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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사랑하는 그대와

2010.01.29 22:4501.29

    I.
    그리하여 이야기는 다시 붉은 용의 탑으로 돌아온다. 그 높은 탑의 꼭대기에는 공주가 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 탑과 안에 든 공주는 붉은 용이 지키고 있다. 용은 불을 뿜고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공주하고 수다도 떨 줄 알고 그 나름대로 유머 감각도 좀 있고 그래서 커다란 보라색 눈이 어떻게 보면 귀엽기도 하고 그런 용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한 어린애가 공주를 구하러 나선다. 정체를 알고 보면 전에는 왕자였다가 이제는 명목상이나마 한 나라의 국왕 자리를 물려받은 이 소년은 소년답지 않은 끈기와 근성으로 몇 날 며칠 말을 달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붉은 용의 보금자리로 찾아온다. 그곳은 산꼭대기라도 좋고 깊은 계곡 밑바닥이라도 좋지만 어쨌든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안식을 갈구하나 영원히 찾지 못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이는 무시무시한 장소다. 어린 왕자는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 끝에 이런 황무지에 외따로 떨어진 용의 탑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전에 기사가 했듯이 용의 눈을 피해 높은 탑을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공주의 방으로 숨어든다.
    공주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다. 눈부신 하얀 뺨은 방 안이 용이 뿜어낸 열기로 언제나 따끈따끈하기 때문인지 홍조를 띠어 짙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다친 오른손에는 치마를 찢어 만든 붕대를 감고 있다. 왕자는 아름다운 공주의 잠든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다가 침대 위로 몸을 숙인다. 공주의 귓가에 속삭인다. 공주, 나 왔어요. 눈 좀 떠 봐요. 그리고 공주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입맞춤을 느끼고 공주가 눈을 뜬다. 왕자의 얼굴을 본다. 잠이 덜 깼는지 멍한 표정으로 잠시 어리둥절하여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뛰어 일어난다.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을 열어 말한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요?”
    “어떻게 오긴요.”
    공주가 자신을 알아보자 왕자는 얼굴이 환해진다.
    “공주를 구하러 왔죠. 자, 빨리 나랑 같이 집에 가요.”
    “아니, 저기, 그게….”
    공주는 당황한다. 공주 입장에서는 여태까지 겪은 일들이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말처럼 쉽게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왕자는 보아하니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인데다 원체 아직 어린애라서 어디까지 설명해줘도 될지, 설명을 해 준다고 해도 얼마나 알아들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공주는 망설인다.
    “왜 그래요?”
    왕자가 묻는다.
    “나랑 같이 집에 가기 싫어요?”
    공주는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왕자의 표정이 점점 슬퍼진다.
    “내가 싫어진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공주는 점점 더 당황한다. 어린 왕자는 그런 공주를 보고 더 끈덕지게 조르기 시작한다.
    “그럼 나랑 같이 가요. 난 이제 곧 왕이 될 거니까, 다시는 나쁜 용이 잡아가지 못하게 잘 지켜 줄게요. 그럼 우리 둘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요?”
    “아니, 저기, 그게 꼭, 용이 나쁜 게 아니고….”
    “나쁜 게 아니라니? 공주를 이런 데 가둬 뒀잖아요? 내가 물리쳐 줄테니까, 우리 빨리 집에 가요.”
    “그게, 저기….”
    공주는 정말로 곤란해져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그 때 밖에서 퍼덕퍼덕 하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달걀 썩는 듯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한다. 왕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움켜쥔다.
    곧 창문을 통해서 훅훅 찌는 열기가 뿜어 들어온다. 그리고 창 밖에 낯익은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가 나타난다. 왕자가 서투른 몸짓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든다. 왕자와 칼을 보고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 정확히 말하자면 그 눈동자의 나머지 부분인 용이 탑의 창 밖에서 울부짖는다.
    - 끼오오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용은 원래 그냥 평범하게 대화를 하는 쪽을 선호하며 평소에는 굳이 이런 식으로 울부짖지 않는다.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은 탑을 찾아오는 인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혹은 그 인간들을 겁주기 위해서, 펼치는 일종의 연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하듯이 용이 울부짖는 연기는 효과 만점이라서, 왕자는 과연 뒤로 흠칫 한 걸음 물러서면서 몸을 움츠리고 칼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공주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창 밖의 거대한 눈동자를 쳐다본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공주를 향해 새빨간 눈꺼풀을 재빨리 움직여 눈을 찡긋해 보인다. 왕자는 그런 공주와 창 밖의 보라색 눈동자를 번갈아 보면서 칼 손잡이를 더 꽉 움켜쥐고 빠르게 심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왕자가 막 칼을 치켜들고 창 밖의 거대한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탑 꼭대기 공주의 방 문이 벌컥 열린다.
    “… 고, 공주님….”
    기사가 고개를 들이밀며 헐떡거린다.
    “너야? 또 왔어?”
    공주가 경악하여 소리지른다.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가 창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안의 동태를 살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공주를 향해 새빨간 눈꺼풀을 깜빡여 보인다.
