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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영 인생

2014.05.31 23:0205.31

인생


딸에게.

1.

이 글을 쓰는 일이 네게 고통만 안겨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나를 부디 용서해준다면 좋겠어. 네가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 고민조차도 온전히 네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설령 네 모든 판단이 내가 바라지 않는 형태가 될지라도, 그래도, 엄마는 네가 세상에 오래 남아주었으면 하고 바라. 이건 온전한 내 욕심이야.


2.

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단다. 네 몸이 인간과 같지 않더라도 엄마는 여전히 네가 네 의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믿어. 네 아빠도 그렇게 믿었지. 세상에는 논리와 이성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 무척 많아. 인간이 알아봤자 무엇을 얼마나 알겠니?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 하여 너의 전부를 안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어. 너를 만든 사람들은 언제나 너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너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정말 그들이 모든 걸 알겠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단지 만들고 구성했다고 모두 안다면 제들 씨와 배로 낳은 자식 맘도 다 알게? 그들은 그저 너를 들여다볼 뿐이야. 너는 그저 남들보다 열린 창문이 많을 뿐이야. 조금 더 누군가의 손이 필요할 뿐이란다. 어설픈 위로나 자기 위안이 아니야. 다 이야기해줄게. 정말이야.


3.

엄마와 아빠는 고아야. 양친도, 친척도 하나 없는 천애 고아. 각자 다른 보육원에서 자랐고, 부모가 누군지 몰라서 보육 안드로이드 혜택도 받지 못했어. 어쩌다 보니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 사랑했고, 조금 이르게 결혼했단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받지 못한 만큼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자고 신께 맹세했어. 하지만 그조차도 우리에겐 욕심이었나 봐. 첫 아이를 가졌지만 유산했지. 곧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몸이 됐단다. 슬펐지만 꼭 내 배로 낳아야만 어디 자식이겠니? 입양이라는 선택지도 있었어. 마음으로 낳은 아이를 맞이할 신청을 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어.
김 박사님이었지. 그래, 네 주치의 말이야. 사실 의사가 아니라 안드로이드 공학 박사야. 그분이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부모를 대신하는 보육 안드로이드는 성공적이니, 반대로 자식을 갖지 못한 부모에게 위로를 주고 나중에는 극진히 모시는 부양 안드로이드를 시도하려 한다고. 그 사람들은 프로젝트를 위해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가진 부부를 물색했대. 몇 년에 걸쳐서야 간신히, 엄마랑 아빠를 찾아냈어. 자식을 두지 못해 늙으면 쓸쓸히 죽을 기대가 큰 최적의 후보로 말이야.
참 우습고 화나는 일이지, 그 사람들이 그래. 제들이 뭔데 우리의 미래를 가지고 이럴 거라느니 저럴 거라느니 왈가왈부하느냔 말이야. 당시에 그리 쏘아주지 못한 걸 지금도 후회해. 그렇지만, 그 때문에 널 만났으니까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쉽게 결정하진 못했어. 아빠랑 오래 머리를 맞댔단다. 거기에 입양 신청이 우리들의 경제적 사유로 자격 미달하여 떨어지니까 온갖 생각이 들었지. 우리 두 사람이 나누었던 말, 고민, 여기에 쓰기엔 너무나도 깊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 2년을 꼬박 이야기하고 싸우다가 반쯤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제안을 수락했어. 애완동물을 자식처럼 여기고 실지 재산도 상속하는 세상인데, 안드로이드를 키워 자식 삼는다고 퍽 이상할 게 뭐냔 맘이었어. 처음엔 그랬어. 네게 상처가 되겠지만,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까.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프로젝트의 산물인 너는 인간 같았어. 아니, 인간과 다르지 않았어. 우리는 그때야 세상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깨달았단다.


4.

처음 네가 오던 날 우리는 연구소라는 델 가서, 네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너는 몸의 부속이 인간과 다를 뿐, 사고나 행동, 정서를 형성하는 방식은 인간과 거의 다르지 않을 거라고 했어. 물론 아직 기술력이 미진해 몸체는 성장에 따라 정기적으로 바꾸어 주어야 하지만, 유년기와 청소년기만 지나면 그마저도 드물 거랬지.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기술적 부담은 없도록 노력했다나 봐. 아이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은 아이 자신도 모르게 진행해야한다는 주의도 들었어. 부모 부양뿐만 아니라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관계성에 관한 많은 연구가 동시에 진행될 거라고도 했어.
김 박사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더구나. 부디 우리의 딸로 여겨달라고. 보통 아이들처럼 사랑해 달라고. 우리 몫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우스웠어. 이미 알 만큼 알고 들을 만큼 들어서 어떡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데, 그냥 사랑해 주라니. 비딱한 맘을 추슬러 너를 맞이하러 갔어. 대기실에서 기다리니까 김 박사님이 포대기에 싼 아기를 데리고 오더구나. 엄마랑 아빠의 모습을 반반씩 반영한 살찌고 젖내가 듬뿍 나는 아기천사였어. 건네받아 품에 안으니 동그란 눈으로 날 보고 방긋 웃었지. 믿을 수가 없었어. 어딜 봐서 이 아이가 안드로이드란 말이지? 하품하고 칭얼거리고, 엄마와 아빠를 찾아 놀랍도록 안심하는 이 아이가 안드로이드라고?
엄마는 그때 울었어. 너를 만나고서야, 엄마는 네가 무엇이든 상관치 않겠다고 마음먹었어. 너는 하늘이 준 아름다운 보석이었단다. 그래서 아름다울 미(美)에 진주 주(珠)를 써서 미주라고 이름 붙였어. 미주. 미주야. 우리 딸, 미주.


