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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높은 탑에 공주와

2009.12.26 23:2512.26

 

    I.


여기 어떤 높은 탑 속에 한 공주가 있다. 그리고 그 탑과 안에 든 공주는 사나운 용이 지키고 있다. 용은 불을 뿜고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리하여 한 용감한 기사가 나선다. 기사는 몇 날 며칠을 말을 달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사나운 용이 사는 곳으로 찾아온다. 그곳은 산꼭대기라도 좋고 깊은 계곡 밑바닥이라도 좋고 혹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이라도 좋다. 어쨌든 기사는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 끝에 멀고 먼 장소에 외따로 떨어진 용의 보금자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용의 눈을 피해 높은 탑을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공주의 방으로 숨어든다. 공주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다. 눈부신 하얀 뺨은 탑에 갇힌 채 용에게 시달려서인지 조금 여윈 듯하고, 붉은 입술도 약간은 파리해진 것처럼 보인다. 기사는 아름다운 공주의 잠든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다가 침대 위로 몸을 숙인다. 공주의 귓가에 속삭인다. 공주님, 제가 왔습니다. 공주님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입맞춤을 느끼고 공주가 눈을 뜬다. 기사의 얼굴을 본다.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뛰어 일어난다.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을 열어 말한다.


“뭐야, ? 여기까지 왜 또 왔어?”


기사의 표정이 구겨진다. 아아 기사님을 기다렸습니다, 라든가,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라든가, 뭐 이런 종류의 대사를 기대한 것이 틀림없다. 기사가 설명한다. 그러니까 공주님, 나쁜 용에게 붙잡혀 이 높은 탑에 갇혀 있는 공주님을 구출하기 위해서 제가….


“구출 좋아하네.”


공주가 말허리를 자른다.


“나가. 당장 나가.”


기사가 다시 설명한다. 아니 그렇지만 공주님. 사나운 용이….


“나가라는 말 안 들려?”


공주가 눈을 치뜨고 기사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내 칼 어디갔어? 혹시 내 칼도 네가 숨겼냐?”


기사는 당황한다. 아니 저기 공주님, 칼이라뇨….


“아, 여기 뒀구나.”


공주가 도로 침대에 앉는다. 그리고 베개 밑에서 단검을, 매트리스 밑에서는 장검을 꺼낸다. 꺼낼 때 장검이 침대 밑판에 쓸리면서 스릉, 하고 칼날 우는 소리를 낸다.


공주쯤 되는 사람이 도대체 왜 침대 속에 저런 걸 숨겨두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기사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본다. 그러나 기사의 기분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공주는 양 손에 칼을 들고 천천히 일어선다. 오른손에 든 장검과 왼손에 쥔 단검을 기사를 향해 똑바로 겨눈다.


“말로 할 때 곱게 나가라.”


기사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칼을 든 공주를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러나 칼이 눈에 들어오자 기사답게 곧 정신을 차린다. 공주를 향해 지긋이 다가서며 다정하게 팔을 벌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칼을 쥔 공주의 양 손을 하나씩 살그머니 잡는다. 아이를 달래는 말투로 말하기 시작한다. 공주님, 그러지 마시고….


따악. 공주가 오른손에 든 장검의 칼등이 기사의 왼팔을 내리친다. 기사가 비명을 지를 틈도 주지 않고 장검은 어느 새 인정사정 없이 기사의 목을 겨누고 있다.


“이게 어디서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그래?”


공주가 장검을 든 채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칼끝이 기사의 목에 닿는다.




기사는 경동맥 바로 아래를 겨누는 칼끝의 날카로운 감촉에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방금 같은 칼에 맞아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다른 한 손으로 부여잡고 잠시 넋을 놓은 채 공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람. 칼 쓰는 법은 대체 언제 배운 거야. 그나저나 용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조용히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이 모양이면 그건 애저녁에 글렀군. 위험하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리하여 기사는 다친 팔을 움켜잡은 채 그대로 조금씩 뒷걸음질 치면서 퇴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퇴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사가 방금 들어온 창문이다. 들어올 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퇴로로서 그다지 현실성이 없다. 일단 창턱으로 가려면 공주가 오른손에 든 장검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창문으로 무사히 나간다고 해도, 탑이 높기 때문에 지상까지의 거리도 무척 멀다. 올라올 때 죽을 고생 한 걸 생각하면 기사는 온 길로 다시 가기는커녕 솔직히 그 창문 쪽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별로 현명한 선택이라 볼 수 없다. 게다가 내려가는 길에 용이 깨기라도 하면 그 길로 대략 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남은 한 가지 퇴로는 공주의 방문이다. 문까지는 그냥 뒤돌아서 몇 걸음 뛰어가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문을 통해서 나가려면 땅에 이르기까지 높은 탑 안에 나선형으로 배배 꼬인 수천 개의 계단을 두다다다 달려 내려가야만 한다.


기사는 달리기를 무척 싫어한다. 갑옷 입고 칼을 찬 차림새로는 무거워서 뛰기 힘들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덜그럭거리는 게 기사 체면에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러나 앞을 막아선 공주의 장검을 물리치고 하늘 높이 솟아오른 탑 꼭대기에서 한 손으로 밧줄 한 줄기에 의지하여 용의 등짝을 향해 대롱대롱 내려가는 것보다는 멀쩡한 두 다리로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편이 낫겠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그리하여 돌아서서 도망가려다가 기사는 그래도 한 번 더 망설인다. 기사는 기사고 임무는 임무다. 여기까지 왔으면 공주를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공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 때, 갑자기 탑이 우르릉, 흔들린다. 기사는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공주도 휘청거린다. 그러나 양 손에 든 칼만은 놓지 않는다.