    - 다시 올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용이 속삭인다. 그러나 용은 자기 나름대로 속삭였을지 몰라도 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다 들었다. 왕자는 용이 입을 열자마자 방 안에 훅훅 뿜어 들어오는 열기와 유황 냄새에 코와 입을 막고 콜록거리며 뒤로 더 물러선다. 기사로 말하자면, 갑옷이라는 명목의 무거운 쇳덩어리를 온몸에 두르고 땅바닥부터 탑 꼭대기까지 뛰어서, 그러니까 처음에는 뛰다가 중간에는 걷다가 후반 약 3분의 1 정도는 기다시피해서 올라오는 바람에 완전히 지쳐 떨어져서 아직까지 죽을 듯이 헐떡거리면서 자기 몸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문고리를 붙잡고 간신히 서서 숨을 고르는 중이다.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네.”
    공주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내 팔자, 하고 한숨을 한 번 쉰 다음에 용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에게 말한다.
    “쟤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는 왕자 좀 집에 데려다 줄래?”
    - 글쎄.
    창 밖의 보라색 눈동자를 세로로 가로지른 검은 동공이 즐겁다는 듯이 가늘어진다.
    - 그보다는 기사를 내가 먹고, 너야말로 왕자랑 둘이서 집에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
    “싫어.”
    공주가 딱 잘라 거절한다.
    “난 거기 절대로 다시 안 돌아가.”
    - 그래?
    용이 창문 밖에서 실망했다는 듯 새빨간 눈꺼풀을 깜빡인다.
    -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리고 짙은 보라색 눈동자는 여전히 덜덜 떨며 칼 손잡이를 꽉 붙잡고 서 있는 왕자 쪽을 향한다.
    - 아가야, 이리 온. 집에 데려다 줄게.
    용이 다정하게 말한다. 방 안은 유황 냄새와 열기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며 서 있던 왕자는 창 밖의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용이 다시 한 번 달랜다.
    - 아가야, 네 공주님이 너만 먼저 집에 가랜다. 내가 데려다 줄게.
    왕자는 멍한 표정으로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와 공주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리고는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으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창 쪽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왕자가 고려하지 않은 요인이 있으니, 바로 공주의 방은 천장이 꽤나 낮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왕자는 또래보다 키가 크고, 국왕의 칼은 길기 때문에, 그걸 쳐들고 몇 걸음 가지도 못해서 칼은 천장에 걸려 버린다. 그런데 또 왕자는 마침 전속력으로 뛰어가던 중이기 때문에, 칼이 천장에 걸려 손에서 튀어나가면서 왕자는 제 기운을 못 이겨 앞으로 고꾸라진다. 국왕의 칼은 왕자의 손에서 튀어나가 쨍,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마룻바닥 위에서 칼은 빙글빙글 돌며 미끄러지다가 공주의 침대 밑으로 들어간다. 왕자는 넘어져서 바닥에 부딪쳐 코피가 나고 입술도 좀 터졌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엉엉 울기 시작한다.
    공주는 재빨리 왕자에게 다가가서 안아준다.
    “다쳤어요? 어머, 피가 많이 나네….”
    공주는 치맛자락으로 대충 왕자의 얼굴을 닦아준다. 왕자가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공주는 왕자를 품에 꼭 안고 달래준다.
    “많이 아파요? 괜찮아요, 금방 나을 거예요. 울지 말아요, 착하지….”
    - 꽤 잘 다루네.
    창 밖에서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가 이런 모습을 보고 논평한다.
    왕자의 등 뒤에서 드디어 숨을 돌린 기사가 공주에게 뭐라고 말하며 방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공주님, 저….”
    그러나 공주는, 여전히 서럽게 울어 젖히는 왕자를 품에 안고, 기사에게 위협적으로 한 손을 들어 보인다.
    “들어오지 마. 거기 서 있어.”
    기사는 움찔하고 제 자리에 선다. 창문 밖에서 용이 다시 조른다.
    - 나 주라. 내가 먹어 준다니까.
    “아, 시끄러. 안 된다고 했잖아.”
    공주가 짜증을 낸다. 그리고 조금씩 울음을 그쳐가는 왕자의 등을 건성으로 토닥이며 기사에게 묻는다.
    “넌 뭐야?”
    “예?”
    기사는 공주와 용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가 공주가 갑자기 묻자 화들짝 놀라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공주가 신경질을 낸다.
    “여긴 왜 또 왔냐고. 다시 나타나면 죽여버린다는 말, 못 들었어?”
    공주의 품에 안겨 있던 왕자가 훌쩍훌쩍 울음을 그쳐 가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기사와 공주의 대화를 알아들으려고 애쓰는 모양이지만 둘은 왕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모국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왕자가 못 알아듣는 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주는 다시 기사에게 왕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짜증을 낸다.
    “이번에도 네 왕비님이 나 죽이라고 보냈냐?”
    “예? 아, 그게, 저기….”
    사실이기 때문에 기사는 머뭇거린다. 공주는 다시 한숨을 쉬고 창 밖의 거대한 눈동자를 바라본다.
    “쟤, 마법 풀린 거 맞아?”
    용도 당황한다.
    - 그 때는 풀린 것 같았는데…. 다시 걸렸나?
    “무슨 남자가 저렇게 쉬워? 마법이 막 풀렸다 걸렸다 하고….”
    투덜거리며 공주는 품에 안겨 있던 왕자를 적당히 달래서 일으켜 앉힌 후 자기도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침대 쪽으로 가서 그 밑에 뒹구는 국왕의 칼을 집어든다.
    “그래 뭐, 좋다 이거야.”
    칼을 들고 돌아서며 공주가 기사를 향해 말한다.
    “오늘 너하고 나하고 아주 끝장을 내자.”
    “아, 그렇지만, 전….”
    기사는 당황하여 그게 아니라고 양 손을 내젓는다.
    “왕비님께서 보내신 건 맞지만, 전 공주님을 죽이러 온 게 아니라….”
    이 때 바닥에 앉아 있던 왕자가 슬금슬금 일어나서 공주와 기사 사이를 막아선다.
    “무슨 소리예요?”
    왕자가 아직도 눈이 벌겋게 부은 채 눈물과 코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묻는다.
    “엄마가 왜 공주를 죽여요?”
    공주와 기사는 깜짝 놀라서 왕자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마주친다. 얘가 지금 우리가 한 말을 알아들은 건가?
    왕자가 다시 외친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엄마가 공주를 왜 죽여요?”
   
