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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독심술

2014.10.01 00:1810.01


독심술




실장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자, 두 단어도 더 말하기 전에, 넌덜머리를 내듯이 짜증을 내며 내 말을 막고 또 소리를 질렀다.


“이거 큰 고객이잖아. 근데 하루 전에 이야기하면 어쩌냐고.”


어찌나 짜증을 내며 펄펄 뛰는지 어떻게 보면 웃길 지경이었다. 어린애가 지 어미에게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앉아 다리를 바동바동 하는 꼴과 비슷한 면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짜증 내는 것을 우울한 표정으로 듣고 있자니 또 벌컥벌컥 화가 날 때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화를 막 내도 되나. 내가 뭐 지 노비인가.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났다. 부모님께서 아들이 건실히 제 몫을 하는 사회인으로 잘 살기를 한 시도 빠짐 없이 빌고 있다는 사실까지 떠올랐다. 이 따위 한심한 놈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며 마구잡이로 욕하고 쳐도 되는 소나 말 취급 정도를 받으며 일한다고 붙어 있는 것을 부모님께서 아시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니 이 정신 나간 것 같은 실장의 소리 지르는 것을 계속 더 듣느니, 확 다 엎어 버릴까 싶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실장이 날뛰고 소리 지르는 강도를 확 줄였다. 소리 지르며 난동을 부리다 보니, 문득 목이라도 아파졌는지, 잠깐 소리 지르는 것을 몇 초 멈추게 되었고 그 잠깐 멈춘 몇 초 동안 자기가 날뛰며 소리 지르는 것이 없는 세계를 잠시 자기도 느낀 것이다. 그러면서 실장은 스스로 보기에도 참 추하게 보일 만큼 방정 맞게 날뛰며 화를 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싶다.


내가 이걸 확 엎어 버릴까 말까 하는 시간과, 실장이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고 잠시 썩는 온도에 눅눅해진 두엄 더미처럼 열 받은 제 얼굴을 식히는 시간이 문득 조용히 몇 초 더 지나갔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이 잠깐 흐른 뒤에 실장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알아?”


이게 뭔가? 실장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괴로움이나 수치심이 모두 잊혀질 만큼 놀라움을 느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알아?” 내지는 “내가 왜 화 났는지 몰라?” 라는 말은 한참 인터넷에서 부질 없는 논란거리로, 허망한 농담거리로, 끝없이 돌며 유행했던 대사 아닌가. 실장은 그걸 모르고 스스로 제 입에 그 단어들을 바르면서 그 문제의 대사를 제 입으로 똑똑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장이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네 입으로 말해 보거라”라고 하는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은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고 멍청하여 지금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고 있지만 뭘 잘못했는지 조차 모르고 일단 빌고 보는 한심한 놈 일거라고, 말하자면 멸시에 가깝게 내 머릿속의 성능을 의심하고 있고, 그 결과로 정말로 내가 왜 실장이 화났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해서 묻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발전적으로 생각하자면야, 사람마다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실장이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서로 다를 수가 있으니까, 그걸 조율해 보자고 꺼낸 이야기일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천만에. 아까까지 어린애 장난감 사달라고 마트 바닥에서 뒹구는 것처럼 악을 쓰며 나에게 소리치던 그런 사람이, 그렇게나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목적만으로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알아?”라고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조차도 모르는 한심한 상태인 것으로 추측된다. 한번 확인해보자. 옳거니. 정말로 한심하게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 이제 이러한 한심함에 초점을 맞춰서 다시 한 번 신나게 너를 욕하며 화를 내 볼테야.” 라는 심정으로 던져 본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은 “정말 너는 네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으니까, 내가 한 번 확인하고 알려줄께” 라는 의도가 바탕이라는 점은 아까의 발전적인 태도와 같다. 그렇지만, 서로의 관점의 차이를 알아 보고 조율하려는 목적에 힘이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넌 분명히 내가 왜 화가 났는지도 몰라. 네 멍청함을 한 번 더 욕해 주마”라는 자신의 분노와 공격에 목적이 있어서 새로운 차원에서 한 번 더 화를 내 보려는 목적에 힘을 확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내 입으로 “나는 이런 멍청한 짓들을 저질렀고, 이래서 실장님께서는 화가 나셨습니다”라고 소리내어 말하며 얼마나 내가 쓰레기인지 내 입으로 스스로 말하며 자학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저렇게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옛날 군대에서 어떤 선임 병사가 한 후임 병사를 다그치면서,


“야, 너 내가 왜 화났는지는 알아?”


라고, 제딴에는 뭔가 위엄 있는 말투랍시고 목소리 깔고 소리쳤던 누추한 광경이 기억이 났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실장이 저런 식인 것은 구체적인 사연이 어찌 되었던지 간에 그냥 실장이 군대에서 배운 버릇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 보았다. 실장은 학창시절 동안 특별히 무리를 이끌어 본다거나 팀을 이루어 사람들끼리 함께 일을 해 본다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살다가 군대에 갔는데, 좀 이상한 인간들을 만나서 왕창 고생을 하고 결과적으로 자기도 그런 이상한 인간이 된다. 그렇게 2,3년 보내는 동안 “그래 아랫사람들 부리는 것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그 군대에서 배운 방법이 바로 무리를 이끌고, 팀을 움직이는 방식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스물 한 두 살 때 2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배운 그 방법만이 대장짓을 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몸에 벤 이 양반은, 그리고 나서 지금 저 나이가 되도록 몇 십 년 째 그 방법만 갖다 대 가며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정말 죄송합니다. 실장님. 큰 고객이고 중요한 거래 앞에 있는 건이니까, 미리미리 말씀 드리고 착실하게 준비하는 게 맞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그냥 사전 설명회로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기만 하는 자리라고 하기에, 저는 그냥 종전대로 하루 전에만 보고 드리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야, 그게 말이냐. 사전 설명회라서 미리 이야기를 안했다니. 이게 그냥 사전 설명회냐고. 얼마나 큰 주문이 걸려 있는 건데. 그게 그냥 다 같아?”


나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사실은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다 말을 끝내기 전에 또 욕을 얻어 먹은 것이지만. 그렇지만 이 내 대답에 이 짓거리의 절묘한 부분이 숨겨져 있었다.


사실 나는 정말로 실장이 “왜 화가 났는지” 정확히 안다. 그런데 내가 대답한 “큰 고객이고 중요한 거래이기 때문에 미리 말했어야 했다”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대도 나는 일부러 실장이 정말로 화난 이유와는 다른 이유를 답했던 것이다. 기이하게도 실장에게 욕먹는 이 시간을 빨리 끝내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실제로 실장이 화가 난 이유는 이렇다. 실장은 그 고객인 전자회사의 설명회에 가서, 전자회사의 기술 구매 입찰 담당인 상무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실장은 언젠가 지금 우리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그 전자회사로 옮겨 가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 그 전자회사에서 친한 사람인 상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몇 년 간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기회가 될 때 마다 밤거리에 서로 같이 술이 취해 비틀거리며 다니기를 수차례 반복해 왔다. 그러므로, 이번에 이 전자회사 설명회에 가는 것도, 실장에게는 상무와 같이 술 마실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루 전에 그 일정을 말해 줬는데, 마침 내일 공무원들을 만나 인사를 하는 다른 일정을 미리 잡아 놓았기에 전자회사 상무와 술 마실 기회를 놓치게 되어 아쉬워하는 것이다.


