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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질세(hemorrhodocene)의 끝

전삼혜

 

*치질은 잘못된 배변습관 및 생활습관으로 인해 나타나며 외계인의 농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부끄러워하지 말고 항문외과 갑시다.

 

뒤로 자빠졌을 때 코가 깨졌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나이 서른 넘게 먹고 위험하게 앞뒤로 흔든 건 분명히 내 잘못이었다. 내 사고 현장을 상세히 들은 친구들 중 대다수는 꼬리뼈는 괜찮냐고 했다. 한 명은 미안한데 무서워서 못 듣겠다며 중간에 전화를 끊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뒤로 넘어졌는데 가랑이 사이에 전선 덮개봉이 깔렸다’는 말은 남자의 생식기가 달린 입장에서는 상상할수록 끔찍한 일이라는 걸 이해 못 할 나이는 아니니까. 내가 외부돌출형 생식기가 없는 신체라 다행이었을까. 하지만 꼬리뼈와 없는 고환이 무사하다고 한들 아무것도 깨지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 날 밤부터 나는 엉덩이와 척추에 사커킥을 맞은 통증에 시달렸다. 꼬리뼈는 분명 멀쩡했다. 병원까지 가서 확인했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대체 무슨 고통이란 말인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 치핵. 흔히 치질이라고도 부르는 항문정맥류. 그 놈과 나는 10여년을 함께 살아왔다. 10년이나 방치하고 뭐 했냐는 질문에 대답하자면 그냥 살았다. 어차피 애 낳으면 다 재발한다는 신조로 전신마취 수술 동의서를 쓰지 않으시겠다는 법적보호자를 믿으며. 하지만 세상이 발전해서 그런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핵절제술은 부분마취였다. 법적보호자 서류 필요 없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어서 수술예약을 잡으시길 바란다. 이야기가 또 딴 데로 샐 뻔했다. 치핵을 의심한 나는 항문진료를 보는 외과, 그 중에 여성 의사가 있는 곳을 검색했다. 앞이든 뒤든 나는 중요부위는 동성에게 진료를 보는 게 편하다. 지금은 그 여성 의사 덕분에 무려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으니 다행이다. 아니, 정말 범우주생물학회에 등록됐다던 그 헤모뭐시기가 자꾸 날 방해하나. 왜 하려던 얘기와 점점 멀어지지.

의사는 평온하고 느릿한, 나무늘보를 닮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제가 치질이 있는데요. 이틀 전에 뒤로 넘어졌는데 그때부터 진짜... 네.. 그래서...”

고통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내 말재주를 듣던 의사는 일단 침대에 옆으로 누워서 엉덩이 까고 태아자세를 해 보라고 했다. 음, 내 엉덩이를 누가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경험은 썩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의사가 계속 ‘어?’나 ‘응?’ 같은 혼잣말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좋지 않은 경험일 거였다. 치질을 어떻게 손으로 촉진하는지는 그냥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보길 추천한다. 나는 별 거 아니겠지 하다가 의사의 말에 뒤통수를 한 번 더 맞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내시경 넣을게요.”

네?

뭐가 더 볼 게 남았나요?

그리고 내시경이 들어온 후, 의사의 ‘응?’은 ‘아하...’ ‘우와...’로 바뀌었다. 선생님, 제 이름을 딴 항문질환이라도 발견된 게 아니면 적당히 해 주세요. ‘흐음?’ 다음에 내시경이 특정 부위를 건드렸을 때는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도 나는 옷을 다시 입고 의자에 앉아 의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싸커킥 맞은 고통은 여전할지라도. 아니, 두 번 맞은 기분이었다. 그 날 외과에 대기환자가 있었다면 내 비명에 병원 선택을 후회했을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파서 소리도 안 나와서 다행이었다. 의사는 모니터에 여러 개의 사진을 띄우고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환자분의 치핵이에요. 내치핵이고, 3기 정도? 아주 심하진 않네요.”

저기 선생님, 좀 이상한데요. 원래 치핵이란 것은 그래도 인간의 내장이고 피부니까 좀 붉은 색이 돌아야 하지 않을까요? 의사가 가리키는 모니터 안에는... 머루포도 같은 게 있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이었다는 얘기다. 원래 치핵이 보라색인가?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의사는 정체불명의 머루포도가 지금 내 내장 안에 숨쉬고 있다고 말했다.

