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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연 밤의 끝

2022.05.01 00:0005.01

밤의 끝

해도연

 


별빛 사이로 시아의 날개가 뻗어나갔다. 날개는 바람을 붙잡으며 날아올랐고 시아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날개 조종간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바람은 너무 강했고 오른쪽 날개가 먼저 부서졌다. 시아의 몸은 빠르게 회전했다. 피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시아의 의식이 옅어졌다. 시아가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언덕 너머로 솟아오르는 별들이었다. 유독 밝은 별 하나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시아는 의식을 완전히 잃었고 왼쪽 날개가 부서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세찬 바람이 시아의 몸을 다시 들어 올렸으나 그때마다 바닥과 연결된 생명줄이 간신히 시아를 붙잡았다.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시아의 몸은 생명줄 길이만큼의 호를 그리며 두 시간이 넘도록 그곳을 맴돌았다.


“유시아 씨, 당신을 구조한다고 일손이 얼마나 낭비되었는지 알아요?”

교사가 질책했지만 시아는 침대에 누워 날개 구조를 개선할 방법에 대한 고민을 굴릴 뿐이었다.

“알아요. 바깥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욕망은 우리, 특히 당신의 본능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거. 그래서 유혹을 견디기도 힘들다는 거. 하지만 우리가 신께서 주신 낙원을 벗어나려고 하다가 낙원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잘 알잖아요? 우리는 스스로 지구의 절반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고 태양을 잃었어요. 이게 우리의 마지막 기회에요. 그동안 고난을 견디며 속죄한다면 신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태양을 돌려주실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영원히 텅 빈 우주를 떠돌며 살아야 하겠죠.”

개선 방법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자 시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아는 교사를 슬쩍 밀어내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 몸 여기저기에 아직 통증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아는 교사를 바라보지도 않고 책상 서랍을 뒤지며 말했다. “내 설계도 가져갔나요?”

“시아 씨는 우리 도시의 재산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고 예배당 천장에 구멍을 뚫어서 주민들을 위험에 빠뜨렸어요. 제가 당신을 열심히 변호했으니 그나마 설계도 압수에서 끝난 겁니다. 장로들은 당신을 지열발전소로 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요. 거기가 얼마나 힘든 곳인지 아나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 곳인지 아냐고요.”

시아는 그제야 교사를 향해 돌아섰다. 교사는 시아의 할머니가 지열발전소에서 일했었다는 것을 떠올린 듯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시아 씨, 지금 우리 도시는 중요한 단계에 있어요. 소비가 늘어난 만큼 정체되었던 인구를 늘려 생산을 키우고 도시도 확장할 때가 되었죠. 많은 일이 필요해요. 시아 씨가 여기에 협조해준다면, 장로회가 시아 씨에게 더 좋은 거주구를 줄 수 있다고 했어요. 설계도는 장로회에 제출하겠습니다. 당신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니까요.”

거짓말. 시아는 교사가 그저 눈에 보이는 실적을 원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장로회도 시아가 유능한 기술자라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설계도는 이미 시아의 기억 속에 있기 때문에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사를 내보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그저 다시 그리는 게 귀찮을 뿐이었다.

교사가 나가려고 문을 열자 고양이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양이는 교사에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시아에게 다가갔다. 시아는 몸을 숙였고 고양이 코니는 능숙하게 시아의 몸을 타고 올랐다. 시아가 팔로 감싸자 코니는 발목 아래가 절단되고 없는 왼쪽 앞발로 시아의 턱을 가볍게 툭툭 치며 놀았다.

“생산성 없는 동물은 키워선 안 돼요.” 교사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시아는 코니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괜찮아. 저런 녀석보다 네가 훨씬 생산성 높으니까 걱정하지 마.”시아는 코니를 점쟁이 집에서 구출했을 때를 떠올리며 코니의 목을 어루만졌다.

코니가 잠들자 시아는 코니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벽에 도시 전체의 단면도를 펼쳐 붙였다. 도시는 거대한 분화구 바닥에 만들어졌다. 평평하고 두꺼운 천장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모습은 화산 분화구에 고인 호수와 비슷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시아는 화산을 본 적이 없었지만 할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시아의 증조할머니는 첫 번째 항성간 우주선의 수석 엔지니어였고 그전에는 커다란 화산섬에 살았다고 했다. 언젠가는 직접 보고 싶었다. 분화구 아래에는 지열발전소가 있었다. 그 위로 지상층이 켜켜이 쌓여있고 10층까지는 지열발전소 근로자들의 가족이 사는 곳이었다. 시아는 지상 7층에서 태어났다.