곧이어 창문으로부터 달걀이 썩는 듯한 냄새와 함께 뜨거운 기운이 홱 끼쳐온다. 기사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간신히 윗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리고 창 쪽을 바라본다. 창을 가득 채운 거대한 눈동자가 보인다. 고양이 눈처럼 가운데가 길고 검은 동공으로 갈라진 보라색 눈동자다. 기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동자는 한 번 눈을 깜빡인다. 잠깐 덮였다가 다시 올라간 눈꺼풀은 눈 주위를 둘러싼 피부와 마찬가지로 타는 듯한 빨간색이다.


“용, 깼다.”


공주가 말한다. 어쩐지 즐겁다는 듯이 웃는 공주의 표정이 기사는 이런 와중에도 신경에 거슬린다.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창 밖의 눈동자 - 의 나머지 부분인 용 -이 포효한다.


- 끼오오오오….


다시 탑 전체가 우르르 흔들린다. 멀미가 날 것 같아서 기사는 고개를 숙이고 방바닥에 몸을 착 붙인다.


포효와 진동이 멈추고 기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바닥에 붙인 얼굴 바로 옆에 칼이 콱, 내려꽂힌다. 기사는 흠칫 놀라 여전히 바닥에 착 달라붙은 채로 고개만 살그머니 들고 올려다 본다. 공주는 장검 손잡이에 한 손을 얹고 그 위에 턱을 대고, 기사를 내려다보면서 빙글빙글 웃는다.


“내 손에 죽을래, 용한테 죽을래?”


기사는 공주의 얼굴과 장검의 칼날을 한참이나 번갈아 쳐다본다. 그리고 입을 열어 간신히 말한다.


“… 옛 정을 생각해서, 살려주시면 안 됩니까?”


공주는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입 끝을 한 쪽만 올려 씨익 웃는다.


“옛 정이라….”


그리고 공주는 왼손에 쥐었던 단검을 침대 쪽으로 내던진다. 바닥에 내리꽂았던 장검을 양 손으로 잡아 뽑는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기사는 몸을 조금 일으킨다.


“네가 말을 꺼냈으니 말인데.”


공주가 양손으로 잡은 검의 칼끝이 다시 기사의 목을 향한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 칼끝에 밀려 기사는 옆으로 구른다. 얼굴을 위로 하고 똑바로 드러눕는다.


공주는 똑바로 누운 기사 위로 다가와 다시 칼을 겨눈다.


“아무래도 죽여야겠다.”


공주는 아까처럼 입 끝을 한 쪽만 올려서 씨익 웃는다.


창 밖에서 이 모든 광경을 용의 커다란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지켜보고 있다. 공주는 잠깐 고개를 돌려 용의 눈동자를 쳐다본다. 공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용은 마치 격려하듯 새빨간 눈꺼풀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뜬다.




II.


그러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옛 정으로 따지자면 공주와 기사는 철 모르던 어린 시절 한 때 연인이었다. 공주는 공주니까 대부분의 시간을 시녀들한테 둘러싸여서 갇혀 지냈고, 기사는 기사니까 대부분의 시간을 땀내 나는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지냈고, 그래도 이차 성징이 발현하고 이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성호르몬이 넘실거리는 이팔청춘 좋은 나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여차저차했으므로 서로 주위에 눈 맞을 이성이 달리 없는 상황에서 무슨 행사에 기사가 공주를 호위한다고 한 번만 따라가기라도 하면 그대로 눈은 맞게 마련이다. 그러나 또한 서로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하여 연애편지 한 번 못 쓰고 손 한 번 못 잡고 그저 다음 번에 서로 호위하고 호위당하는 ‘무슨 행사’ 같은 건 또 언제 한 번 일어나나 그런 것만 목 빼고 기다리는, 순진하다면 순진하고 멍청하다면 멍청한 연애였다.


그러다가 연애편지는 여전히 안 썼지만 손도 잡고 뽀뽀도 해 보게 된 것은 순전히 공주의 유모 덕이었다. 공주라면 누구나 마법을 쓸 줄 아는 요정 대모라든가, 뭐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특출나게 지혜롭고 현명한 유모가 하나쯤은 딸려 있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문제의 이 공주처럼, 아버지랑 어머니가 각각 서로 대대손손 못 잡아먹어 안달인 두 나라의 왕자공주 출신이라 세계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혼은 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얼굴이라도 마주쳤다간 전쟁 날까봐 서로 말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쳐서 도대체 애는 어떻게 낳았는지 신기할 지경인 집구석에서 태어나 자란 경우라면 왕위 물려받을 왕자도 아니고 계집애 하나 따위 키우는 데 신경쓸 리도 없으니 유모는 필수다.