“넘어지실 때 운이... 나쁘셨네요. 완전히 충혈됐어요. 그런데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무네요. 아, 이것도 막 지금 당장 괴사할 만큼 심각한 건 아니지만 희귀해요. 저도 이런 케이스는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까놓고 말하자면 의사는 좀 즐거워 보였다. 내 주위에도 자기 공부하는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이 뜨면 흥미진진하게 돌아버리는 친구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의사는 내 친구가 아니고 저 머루포도는 내 내장 안에 있다. 의사 선생님. 선생님 애인은 선생님한테나 예쁘고 선생님네 고양이는 저에게도 귀여울 거예요. 하지만 제 치핵은 선생님한테나 신기하지, 저 지금 아파 기절할 것 같거든요? 의사는 ‘답은 수술밖에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저 머루포도를 수확해 버리지 않으면 작고 연약한 친구라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변이 머루포도의 껍질을 사포로 밀듯 밀어댈 거라고. 순간 내 눈앞에는 프로젝트 일정이 여섯 개 정도 스쳐지나갔다. 담당인 게 셋, 간접 담당인 게 둘, 대충 보기는 해야 하는 게 하나인지 둘인지 헷갈렸으니 여섯 개 정도다. 무꾸리를 해보자 네 일정이 언제 나올런는지. 12월쯤?

“11월 지나야 수술 휴가가 나오겠는데요?”

“그러면 그 때까지 그렇게 지내셔야죠.”

“지금까지 대충 같이 살았으니 어떻게 되지 않을까요?”

내 마지막 간절한 말에 의사는 약간 경멸이 섞인 눈초리를 보냈다.

“11월 지나서 실려오시면 병원비가 더 들 거예요.”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머릿속에서는 휴가 일정을 잡는 계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까짓거 멍 한두 번 들어봤나. 대충 자극 안 주고 버티다 보면 알아서... 멍은 빠지지 않을까? 그래. 식이섬유와 유산균을 많이 먹으면 화장실에 갈 때 고통도 적게 들 거야. 정 안 되면... 그래... 변비약이라도 먹으면 되지! 그러나 하늘 아래 의사가 있는 법은 무릇 인간이 함부로 고칠 수 없는 영역이 있어 전문가를 내리심이라. 나는 하루에 아홉 시간씩 꼬박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폭식과 단식을 반복했다. 그렇게 사흘. 금요일. 퇴근하며 나는 예감했다. 내일쯤 어떻게든 내보내지 않으면 아랫배 때문에 바지 지퍼가 잠기지 않을 것이다. 바지 지퍼가 안 잠기면 고무줄 바지를 입으면 되지만, 나의 머루포도는? 멍드는 게 빠져가는 자리에 아스팔트를 비벼대면 무지하게 아프지 않을까? 아스팔트보다는 조금이라도 무른 게 낫겠지? 나는 당일 야식을 생략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변비약을 먹었다.

그것이 악몽의 시작이었다.

물론 변비약은 효과가 있었다. 음. 그러니까, 부른 아랫배가 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나의 머루포도에겐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다. 마치 스펀지밥 일개 소대가 할로윈을 맞아 ‘트릭 오어 트릿!’ 이라며 1분마다 머루포도의 등짝을 때리는 고통 같았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는 의문이 있다면, 왜 머루포도가 아니라 배출구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냐는 거다. 그런 고통이 밀려오면 옆으로 눕든 똑바로 눕든 엎드려 눕든 잘 수가 없다는 건 처음 알았다. 나는 잠 보채는 신생아를 돌보듯이 베개를 껴안고 어정쩡한 포즈로 방 안을 4시간쯤 돌다 지쳐 쓰러졌다. 토요일과 일요일 밤을 고통으로 지새고 월요일 아침에 병원을 가니 의사는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장갑을 끼고 내 배출구를 헤집었을 뿐이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니. 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이 동네 직장인들은 다 그래요. 의사 말 안 듣죠. 그래도 변비약까지 드시는 분은 드문데.”

“끄아아아아악!”

밖으로 나오니 간호사가 ‘좌욕을 꾸준히 하시라’며 좌욕기를 만원에 팔고 있다고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회사 가야 하는데요. 지금.”

“검은색 비닐봉투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걸 들고 회사에 가기엔 제가 좀.”

“인터넷에서 사서라도 꼭 하세요.”

“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충동적이지만 매우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번주 금요일에 수술하고 싶은데, 예약 될까요?”