    II.
    그러니까 왕자는 공주가 사라진 바로 그 날 저녁에 공주와 기사가 자기 앞에서 했던 대화를 못 알아들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 혼자 조금씩 공부를 했던 것이다. 외국어란 하나쯤 알아둬서 나쁠 것 없고 더구나 배우자가 외국인이라면 그 배우자의 모국어로 기본 회화 정도 마스터하는 것은 생활의 편의라는 측면에서나 인간 된 예의라는 측면에서나 필수다. 그러나 공주가 돌아오면 놀라게 해 주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공부했던 것이 어린애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어른 남자들도 별로 감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고부갈등을 갑자기 알게 돼 버린 것이니 이런 상황에서는 모르는 것이 약인지 아는 것이 힘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고 보겠다.
    그리하여 기사도 공주도 선뜻 뭐라고 대답을 해 주질 못했고, 그러자 점점 더 불안해진 왕자는 이제 눈에 다시 눈물까지 글썽거려 가면서 세 번째로 외쳤던 것이다.
    “엄마가 공주를 왜 죽이냐고? 거짓말이지?”
    공주와 기사는 당혹한 표정으로 서로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왕자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또 다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공주와 기사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외친다.
    “거짓말이죠, 그렇죠? 엄마가 공주를 죽이라고 한 거 아니죠? 대답해 봐요!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공주는 얘 좀 얼른 집에 데려다 주라고 용을 재촉하려고 창 밖을 쳐다본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는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방금까지 저기 있던 용, 어디로 갔어?”
    공주가 더욱 당황하여 기사에게 묻는다. 기사도 더욱 더 당황한 표정으로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왕자도 더욱 더 큰 소리로 울면서, 공주와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더욱 더 언성을 높여 외친다.
    “엄마가 공주를 죽이라고 했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무슨 거짓말을 하는 거야! 왜 대답을 안 해 주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들 나만 빼놓고, 다들 나한테만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저기, 왕자님, 진정하세요.”
    공주가 달랜다.
    “그게, 얘기하자면 좀 복잡하니까…, 우선 우리, 집으로 가요.”
    “안 가!”
    왕자는 이제 발악을 하면서 운다.
    “집에 안 가! 공주 미워! 혼자서 어디로 없어지더니, 어떻게 된 건지 말도 안 해 주고…. 엄마가, 엄마가….”
    고함을 치다가 왕자는 제 울음에 목이 막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울어댄다. 공주와 기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통곡을 하는 왕자를 그저 바라보고 서 있다.
    그 때, 창문으로 누군가 불쑥 들어왔다.
    “어른들 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복잡한 법이유.”
   