시아는 지열발전소 조금 위에 있는 작은 공간을 바라봤다. 도서관이었다. 그곳에는 자료 폐기령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지난 문명의 기술서들이 숨겨져 있었다. 시아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책의 이름은 알아도 내용은 모르는 장로들에게 옛 기술을 조금씩 팔아온 덕분에 시아는 지상 97층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시아는 빨간 펜으로 도시 천장 한 곳에 X표시를 하고 주변에 바람의 방향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잠시 뒤로 물러나 설계도 전체를 다시 살폈다. 여기저기에 X표시와 메모들이 가득했다. 언덕 너머로 떠오르던 밝은 별을 떠올렸다. 시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떨어지면서 봤던 언덕의 모양을 토대로 방향을 짐작하고 X표시와 별이 보이던 언덕 조금 위의 지점을 연결했다. 그 끝에 별을 그렸다. 그 별이 맞을까? 확실하지는 않았다. 천장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는 도시에선 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시아는 전화기를 들고 선을 연결했다. 대화는 길지 않았고 노크 소리는 한 시간 뒤에 울렸다.


“맞아. 이카로스의 별이야.” 시아의 방을 찾아온 한나가 설계도 위에 표시된 별의 위치를 보며 말했다. “엄밀히는 별이 아니라고 하지만.” 한나는 주기적으로 최상위층에 있는 관측실에 올라가 별을 보는 것이 허락된 성직자였다.

“저 별에 대해 아는 걸 얘기해 줘.” 찻잔에 캐모마일 차를 따르며 시아가 말했다. 진짜 식물로 만든 차는 귀한 물건이었지만 시아는 이제 아끼지 않았다.

시아가 잔을 건네자 한나는 살짝 눈웃음으로 답하며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리고 깊게 향을 맡았다. 마치 거기에 시아의 마음이 담겨있기라도 한 것처럼. 차에 입술을 살짝 적신 한나는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시아를 바라보며 침대 위에 앉았다.

“저건 항성간 우주선의 비콘이야. 탐험가들이 경유지마다 뿌리려고 했던 물건이지.”

시아는 잔을 들고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난 그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모르겠어.”

한나는 그런 시아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깨어난 코니가 침대 위에서 한나의 무릎을 가로지르며 시아에게 다가갔다. 시아는 코니를 품에 안았다.

“이미 아는 얘기겠지만,” 한나는 허리를 세우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인류는 항성간 우주선을 만들었어. 중력 엔진으로 우리은하의 중력장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빛보다 빠르게 갈 수 있었지. 이걸 태양계 내부에서만 실험하다가 드디어 태양계 바깥으로 가기로 했고 목적지는 트라피스트-1으로 결정되었어.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그날, 사고가 일어났고 우주선은 지구로 추락했어. 중력 엔진은 폭주하면서 주변 공간을 찢어버렸고 지구를 태양계 바깥으로 던져버렸다지. 중력 엔진이 폭발하는 순간, 지구의 절반은 지각이 녹아내릴 만큼 불타올랐어.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은 중력 엔진에서 쏟아진 뜨거운 유해 물질로 뒤덮여 있을 거야. 우리가 있는 지구 반대편은 그 충격파로 지형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고.”

코니가 시아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한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한 번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지구에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어. 항성간 우주선의 승무원 일부만이 살아남아 지상으로 내려왔고. 인류는 다시 한번 심판을 받은 거야. 생존자들은 지구 반대편의 지옥을 뒤로하고 얼어붙은 땅을 가로질러 이동했고 그나마 살만한 곳을 찾아 헤맸어. 따뜻한 공기를 품은 거대한 분화구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살 곳을 만들고 속죄를 시작했어. 지구는 신이 우리에게 안겨준 두 번째 낙원이었는데 우리는 거길 떠나려고 했기에 이렇게 된 거라면서. 그리고 여기까지 온 거지.”

시아도 아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시아는 믿었다.

