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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재 포순이의 안팎

2014.06.01 02:0606.01

포순이의 안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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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웠다.


홍대입구 역 앞에서 고양이 탈에 고양이 옷을 입고 카페 홍보를 하는 남자 생각이 났다여기 들어오기 전 까지만 해도 세상에 그만큼 신세 편해 보이는 알바가 없었는데때가 꼬질꼬질 묻은 고양이 코스튬에 멍청해 보이는 고양이 탈을 쓰고 손만 흔들고 있어도 지나가는 여자애들이 다들 좋아하는 걸가끔은 프리허그하며 덥석 끌어안기도 하고얼마나 좋아그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나는 여기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탈만 뒤집어 쓴 것 뿐인데도 덥죠땀 차죠갑갑하죠탈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좁고 어두워서 마치 관에 들어와 누운 것 같았다정말로 관 속에 누워 본 적은 없지만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햇볕의 열기내 땀냄새가 푹푹 썩어 무슨 걸레 쉰 듯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두툼한 재질의 커다랗고 무거운 탈학교에서 배웠던 복사열과 온실효과가 얼마나 크나큰 재앙인지를나는 이 탈을 쓰고서야 절절히 깨달았다바람 들어오는 데라고는 무릎 아래 뿐이었다.


야야야.”


화장실 문을 두드리듯나보다 고작 두 살 많은 소대장이 내 탈바가지 뒤통수를 똑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어디 포순이가 치마를 걷어올리고 있어칠칠치 못하게.”


그렇다나는 왜 여자들이 한여름에 원피스를 입는지 십분 이해했다왜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는지는 백분 이해했다그런 건 우리같은 남자들 좋으라고 입는 게 아니었다젠장이 더위에이런 치마라고 입지 않으면 못 견디니까 입는 거였다.


그리고 나는 그놈의 치마를 걷어올릴 자유도 없었다남색 스커트 아래 남우세스러운 검정 레깅스그런데다 커다란 탈바가지에 가슴에 뽕까지 넣은나는 의경이었다어린이의 친구민중의 지팡이무슨 행사만 있으면 불려가서 포순이 탈을 쓰는 의경.


이거 하루 이틀 해? 네가 벌써 수경이야 수경. 1년 반이나 했으면 좀 잘 해."

"그게 말입니다김 주임님.”


포순이 탈을 벗고땀내와 썩은내가 밴 머리도 감고 겸사겸사 샤워까지 한 다음에야나는 정색을 하고 말할 수 있었다.


아까는 정말 너무 더웠지 말입니다.”

빠져서는......”

김 주임님도 아침부터 덥다고 하셨지 말입니다.”

그래덥긴 덥지근데 요새 초딩들이 어디 보통 초딩들이냐?”

그게......”

그렇지 않아도 포순이 아이스케키포순이 똥침그런거 하고 도망가는 애새끼들이지그치?”

그렇지 말입니다.”

그래공권력에 아이스케키를 하는 겁대가리 없는 애들이라 이거야그건 괜찮아어차피 포돌이 포순이 인형 탈이야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있는 거니까그런데 말이지.”


그렇다고 포순이가 성희롱의 대상이 되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말입니다.


그 포순이가 덥다고 치마 헤 벌리고 앉아있거나덥다고 타이즈를 벗어버리고 그 다리털 숭숭 그 상태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봐라이건 경찰의 위신 문제지안 그러냐?”


그리고 경찰의 위신 이전에 복무자의 인권 문제가 걸려있지 말입니다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따지고 보면 스물 넷에 벌써 주임이고 소대장님이라고 해도나보다는 겨우 두 살 많을 뿐이었다경찰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그런 엘리트가 이런 데서 의경들 데리고 있는 것이 낭비인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그게 또 이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대체복무 비슷한 거라니 어쩔 수 없지.