그리하여 공주의 유모 말인데, 이 유모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지혜롭고 현명하고 마술 비슷한 것도 어떻게 좀 쓸 줄 아는 특출난 인물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건 어디까지나 나중 일이고, 공주가 자라나는 동안에는 그냥 잠자는 걸 특출나게 좋아하는 특출나게 게으른 인물이었다. 최소한 공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주가 아직 아장아장 걷는 나이의 어린 아기였을 때부터도, 밤에 잠들기 전에 옛날 얘기 해 달라고 유모를 졸랐더니 ‘옛날 옛적에…’까지만 말해놓고 나머지 얘기를 생각하다가 자기가 먼저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황당한 경우가 빈발하여 공주로 하여금 어린 마음에 더럽고 치사하니 하루빨리 스스로 글 읽는 법을 터득하여 듣고 싶은 옛날 얘기가 있으면 직접 찾아 읽어야지 이 유모 믿다간 되는 일이 없겠다는 자력갱생의 의지를 심어준 일화가 있다.


일화로 따지면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어쨌든 거의 전부 이런 종류였기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공주는 유모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유모 뿐만이 아니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건조한 어른들의 현실을 지나치게 어렸을 때 깨달아 몸에 뱄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출생 이래 공주가 아는 집구석 분위기는 언제나 상기한 바와 같이 대체로 살벌하여 남녀간이건 가족간이건 사랑 따위 보들보들 말랑말랑 달착지근하고 꿈결 같은 감정은 도대체 경험해본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나의 머리와 가슴과 가끔은 허벅다리 안쪽을 휘어감는 이 불꽃이 정녕 세균성 전염병인지 귀신의 장난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그러므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는 정서 바짝 메마른 정황 때문이기도 했다.


공주가 겪는 일이 무엇인지 공주 본인보다도 먼저 눈치 채고 먼저 입 밖에 내어 말해준 사람은 그러므로 위에 말한 대로 여러 가지 면에서 특출난 인물인 바로 그 유모였다. 해가 졌는데도 유모가 어딘가에 퍼질러 앉거나 누워서 공주보다 한참 먼저 코를 골고 있지 않았다는 특출난 정황 때문에 공주는 그 날의 앞뒤 사정을 또렷이 기억한다. 저녁밥을 먹자마자 어딘가에 퍼질러 잠들어 버리는 대신에 유모는 안 졸리다는 공주를 억지로 침실로 데려가서 침대에다 우겨넣고 무거운 깃털 이불을 콱 눌러 덮었다. 그리고 꼼짝도 못 하게 된 공주 위로 몸을 잔뜩 숙이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공주님, 그 호위무사 좋아하지유?”


그 때 유모의 등 뒤로 커다랗게 열린 아치형 창문 밖에 아직 이른 밤의 짙은 쪽빛 하늘이 진한 물감처럼 흘러가고, 보는 사람의 눈까지 물들일 것 같은 그 남빛 사이로 반짝이는 수줍은 별빛과 함께 어린 반달이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밤 바람에 한들한들 실려가며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던 것을 공주는 기억한다. 유모의 등 뒤로 열린 창 밖의 한가로운 반달을 한 번 쳐다보고, 그리고 고개를 숙여 바짝 들이댄 유모의 쪼글쪼글한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보고, 언제나 잠에 취해 세상 만사 귀찮아하는 것 같던 그 낯익은 얼굴에서 어린 딸이 첫 사랑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반쯤은 흐뭇해하고 반쯤은 근심에 찬, 그러니까 한 마디로 모성(母性)이라는 것을 모처럼 발견하고 공주는 문제의 기사를 생각할 때와는 약간은 비슷한 종류의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하고 달콤한 기분을 느꼈지만 그것은 문제의 기사와 관련된 감정과는 달리 편안하고 포근하고 어쩐지 익숙했으므로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


하여 공주가 얼른 대답하지 않고 - 이것은 무거운 이불 아래 코까지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불을 거기까지 덮어준 것은 바로 유모였으므로 공주가 자신의 연애사에 대하여 유모의 질문에 얼른 대답하지 않은 것은 절반쯤은 유모 자신의 책임도 있다 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여간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고 - 어쨌든 공주가 무거운 이불 아래에서 눈만 크게 뜨고 깜빡깜빡하자 유모가 다시 물었다.


“내가 그 무사님이랑 이어 줄까유?”


“뭘 이어요?”


공주가 되물었으나 두꺼운 이불에 눌려 그 말은 ‘으엉 이어으?’ 처럼 들렸기 때문에 다시 똑똑히 말하기 위해서 이불을 턱 아래까지 밀어내렸으나 유모는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이불 밑에 짓눌린 ‘으엉 이어으?’가 무슨 뜻인지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공주가 굳이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기 전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왜, 서로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평생 죽을 때까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언제나 함께 한다는 그런 거, 있잖유.”