간호사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럼요!”

 

우리 회사는 휴가를 쓸 때 사유를 꼭 기재해야 하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바쁜 때에 금요일과 월요일 휴가를 붙여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설명이 필요했다.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서 출근한 직속 부하가 ‘용건이 있어서 그러니 10분만 바깥에서 상담할 수 있을까요?’라고 월요일 아침 메시지를 보냈을 때 상사의 심정을 구하시오. 아마 퇴사 아니면 퇴사 아니면 퇴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상사인 G님은 비장하게 노트와 핸드폰을 들고 나와 함께 바깥 까페로 향했다.

“뭐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법카.”

“아, 그러면 저는 요거트 프라푸치노요.”

내 주문에 G님의 눈이 커졌다. 단 음료는 혈당 때문에라도 안 먹는다고 아메리카노만 고집하던 내가 요거트라니. 이 아침부터. 하지만 G님은 곧 아이스 라떼 하나와 요거트 프라푸치노를 자리로 가져왔다.

“무슨 일이에요?”

“휴가를 써야 하는데, G님이라도 상황을 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G님이 울 것 같아서 나는 빠르게 먼저 말했다.

“이직 아닙니다. 퇴직 아니구요. 장기 휴가 아니에요. 어디 안 가요.”

G님이 조금 안심하는 표정을 짓자 나는 이제는 정말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내라. 지금 와서 말 안 하면 이도저도 안 된다! 병은 수치스러운 게 아니다! 정말이다. 이 병이 수치스럽거나 남사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치핵 3기에 도달하고 나서야 병원에 오는 사람이 태반이라는데, 나는 이미 선을 넘은 후였다.

“치질수술을 해야 하는데, 금요일에 하니까 월요일까지 휴가를 좀 붙여 썼으면 합니다.”

G님이 아이스 라떼를 들이마시다 켁켁거리며 나에게 몇 방울 튀겼다.

“어, 우리 회사는 그런 거 안 물어보는 거 알잖아요.”

나는 방금 전 울기 직전 같던 G님의 표정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건 뭐 강압이나 그런 게 아니라 순전히 G님이 딱해 보여서 말해 준 건데.

“G님 이번 주말 내내 울까봐요. 직속부하 다른 데로 튄다고 생각하실까봐.”

“사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어떻게 잡아야 하나 고민 중이긴 했어요.”

“그거 봐요. 알고는 계시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G님은 입이 무겁기 때문에 나는 이 사실이 밖으로 딱히 새어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휴가 기안을 올렸다. 그런데 G님의 입이 너무 무거운 탓이었을까. 아니면 회사가 너무 작아서였을까. 부대표님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메시지를 보내셨다. 나는 의자를 돌려 뒷자리의 G님 뒤통수에 눈으로 욕을 했다. 대충 이직이나 퇴사, 플라이 어웨이 아니라는 말만 해 줘도 될 것을. 나는 부대표님의 메시지에 응했다. 부대표님은 애가 둘인 파워 워킹맘이니 오히려 말하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번 한 말을 두 번 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맵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달라고 하자 부대표님은 대뜸 죽집에 가자고 했다. 성큼성큼 걷는 부대표님을 따라잡으려다 보니 엉덩이가 다시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죽집에 앉아서 메뉴를 시키고 부대표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많이 힘들지? 사람도 적고, 일은 많고. 게다가 요새 또 한창 뭐 바쁘잖아. 원래 휴가 사유 이런 거 묻는 거 예의가 아니라는 거 알아. 그런데 지난주부터 계속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거 알아? 혹시 이틀 아니라 더 필요한데 일부러 적게 썼을까봐 밥 먹자고 한 거야. 자기,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틀 가지고 돼?”

그날 죽집에서 좀 울었다. 울면서 눈물콧물 닦아가며 사태를 설명하는 동안, 부대표님은 진지하게 들어 주셨다. 그 동안 죽이 나왔고, 작은 그릇에 죽을 덜어주며 부대표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그래. 사무실 출근이 편하면 이틀 써도 상관 안 해. 그 대신 재택 필요하면 바로 말하기야. 다들 민망하다고 말 안 해서 그렇지, 나 여기 있을 때도 그렇고 전 회사도 그렇고 치핵 환자 많았어. 대표님한텐 내가 따로 말할게. 그 대신 하고 나면 후기 좀 들려줘. 분명히 지금 말 못하고 앓고 있는 사원들 셋 넘어. 내가 앓아 봐서 알지.”

