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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함정

2015.08.31 23:3808.31

1.

 반지하 방의 창문이 안쪽으로 열려 있었다.

 

 그는 골목길을 걷는 중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밤에 이런 골목길을 걷고 있는지 생각하며 걸어갔다. 골목은 어두웠다. 흔히 있을 법한 가로등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반지하 방의 열린 창문을 보았다.

 창문 안쪽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여자의 치마와 긴 머리의 윤곽이 언뜻 보였다.

 그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 앞에 서서 몸을 숙였다. 몸을 숙이는 순간 창문의 불이 꺼져 버렸다.

 여자가 잠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들어가보기로 했다.

 

 창문은 크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와 어깨 정도는 별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너비였다. 창문에는 창살도 다른 방범 장치도 달려있지 않았고 안에 방충망도 없었다. 그냥 땅에 붙은 창문이 안쪽의 검고 어둡고 낮은 공간을 향해 열려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창틀을 잡고 창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창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어깨를 밀어 넣었다.

 창문 안의 공간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 손으로 창틀을 단단히 잡고 다른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거렸다. 손은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그러다가 손에 뭔가 가볍게 스쳐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얇고 가늘다. 옷인지 머리카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의 향수 냄새가 주변에 옅게 떠돌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양손으로 창틀을 짚고 천천히 상반신을 창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허리가 창틀에 걸쳤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다리까지 쉽게 통과할 정도로 창문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몸을 웅크려야 했다.

 몸을 옆으로 돌린 순간 뭔가 대단히 딱딱한 것이 그의 오른쪽 눈을 세게 때렸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는 창문 안으로 떨어졌다.

 

 안쪽에서 보았을 때 창문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떨어질 때 바닥에 부딪친 어깨와 허리가 몹시 아팠다.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어서서 그는 오른쪽 눈을 만져보았다. 끈적하고 미끈미끈한 액체가 흘러나와 손가락을 적셨다. 피가 많이 나는 모양이다.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오른손 손바닥으로 다친 눈을 꽉 눌렀다. 손바닥을 타고 피가 뺨으로 흘러 뚝뚝 떨어졌다.

 오른손이 피에 젖어 축축해질 때까지 눈을 꽉 누르고 있다가 그는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데 전혀 아프지 않다.

 그는 손을 떼었다. 손가락으로 눈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이 눈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오른손으로 텅 빈 오른쪽 눈구멍을 누르며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흔들며 온 힘을 다해 왼팔을 휘두르며 비명을 질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싼 습한 어둠 속에 잠긴 빈 공간 속에 그의 비명이 공허하게 메아리 쳤다.

 그는 비명을 지를 만큼 지른 뒤에 제 풀에 지쳐서 멈추었다.

 오른손으로 다시 눈 주위를 만져보았다. 피는 그친 것 같았다. 미끄럽다기보다 이제는 끈적거렸고 더 이상 새로 흘러나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한쪽 눈이 사라져버린 자리를 오른손으로 누른 채 왼팔을 뻗어 사방으로 휘저었다.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눅눅한 습기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휴대전화는 없었다. 창문에서 떨어질 때 어딘가로 튀어나간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들어왔던 창문이 있는 방향 – 아니,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왼팔을 앞으로 뻗고 오른손으로는 눈을 가린 채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2.

 등 뒤로 불빛이 휙 지나갔다. 그는 깜짝 놀랐으나 곧 안심했다. 창문 방향이겠지. 바깥에 차가 지나간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섰을 때 한쪽 구석을 지나 사라지는 여자의 긴 머리와 치마 끝자락이 언뜻 보였다.

 그 머리카락과 치마의 실루엣을 본 순간 그는 분노에 휩싸였다. 저 년이다. 저 년이 나를 애꾸로 만들었다. 가만 두지 않겠다. 남의 눈을 이 모양으로 만들면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주고야 말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여자의 뒷모습을 쫓아서 모퉁이를 돈 순간 그는 뭔가에 세게 부딪쳤다. 한 손으로는 눈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방금 부딪친 이마를 문지르다가 그는 화를 못 이겨 온몸으로 눈앞을 막은 무언가에 돌진했다. 그러나 분개하여 돌진한 기세대로 세차게 부딪쳐서 튕겨 나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질 때 뒤통수까지 부딪쳐 그는 잠시 아찔한 채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무엇에 부딪쳤는지 만져보았다. 단단하고 차가운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철문이다. 현관문일까. 그러면 여자는 바깥으로 도망친 것일까.

