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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두 부부 이야기

2014.02.01 10:4502.01

두 부부 이야기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중턱 외딴 작은 초가에 노모와 단둘이서 살아가는 가난한 나무꾼이 있었다. 성실하고 순박한 성격에 키도 크고 떡 벌어진 어깨에 소의 것처럼 크고 맑은 눈을 가진 청년이었으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혼기가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해 노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처 마을과 시장에서 청년과 알고 지내는 사람들 역시 그를 마음에 들어 했기에 안타까워했다. 중매를 서주마고 나서는 이도 있었으나 전답도 가축도 모아놓은 재산도 없이 가진 거라곤 고작 쓰러져 가는 집 한 채 뿐에 늙고 병들어 모시기 까다로운 시어머니가 딸린 남자에게 시집가겠다는 처녀도, 그런 청년을 사위로 들이겠다는 집안도 없었다.

하지만 나무꾼은 어째선지 싱글벙글 웃고 다녔고 활기에 차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로움과 피곤함,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다녔던 청년이 갑자기 어느 날부턴가 세상 다 얻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도 의아하게 여겼다. 그와 산에서 자주 만나 친해진 사냥꾼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이 몰락하여 지금은 산에서 사냥을 하며 먹고 살고 있지만 어릴 때는 부유한 포목점 아들이었다. 처음부터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이들을 만나며 겪어본 경험이 있다. 나무꾼의 갑작스런 표정의 변화는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만나는 총각 그 자체였다.

대체 마을의 어느 처자가 그와 만나준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잘생겼다며 호기심을 보인 아가씨는 몇몇 있었다. 나무꾼이 더운 여름날 우물터에서 등목을 하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버드나무 뒤에서 숨어 지켜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 눈에는 가난뱅이에 병든 노모까지 딸린 최악의 신랑감이기에 절대 만나지도 말을 건네지도 말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터다.

호기심을 느낀 사냥꾼이 지나가던 길에 나무꾼의 집에 들러 노모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아들이 누구와 만나는 것을 통 못 보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어차피 만나는 아가씨가 있다 하더라도 그 부모님이 반대할 게 뻔하니까 아무도 몰래 밤이나 산속에서 만날 터였다. 생각이 이에 미친 사냥꾼은 날을 정해 집을 나서는 청년을 몰래 따라나섰다.

* * * * *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나무를 하는가 싶었는데 사방이 트인 널찍한 바위 옆에 지게를 내려놓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평소 때라면 해가 질 때까지 나무를 해서 지게 위로 고봉밥처럼 땔감을 잔뜩 짊어진 후에야 산을 내려갔을 청년이 해가 중천인데 지게를 내려놓고 어딘가로 헐레벌떡 달려가는 것이었다.

예상이 적중했다 싶은 사냥꾼은 뒤를 따라갔다. 덕분에 사냥은 하지도 못한 채로 하루를 공치는 셈이었지만 워낙 호기심이 많은 남자라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시야에서 상대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느라 신경을 쏟았다. 노련한 사냥꾼답게 몸에 익힌 솜씨 덕분에 들키지 않고 미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청년은 목적지로 향하는 데에 온정신이 쏠려 있어서 뒤를 신경 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행은 아주 수월하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깊고 깊은 숲 속으로 얼마나 들어갔을까.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사냥꾼은 해진 뒤의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쯤에서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쯤 청년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바위로 둘러싸인 천혜의 욕탕, 하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천연 온천이었다. 사냥꾼은 이 근방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고 자부하는 터라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이 천연 온천을 몰래 독차지하고 목욕을 즐기는 게 나무꾼의 숨겨진 즐거움이었나? 그런 생각도 잠시, 비밀은 다음 순간 완전히 풀렸다. 나무꾼 청년은 바위 뒤에 자리를 잡고 웅크려 앉았는데 그 위치나 자세가 무척이나 익숙하여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오자 집채만큼 커다란 새가 하늘 위에서 날아오더니 입에 물고 있던 큰 조개를 온천가에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조개의 껍데기가 벌어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냥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안에서 주위의 어둠을 환히 밝혀줄 정도로 빼어난 절세미인이 열 명 가까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미녀들은 수다를 떨고 웃으며 고운 비단옷을 훌훌 벗고는 알몸이 되어 온천에 몸을 담갔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숨이 막힌 사냥꾼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수풀 속에 몸을 감추었다.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내뱉은 후에야 겨우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나무꾼이 숨은 쪽을 보니 청년은 발그레한 얼굴에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숨은 위치와 얼굴에 담긴 느긋한 태도를 보아하니 한두 번 경험하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냥꾼은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청년이 어느 날부터 정신이 나간 것처럼 실실 웃고 다녔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이 정도 미녀들이 알몸으로 웃고 떠들고 있으니 황제라도 쉬이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닌가. 사냥꾼도 벌게진 얼굴로 정신없이 훔쳐보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상대에게 들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어느덧 꿈같은 시간이 훌쩍 지나고, 온천욕을 즐긴 미녀들은 탕에서 나와 가져온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다시 입은 후 조개 안에 들어가 앉았다. 조개껍데기 바닥에는 부드러운 천과 솜이불을 깔았으며 위 껍데기에는 초롱을 달아서 해진 후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목에 건 보석처럼 반짝이는 짧은 피리를 휙 불자 그간 석상처럼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던 새가 벌떡 일어나더니 부리로 껍데기를 닫고 입에 문 후 날개를 펄럭이며 도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시각은 이미 달이 중천에 뜬 깊고 깊은 한밤중이었다.