진짜 울었다.

 

휴가가 처리되고, 별 일 없이 진통제를 먹어가며 수술 날짜만 기다리던 나의 생활 장르가 바뀐 건 수요일이었다. 리얼리즘에서 갑자기 외계인과의 교신 장르가 될 줄이야. 알게 모르게 뒤에서 지원을 해 준 G님과 부대표님 덕분에 나는 섬유질 풍부한 메뉴와 정시칼퇴를 반복하며 수술에 임할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수요일 새벽, 엉덩이가 은은하게 아파 눈을 떴더니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뭔가.

“...세요? ...시죠?”

나는 드디어 내가 고통 끝에 환청을 듣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이건 고통이 오히려 평소보다 덜한데?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의문과 함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저랑 대화를 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있으면 선생님이 위험해요.”

대화는 개뿔. 나는 옆으로 돌아 누우며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 순간,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엉덩이에 사커 킥보다는 머루포도에 헤드락이 내려쳐진 듯한 고통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내부에서 잡아 비튼 듯한 고통이 느껴지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 앉았다.

내가 일어나 앉자 목소리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선생님... 선생님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방금 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어요.”

이번에는 무서워서 울 뻔했다.

내게 자신을 뭐라뭐라 소개한 그것을 나는 외계인이라고 부르려고 했다. 어느 은하 어디에서 온 무슨 특성을 띈 지적 생명체라고 해봤자 우리 은하계 밖에서 왔으면 외계인이니 말이다. 외계인은 천천히 몇 번에 걸쳐 자신의 출신을 납득시키려고 했지만 나는 5시간 후엔 일어나서 직장에 가야 하는 바쁜 몸이고, 방금 전부터 무지하게 아픈 몸이었다. 이 외계인은 자신과 대화하고 싶을 때는 코어에 힘을 주며 생각하라고 했다. 코어? 코어근육이요? 필라테스 3개월 다닌 걸 이럴 때 써먹게 될 줄이야. 나는 ‘됐고 아프니까 제발 용건만 얘기하고 저리 가세요’를 전달했다. 외계인은 최소한 자신을 ‘온건파 대표’로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퍼지는 걸 느꼈다. 온건파는 보통 강경파의 반댓말이다. 온건파가 내 엉덩이에 스파이크를 내리칠 정도면, 강경파는 대체 무슨 짓을 할 거라는 소리인가? 온건파 대표는 ‘그런 폭력은 우리 온건파가 지향하는 게 아니다’ 라며 길고 긴 지구정착 스토리를 풀어놓았다.

내가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졸며 들은 것을 요약하자면, 이 온건파 대표네 종족은 그간 인류와 소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범우주생물학회에도 가입했고, 인간의 몸안에 들어갈 권리도 보장받았다고 한다. 잠깐, 누구 맘대로. 내가 코어에 힘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온건파 대표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정맥류 말단에 주로 집단을 이루고 살며, 그 중에서도 자신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는 서서히 치핵화 된다고 했다. 아무래도 세력이 불어나면 정맥류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는 꼴이 되니까.

그래서 하지정맥류나 치핵에 군락을 이루며 사는 것이 일반적 거주 방식이라고 했다. 하지정맥류나 치핵은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특이 질환이므로 연구를 겸한다는 말도 함께. 나는 있는 대로 코어에 힘을 주고 내적 사자후를 질렀다.

'그러니까 이 치핵이 너네 때문이라는 거예요? 십 년도 넘게 내 몸에서 뭐 하는 짓이야!'

온건파 대표가 항의했다.

"그렇게 말하시면 우리 때문에 없던 치핵도 생긴 것 같잖습니까! 한국 직장인과 고등학교 학생들의 불규칙한 식사와 배변, 화장실에서 변기에 앉아서 스마트폰 하고 책 읽는 게 원인이라고요!"

'방금 너네가 머물러서 치핵이 됐다며!'

"보통 이 전에 자른다고요!"

인정해야겠다. 소싯적 화장실에 책 가지고 들어가고, 싱싱한 채소와 유산균을 멀리하고,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닌데 귀찮다고 1시간에 3분도 일어나지 않은 나의 생활 습관이 일차 원인이다. 그리고 저 외계생물들이 무슨 바이러스처럼 묘사된 것은 소설적 기법이다. 놀라지 마시고 항문외과 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다시 코어에 힘을... 아, 슬슬 배가 땡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갑자기 왜 나타난 건데요.’