“지금까지 열세 번 바깥으로 나갔는데 저 별이 있을 때마다 바람이 약했어. 특히 머리 위에 있을 땐 더욱. 비행하기에 딱 좋은 정도의 바람이라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글쎄. 이카로스의 별은 18일에 한 번씩 제자리로 돌아와. 그리고 가끔 별자리와 비교해보면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갈 때도 있어. 그래서 인공물이라고 추정되었고 사고 때 남겨진 비콘이라고 알려진 거지. 탐험가들의 위치와 상태를 알려줘야 할 비콘이 결국은 지구도 벗어나지 못하고 인류의 마지막 도시를 묵묵히 기록하고만 있어. 그 이상은 아무도 몰라. 바람의 주기와 비콘의 주기가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수도 있지.”

한나의 시선을 잠시 따라가던 시아는 코니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벽에 붙은 설계도를 향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려 넣은 이카로스의 별을 바라봤다. 한나는 코니가 다가오자 코니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품었다. 코니는 아직 졸린 듯 한나의 품 안에서 자세를 고쳐잡으며 눈을 감았다. 한나는 조용히 코니를 쓰다듬었다. 시아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나는 시아의 생각을 이미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다시 나갈 거야?”

시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한나는 계속 코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관측실에서 매일 사라진 태양과 영원한 밤, 아무것도 없는 우주공간을 떠돌고 있는 지구를 목격해. 우리는 해와 달과 별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항상 돌아오던 시절을 기억하며 하루라는 시간을 이야기하지만, 이젠 태양과 달은 영원히 우리를 떠났고 별들은 6일에 한 번씩 돌아와. 하지만 그것마저도 관측실의 투명한 천장이 들려주는 한낱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르지.”

코니가 기분이 좋다는 듯 골골거렸다.


관측실은 초라했다. 시아는 관측실 입구에 커다란 큰 가방을 내려놓으며 주변을 살폈다. 붙박이 책상 두 개와 방 가운데에 외롭게 놓인 의자가 전부였다. 코니는 의자를 보자마자 잽싸게 올라가 몸을 말고 누워버렸다. 비스듬한 유리 천장에는 커튼이 내려와 있었다. 시아는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나의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천장을 개방하는 핸들은 한나가 알려준 대로 입구 옆에 있었다. 시아는 구경을 멈추고 가방을 열었다. 금속 뼈대가 복잡하게 얽힌 원뿔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아가 자기 키만 한 원뿔 속에 손을 넣고 손잡이를 당기자 숨어있던 날개가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날개가 들어있던 곳은 시아가 올라탈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날개 달린 원뿔을 착용하는 데는 두 시간이 필요했다. 시아는 가방에서 공구가 잔뜩 달린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장갑을 입술에 물고 손바닥의 땀을 비벼 닦으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혼자서 하려고?”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시아는 숨을 뱉는 타이밍을 놓쳐 콜록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한나였다. 한나는 시아가 물고 있던 장갑을 뺏어 손에 끼고는 원뿔 옆에 서서 말했다. “난 뭘 하면 돼?”

시아는 원뿔 속에 올라탔고 한나는 시아의 지시에 따라 손을 분주히 움직였다. 두 시간 걸릴 거라 생각했던 작업은 한나의 도움 덕분에 한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시아는 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문제없었다. 이번엔 한나가 날개 끝에 매달렸다. 조금 힘이 들긴 했지만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한나는 장갑을 벗고 의자 위에서 졸고 있는 코니를 어루만졌다.

“그냥 도와주러 온 거야?”

“아니. 전해 줄 게 있어서.”

한나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오래된 종이 하나를 꺼내 시아에게 건넸다. 시아는 날개가 한나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어서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집었다. 종이를 펼치자 도시 전체를 둘러싼 분화구의 지도가 나타났다.

시아는 코니의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분화구 바깥 왼쪽 아래에 X표시가 있을 거야. 항성간 우주선 승무원들이 타고 온 착륙선이 아직 거기 있을지도 몰라. 너, 사실 구체적인 목적지도 없잖아. 거기 가보는 건 어때?”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여기 사람들 모두가 항성간 우주선 승무원들의 아이들이야. 많은 사람이 과학과 기술을 떠났지만, 과거의 도전과 실패를 기억하고 전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어. 내 어머니의 어머니들도 그랬고.”