‘그런 거’라면 공주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일단은 서로 눈도 안 마주치려 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거’로 매여서 죽지 못해 ‘언제나 함께 하는’ 중이었고, 일전에는 오빠가 또한 어떤 귀족 아가씨와 ‘그런 거’ 때문에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사제 앞에 서서 번쩍이는 반지를 서로 끼워주는 행사를 벌인 적이 있었다. 그 때 입은 화려한 옷과 번쩍이는 반지와 그 때 불러온 사제와 그 때 행사를 구경한 사람들이 먹은 음식값 때문에 총리라고 했던가 대신이라고 했던가 뭐 그런 높은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는 오빠가 돈을 너무 많이 써서 금고에 남은 게 한 푼도 없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냐고 징징대는 바람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가 또 궁궐의 대리석 천정이 훌렁 날아가도록 싸우는 소리가 멀리 떨어진 공주의 침실까지 들려왔었다. 그러므로 이런 게 ‘그런 거’라면 별로 이어지고 싶지 않다고 공주는 생각했다. 지금 공주의 어리고 매끈매끈한 허벅다리 안쪽에서 비롯되어 건강한 욕망으로 맥박치는 젊은 심장 안쪽까지 휘감아 흐르는 이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하고 짜릿짜릿하고 따끈따끈하고 달착지근한 감정이 ‘그런 거’로 이어지는 순간부터 평생 서로 얼굴만 맞대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고 그러면서도 이어졌기 때문에 확 끊고 어디 먼 데로 혼자 가 버리지도 못하는 ‘그런 거’라면 ‘그런 거’ 따위 안 이어지는 편이 낫다, 평생 함께 한다는 말에 조금은 설레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공주의 말에 유모는 조금 웃었다.


“그거, 꼭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유.”


뭐가 어떻게 돼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건지 설명해 줄 거라고 예상했으나 유모는 다시 쪼글쪼글한 얼굴을 조금 더 쪼글쪼글하게 만들며 웃음을 띨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름살과 웃음 때문에 더 작아진 유모의 눈을 보며 분명 지금쯤 잠이 오는 거라고 공주는 생각했다. 그러나 유모는 말했다.


“그 무사 양반한테도 살짝 알아봐유, 같은 마음인지. 둘이 같은 마음이면 내가 이어주게유.”


그리고 도대체 무슨 수로 ‘살짝 알아보’라는 건지 공주가 되묻기도 전에 유모는 이렇게 덧붙이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허기사 같은 마음이면 내가 안 나서도 저절로 이어지겠구먼.”




III.


일이 여기서 일단락되었다면 공주는 한편으로는 ‘그런 거’로 이어진다는 데 관하여 경험에서 기인하는 부정적인 의견을 타파하지 못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사의 마음이 어떠한지 ‘살짝 알아볼’ 방법을 찾지 못해 혼자서 속만 태우다가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시간 지나면서 흐지부지 포기하거나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공주가 상당히 예상가능한 절차를 거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과 갑작스럽게 ‘그런 거’로 ‘이어질’ 가능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에 공주는 기사와 이어진다는 문제에 대해서 가능한 한 단시일 내에 뭔가 해결책을 찾아내야만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예상가능한 절차를 거쳐 다른 인물과 이어진다는 것은 즉 이웃 나라에서 찾아온 공주의 혼담이었다. 이웃 치고는 거리도 좀 멀고 중간에 작지만 빽빽하게 우거진 숲도 하나 가로막혀 있으니까 아주 친한 이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왕래가 아주 없지도 않은 나라인데 사정인 즉슨 그 나라의 왕이 나이 연로하여 이제 곧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 죽기 전에 왕자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뭐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떡두꺼비 같은 손주를 낳아서 후계자까지 안아 보아야만, 왕위를 물려주고 편히 눈을 감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적당한 나라의 적당한 공주가 적당히 시집을 와 주면 그 대가로 금은보화를 많이 안겨 주마고 그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나이 많은 왕이 굳건히 약조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거야 그 쪽 사정이고, 그 왕위 물려받게 생긴 왕자가 자기보다 네다섯 살이나 어리다는 소리를 듣고 공주는 어이가 없었다. 공주 자신도 결혼 같은 걸 진지하게 생각하기엔 좀 이른 거 아닌가 혼자 겁을 먹는 중인데 거기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네다섯 살이나 더 어리면 이건 갈 데 없이 그냥 애다. 알지도 못하는 어린애하고, 더구나 안 그래도 수상쩍게 여기는 ‘그런 거’로 이어져서 평생 서로 애물단지로 여기면서 지지고 볶으며 죽을 때까지 그러고 살아야 한다니 이건 저주가 따로 없지 않은가.


하지만 또 어머니나 아버지는 공주의 의견에는 일단 전혀 관심이 없고, 문제는 항상 그렇듯이 그냥 돈이라서, 총리니 대신이니 하는 사람들이 연거푸 찾아와서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나라의 금고에 돈이 한 푼도 없다니까 만만한 공주를 팔아먹자는 건데, 그래도 명색이 공주된 입장에서 집안의 운명 정도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이 자기한테 걸렸다고 다들 심각하게 떠들어 대니까 또 여기다 대고 공주는 아직 너무 어리고 좀 순진하기도 하고 그래서 뭐 어떻게 딱 부러지는 자기 주장 같은 걸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혼담이 진행이 돼서 낼모레면 그 알지도 못하는 적당히 먼 나라로 적당히 시집이라는 걸 가 버려야 하는 때가 닥쳤을 때 공주는 그리하여 갈 때 가더라도 한 가지는 해결하고 가야겠다는 다급한 마음에 아주 고전적인 방식으로 기사가 지나가는 앞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불쑥 나타나서 손수건을 들입다 떨어뜨렸다. 그리고 주워 주려고 무심코 몸을 숙인 기사에게 오늘 밤 달이 뜨거든 궁정 안뜰로 나오라고 소근소근 순식간에 내뱉고는 어리둥절한 기사를 뒤로 하고 문제의 손수건 한 장쯤 바닥에 그대로 버린 채 혼자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하여 기사는 이런 경우에 대체로 그렇듯이 공주가 내버리고 간 손수건을 집어다가 소중히 간직했고 그래서 시키는 대로 달이 뜨자 궁정 안뜰로 나왔고 거기서는 또 공주가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 하면서 기다리고 서 있다가 기사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손수건 떨어뜨릴 때와 같은 기세로 들입다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나랑 평생 이어질 마음 있어요?”


