새 학기를 맞은 중학생처럼 묻는다.

 

“수진아, 너... 내 목소리, 알잖아.”

 

은주가, 앳된 목소리로 흐느끼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변하긴 했지만, 은주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수진은 어떤 몸짓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 너 보고 싶었어. 얘기하고, 만지고 싶었어. 너는...”

 

은주가 말끝을 흐렸다. 울음 때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울던 수진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네모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려놓았다. 하얀 종이였다. 수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반들반들한 그 종이가, 무엇의 뒷면인지 알 것만 같았다. 수진은 망설였다. 망설이다, 은주를 보았다. 은주는 울면서 계속 수진을 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뒤집었다. 학생 넷이 찍은 스티커사진이었다. 졸업사진을 찍지 못한 은주, 그리고 수진이 함께 담긴 단 한 장의 사진. 십 년이 흐르도록 버리지도,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서랍 깊숙이 넣어둔 물건이었다. 수진의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코팅된 사진 위에 고였다. 수진은, 은주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온몸을 떨며 우는 둘의 소리는 그 작은 공간 밖으로 결코 나가지 않았다. 오직 둘만이 서로의 소리를 들었다. 유자차와 딸기 바나나 주스가 합쳐진 듯한 향기가, 이상하리만큼 진하게 풍겨왔다. 수진이 은주를 바라본다. 은주도 수진을 바라본다. 눈물이 잦아든 눈으로.

 

“은주야, 나, 너... 많이, 많이 그리웠어.”

 

은주가 슬프게 웃었다.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만났잖아.”

 

 

 

은주를 잊었고, 그리워한 수진이 은주의 손을 쓰다듬었다. 은주가 싱긋, 웃더니 수진과 손깍지를 꼈다.

 

“에이, 근데 청소만 하기엔, 너무 예쁘다.”

 

마주 잡은 손을 번쩍 들며 은주가 말했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너는, 손가락이 길어서 좋겠다. 나중에 손 모델 해서 부자 되면 나 모른 척하지 마. 장난스러운 열네 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기억나? 우리, 특별구역 청소 같이한 거?”

 

잠시 생각하던 수진이 웃으며 천천히 끄덕였다. 저 멀리, 앳된 얼굴의 소녀 둘이 한 명은 대걸레를, 한 명은 빗자루를 들고 행정실을 청소하러 간다. 은주는 대걸레를 빨러 화장실에 가는 수진을 따라와 기다려줬다.

 

-아, 이렇게 청소만 하고 있기엔 청춘이 아깝다.

 

어린 은주는 입을 삐죽, 내밀고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수진은 너무도 오래 잊었고 그리워한 은주의 얼굴에서 마냥 눈을 떼지 못했다.

 

“야, 근데 너 나랑 적당히 친했어? 진짜 실망이다, 습자지 우정!”

 

은주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괜히 엄청 친하다고 했다가 네가 싫어하면 어떡해. ...나는, 맨날 그게 겁났어.”

 

그게 겁나서,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고 단짝도 아닌 수진은 감히 오래 울지 못했다.

 

“하긴 그러네, 물어볼 수도 없잖아? 죽었으니까.”

 

은주가 까르르, 웃으며 수진에게 몸을 기울였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수진은 갑자기 다시 눈물이 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은주가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바보야. 나는 더 좋아했는데.”

 

수진과 은주는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은주야.”

 

“응.”

 

“나, 이제 어떡해?”

 

“뭐를?”

 

“너... 가면 어떡해?”

 

은주가 수진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뭐야, 다시 만나면 되잖아!”

 

수진은 은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잊어도 잊지 못한 그 질문을 품고 사는 동안, 몸에는 병이 생겼다. 점점 짧은 일자리를 찾던 수진은 마지막으로 청소 일을 택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래서 은주를 만나 지금 여기에 마주 앉아있다. 병원에서 만난 낮은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가슴과 배와 머리 윗부분이 뻥 뚫렸던. 은주의 가슴은 꽉 차 있었다. 배도 그랬다. 옷을... 입어서인가? 그때, 은주가 입은 목폴라에 눈이 갔다. 어쩐지 유독 하늘거리는 것 같았다. 수진은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순간 은주와 눈이 마주쳤다. 은주는, 수진의 시선이 머문 목폴라를 매만져 가만히 끌어올렸다. 수진은, 하려던 말 대신 말했다.

 

“근데, 더 예뻐졌네. 정말, 어른... 같아.”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너, 딸기 되게 좋아했었는데.”

 

“응. 바나나도 좋아했어.”

 

헤헤 웃는 은주 뒤로, 노을 지던 하늘이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은주야. ...미안해.”

 

은주는 말없이 수진의 팔을 쓰다듬어주었다.

 

“너, 또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해?”

 

은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고 싶으면, 나중에 또 만나면 되지!”

 

수진은 문득, 뒤를 돌아 카페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늦은 퇴근을 하는 이들 몇이 이쪽을 바라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병원을 향해 오고 있을 것이다. 수진은 오늘 병원을 떠나, 내일 다시 출근한다. 그런데, 이 카페가 언제부터 있었더라. 마른 눈물이 남은 얼굴로, 수진과 은주는 손을 흔들었다.

 

“안녕, 또 봐!”

 

길고 경쾌한 작별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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