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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Revoir

2021.06.01 00:0006.01

Revoir

갈원경


거리는 소음으로 넘쳐난다. 가게마다 바깥을 향한 우프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낯선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밤공기에 소리는 아래로 고여 하늘로 사라지지 못하는 소리들은 지표 가까이 모여 서로 부딪힌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꽂고 나올 걸 그랬다고, 나는 길을 나선지 한시간만에 후회한다. 경적소리를 듣지 못할까봐 아무것도 귀에 꽂지 않고 나왔더니. 과일향과 커피향이 섞여 창밖으로 날아오는 테이크아웃 커피점 앞에 멈춰섰다. 

"안에 자리 있나요?"

10대로 보이는 점원은 밤공기에 익숙한 사람답게 자정 가까운 시간에도 또렷한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인다. 들어선 좁은 가게 안에는 사람이 없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주방쪽에서 한 사람이 의외라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하얀 깃을 세운 드레스셔츠에 날을 세운 검은 바지, 공단으로 칼라를 댄 선이 잘 나온 베스트, 비뚤어지지 않고 붙은 듯이 단정한 턱스- 과거의 영화에서 빠져 나온 것 같은 사람이었다.

“카페라테, 따뜻한 걸로 하나요.”
“시럽 추가해 드릴까요?”
“아뇨.”

주방의 사람은 에스프레소를 뽑으며 스팀밀크를 만든다. 남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내게도 이 시내 한 복판의 작은 커피점에 50대의 외모를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주인인지 직원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라 해도. 

“테이크아웃인지 안 물어보세요?”
“그럼 밖에서 주문하셨을 것 같은데요. 가지고 가시게 만들어 드릴까요?” 
“아뇨, 아니지만.” 

그의 말에 머쓱해져 가게를 슥 둘러보았다. 원두 진열대와 아이템 전시 코너는 보이지 않고 구석에 있는 유리문 너머로 커다란 기계가 꽉 들어찬 방이 들어왔다.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는 넓은 내부지만 앉을 수 있는 좌석은 넓이에 비해 적다. 보통 이 정도라면 테이블을 넷은 두었을 것 같은데, 두 개 테이블에 의자도 각각 두 개 뿐이다. 

“앉아서 기다리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내부에서 또 구석자리 간접조명 아래의 의자에 앉았다. 딱딱한 나무 의자가 아니라 어쩐지 졸음이 쏟아질 것 같은 폭신한 의자다. 스팀밀크를 만드는 증기 소리가 얕게 들리다 멈추더니, 잠시 후 안쪽의 턱시도 차림의 사람이 잔을 나무 쟁반에 받쳐들고 와서 내 앞에 놓았다. 

“카페라테 나왔습니다.”

막 만든 스팀밀크 위로 올리브 무늬가 그려져 있다. 무늬가 무너지지 않게 조심하며 한 입을 머금었다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마스터를 쳐다보았다. 커피 향이다. 적당한 산미와 우디향이 섞여서 우유향에도 지지 않고 생생히 남은, 잘 뽑은 에스프레소의 향이다. 

"입에 맞으신가요?"

턱시도의 사람이 엷게 웃었다. 저렇게 웃는 사람을 본 게 언제였더라. 

"볶은지 며칠이 지나야 맛있다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만, 오늘 볶은 원두가 좋아서요. 가게에 들어오신 분은 오랜만이기도 하고. "
"…굉장하네요."

입은, 가슴은, 기억하고 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커피향과 목을 타고 흘러가는 개운한 뒷맛을. 우유로 희석되어도 옅어지지 않은, 기분 좋은 커피 특유의 쓴 맛. 조용한 가게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가게 안에 조용히 들리는 선율을 깨닫는다. 이것은, 재즈. 오래된 옛 시절의 노래. 먼 기억 속에서, 아주 어린 시절에 들은 그 노래들.

“드립커피도 좋아하시나요? 드립용 브랜드도 오늘 볶은 게 있는데.”
“메뉴판에는 안 보였는데요.”
“제가 마시려고 볶아두는 거라서요. 그러니 그냥 한 잔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내가 넋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사이에 그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드르륵, 커피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나무 트레이에 그가 가져온 것은 드립 주전자, 원추형의 황동 드리퍼와 유리 서버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이었다. 드리퍼 안에는 종이 필터 위로 고소한 향의 원두가 들어 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원두 위로 물을 떨어뜨리는 움직임을 보았다. 봉긋하게 원두가 올라오는 것을, 따뜻한 물길이 원을 그리고 유리 서버 아래로 똑똑 짙은 커피가 내려오는 것을, 여분의 서버 위로 드리퍼가 옮겨진 뒤에 커피잔의 따뜻한 물이 여분 서버 위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진한 커피향이 채워지는 것을 보았다.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가게에 손님이 들어온 게 꼭 두 달만이라서요."