즉 실장이 화가 난 이유는, 내가 미리 알려 줬으면 자기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잘 보일 기회를 잡도록 일정을 맞출 수 있었는데, 일정이 겹쳐서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말하면, 실장은 분명히 더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애꿎은 큰 고객이니 중요한 거래니 하는 말 따위를 갖다 붙여서, “진짜로 실장이 화가 난 이유”가 아니라, “실장이 화가 난 이유라고 대외적으로 내세우고 싶은 이유”를 상상해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


실장은 나를 나가라고 하더니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한번 갑자기 머리 쪽으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 확 들면서,


“야 이 자식아 짜증은 내가 나지.”


라고 소리 지르고 또 다 엎어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그냥 꾹 참고, 그냥 나왔다. 이게 인내심인 것인지 비겁한 것인지 고민만 눅눅하니 이어질 뿐이었다.


자리로 돌아 오니 컴퓨터 화면으로 메시지가 들어 왔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그녀가 보낸 것이었다. 그녀에게도 실장이 소리 치는 것이 들렸던 것이다.

 

괜찮냐고. 빌어먹을, 회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지금 바깥으로 나가서 정처 없이 계속 걷고 싶어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자꾸 나아 가서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면 보는 놈들 마다 다 패버리고 싶은 기분이요. 라는 식으로도 그녀에게 대답할 수 있었겠으나, 나는 다른 대답을 했다.


“괜찮아요. 실장님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인가요, 뭐. 그냥 오늘은 귓속으로 들어 오는 바람이 좀 센가 보다 하죠.”


실장은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데, 내가 실장의 압제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실장의 지배를 받는 인간, 실장의 노비, 실장 보다 아래에 놓여 있는 인간, 실장 보다 하등한 자리에 있는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되니, 꼭 그 쓰레기 보다도 나는 사회에서 더 낮은 자리에 있는 그 쓰레기 이하의 위치에 있는 인간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는 “나는 실장 따위가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써요. 그 따위 쓰레기가 어찌 내 강하고 높은 마음에 흔들림을 줄 수 있겠어요?” 라는 식으로 굳세고 흔들림 없는 척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고 보니 그렇게 꾸미고 있는 것도 참 부끄럽게 느껴졌다. 중학교 때 보면 왜 세 보이고 싶어하는 껄렁한 애들 중에 교사가 불러 내서 뭐라고 꾸중하면 괜히 교사 보고 피식 웃으면서 비웃는 표정 지으며 반항하고 그러면 교사가 황당하고 열 받아서 소리지르면 자기가 교사 보다 대단하게 보이는 줄 알고 좋아하던 애들 있지 않은가. 이 나이에 그런 중학생이나 나는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부끄럽고 처량하기도 했다.


“실장 걔는 왜 말부터 그렇게 아주 야, 자, 너, 하면서 반말도 아주 싹 자른 반말로 할까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녀의 메시지가 다시 날아 왔다.


“부사장이나 사장한테는 친한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러나?”

“대리님, 기분도 거시기 한데 밑에 내려가서 요구르트나 하나 드시죠?”


오후에 잠깐 건물 1층의 커피 가게에서 차를 마시고 올 때가 있는데,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 그날 밤은 잠을 못 자기 때문에 항상 요구르트 음료를 마시곤 했다.


“O.K.”

“그럼, 잠깐만요. 제가 보고 적당할 때 먼저 일어나서 갈 테니까. 저 일어나면 따라 나오세요.”


그녀가 다시 회신해 주었다. 나는 놀랐다. 그녀가 먼저 제안해서 뭘 마시러 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녀와 둘이서만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그 만큼 그녀와 내가 이제 친밀한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 정도 친해진 것이라면, 적당할 때 평일에 집에 들어 가기 전에 저녁 같이 먹고 가자고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주말에 따로 만나서 밥 먹자고 하면 너무 진지하고 무게감 크게 느껴질 것 같으니까, 그냥 퇴근하면서 “요 앞에 쭈꾸미 잘 하는 집 있다던데 그거 우리 한 번 먹어 보고 갈까요?” 라고 한 번 자연스럽게 제안해 볼 수 있을까. 저는 당신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아니고 당신과 나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궁금한 것도 아니고, 그저 새로 생긴 쭈꾸미 집의 수준에 대해서만 궁금한 것이니까, 그 정도는 우리 같이 탐색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쭈꾸미 맛에 대해 탐색하다가 우리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탐색이 옮겨 가더라도 굳이 피하지는 않겠지만.


그녀가 일어나서 내 쪽을 보고 눈을 한번 맞춘 다음 다시 나갈 때까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 덕분에 실장에게 욕 먹으며 인생을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허무감에 빠지던 기분은 이미 머리 속에서 다 사라진 후였다.


요구르트 한 모금을 일단 먼저 마시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큰 거래예요?”

“큰 거래이기는 하죠. 그 전자회사가 이번에 처음으로 ‘5세대 인공지능’이라는 걸 넣은 전화를 내 놓는데, 정말 온 세상에 전화 갖고 있는 사람들한테 전부 다 한 대씩 팔 생각을 할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회사에 파는 부품이 들어 가는 것도 양도 많기는 많을 거에요.”

“우리 회사가 파는 건 쇠로 되어 있는 전화기 껍데기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돈이 많이 돼요?”

“요즘 전화기 같은데 쓰는 가볍고 튼튼하고 빛깔 좋은 쇠 껍데기 만들 수 있는 데가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이게 기술이 꽤 필요하다고요. 거기다가 색깔을 입혀서 달라고 할 건데, 이런 금속 재료에다가 색깔을 예쁘게 잘 입히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기술을 있는 회사가 어느 정도 돈을 받고 파니까.”

“저는 자동차나 헬리콥터 같은 큰 데 들어 가는 금속 재료만 주로 담당하다 보니까... 전화기 껍데기 같은 작은 것도 그렇게 돈이 되는지 몰랐네.”


나는 소리를 약간 높였다.


“뭐 또 그렇게 그렇지는 않아요. 그 말대로, 자동차, 헬리콥터 이런 데에 들어 가는 부품 파는 게 훨씬 거래가 크고 돈이 많이 나오는 게 맞아요. 지난 달에 자동차 회사 사전 설명회 들어갈 때에도 하루 전에 보고 하고 사전 설명회 들어 갔고, 그 때는 실장은 아무 말 없었거든요. 거래는 그게 열 배는 더 컸을 텐데. 말 그대로 사전 설명회니까. 사전 설명회 끝나고 실제로 견적서 내고 제품 설명하고 입찰하고 할 때가 중요한 거지. 사전 설명회는 그냥 사, 전, 그러니까 진짜 일 그 이전에 하는 설명회인건데.”


나는 뒤 이어서, 사실 실장이 오늘 날뛰며 화를 낸 것은 거래 규모와 중요한 일에 대해서 미리미리 알려주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고 그냥 실장이 사전 설명회 핑계 대고 전자 회사에 들어 가서 요즘 열심히 줄 대고 있는 상무와 술 마시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거 일정 못 잡게 돼서 짜증낸 것이라고 설명하려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또 설명 하자니 너무 구구해지는 것 같아서 말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할 말이 정해져 있는데, 말을 안하고 있자니 다른 말은 또 뭘 해야 할 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대화가 끊겼다. 실장과 이야기한 전자회사 사전 설명회 이야기만 열 띄게 하다가 그 말을 딱 멈추니, 그녀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말 없이 두리번 두리번 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눈이 마주치자 나는 또 괜히 어색해서 눈을 돌려 멍하니 바깥 거리나 보게 되었다.