5.

너는 보통 아기와 달리 곧잘 있을 법한 병치레 하나 없었지. 배고프고 실례하면 울고, 야밤중에도 엄마를 괴롭히고, 놀아주면 좋아하고 미처 보지 못하면 사고를 쳤어. 초보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넌 모를 거야. 네가 왜 우는지 몰라서 속상하고, 잠들지 않아 힘들었어. 네 아빠를 닮아 부녀가 나란히 밤에 잠을 안 자서 속을 썩였지. 당근 든 이유식을 싫어하고, 악어 캐릭터 인형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손에서 놓지 않아 큰일이었어. 그래도 너는 주위에서 보는 다른 집 아이보다 돌보기 참 편했다고 생각해. 착한 아이였거든. 네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었어. 이렇게 예쁘고 착한 내 딸이 아파서 끙끙거린다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져도 여러 번 무너졌을 테니까.
네가 왜 접종을 하지 않는지, 한 번도 아픈 기색이 없는지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어. 설마 인간이 아니리라 생각하진 못했기 때문에 그냥 건강한 아이라고 넘길 수 있었지만, 사소한 의문을 지적받을 때마다 죄지은 사람처럼 불안하기도 했단다. 나쁜 일이 아니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완전히 이해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기까진 좀 더 시간이 필요했어. 네가 부끄럽거나 나빠서가 아니야. 엄마가 굳센 사람이 아니라서, 두려워서 그랬던 거야.


6.

네가 처음 말문을 열고 걸음마를 시작할 때쯤 몸을 바꾸러 갔어. 첫 돌부터 36개월까지 쓸 몸으로 바꿔주며 김 박사님이 고맙다고 했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더구나.
바뀐 네 몸은 바꾸기 전보다 조금 자라서 처음엔 적응이 잘 안 됐어. 이후에도 네 몸을 바꿀 때마다 그런 부분이 있었어. 너도 기억하지? 방학 중에 검사를 받고 오면 키가 좀 커졌다거나 살이 붙은 것 같다고 물어본 적 있잖니. 김 박사님 말로는 인식과 몸 상태의 정교한 수준의 조절은 어려워서 위화감이 들 수 있댔어. 기분 탓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일도 쉽지만은 않더구나.
안드로이드라고 해서 네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눈에 띄게 똑똑하다거나 두각을 보이는 영역은 없었어. 어려운 말은 잘 모르지만, 엄마 아빠의 평균 지능과 여러 가지 요소를 반영했대. 이해력이나 응용력 부분은 안드로이드 시스템 특성상 보통 이상은 되겠지만, 천재처럼 보이는 경우는 없을 거라고 들었어. 안심했단다. 평범하게 살겠구나, 싶어서. 네가 남과 다르단 이유로 눈에 띄고 입방아에 오르는 일은 없었으면 했으니까. 같은 이유로 아쉬움도 들었어. 너무 제멋대로라고 생각하지? 똑똑하고 잘 되길 바라는 맘이 왜 없겠니.
엄마는 많이 노력했어. 네가 어쩌면 가장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살았단다. 


7.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어선 걱정이 많았어. 엄마 아빠와 떨어져 다른 사람들과 보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김 박사님과도 오래 상담했단다. 박사님은 괜찮다고 안심시켰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 너는 밖에서 만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낯을 가리는 성격도 아니고, 도리어 지나칠 정도로 잘 웃고 친화력이 좋았어. 네가 자라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 사회생활을 하게 될 나이까지 걱정을 달고 살 순 없잖니? 어렵게 인정하고 너를 처음 등원시켰어. 데리러 온 유치원 선생님 손을 잡고, 불안한 듯이 나를 돌아보던 네 표정이 기억나. 아마 널 보는 내 표정도 그랬을 거야. 옆집 네 또래 아이를 둔 아주머니가 자기도 그랬다며 너무 걱정 마라고 위로해주지 않았다면 그 불안이 오직 나만 겪는 것인 줄 알았을 거야.
다행히 너는 금방 또래 아이들과 친해져서 유치원 갈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게 됐지. 얼마나 안도하고 또 한편으론 쓸쓸하던지. 점점 엄마도 네가 집에 없는 시간을 맘 편히 보낼 수 있게 되었어. 널 못살게 굴었던 남자아이의 이름이 수혁이고, 네가 처음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엄마 얼굴이었고, 처음 유치원에서 먹은 간식이 초콜릿 도넛인 것도 엄만 다 기억해.
세영이 손을 잡고 온 날도 기억나. 너희 둘은 떨어지면 곧 죽을 사이처럼 찰싹 붙어 다녔지. 어찌나 귀엽던지. 너와 세영이는 서로 어떻게 친해졌는지 잊었을 거야. 엄마는 기억하고 있어. 다 기억해. 세영이가 신발을 잃어버려서 울 때 네가 한 짝을 줬잖니. 엄마는 네가 그토록 착한 아이라 기뻤어. 세영이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홀로 남은 세영이를 안고 울던 네 모습, 기억해. 기억하고말고. 우리 착한 딸, 미주야.