나무꾼은 새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더니 자기도 옷을 벗어 온천수로 몸을 가볍게 씻고는 다시 옷을 입고 돌아갔다. 사냥꾼은 행여나 들킬 세라 한동안 꼼짝 않고 있다가 그가 든 횃불을 표지 삼아서 산을 내려갔다. 나무꾼이 지게를 찾아서 지고 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촛대를 켜고 자신도 집으로 돌아갔다.

* * * * *

다음날 사냥꾼은 장터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나무꾼을 발견하고 얼른 맞은편에 앉았다. 으레 나누는 인사를 마치고 나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자네 요즘 표정이 좋네 그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예? 아, 네. 조금 그런 게 있어서요.”

어쩐지 말을 둘러대면서 밥을 입안에 우겨넣는 꼴을 보니 노골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려는 수작이 빤히 보였다. 좀 더 파고들기로 했다.

“자네 모친께선 자식 걱정에 잠을 못 이루신다는데, 자네도 효자로 이름이 자자한 사람이니 이렇게 즐거운 걸 보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구만. 어머님 걱정 덜어드릴 소식이겠지?”

숟가락을 쥔 나무꾼의 손이 딱 멈췄다. 토끼처럼 놀란 눈이 사냥꾼에게로 향했다. 반면 상대방의 시선은 먹잇감을 노리는 여우처럼 날카로웠다.

“만나는 아가씨라도 있는 모양이구만?”
“아이고, 아닙니다! 그게, 요새 제가 산 속에 자라는 꽃을 보고 다니는데 말이죠, 그 꽃이 하도 예뻐서……”
“오호, 꽃이란 말이지?”
“예, 꽃입니다.”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는 청년의 어설픈 거짓말을 본 사냥꾼은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상대의 마음도 떠볼 겸 슬쩍 농을 던졌다.

“거 잘 되었군. 내 마침 좋은 색싯감을 찾아서 자네에게 소개시켜 주려는데 어떤가, 한 번 만나볼 텐가?”
“예에? 저기, 말씀은 고맙지만요, 죄송합니다. 요즘 버섯이 많이 나서 캐느라 바쁘거든요.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요.”

그렇겠지. 사냥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여쁜 선녀님들을 만나고 있는데 시골 처녀 따위가 어디 눈에나 들어오겠나. 요새 비도 안 오는데 무슨 버섯이 많이 나겠나. 순박한 청년이 둘러대는 어설픈 거짓말이 우스워서 국을 마시다가 사래가 들렸다.

“그래? 정 그렇다면 하는 수가 없지. 다음에 또 좋은 인연이 생길 거야.”

사냥꾼은 쉽게 물러났다. 그의 속을 알 리가 없는 청년은 어째서 이리 간단히 포기하는지 의아했다. 자신과 맞선 보자는 처자가 좀처럼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면서 그런 기회를 차버리는데도 놀라거나 역정을 내거나 더 권유하지 않는 사냥꾼의 태도는 확실히 이상했다. 물론 애초에 색싯감 따위 있지도 않다는 것을, 자기 속을 떠보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을 청년은 꿈에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사냥꾼도 이미 그 미녀들에게 마음을 사로잡혔다는 것도.

이제 사냥꾼도 눈을 감으면 온천의 정경이 훤하게 떠올라서 슬그머니 웃음 짓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급기야 그날 오후 동료로부터 무슨 좋은 일 있냐는 질문을 들은 후에야 그 사실을 스스로도 깨달았다. 자신도 나무꾼처럼 되고 만 것이다.

사냥을 마치고 지친 심신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가면 같이 사는 아내가 시큰둥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건만 너무도 추하고 심술궂게만 보였다. 그야말로 개돼지만도 못하게 여겨졌다. 괜히 짜증이 난 그는 자그만 트집을 잡아 아내에게 거친 말을 퍼붓고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린 채로 잠을 청했다. 어둠 속에서 미녀들의 아리따운 얼굴과 몸이 온천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섞여서 일렁거렸다. 그렇게 그는 밤새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 *

시간이 지날수록 불면증을 견디다 못한 사냥꾼은 천연 온천을 직접 찾아 나섰다. 산길에 훤한 사냥꾼의 솜씨를 최대한 발휘했건만 첫날은 찾지 못하고 밤새 헤매다 멧돼지의 기척을 느끼고 나무 위에 올라 해가 중전에 뜰 때까지 얕은 잠에 빠졌다 깨었다를 반복했다.