이래서야 자연스럽게 저녁에 쭈꾸미 먹자고 할 만한 분위기는 아직 멀었다는 사실만 확실해질 뿐이었다.


“요즘은 날씨가 갑자기 서늘해지네. 며칠 전만 해도 더웠는데요.”


나는 결국 날씨 이야기나 하고 말았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때 별 할 말 없으면 날씨 이야기를 이렇게 했던 것이 도대체 인생에 몇 번이나 되었는지 잠깐 돌이켜 보았다. 백 번? 이 백 번?


“맞아요. 지난 주에는 분명히 더울 때도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나부터 속으로 지루해 하고 있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렇게 예의 바르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어, 더위 많이 타시나 봐요?” 라고 말을 꺼내서, 그녀의 체질이라든가, 더위나 여름에 얽혀 있는 추억에 관한 이야기로 말을 풀어 가 보려고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게 대학 시절 소개로 만난 여학생과 이야기할 때 이미 서너 번 반복했던 것과 똑같은 형식이라는 점이 기억이 났고, 그 결과도 딱히 별로 좋지 않았다는 점까지 기억이 나서, 더 말을 하는 것도 멈추었다.


어차피 갑자기 그녀와 엄청 뭐가 잘 될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확 하고 싶은 말이나 한 번 강하게 해볼까 싶었다. 예를 들자면,


“예쁘다는 이야기 옛날부터 많이 들었죠?”


같은 말이었다. 그녀가 놀라면서,


“예?”


라고 하고 그냥 웃으면서 잠깐 말을 멈추면, “그렇잖아요. 이렇게 그냥 봐도 예쁘긴 예쁜 편이잖아요.”라고 하고, 태평하게 어디가 어떻게 예쁜지 말하는 것이다. 그런 말이라면 한참 길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콧날이 오똑해서 사람이 되게 당당하고 귀족처럼 보이면서도, 눈매는 조금 쳐져 있어서 매섭고 날카로운 인상이 아니라 친절하고 순해 보이는 모습이고. 또, 그리고.


그렇지만 그렇게 말을 해서, 그녀에게 내 모든 생각을 털어 놓은 솔직함을 남길지, 아니면 사람 얼굴 보고 주절주절 평하는 말 늘어 놓는 느낌에 “개자식아, 너한테 좋은 그림 보여 준다고 날마다 내가 이 회사 출근하는 거 아니거든”라는 욕이나 먹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어떤 쪽이 그녀의 생각인지 실제로 물어 보지 않고 알 수는 없을까. 막연히 허망한 상상이나 했다.


그날은 저녁까지 평소에는 결코 만들지 않던 “고객 요구사항 예상 보고서”나 “특장점 강조 방안” 같은 자료들을 무수히 만들어 실장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무의미하게 보냈다. 자료 자체의 내용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실장은 화를 냈고, 실장이 화를 냈으니, 실장을 화를 내게 한 나는 그만한 고통을 겪어야만, 알 수 없는 신비의 균형을 찾게 된다는 식의 생각을 실장이 마음 속에 품고 있었으니, 나는 단지 실장에게 이만큼 나는 일하느라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부지런히 자료를 만들어 보여 주고, 욕을 먹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예정대로 실장은 관계 공무원들에게 자라탕을 사주기 위해 세종시로 내려 갔고, 그 때문에 나는 그녀와 함께 전자회사의 사전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전자회사가 있는 시내로 들어 갔다. 그녀는 내가 앉은 쪽 반대로 고개를 돌려 창 바깥을 보았고, 저마다 모습이 다른 빌딩들이 빽빽히 차례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듯 하자, 황급히 나도 반대쪽 창 바깥을 보고 있던 것처럼 고개를 돌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렇지만 처음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했을 때에는 사실 그녀는 그냥 빌딩의 위쪽을 올려다 보기 위해 머리를 조금 움직인 것이어서, 나는 쓸데 없이 고개를 돌린 것이 되었다.


게다가 재미 없게도 두번째로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에는 방심하고 그냥 계속 그녀를 쳐다 보고 있다가 시선을 재빨리 숨기지 못했고 이상하게 뒤늦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들키기만 했다. 나는 “너를 계속 쳐다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볼썽사납게 고개를 앞뒤좌우로 움직이며 목운동을 한 척을 했다.


그 목운동을 하고 있는 불쌍한 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제가 대리님 어제 만드신 자료 보니까, 이번 건은 색깔이 제일 중요할 것 같던데요?”

“예?”


나는 “뭘 보고 있었어요?” 같은 질문이나 혐오스러운 눈빛이나 난처한 기색을 나에게 내뿜지 않는 것에 일단 감사해 했다. 그리고 그 감사함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빠른 목소리와 열정적인 말투로 어제 만든 자료라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전자 제품 껍데기 쪽은 항상 그렇죠. 색깔을 어떻게 잘 낼 수 있느냐, 전자회사에서 자기 제품이 좋아 보이게 하려고 쓰고 싶다는 색깔을 어떻게 정확하게 우리 쇠로 만든 껍데기에 잘 입혀서 보여 줄 수 있느냐 거기서 다 품질 차이가 나오는 거니까요.”

“쉬울까요? 지난번에 제가 자동차 회사에 들어 갔을 때는 옛날 인쇄할 때 쓰던 CMYK 색상 코드 불러주면서 그거 대로 색깔 입혀서 부품 만들어 오라고 하던데, 그렇게 갖다 주니까 아무래도 그대로 색깔 맞추는데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요. 인쇄용으로 쉽게 색깔 만드는 거 하고, 우리처럼 금속판에 색깔 입히는 거 하고 다르니까.”

“거기다가 금속은 금속 자체의 질감하고 광택이 있으니까 CMYK 코드만 아는 걸로는 딱 그 색감을 맞추기가 어렵죠.”

“맞아요. 광택. 어휴, 그 놈의 광택 때문에 지난번에 엄청 고생했어요.”

“광택도 좀 알아서 생각해 주고, SWOP 코드로 색깔을 알려 주면 그래도 좋은데.”

“거기 전자회사에서는 누가 나와서 사전 설명회를 해요? 그런 거 좀 아는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거에요?”

“수석 디자이너가 직접 나와서 한다니까, 그래도 아주 모르는 사람이 하는 건 아닐텐데.”

“수석 디자이너요? 그 사람 TV 광고에도 막 나오는 그 사람?”

“예, 맞아요.”