8.

재롱잔치 때 영상은 지금도 한 번씩 돌려본단다.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이며, 졸업식 의젓한 모습까지. 내겐 하나도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이야. 너는 때때로 뭘 그런 걸 아직도 보고 있느냐며 투덜거렸지. 엄마는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언제 네가 엄마 아빠 곁을 훌쩍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안고 살았어.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너에 대한 건 모두 알고 기억하려고 했어. 많은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단다. 떠나더라도 네가 우리의 딸이었단 사실을 사실로 남기고 싶어서.
한때는 그 모든 일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우울한데, 네 아빠가 그러더구나. 이렇게 하면 미주가 이 세상에 우리 딸로 존재했음을 역사로 남기는 거 아니냐고. 누가 뭐라고 하든 지나간 시간과 역사는 바꿀 수 없지 않으냐고. 또 나중에 미주가 길을 잃는 일이 생길 때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네 아빠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엄마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니.
엄마는 네가 여섯 살 재롱잔치 때 세영이랑 같이 춘 펭귄 춤을 정말 좋아해. 펭귄 탈을 쓰고 뒤뚱거리며 추던 춤 말이야. 둘이 반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부딪혀 넘어졌는데도 씩씩하게 일어났지. 춤이 끝나고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던 내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어. 엄마. 나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어. 잘할 수 있어. 지켜봐 줘.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가슴이 벅차서 자꾸 눈시울이 붉어지는 거야. 너는 언제나 엄마의 걱정을 걱정하지 말라며 배려하는 그런 아이였어.


9.

초등학교 입학하고서 있었던 일 기억하니? 계곡에 소풍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사고 말이야. 미주 너는 아마 하루 기절하고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기억할 테지만, 실은 무척 심각한 상황이었어. 네 몸의 반이 산산조각이 나서 몸을 교체해야 했거든. 엄마는 네 치료실 앞에서 기절하기 직전이었어. 김 박사님이 만약 네 시스템에 심한 손상이 갔다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이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했어.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우리 딸이었던 기억이 사라지거나 심각하면 모든 상태를 리셋 해야 할지도 모른댔어. 네가 보고 들은 기억은 자동으로 백업 되지만, 그 기억을 가지게끔 한 행동 방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부분은 복구할 수 없다고 했어. 그건 오직 시간을 들여 꾸준히 피드백으로 성장해 온 안드로이드의 마음 같은 거라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구나.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네 시스템은 모두 무사했어. 우리 딸 미주는 사라지지 않은 거야. 잠든 널 데리고 집에 돌아와 아빠와 이야기를 했단다. 의문이 들었거든. 어디까지가 미주인가, 하고 말이야.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 딸이 아닌가? 리셋 된 채로 생김새만 미주이면, 우리 딸이 아닌 걸까? 그렇다면 기억 상실에 걸린 사람들은? 마음의 병으로 세상과 등진 사람들은? 무엇이 미주를 미주이게 하는 걸까?
엄마랑 아빠가 믿고 싶은 대로라는 결론을 내렸어. 미주를 미주라고 보고 인정하는 엄마 아빠의 믿음이라고 하기로 했단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겨 네가 다치고 우릴 잊어버리는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 딸로 극진히 여기고 믿는다면 네가 우리 딸이 아닐 리가 없다고. 닥치면 또 다르게 생각할 가능성도 있겠지. 다행히도 이후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믿음은 어찌나 흔들리기 쉬운지. 사람의 마음이 약한 탓에.
깨어난 네게 사고의 원인을 네게 묻자 너는 자신의 부주의로 발을 헛디뎠다고 대답했지. 우린 이미 김 박사님을 통해 사고가 일어난 네 기억에 대해 알고 있었어. 평소 반의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남자아이들과 싸웠지? 티격태격 몸싸움을 하던 중에 밀려 굴러떨어졌고. 그런데도 너는 그 애들을 지켜주었어. 그것이 네 결정이라면 존중해 주자고 아빠랑 이야기했단다. 나중에 널 민 남자애랑 그 애 부모님이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더구나. 화가 났지만 그래도 받아들였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용서라는데, 네 덕분에 엄마랑 아빠는 할 수 있었어.


10.