한나는 여전히 코니 만을 보고 있었고 시아에겐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나가 코니를 품에 안았다. 코니는 쪽잠에서 깨어난 듯 잠시 발톱을 드러내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자신을 안은 것이 한나라는 걸 깨닫자 곧 얌전해졌다. 한나는 무언가를 닦아내듯 코니의 몸에 얼굴을 한 번 비비고는 시아를 향해 돌아섰다. 한나는 물기가 남은 눈으로 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엔 네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이제 마지막 계단을 오른 것처럼 보여서. 그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코니가 하품을 했다. 한나는 코니를 시아에게 건넸고 시아는 코니를 받았다. 코니는 반가운 냄새에 잠시 흥분했지만 곧 무관심하다는 듯 혼자 발을 휘두르며 놀았다. 덕분에 시아와 한나 모두 가볍게 웃었다. 시아는 코니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들어 한나에게 말했다. “한나. 코니를 돌봐주지 않을래?”

“아니.” 한나는 빠르게 거절했다. “고양이는 항해의 필수 동반자야. 널 지켜줄 거라고. 코니, 시아를 잘 부탁해.”

코니는 뜻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부지런히 세수만 했다. 한나는 시아의 날개를 어루만졌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속과 나무 결집체의 뼈대 사이로 한나의 손가락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흘러갔다. 날개를 스치는 손가락은 한나의 숨결을 따라 흔들렸다.

한나가 손을 거두려고 하기 직전, 커다란 금속 고리 두 개가 나타나 한나의 손목을 낚아챘고 다른 하나는 날개의 뼈대 하나에 연결되었다. 수갑이었다.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에 코니는 깜짝 놀라며 관측실 구석으로 도망갔다. 시아는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날개를 잘못 움직였다가는 한나가 다칠 것 같아 움직이지 못했다.

“당신들의 안일한 헛소리에는 정말 진이 빠져요.”

교사가 날개 뒤에서 나타났다. 한나는 그제야 관측실로 들어오고 나서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시아는 짜증이 섞인 눈으로 교사를 노려봤다.

“이 도시는 신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낙원의 마지막 한 조각입니다. 우리는 태양과 달을 잃고 태양계에서 쫓겨났어요. 낙원 바깥의 세상에 대한 무책임한 장난 때문에 지금 우리는 우주라는 영원한 밤의 광야를 떠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벗어나 신의 분노를 사겠다고요?”

한나가 수갑에서 손을 빼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도무지 빠지지 않았다. 교사는 그걸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관측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지금 날개를 잘못 움직인다면 한나의 손목이 찢어질 겁니다." 교사는 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는 열쇠가 걸려있었고 교사는 조롱하듯 열쇠를 흔들었다. "그리고 시아 씨가 지금 제 손에 있는 열쇠로 한나를 풀어주려면 일단 그 깡통에서 내려야겠죠. 거기서 한 번 내리면 다시 올라타는 데 한두 시간이 걸린다는 건 알아요. 저도 설계도 정도는 읽을 수 있거든요."

시아는 이를 악물었고 한나는 절망한 듯 시아의 날개에 얼굴을 묻었다.

교사는 그 모습을 즐거운 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15분 뒤면 장로회가 직접 보낸 집행관들이 있으면 여기로 올 겁니다. 그들은 저처럼 말로 설득하지 않을 거고. 이런 고철 따위는 발전소 부품으로 보내버리겠죠. 그리고 시아 씨 역시 거기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한나는… 당신은 정말 당신 어머니 덕분에 비참한 꼴을 면할 수 있는 거 알죠?”

한나는 자그맣게, 하지만 들으라는 듯 욕을 뱉었다. 시아는 놀란 표정으로 시아를 바라봤다.

교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열쇠를 흔들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나 역시 난처해지긴 할 겁니다. 자, 어서. 날개에서 내려와 열쇠를 가져가요. 그 열쇠로 한나를 풀어주는 겁니다. 한나는 집행관들이 오기 전에 여길 떠나고요. 그럼 제가 시아 씨 당신을 어떻게든 변호해 드리죠. 집행관들이 제 말은 잘 듣거든요.”

시아는 결국은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한나의 손가락 끝이 시아의 손등에 닿았다. 한나는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고 시아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어서 떠나. 난 괜찮을 거야. 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때 관측실 구석의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코니였다. 코니는 의자 위로 올라가더니 그곳에서 우아하게 뛰어올랐다. 코니는 오른쪽 앞발로 교사의 손끝에서 흔들리던 열쇠를 후려쳤다. 코니의 발톱이 교사의 손가락을 긁었고 열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코니는 떨어진 열쇠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나는 발을 뻗어 열쇠를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더니 힘껏 허리를 숙였다. 수갑에 고정된 손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한나의 엄지손가락이 기묘한 방향으로 비틀어졌다. 살갗이 찢어지며 가느다란 핏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시아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뒤늦게 교사가 한나에게 달려들었다.