미국 회사나 일본 회사 제품에 비해 성능은 크게 떨어지지 않는데, 디자인이 어쩐지 싸구려스럽다는 것이 오늘 찾아가는 전자 회사가 벌써 몇십년 째 듣고 있던 평이었다. 그러던 회사가 이번에 전 세계의 모든 전화 쓰는 사람에게 한 대씩 팔아 치우겠다고 준비한 “5세대 인공지능” 기계를 팔면서는 디자인도 세계 최고의 모습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대대적으로 주위에 선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 디자인 쪽이 트이나 보다 싶어, 혹시 월급이나 성과급이라도 몇 푼 더 오르지 않을까 이 회사 디자인 쪽 직원들은 한 몇 달 기대감에 부풀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이 회사의 제품 개발 담당 전무라는 사람 세 사람은 “실제로 얼마나 디자인이 좋아지는가” 보다는 “회장님께 얼마나 디자인이 좋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까”에 더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디자인 부서에 월급을 올려 주기는 커녕, 일 잘하던 팀장 한 사람을 내 보내고 얼굴이 잘 알려지고 특이한 머리 모양으로 신기하게 보였던 미국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던 한국인 디자이너를 “수석 디자이너”라며 디자인 부서로 데려왔던 것이다.


이 수석 디자이너라는 사람은 TV와 잡지에 “창의적인 세계의 한국인”으로 나온 사람이었는데, 웃긴 소리 잘했고 무엇보다 그 특이한 머리 모양으로 여러 사람이 기억했다. 광고에도 나오고 무슨 잡스러운 지방 자치 단체 축제 - 열린 미래 문화 전통 웰빙 어쩌고 축제 한마당 - 같은데도 나오게 되었는데, 이 전자회사는 이 대단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모셔 왔으니, 이제 우리 회사 제품도 디자인이 좋다고 또 광고를 찍어다가 내 보냈던 것이다.


“이상하네요.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래도 들어보니까 나름대로는 양심적인 사람들이에요. 그 예전 디자인 팀장도 그냥 확 잘라 버린 건 아니고, 그래도 회사 계속 다닐 수 있게 회사 사보 만드는 쪽에 자리는 하나 마련해 줬나 보더라고요. 그 중역이라는 사람들도 어쩔 수 있겠어요? 소비자 취향 맞추는 것 보다는 회장님께 말하기 좋은 데로 맞춰야지.


소비자 취향 못 맞춰서 제품이 못팔리면 그래도 핑계를 댈 수가 있잖아요. 디자인은 괜찮았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든가,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물건이 안 팔렸다든가, 경쟁사 제품이 너무 좋았다든가. 그런데 회장님이 ‘이렇게 해서 무슨 새로운 디자인이 나오겠어?’이러면서 인상 한 번 팍쓰면 회장님 심기 못 읽는 무능한 중역으로 찍히는 거 거잖아요. 그러다 확 짤리면 어떡해. 그 중역이라는 양반들 다 연봉으로 몇십억 이상씩 받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 그렇게 돈 버는 만큼 또 다 그만큼 돈 들어갈 일들을 벌여 놓은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여기서 잘리면 어디 가서 또 돈 그만큼 더 주는 자리를 갑자기 찾겠어요? 그러니까 돈 많이 받는 높은 사람들 중에도 잘릴까봐 무서워하는 사람 또 많아요.”

“그래도 좀 이상한 거 같애.”


그녀는 다시 창 바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말했다.


“하여튼 형광색 이런 쪽만 아니면 좋겠다. 우리 회사가 형광색 쪽 계통 입히는 기술은 좀 떨어지더라고요.”

“제가 걱정하는 건 뭐냐면, 이 수석 디자이너라는 사람이 웹 쪽에서 디자인하던 사람이라서 색깔을 RGB 코드로 알려주면 어쩌나, 그거에요. 컴퓨터 화면에서 RGB로 색상 보는 거랑, 이런 금속에 색상 입혀서 눈으로 보는 거랑 보기에 따라서는 많이 다르거든요.”

“RGB 코드만 해도 낫죠. 지난 번에 헬리콥터 회사 갔을 때는, 거기 사람이 무슨 꽃잎 말린 걸 들고 와서는 그걸 우리한테 보여 주더라고요. 그리고 그 색깔 대로 그대로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있어요.”


전자 회사 건물에 가까이 갈 수록 점점 더 머리 아프고 복잡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쓸데 없이 눈치 잘못 봐서 욕먹을까 고민하며 사무실에서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느니 보다야, 골치 아픈 일거리라도 하나 들고 그녀와 같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훨씬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전자 회사에서 TV 광고에서만 보던 그 수석 디자이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약간 실망 했다. 애석하게도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그 독특한 머리 모양을 없애고, 어느 회사의 어느 중역들이나 하는 조용하고 지루한 머리 모양으로 바꾼 상태였던 것이다. 누가 강제로 그렇게 시켰는지, 아니면 그 스스로 회장님을 만난 뒤에 뭔가를 눈치채고 자진해서 머리 모양을 바꾼 것인지, 나 혼자 상상해봐야 영영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바글바글 들어선 도심의 많은 빌딩들을 멀찍이서 휑하니 내려다 보는 높고 전망 좋은 곳에 그 회사의 회의실이 있었다. 그 훌륭한 전망만으로도 “이 회사는 대단한 회사구나” 싶게 만드는 위세가 있었다. 그보다 훨씬 못한 전망에서 일을 하는 우리 같은 작은 회사 사람들은 괜히 “여기는 어마어마한 회사니까 우리 같은 작은 회사는 하여튼 잘 모시고 잘 보여야 할 거야” 라는 식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쉽지 싶었다.


회의실 안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다른 회사의 사람들도 있었다. 늙은 영감님들 둘이서 와서 회사 입구에서 나눠주는 출입증을 다소곳이 목에 걸고 앉아 있는 독일 회사 사람들이 있었고, 젊은 여자 둘이 와서 컴퓨터를 열고 뭔가 열심히 타이핑 하고 있는 미국 회사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회사에서도 두 사람이 와 있었는데, 중년 남자 한 명과 그 남자의 통역을 도와 주는 훨씬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아마도 남자는 도쿄 본사에서 온 사람이고 여자는 서울의 지사에서 온 사람인 듯 하였다.


모두가 다 모였다는 것을 확인한 전자 회사의 수석 디자이너는,


“다들 시간 보다 조금씩이라도 일찍 오셨네요.”


라고 말하면서 명함을 건네고 웃었다. 수석 디자이너라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소리를 내며 웃어 댔는데, 그 헤프게 쏟아지는 웃음에는 어쩔 수 없는 부자연스러움이 있었다. 불안한 점이 있는 사람이 애써서 그것을 이겨 보려고 하는 기색이 있는가 싶기도 했지만, 너무 빤히 쳐다 보다가 혹 안 좋은 인상을 남길까 싶어 더 이상 수석 디자이너를 관찰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그러면 사전 설명회 설명 시작하겠습니다.”


수석 디자이너는 그렇게 말을 하고 화면을 켜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기계는 기계였습니다. 기계라는 것은 자연, 네이처와 반대되는 거죠. 그러니까 기계의 도움을 얻으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얻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 저희 제품은 기계지만 자연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수석 디자이너는 이번에 새로 내놓는 전자회사의 제품에 대해 누구나 다 몇 번씩은 들었던 이야기를 또 하기 시작했다. 이 전화에는 5세대 인공지능이 구현되어 있어서, 그냥 전화를 들고 대충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그냥 자연스럽게 지시 하기만해도, 그 말뜻을 자연스럽게 추측해서 진짜 사람처럼 알아 듣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뭐 재밌는 게임 같은 거 좀 다운 해 보자.”

“이게 인기 순위에서는 제일 높은 건데, 주인님 취향에는 이런 게 더 맞겠죠.”

“괜찮기는 한데, 시간 제한 없이 할 수 있는 게임 없어?”