    III.
    “… 유모?”
    공주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는 사이에, 창문을 통해 갑자기 나타난 유모는 어린 왕자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
    “운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 얼른 뚝 그치게유. 그러다가 목 다 쉬겠구먼.”
    “그치만 엄마가…. 공주가….”
    유모는 과연 어린애 다루는 데는 전문가라서, 왕자는 고분고분 유모가 달래는 대로 조금씩 울음을 그친다. 그러면서도 훌쩍훌쩍 하면서 여전히 공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더듬더듬 뭐라고 항의를 하려고 한다. 유모가 다시 달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사이가 나쁠 수도 있는 법이유. 어른들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잘 해결할 테니까 그만 울고 뚝 그치게유.”
    그리고 유모는 공주를 가리키는 왕자의 손가락을 자기 손으로 감싸서 내린다.
    “사람한테 삿대질하는 거 아니유.”
    “그렇지만 엄마는…, 어떻게…, 된 거야…. 공주를, 왜….”
    왕자가 훌쩍거리면서도 끈질기게 질문을 되풀이한다. 유모가 한숨을 쉰다. 그리고 공주에게 말한다.
    “공주님이 설명 좀 해 주게유. 부엌에 가서 먹을 것 좀 찾아올 테니.”
    그리고 유모는 천천히 한가롭게 방문으로 나가 버렸다.
    공주도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왕자의 손을 잡았다.
    “이리 와서 좀 앉아 봐요.”
    공주는 어린 왕자의 손을 잡고 이끌어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자기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
    왕자는 그렇게 앉아서 자기 손을 잡은 공주의 손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엄마가 공주를 죽이려고 했다는 거, 진짜예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여기 와서 숨어 있는 거예요? 집에 안 가고?”
    공주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또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젠 집에 안 갈 거예요?”
    공주는 잠깐 망설였다. 왕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세 번째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진짜로, 집에 안 갈 거예요? 내가 부탁해도?”
    공주는 어린 왕자의 손을 양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왕자님이 싫은 게 아니에요.”
    공주가 그 손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난 왕비님이랑 싸우는 게 싫은 거예요.”
    “안 싸우면 되잖아요.”
    왕자가 여전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반박했다. 공주는 그런 왕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작게 한숨을 쉰 후에 대답했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왕자는 여기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공주가 물었다.
    “왕자님도, 내가 죽는 건 싫죠?”
    왕자는 계속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공주가 손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여기 있을 테니까,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나러 와요.”
    왕자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방문 쪽에서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이 문 좀 열어주게유!”
    문 밖에서 유모의 목소리가 외쳤다. 문간에 서 있던 기사가 방문을 열었다.
    “부엌두 참 멀기두….”
    유모가 투덜거리면서 쟁반에 차와 과자를 하나 가득 받쳐들고 들어왔다.
   
    공주와 왕자와 기사와 유모는 말없이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가끔 왕자가 과자를 집어 입에 넣고 씹는 와그작 와그작 하는 소리만 방 안에 울렸다.
    마침내 공주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런데 유모는 여기 어떻게 왔어요?”
    “다 방법이 있지유.”
    유모는 비밀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용은 아까부터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공주가 중얼거렸다.
    왕자가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용, 저 아래에서 자요.”
    “그래요?”
    공주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용하고 유모하고 좀 비슷하네요. 둘 다 아무 때나 막 자 버리는 게….”
    “다른 점도 있지유.”
    유모도 웃으며 말했다.
    “용이 자면 내가 깨고, 내가 자면 용이 깨지유.”
    이 말에 공주와 기사와 왕자가 일시에 동작을 멈추었다. 공주는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려다 말고, 기사는 찻잔을 내려놓고 왕자가 다 먹어버리기 전에 과자 하나만 맛을 좀 보려고 손을 뻗다 말고, 왕자는 입 안에 과자를 하나 가득 우겨넣고 씹다 말고, 모두 유모를 응시했다.
    유모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이어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니께유.”
    말하면서 유모는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그리고 다시 비밀스럽게 웃었다.
    ‘이어진다’는 말에 공주와 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서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치자 또한 자기도 모르게 둘 다 불편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를 모두 마시고, 과자도 결국 왕자가 기사에게 단 하나만 뺏기고 전부 먹어치우고 나서, 유모는 빈 찻잔과 그릇을 다시 쟁반에 주섬주섬 챙겨들고 일어섰다. 아까처럼 한가로운 걸음으로 천천히 방문을 나섰다.
    유모가 나가고 나서 기사가 왕자에게 말했다.
    “저와 함께 돌아가시지요.”
    그 말에 왕자는 몹시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공주를 쳐다보았다. 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눈에 다시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왕자가 문득 말했다.
    “… 그런데, 칼은?”
    “예?”
    기사가 돌아보았다. 공주는 무슨 말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왕자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칼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기사님이 그랬잖아요….”
    그리고 왕자는 바닥으로 내려가서 침대 밑에 납작 엎드렸다. 그 아래 미끄러져 들어간 칼을 끄집어냈다.
    공주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누가 칼을 가져오래요?”
    그래서 기사는 붉은 용의 탑을 둘러싼 황무지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되살아난 기사들의 시체에게 둘러싸여 겪었던 일들을 공주에게 들려주었다.
    유모가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탑 꼭대기 공주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기사가 막 이야기를 마치려던 참이었다.
    “다들 집에 가는 거 아니었에유?”
    유모가 물었다.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기사님하고 왕자님이, 밤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한대요, 할 일이 있다고.”
    “그래유?”
    유모가 기사와 공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뭔가 꺼냈다.
    “그럼 이것도 같이 처리하게유.”
    공주는 유모가 내미는 것을 받았다.
    “그거 찾느라 어제 하루 죙일 정원을 돌아다녔더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구먼.”
    유모가 투덜거렸다.
    공주는 언젠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옛날에 달빛 아래 자신과 기사를 평생토록 이어 주리라던 붉은 실을 손에 쥔 채 기사를 돌아보았다. 기사는 공주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이건, 보름달 아래에서만 효력이 있지 않아요?”
    공주가 물었다.
    “여기는 항상 보름달이 뜨지유.”
    유모가 웃으며 대답했다.
   