한나의 눈에 교사의 목에서 흔들거리는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교사가 옷 속에 숨겨두고 있던 것이었다. 목걸이 끝에는 고양이 발이 걸려있었다. 지열발전소에서 흔히 쓰이는 부적이었다. 한나는 시아를 올려다봤다. 역시 목걸이를 발견한 시아의 눈은 분노로 가득했고 한나는 교사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교사의 배를 걷어찰 힘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한나의 발길질에 교사가 바닥을 구르는 동안 한나는 열쇠를 집어들고 수갑을 풀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코니를 품에 안아 이마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마워, 코니. 널 잊지 못할 거야.”

한나는 코니를 시아에게 건냈다. 시아는 원뿔 구석에서 쿠션으로 가득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코니는 얌전히 자신을 위한 공간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리울 거야.” 한나가 말했다.

“나도.” 시아가 대답했다.

“…돌아오길 기다려도 될까?” 한나가 물었다.

시아는 아무 말 없이 한나의 두 눈 사이에 입을 맞추었다. 천장이 열리자 폭풍 소리가 관측실을 가득 채웠다. 이카로스의 별빛이 시아의 눈동자에 맺혔다. 시아는 날개를 펼치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눈을 뜨기 두려웠다. 어딘가 부러졌을까. 팔다리가 아직 붙어있기는 할까. 입에서는 시큼한 피맛이 났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의 폭풍 소리 덕분에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추락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한나가 알려준 착륙선이 있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이동했지만, 언덕을 넘으려고 할 때 갑자기 들이닥친 상승기류에 균형을 완전히 잃었다. 지난번처럼 부서지기 전에 날개를 작게 접어 추락에 대비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시아는 눈을 뜨지 못한 채 바닥을 더듬어가며 최대한 무거워 보이는 것을 찾아 헤맸다. 이윽고 커다란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아래로 얼굴을 숨겼다.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몸은 최대한 납작하게 숙였다. 그제야 시아는 눈을 다시 뜰 수 있었다. 주변에 남아있는 건 날개의 무거운 부속들뿐이었다. 가벼운 것들은 모두 바람에 날려가고 없었다. 코니의 상자는 모래에 박혀 입구만 빼꼼 솟아나 있었다. 상자 속은 비어있었다.

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바람 소리 사이로 코니 울음소리가 살짝 들린 것 같았다. 시아는 천천히 바위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바람 때문에 눈을 크게 뜰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실눈 사이로도 바위 뒤편에 숨어있던 거대한 구조물은 볼 수 있었다. 인공물이 분명했다. 그 인공물의 그림자 아래 어딘가에서 코니의 자그만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날개에서 떨어져 나온 기다란 막대를 집어 들고 지팡이로 삼아 바위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연신 코니를 외치며 인공물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다가 자칫 코니가 바람을 피해 숨어있다가 자기 목소리를 듣고 달려 나올까 싶어 입을 닫았다. 거기 그대로 있으렴, 코니. 시아는 잠시 고통을 잊고 커다란 보폭으로 인공물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인공물은 생각보다 컸고 동굴처럼 생긴 구멍이 뚫려있었다.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그 안에서 코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통로에서는 바람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기에 시아는 다시 한 코니를 불렀다. 그제야 코니가 모습을 드러내고 시아에게 다가왔다. 시아는 힘이 빠진 듯 주저앉아 코니를 감싸 안았다. 시아는 어떻게 코니에게 여기까지 왔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골골거리는 코니를 보고는 그대로 잊어버렸다.

“여기가 아마 한나가 얘기해 준 착륙선일 거야. 100년 가까이 지나면서 흙과 모래에 파묻힌 거겠지.”