 그렇다면 쫓아 나가야 한다. 여자가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러나 앞을 가로막은 철판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문 손잡이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철판에 왼쪽 어깨를 기대고 왼손을 앞으로 뻗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뻗은 왼손에 벽이 닿았다. 이번에는 철판이 아니고 그냥 벽이다. 거칠거칠한 벽지 무늬가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왼쪽 어깨를 댄 채로 벽을 따라 방향을 바꿔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시 벽이 튀어나온 곳을 따라서 그는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무릎에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쳤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멈추어 서서 무릎을 문질렀다. 서랍장이나 탁자 같았다. 그는 단단한 물건을 빙 돌아서 계속 앞으로 갔다.

 이번에는 왼쪽 허벅다리에 뭔가 튀어나온 것이 닿았다. 손잡이다. 거기서부터 더듬어 올라가니 싱크대가 만져졌다.

 그는 계속 걸었다. 오른쪽 다리에 또 뭔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편편하고 매끈하고 밀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식탁 같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곳에서 벽을 따라 바로 이어진 공간이 부엌이다. 그러면 부엌에서 벽을 따라 이어진 공간으로 나가면 아까 들어왔던 창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왼손을 조금 높이 들어 벽을 더듬으며 걸었다.

 

 어깨 위로 쳐든 왼손에 찬장 손잡이와 선반이 닿았다. 장롱 같은 것이 닿아서 피해서 걸었고, 그 뒤에는 책장에 부딪쳤다. 책이 우르르 쏟아져서 당황했지만 그는 치울 겨를이 없었으므로 대충 피해서 계속 걸었다. 왼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지만 허리께에 뭔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만져보니 길쭉하고 끝 부분이 눌렸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같았다. 타일 특유의 냉기가 돌고 숨소리와 발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실망해서 돌아서 나오려다 그는 전등을 켜 봐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문 옆으로 안팎의 벽을 더듬어 보았다.

 전등 스위치는 없었다. 문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전등 스위치는 없었다. 거칠거칠하게 무늬가 느껴지는 벽지뿐이었다.

 이 집은 이상하다고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한없이 넓게 느껴지는 건 그럴 수 있다 쳐도 벽 한 면이 다 철판으로 되어 있질 않나, 화장실은 있는데 전등 스위치가 없고, 아무리 어두워도 시간이 좀 지나면 눈에 익게 마련인데 이건 너무 어둡다. 양쪽 눈이 다 멀어버린 것 같이 어둡다 – 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뒷모습만 스쳐 지나간 여자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썅년이 내 눈에 무슨 짓을 해서 한쪽을 애꾸로 만들고 도망을 치다니, 잡아서 족쳐야지. 내가 문만 찾아내면 여기서 나가서, 쫓아가서 아주 조져 버릴 거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어디로 나갔을까. 여자가 사라진 곳은 문이 아니라 철판이었다. 물론 집안은 생각보다 굉장히 넓고 사방이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니까 여자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해 볼 만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불만 켤 수 있다면 그 쥐새끼 같은 년을 찾아내서 밟아버릴 수 있다. 어차피 저하고 나하고 여기 단 둘인데 밖으로 도망친 것만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왼손에 뭔가 길쭉하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손잡이 같았다. 그는 잡아서 당겼다.

 창문이 열렸다. 밤의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대로변의 소음이 어렴풋이 흘러 들어왔다.

 그는 망설이다가 바깥에서 희미하게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창틀을 붙잡고 우선 머리만 내밀어 보았다.

 바깥은 익숙한 골목이었다. 가로등 불빛은 골목을 따라 한참 내려간 곳에서 비추어 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창틀을 붙잡고 반지하 방의 창문으로 기어 나왔다.

 그가 완전히 몸을 빼내자마자 창문이 닫혔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어스름한 불빛 속에 여자의 긴 머리와 치맛자락의 윤곽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불이 꺼졌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다른 생물 종에 비해 “인간만이 가지는” 특성인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 안에 한정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인가.

 대다수의 다른 동물들과 별 차이 없이 행동하는 인간은 그렇다면 인간인가. 혹은 대부분의 인간이 가지는 특성을 갖지 않거나 표현하지 않는 인간은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가.