“저희는 정든 치핵을 떠나는 것에 별 유감이 없습니다. 이 치핵은 우리에게는 국가와도 같은 곳이지만, 때로 이민을 가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강경파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집을 철거하는 경우가 어디 있냐. 집주인의 횡포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장기에 깃들어 살겠다’며 범우주생물학회 평화조약을 위반하고 온몸으로 퍼질 가능성이 있어 알려드리려 온 겁니다.”

이제 코어에 힘이 안 들어갔다. 나는 간신히 코어에 힘을 주었다. 야밤에 웬 복근운동이야, 이게.

‘어디로 가는데요?’

“뇌로 갈 수도 있고, 간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강경파가 나서면 과격한 행동으로 이주한 장기를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잠이 싹 달아났다. 아니, 몸 주인도 지금 아파서 고생하는데 왜 외계인들까지 난리야? 게다가 뭐? 뇌하고 간? 한국 직장인이 외계인 없이도 과로하는 장기들에 왜 이사를 가겠다고 그래? 나보고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쩌라는 거죠.’

슬슬 코어에 힘을 주는 게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코어에 반복적으로 힘을 주면 어떻게 되는지 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일단 코어 주변이 아팠고, 엉덩이도 아팠다. 온건파 대표도 곧 통신이 끊길 것 같다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종족은 우유에 취약합니다. 우유에 든 일부 성분이 활동을 둔화시키고 신호체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에 우유를, 우유를 많이...!”

팟, 하고 뭔가 꺼지듯 말이 끊겼다. 우유? 야, 우리 동네 마트만 가도 저지방인지 락토프리인지 소화가 잘 되는지 무지방인지 선택의 폭이 넓은데 뭐가 가장 효과가 좋은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시계는 수요일 새벽 5시 40분을 나타내고 있었고 나는 내가 이 대화를 잊지 않기를 바라며 잠에 빠져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내가 뭘 했겠는가. 금요일 오전 9시 30분에 수술을 예약했고 12시간 금식이니 목요일 밤 9시 반까지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술은 안 되지만 우유가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충분한 탄수화물을 섭취하며 수시로 우유를 마셨다. 아예 자리에 1리터 팩 두 개를 가져다 놓고 계속 마셨다. G님은 내가 뭘 하든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측은하게 날 바라보았다.

목요일에도 우유를 마셨다. 혹시 몰라서 발효유인 요거트도 마셨다. 그 결과 나는 수요일 밤부터 설사에 시달렸다. 머루포도가 고통을 호소하는 게 느껴졌다. 목요일 퇴근 후에는 아무것도 넘어가질 않아서 물도 안 마시고 굶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은 멀쩡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덜덜 떨며 오뉴월 맥주 마시듯 벌컥벌컥 우유를 들이키던 수요일과, 아무것도 못 먹으면서 계속 코어에 힘을 주고 온건파 대표를 불러대던 목요일 밤. 금요일이 밝자 나는 9시까지 오라던 병원에 8시 30분에 도착했다. 내가 간호사들의 놀란 눈을 뒤로 하고 다짜고짜 진료실 문을 열자 나무늘보같은 인상의 의사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바닥에 쓰러지며 간신히 말했다.

“외계인들이 제 뇌를 노리고 있어요!”

눈을 떴을 때는 한 시간 후. 외과 안에 있는 1인용 병실이었다. 내가 눈을 뜨자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열 없으시고. 이제 좀 괜찮으세요?”

“아, 어, 네...”

“그럼 옷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기다려 주세요.”

“네...”

환자복을 입자 좀 정신이 들었다.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침대에 눕자 천장에 붙어 있는 TV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렇군. 누워서 가만히 있어야 하니까 아예 천장에 설치했나보다. 그런데 베개가 없었다. 내가 너무 난동을 부려서 깜빡하셨나? 베개가 없으면 가슴 위에 스마트폰이건 태블릿이건 올려놔 봤자 시야각이 안 나와 볼 수가 없었다. 잠시 뒤 간호사가 와서 카테터 놓을 자리를 주삿바늘로 잡았다.

“척추마취라 계속 정신이 깨어 계시긴 할 거예요. 여기로 나중에 지혈제랑 무통주사 연결합니다.”