지친 몸으로 오후 내내 다시 수색한 끝에 마침내 온천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났는데 새는 날아오지 않았고 나무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 오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무꾼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미녀들이 언제 오는지까지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허탕을 치긴 했지만 수확도 있었다. 사냥꾼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집에서 온천까지 오고 가는 길을 외웠다. 그 뒤로 매일같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온천에 들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거기서 해가 질 무렵까지 기다렸다 나무꾼이 나타나지 않으면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해진 후의 산속에는 위험한 산짐승들이 출몰했기에 오래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며칠이 지났던가, 마침내 자신보다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나무꾼 청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날처럼 해가 지자 약속한 듯 새가 조개를 입에 물고 날아왔다.

‘옳거니! 날짜를 헤아려보니 꼭 일주일만이로구나. 저들은 매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목욕을 하러 오는 거야. 저 녀석은 이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제는 사냥꾼도 알게 된 셈이었다. 그때와 같이 조개 속에서 열 명 가량의 미녀가 나와 온천욕을 즐기고 돌아갔다. 사냥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집에 돌아와 모처럼 못나고 뚱뚱한 아내를 끌어안고서 끓어오른 욕구를 해소하려 했지만 잘 안 되었다. 그 미녀들 중 한 사람이라도 좋다. 만나서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 첩으로 삼을 수 없을까? 그런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늘 싱글벙글하는 청년과 반대로 사냥꾼은 그 뒤로 일주일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지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그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 때문일까. 사냥꾼은 결코 청년처럼 그냥 구경만 하고 만족하며 지내지 못했다. 미녀들을 직접 만나고 품에 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큰 장애물이 있었으니 하나는 같이 사는 아내요 또 하나는 바로 그 나무꾼 청년이었다. 덩치만 큰 새나 가녀린 아가씨들은 아무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을 가로막는 장벽은 오직 아내와 청년 둘뿐이었다. 토끼와 노루를 죽이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사냥감이 아내와 청년으로 보이게 되었다. 쾌감과 동시에 이런 식의 대리만족으론 채울 수 없는 시커먼 욕망 또한 함께 커져갔다.

* * * * *

마침내 미녀들이 목욕을 하러 오는 날이 되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던 나무꾼 앞에 불쑥 사냥꾼이 나타났다. 기척도 없이 갑작스레 튀어나온 것도 물론 놀랍지만 한층 더 놀라운 건 온천이 바로 코앞이라는 점이었다. 나무꾼은 너무 몰라서 온몸이 굳어진 채로 뭐라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여어, 이런 곳에서 다 만나게 되네.”

사냥꾼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만 입은 웃되 눈동자에 어린 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여, 여기는 어, 어쩐 이, 일로……?”

당황한 나무꾼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디 급하게 갈 데라도 있는 모양이지? 쫓기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서둘러 가는 건가?”
“그, 그게 말이죠…… 그러는 아저씨야말로 왜 이런 곳에……?”
“나 말인가? 나야 목적이 있지. 큰 사냥감이 있어서 말일세. 정말 큰 놈이지.”

그는 천천히 말하며 허리에 찬 단검을 꺼냈다.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한 해질녘의 붉은 빛을 받아 칼날이 번뜩였다.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 근처에는 산짐승도 오지 않아요.”
“나도 아네. 저 천연 온천 때문이지 아마? 짐승들은 뜨거운 물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말야……. 하지만 말일세. 맛난 음식을 먹으려 할 때 꼭 파리가 하나 날아들어서 성가시게 만드는 때 없나? 내가 지금 바로 그런 심정이야. 해서 오늘 그놈을 꼭 잡아야겠다 싶어서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사냥꾼은 한 걸음씩 천천히 나무꾼에게로 다가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청년은 아직도 그가 치켜든 칼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착한 사냥꾼 아저씨가 왜 자신을? 얼마 전에 결혼해서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을 사람이 갑자기 왜 칼을 들고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건지.

“아, 아저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은데……”
“어허, 아니야. 난 제대로 알고 왔어. 이 온천의 비밀에 대해서 말일세. 그걸 아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야. 이제 곧 한 사람만이 알게 되겠지!”

말을 마친 사냥꾼은 재빨리 단검으로 청년의 가슴을 찔렀다. 갈비뼈 사이로 정확히 심장을 꿰뚫은 건 과연 사냥꾼의 솜씨다웠다. 그간 쌓은 옛정도 있고, 어설프게 살려놨다가 나중에 깨어나서 소동이라도 피우면 미녀들이 도망갈 수도 있으니 최대한 고통 없이 한방에 숨통을 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수많은 들짐승과 산짐승의 숨통을 끊었던 칼이 나무꾼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후, 사냥꾼은 말없이 날에 묻은 피를 닦은 후 칼집에 넣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온천으로 향했다. 마침 미녀들이 탕에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냥꾼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우선 고개를 묻고 잠을 청하고 있던 거대한 새, 저 새가 최대의 관건이었다. 덩치가 워낙 커서 한 방에 죽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정 안 되면 접근하지 못하게 쫓아내기만 해도 상관은 없을 듯 했다. 어차피 저들은 이곳 지리를 알지도 못할 테니까.