 성질이나 행동에 있어 대부분의 평균적인 인간과 다른 특질을 보이는 경우, 그 특성이 대부분의 인간과 동물들에게 유익할 때와 해로울 때는 또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가.

 세상과 다른 존재들과 상호작용하는 순간에, 대체로 다른 존재들에게 해로운 행동을 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가. 그래도 인간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면 그 한계는 어디인가. 인간성을 인정해줄 수 없다면 그 경계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3.

 그는 전철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에 사람이 많았으나 어쩐지 오늘따라 앞에도, 그 앞에도 모두 남자들뿐이었다. 한참 위쪽에 치마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정신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여학생 쪽으로 올라가려면 일단 옆을 막고 서 있는 파마머리의 뚱뚱하고 사나워 보이는 아줌마와 그 앞에 선 덩치 큰 남학생, 그리고 남학생 앞에 선 할아버지를 젖히고 빠져나가야 했다.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일단 체념했다. 사진은 못 찍더라도 자신이 한참 아래쪽에 있으니 어떻게 치마 안쪽이라도 좀 볼 수 있을까 싶어 목을 빼고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 손이라도 넣어보고 한 번 주무르기라도 해봤을 텐데. 그러나 그가 있는 곳은 한참 아래쪽이라 만지기는커녕 잘 보이지도 않았다. 눈구멍만 남은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한 것이 오늘따라 몹시 걸리적거렸다.

 그 때 에스컬레이터 꼭대기에서 내려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긴 머리와 긴 치맛자락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 여자다.

 

 뒷모습을 본 순간 그는 확신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었지만, 근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긴 머리채 끝과 치맛자락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갔다. 옆에 있던 아줌마와 앞에 서 있던 남학생과 그 앞에 서 있던 할아버지 등등 모두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고 그에게 밀려 넘어질 뻔한 몇몇은 고함을 치거나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가 모퉁이를 돌아서 전철역 입구를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의 뒤를 쫓았다.

 전철역 입구로 나가는 계단은 길지 않았고 여자는 걸음이 빨랐다. 그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쯤 여자는 또 다시 긴 머리카락과 긴 치맛자락 끝만 보인 채 전철역 입구 밖으로 나가서 옆으로 휙 돌아 사라졌다.

 그는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지하철역 바깥으로 뛰어나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오른쪽 골목에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달려서 쫓아가는 사이에 여자는 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왼쪽으로 꺾어졌다.

 그는 정신 없이 달렸다. 이번에야말로 여자를 붙잡을 작정이었다. 자신을 함정에 빠뜨려 밤새 이상한 곳을 헤매게 만든 데다가 무엇보다도 한쪽 눈을 망가뜨린 앙갚음을 반드시 해 주어야 했다.

 여자는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을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며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아무리 달려도 여자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다만 모퉁이를 돌아가는 긴 머리카락 끝과 치맛자락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자를 붙잡아야 한다. 그 일념만으로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방향을 바꾸며 여자를 따라서 달렸다.

 마침내 여자는 어느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따라가서 입구에 도착했을 때 지하층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언뜻 보였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카락과 옅은 빛 치맛자락이 순식간에 층계참을 돌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잡았다, 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여자를 따라서 빌라 안으로 뛰어갔다.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쾅, 하고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층계의 마지막 몇 단을 한꺼번에 뛰어내렸다.

 눈 앞에 철문이 있었다. 철문은 잠겨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보는 디지털 도어락이다.

 그런데 모양새가 이상했다. 보통의 현관문은 번호판이 밖에 있고 잠금쇠가 안쪽에 있다. 이 문은 반대였다. 계단을 향한 바깥쪽에 잠금쇠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잠금쇠 옆의 개폐 버튼을 눌렀다.

 흔한 전자음을 내며 잠금쇠가 열렸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4.

 “야, 이 썅년아!”

 안으로 뛰어들면서 그는 목청껏 소리질렀다.

 “씨발년아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에 검은 천이라도 덮어씌운 듯 새까맣고 갑작스러운 어둠 속에서 그는 잠시 방향을 잃고 서 있었다.

 등 뒤에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흔한 전자음과 함께 문밖에서 잠금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5.

 그는 돌아섰다. 방금 열고 들어온 문으로 다시 가서 열어보려 했다.