표정이 웃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번잡한 시내에 사람이 들지 않는 가게를 두 달이나 유지할 수 있을까? 한 평의 점포를 임대하는 비용이 도시 최고라는 지역이다. 나는 바깥을 내다보고 수긍한다. 바깥에서 나를 안내해주었던 점원은 연신 종이컵과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카페라테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과일주스를, 내고 있었다. 

"정말 테이크아웃 손님밖에 없네요. 두 달이라니 너무 길긴 하지만."
"몇 달씩 안 들어오실 때도 있죠. 여기 의자도, 가게에 들어온 건 몇 년 됐는데 사람이 앉은 건 몇 번 안 되니까요."

나는 그가 가까이 밀어놓는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잡아 입에 한 모금을 머금는다. 좋은 커피는 꼭 와인과 같다. 입술에 닿기 전에 코가 먼저 느끼고, 입안 가득 퍼지는 복잡한 맛과 코로 퍼지는 향이 동시에, 세상에 오직 나와 커피 둘만이 남는 것 같은 느낌이 된다.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커피를 마시지 않은게 오래됐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들고 다니는 한여름에도, 차라리 수박주스를 시키지 라떼가 아닌 커피는 주문하지 않았다. 강한 쓴맛, 때로는 거슬리는 신맛이 위벽을 헤집는 것이 싫어서였다. 속이 메슥거리지 않고 오히려 얼굴이 풀어지게 만드는 커피맛은 오래전에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익숙해져야했다. 거리 곳곳에 두어 건물마다 하나씩 들어왔는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내게 건네는 그랑데 사이즈 카페라테. 우유 향으로 덮지 않으면 쓴 맛을 감당할 수 없으면서도 1/3쯤 남았을 때는 눅눅한 우유향만 남게 되는 그런 커피에.  

"집에서도 커피를 드시나요?"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간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망설인다.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에 있기 위한 기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이 도시의 빠른 물결에 휩쓸려 걸을 수 조차 없기 때문에.

"안 마신지 오래 됐어죠. 집에서 마셔도 별반 다를 게 없으니까. 캡슐머신도 사 봤는데 취향에 안 맞더라고요."
"하긴, 요즘은 집에서 차분하게 커피를 마실 시간 같은 건 없지요."

마스터는 쉽게 내 속뜻을 알아차리고 정말로 안타까운 것같은 표정을 짓는다. 물론 정확한 속뜻은 알아차리지 못할테지만. 

"직장이 근처시죠? 지나가시는 걸 몇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 거리를 매일 밤 지나치는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텐데, 그중에서 별 특징이 있을 리 없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내가 뭐라고 물으려던 순간 길에서 커피를 팔던 그 사람이 가게로 들어온다.

"마스터, 슈크림 휘핑이 떨어졌는데요."
"냉장고 안에 두어 병 남았을 거야."
"예."

오늘은 슈크림 모카가 잘 팔리는 모양이군요 라고 말하며 그, 마스터는 씁쓸하게 웃는다.

"아, 마스터. 뭔가 드실래요? 저 샌드위치 주문할 건데."
"나는 됐어."

마스터는 눈짓으로 종업원을 가리키며, 입술로 딸이에요 라고 말한다. 나는 따님이 예쁘시군요 하고 입술로 답한다. 딸은 마스터와 얼굴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잠시 정적이 흐른 끝에, 지난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하고 그는 내게 입술로 묻는다. 음악을 조금 올릴까요? 나는 그러시죠- 하고 입술로 대답한다. 음악이 조금 높아지고 그와 나는 아주 작은 비밀을 공유한 공범자가 된다. 음악은 재즈- 흐느적대는 반주와,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않는 남자 가수의 음성이 묘하게 가슴을 훑어내린다.

"I left my heart in sanfrancisco..."

마스터는 내가 조그맣게 가사를 따라 읊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본다. 어쩌면 마스터는 나처럼 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시절의 케케묵은 노래를 숨죽여 틀어놓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옛 시절의 방법으로 커피를 만드는 것이 그의, 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 대한 조그만 저항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어버린다. 이 좁은 가게를 유지하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지 모르는데. 도시에 낙오되어 과거에 젖어 지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일까. 최악으로 상상하자면 이 사람은 나와 같이 뒤떨어져, 거리를 걸으며 뭔가 생각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패배자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자기 주머니를 채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쪽의 상상이 도리어 즐거워졌다. 나와 같은 사람이 혼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 거리를 혼자 걷는 사람은 드뭅니다. 특히 이런, 자정 가까운 시간은. 이 낡은 녀석도 기분이 좋겠군요. 이렇게 소리를 올려 본 것도 오랜만이라."