“예?”


영문을 모르는 기사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공주는 좀 답답해져서 다시 물었다.


“있잖아요, , ‘그런 거.’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평생 영원히 함께, 남자랑 여자랑 뭐 그렇게 이어지는 거요.”


기사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기사는 공주에게 한 걸음 다가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주님, 공주님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다른 나라의 왕자님과 결혼을….”


“그러니까 묻잖아요.”


이제는 무척 다급해진 공주가 말을 끊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대답해요. 나하고 이어질 마음 있어요, 없어요?”


기사는 다시 한 걸음 다가와서 공주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대고 들여다보았다. 잘못하면 뒤로 밀려서 넘어질 것 같다고 공주는 생각했다.


“… 있습니다.”


기사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영원히, 당신과 함께….”


기사는 더 뭐라고 말을 했던 것 같지만 공주는 여기까지 들었으니까 충분했다. 그 길로 기사의 손을 마주잡고 유모가 가르쳐준 대로 붉은 실로 자신의 약지와 기사의 약지를 휘어 감았다.


유모의 말에 따르면 매듭을 단단히 지어야만 하는데, 가느다란 실을 한 손으로 잡고 매듭을 지으려니 영 말을 듣지 않았다. 기사가 좀 도와주면 좋을텐데 제 흥에 겨워서 뭐라고 계속 소근소근 지껄이는 중이라 매듭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머리 위로는 커다란 보름달이 천천히 까만 밤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달이 완전히 하늘 꼭대기에 이르기 전에 매듭을 맺어야만 한다. 하늘과 손가락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공주는 바빴다.


그리고 막 어떻게 좀 매듭 비슷한 걸 지으려는 순간 저기 어디서 또 정체 모를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기사는 공주를 끌어안고 적당히 주저앉아 적당히 숨었다. 부스럭 소리의 정체인 야간 경비병이 지나갈 때까지 두 젊은 남녀는 숨을 죽이고 서로 얼싸안고 있었는데 뭐 그러다가 서로 마음이 있는 젊은 남녀가 항용 그렇듯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입술을 포개었다. 입맞춤은 달콤했고, 뜨거웠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금은 서글프고 절박했고, 그러는 동안 머리 위에 뜬 달은 소리없이 하늘 꼭대기에 이르렀다가 또 소리 없이 천천히 기울어 갔고, 죽을 때까지 평생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공주와 기사의 운명을 이어주리라 맹서했던 약지의 붉은 실은 제대로 모양 잡혀 매듭을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그냥 다 풀어진 것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엉킨 채로 손가락에서 스르르 흘러 떨어져서 공주와 기사가 정말로 영원을 걸어도 좋을 길고 긴 입맞춤 끝에 정신을 차리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또 다음 번 야간 경비병이 지나가는 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섬주섬 일어나서 서둘러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궁정 안뜰의 풀밭 어딘가에 떨어진 채 그대로 잊어버렸기 때문에 공주가 다음 날 유모한테서 매듭 어쨌냐는 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생각이 났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하여 공주는 그렇게 먼 나라로 시집을 갔다. 그리고 공주와 좋든 싫든 이어졌다기보다는 엉켜버린 기사는, 뭐 당사자는 자기가 그렇게 돼 버린 걸 몰랐지만서도, 하여간 공주의 호위 무사가 되어 따라갔고, 문제의 손수건도 기사가 갑옷 속에 고이 간직한 채 함께 따라갔다.




그리하여 산 넘고 물 건너서 앞으로 결혼해서 살아가야 될 그 먼 나라에 도착해 보니 상황은 공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개판이었다. 왕은 과연 들은 대로 연로했고 병세는 공주가 고향에서 들은 것보다 훨씬 위중하여 오늘내일 하는 형국이라 손주 낳을 때까지 기다리기는커녕 결혼식이나 제대로 살아서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따라서 결혼식 끝나면 주기로 한 공주의 나머지 몸값도 이 왕이 과연 제대로 치르고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공주를 따라온 신하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공주 입장에서는 낼모레 남편이 된다는 어린애가 과연 들은 대로 그냥 몸만 커다란 어린애더라는 사실만 해도 앞이 깜깜한데 거기다가 그 어린애의 엄마, 그러니까 현재 왕비에 공주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불길하였다. 이 왕비는 나이가 아주 많은 왕에 비하면 아주 젊고 또 여전히 같은 여자가 봐도 눈이 튀어나오게 미인인데 거기다가 나이가 아주 많은 왕에게 아주 늦게 후계자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왕이 저 지경으로 고롱고롱 하기 전부터도 권세가 막강했는데 그러다가 왕이 자리에 눕고 나서는 아예 자기가 왕권을 잡고 흔드는데다 어린 아들은 아주 아기 때서부터 치마폭에 감싸 키워놔서 자기 엄마 말이라면 어린애가 달게 자다가도 군말없이 벌떡 일어나고 맛있게 먹던 밥도 고분고분 뱉어낼 지경으로 훈련을 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마녀라고까지 불리는 인물이었다. 물론 왕비 앞에서는 아니고 못 듣는 데서 그랬지만, 또 그렇게 왕비가 못 듣는 구석으로 가서 물어보면 진짜 마녀라는 둥 미약을 써서 나이 많은 왕을 유혹했다는 둥, 그렇게 따지면 왕이 제 나이보다 훨씬 늙고 병들게 된 것도, 한창 말 안 들을 나이의 왕자를 제 치마폭에 감싸고 주무르는 것도, 그게 다 마녀라서 남들은 알지 못하는 무슨 술수를 쓰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는데, 공주는 결혼식 전에 자기만 빼고 다들 무지무지 바쁜 모양이라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심심하고 또 드디어 결혼이라는 걸 한다니까 여러 모로 싱숭생숭하고 그래서 고국에서 유모가 잘 때 종종 그랬듯이 뭐나 좀 얻어먹을 거 있나 하고 부엌에 내려가서 왔다갔다 하다가 시녀들이 이러고 수군거리는 얘기를 듣고는 앞뒤 없이 유모가 달빛 아래 매듭을 지으라던 게 생각이 나서 여자들은 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그런 비법이니 술수 같은 걸 하나 둘쯤 알게 되는 걸까 뭐 그런 궁리를 좀 했었다.