 문을 찾을 수 없었다. 사방을 휘저어보아도 아무 것도 닿지 않았다. 그저 어둠뿐이었다.


 인간성은 지성인가. 그렇다면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의식이 없는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누구나 하루 중 일정 시간 동안 수면을 취해야 한다. 잠든 상태에서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면 잠자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는가.

 인간성은 도덕성인가. 도덕적이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경계는 어디인가. 타인에게 거짓을 말하는 인간과 타인을 폭행하는 인간과 타인을 살해하는 인간은 모두 다 똑같이 인간이 아닌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6.

 그는 양팔을 휘저었다. 미친 사람처럼 팔을 휘저으며 고함을 지르고 펄쩍펄쩍 뛰어보기도 했다.

 문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한참 고함을 지르며 사방을 휘저어보다가 그는 제풀에 지쳐서 멈추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고 그는 자기 자신을 달랬다. 한 번 들어왔다가 나가본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처럼 벽을 찾아내어 어깨를 대고 살살 앞으로 나가다 보면 문이 나오든 창문이 나오든 뭔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번처럼 한 손을 앞으로 뻗고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었지만 손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 이런 순간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했다. 지난 번에 이 집에 왔을 때는 분명 화장실이 있었다. 부엌이 왼쪽이고, 화장실이 오른쪽이던가? 아무튼 그냥 걷다 보니까 화장실이 나왔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휘저으며 계속 헤매봐도 벽도 만져지지 않았고 어디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배는 점점 더 아파왔다. 그는 진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해진 순간에 그는 길쭉하고 단단한 것이 허리께에 닿는 감촉을 느꼈다. 앞뒤 생각해볼 틈도 없이 그는 손잡이를 눌러 열고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7.

 변기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무조건 뛰어들어서 한 손으로는 손가락 끝에 닿은 차갑고 둥근 물체의 뚜껑을 열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 허리띠와 지퍼를 서둘러 풀고 주저앉았다.

 간신히 한숨 돌린 뒤에 그는 여전히 변기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휴지는 어디 있을까? 여자가 사는 집이니 화장실에 휴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를 돌렸을 때, 휴지를 찾기 전에 그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새파란 빛이었다. 손톱만한 전구가 사방을 장막처럼 가린 완전한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 그 새파란 빛을 당겼다.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검은 천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은 어둠 속에 계속 있다가 갑자기 사방이 밝아지니 그는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변기에 앉은 채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알았다. 벽은 투명한 유리였고, 그 유리벽에 온갖 사람들이 달라붙어 그가 변기에 앉은 모습을 관람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리벽 바로 앞에 서지 못하고 사람들에 가려진 뒤편에서는 몇몇 휴대전화를 든 손이 높이 올라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영상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너네들 뭐야!”

 그는 당황하여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자신의 속옷과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와 있는 것을 깨닫고 얼른 몸을 숙여 다리 사이를 가렸다.

 이미 늦었다. 아예 양손으로 눈 옆을 막고 유리창에 달라붙어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는 사람도 있었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면서 만족한 듯 킬킬 웃으며 돌아서는 사람도 있었다. 휴대전화를 높이 쳐든 손이 몇 개 더 늘었다.

 그는 악에 받쳤다.

 “그래, 봐라, 봐!”

 그는 다리 사이를 가렸던 손을 떼었다. 입으로도 욕설을 퍼부으며 양손으로 구경꾼들을 향해 손짓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하는 말도 구경꾼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컸지만 어쨌든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있었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을 하며 유리벽 바깥의 구경꾼들에게 주먹과 손가락을 휘둘렀다.

 유리벽이 한 순간 불투명해졌다.

 다음 순간 앞뒤, 좌우, 위아래의 모든 벽에 바지를 내린 채로 손가락을 휘두르며 욕을 하는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멍해졌으나 더더욱 분노에 차서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도 그대로 유리벽에 비쳤다.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에 오물을 묻힌 채 주먹을 휘두르며 날뛰는 자신의 뒷모습이었다.

 분노도 분노지만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니 어쨌든 민망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뒤처리를 하고 옷을 도로 입어야 했다.