결국 그날은 조개와 새를 조심스레 살피기만 하는 것으로 끝냈다. 괜히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면 안 될 일이었다. 어차피 방해물은 제거했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사냥꾼에게는 처리해야 할 방해물이 아직 하나 더 있지 않았던가.

* * * * *

이후 마을과 장터에서는 정신이 나간 얼굴로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나무꾼의 노모를 볼 수 있었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 아들 못 봤냐고 묻는가 하면, 나이가 비슷한 청년을 보더니 자기 아들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두 눈물짓고 한숨을 쉬며 딱한 노모를 바라볼 뿐이었다. 착하고 순박하며 기운도 센 하나뿐인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평소처럼 나무를 하러 나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냥꾼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친한 마을 남자 및 동료 나무꾼들이 청년을 찾으러 산으로 들어갈 때 그는 자청하여 길안내를 맡았다. 평소 친하기도 했고 인근 지리에 대해 훤한 사람이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를 헛고생시켰을 뿐이다. 사냥꾼은 일부러 교묘하게 온천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을 안내했다. 어차피 시신은 다음날 바로 땅에 파묻었기에 쉽사리 발견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온천은 자신만의 비밀로 해두고 싶었다. 새로운 화근을 만들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되었기에 온천과 동떨어진 방향으로만 수색을 이어갔다.

대신 동료들은 큰 바위 옆에 놓인 청년의 지게를 발견하는 걸 유일한 수확으로 얻고 돌아가야 했다. 이게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범이 와서 물어갔다면 싸우거나 도망친 흔적이라도 남아야 정상일 텐데, 주위엔 풀이 쓰러진 흔적이나 핏자국 하나 없으며 지게는 팽개친 것도 아니고 땔감을 얹고 지겟작대기로 받친 채 얌전히 놓여 있었다. 옆에는 도끼며 빈 도시락 통까지 가지런히 놓인 게 당장이라도 청년이 돌아올 것만 같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모두들 영문을 모른 채로 멍하니 있다가 유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을 챙겨 청년의 집에 돌려놓고는 산을 내려왔다. 소지품을 놔두고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연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사냥꾼의 아내 역시 청년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약간의 죄의식과 귀신의 원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 사냥꾼은 술과 과일을 갖고 와서 묘비도 없는 봉분 앞에 절을 한 후 중얼거렸다.

“특별한 원한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게 되어 미안하구만. 나 같은 놈을 만난 게 죄라면 죄요, 여보.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 생엔 두 사람이 부부로 만나서 백년해로하길 바라겠소.”

* * * * *

미녀들이 다시 온천으로 오는 날이 되자 사냥꾼도 작전을 실행했다. 그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해온 계획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가 물고 온 조개 안에서 나온 미녀들이 옷을 벗고 탕으로 들어가자 새는 구석진 바위틈에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숙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탕 안에서 여인들이 자기네끼리 웃음꽃을 피우고 노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그는 몰래 새에게로 다가가 발목에 밧줄을 감았다. 다른 쪽 끝은 근처에 있는 아름드리나무에 미리 단단히 감아두었다. 예상했던 이상으로 새는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무거운 짐을 들고 먼 길을 날아오느라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시간이 흘러 목욕을 마친 여인들이 조개껍데기 안으로 들어가자 대표가 작은 피리를 불었다. 새가 여느 때처럼 깨어나 부리로 뚜껑을 닫고 입에 물었다. 날개를 펼치며 힘차게 날아오르려는 순간, 발목에 묶었던 밧줄이 당겨지며 뒤로 몸이 젖혔다. 그 서슬에 새는 부리를 활짝 벌리며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고, 조개는 바닥에 떨어졌다. 일은 예상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사냥꾼은 얼른 다가가 껍데기를 열었다. 어차피 한 사람 이상을 납치한다는 건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누구를 고를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면 외모나 옷차림의 화려함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이들 중 누구라도 세상천지에 다시 만나기 힘든 절세미녀임에는 분명했다. 따라서 아무나 한 명이면 되었다.

안으로 뻗은 굵고 억센 손이 가장 먼저 닿은 가냘픈 팔뚝을 움켜쥐었다. 누구인지 확인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이 곧장 힘주어 잡아당겼다. 약간 열린 껍데기 틈으로 한 여인이 끌려나왔다.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들쳐 업고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새는 덩치만 큰 게 아니라 두뇌도 제법 명석했다. 자신이 날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내고는 부리로 쪼아서 밧줄을 끊었다. 당황한 여인들은 새에게 납치된 동료를 찾을 것을 명했으나 지리에 익숙하지도 않고 해도 진 후라서 찾기가 힘들었다. 새는 위로 높이 날아올라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움직이는 기척을 찾지 못했다. 겨우 하나 찾아 날아갔으나 조그만 산짐승이었다. 사냥꾼은 이미 사전에 점찍어 두었던 근처 큰 바위 아래에 몸을 숨기고 여성의 입을 천으로 막고 있었다. 새는 근방을 몇 번 날아다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갔다. 여인들은 황급히 대책에 대한 토론을 했으나 흩어져서 찾는다든지 하는 무모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에 더 오래 있다가 자신들에게도 화근이 닥칠지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음이 분명하다.