어쨌든 아무리 시어머니 후보가 마녀고 남편감은 어린애고 어쩌고 해도 여기까지 온 마당인데다 친정이 금방 망할 지경으로 째지게 가난하다는데 이미 받은 돈을 뱉어낼 수도 없고 해서 공주는 그리하여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사제 앞에 화려한 옷을 입고 서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하는 말을 들을 때는 보름달 뜬 밤의 궁정 안뜰이 떠올라서 문득 입술부터 심장 안쪽을 거쳐 다리 사이까지 한 번 화끈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시치미 뚝 떼고 고분고분 ‘네에’ 하고 대답하고 명목상 남편이라는 어린애하고 형식상 입맞춤도 나누었다. 오늘내일 한다던 왕은 결혼식 끝나고도 죽지 않아서 약속한 대금을 무사히 치르었고 그리하여 공주를 따라왔던 대신들은 희희낙락하며 돈주머니와 보석상자를 챙겨 고국으로 돌아가고 그러니까 공주는 낯선 나라에 혼자 남았을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랑 딱 둘이 남았는데 이런 게 기실 더 위험한 법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공주가 남편이랑 시댁 사람들 몰래 기사랑 바람이 나는 게 정석이겠지만 웬일인지 사정은 또 그렇게 돌아가질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러니까 공주의 남편, 어린애라고 무시했지만 어쨌든 왕이 죽으면 다음 왕이 될 테니까 현재로서는 황태자인 그 어린애가 다분히 어린애답지 않은 이유로 인해, 아니 뭐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어린애다운 것도 같지만, 아무튼 공주와 열렬히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열 네다섯 살 되는 남자애답게 몸은 다 큰 어른인 것처럼 보여도 말하는 거나 행동이나 이런 건 아직 어린애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다. 이런 어린애가 남편인데다 또 자기 엄마한테 훈련을 엄청나게 철저히 받아서 처음에는 공주를 대하는 것도 그렇고 어째 앞날이 불길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열 네다섯 살 된 남자애다 보니까 첫날밤을 한 번 치르고 나더니 태도가 싹 바뀌더라는 것이다. 거기다 또 아무리 명목상이라지만 일단은 부부이다 보니까 첫날 밤만 같이 자는 게 아니고 계속 같이 자는 게 법도인데 그래서 공주는 어쨌든 결혼한 사이고 식도 올렸으니 함부로 거절할 계제도 아닌 것 같고 달리 뾰족한 핑계거리도 없고 해서 하자는 대로 해 줬기 때문에 몇 번 그러고 나니까 이 열 네다섯 살 된 남자애는 그 나이 또래 어린 남자애답게 그야말로 몸 바쳐, 그리고 다음 순서로는 마음을 바쳐, 공주를 진짜로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결혼하기 전에 기사하고 보름달 뜨는 밤에 빨간 실 매듭 뭐 이런 거하고는 문제가 좀 많이 달라지는 것이, 일단 어리기는 해도 남편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정신없이 좋아한다는데 공주로서도 그게 딱히 싫은 일은 아니었을 뿐더러, 현실적인 문제로 이 어린애가 가는 데마다 공주를 데리고 다니려고 들고 또 공주가 가는 데라면 측간 빼고는 전부 쫓아오려고 들었는데 그 어린애가 사실상 낼모레 왕위 물려받게 생긴 황태자이다 보니까 시키는 대로 안 할 수도 없고, 덧붙여서 거기가 자기 집도 아니고 낯 설고 물 선 딴 나라이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공주는 처음 몇 달이 지나 좀 익숙해질 때까지는 말 그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 어느 정도로 정신이 없었냐 하면 안 듣는 데서 다들 마녀라고 하는 그 왕비가 스리슬쩍 기사를 꼬셔다가 같이 자는 사이가 돼 버린 걸 그러니까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궁정의 시녀와 시종들도 다 알고 있었는데 공주하고 공주의 남편하고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왕비의 남편인 그 연로하여 앓아누운 왕하고 이렇게 셋이서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 또 그 왕비는 남편은 앓아눕고 아들은 장가갔고 혼자 심심하니까 소일거리로 기사를 꼬셨느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고 사실은 믿고 있던 아들녀석이 장가를 들더니 마누라한테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하는 게 티는 안 냈지만 은근히 무척 괘씸했더란 말이지. 