마스터는 쟁반을 들고 일어나 내가 비운 커피잔을 거두어 깨끗이 닦아 선반에 올려놓는다. 긴 머리를 가죽끈으로 묶은 것은 옛 시절의 유행이었을까. 옛 시절의 기억은 지독하게 희미해서 확인할 수 없다. 

"이거, 스트리밍이 아니라서요. CD 플레이어예요. 좀 크죠? 그래도 꽤 멋진 녀석이었습니다. 그때 유행하던 온 힘을 튜너와 음질에 투자한 제품이라고 홍보를 했었다더군요. 덕분에 그 시절에도 별로 히트작이 아니었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CD 플레이어라, 그리운 이름이네요."

작은 가게, 마스터와 나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나는 마스터가 가리키는 낡은 손때묻은 플레이어를 본다. 어느 시점에서였을까.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좋아하는 곡을 실시간으로 듣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신청할 뿐 더이상 음반을 구입하지 않게 되었다. 좋아하는 음악가들에 대한 애정으로, 발매되는 CD를 사긴 했지만 그 음반들이 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로 장식물처럼 놓여있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몇 개의 소장 브랜드가 옛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로 부품만은 소량 생산을 하고 있긴 해도 사실상 CD 플레이어 브랜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취미라는 비난도 들으면서, 주문생산처럼 한정판으로 적은 물량이 제작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새롭다는 건 뭘까요. 내 조부모님 시절에는 이 녀석도 새로운 기술이었다고 들었거든요. 원음을 완벽하게 보존해준다고. 그 전엔, 그걸 뭐라고 불렀더라. 아십니까 혹시? 검은 판에 홈을 파서 음을 기억시킨."

"LP. 아니 바이닐이던가요."

"맞아요. 바이닐을 삽시간에 엎어버렸다죠. 그 시절엔 CD가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 것인지 몰랐나 봅니다. 원음의 완벽한 보존이라니."

"…완벽한 보존이라."

마스터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을 잇는다.

"난 가끔씩, 이 도시에 남아있는 CD가 총 얼마나 될까 생각을 해요. 내가 갖고있는 것이 전부인 건 아닐까. 이 소리를, 이 섬세한 소리를 기억해내는 사람들은 이미 다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음악을 좀 크게 틀어보시지 그래요? 혹시 모르잖아요. 길을 가다가 그 음악을 듣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가게로 들어오게 될지."

"60년대에 태어나지 않으셨죠?"
"네. …50년대도 아니고, 70년대도 아니고."

순순히 대답하자 마스터는 처음으로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왜 묻는지 바로 아시는군요. 동안이라고 받으실 줄 알았는데."
"제가 진담이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저도 사람 표정 정도는 읽을 줄 알아서. …'깨어난' 사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요."

고개를 저으며 남은 잔을 비웠다. 마지막까지도 깊은 향이 내 입안 가득히 채워져, 여운이 깨질까봐 입을 열기가 두렵다.

"'사고' 이야기가 뉴스에도 나왔고.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요."
"…그렇죠."

직장 상사는 내가 새로 쥔 신분증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동면기간중에 속성으로 머리 속에 가지게 된 지식이라는 건 단순히 주입되었을 뿐이라서, 동면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복잡한 처리를 요하는 전문직을 얻을 확률은 희박하다. 물론 내 새 직장도 단순한 작업이다.

음악은 여성 보컬의 조금은 부담스러운 감정적인 블루스로 바뀌었다. 내 표정을 보고 마스터는 별말 없이 앞곡으로 되돌렸다. 버튼 조작을 한 번 더 하는 것은 한 곡만 반복하도록 설정하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고 음악에 취해버렸다가 드륵드륵 원두를 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막 커피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제 것을 한 잔 내리려고 하는데.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문득 청동 드리퍼도, 드립용 필터도 ‘깨어난’ 뒤에 실물로 보는 것이 오랜만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두 번째 잔은 사양하지 않는다. 드리퍼와 거름종이는 적어도 CD처럼 시대 저편으로 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한가로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지만, 그 말은 한가로운 사람에게 커피는 여전히 유희가 될 수 있다는 뜻도 될테니까. 마스터가 조용히 원두를 불린다. 물을 머금은 원두는 다시 볼록하게 솟아오르고 향이 깊이 퍼진다. 유리 서버로 떨어지는 커피를 보는 눈이 뜨겁다.