소대장은 아버지도 큰아버지도 작은아버지도 전부 다 경찰인소위 경찰가족의 장남이었다소대장의 아버지는 소대장의 고향에서 지구대장을 하고 계신데젊어서 순경으로 들어와서는 같이 순찰 조였던 선배의 막내 여동생과 오며가며 눈이 맞아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다원래 경찰이나 공무원들 중에는 이렇게 직장동료가 사돈이 되는족내혼같은 관계가 꽤 많다는 말도 들었다소대장은 친가 외가 합쳐서 가장 공부를 잘 한 아이였고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친척들의 아낌없는 격려 속에 경찰대에 진학하여 졸업하자마자 평생 경찰로 일했던 작은아버지와 같은 계급장을 달았다고 했다사촌들도 전문대를 졸업하고 바로 경찰이 되었거나심지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찰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서현재 친가 외가를 합쳐서만 경찰이 여덟 명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행정직까지 아홉 명이나 된다고.


나는 그렇게 앞날이 딱 정해지는 것은 답답하다고 생각해왔다하지만 요즘들어 불확실한 미래에 공포를 느끼는 것 보다는 어쩌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주어진 틀 안에 꽉 짜여진예상대로 앞날들이 하나하나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듯 순차적으로 다가오는 인생심지어는 결혼조차도 마치 족내혼처럼 경찰이나 공무원 중에서 상대를 만나 아이는 둘쯤 낳고 살아가는아주 보통의 인생그건 지루할지는 몰라도 안전해보이는 것만은 틀림없다정작 당사자들은공무원 연금이 줄어드네공무원도 이제는 철밥통이 아니네점점 불안해지는 미래를 걱정하기는 하는 모양이지만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한없이 얌전하지.


제대가 반 년도 안 남아서 그런지그게 아니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야말로 갑작스레 터졌다는 IMF그에 따라 한참 흔들거렸던 우리 집 살림 때문인지 몰라도나는 그 안정감이 숨막히도록 부러웠다어차피 밖에 나가봐야 취직하기도 쉽지 않은데그냥 지금부터 경찰이나 말단 공무원 공채 준비를 해서 시험을 봐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 만큼둘째아들 명문대 간 것 하나가 그렇게 자랑스러우신 우리 어머니가 들으셨다가는 등짝에 불이 날 이야기였다공무원을 지망한다면 차라리 고시를 본다면 모를까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이만하면 잘 생겼어,학벌도 괜찮아어디로 봐도 딱히 꿀릴 것 없는우리 동네 공인 엄친아인 내가 고작 그 안정감에 목을 매고 몸 굴리고 위험한 경찰이 되는 것을 좋아하실 리 없었다.


엄마 말고도우리 집에는 내가 경찰이 된다고 하면 내 얼굴도 안 볼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바로 형이었다학교 다닐 때도 맨날 촛불집회 따라다니다 못해멀쩡히 취직까지 한 지금도 주말에는 밀양이며 용산이며 광화문이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우리 형.


자고로 캡싸이신은 떡볶이에나 뿌리는 거지그래사람이 무슨 떡볶이냐?”


휴가 나갈 때 마다 형은 나를 발로 툭툭 차며시비를 걸어댔다아마도 형의 눈에 나는군생활 좀 하자고 인간의 양심을 팔아치우고 민주주의적인 평화 시위를 가로막는 인간 쓰레기 비슷한 것으로 비치는 모양이지그렇지 않아도 난 태어나지도 않았던 87년에그러니까 형도 겨우 엄마 젖이나 떼었을까 싶은 딱 그 시대에시위에 나선 직장인 형과 가로막던 전경 동생이 시위 현장에서 딱 만나고 그랬다는데 우리 형제가 그 꼴이 날 거라고 같잖은 술주정도 해대던 인간이니아마 내가 경찰이 되겠다고 한다면형은 날 반쯤 죽일 지도 모르겠다그저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경찰 시험이나 봐야겠다고 한다면아마 연을 끊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남의 속도 모르고.