그리하여 이제까지 하던 방식대로 하자면 공주가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에 슬쩍 독약 같은 거 집어넣고 기다렸겠지만 그 괘씸한 며느리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라다니면서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틈만 나면 손 잡고 뽀뽀하고 비벼대는 것이 바로 하나뿐인 자기 아들내미이다 보니까 함부로 약 같은 거 쓸 수도 없고, 그러니까 꼴 보기 싫은 며느리 가까이 있는 인물들 중에서 만만해 보이는 기사를 점찍어서 자기 말 잘 듣게 적당히 꼬여둔 후에 어느 날 기회 봐서 공주를 살짝 불러내서, 여기까지만 들으면 유모가 공주한테 기사를 살짝 불러내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나서 대체 어떻게 불러내라는 건지 궁금해지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살짝 불러내서, 살짝 죽여버리라고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앓아누웠던 왕이 드디어 숨을 거두어서 공주에게 푹 빠진 왕자가 그대로 왕위에 오르게 생겨버렸기 때문에 계획은 예상보다 앞당겨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효하게 약발이 먹혔던 게 바로 공주가 처음 기사를 ‘살짝 불러낼’ 때 들입다 떨어뜨린 다음에 그대로 버려 버리고 두 번 다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이 때의 여자들이 쓰는 이런 비법이나 마법이라는 게 결국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한다는 목적인데 그런 술법을 행할 때 가장 유용한 것이 내가 움직이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스민 물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왕비의 경우 같으면 움직이고자 하는 사람과 그 사람을 움직여 없애버리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조금씩이나마 동시에 스며 있으니 이 아니 좋으냐 말이다. 뭐 왕비야 처음에는 그런 자세한 속사정까지 몰랐지만 어쨌든 적당한 인물로 기사를 점찍은 후에 가만히 보니까 어째 여자 손수건같이 생긴 레이스 달리고 수 놓인 물건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신주단지 모시듯 하길래 손수건이라는 건 아무리 잘 모셔도 더러워지면 빨아야 하는 물건이니 빨랫줄에 널렸을 때 시녀 하나를 시켜서 슬쩍 집어오게 해서는 보통 마녀들이 하듯이 개구리 뒷다리와 생쥐 꼬리와 까마귀 깃털과 기타등등 구역질 나는 재료를 부글부글 끓는 재료 미상의 약물 속에 던져넣고 마지막에 문제의 손수건도 처넣은 뒤에 수리수리 마하수리를 외운 결과 울긋불긋한 연기가 폭폭 피어오르고 그 뒤로 기사는 손수건을 주웠을 때 공주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마음을 바로 그 수리수리 마하수리 주문을 외운 왕비에 대해서 가지게 되었더라는 것이었다. 반대로 공주에 대해서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주문이 떨어지기 전에 왕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니까 왕비가 그 아름다운 눈에 눈물을 하나 가득 담아서는 그렁그렁 해가지고 기사를 애처롭게 쳐다보면서 공주를 꼭 죽여달라고 부탁했을 때 기사는 자기가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모르면서 당신의 명령이라면 목숨 걸고 무엇이든 따르겠다고 맹세를 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죽은 왕의 시신은 장례 치르려고 호화찬란한 관에 넣어서 공주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왕궁 입구에다가 전시를 해 놓고 장례만 치르고 나면 즉위식도 연이어 치러서 공주의 남편은 곧 왕이 되고 공주는 왕비가 되려는 마당인데 기사가 어느 날 저녁에 이제 밥 다 먹고 하루 일과 마쳤으니 침실로 가서 자야겠다 하는 공주한테 고국에서 무슨 급한 전갈이 왔다고 그것도 공주의 남편인 아직은 왕자가 보는 앞에서 불러냈던 것이다. 공주야 아무 것도 모르고 기사는 자기가 믿는 사람이니까 불러내는 대로 따라나갔고, 왕자는 공주랑 기사가 자기 나라 말로 이야기하니까 못 알아듣고 두릿두릿하고 서 있다가 공주가 친정에서 무슨 소식이 온 모양이라니까 의심없이 내보냈고, 하여 기사가 가자는 대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왕비가 계획해둔 대로 처음에는 한참을 걸어서, 그 다음에는 적당한 곳에 매어둔 말을 타고 한참을 또 달려 나가서, 오밤중에 궁성의 불빛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후에야 공주가 어딘지 의심스러워져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재우쳐 묻기 시작할 때쯤 기사는 불시에 공주의 목을 향해 칼을 겨누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주는 깜짝 놀랐고, 그 때문에 기사 뒤에 타고 있다가 말에서 떨어졌고, 기사도 따라서 말에서 내려서 쫓아가면서 칼을 휘둘렀고, 공주는 영문도 모르면서 피했고,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아무리 소리질러 봤자 기사는 바빠 죽겠는데 자세한 걸 설명할 여유 없으니까 왕비님의 명령이고 네 죄는 네가 알렷다, 류의 대답밖에 안 해 주고, 말은 겁을 먹고 앞발 쳐들고 히힝히힝 울고, 설상가상으로 천둥번개가 우르릉 꽝꽝 치더니 비가 퍼붓기 시작했고, 그렇게 깜깜한 밤에 얼음장 같은 비를 맞으면서 나무둥치라든가 덤불숲 같은 델 쫓고 쫓기면서 뺑뺑 돌다가 공주는 어떻게 어떻게 도로 말을 집어 타고 휭하니 달아나 버렸다. 기사는 사방 깜깜한데 말까지 뺏겼으니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닭 쫓던 개처럼 그러고 보고 있다가 그냥 터덜터덜 걸어서 궁으로 돌아왔고.