"…괜찮으십니까?"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요. 괜찮습니다."

눈을 감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불린 원두 위로 물이 조로록 떨어지는 소리가 낮으면서도 감미롭다. 나와 함께 잠들어 있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대에 깨어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낯선, 왜 이런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식이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늘 궁금했다. 난 왜 내 원래 시대에서 이 시대로 내쫓겨진 것인지, '내' 기억은 무엇이었는지. <잠입자>는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인지.

누가 냉동센터의 컴퓨터로 '잠입'해 들어왔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 부적응자나 범죄자에게 적용하는 프로그램이 전체 보존체에게 적용되면서 일순간에 모든 이들의 과거의 기억은 완벽하게 말소되고 그들의 신변에 관한 자료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것으로 '잠입자'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곧바로 '방어자'들이 동원되어 추적에 들어갔을 때는 '잠입자'가 접속을 종료해버린 다음이었다고 했다. 정부에서 세운 대책은 범죄자들에게 하듯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신변에 대해서 정보제공을 받을 수 있었던 운 좋은 일부를 제외하고.

기억은 사라졌어도 느낌은 남아 있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함과 타인들의 방식에 동조할 수 없는 껄끄러운 이물감이 불시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정작 기억하지는 못하면서도 이것은 낯설다거나 이것은 그립다, 이것은 오랜만이다, 그런 느낌만이 있는. 하여 나는 이 시대에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탁. 내 앞에 잔이 놓이는 소리와 함께 커피의 증기가 내 코를 간지럽힌다. 나는 눈을 뜨고, 웃고 있는 50대 후반의, 과거의 차림새를 한 이를 본다.

"원래 그렇게 사람을 쳐다보시나요?"
"아주, 가끔은."

마스터는 자기 몫의 커피를 붓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로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20대 초반에는 한 사람을 정말로 사랑한 적이 있었습니다.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이나, 결국 이렇게 커피점을 내게 된 것 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 덕분이라고 할 수 있죠. 벌써 30년 전의 일이군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반려를 만나셨잖아요."

마스터는 그 사람이 반려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낯선 확신에 마스터는 그저 웃어주었다.

"결혼, 안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바깥으로 향해 서 있는 10대 여자애를 쳐다보았다. 마스터는 자기 앞에 놓인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저 애도 70년대생이 아니에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독립된 직장을 가질 수도 없고, 신상도 알 수 없어서 제가 맡았습니다. 옛 친구가 북부 냉동센터의 총 책임자라서요."

소리를 낮춘 마스터의 말에 나는 내 앞에 놓인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생각해보면 운이 아주 나빴던 것도 아니다. 냉동센터의 사람들이 소리를 죽여 이야기했던 것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나는 불치병에 걸려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가. 육체 연령으로 추정해서 스물 한 살 정도라 성인의 신분도 얻었다. 오후 2시에 출근해서 열한시에 퇴근하는 직장도 얻었으니 냉동센터에선 나름대로 책임을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 적응해나가고 있다. 부적응은 내 개인의 문제다.

"그 연인분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 묻는다.

"…글쎄요, 어딘가에서 잘 살고있을 겁니다. 저처럼 늙지도 않았을 테고."
"추억은 언제나 과거의 모습대로죠."

조금 웃으면서 나는 일어났다. 너무 오래 이 시대에 잠겨 있으면 안 된다. 샌프란시스코를 노래하는 이 곡에 취해버려서는 안된다. 나는 지금 20대의 나이로 21세기 후반에 살아 있으니 말이다.

"잘 마셨습니다."

커피값을 치르는 나를 마스터는 아까처럼 쳐다본다. 마스터의 눈이 노란 조명 탓인지 물기 어려 보인다.

"가끔 들러주시겠습니까? 맛 좋은 커피를 준비해 둘테니."
"그러죠."

건성으로 대답하며 나는 시끄러운 도시의 밤으로 돌아간다. 퇴근길이 늦어졌지만 별로 문제는 되지 않는다. 고층의 아파트는 내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온도가 조절되어 있을 테니 평소처럼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낯선 가게를 뒤로 하며 걷는다.

겨울바람이 휭하니 지나간다. 눈이 뜨겁다. 매운 바람 탓인가보다.

 
댓글 2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1.06.24 15:34 댓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프랭크 시나트라 목소리처럼 잔잔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글쓴이 갈원경 21.06.29 21:13 댓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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