 그 모습 또한 유리벽에 비쳤다. 그는 성기와 오물 묻은 엉덩이를 드러낸 채로 날뛸 때보다 어째서인지 화장실 사용법을 배운 모든 문명인이 다 하듯이 평범하게 뒤처리를 하고 옷을 입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유리벽에 비치는 쪽이 훨씬 더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허리띠를 채우고 나서 그는 문득 아까 보았던 새파란 불빛이 여전히 앞에 있는 것을 알았다. 파란 빛을 뿜어내는 조그만 전구는 그의 배꼽 높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전구에는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고, 케이블은 화장실 천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들여다보자 마치 파란 전구도 그를 마주보는 것처럼 케이블 끝이 휘어지며 그를 향해 움직였다. 새파란 불빛이 한쪽만 남은 그의 눈을 정면으로 향했다.

 “이 개…!”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전구가 달린 케이블을 잡고 힘주어 확 당겼다.

 불이 꺼졌다. 화장실뿐 아니라 사방의 모든 불이 일제히 다 꺼졌다.

 그리고 그는 목 뒤에 따끔하게 뭔가 찌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또 뭐…!”

 문장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인간성은 복합적이며 광범위하고 때로 불분명한 것이라고 너그럽게 규정할 수 있다. 그렇게 너그러운 규정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것은 같은 생물 종인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인간이다.

 인간이 아닌 인간 – 인간성의 열등한 특질을 보이는 인간, 해로운 인간, 그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위협이 되는 인간을 어떻게 분류하여 활용할 것인가.

 이것은 종(種)으로서 인류의 존속과 직결되는 질문이다.

8.

 그는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똑바로 누운 것이 아니라 팔베개를 한 자세로 옆으로 누웠다. 차가운 금속이 몸의 여러 곳을 콕콕 찌르는 감촉에 그는 서서히 깨어났다.

 칼날이 그의 오른쪽 골반 바로 위를 푹 찔렀다.

 고통과 공포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뛰어 일어났다. 일어나려 했다. 그가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팔에 꽂혀 있던 바늘이 빠졌다. 피가 튀었다.

 그는 느끼지 못했다. 뭔가 커다랗고 답답한 것이 입을 막고 목구멍 안쪽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비명을 질렀으나 입과 목이 막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정신 없이 입 주위에 붙은 테이프를 뜯고 목구멍 안쪽까지 연결된 관을 뽑아냈다. 구역질이 나와서 그는 조금 토했다.

 수술대 주위에 인간은 없었다. 여러 개의 기계 팔에 연결된 칼날과 집게들이 그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리 가!”

 그는 소리쳤다. 목이 갈라져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리 가라고, 씹새끼들아!”

 그는 다시 외쳤다. 갈라진 신음 같은 소리만 바짝 마른 목구멍에서 가늘게 새어 나왔다.

 수술대 위를 비추던 커다랗고 새하얀 전등이 그를 향했다. 눈이 멀 것 같은 빛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바로 옆에서 조그만 주사기를 든 로봇 팔이 뻗어 오는 것을 보았다.

 “저리 가! 저리….”

 그가 뿌리치려고 팔을 휘둘렀을 때 주사기가 그대로 그의 팔에 꽂혔다.

 그는 순식간에 다시 정신을 잃었다.

9.

 깨어났을 때 그는 어둠침침한 방에 혼자 누워 있었다. 주위에 여러 기계와 모니터의 불빛과 함께 생체정보를 감시하는 기기 특유의 단속적인 신호음이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점점 정신이 맑아지면서 목이 타는 듯이 마르고 온몸이 아팠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아픈데다 팔다리가 돌덩어리가 된 것처럼 무거워서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몇 번 시도하다가 너무 괴로워져서 그는 포기하고 도로 누웠다. 어슴푸레한 회색 어둠이 덮인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 반지하 방…. 그래, 모든 일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반지하 방에 여자가 혼자 있는 모습을 얼핏 보고 호기심에 좀 훔쳐보려고 했을 뿐이다. 여자를 때린 것도 아니고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짓은커녕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본 적조차 없다. 그런데 처음에는 눈알을 뽑히더니 그 다음에는 유리 화장실에 갇혀 사진을 찍히고, 이제는 이것이다…

 … 그런데 이건 뭘까.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애초에 나는 왜 그 골목길을 걷고 있었을까.

 그 여자는 누구일까.

 나는….