그냥 기절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대망의 수술에 대해선 길게 말하지 않겠다. 나는 제정신으로 수술실 천장 TV에 나오는 동물농장을 보고 있었다. 아래쪽에서는 감각은 없었지만 뭔가 자르거나 들어올리는 느낌은 났다. 의사가 말이 없었기에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내가 인터넷에서 본 수술 자세와는 상당히 달랐다. 옆으로 누워서 하는 수술은 아니었다.

마취 뒤, 비척비척 병실로 돌아와 나는 여전히 베개가 없는 침대에 누웠다. 왜 베개가 없냐고 물으니, 척추마취 약물 때문에 최소 오늘 하루는 머리 높이가 낮아야 한다며 베개를 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머리를 함부로 들면 낮은 확률이지만 끔찍한 두통이 일주일간 찾아올 수 있다는 보조 답변도 함께 왔다. 나는 그냥 베개를 포기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강경파가 뇌 운운했는데 두통이라니. 제발 그것만은. 무통주사 버튼을 몇 번 누르다 꼬르륵 잠에 빠졌다. 직장인의 피로는 가끔 고통을 넘어섰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서 눈을 떠 보니 의사였다.

“괜찮으세요? 소변은 보셨어요?”

자애로운 얼굴을 보며 나는 새삼 부끄러워졌다. 내가 오늘 아침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외계인이라니. 그것도 뇌를 노리는 외계인이라니. 아니, 나에게는 모두 사실이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아침에는, 그,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파서 헛소리를…”

“쉿.”

의사가 말을 잘랐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내 침대 옆에 앉았다. 의사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걱정 마세요. 그분들은 지금 안전한 곳에 계십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내 눈앞에 들이댄 카드에는 ‘범우주생물학회 정회원’ 이라는 글자가 한국어, 영어, 알 수 없는 몇 개 국어로 새겨져 있었다.

“환자분의… 치핵은 가장 가까운 본부로 전달했습니다. 곧 전문가가 강경파와 온건파를 분리해서 조약 위반에 대한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겁니다. 온건파 대표가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잠깐. 잠깐만요. 내 치핵을 뭐 어디다 보낸 거야. 그거 생물학적 쓰레기 아냐? 나는 할 말이 산처럼 많았지만 고개도 못 들고 꺼진 티비만 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은은한 고통이 계속 전해지는 걸 보니 꿈은 아닌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죄송한데,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간신히 고개만 옆으로 돌리고 내가 말하자 의사는 주변을 한번 슥 둘러보더니 말했다.

“안심하세요. 환자분은 저희 병원에서 세 번째 케이스입니다. 우리는 모든 절차를 숙지하고 있고, 안전하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세 번째 어쩌고 소리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체내에 서식하며 의사소통을 하는 지적 외계 생명체를 치핵과 함께 제거한 게 세 번째라는 거죠.”

내가 병원을 제대로 찾은 건지, 제대로 잘못 찾은 건지 점점 확신할 수 없어졌다. 의사는 핸드폰 사진첩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나의 항문 사진을 보여주었다. 일단 머루포도는 없었지만, 수술 후의 사진이라기엔 어쩐지 자르다 만 것 같은 구석이 군데군데 보였다. 의사는 낮게 한숨을 쉬더니 속삭였다.

“1차 국가는 깔끔하게 잘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외계 생명체가 없으니 하는 말이지만, 강경파 녀석들은 온건파를 완벽하게 속였습니다. 그놈들은 선생님 몸 안에서 1신체 1국가 조약을 어기고 위성국가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더군요. 이 사실에 대해서도 범우주생물학회에 알리고 규제할 예정입니다.”

“위성국가라뇨?”

“내치핵 2기가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 생명체는 몰아내었습니다만, 이것까지 한번에 자르면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너무 커서 추후로 미뤄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죠.”

“그 말씀은…?”

의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수술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나중의 일이니, 일단은 회복에 전념하십시오.”

재수술이라니.

“다음에는 기필코, 선생님의 몸에서 치질세가 끝나게 제가 책임질 겁니다.”

의사는 비장하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 나갔다.

제발 누가 꿈이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수술은 잘 끝났냐는 부대표님과 G님의 메시지가 핸드폰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나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한 세를 끝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이 공룡의 세이건, 인간의 세이건, 하다못해 치질의 세이건 말이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당신도 하루빨리 항문외과에 가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외계인은 다양하고, 당신도 나와 같은 세대를 몸 안에 키우고 있을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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