위험천만했던 그 일 이후 김 박사님과 연구원들이 고민을 많이 했나 봐. 미주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구나. 입양을 도와주겠다고 했어. 그 사람들은 미주 너의 일 뿐만 아니라 너를 키우고 돌보는 엄마와 아빠의 상태도 늘 신경 써주었어.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도록 지원도 잘 해주었지. 애정을 쏟는 네가 중간에 망가지거나 사라질 경우에, 우리가 받을 충격과 고통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대.
마다할 일이 아니었어. 입양은 원래 우리가 바랐던 일이었고, 너를 소중히 여겨줄 가족이 늘어나면 얼마나 좋은 일이야? 혹시나 싶어 네게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냐고 물으니 거리낀 내색 하나 없이 기뻐해 주었지.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고, 아끼고 사랑해줄 거라며 웃었어. 우린 걱정 없이 너보다 세 살 어린 여자아이를 입양했어. 현주가 오면서 우리 네 가족은 완전해질 수 있었단다. 미주 네가 쭈뼛거리며 도통 말문을 열지 못하는 현주에게 끝없이 말을 걸고, 안아주고, 손을 잡고 돌아다니면서 집이며 동네 여기저기를 소개해주고,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동생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주었지. 일주일이 지나니까 엄마, 아빠 보다 언니라는 말을 더 자연스럽게 하기에 밉지 않게 괘씸했어.
현주에게 네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은 좀 더 자란 뒤에 알려주기로 했단다. 너도 알다시피 현주는 상처가 많은 아이였고, 제 일을 이겨내고 평범하게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잖니. 언제나 바르게 자라온 너와 달리 현주는 우여곡절이 많았어. 우울증을 앓기도 했고, 학교에서 따돌림당하기도 했었어. 나중엔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했고. 그래도 미주 네가 옆에서 동생을 많이 도와주어서, 어려운 상황에도 안심할 수 있었어.


11.

너는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고, 만화책 읽기를 좋아했지. 지금도 그러니? 수학을 참 잘했잖니. 엄마는 수학은 젬병이었는데. 네 아빠 머릴 닮아서 그럴 거야. 수다가 많고 애교 많은 성격으로 자라는 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여우 같다며 웃어른들이 애정을 담아 놀리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토라지다가도 금방 사랑스럽게 굴었지. 예의 바르고 착하다고 동네에 칭찬이 자자했단다. 속 썩일 때도 잦았어. 잠도 많고, 편식하고, 늦게까지 나돌아다니고. 엄마 속 타는 줄도 모르고 커서도 남자애들이랑 싸움질이나 하고……
미희를 중학교 때 만났지? 너랑 세영이랑 미희, 지금도 끔찍하게 서로를 아끼는 너희. 그 애들 존재가 참 고마워. 그 애들이라면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어. 실제로 그랬지. 가족이 주는 사랑과 그 애들이 네게 주는 사랑은 같으면서도 달라서, 이 세상에 너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뻤어.
미주야.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인간이든 무엇이든 세상에 존재한다면 사랑받아야 마땅하다고. 사랑해야 한다고. 존재를 존재하게끔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엄마는 사랑이라고 대답하려고 해. 엄마랑 아빠는 널 키운 게 아니야. 세영이와 미희는 네게 친구가 되어준 것이 아니야. 네가 인간이 아녀서 네 삶 모든 것이 수동적으로 따라왔다고 생각하지 않아. 미주 네가 엄마와 아빠의 의미로 거기 태어났고, 세영이와 미희의 친구로 네가 다가간 거야. 너는 그저 우리와 함께 살았을 뿐이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응, 미주야?


12.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고 기능하는지 잘 모르겠다만, 잘 대해주고 호감 가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겐 누구나 끌리지 않겠니? 서로 아끼고 애틋하게 여기고, 더불어 생긴 모양새가 내 취향이면 좋잖니. 사람의 사랑도 감정도 발현하는 이유와 조건이 있는데, 시스템의 판단과 계산에 의한 반응이 뭐 그리 대수겠니? 얘, 따지고 보면 엄마도 아빠 잘생겨서 좋아한 거야.
고등학교 들어가고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지? 네 첫사랑. 세영이랑 미희랑 같이 들어간 만화 동아리의 한 학년 선배랬지. 이름이 재훈이였어. 배우 누구를 닮고 어른스럽다고 한동안 재훈이 이야기만 엄마 귀에 못이 박히게 떠들었잖니. 밸런타인데이, 생일선물 챙겨준답시고 참고서 사야 한다며 돈 받아가기도 했었지? 엄마가 모를 줄 알았어? 바보. 알고 넘어가 준 거야. 네 첫사랑은 재훈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끝났지만, 그 애를 좋아하며 울고 웃던 네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예뻤단다.
네 사랑이 네게 어떤 의미일지 김 박사님께 물어본 적 있었어.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몰라도, 이론적으로 네게 허락되지 않은 감정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어. 어떻게 판단할지는 사람의 몫이라 했지. 특정 감정이 발현될 때 인간의 뇌와 몸 상태를 본떠 네 시스템을 만들었대. 그런 상태의 네 행동을 감정이라 볼지, 그냥 어떤 문제에 의한 반응으로 볼지는 우리 몫이라고. 자기는 과학자라 현상과 원인을 언제나 인지하지만, 널 사랑하는 우리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라 했어.
그렇다면, 미주 너는 사랑을 했어. 네가 그 감정을 사랑이라 여겼다면 사랑이야. 틀린 건 없어. 옳고 그름을 누가 재단하겠니? 미주야. 너는 아무것도 기만하지 않았어. 넌 그저 사랑했을 뿐이야.