야야윤 수경.”

부르셨지 말입니다.”


소대장이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빗어넘기며 나를 돌아보았다.


너 요즘 좀 빠진 것 같지 않냐말년에는 떨어지는 가랑잎도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렇잖지 말입니다.”

하기사네 체격이 저 포순이 옷에 딱 맞아서 계속 시킨 거긴 해도제대 반 년도 안 남은 애가며칠 있다가 분대장도 달 거면서 아직까지 포순이 쓰고 있기도 그렇지포순이 탈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한테 넘기든가.”

안됩니다.”


소대장이 낄낄 웃었다뭔가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나는 농담하듯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포순이 옷을 새로 만들어주실 거라면 모를까맞지도 않는데 대원을 구겨넣는 건 인권침해지 말입니다.”

인권침해같은 소리 하네포돌이 포순이 쓰는 것도 너희들 업무의 일종이거든?”

저야 옷이라도 맞으니 이걸 하지만지금 신임들 다 저보다 허리 사이즈 크지 말입니다.”

애들이 빠져서좀 더 돌려야 살이 빠질 텐데그리고 너너 지하 체력단련실에서 본 적이 없더라아니냐?”

맞습니다.”

너 이제 수경도 달았겠다 상경 때처럼 밤낮 부려먹지도 않는데가서 웨이트도 하고 좀 그래그래야 나가서 여자도 꼬시고 그러지.”

저 인현공대 다녔지 말입니다.”

.”

학교에서 본 여자보다 여기 계신 여경님들이 더 많지 말입니다.”

“.......”

그리고 보시다시피 172밖에 안되어서 여기 괜히 갑빠 키우면 스타일이 안 나지 말입니다.”

그래파이팅.”


나는 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목빼고 기다리던 제대가 코 앞인데여길 떠나고 싶지 않았다갑자기 밥이 맛있어진 것도 아니고잠자리가 편안해진 것도 아니고사지방에 인터넷 PC가 뭐 새로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수경이 되었다고 해서 출동 나가는 걸 덜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포순이 탈을 쓰고 경찰서에 견학 온 어린이 여러분 앞에서 손을 흔들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그렇게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닌데도포순이 탈을 다른 녀석에게 넘겨주기 싫은 것과 마찬가지로.


포순이 탈을 쓰고 바라보는 세상은 좁고 어두웠다군 생활이 어두운 통로같은 것이라면포순이 탈은 그 중에서도 특히 그렇겠지나는어느 순간부터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머리가 나쁘다거나 공부를 안 한다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편안하고,동시에 나쁜 일이었다나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부채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나는 그저 지시에 따르고대오를 짜고 사람들을 막았다혹은 분대 애들과 함께 야광조끼를 입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고더 이상 신문을 찾지 않게 되었다겉멋으로라도 읽던 사회과학 서적들은 휴가 나와서 방구석에 쌓여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어쩌면 대학에 갈 때 까지 죽어라 공부한 것으로평생 해야 할 공부는 거의 다 한 것일지도 몰랐다여기 이 곳에 있다보면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결국에 세상 더 힘들게 사는 모습만 수태 보게 된다똑똑한 사람이 적당히 약게 사는 게 제일 좋은 것이고그렇지 않으면 그냥 틀에 맞추어서 살면 된다네모 반듯반듯한 틀나는 그 좁고 어두운 틀 안에 웅크리고 싶었다.