    IV.
    해가 질 때까지 기사와 왕자는 탑 안을 돌아다니면서 버려진 칼을 모았다. 공주도 거들었다.
    몇 시간이나 작업을 하면서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각자 그 나름대로 머릿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이고 있었고, 그래서 누군가 침묵을 깨려고 입을 열었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졌다. 하늘에는 이미 남빛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지만 둥글고 붉은 불덩어리가 서쪽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곳에 여전히 따스하게 주황색 기운이 남아 있는 시각에 기사는 그 때까지 모은 칼을 밧줄로 한데 묶어서 끌고 탑을 나섰다. 왕자도, 기사와 공주가 말렸지만, 막무가내로 따라 나섰다. 말에 오르려 했으나, 이번에도 두 사람이 타고 온 말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기사가 혼잣말로 욕을 하며 뭐라고 투덜거렸다.
    “말이 어디로 간 거예요?”
    왕자가 물었다.
    “어딜 가긴유, 되살아난 시체들한테 먹힌 게지유.”
    기사가 깜짝 놀라서 뒤돌아 보았다. 어느 새 나타난 유모가 탑 아래 쪽문 옆, 공주 뒤에 서 있었다.
    유모가 왕자를 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왕자님은 여기 있게유. 이런 데는 어른이 가야 하는 법이유.”
    그러나 왕자도 역시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칼은 내가 돌려드려야 해요.”
    유모는 심각한 얼굴로 왕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왕자의 표정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가 옆에서 기사에게 물었다.
    “이거, 잘라버려도 되죠?”
    기사는 공주가 내민 빨간 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복잡한 표정이 되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삭였다.
    “… 죄송합니다.”
    공주는 손에 쥔 붉은 실을 들여다보며 대답 대신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기사는 칼 뭉치를 묶은 밧줄을 어깨에 메고 끌고 가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유모가 말했다.
    “잠깐 기다리게유. 그걸 다 지고 가다간 한 마장도 못 가서 쓰러지겠구먼.”
    그리고 유모는 손가락을 딱, 하고 울렸다.
    그러자 멀리서 다각다각 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남빛이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푸른 인광 네 개가 나타나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뭐예요, 저게? 어떻게 한 거예요?”
    공주가 놀라서 물었다.
    유모는 다시 비밀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들은 어둠 속에서 보기에 눈에 새파란 불이 켜진 것 외에는 아무 이상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올라타려고 가까이 가서 보니 기사가 타고 온 말은 엉덩이에, 왕자의 말은 오른쪽 앞다리 부근에 물린 심하게 물린 자국이 있었다. 가죽이 뜯어지고, 그 아래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미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말을 타려는 기사와 왕자에게 유모가 말했다.
    “절대로 물리지 말게유. 말한테나, 그 기사들한테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도, 영문도 모르면서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가 덧붙였다.
    “물릴 것 같으면, 말을 내주고 도망치게유.”
    왕자가 뭐라고 항의하려 했다.
    “그렇지만, 내 말은….”
    “… 이미 죽었습니다.”
    기사가 옆에서 짧게 내뱉었다. 왕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떠났다. 왕자와 기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다각다각 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낡고 녹슨 칼 뭉치가 땅의 돌과 모래에 서로서로 부딪치는 덜그렁 덜그렁 하는 쇳소리가 오랫동안 들려왔다.
   