13.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고 했지. 세영이는 선생님, 미희는 소설가. 입시지옥을 견뎌내고 대학 새내기가 되어 학교는 제각기 떨어졌지만, 너희 세 사람은 언제나 친구였어. 세영이가 부모 대신 자길 키워준 보육 안드로이드를 보낼지 말지 고민할 때, 핀잔주면서도 세영이를 돕고 같이 울던 때, 엄마랑 아빠도 몰래 울었어. 세영이 맘이 우리 맘과 어떻게 다르겠니. 세영이가 결국 아빠 안드로이드를 보내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로 하고서…… 그 뒤에 엄마 아빠는 미주, 네 이야기를 세영이에게 해주기로 했단다.
이기심이야, 알아. 제멋대로지. 세영이가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도 많이 했어. 배신감 느끼면 어쩌나 하고. 미안해. 자식의 원망을 감수한다고 부모가 자식에 대해 휘두르는 일이 정당화되진 않아. 정말 미안해.
네가 집을 비운 동안 세영이를 불러 어렵게 어렵게 이야기했어. 네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세영이는 침착한 표정으로 잠자코 듣고서, 우리가 이야기를 끝낸 뒤에야 입을 열었어. 그리고 그 애가 한 말에 너무 놀랐단다.

“아주머니, 아저씨. 저 알고 있었어요.”

믿을 수 없었지. 어떻게 아느냐고, 언제부터 알았느냐고 물었어. 세영이가 그러더라. 아빠 안드로이드가 가르쳐 주었다고. 보육 안드로이드 혜택을 받고 머잖아서 알았다고. 보육 안드로이드는 같은 목적을 가진 안드로이드를 알아보는데, 미주 너도 기본은 거기서 온 것이니 쉽게 알아차린 듯하다고. 세영이가 그러면서 뭐랬는지 아니?

“전 미주가 한 번도 제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었어요. 유치원 다닐 적부터 지금까지 미주는 제 소중한 친구였어요. 저는 미주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물론 가끔 돌이키곤 했지만, 그게 미주와 제 관계에 어떤 문제가 된 적은 없었어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포함해서, 미주는 제 친구예요. 두 분께 미주가 딸인 것과 마찬가지로요. 오히려 미주에게 고마워요. 아빠를 반납해야 하나 고민했을 때 미주 생각도 많이 했었거든요.”

네 소중한 친구는 우리만큼, 그 이상으로 너를 아껴주고 있었어. 세영이는 미희도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해서 또 놀라버렸지. 세영이와 미희는 둘이서 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나 봐. 그 애들은 그 애들 나름대로 너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거야. 어린 맘인데도, 험난한 세상에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도. 네 자리를 만들어서 품고 소중히 여겨준 그 애들에게 말도 못 할 만큼 고마워서 마냥 울었어. 세영이가 내 손을 잡고 같이 우는데……


14.

김 박사님을 만나러 갔어. 우리는 네가 평범한 삶을, 인간 누구에게나 허락된 삶을 살아주었으면 바랐어. 우리가 죽을 때까지가 네 삶의 한계라면, 거기서 자유로워져서 누군가와 결혼하고, 자식을 두고, 혹은 그러지 못하더라도 미주로 세상을 충분히 누리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김 박사님은 우리 이야기를 듣더니,

“두 분이 미주를 끔찍이 여기는 점은 압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셔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미주는 두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으로 살도록 만들어졌고 그 의무를 수행하면 다시 또 어떤 목적을 세팅해 주어야 합니다. 두 분이 바라는 대로 살고자 한다면, 그런 바람의 삶을 명령으로 만들어 입력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건 과연 두 분이 생각하시는 진정히 자유로운 삶일까요? 두 분이 안 계신 상태의 미주 존재 이유를 두 분이 강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미주의 판단은 어떻게 되느냐고, 미주가 원한다면 어떻게 되냐고 반문했지. 

“미주는 인간이 아닙니다. 물론 미주의 존재는 저희도 오랜 시간을 들이는 테스트 모델이기 때문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확답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미주가 자신의 소임을 다 했을 때 스스로 계속 살아가길 선택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설령 미주가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할지라도 마냥 기뻐하지 못할 겁니다.”

김 박사님은 무척 괴로운 표정을 짓더구나.