이런 식으로 말하면, 굳이 게임 마다 시간 제한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가 데이터베이스로 미리 마련되어 있지 않아도, 인공지능이 하나하나 자기가 직접 이 사이트 저 사이트 검색해 가면서 그 게임이 시간 제한이 있는 방식인지 없는 방식인지 알아 보고 알려 준다고 했다.


수석 디자이너는 이 5세대 인공지능은 우리의 눈치를 보고, 우리의 말뜻을 끊임 없이 예상하고 추측한다고 설명했다.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저희가 디자인에도 세계 제일이라는 방향으로 새로 출발하는 거 거든요.


그래서 저희 외관, 외장 부분도 완전히 새롭게 개선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중국계 회사에서 만든 플라스틱 외장으로 저희가 제품을 만들어 왔는데요, 이번 제품은 새로 금속으로 겉을 꾸미려고 합니다. 그래서 미래적인 느낌, 마치 미래에서 온 제품을 쓰는 느낌을 소비자들에게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제일 어울리는 외장 부품, 외장 재질 샘플을 저희에게 보여 주실 수 있는 회사와 저희가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겁니다.”


수석 디자이너는 외관 설계도를 보여 주었다. 색상이 뭘까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보여주는 모습은 색상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선으로만 되어 있는 설계도였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외관에서 저희 제품의 이번 방향인 자연스러움, 네이처, 이런 느낌을 살리려고 하는 거죠.”


수석 디자이너는 그리고 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껍데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음 슬라이드를 보여 주니, 거기에는 껍데기의 무게, 두께 같은 규격이 나와 있었다. 슬라이드를 넘겨 가면서, 수석 디자이너는 껍데기의 강도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도 이야기 했고, 중금속이 없는 안전한 재질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도 설명을 했다.


그녀의 눈을 쳐다 보았더니, 그녀도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저 정도 무게, 저 정도 강도의 부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회사 기술로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눈동자를 조금 움직이고 얼굴을 약간 기울이는 것만으로 나는 그녀에게 묻고 그녀는 대답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수석 디자이너가 껍데기의 색깔을 설명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제발 형광색만 아니기를 빌었다. 다른 회사에서 온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 회사에서 잘못 만드는 순백색은 아니기를, 복잡한 색깔은 아니기를, 너무 단순한 색깔이 아니기를, 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수석 디자이너가 색깔에 대해 보여주는 슬라이드에는 아무 색깔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 숫자나 코드도 없었다. 수석 디자이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제품 외관에서 색깔이 가장 중요한데요. 저희 제품의 자연적인 감성을 살려서, 색깔을 택하려고 합니다. 좋은 색깔을 주실 수만 있으면 사실 이번에는 가격은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저희가 원하는 색상을 딱 맞춰서 주시면 가격은 저희가 높게 쳐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수석 디자이너가 RGB코드로 색깔을 이야기할 지, 혹시 옛날 식으로 컬러 인덱스 번호를 말할 지, 조마조마했다.


”저희가 필요한 색깔은 그러니까…”


그런데 수석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저 지리산 깊은 계속에서 흐르는 맑은 물. 그 맑은 물 색깔 있지 않습니까.”


그게 수석 디자이너가 말하는 껍데기의 색상이었다.


수석 디자이너가 말을 마치자, 거기에 모인 금속 껍데기 만드는 회사 사람들은 그야 말로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어떤 코드로 색상에 대해 이야기할 지, 혹시 애매하게 아무 색깔이나 짚으며 그 비슷한 색깔로 만들어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걱정하고 있는데 이 양반은 우리 모두의 예상을 미안한 마음도 없이 아주 산산히 다 깨어 버리고 그저 “지리산 깊은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색깔”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한 것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도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없었다. 나는 독일어나 일본어는 한 마디도 몰랐지만 독일 회사에서 온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일본 회사에 온 사람들의 멍한 눈빛은 저마다 모두 “어리벙벙”이라는 단어를 공기 속에 확실히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회사에서 온 사람들이, “그 맑은 물 색깔이라고 말하셨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광택은 있다는 뜻이겠죠?”라면서 질문을 주고 받으며 색깔을 구체적으로 좁혀 보려고 시도하려고도 했으나, 수석 디자이너의 더 이상 뭘 기대하느냐는 오묘한 웃는 표정에 그저 말문이 막혀 모든 걸 포기하고 멈출 뿐이었다.


사전 회의가 끝나고 내려 오는 길, 엘리베이터에서 그녀가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진짜 황당하네요. 자기 말로 ‘지리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 색깔’이라고 하면 도대체 누가 안다고.”


나는 그때까지도 어리벙벙함이 가시지 않아서 멍하니 있다가, 그녀가 귓속말을 하면서 숨길이 닿는 것에 겨우 정신이 번쩍 돌아 왔다.


빌딩 바깥으로 나오니, 우리 뿐만 아니라 독일 회사, 일본 회사, 미국 회사 사람들도 서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독일 회사 사람들은 본사에 전화해서 뭘 좀 물어 보는 것 같더니, 전화를 켜서 지도를 좀 찾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자기들끼리 “남원”이니 “구례”니 하는 한국 지명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여기서 고속 버스 터미널 가는 방법을 물어 보는 것이었다.


독일 회사 사람들은 이 길로 진짜 지리산에 내려 가서, 지리산의 맑은 물 색깔을 보고 오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아마도 “지리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들 여럿을 다양한 조명과 다양한 방향, 다양한 노출로 촬영을 해서 그 사진을 본사로 보낼 계획인 듯 하였다. 그러면 본사에서는 그 물 색깔들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따져서 그 색깔대로 제품에 색을 입혀서 선보이려는 계획이었다.


“우리도 지리산에 지금 빨리 가봐야 되나.”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나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시 회사로 돌아 가면서 생각해 봐도 그럼 뭘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물 색깔 하면 보통 파랑색 많이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면 그냥 파랑색 중에서 적당한 걸 골라서 입히면 될까. 그런데 바닷물이나 강물이 그런 파란색 물 색깔에 가깝지 보통 계곡물을 생각할 때는 그걸 생각하지 않는데. 굳이 “지리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라고 한 걸 보면 그걸 말한 것은 아니지 싶었다.


“진짜 맑은 물은 무슨 색이죠?”

“맑은 물이면 투명하죠.”


그녀의 대답대로 그러면 그냥 투명하게 만들어야 하나. 금속으로 만드는 껍데기를 투명하게 만들 수도 없겠지만 그렇게 만든다고 해 봐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 껍데기를 씌우려고 “지리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 색깔이라고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냥 투명으로 해 달라고 했을 거고, 애초에 우리 같은 금속 재료로 만드는 회사들을 부르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면 무슨 뜻일까. 파란색 계통의 호수나 강물 같은 색깔을 입히되 맑은 느낌이 들도록 반짝거리게 처리를 하면 될까. 생각만 계속 늘어날 뿐 알 수가 없었다.


회사에 돌아 와서 실장에게 말을 하면 실장이 또 얼마나 짜증을 낼 지 걱정하고 있는데, 의외로 또 무슨 리듬을 탔는지 실장은 실실거리고 웃으면서 이 직원 저 직원에게 쓸데 없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실장은 가끔씩 “여유롭게 농담을 건내며 웃음으로 가득한 무리를 이끄는 것이 멋있어 보이는 대장”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별 값어치도 없는 싸디 싼 농담으로 웃음을 흘리면서 난데 없이 여유로운 척 할 때가 있었다.