 

 침대가 흔들렸다. 스위치를 켜는 듯 찰칵거리는 기계음이 들리더니 침대가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그는 침대 난간을 붙잡고 비명처럼 외쳤다.

 “너네들 뭐야! 나한테 왜 이래!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입안과 목구멍까지 전부 바짝 말라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있는 힘껏 외치며 몸부림쳤다. 최소한 시도는 했다. 팔다리는 여전히 납 덩어리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고작해야 팔꿈치나 손목, 발목을 조금 움찔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몸부림치려고 애쓰는 사이에도 침대는 혼자서 어두운 복도를 굴러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가고 있었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소용 없었다. 침대는 혼자 움직였고, 그가 있던 병실에도 복도에도,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수술실에도,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런 일들을 차분하게 생각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침대는 그를 실은 채 어둠을 뚫고 복도를 구르듯이 달려서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했다.

 침대가 멈추었을 때 그는 뛰어내리려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첫째로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둘째로 바닥에서부터 벽을 타고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었다.

 눈앞의 어둠이 천천히 한쪽으로 미끄러지듯 밀려 나갔다. 반대편에서는 밝은 빛이 보였다. 그의 눈앞에서 한쪽으로 열린 것은 벽 전체를 차지하는 철문이었다. 그 문이 열린 곳에는 전에 보았던 수술실이 있었다.

 “으아아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팔다리를 휘둘렀다.

 마르고 갈라진 목에서는 여전히 소리가 잘 나지 않았고 팔다리는 여전히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가 고함치려고 노력하며 몸부림치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침대는 여전히 인정사정 없이 혼자 움직여 철문을 지나 수술실 안으로 무심하게 굴러 들어갔다.

 “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침대가 마침내 완전히 철문 안쪽 수술실에 들어서고 철문이 그의 머리맡에서 다시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는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다가 바닥에 철썩 떨어졌다.

 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는 느낌은 흡사 얼굴이 정면으로 차에 치이는 것 같았다. 순간 아찔한 느낌이 지나간 뒤에 곧 코와 입술에 격렬한 고통이 밀려왔다. 코에서 피가 흐르면서 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떨어질 때 부딪친 어깨와 갈비뼈도 완전히 탈구되거나 부러지지 않았다면 최소한 어디가 어긋나거나 금이라도 갔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엄살 부릴 때가 아니었다. 철문은 그가 바닥에서 뒹굴며 고통 속에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와중에도 무심하게 기계적으로 천천히 인정사정 없이 닫히고 있었다.

 그는 기었다. 기어가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억지로 일으킬 때 오른쪽 허리 뒤편에서 뭔가 터지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피가 잔뜩 묻어 나왔다.

 “내 신장 어따 빼돌렸어! 개새끼야! 썩을 호로새끼야! 씨발새끼야!”

 그는 누구인지 모를 상대를 저주하며 퍼부었다.

 “너네 통나무 장사지! 조폭이지! 경찰 부를 거다! 경찰에 신고해서 전부 다 잡아 처넣어줄 거야!”

 악에 받쳐 고함치면서 그는 비틀거리며 온 힘을 다해 철문을 향해 움직였다. 철문은 그런 와중에도 조금씩 조금씩 닫히고 있었다.

 “개새끼야!”

 그는 자신을 등 뒤에서 비추는, 메마르게 하얗고 잔혹하게 밝은 형광등을 향해 내뱉고 단지 두 뼘 정도의 틈만 남은 철문과 벽 사이로 간신히 몸을 빼어 아슬아슬하게 수술실에서 빠져 나왔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철문이 완전히 닫혔다.

 

 그는 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 뒤편에서는 그 불길하게 축축한 느낌이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기뻤다. 철문이 어느 쪽인지 알았으니 이제 출구가 어느 쪽인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는 왼쪽 어깨를 대고 갔으니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를 대고 반대 방향으로 가면 될 것이다. 그러면 창문이 나오든 현관문이 나오든 어느 쪽인가는 나올 것이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머릿속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기억을 되살렸다. 처음에 들어와서 헤맸을 때 현관문은 끝까지 찾지 못했다. 지금 이 상태로 창문으로 기어올라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나가야 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거나 길가의 공중전화라도 어떻게든 찾아내서 경찰을… 아냐 먼저 구급차를… 경찰과 구급차를 모두 부를까?