    V.
    왕자와 기사는 침묵 속에 말을 타고 조용히 나아갔다. 어둠은 갈수록 차차 짙어져서 이제 주위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고, 타고 있는 말의 눈에서 이는 새파란 인광만 바로 앞에 보일 뿐이었다. 왕자와 기사는 죽은 말에게 길을 맡긴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둠 속을 떠 갔다.
    갑자기 왕자가 물었다.
    “우리 엄마, 좋아해요?”
    기사는 왕자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짙은 어둠 때문에 왕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왕자가 다시 물었다.
    “우리 엄마, 좋아하냐고요.”
    “… 예.”
    기사가 대답했다.
    왕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왕자가, 아까처럼 갑자기, 말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기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 속에 한동안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다가, 어린 왕자가 다시 말했다.
    “아버지는, 나도 별로 안 좋아했어요.”
    “하지만, 이젠….”
    기사는 뭔가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치 마법처럼, 깜깜하던 하늘에 돌연히 달이 나타났다. 수십 개의 횃불을 켠 것처럼 달은 희고 투명하고 차가운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리고 왕자와 기사는 저 앞에서 언뜻 작고 성긴 숲처럼 보이는 것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저게 뭐예요?”
    왕자가 속삭였다.
    기사는 대답하지 않고 소리 없이 말에서 내렸다. 밧줄에 묶어 끌고 온 칼 뭉치를 풀었다. 왕자가 따라 내리려 하자 손짓으로 저지했다.
    가지도 잎사귀도 없는 나무들이 달빛 아래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갈라진 목소리가 물었다.
    - 너희는 누구인가?
    그와 함께, 생명을 잃었으되 죽지 못하고 썩어가는 시체들의 무리가 희고 찬란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V.
    높은 탑의 창문을 통해서 희고 찬란한 달빛이 흘러 들어왔다. 공주는 붉은 실을 든 손을 창 밖으로 내밀었다. 실은 달빛을 받아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였다. 공주는 그 모습을 잠시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예쁘지유?”
    유모가 옆에서 말했다. 공주는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에유?”
    공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주는 다른 한 손에 단검을 들고 창 밖으로 내밀었다.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 아래, 엉켜버린 붉은 실을 칼날에 걸고 당겨서 끊었다. 조각조각 끊어진 실은 하얀 달빛 속에 둥실 떠서 마치 붉은 꽃잎처럼 천천히 탑 아래로 떨어져서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VI.
    밤의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기사들의 시체를 보고 왕자는 말의 고삐를 당겼다. 말은 걸음을 멈췄다가 뒷걸음질쳤다.
    기사는 말에서 내렸다. 밧줄로 묶은 칼 뭉치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언젠가 보았던, 목이 잘려 해골을 옆구리에 낀 시체가 선두에 서서 물었다.
    - 너희는 누구인가?
    그 뒤에서, 두 눈의 안구가 모두 떨어져나가고 퀭한 눈구멍만 남은 시체가 물었다.
    - 너희도 우리와 같은가?
    “우리도 너희와 같다.”
    기사가 대답했다.
    “우리도 기사다.”
    - 기사는 임무를 수행한다.
    사지가 모두 절반씩 썩어 떨어져나가서 바닥을 기는 시체가 말했다.
    - 우리의 임무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얼굴의 절반이 부서져나가고 나머지 절반은 살가죽이 썩어 허물어진 시체가 말했다.
    “나의 임무는 너희들에게 칼을 돌려주는 것이다.”
    기사가 대답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낡고 녹슨 검 뭉치를 묶은 밧줄을 끊었다. 양 손에 낡은 칼을 하나씩 잡고 높이 들어올린 채 말했다.
    “칼의 주인은 누구인가? 너희에게 안식을 찾아주려고 돌아왔다.”
    되살아난 기사들의 죽은 시체가 기사를 에워싸고 점점 좁혀 들어왔다. 한쪽 팔이 떨어져나간 시체가, 기사가 높이 쳐든 검을 향해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은 다른 팔을 뻗었다.
    - 칼….
    한쪽 팔이 없는 시체가 중얼거렸다.
    - 안식을….
    시체의 떨어져나가지 않은 다른 쪽 팔이 언젠가 자신이 소유했던 검에 닿은 순간, 검은 먼지가 되어 부서졌다. 그와 함께 시체도 영원히 죽어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할 백골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버렸다.
    한 쪽 옆구리에 해골을 낀 목 잘린 시체도 기사에게 다가와서 다른 한 팔을 뻗었다.
    - 칼….
    시체의 옆구리에 낀 해골이 턱뼈를 덜그럭거렸다.
    - 내 검….
    그리고 이번에도, 시체의 팔이 검에 닿은 순간, 검은 먼지로 화(化)하고, 시체의 영혼은 저승으로 사라져, 죽은 기사는 땅에 쓰러져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는 다시 칼 뭉치에서 검을 꺼내 높이 쳐들었다. 되살아난 기사들의 시체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서 기사를 에워쌌다. 기사의 어깨를, 팔을, 다리를 잡아당겼다. 기사가 몸을 돌려 빠져나오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왕자님…!”
    되살아난 시체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시체들에게 짓눌려, 뜯어먹히면서 기사가 외쳤다.
    “도망치십시오…!”
    그 소리를 듣고 왕자는 말에서 내렸다. 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미처 가까이 가기도 전에, 흰 물결처럼 사방을 가득 채운 달빛 아래 나타난 한 창백한 형체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 아들아.
    죽은 국왕의 유령은 공포에 질린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핏기 없는 웃음을 지었다.
   
    기사가 되살아난 시체들에게 뜯어먹히면서 지르는 무시무시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죽은 아버지의 창백한 유령 앞에서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허리에 찬 칼을 풀었다. 내밀었다. 죽은 국왕의 유령은 아들이 내미는 칼을 받아들었다.
    - 돌려주었구나….
    죽은 국왕의 유령이 속삭였다.
    - 이제 나를 묻어다오….
    그리고 죽은 국왕의 유령은 칼과 함께 사라졌다.
   
    소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기사의 비명소리가 이미 그친 뒤였다.
    되살아난 시체들 중에서 자기 칼을 찾아낸 이들은 이미 백골이 되어 땅에 쓰러졌다. 그러나 칼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제 소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일어서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새하얀 달빛 아래 시체들의 썩어가는 살점과 빛 바랜 뼈가 똑똑히 보였다.
    소년은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그러다가 등 뒤에 서 있던 말에게 부딪쳤다. 어린 왕자는 서둘러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말 머리를 돌리고 박차를 가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달이 다시 모습을 숨겼다. 하늘을 가득 채웠던 은빛이 사라졌다. 왕자는 죽은 말을 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렸다. 뒤에서는 되살아난 시체들이 천천히, 쉬지 않고, 쫓아왔다.
   