참 묘하기도 한 것이, 사소한 일에 신경질을 부리면서 소리를 질러 대는 그런 성격의 인간이 차라리 항상 걸레 같은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으면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저렇게 가끔 무슨 즐겁고 유쾌한 사람인 척 할 때면 도리어 훨씬 더 밉게 보였다. 이건 저런 양반이랑 같이 지내다 보니 내가 성격이 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녀에게 “실장님 저러면 더 싫지 않아요?”라고 한 번 물어 보고도 싶었는데, 그녀와는 나쁜 이야기는 최대한 하지 말자 싶어 묻는 것은 멈추었다.


실장에게 사전 설명회에 가서 들어 보니, 이러 저러한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했고, 독일 회사, 미국 회사, 일본 회사가 왔더라고 이야기를 하며 설명을 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큰 건이네. 공을 좀 많이 들이고 돈을 많이 들여서라도 이번 주문은 꼭 따야겠다.”


실장이 말했다. 나는 그런데 색깔이 문제라면서, 이 사람들이 막연하게 그저 “지리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 색깔”을 입혀 달라고만 했다고 설명을 했다. 실장의 히죽거리는 행동에는 전혀 동조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말을 내 입으로 다시 전하자니 어쩔 수 없이 어이 없는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 색깔을 어떻게 만들죠?”


내가 그렇게 만들자, 웃음이 많고 여유로운 사람 행세를 표현하고 있던 실장은 하하하 하고 소리까지 내며 웃으면서 무려 이렇게 대답했다.


“잘-.”


그 말을 듣자 나는, 너 도대체 뭐야 라고 말하면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아니 무슨 그런 농담을 하나. “도대체 어떻게 하지?”라고 누가 궁금해 하면 “잘 하면 되지”라는 뜻으로 그저 “잘”이라고 대답한다는 그 농담은 이미 20세기에 유행이 다 지났고, 그게 유행이 지난 철지난 것이라고 욕하던 것 조차도 2000년대 초반에 다 지난 것 아닌가. 이런 허무한 맛을 주는 농담은 너무나 허무한 대답이라 예상을 못하고 의표를 찌르는 것이 재미인 법인데, 지금에 와서 “잘”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표를 찌르는 것도 없고 허무한 것도 없고, 그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신물나게 진부한 인간인지를 나타내는 역할 밖에 못하는 농담 아닌가. 아니 순한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아직 하고 다니면 순박해 보이기라도 하지.


“우리 저력이 있잖아. 잘 하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을 하면서 실장은 우리를 격려해 주는 멋진 상사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즐거워 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나와 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답답해 하는 상황에서 실장 자신은 걱정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은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더 강한 사람임을 과시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였다.


실장은 잠깐 자기 수첩에서 무엇인가를 뒤적거리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 잘 지내셨어요? 저에요. 잘 나가기는 뭘. 이번 껀이 잘 풀려야 잘 나가게 되는 거지.”


실장은 그리고 큰 목소리로, 그러니까 마치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감히 ‘일에 방해 되니까 좀 조용히 통화하라’고 나한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라고 호탕하게 선언이라도 하듯이 아주 큰 목소리로 낄낄거리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자리로 돌아 오니, 그녀가 또 컴퓨터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건이 크긴 큰가 봐요. 이번 건 성사되면 실장님은 바로 승진하셔서 미국 지사장으로 가시게 된다는 거 같아요.”

“정말요? 그럼 우리 꼭 성공시켜서 제발 저 분 좀 멀리 멀리 보내 드립시다.”


실장이 난데 없이 싱글벙글하며 여유 있는 사람인 척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싶었다.


실장은 미국에 있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야 말로, 격이 다른 부유층의 흉내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지사로 가서 아이들을 미국 학교에 보낼 기회를 별별 수를 부려 가며 간절히 찾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 건이 잘 풀리기만 하면 다른 자리도 아닌 지사장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수를 생각해 냈는지, 바로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고 자신도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열렸다고 기대하며 좋아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실장이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바로 그 다음 날 알 수 있었다. 다음 날이 되니 실장은 자리에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이 되어서야 부사장이 나를 불렀다.


“이번에 그 전자회사에 전화기 껍데기 공급하는 껀, 어떻게 잘 되어 가고 있어?”

“대체로 다 그 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충분히 맞출 수 있고 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색상이 문제 입니다. 색상에서 결판이 나지 않겠나 합니다.”


부사장은 전자 회사 쪽 거래 이야기를 이리저리 물어 보았다. 부사장은 말 없이 잠깐 생각을 하더니,


“이번 건이 생각 보다 훨씬 크고 또 우리 회사에 굉장히 중요해. 다른 거 다 젖혀 놓고 이것만 하라고. 나도 이건 직접 좀 챙길테니까. 그 쪽에서 필요한 대로 개발해 보여 줄 수만 있으면, 돈은 10억을 쓰든 20억을 쓰든 상관이 없어. 그러니까 그런 쪽에는 부담 같지 말고 어떻게든 그쪽에서 좋아할 결과만 내라고.”


라고 느릿느릿 말했다.


그리고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이제 서야 한다는 양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부사장이 말했다.


“실장, 오늘 회사에 안나왔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부사장은 말을 이었다.


“실장 이 사람이 자기 아는 무슨 임원이 그쪽 전자회사에 있다고, 거기에 돈을 먹여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나봐. 걔도 이게 얼마나 큰 건인 줄 알고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회사에서 연구비라고 한 5억원 쯤 집어 다가 이리저리 적당히 돌려서, 그쪽 회사에 힘 좀 쓸 수 있는 임원한테 그 돈을 줄테니까 이번 부품은 우리 회사에서 공급하게 해달라 그런 식으로 부탁을 하려고 했데.


그런데 그러면 큰일 나거든. 실장 걔가 실수한 게, 거기 회장님이 지난 번에 대통령 후보 누구하고 뇌물죄로 엮여 가지고 빵살이를 하네 마네 하고 한 번 난리가 났잖아. 그래서 거기 회사들이 아주 뇌물이라면 그 비슷한 것도 절대 끊어 내려고 그런 쪽으로는 아주 무섭게 한다고. 그걸 모르고 돈 챙겨 주겠다고 할려고 했으니.


다행히 그쪽으로 말 들어가기 전에 우리 쪽 재무 부서에서 먼저 알아서 잡아 냈기에 망정이지, 정말 걔가 돈 줬으면 걔 하나 잘리고 말고 하는 게 아니고, 신고하고 구속 수사 들어 오고 감옥 가는 사람도 생기고 난리 한 번 크게 날 뻔 했어.”

“그러면 실장님은 이제 회사에서 나가게 되신 건가요?”


나는 기뻐하는 기색을 최대한 감추고, 그렇다고 슬퍼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것처럼 역겹게 굴기는 싫어서 그러지는 않기로 노력하면서, 조심조심 물어 보았다. 부사장이 대답했다.


“그렇게 될만도 하지. 일단은 좀 조용해질 때까지 휴가 내고 회사 사람들 연락 안 닿는데 숨어서 좀 박혀 있으라고 했어.”


부사장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하여간 이 정도로 목숨 거는 사람들도 있는 일이니까, 그 정도 중요한 걸로 알고 한번 정말 잘 해보라고.”