새가 다시 조개를 입에 물고 하늘 너머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사냥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이 자신의 예상대로 되었고 너무나 쉽게 풀려서 허탈할 정도였다.

사냥꾼은 마음을 놓고 일생일대의 사냥감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하얀 피부는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고 황홀한 광경에 잠시 취했다가 고통에 찬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그제야 여인의 입을 묶은 천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양팔과 발목에 묶은 밧줄은 그대로 놔뒀다.

이제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이니 친절한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 싶었던지 일단 큰절을 하며 사과했다.

“거칠게 대해서 미안합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워낙 다급했기에 그만……”
“소녀를 돌려보내주세요.” 여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소녀는 용궁 각료의 여식이옵니다. 소녀가 돌아가지 않았음을 용왕님께서 아신다면 진노하시어 소녀를 찾고자 바다의 군사들을 보내실 것이옵니다. 그리 되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소녀도 벌을 받겠지만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제법 힘을 주어 말을 했으나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냥꾼은 이 정도 위협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여인을 얻기 위해 두 사람의 목숨을 앗은 뒤가 아닌가. 더구나 용왕의 딸도 아니고 신하의 딸이라는 말을 듣자 한층 안심이 되었다. 과연 용왕이 여자 하나 찾겠다고 뭍 위로 군사를 보내는 위험을 자초할까. 지금 하는 소리는 그저 자신을 겁주려는 허풍에 불과할 터다.

“나는 당신을 얻기 위해 제 모든 걸 걸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위협으로 당신을 포기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순순히 나를 지아비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겁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살벌한 눈빛과 힘이 들어간 팔을 본 여인은 공포에 질렸다.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저항을 하지 않자 사냥꾼은 흐뭇하게 웃으며 여인을 업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당장 마을을 벗어나야겠소.”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아름다운 여인을 손에 넣고 실컷 즐거움을 누린 사냥꾼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참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못할 짓을 좀 했거든.”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여인도 눈치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집에는 여자가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하기도 싫었으나 자꾸 기분 나쁘고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동료들이 자주 집에도 놀러오고 전에 있던 안사람도 종종 장터로 마실을 나갔으니 눈치가 보여서 여기선 어디 살 수가 있겠나. 당신을 보게 되면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묻고 따지기 시작할 텐데 어떻게 둘러대겠어? 내일 일어나자마자 짐을 꾸려 떠날 테니 그리 알어.”

사냥꾼은 자기 할 말을 마치고는 이내 누워서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모두가 자기 멋대로였고 여인에게 선택은커녕 내막을 알 권리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육지의 천한 사내에게 농락당했다는 수치심, 낯선 장소에 대한 두려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앞날에 대한 불안함 이 모든 감정이 해일처럼 몰려왔으나 여인은 통곡을 하다가 자칫 남자를 깨울까 두려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 소리죽여 눈물을 삼킬 뿐이었다.

다음날 두 사람은 되도록 가볍게 짐을 챙겨 집 다음으로 큰 재산인 말을 타고 떠났다. 기르던 닭은 모두 잡아서 비상식량으로 만들어 짐과 함께 실었다. 한편 매일 아침 모이는 장소에 그가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된 동료 사냥꾼이 집으로 찾아갔다가 대문이 열린 채로 텅 빈 집을 보고 놀라서 다른 동료들을 불렀다. 평소 쾌활하고 어울리기 좋아하던 사내가 주위에 아무 언질도 없이 갑자기 짐을 꾸려 사라진 사건을 두고 명확한 답을 내린 사람은 없었다. 저잣거리에서는 비슷하게 갑자기 사라졌던 나무꾼 청년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풍문은 떠돌았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뻔할 뻔자지. 그 사냥꾼 마누라랑 나무꾼 총각이 바람이 나서 함께 도망간 게 틀림없어. 남편은 두 사람을 잡으러 쫓아간 거고.”

장터에서 산나물을 파는 노파가 다 안다는 투로 말했으나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 * * * *

시간이 흐르자 마을에 이변이 일어났다. 사냥꾼이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던 그 일, 용궁에서 온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경고했던 바로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제일 먼저 나타난 건 고래였다. 산처럼 거대한 몸뚱이가 집채만 한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메마른 땅 위를 펄쩍펄쩍 뛰어오고 있었다. 고래를 본 적이 없는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하늘에서 온 건지 땅에서 솟은 건지 알 수 없는 괴물을 보고 공포에 찬 비명을 질렀다.

목적지인 마을에 다다른 고래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안에서 상어, 오징어, 가자미 등 온갖 물고기들이 바닷물과 함께 쏟아졌다. 그 등 위에는 갑옷을 입은 장수들이 타고 있어 각자 칼과 창, 활을 들고 위엄을 뽐내었다. 용궁에서 온 병사들이었다.