    VII.
    왕자는 날이 밝을 때까지 말을 달렸다. 동녘의 빛이 하늘을 채우고 사방으로 뻗어나가 왕자가 탄 말을 비춘 순간, 말은 땅에 쓰러져 뼈만 남은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왕자도 땅으로 튕겨나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VIII.
    왕자를 발견한 것은 국경 반대쪽, 그러니까 왕자의 고국 쪽에서 땔나무를 찾아다니던 숲지기였다. 이전에 공주나 기사가 거쳤던 것과 비슷한 경로로,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국경의 반대쪽에서, 왕자는 숲지기의 집과 인근 영주의 성을 거쳐 왕궁으로 귀환했다.
    왕궁으로 돌아와서 왕자는 이레 낮 이레 밤 동안 죽을 듯이 앓았다. 어머니인 왕비의 극진한 간호 아래 일주일간 밤낮으로 앓다가 마침내 깨어나서 왕자는 눈을 뜨자마자 뭐라고 속삭였다. 왕비는 아들의 입 쪽으로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아버지를 묻어 드려야 해요.”
    왕자가 말했다.
    뭐라고 말해도 듣지 않고 왕자는 이 한 마디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관에 넣어 왕궁 앞에 전시해 놓았던 국왕의 시체는 드디어 매장되어 땅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게 되었다.
   
    IX.
    국왕을 매장하던 날에는 아침부터 하루종일 안개 같은 비가 뿌렸다. 햇빛이 보이지 않고, 하늘은 회색으로 침침하고 음산했다.
    관을 싣고 가는 마차 앞뒤로 군대가 행진하고, 장지에 도착해서는 사제가 길고 긴 기도문을 읊으며 장엄한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하여 회색으로 흐렸던 하늘이 침침한 푸른빛으로 어두워져 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국왕의 시체가 든 관은 검은 끈에 묶여 땅 속으로 내려갔다. 관습대로 후계자인 왕자가 입고 있던 검은 윗옷을 벗어서 찢은 뒤 구덩이 속 관 위로 던졌다. 이어서 왕비가, 관습과는 상관 없이, 손에 끼었던 결혼 반지를 검은 비단에 싸서 구덩이 속으로 던졌다. 그리고 시종들이 관 위로 흙을 덮기 시작했다. 왕비와 왕자, 그리고 구덩이 주위에 도열한 여러 대신과 귀족들은 관이 완전히 흙에 묻히고 구덩이가 편편하게 메워질 때까지 둘러서서 지켜보았다.
    마침내 매장이 끝났다. 사제가 다시 기도문을, 이번에는 간단하게, 읊었다. 역시 관습에 따라 왕비와 왕자는 무덤의 흙을 한 줌 집어 입을 맞추고 도로 무덤 위에 뿌린 뒤 준비해 온 돌멩이를 그 위에 얹었다. 참석한 여러 대신과 귀족들도 서열에 따라 한 사람씩 차례로 똑같이 되풀이했다.
    의식이 전부 끝났을 때는 이미 사방이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시종들이 높이 쳐든 횃불의 불빛을 따라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장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때, 뒤에서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까지 무덤 곁에 서 있던 왕자가 가장 먼저 멈추어 서서 돌아보았다. 왕자가 멈추어 섰기 때문에 왕비도 함께 멈추어 서서 돌아보았다.
    무덤에서 다시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왕자는 횃불을 비출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시종들은 아무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왕자가 한 시종이 들고 있던 횃불을 빼앗아 무덤에 가까이 갔다. 그 뒤에서 왕비가 따라왔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는 무덤을 덮었던 돌멩이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왕자가 보는 앞에서 돌멩이 사이를 비집고 창백한 손이 한 개 튀어나왔다. 그리고 또 한 개.
    왕자는 뒤로 물러섰다.
    손은 무덤을 덮은 돌멩이를 아무렇게나 치우고는 흙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왕비가 시종들을 불렀으나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사제는 멀찍이 서서 열심히 큰 소리로 기도문을 읊었다.
    손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여서 흙을 전부 치웠다. 그리고 시체가 칼을 들고 무덤 속에서 일어섰다.
    흙투성이가 되어 되살아난 국왕의 시체는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왕의 검을 들고 천천히 왕자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왕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뒤에 있던 왕비가 얼른 아들 앞으로 와서 막아섰다.
    “폐하,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국왕의 시체에게 왕비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도 이승을 떠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국왕의 시체가 다시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 너다.
    그와 함께 국왕의 시체는 검을 치켜들고 왕비를 향해 내리쳤다.
   
    왕의 시체가 칼을 내리친 순간 왕비는 양 손을 들어 칼날을 잡았다. 그러나 검은 왕비의 손바닥을 베며 그대로 전진하여 목에 박혔다. 왕비는 땅에 쓰러졌다.
    왕자가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들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정신을 차린 시종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왔을 때는 국왕의 시체도 국왕의 칼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피 흐르는 손으로 피 흐르는 목을 붙잡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쓰러진 왕비의 시체 뿐이었다.
   
    X.
    궁정의 의사가 왕비의 사망을 판정한 후, 관례대로 왕비의 시체 또한 관에 넣어 왕궁 앞에 전시해 두었다.
    다음날, 관만 남기고 왕비의 시체는 사라졌다.
   
    왕자는 아버지의 시체가 살아나 어머니를 죽인 날부터 말을 하지도 침전에서 나오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공주가 왕궁으로 돌아왔다.
   