“예.”

“내가 소문에 들으니까 말이야, 미국 회사 쪽 사람들은 그 ‘지리산 깊은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색깔이라는 그 이미지를 잡아 내려고, 이쪽 검색 엔진 회사 사람들이랑 언어 연구하는 교수들하고 손을 잡았다는 거야.


그래서 걔네 들은 어떻게 하냐면, ‘지리산 계곡 맑은 물’로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 사진, 영상 이런 걸 다 잡아 내서 분석을 한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한국어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리산 계곡 맑은 물’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많이 나오는 지 통계를 내서 잡아내서 그 색깔을 따온데.”


나는 실장이 영영 회사를 떠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그러면 도대체 이 색깔은 어떻게 알아 내면 좋겠는가 하는 걱정이 괴상하게 뒤섞여,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개떡처럼 버무려진 기분으로 부사장의 방을 나왔다.


일단 나는 그녀와 함께 회의실에서 자리를 잡고 이것 저것 우리 자료들을 살펴 보았다. 우리는 우리 회사의 색상 입히는 기술에 관한 자료들을 다 펼쳐 놓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서 문제의 색깔을 정할 지를 고민했다.


“우리도 미국 사람들처럼 검색 엔진 회사나 언어 연구하는 교수들하고 한 번 같이 작업해 볼까요? 예산은 10억이든 20억이든 써도 된다고 이미 이야기가 내려 왔고. 그렇게 언어 기술로 하면, 우리가 미숙한 점은 있어도 그리고 우리 회사는 다 한국 사람이고 한국 회사인데 그래도 한국어로 작업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 유리한 점도 있지 않겠어요?”

“그게 독일 회사처럼 직접 지리산에 내려가서 물 사진 찍어 오는 것 보다는 나은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식으로 자료 통계 분석해서 고객이 원하는 거 찾는 방식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잖아요.”

“그건 좀 그렇네요.”

“그렇죠. 우리가 무슨 이론을 알아, 아니면 경험이 있어? 그 미국회사 사람들은 평소에 그런 식으로 많이 하니까 그런 방법을 쓰면 결론을 자기 나름대로는 잘 얻겠지만, 우리가 지금 걔네들하고 똑같이 해서 걔네들 보다 잘하기는 어렵다고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그 동안 쌓아 놓은 자료들을 보면서 그날 오후 내내 같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좋은 결론은 나지 않았다. 중간에 갑자기 지리산 여행한 이야기로 잡담으로 말이 새면서 괜히 한 한 시간 잡담만 길게 하다가, “회사에서 이러면서 시간 때우면 안되겠지”하는 죄책감을 거의 동시에 느끼고 그만 둔 일은 있었다. 나로서는 그 정도가 그날 오후의 수확이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캐 봤지만 딱히 확실하게 색깔을 결정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이 ‘지리산 깊은 계곡 속에 흐르는 맑은 물 색깔’이라는 것은 어쨌거나 그 수석 디자이너 그 사람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거잖아요. 그 사람 다시 찾아 가서 계속 물어 보고 대화를 많이 해보고 이리저리 캐 보고 하다 보면 어떻게든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 사람 머릿속에 있는 건 맞는데, 그 사람이 우리가 찾아 가서 우리한테만 뭐 더 알려 달라고 조르고 그런다고 우리를 만나 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괜히 그러다가 역효과만 생겨서, ‘쟤네들은 이상하게 수 쓰는 얍삽한 애들이더라’이런 식으로 보여서, 우리 회사 물건 안 골라 주면 어떡해?”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게 들렸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야, 그 수석 디자이너 머릿속에 있는 것을 캐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냥 그 회사 사무실 근처에서 숨어 있다가 그 수석 디자이너 왔다 갔다 할 때, 우연히 만난 척 하고 괜히 인사하고 말 걸고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동태도 좀 보고 하면 어때요. 그만해도 그냥 여기서 답도 안나오는 문제 붙잡고 이러고 있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일단은 지금은 더 이상 뭐 할 것도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그 전자 회사로 갔고, 수석 디자이너가 나오기만을 하염 없이 기다렸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끝없이 잡담을 하며 같이 계속 차 안에 앉아서 건물 입구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는 그 일본 회사에서 온 사람들과 그 동료 직원들, 그 사람들이 고용한 다른 사람들이 그 주변에 많이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사람들 여기에서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한 번 보고 올게요.”


내가 차 밖으로 나와서 짐짓 이 일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 척 옆을 지나면서 일본 회사 사람들이 뭘 하는 지를 보았다.


그 사람들은 설문조사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수석 디자이너도 이제 이 회사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되었고, 그러니까 정말 이 회사 사람들이 “지리산 깊은 계속을 흐르는 맑은 물 색깔”하면 뭘 떠오르는 지를 조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련한 색상표를 보여 주면서, 그 중에 “지리산 맑은 물 색깔” 하면 떠오르는 색깔에 가장 가까운 것을 골라 보라고 하고 있었다. 하나를 고르면 선물로 근처에서 먹을 수 있는 햄버거 식권이나 커피 교환권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면 다들 먹을 거 얻어 먹으려고 하나씩 색깔을 골라 주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햄버거와 커피를 들고 다시 그녀 옆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에게 저 일본 사람들은 색깔을 찾기 위해서 설문 조사를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대리님도 설문 조사 하신 거에요?”


그녀는 내가 가져온 햄버거와 커피를 보고 물었다.


“예. 근데 나는 걔네들 헷갈리게 하려고 일부러 제일 맑은 물 색깔 아닌 거 같은 색깔 골랐어.”


그 말에 그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그녀는 웃는 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일부러 그때 마다 소리를 줄이려고 애를 쓰는 버릇이 있었는데, 오늘 따라 그게 바로 그녀의 어떤 특징적인 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유난히 들었다.


저녁 무렵까지 기다린 끝에 지난 밤을 홀딱 세우며 일을 한 수석 디자이너가 이틀 만에 퇴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수석 디자이너 옆으로 가기도 전에 분명히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음직한 일본 회사 사람들이 수석 디자이너 곁으로 다가가 붙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수석 디자이너의 행색에서 무슨 취향에 관한 정보라도 얻어 보겠다고 그 모습을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으로 촬영해 녹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벌써 그런 일본 회사 사람들을 만난 것이 여러 번인지, 수석 디자이너는 그저 진절머리를 내며 빠르게 움직여 피해 도망칠 뿐이었다. 뒤늦게 우리가 따라 붙는다고 해 봐야, 아무 정보도 더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 가기로 했다. 그런데 돌아 가면서, 우리는 그 동네 지하철 역과 버스 정류장 근처 곳곳에 붙은 성형외과 광고를 보았다. 그런데 그걸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얼핏 꺼내 보았는데,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것 같았다.


“이거 될 거 같은데요?”

“너무 꿈 같은 이야기 아닌가?”

“한번 차근차근히 파 보자고요.”


그날 그렇게 헤어지면서, 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같은 내용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아침 만나자 마자, 우리 제품을 무슨 색깔로 할 지 그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그리하여 나중의 결과부터 이야기 하자면, 우리의 수법은 정말로 먹혔다.