마을은 단숨에 바닷물에 반쯤 잠기고 쑥대밭이 되었다. 논밭을 망친 건 물론이고 소와 돼지 같은 가축들은 낯선 바닷물과 물짐승의 습격으로 두려움에 질려 외양간에서 뛰쳐나가 달아났다.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용궁의 장수는 반짝이는 비늘 갑옷에 청룡도를 들고 있었다. 그는 부하들이 닥치는 대로 잡아온 사람들에게 물었다.

“용궁에서 온 여인을 본 적 있나? 알고 있나? 어디에 숨겼나?”

사람들은 그런 질문에 대해 한결 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으리, 저희는 그런 사람을 들은 적도 본 적이 없습니다. 부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결국 그들은 분에 겨워 기둥을 부러뜨려 집을 무너뜨리고 작물 위에 바닷물을 끼얹었다. 더 이상 사람이 살 장소가 못되자 마을 사람들은 그 길로 뿔뿔이 흩어져 마을은 순식간에 사람이 살지 못할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에 홀로 남은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나무꾼 청년의 어머니였다. 자신들을 보고도 놀라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낀 장수가 노모를 불러 물었다.

용궁 여인에 대해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대신 멍하니 얼굴을 보더니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아들아, 네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이렇게 장군님이 되어 돌아왔구나!”

당황한 장수는 손을 뿌리쳤다.

“무슨 헛소리요, 할멈! 내가 왜 당신 아들이야?”
“어젯밤에 보았을 대는 낯빛이 퍼렇길래 걱정이 되었는데 이렇게 신수가 훤한 걸 보니 반갑구나. 네가 사라지기 전부터 갑자기 싱글벙글 뭐라 그리 좋은지 늘 웃고 다니길래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싶었는데 이렇게 출세를 해서 돌아왔구나 그래!”
“젠장, 말이 안 통하는 할멈이군.”

장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옆에 있던 가오리를 보았다. 가오리 병사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실성한 노파라고 합니다. 아들이 실종된 이후로 저렇게 되었다는데요.”
“어젯밤 운운하는 건 뭔데?”
“아마 꿈을 꿨거나 헛것을 보았겠지요.”

장수는 이내 흥미를 잃어 쫓아버리라고 말하려고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다 움직임을 멈췄다. 아들이 실종되었다고? 갑자기 웃고 다니다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장수는 들었던 손을 가오리에게로 돌렸다.

“다시 가까이 데려오라.”
“괜찮으시겠어요?”

가오리는 의아하게 여기면서 나무꾼의 어머니를 장수 앞에 데려다놓았다.

“아이고, 우리 아들. 장군님이 되셨구나 그래!”
“그렇습니다, 어머니.”

장수는 주름진 손가락이 자기 팔을 어루만지도록 내버려두고 굳은 얼굴로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소자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아십니까?”
“나는 모르겠구나. 네가 알지 내가 알겠니?”
“소자가 사라지기 전에 누구를 만났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미친 줄 알았던 노파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적어도 아들에 대한 일은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무언가 낌새는 느꼈단다. 지고 오는 나무의 양이 반으로 줄어들기 시작한 거 아니겠니. 그런데 성을 내기는커녕 좋아하는 임이라도 만난 마냥 들떠서……”
“누군지 짐작 가는 건 없습니까?”
“옷에서 이상한 냄새가 베였지. 조금 매캐하고…… 돌을 태운 듯한 냄새랑…… 소금기도 있었고……”

옆에서 듣던 가오리가 화들짝 놀랐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장수의 신중한 얼굴에 확신의 빛이 어렸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어머니. 집에서 좀 쉬고 계십시오.”
“넌 언제 집에 돌아올 거니, 응?”
“소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라에서 내린 중대한 임무가 있거든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노모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해야지. 에미 걱정은 말거라. 그저 연락이라도 좀 전해주렴.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니까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병사 둘을 붙여서 집으로 보내. 정중하게 모시도록.”

장수는 가오리를 보며 명령했다. 반쯤 끌려가는 노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 여자의 아들이 궁녀를 데리고 달아난 듯싶었다.

“잠깐만.”

미진한 게 있어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어머니, 어젯밤에 소자를 만났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도 어젯밤에 너를 봤어. 옆에 여자가 함께 서있었지.”

듣고 있던 모두 놀랐지만 노모는 눈치 채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둘이 낯빛이 푸른 게 꼭 죽은 사람 같았지 뭐니.”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십니까?”
“글쎄 그게……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 사냥꾼 박씨네 안사람이 아니겠니.”

모두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렸다.

“그래 내가 ‘얘야, 네 얼굴이 어찌 이리 푸르고 손은 어찌 이리 차갑냐?’하고 물었더니,
‘어머니, 불초 소자를 용서하소서. 불효 중의 불효를 저질렀으니 이 죄를 어찌 갚아야 할지……’라고 말하더니 엉엉 울더구나.
한참 껴안고 우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집 안에 나만 홀로 있었어.”

결국 꿈인 모양이었다. 실망한 장수는 노모를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명령했다.