    

 

 

 

 

 

 

 

  

얼마 전, 경찰서에는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 인사이동 때 여성청소년과로 들어온 김 순경은 수시로 우리 행정실에 올라오곤 했다올해 스물 두 살로전문대를 졸업하고 바로 경찰 시험에 합격해서반 년동안 파출소에서 근무하다가 이번에 들어왔다고 했다경찰이라고 다들 경찰복만 입는 것은 아니라서수사하러 다니는 형사님들은 대개 사복들을 입고 다녔다보통은 그 사복 입는 센스라는 게 밖에서 보기에는 영 촌스러워서 자세히 보면 티가 나겠다 싶기도 했지만김 순경은 달랐다날씬하고 스타일도 좋은 편이라서 뭘 입어도 어울릴 성 싶었지만한창 유행하는 옷차림을 자기 나름대로 멋스럽게 차려 입는 것이모르긴 몰라도 학교 다닐 때에도 옷 잘 입는다는 말을 들었을 것 같았다절전운동을 한답시고 냉방이라고 나오는 게 늘 나오다 마는 수준이라한창 나이의 사내놈들이 잔뜩 모여있는 이 곳은 늘 그 기계과 강의실처럼 썩은 내에 가까운 땀냄새로 가득 차 있었는데그녀가 나타날 때 만은 달랐다그녀에게서 희미하게 풍기는 비누 냄새인지 화장품 냄새인지향긋하고 상쾌한 냄새가 이 악취들을 한순간이나마 잊게 해 주었으니까.


이 자식들김 순경에게 눈독 들이는 새끼 내가 다 죽여버린다.”


소대장은 반은 농담반은 진담으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그때마다 우리는 소대장이 김 순경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그러던 어느 날분대장이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분대장은 그래도 이런 일은 수경이 총대 메고 해야 하는 거라더니소대장에게 김 순경에 대해 질문하는 영광을 갓 수경을 단 내게 떠넘겼다개새끼나는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요즘 들어 유난히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소대장 앞에 섰다.


두 분 사귀시지 말입니까?”

?”

김 순경님 말입니다.”


소대장은 날 미친 놈 보듯 올려다보았다.


여동생하고 사귀는 놈이 어디있냐새꺄.”

여동생분이시지 말입니까?”

어어저게 우리 집안 아홉 번째 경찰이다여자 직업으로 나쁘지 않지경찰.”

저희는...... 소대장님 요즘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서......”

그거.”


소대장은 중얼거렸다.


“......쟤랑 다리 놓아 달라고 집적거리는 새끼들이 많아서 그러지.”

......”

네놈들도 눈독 들이면 너 죽고 나 죽고 하는 거다알았냐?”

...... 알겠지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포돌이 포순이라는 캐릭터를 제일 잘 써 먹는 데는 역시 어린이들이 오는 행사였고이 여성청소년과라는 곳은 바로 그런 어린이 행사들을 시도 때도 없이 주최하거나 혹은 참석하는 곳이었다나는 수시로 무시로 불려다녔고그때마다 김 순경과 마주쳤다이쯤 되면 별 관심이 없었어도 사람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들겠다 싶을 정도였는데하물며 기본 호감도가 있는 상태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아이들이 앞에 세 줄로 줄을 지어 서고맨 뒤에 경찰들과 포돌이 포순이가 서서 손을 흔들며 기념 사진을 찍을 때 마다김 순경은 내 바로 옆 자리에 있었다그때마다 그녀의 향긋한 샴푸 냄새가 퀴퀴한 포순이 탈 안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나는 포순이 탈을 쓰고손에도 커다란 장갑을 낀 채그녀와 손을 잡거나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했다하지만 그 뿐이었다나는 탈을 벗은 채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고그녀에게 나는 그저 포순이일 뿐이었다내용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9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더웠다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 때도 되었는데날씨는 마치 바이메탈이 고장난 전기밥솥처럼 여전히 점점 더 더워지는 것만 같았다나는 그날도 어린이 행사에서 포순이 탈을 뒤집어 쓰고 손을 흔들었고초등학교 2학년생들에게 아이스케키는 물론 엉덩이를 만지는 희롱을 당하기도 했다몇몇은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탈바가지를 쓴 내게 기어오르며 포순이 탈을 벗어보라고 졸라대기도 했다.