우리는 독일 회사, 미국 회사, 일본 회사를 모두 따돌리고 그 전자 회사와 계약을 하는 데 성공했다. 전자 회사가 사람의 마음을 인공지능으로 추측하겠다며 전 세계에 몽땅 뿌려 버린다는 그 어마어마한 양의 전화기들은 모두 우리 회사가 만든 “지리산 깊은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색깔의 금속 껍데기를 씌운 채로 판매되게 된 것이다.


계약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날 저녁에 전화로 전해 듣고 다음날 아침 출근해 보니, 나와 그녀를 사장이 직접 사장실로 불렀다. 사장이 축하하는 말을 듣고 나오자, 나와 그녀가 사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 가는 길 마다 회사의 다른 직원들이 둘러 서서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다. 다들 “대단하십니다” “축하합니다” “멋져요” 같은 말을 하며 기뻐했다. 우리 둘은 같이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하며 그 무리들을 지나 자리로 걸어 갔다.


그런데 내 자리로 돌아 가면서 보니 실장이 실장 방에 돌아 와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서 나는,


“당신이 왜 여기에 계세요?”


라고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실장이 나와 그녀를 먼저 자기 방으로 불렀다.


“진짜 고맙다. 니들 때문에 내가 살았어. 원래는 이번 건 성공하면 승진해서 미국 지사장으로 가기로 했었는데, 징계를 받았으니까 승진은 없던 걸로 하고 그냥 여기에서 그대로 일하는 걸로 결정 났어. 그래도 천만 다행이지. 니들이 계약 못 따왔으면 나 그냥 잘렸을 거야.”


그러니까, 일이 아주 잘 되었어도 실장은 우리 곁을 떠났을 것이고, 일이 아주 안 되었어도 실장은 우리 곁을 떠났을 것인데, 실장이 사고를 친 것과 우리가 계약을 따낸 것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덕택에 실장은 아직도 들러 붙은 저주처럼 우리의 상사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다는 이야기였다. 실장은 우리의 표정이 “이 기쁜 소식”에도 예상 보다 밝아지지 않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깐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희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미국 회사 수법 따라한거야? 아니면 일본 회사 애들처럼 한거야? 보고 좀 해봐.”


실장의 질문을 듣고 나는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나를 쳐다 본 후, 실장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독일 회사 사람들은 정말로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보려고 한거고, 미국 회사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지 알아 보려고 한거고, 일본 회사 사람들은 그 수석 디자이너라는 그 사람이 그걸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지 추측하려고 한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아예 반대 방향으로 갔어요.”

“어떻게 했는데? 쓸데 없는 이야기 다 빼고, 요점만 이야기 해봐. 항상 내가 말하잖아. 다 아는 이야기 할 필요 없는 이야기 빼고 요점만, 결론부터 이야기 하라고.”


실장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말하는 것을 바로 딱 멈추었다. 나는 오늘 따라 우리 기분이 괴상하게 들뜬 상태에서 이거 잘못하면 그녀가 실장을 때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뒤 이어서 말을 했다.


“우리는 색깔은 그냥 우리 마음대로 정했어요. 우리 회사에서 싼 값에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물 느낌 주는 색깔 그냥 우리가 정해 버렸다고요. 대신에 수석 디자이너가 왔다갔다하는 길에다가 광고지 붙이고, 포스터 걸고, 전단지 나눠주고 그런 걸 했어요. 방송국에서 광고 시간 사서, 수석 디자이너가 보는 TV프로그램 시간에 광고도 내고요.


그렇게 해서 거기다가 지리산, 깊은 계곡 물 그런 걸 계속 보여 주는데, 그때마다 그  색깔이 우리 회사 제품 색깔로 보이게 한 거예요. 한 며칠 계속 그렇게 수석 디자이너가 고개만 돌리면 거기에 맑은 계곡 물 흐르는 장면이 보이는데 색깔은 우리 회사 제품이 보이게 한 거죠. 특히 입찰 붙는 그 날 그 바로 근처에 집중적으로 그걸 많이 보게 하려고 했습니다. 수석 디자이너 머릿속에 바로 이게 계곡 맑은 물 색깔이라고 주입을 한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수석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색깔’을 읽어 내려고 한 게 아니라, 그 수석 디자이너가 우리 색깔을 생각해 버리도록 그 사람 생각을 살살 바꿔 버린 겁니다.”


우리 설명을 듣자 실장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우리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고맙다고 연거푸 말했다. 나는 그 손 좀 내 손에 닿게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그냥 엉거주춤 빨리 그 방을 나오기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을 보자니, 저 얼굴이 도대체 몇 시간, 며칠이 지나면 또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듯이 소리를 지르며 짜증 난다고 날뛸 지 쓸쓸하게도 궁금했다.


실장은 사장이 뭐라고 했는지 물었다. 자기 이야기는 안 했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다른 이야기는 아무 말씀 안하시고요. 수고했다고. 이제 수고했을텐데 오늘은 그냥 점심 때 되면 퇴근해서 주말까지 계속 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니들이 수고는 했지. 그래 내 눈치 보지 말고 일찍 퇴근해서 쉬어.”


이미 사장이 이야기한 일을 갖고, 왜 우리가 실장의 눈치를 보겠냐 만은, 실장은 굳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한 마디 말을 덧붙이면서, 우리는 항상 실장의 눈치를 보고 그의 기분을 읽으려 애를 태우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한번 자기가 되새기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냥 멍청한 말 버릇이었는지.


우리는 또다시 정리가 되지 않는 심정으로 가방을 챙겨 같이 회사 밖으로 나섰다. 회사 건물 바깥으로 나가는 유리 문을 열자, 눈부신 낮 햇살과 맑고 시원한 가을 바람이 가득 밀려 왔다.


정말 지금 집에 가면 되나, 일찍 집에 가면 뭐하지.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요 앞에 쭈꾸미 잘 하는 집 있다던데 그거 우리 한 번 먹어 보고 갈까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을 그대로 계속 쳐다 보았다. 그렇게 보니 그녀의 눈은 놀란 것 없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않게도 수줍어 하거나 억지로 용기를 짜낸 부끄러운 기색도 숨겨져 있는지 뭔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때 문득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얼마 전부터 내가 유난히 쭈꾸미 집 광고 전단지를 많이 받고, 내 책상에 쭈구미 집 전화번호 쓴 명함이 많이 뿌려져 있던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곧 다른 모든 생각을 일제히 멈추고, 그저 즐겁게 그녀를 따라 나서기로 했다. 뭐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 2014년, 샹하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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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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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환상1 14.10.06 16:16 댓글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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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4.10.07 12:56 댓글

    감사합니다. 이번엔 우화 같은 이야기라 연애담과 잘 안엮이는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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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dnight 14.10.12 22:08 댓글

    그럼 이게 독심술은 아니고... 인셉션? 쯤 되는건가요...?


    생각 심어놓기.

  • No Profile
    곽재식 14.10.13 21:23 댓글

    그러고 보면 "출장 가서 이상한 데 갔다가 겪었던 일", "직장에 있는 동료들끼리 연애할랑 말랑하는 가운데 말도 안되는 업무 맡아 같이 고생하기" 못지 않게 제가 남용하는 소재가 "무의식 중에 살살 나의 기억을 조작하는 어떤 음모"라는 생각 새삼 듭니다. 다른 독자분들께서도 몇몇 분 지적하신 분 계신데, 아마 앞으로도 종종 다룰 소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만 다음번에는 좀 다른 소재로 또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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