이후 장수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을 잡아서 나무꾼 청년과 사냥꾼의 아내에 대해 물어보았다. 결과 청년이 갑자기 사라졌고 이후 사냥꾼 부부도 뒤를 따르듯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무꾼이 우리 용궁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간 게 아니었나요?”

가오리가 묻자 장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구나. 꿈에 나타난 아들과 사냥꾼의 아내는 죽은 혼백이 아닐까.”
“왜 그 두 사람이 죽어서 같이 나타난 걸까요?”
“열쇠를 쥔 사람은 사냥꾼이야. 대관절 그는 어디로 간 걸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건 나무꾼과 자기 아내가 놀아나는 걸 보고 격분하여 둘을 죽이고 달아났을 가능성이 있지.”
“근데 나무꾼이 사라진 뒤에도 사냥꾼의 아내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럼 지금 내 추측이 맞을 거야. 나무꾼의 옷에 밴 냄새는 온천과 바닷물 냄새…… 필시 그가 목욕하던 용궁 여인을 데려왔을 거야. 어머니 몰래 어딘가에 숨겨놓았거나 했겠지. 이를 알아챈 사냥꾼이 자신이 차지하기 위해 나무꾼과 자기 아내를 제거했다, 그리고 여인을 데리고 도망쳤다…….”
“끔찍하네요. 뭍짐승들은 다들 그런가요?”
“그럴지도. 나무꾼과 사냥꾼의 아내는 같은 원한을 지닌 채 죽어 저승에서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은 게 아닐까.”
“그럼 마을에서 더 얻을 게 없겠네요. 그 사냥꾼을 잡아야죠!”
“이 넓은 땅덩이에서 어떻게 찾겠나?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야. 우리 역시 물을 떠나서는 오래 버틸 수가 없는 노릇이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장군님? 아가씨는 장군님의……”

장수는 눈을 감았다. 납치된 여인은 자신의 혼약자였다. 그렇기에 이토록 위험한 임무를 자처하여 맡은 것이다. 물짐승들이 이렇게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래 머문다는 건 목숨을 내걸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을 뜨고 차마 입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퇴각 명령을 내리기 위해 망설이고 있는데 병사 두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나무꾼의 노모를 데려다주라고 했던 병사였다.

“장군님! 할멈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집에 데려다주고 방에 눕혔는데 이미……”

둘은 조금이라도 잘못을 줄이려는 듯이 필사적으로 변명했으나 장군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직접 둘을 데리고 집으로 가서 용궁에서 하는 식으로 비석 세 개를 만들도록 시켰다. 조개와 진주 같은 재료가 없기에 근처에 있던 돌과 바위로 간단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왜 묘비가 셋인지 묻고 싶었으나 장수의 침통한 표정을 보니 겁이 나서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장수는 정중한 용궁식 예를 갖춰 말했다.

“비록 착각이었으나 나를 아들이라 불러주었고 나 또한 거짓이었으나 어머니라 불렀으니 이 또한 인연. 소자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어머니. 부디 저승에서 진짜 아들과 며느리를 만나 한을 푸시길 바라마지 않사옵니다.”

절을 마친 장수는 부하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그대로 마을을 떠나 바다로 돌아갔다.

* * * * *

한편 도주했던 사냥꾼과 용궁 여인 부부는 장사를 하며 한동안 세상을 떠돌았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시를 얻었기에 남편은 늘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어서 집을 마련하여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악몽이나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은 것도 아내 덕분이라고 여겼다. 직접 물어보고 확인한 적은 없으나 용궁에서 온 여인에게 어린 고귀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자신이 죽인 둘의 원혼을 쫓아주는 게 아닌가 짐작하며 마음에 앙금처럼 남았던 꺼림칙함을 떨쳐냈다.

하지만 기쁨은 이내 사그라지고 그 자리를 고통이 채우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남편은 잠시도 마음 편히 살지 못했다. 어디의 누구든 아내를 본 남자는 반하고 말 것임을 스스로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결국 자신이 나무꾼에게 그랬듯 누군가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 목숨을 노릴지 모를 일이었다.

물에서 살던 여인이어서 체질이 달라 그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일어나는 노화의 흐름이 너무나도 더딘 것만 같았다. 남편인 자신의 얼굴에 고랑보다 깊은 주름이 파이는 동안에도 아내는 처음 만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남편의 조바심과 괴로움을 더욱 부채질했다. 언제 자신보다 젊고 잘난 사내놈이 나타나 아내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돌을 삼킨 것처럼 그의 심신을 답답하고 무겁게 만들었다.