시아는 코니를 데리고 통로 안으로 걸었다. 바람 소리가 점점 둔탁해지더니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아의 발소리만이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한 세기 전, 항성간우주선의 승무원들이 이 착륙선을 타고 초토화된 지구로 내려왔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신들의 실패로 고향과 가족을 잃었다. 분화구 바닥에 도시를 만든 사람들은 그 죄책감에 과거를 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시아는 코로 차가운 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다.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가 벽이든 바닥이든 천장이든 어딘가에 있었다. 지도에 쓰인 문자는 도시에서 쓰던 것과 모양이 조금 달랐지만 시아가 뜻을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이미 고문서를 보며 좋든 싫든 공부를 거듭한 덕분이었다. 시아는 조종실을 찾아갔다.

조종실 내부는 시아가 지금까지 옛 기술서에서만 봤던 다양한 장비들이 가득했다. 시아는 일단 납작한 버튼으로 가득한 입력장치 앞으로 갔다. 그리고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갑자기 옆에 있던 벽이 번쩍하고 빛나더니 수많은 문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지더니 한 줄의 문자만 남았다.

컴퓨터를 깨우는 중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조종실 어딘가에서 낯선 억양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아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인공지능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대개 인공지능은 사람이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는 것도 알았다. 시아는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코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혼자 조종실을 돌아다녔다.


인공지능 앤은 붉은 태양을 공전하는 행성 LRC 1301c의 모습을 커다란 화면 위에 그렸다.

「여기는 지구가 아니에요. 지구에서 540광년 떨어진 LRC 1301c입니다. 적색왜성 LRC 1301을 6일 주기로 공전하는 행성이죠. LRC 1301c는 LRC 1301에서 고작 450만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요. 그래서 동주기자전을 하고 있어요. 항상 같은 면만 붉은 태양을 향하고 있는 거죠. 반대편은 영원한 밤이고요. 달이 항상 같은 면만 지구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이 지구의 달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군요. 지금 우리는 영원한 밤의 영역에 있어요.」

시아는 의자에 일어나 화면에 표시된 LRC 1301 항성계를 바라봤다. 현재 위치라고 표시된 마크가 LRC 1301c 옆에 나타나 행성의 공전을 따라 움직였다. 붉은 태양 LRC 1301에서는 가끔 작은 불기둥이 솟았다가 사라졌다. 정말 저런 불기둥이 있는지는 시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시아는 어떤 종류의 태양도 직접 본 적이 없으니까.

“영원한 밤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반대편에 영원한 낮이 있었다니.”

「이 행성이 항상 강력한 바람에 휩싸여 있는 이유죠. 양쪽 면의 온도차가 너무 크거든요.」

“옛날 사람들이 항성간 비행에 성공했던 거구나.”

「반쪽짜리 성공이죠. 엔진이 폭주를 일으켜서 원래 목적지보다 훨씬 먼 곳에 도착했어요. 근처에 행성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죠. 승무원들은 엔진이 다시 폭주하며 증발하기 직전에 착륙선을 타고 행성 표면에 내렸어요.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어딨는지 모르고서는 지구에서 구조가 올 수도 없었고 모두 절망했죠.」

“비콘은? 이카로스의 별. 여기가 지구가 아니라면 비콘이 지구로 신호를 보내지 않아?” 시아는 한나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당신이 이카로스의 별이라고 부르는 그 별은 비콘이 아니에요. 이 행성계의 또 다른 행성 LRC 1301b에요. 9일 주기로 공전해요. 여기서 보면 18일 주기로 움직이면서 5~6일 정도는 겉보기운동 때문에 마치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가까울 땐 100만 킬로미터까지 다가와서 이곳의 바람 방향까지 바꿔놓고. 승무원들이라면 당연히 알았을 텐데. 여기가 지구가 아니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요.」

한나가 그런 말을 했었다. 이카로스의 별이 별자리와 비교했을 때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때가 있다고. 한나는 우리가 다른 항성계에 있다는 증거를 항상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에게 이걸 알려주지 못해 시아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정말 좋아했을 텐데.

「대신 예비용 비콘이라면 착륙선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콘은 궤도 위에서만 작동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아쉽게도 지금 상태로는 궤도로 올라갈 만큼의 연료가 남아있지 않아요. 게다가 우주로 나가서 비콘을 작동시킨다고 한들, 신호가 지구에 도착하는 데 540년이 걸려요. 애초에 비콘은 구조신호를 보내기 위한 게 아니거든요. 먼 미래의 항성간 항해시대를 위한 표식일 뿐이죠.」

시아는 눈을 감았다.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더 거대하고 웅장했다. 잠시 스스로가 너무 작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흥분되었다. 비록 마지막에 사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시아는 수백 광년의 공간을 가로지른 사람들의 숨결 속에 있었다. 시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작고 연약한 내가 항성과 항성을 가로지르는 역사 위에 서 있다. 시아는 더 이상 작아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마지막 계단을 오른 뒤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비콘을 올릴 방법이 있을까?”