속에 남자 들었대!”

남자가 여자 옷을 입어?”

그거 트랜스..... 변태라는데.”

목소리 들어보면 알잖아말해봐포순아말해봐.”


마음같아서는 탈바가지 따위 휙 벗어던지고 어린 나이에 싹수 노랗게도 여자로 추정되는 인물의 엉덩이를 주물거리면서 트랜스젠더 아니냐고 묻는 애새끼들을 반쯤 패 죽여놓고 싶었지만의경 주제에 무고한 시민 레벨도 아닌 견학온 어린애들을 두들겨 팼다가는 바로 신문에 날 일이었다그렇지 않아도 기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데그런 거 하나 제대로 걸렸다가는 인터넷 신문에 바로 속보로 뜨고카카오스토리며 페이스북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간 뒤 네티즌 수사대에게 신상을 탈탈 털리겠지아아아들이 엄친아 레벨이라고 좋아하시던 우리 어머니는 동네에서 낯을 드실 수 없을 거고아마도 형은 날 사람 취급도 안 할 게 틀림없었다이런 젠장.

마침내 아이들이 경찰서 밖으로 다 빠져나갔을 때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나는 탈을 쓴 채로 천천히 돌아보았다김 순경이었다.


고생했어요.”


그녀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종류별로 들어 있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하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하다못해 이 포순이 탈이라도 벗어야 할 것 같았다벗을 수 없었다이 탈을 벗어버렸다가는 한여름 땡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주저앉고 말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이 이게 뭐야?”


결국 분대장이 내 손에서 아이스크림 봉지를 빼앗아다가 냉동실에 넣었지만이미 늦었던 모양이다소대장은 녹았다 얼어붙어 이상한 꼴이 된 스크류바를 입에 문 채로 행정실을 휘 둘러보았다.


누가 사다 넣어놓았어?”

그거김 순경님이 사다주셨지 말입니다.”

?”

아까 윤재민 수경님 수고했다고 사주셨지 말입니다.”

그래?”


소대장은 내 이름이 떨어지자마자 다가와 등짝을 철썩 소리가 나게 한 대 쳤다.


어우이 새끼어우.”

그건 제가 아니라 포순이에게 사 주신 거지 말입니다.”

포순이네가 포순이잖아!”

아니그게 아니라......”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포순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 말고알맹이 말고 말입니다.”


답답했다.


김 순경은 자주 이쪽 행정실에 놀러왔으니까소대원 서넛의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니 그녀가 관심을 보여 준 바로 그때적어도 탈을 벗고 그게 나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나는 왕자를 앞에 두고도 말 못하는 인어공주가 된 기분으로 책상에 머리를 처박았다소대장이 투덜거렸다.


넌 키가 작아서 안 돼.”

?”

넌 그나마 제대하면 경찰 아니니까 그건 괜찮은데키가 너무 작아.”

김 주임님보다 요만큼 작지 말입니다.”

그 요만큼이 크지임마내 동생 키가 165힐 신으면 너보다 커.”

그건 아니지 말입니다.”

원래 여자들이남자보다 슬림하기도 하고 해서 힐 신어서 170쯤 되어 보이면 175쯤 되는 남자랑 비슷해 보여그래서 안 돼.”

뭐가 또 안 되지 말입니까제가 키가 크면 김 순경님과 사귀게라도 해 주실 거지 말입니까.”

어허.”


소대장은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꾹 누르며 낄낄거렸다.


미쳤냐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그게 이 바닥의 소개팅 풍속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경찰대 출신의 경위들과 일찍 승진하여 서른 전에 경사가 된 이들은 잊을 만 하면 한 명씩 우리 행정실에 나타났다먹을 것이나 더러는 담배를 사들고서이야기하는 레파토리도 똑같았다같이 술이나 하자하는 김에 김 순경도 같이 오라고 하자서로서로 친해지면 좋지 뭐소대장은 먹을 것과 담배는 열심히 챙겼지만정작 술 약속은 안 잡고 버티기 일쑤였다경장이나 순경들은 아무래도 계급 차가 있어서인지이쪽을 공략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아무려면 어때. 나는 반쯤 씁쓸한 기분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아니면 그녀에게 고백도 못 하고 게임 오버인 모양인데.  