“안드로이드가 사람이 내린 절대 명령을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는 안드로이드를 물체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이 제 편의를 위해 만든 기계가 통제를 벗어날 때 안드로이드의 존재 효용가치는 사라지고 혼란이 닥쳐오게 됩니다. 비약이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윤리, 철학, 과학, 사회 모든 인식을 통틀어 쉬이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인간들의 세상이 그러한 혼란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미주는 부모 부양이란 본연의 의무를 다하면 수거하여 두 분의 자식으로 잠들게 해야 마땅합니다. 두 분이 진정 원하신다면 사람 평균 수명만큼은 기능하도록 다른 사용처를 찾아보겠습니다만……”

우리는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안드로이드이기에 인간을 위해서 통제해야 한다고 해. 안드로이드의 발전과 인간에 근접해가는 상태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데, 그럴수록 안드로이드는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하도록 구속해야만 한다고. 네가 안드로이드라서.
머리가 텅 비는 기분이 들었어. 그런 말을 이제 와 할 거면, 차라리 자식처럼 키우지 말고 애정을 쏟지 말라고 하지 그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어. 아무리 우리가 죽은 뒤의 일이지만, 자식이 오래 살아 행복하지 못할 거란 말을 듣고 어느 부모가 억장이 안 무너지겠니?


15.

지금껏 뉴스에서 온갖 사건과 사고를 보았단다. 그중에서 네 또래의 아이들이 죽었다는 소식만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일이 없었어. 떠난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부모를 당시에는 그저 딱하다고만 생각했어. 네 미래를 알고 나서는 내가 저들과 다른 게 뭔가 싶더구나. 죽어 알 수 없는 미래의 일, 살아 있는 동안엔 너는 우리 곁에 있을 테니까,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너의 존재로 이미 과분할 만큼의 행복을 받았는데, 김 박사님 말 대로 더 바람은 그저 우리의 과욕일 뿐 아닐까. 무엇부터 잘못됐지? 혼란스럽고 빠져나올 구멍조차 없는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어.
엄마 어디 아프냐고, 왜 이리 우울해 하냐며 네가 걱정했지. 네 얼굴을 보니까 알겠더구나. 아까도 말했지, 너는 그저 거기 있었을 뿐이라고. 존재했을 뿐이고, 너를 딸로, 친구로 여기어 세상에 의미로 만든 건 우리들이었다고. 처음부터였어. 그래 맞아. 처음부터 우리는 너를 우리의 욕심으로 살게 했던 거야. 너는 우리의 욕심을 이뤄주려고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잖니.


16.

네게 너에 대해 알릴지 말지는 중대한 문제였어. 김 박사님은 권장하지 않겠다고 했지. 정체성이란 폭탄 같은 거라고, 인간인 줄 알고 인간으로 살아온 네 시스템이 과부하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그러면 수명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했어.
자포자기가 아니야. 믿어주렴. 우리는 네가 온전히 너로 살아주길 원했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타의에 의해 생을 끝내지 말고, 네가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고 그렇게 되어주기를. 김 박사님은 아직 이르다고 한 일 말이야.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기적이 네게 있기를 바랐어. 왜냐면 우리는 너를 기계로 끝내게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모순된 말인 줄 알지만, 네가 안드로이드이기에 안드로이드로 살지 않기를 바랐어. 이미 너의 삶은 우리에게 그랬다고 생각해. 이제는 ‘누군가의 너’가 아니라 ‘너만의 너’가 되기를. 네가 안드로이드이기에 받아야 하는 불평등과 한계, 고통을 알면서도 네가 해 왔던 모든 일과 삶이 오롯이 너의 판단이고 자유로움임을 믿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주기를.
우리는 김 박사님께 너에 대한 정을 떼는 과정이 되리라 이야기했어. 설득은 어려웠단다. 그럼에도 김 박사님이 끝끝내 우리의 의견을 들어준 이유는, 네가 안드로이드로 자각하게 되면 더욱 더 안드로이드로서 올바른 상태로 못 박을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래. 재미있지 않니? 우리는 네가 안드로이드로 자각하는 일이 너의 한계를 뛰어넘으리라 생각하는데, 정작 너를 만든 사람들은 뛰어넘기를 바라지 않고 정 반대의 상태가 될 기대를 하니 말이야.
그래. 우리의 기대와 바람은 말하자면 이성적이지 않고 근거 없는 믿음에 불과했어. 네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살면서 네가 어떻게 자라고 변해왔는지 자세한 내막은 하나도 몰라. 그저 너를 키우며 얻었던 경험과 믿음 외에는 무엇도. 단지 네가 잘해낼 걸 알 뿐이란다. 어떤 아픔과 시련이 닥쳐와도 꿋꿋하게 이겨내고 네 주위의 사랑하는 이들을 품어 안아 줄 사람이란 걸 알 뿐이야. 네가 지금껏 우리 딸로 살아온 일이 기적 아니겠니? 엄청난 우연으로 외톨이인 두 사람이 만났고, 아이를 점지받지 못했어. 와중에 너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선택받아 너의 엄마 아빠가 되었어. 이 모든 일이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을 기적이라 해야 하겠니?
네가 대학을 졸업하는 날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했어. 늦었지만 현주에게도 알리자고 했지. 만에 하나 큰 충격으로 네게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처치할 수 있도록 김 박사님과 연구원들이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기로 계획을 세웠어.