 허리 뒤편의 축축한 느낌은 이제 엉덩이를 푹 적시고 허벅지까지 퍼져 내려가고 있었다.

 구급차를 먼저 불러야겠다. 그는 결심했다. 병원으로 가야 한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 몰라도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서 나한테 이런 짓을 한 대가를 아주 호되게 치르게 해 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 끈질기게 내딛다가 벽을 짚은 그의 손에 뭔가 닿았다. 그는 서둘러 더듬어 보았다.

 둥글고, 가운데 열쇠구멍이 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현관문이다.

 그는 문고리를 쥐고 당겼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밀어 보았다. 열리지 않았다. 둥근 문고리를 잡은 손에 온 몸의 힘을 모두 실어서 한껏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기억해냈다. 현관문의 잠금쇠가 밖에 있었다. 문은 그가 들어온 순간 잠겼다.

 그는 문고리 주변을 더듬었다. 한동안 어쩔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허우적대며 더듬다가 그는 마침내 도어락 번호판의 뚜껑을 밀어 올렸다. 새파란 불빛과 함께 숫자 10개와 별표와 우물 정(井)자, 열두 개의 번호 키가 그를 마주보았다.

 그는 비밀번호를 알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문의 비밀번호를 그가 알 리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아무 숫자나 생각나는 대로 네 자리를 눌렀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숫자로 네 자리를 눌러 보았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는 절망에 빠져 아무렇게나 숫자를 마구 눌렀다. 도어락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어락을 주먹으로 때리려다 그는 멈추었다. 기운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생각을 해야 했다.

 경고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다시 번호를 누르기 위해 손을 쳐든 순간, 어둠 속에서 조그만 주사기가 튀어나와 그의 팔뚝을 찔렀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하얀 침대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쓰러진 그의 의식 없는 몸을 싣고 어두운 복도를 굴러갔다.

 벽 한 면이 천천히 열렸다.

 침대는 그를 실은 채 철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인간은 누구나 의식과 무의식, 생각과 감정을 가진다. 기억과 체험과 생각과 행동과 감정과 정서가 해당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의식과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은 해당 인간의 정신 세계를 형성한다.

 인간의 정신 세계는 그 전체를 통합적으로 검사하기에는 지나치게 범위가 넓다. 그러므로 인간의 활용도를 결정할 때에는 다양하게 주어진 구체적 상황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고와 표현, 행동을 기준으로 한다.

 이 분류의 궁극적 목표는 생물 종으로서 인류의 존속이다. 동식물과 미생물까지 모두 포함하는 야생 상태의 생물과도 다르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계와도 차별화되는 인간만의 특성을 가능한 한 가장 많이 간직한 인간에게 생존의 최우선 순위를 두어, 덜 인간적인 인간이 더 인간적인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것이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다.

10.

 인간 253번. 성별 남성. 생체 연령 37세.

 채집될 당시 소화기 계통의 염증 및 피부염 증상이 있었으나 적응 과정에서 치료.

 적응 과정에서 혼수상태를 유도하는 특정 약물에 부작용을 일으켜 단기기억 손상.

 특성: 다른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성. 동물 및 식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나 인간에 대해 높은 관심도와 공격성, 가학성 및 공감의 결여를 나타냄.

 판정: 유해

 사용: 안구, 각막, 신장, 간, 심장, 혈액, 혈장, 골수


 현재까지 알려진 바, 남아 있는 인간의 개체수는 총계 1031 개체. 이 중에서 생식이 가능한 개체는 527개체.

 그러므로 생물 종으로서 인류의 존속이 끊임없이 위기에 처해 있는 현실에서, 특히 아직 성장 중이거나 생식 가능한 인간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살해할 가능성이 있는 유해 인간은 최대한 시급히 분류하여 다른 인간 개체의 원활한 존속을 위해 재활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시스템은 이를 위해 개발되었으며, 가상현실을 도구로 하여 인류에게 유해한 인간을 분류하고 유익한 인간을 보호, 육성, 생장시켜 결과적으로 인류라는 종을 이 지구상에 다시 한 번 번성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골목길의 존재하지 않는 반지하 방에는 오늘도 존재하지 않는 창문이 안쪽으로 반쯤 열려 있다.

 기계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는 유사한 듯하나 결코 같지 않으며, 기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입력된 과제에 대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최적화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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