난 경찰하고 결혼 안 할 거다.”


지하 식당에서 소대가 회식을 하던 날평소답지 않게 거나하게 술을 마신 소대장이 중얼거렸다나는 소대장을 부축하다가 되물었다.


공무원 부부 좋지 않습니까. 요즘은 중소기업 사장 부부 같은 거랍니다.”

개뿔수능 보자 마자 군대 말뚝 박은 거나 다름 없는데집구석에 들어가서도 경찰만 보고 살라고?”

경찰 가족인 거 자랑스러워 하시는 줄 알았지 말입니다.”

자랑이야 아버지가 자랑스럽겠지.”

“......안 자랑스러우시지 말입니까.”

야야내가 딱 초등학교에 갔는데 IMF였어.”

“......”

안정된 게 짱이라 이거지대학교 학비도 공짜고.”

“......”

나라고 고민 없이 사는 게 아냐시발.”

그래도......”

야야스물 넷에 자기 남은 인생이 다 결정되어 있는 것 같은 그런 게 좋아 보이냐?”

그렇지만 말입니다......”


주임님은 경찰대 출신이고그 나이에 벌써 간부고앞으로 계속 승진해서 못 해도 경찰서장잘 하면 그보다 더 위로도 올라가실 수 있는 분이지 말입니다요즘같은 세상에 그게 얼마나 사치스런 고민인지 아시는지 말입니다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그런 생각이 가슴에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우리 형이 쫓아다니는집이 철거당하고 회사에서 해고당하고억울하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되지 않고평생 안정적인 직장과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과그런데다 우리 소대장에게는 앞길 창창하게 뻗어 있는 영전의 날들까지어디로 보아도 부럽기만 한 일들을 두고그는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 적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야야시발생각해 봐온 집안 식구들이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내가 경찰대 갈 거라고 믿잖아시발그거 나왔는데신부 되는 거랑 똑같아.신학교 갔다가 신부 못 된 사람은 뭐에다 쓰냐그거 배운 것 갖고 어디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똑바로 좀 서 보십쇼주임님.”

너넨 여기서 제대라도 할 수 있지.”


소대장은 내 어깨를 짚으며 몸을 가누려 애썼다.


야야.”

김 주임님.”

내가 지금내 동생에게 어떻게 작업해 보려는 사람들 중에서 네가 그나마 좀 낫다고 생각하는 게 뭔지 아냐?”

경찰 아닌 거...... 말입니까?”

경찰뭐 그거 나쁘지 않지안정적이고근데 말이야이 안에 있으면 사람이 자꾸 좁아지는 것 알겠냐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들이 다 경찰이고집에 가서도 경찰가족이라고 일가친척이 죄 다 경찰이고친구들도고등학교 친구들은 지금 군대 가 있거나 취업 준비에 정신이 없고대학 친구들은 다 경찰인거야바깥에 세상이 저렇게 넓은데이 경찰서 담장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가는 것 같은 그거 아냐?”


나는 그것이이경 때 처음 여기 발령받아 와서 느꼈던 그 막막함과 어쩌면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높은 담벼락도 없이그저 정문 초소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익숙한 세상인데도허락 없이는혼자서는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그런 감정아니소대장의 발목을 붙잡아이 담장 안에 뿌리를 박을 때 까지 묻어놓은 것 같은 그런 감정은그때 우리가 으레 느끼는 그 감정과는 또 다른 것일테다우리는 2년이지만그에게는 40년이니까그가 살아왔던 세월의 두 배나 되는 시간을그는 제복을 입은 채 살아야 할 테니까그것이 선택 가능한 영역이고 포기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했지만대학마저 이쪽으로 진학한 그에게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 그렇게 클 수 없다는 것도아니어쩌면 그조차도태어나서 지금까지 경찰 아닌 인생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그의족쇄일지도 모르겠다코끼리의 발목을 감은 얇은 새끼줄같은그런 빈약하지만 효과적인 마음의 족쇄.