「신기하네요. 항성간 우주선의 선장조차 제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 물론 그땐 모두를 살리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요. 지금이라면 방법이 없지는 않아요. 당신이 좀 고생할 뿐이지.」


앤은 선체를 진동시켜 주변에 쌓인 흙과 모래를 털어냈고 시아는 앤의 도움을 받아 가며 90일 동안 착륙선을 절단해 크기를 5분의 1로 줄였다. 연료 탱크를 제외하고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던 생명유지장치는 시아와 코니를 위한 것만 남기고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후미에 있던 엔진은 작아진 우주선 바로 뒤에 연결했다. 낯선 기계들이 가득했지만 앤의 설명과 그동안 읽어온 옛 기술서를 바탕으로 시아는 착륙선을 소형화했다. 이젠 착륙선이 아니라 이륙선이었다. 가져온 식량이 바닥난 뒤로는 착륙선에 남아있던 건조식품을 먹기 시작했는데 강풍 속에 날아오는 모래의 맛과 구분되지 않았다. 몇 개 없던 고급비상식은 코니에게 줬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시아는 몸이 가벼워진 걸 느꼈다. 체중이 적잖게 빠져나간 게 분명했다. 시아는 이륙선에 우주선 한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출발을 앞두고 시아는 오랜만에 조종석 의자에 앉았다. 앤은 선체가 가벼워진 만큼 가속도 역시 어마어마하게 클 것이라며 단단히 준비하라고 했다. 코니는 수면제를 먹여 재워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앤은 화면 위에 숫자를 띄웠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며 우주선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0이 나타났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가속도가 시아의 몸을 짓눌렀다. 아마 의식을 잃게 되겠지. 시아는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우주선 한나가 2시간에 한 번씩 행성을 공전하는 궤도에 이르렀을 때 시아는 다시 깨어났다. 앤은 미리 조종실의 창을 투명하게 개방해 두었고 시아는 눈을 뜨자마자 붉은 태양과 LRC 1301c의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운 풍경을 목격했다. 시아는 벨트를 풀고 의자에서 떠올라 창가로 다가갔다. 적색왜성 LRC 1301에서는 불기둥 서너 개가 멀리서도 보일 만큼 솟아올랐다가 다시 표면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때로는 표면에서 눈부신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 붉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행성 LRC 1301c의 절반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녹아내린 암석의 강줄기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영원한 낮의 세상이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반대편은 완전히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았다. 앤이 적외선 이미지를 보여준 덕분에 어둠 속에 숨어있는 얼어붙은 강과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대편에서 불어온 뜨거운 폭풍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가끔 액체로 된 물이 눈에 띄기도 했다.

시아는 창밖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가 조용히 제어판으로 돌아왔다. 버튼과 스위치 몇 개를 눌렀다. 앤은 화면으로 우주공간으로 나아가는 비콘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 540년 뒤면 지구에서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되겠죠. 나중에 더 안전해진 초광속 우주선을 타고 와서 비석이라도 세워줄지도 모르겠네요.」

시아는 낯선 별빛이 가득한 창 밖을 바라봤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여기까지 와 버렸다. 이젠 뭘 해야 할까.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공허감이었다. 출발할 때 많은 보호장비까지 버렸기 때문에 LRC 1301c로의 재진입은 불가능했다. 연료가 조금 남아있기는 했지만 LRC 1301c의 중력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 더 나갈 곳이 있을까? 이번에야말로 한나의 말처럼 마지막 계단을 올라버린 걸지도 모른다. 지열발전소에서 시작해 한 계단씩 올라 이윽고 익숙하지만 낯선 행성 주변의 궤도까지 왔다. 이제 아득한 세월 동안 LRC 1301c의 궤도를 떠돌 일만 남은 걸까?

아직 무중력에 익숙해지지 않은 코니가 버둥거리며 벽을 타고 시아에게 다가왔다. 시아는 마른 인공고기 조각을 코니에게 줬다. 코니는 작은 입을 움직이며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넌 걱정 안 해도 돼. 10년 치 식량은 있다고 하니까. 물질순환 시스템까지 활용하면 15년.”