결국 남편이 떠올린 대책은 아내를 감추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먼 외국의 여성처럼 천을 감아 얼굴을 가리게 하고 남들에게는 화상을 입었노라고 둘러대었다. 그러나 오래 갈 수는 없었다. 특히 방을 빌려 정착하게 되면서 점차 아내의 본모습이 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게 되었다. 더운 여름 집에서 천을 벗은 여인의 얼굴을 본 이웃 여자에서 시작된 소문은 가출한 고관대작의 딸이라는 설, 하늘에서 떨어진 선녀라는 설, 납치된 어느 작은 나라의 공주라는 설, 사람처럼 만든 인형이라는 설 등등 갖가지 종류로 뻗어갔다. 그들은 황급히 짐을 꾸려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머문 마을에서는 눈만 보이도록 천을 감고 한동안 잘 지냈다. 그러다 장터에서 장사꾼 남자와 대화하며 웃는 모습을 지나가다 우연히 본 남편은 가슴을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날 저녁 남편은 아내를 우악스럽게 때리는 걸로 속을 달래었다. 마음 같아선 늘 자기 곁에 두고 싶었으나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려면 그러긴 어려웠고, 시간이 날 때마다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 감시의 시선을 보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눈웃음을 친다는 이유로 남편의 손찌검은 점점 잦아졌고 아내는 몰래 치료차 의사를 찾았다가 그걸 들켜서 또 얻어맞았다. 상처를 보기 위해 아내의 맨얼굴을 본 의사는 남편이 없을 때 몰래 찾아와 선물을 건네주며 손을 덥석 쥐고 같이 도망가자고 청했다. 남편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안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거절했으나 이에 앙심을 품은 의사가 아내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 남자들이 집 주위를 기웃거리자 분노한 남편은 그들과 싸움을 벌였고 망신창이가 된 채로 마을을 떠났다.

이런 식으로 곳곳을 떠돌며 부부는 숱한 고초를 겪었다. 대부분 비슷한 일의 반복이었다. 남편은 아내를 최대한 숨기려 했으나 결국 정체가 들통 나 달라붙는 남자가 생겼고, 둘은 마을을 도망치듯 떠나는 식이다. 아내를 첩으로 들이고 싶으니 넘기라며 돈으로 흥정을 하던 부자도 있었다. 남편은 엄청난 금은재보에 일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으나 끝내 참아내어 거절했고, 그날 밤 부자가 보낸 자객들이 집에 들이닥쳤으나 이미 눈치 채고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익숙지 않은 육지에서 살면서 모진 풍파를 겪던 아내는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몸져눕게 되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덕분에 늘 달라붙던 사내들이 사라지게 되어 기쁘기도 했으나 대신 아내의 빼어난 미모도 이제는 사라지고 말라붙은 고목처럼 앙상하기만 했다. 남편은 아내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차렸으나 자신의 심신도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애정도 미련도 사그라진 상태였다. 그저 사이에 자식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 때문에 같이 사는 거지, 중얼거리며 남편은 약을 구해다 먹이기도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바다에서 온 사람이라 듣지 않는 건지, 병세가 악화되어 손쓸 길이 없는 건지는 몰랐다. 죽은 사람처럼 꼼짝 않고 누워서 살아 있다는 신호인양 가끔 신음소리만 내던 아내가 어느 날 눈에 약간 생기를 띠고 모처럼 입을 열었다.

“여보,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요. 바다에 몸을 담그고 싶어요.”

목소리와 눈빛에서 남편은 이 말이 곧 아내의 유언임을 깨달았다. 그는 군말 없이 아내를 업고 가까운 바닷가로 갔다. 아내의 몸에 좋을까 싶어서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문득 어두운 밤 납치한 아내를 업고 돌아가던 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지금처럼 가볍지 않았는데.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으나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침만 삼키며 묵묵히 걸었다.

바닷가는 바위투성이라서 배도 인기척도 없었다. 남편은 아내의 마른 몸을 파도가 닿는 자갈 위에 눕혔다. 오랜만에 아내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벼운 한숨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눈이 사르르 감겼다.
몇 번의 파도가 자갈 위를 훑고 지나가자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육신은 물거품이 되어 나고 자란 바다로 돌아간 후였다. 남편은 그제야 꾹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자리에 엎드려 한참이나 통곡을 하던 남자는 오래지 않아 근처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아내의 뒤를 따랐다.

* * * * *

용궁의 장수는 보고를 듣고는 바다로 돌아온 시신과 스스로를 바다에 맡긴 시신을 부부의 예를 갖춰 함께 장사지내주도록 명했다. 세월이 그의 마음에서 분노와 원한을 걷어간 걸까. 그의 비서인 가오리가 꼬리지느러미를 유유히 저으며 다가왔다.

“명하신 대로 장례를 마쳤습니다.”

장수는 그 말을 듣자 힘든 일을 마치고 지친 것처럼 의자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했다. 결국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구나.”
“이걸로 모두 끝난 건가요.”
“그래……. 두 부부가 있었다. 한 쌍은 산으로, 한 쌍은 바다로 돌아갔지. 그걸로 된 거다.”

말을 마친 장수는 이내 언제 지쳤냐는 듯이 기운차게 일어나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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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4.02.01 13:35 댓글 수정 삭제

    제목을 잘못 읽어서 "두부 이야기"인 줄 알고 "두부!! 두부 좋아!!" 이러면서 읽었는데 두부는 안 나오고 불쌍한 사람들만 잔뜩 나오는군요 ㅠㅠ 잘 읽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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