17.

삶이란 얼마나 예측 불가인지. 네 아빠와 네 동생이 그렇게 세상을 떠날 줄은 누가 예상했을까?


18.

그 날 밤에 아르바이트 나간 현주가 늦는다니 불안했던 네 아빠가 데리러 나갔지. 아무 예감도 들지 않은 평범한 날이었어. 자정이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나간 김에 둘이서 야식이라도 사 먹고 오는가 싶었지. 엄마는 당장 어떤 불행이 찾아올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 너도 그랬을 거야. 전화벨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렸어도 그저 네 아빠가 곧 돌아가겠다고 알려주려 걸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어.
차 사고가 났대. 건너편에서 오던 음주운전 차량이랑, 그래서 다 죽었대. 무슨 소릴 하나 했지. 엄마가 하나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네가 나와서 전화를 받았지? 그 뒤로는 기억이 잘 안 나. 정신을 차리니까 병원 침대였어.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엄마가 울었니? 아빠랑 현주 누워있는 거 보고 비명을 질렀니? 기억난다고 달라질 건 없어. 아빠랑 현주는 영영 가버렸으니까.


19.

있어선 안 될 일이 생기고, 그래서 삶을 알 수 없다고 한다마는. 엄마는 너무 많이 힘들었어. 미주 네가 너의 이상을 눈치챘지. 슬픔에 미쳐 엉망진창이 돼버린 엄마처럼 네 시스템도 이상해졌나 봐.

“엄마, 나 사람이 아닌 거 같아. 슬프고 힘든데 고통스럽지 않아. 그렇게 느끼고 반응하라고 머릿속에서 자꾸 목소리가 들려. 나 정말 슬퍼하는 거야? 내 감정이 어떻게 된 걸까?”

네게 울분을 다 토해내고 말았어. 넌 인간이 아니라고 모질게 말 한 거 후회해. 그리 알려주어선 안 됐는데. 엄마가 약하고 바보 같아서 우리 딸한테 상처를 줬어. 네 탓이 아닌데. 세영이랑 미희가 그만 하라고 말리니까 정신이 들었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네 충격 받은 얼굴이 잊히질 않아. 너는 그게 무슨 농담이냐고 되묻지 않았어. 하얗게 질린 낯이 점점 평온해지고 마치 그랬다는 걸 예상한 듯이, 그래서였구나, 곱씹으면서…… 무서웠어. 엄마가 알던 미주가 사라질까 두려웠어. 네가 그 모든 사실을 체념하고 다 놓아버릴까 봐. 엄마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말했지.

“미안해요, 엄마. 내가 인간이 아니라서.”

아니야. 왜 네가 미안해하니? 한 번도 통곡해본 적 없는 네가 곧 죽을 만큼 울었어. 엄마도 네 손을 잡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
네가 종종 느꼈던 이질감에 대해서 미희가 말해주더구나. 어째서 그 흔한 감기조차 걸리지 않는지, 남들은 받지 않는 검사를 매년 받는지, 헌혈이나 네 존재를 감지할 만한 일에는 거부감부터 드는지. 언제부턴 가는 머릿속에 뭔가 다른 사람이 사는 것 같아서, 자신의 의지대로 못 살까 봐 걱정했다고. 완전한 자각은 아니지만, 피드백이 쌓여 본래 시스템과 충돌하는 부분에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을 거라고.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내색하지 않았다고 했지.
어쩔 줄 모르는 엄마에게 세영이와 미희가 한동안 지켜보라고 위로해 주었단다. 엄마에겐 시간이 필요했어.


20.

김 박사님 그 머리 좋은 사람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라서 낭패한 눈치였단다. 애도의 말을 건네고 조심스레 네 상태를 물었어. 너의 세팅 변수에 이렇게 일찍 가족을 잃는다는 건 없었대. 물론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얼마든 상태에 적응할 수 있지만, 손쓰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전부 설명했단다. 미희에게서 들었던 말, 너의 정체성에 대해 말한 전황 전부. 김 박사님이 깊은 한숨을 쉬고 먹먹해하더구나. 한참을 우리는 침묵 속에 있었어. 오래 지나고서야 김 박사님이 입을 열었지. 자기들이 너무 안일해서 내게 큰 짐을 지웠다고 사과했어. 마치 그들이 작금의 모든 현실을 만든 것처럼 미안해하더구나.
웃음이 났어. 그 사람이 그리 말한 이유며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지. 그런데 어쩌겠니? 그 사람은 너를 만들었고, 너는 우리에게 왔고, 엄마는 널 만났는걸.