시아는 두 손으로 코니의 얼굴을 감싸고 이상한 표정으로 만들었다. 코니는 저항하지 않았다.

“앤, 잠자기 모드로 들어가면 넌 언제까지 견딜 수 있어?”

「아주 오랫동안. 540년 뒤에 지구에서 방문자들이 온다면 그들에게 당신과 코니에 대한 기억을 해줄 시간은 충분히 있어요.」

“기억해 줬으면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시아는 코니가 잠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앤에게 이야기를 했다. 앤은 놀라움과 슬픔, 기쁨을 담은 반응을 하며 시아의 말을, 시시아가 들려주는 한나와의 이야기를 기억소자에 남겼다. 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농담처럼 과장된 짜증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나의 마지막 물음을 앤에게 들려주는 순간, 시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뭐라고 대답했나요?」 앤이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어.” 시아가 말했다.

앤은 시아가 생각과 감정, 그리고 후회를 정리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침묵을 지켜줄 만큼 뛰어난 인공지능이었다.

한참이 지난 뒤, 시아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들어줘서 고마워. 잘 자.”

「좋은 꿈 꾸시길, 유시아.」 앤의 포근한 목소리가 시아의 몸을 감쌌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시아는 코니를 안은 채 그대로 잠들었다.


코니가 유리를 긁는 소리에 시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코니는 제어판 위에 있는 유리 화면 하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배가 고픈 걸까? 시아는 주머니에 먹을 게 남았나 뒤져봤다. 없었다. 그때 코니의 귀가 움직였다. 무언가를 들으려는 듯 코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귀만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움직였다.

코니는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시아는 서둘러 다시 컴퓨터를 켰다. 반가운 문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컴퓨터를 깨우는 중입니다.

「벌써 540년이 지났나요? 안녕, 572살의 유시아.」

“두 시간밖에 안 지났어. 뭔가 소리가 들려? 코니가 뭔가를 들은 것 같아.”

「들립니다. 5만 헤르츠의 고음이네요.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소리예요. 주변의 중력장이 진동하면서 우주선을 울리고 있어요.」

앤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시아는 인공지능의 침묵이 불안했다. 다행히 앤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해석 방법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음성 신호네요. 인류 문명의 신호가 분명해요.」

“들려줘!” 시아의 몸이 순식간에 땀으로 흠뻑 젖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앤과는 다른 목소리가 조종실 안에 울려 퍼졌다.

「…구입니다. 항성간 우주선 디달로스 제로의 비콘 신호를 포착했습니다. 디달로스 제로의 승무원… 아니면 그들의 자손이 그곳에 있다면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지구입니다. 당신들의 신호를 포착했습니다.」

“대답을 보낼 수 있을까?”

이번에는 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중력장을 흔들 수는 없지만… 저들은 겨우 몇 시간 전에 보낸 비콘의 신호를 잡았어요. 우린 그냥 평범하게 신호를 보내면 될 것 같아요.」

시아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송신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여기는 LRC 1301c입니다. 디달로스 제로의 착륙선을 개조한 우주선 한나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들리나요? 정말 지구인가요?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아주 잘 들립니다. 여긴 지구입니다. 믿기 힘드시겠죠. 30년 전부터 초광속 통신과 항성간공간 원격탐사가 가능해졌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은하 곳곳을 뒤지며 계속해서 디달로스 제로의 비콘 신호를 찾고 있었습니다.」

“거긴 지금… 낮인가요?” 시아가 물었다.

「저는 지금 칠레 아타카마에 있고, 네, 여긴 해가 중천에 떴네요. 이쪽은 벌써 축제 분위기입니다. 당신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항성간 항해시대에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때 디달로스 제로가 폭주한 엔진을 수동으로 움직여 지구를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는 불지옥이 되었겠지요. 디달로스 제로의 아프지만 위대한 실패와 희생을 딛고 우리는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지구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36시간 뒤면 우리 구조선이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우리는 디달로스 제로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세상에,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군요.」

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참았다.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감각을 기억에 담아두고 싶었다. 손가락 사이로는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코니가 시아의 낯선 모습에 다가와 뭉툭한 앞발로 시아의 머리를 더듬었다. 시아는 다시 얼굴을 드러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코니를 품에 안고 말했다.

“여기는 우주선 한나. 당신들을 기다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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