저는 말입니다.”

.”

제대하는 게 무서웠지 말입니다.”

미친 새끼.”

말뚝을 박을까 뭐 그런 생각도 했지 말입니다.”

“......너 의병 제대나 해라미친 놈아말뚝을 왜 박아.”

김 순경님 보고...... 정말 말뚝 박고 여기 남으면 어떻게 잘 해 볼 수 있지 않을까그런 생각도 좀 했지 말입니다.”

너 순경 시험 보고 경찰학교 들어가서 구르고 나오면 딴 놈이 채 갔을 거다.”

“......그러게 말입니다.”

너 다음 달에 분대장 아니냐?”

그렇지 말입니다.”

그놈의 포순이 슬슬 그만두고 전역 준비나 해미친 새끼.”

포순이 탈을 벗는 것도 무서웠지 말입니다.”


나는 중얼거렸다나보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큰 소대장이짐짓 턱을 든 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얼씨구.”

바깥 세상에 뭐가 있을지무서웠지 말입니다.”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캡싸이신은 떡볶이에나 뿌리는 거지사람들에게 뿌리는 게 아냐약하고다치고그렇게밖에는 세상에 무언가 이야기할 기회를 박탈당한그런 사람들에게 그러는 게 아냐우리가 정의의 편이고 상대가 악의 편인 게 아니라우리 역시 규칙에 의해 움직이지만 상대 역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생각하지 않으려 애쓴 것이 두려웠다포순이 탈만 해도 그랬다그때김 순경이 내게 아이스크림 봉지를 건네 주었을 때그 탈을 벗고 감사합니다그렇게 인사만 해도 좋았을 거다그랬으면 김 순경은행사 때 마다 따라다니던 그 포순이가 나라는 것을 알았을 거다.


그렇게 무서워서 잘도 경찰은 하겠다.”

그러게 말입니다.”


생각했다당장 다음 번 행사 끝나고서라도그때 아이스크림 잘 먹었다고 이야기를 해야지제대가 얼마 안 남았다는 이야기도 하고여기서 빡빡 밀고 제복 입고 있으니 꾀죄죄해 보일 뿐 이래봬도 내가 저평가 우량주라고 어떻게 설명이라도 해 봐야지그리고 생각을 해야겠다이 곳을 나가서 복학할 때 까지 뭘 해야 할 지를어떻게 취직을 하고무엇을 먹고 살 지를무엇을 바라볼지를어떤 인생을 살아갈지를갑갑하고 좁았지만언젠가는 이 문을 열고 나가야만 한다그게 무엇이 되더라도소대장에게는 고작 손바닥 한 뼘 어치밖에 안 될 그 기회가적어도 내게는 다른 소대원들만큼은 주어져 있으니까.


제대하고 번듯하게 하고 와서 김 순경님 찾아가면안 죽이실 겁니까?”

너 누나도 여동생도 없지?”

형만 하나 있지 말입니다.”

네가 뭘 하든 난 반 죽여놓고 시작할 거다.”

경찰이 선량한 민간인에게 그러시면 안 되지 말입니다.”

내 동생을 노리고 오는 놈이 어디가 선량해일단너 하는 것 보고다 죽일지 반만 죽일지는 그때 가서 보자그러니까.”


소대장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쓸쓸하게 웃었다.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안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그저 안전하고 순탄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건 가짜야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진짜를 봐그래도 이 일을 하고 싶으면말뚝 박는 건 그때 가서 생각해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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