“미주 어머님. 미주 덕택에 안드로이드의 성장에 관한 유의미한 결과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래서 테스트는 계속 진행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이 프로젝트가 상용화하기엔 시기상조라 결론지었고, 상부에도 그렇게 보고하고 설득할 생각입니다.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면 구차한 면피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미주에 대해서는 어머님의 요구를 될 수 있으면 수용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껏 엄마는 김 박사님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어. 너를 만들어 우리에게 보냈지만, 결국 너를 데려갈 사람이라서 늘 곱게 보지 못했지. 그런데 우리 맘이랑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제 손으로 태어나게 했고 네가 자라는 모습이며 우리 딸로 살아가는 시간을 쭉 지켜본 사람이잖니. 우리 못지않게 많은 고민을 했을 거야. 더 힘들었을지도 몰라. 그 사람은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우리가 너를 계속 안고 가고 싶다고 고집을 피워댔으니 얼마나 곤란했을까.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구나.
엄마는 미주 네 삶이니 네가 선택하게 해주고 싶다고 했어.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프로그램대로 행동하고 선택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너의 선택이라면 존중해 주고 싶어. 말이 다르지 않으냐고 생각하니? 기계로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계로 살기를 선택하는 결과도 받아들이겠다니 이상하니?
네가 잘 선택할 걸 믿어. 별개로 어떤 선택도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엄마의 믿음, 바람과는 별개로 네 인생은 네 것이니까. 아빠와 현주를 다 떠나보내고서야 알았어. 자신의 삶을 결정짓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사자뿐이야. 내가 아무리 바라도 사람에게 닥친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순 없어. 태어나면 살고, 살면 죽어. 누구나 마찬가지야. 그래서야. 그래서 네가 안드로이드로 생을 끝내고 싶다면 마음은 아프겠지만 받아들이려고 해. 네 아빠도 분명 이해해 줄 거야.
사랑할 시간조차 부족해. 삶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온갖 변수와 가능성의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단다. 큰 슬픔이 지금 곁에 있다고 앞으로도 계속 있다는 보장은 없어.


21.

미주야. 사람들은 엄마를 보고 불쌍하다고 해. 고아인 출신 성분부터 과부가 된 인생을 보고 기구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동정해. 엄마가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상관없어. 보이는 그대로만 보고 너무 쉽게 많은 걸 속단해. 물론 평범하다고 말할 법한 삶은 아니었어. 어릴 땐 그런 시선이며 동정이 싫었어.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닌데,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나를 상처 입고 나약한 무언가로 보니까 참 싫증 났어. 오히려 그런 상황이 점점 더 나를 좀먹고 불쌍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어. 악의가 없는 동정이 비참하다 느꼈고, 남 보기 행복하게 살지 않으면 이 고통스러운 고리는 절대 벗어던질 수 없다고 믿었지.
원망도 많이 했어. 내 인생은 대체 무엇에 빚을 졌기에 이토록 나락이냐고.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느냐고. 근데 말이지,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어.
찾아온 불행을 불행이 아니라 할 필요는 없어. 행복도 마찬가지로, 온 행복이 행복이 아니라며 더 큰 행복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없더란 거야. 남이 무어라 하든 나를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건 오직 나밖에 없어. 남과 나를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지금에야 깊이 이해한단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너로 인한 행복과 불행은 엄마의 몫이지 네 몫이 아니란 소리야. 엄마는 미주 네가 있어 행복했어. 행복해. 불행했던 적 한 번도 없었어. 뭐가 더 필요하니?


22.

많이 고민하고 있지? 쉬운 일은 아니야. 혼란스러울 텐데도 엄마가 힘들어할 까봐 언제나처럼 밝은 미주로 돌아와 주어서 고마워. 부모를 위해야 한다는 프로그램 때문이라 자책하고 있니? 사람의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도 저절로 샘솟지 않아. 배우고, 가르치고, 살면서 체득한 시스템이지. 너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일찍부터 가졌을 뿐이야. 그리고 프로그램이면 뭐 어떠니. 꼭 사람과 같은 방식이어야만 진심이라고 하겠니? 진심이 대체 무엇일까? 얼마 전에 미희가 그러더라.

“안드로이드에게 인간다움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게 인간 편의적인 판단 같아요. 꼭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안드로이드의 가치를 헐뜯을 필요는 없잖아요. 지금 그대로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인간과 별 차이가 없으니까 지금껏 미주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죠. 그래도 노력을 그만두진 않으려고요. 다름을 이해하고 싶어요.”

그 애는 한 번씩 엄마를 놀라게 해.


23.

두서없는 이야기를 많이 했구나. 얼마가 걸리든 좋으니까, 살고, 숙고해서 결정하고 선택하길 바라. 엄마도 아빠랑 현주처럼 예고 없이 떠날지 몰라. 혹은 네가 먼저 어떤 이유로 엄마보다 먼저 떠날 수도 있지. 불명확하니까. 삶이란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그러니 엄마는 엄마 자신에게, 미주는 미주 너 자신에게 후회 없이 살기를 바라.
엄마는 이제 단 하나의 원칙만을 지키고 살려고 해. 많은 일을 겪고서, 많은 시행착오와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야. 잊지 말고 기억해주렴.


24.

내 인생에 다시없을 소중한 우리 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엄마는 너를 사랑할 거야.

- 20140522
안드로이드 연작, 일곱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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