    XI.
    공주는 곧바로 왕자의 침전으로 향했다. 당혹해하는 시종들의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왕자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공주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왕자는 고개를 돌렸다. 공주를 보고 왕자의 표정이 변했다. 왕자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공주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왕자의 손을 잡았다.
    “나와 함께 가겠어요?”
    공주가 속삭였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왕자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공주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XII.
    공주를 따라서, 왕자는 달의 북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몇 날 며칠 말을 달리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공주와 왕자는 붉은 용의 탑을 둘러싼 황무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공주는 말을 멈추고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둥글고 붉은 불덩어리를 바라보면서 공주가 왕자에게 물었다.
    “나, 원망하지 않아요?”
    왕자는 대답하지 않고 의아한 표정으로 공주를 쳐다보았다.
    공주가 말했다.
    “내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붉은 용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이 황무지로 오지 않았더라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고 운명에 모든 것을 맡겼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고, 왕자님은 지금쯤 어머니와 함께 왕궁에서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을 지도 몰라요. 날, 원망하지 않아요?”
    왕자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마침내 짙은 쪽빛 어둠이 사방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공주는 다시 말에 올랐다. 왕자도 말없이 따라서 말에 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점점 짙어지는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한동안 북쪽으로 말을 몰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새까만 하늘이 갈라지며 하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달은 망망대해를 비추는 등대와도 같이 진하고 투명하고 차가운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공주가 말을 멈췄다. 말에서 내렸다.
    왕자도 따라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기다렸다.
   
    달은 검은 하늘을 한가롭게 떠 갔다. 천천히 여유롭게 흘러서 달은 하늘 한복판에 이르렀다. 새하얗고 둥근 얼굴이 죽음과 삶의 경계에 띠를 두른 황무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황무지에 두 개의 창백한 형상이 나타났다.
    왕자는 목 한 쪽을 뜯어먹히고 가슴 한복판에 구멍이 뚫린 기사와, 양 손과 목을 칼에 베어 상처를 입은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왕비는 달빛 아래 서서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흔히 하듯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왕비에게 기사가 다가갔다. 왕비는 조금 놀랐다가 기사를 알아보고 이내 안심하는 것 같았다.
    기사는 왕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슴에 뚫린 구멍에 한 손을 넣어 심장을 꺼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왕비 앞에 내밀었다.
    왕비는 기사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심장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먹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왕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공주는 차가워진 왕자의 손을 꼭 잡았다.
    왕비가 기사의 심장을 다 먹고 나자 기사는 일어섰다. 손가락으로 왕비의 입가에 묻은 피를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리고 기사는 왕비에게 입맞추었다.
    새하얀 달빛 아래에서 기사는 창백했다. 왕비만이 이전과 같은, 다만 이전보다 조금 옅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죽은 기사와 죽은 왕비의 입맞춤은 길고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기사와 왕비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달빛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서 이윽고 사라졌다.
    죽지도 살지도 않았으므로, 그들은 저 세계로 넘어가서 이승의 삶과 사랑을 잊지도 못하였고, 또한 이승으로 돌아와서 속세의 욕심이나 이해 관계에 얽매이지도 않게 되었다. 부드러운 달빛이 하얗게 서린 어둠 속에서 그들은 영원한 평온과 정적 속에 영원히 단 둘이 남아 있었다.
    “매일 밤 저렇게 만나서, 매일 밤 저렇게 같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공주가 속삭였다.
    왕자가 아주 오랜만에 입을 열어, 낮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는…, 행복하실까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과 영원토록 함께 할 시간이, 매일 밤 처음 시작되어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왕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주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 고마워요.”
    왕자가 속삭였다.
    그리고 왕자는 공주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오랫동안 울었다.
    왕자의 눈물이 따뜻하게 어깨를 적시는 동안, 공주는 왕자가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며, 다시는 이전의 순진무구한 소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XIII.
    왕자와 공주는 왕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뒤에도 왕자는 한동안 침전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주가 침전에 찾아오면 반가워했고, 오로지 공주하고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왕자는 마침내 스스로 침전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런 후에 즉위식을 거쳐 왕자는 왕이 되었다. 공주도 그와 함께 왕비가 되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의지하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에 힘썼다.
   
    XIV.
    바쁘고 어지럽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이제 국왕이 된 왕자는 가끔 말을 달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왕비가 된 공주는 남편이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가끔은 둘이 함께 사라지기도 했다.
    황무지의 무심하게 아름다운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은 죽은 기사와 죽은 왕비가 끝없이 처음으로 단 둘이 만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맹세하고 처음으로 손을 잡고 함께 달빛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지켜보았다. 기사와 왕비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면 왕자는 언제나 공주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때때로 그 손등에 조심스럽게, 오랫동안, 입맞추었다.
    그런 후에 공주는 때때로 동이 틀 때까지 말을 달려서 붉은 용의 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유모가 끓여주는 차를 마셨다. 혹은 유모가 탑 꼭대기 공주의 방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을 때면, 창문 밖으로 보이는 붉은 용의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와 함께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붉은 용의 탑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끝에 가면 언제나, 공주는 왕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감히 바라건대, 아마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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