그 때, 그러니까 기사가 휘두른 칼 끝이 공주의 몸을 스쳐서 피가 났을 때, 쫓고 쫓기다가 공주를 붙잡으려고 기사가 팔을 뻗어서 공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기사의 몸에 닿았을 때, 기사의 마음 속에는 이거 뭔가 크게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제대로 모양 잡힌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냥 느낌이, 그나마 어렴풋이 떠오를 뻔도 하였다. 그러나 이어서 내린 갑작스러운 폭우가 그 피를 씻어버렸고, 그리하여 기사의 마음은 다시 그대로 폭우가 내리는 밤처럼 깜깜하게 흐려져 버렸던 것이다.




IV.


그렇게 말을 집어 타고 도망쳐서 공주는 몇 날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밤낮으로 달린 끝에 자기 나라에 도착을 했다. 길도 잘 모르는 처지에 무식하게 내달리기보다 일단 왕궁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나 뭐 이런 생각도 잠깐 안 했던 건 아닌데 자기한테 칼을 겨눌 때 기사의 표정과 거기에 더하여 왕비님의 명령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논리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그 왕궁에 다시 돌아갔다간 딱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하여 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려서 국경을 넘긴 넘었는데 하필 오밤중에 옆 나라와 경계를 이루는 깜깜한 숲 속에서 말이 쓰러져 그대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공주는 내려서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하늘이 맑았고, 언젠가 기사를 불러내어 다 묶지 못한 매듭을 손가락에 맺었을 때처럼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깊고 깜깜한 숲 속을 어렴풋이 비추는 그 연약한 달빛 아래서 공주는 비로소 자신이 기사의 칼에 베고 찔려서 몸에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멈추어 서서 팔다리를 살피다가 공주는 갑자기 하복부를 덮쳐오는 통증에 그대로 쓰러졌다. 땅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끙끙대며 배에서 허리께를 길게 베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플만큼 깊은 상처는 아닌데, 하고 공주는 생각했다.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배는 점점 더 아파졌고, 그와 함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공주는 그대로 웅크린 채 다리 사이를 만져보았다. 달빛 아래 쳐든 손에는 검붉은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고통으로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 공주는 가진 줄도 몰랐던 아이가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도 죽었고, 아이도 죽었고, 그리고 내가 세 번째 시체가 되겠구나. 정신을 잃기 전에 공주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만 하고 그대로 까무라쳐 버렸기 때문에 그게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그래서 슬프다거나 무섭다거나 이런 것까지는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깨어났을 때는 숲지기의 오두막이었다. 그리고 공주의 차림새, 그러니까 더러워지고 찢어지긴 했어도 풍성하고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섬세하게 지은 옷이라든가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목걸이 손가락에는 반지 손목에는 팔찌에 허리에 찬 허리띠가 모두 금은 보석을 박은 값비싼 물건이라든가 이런 걸 본 숲지기가 처음에는 귀중품만 싹 걷어내고 시체는 어디 아무도 모르게 버릴까 하다가 공주가 신음소리를 내고 몸도 좀 움직이는 걸 보고 망설이다가 마누라를 불러와서 의견을 물었는데 마누라가 어디 귀한 집 따님 같으니 함부로 대하는 것보다는 성에 보고해서 집에 돌려보내고 보상금을 듬뿍 요구하는 게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숲지기도 다시 생각하니까 그러는 편이 여러 모로 더 안전하고 기분도 덜 나쁠 것 같기도 해서 일단 자기 집에 눕혀놓고 가까운 성의 성주님에게 보고를 넣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와서 그 성으로 공주를 실어갔는데 또 가서 보니까 그 성주님은 공주가 공주라는 걸 알아봤기 때문에 황급히 의사를 데려다 대충 치료하고 왕궁으로 실어가서 공주는 시간도 좀 오래 걸리고 우여곡절도 좀 많이 겪었지만 어쨌든 무사히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궁궐로 돌아와 보니까 공주가 숲에서 기절하고 숲지기의 집에서 국경 부근 성주님의 성에서 어쩌고 하여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공주보다 먼저 곧장 이쪽 왕궁으로 온 기사가 공주가 시아버지인 왕이 죽자마자 도망쳤으니 저쪽 왕궁에서 공주를 찾아내든지 아니면 결혼할 때 받은 몸값을 몽땅 도로 뱉어내지 않으면 쳐들어올 기세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왕국 안에는 대충 수배령이 떨어지고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공주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일단은 며칠만 쉬었다가 여행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좀 나아지면 무조건 붙잡아다가 도로 실어서 시집으로 보내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자기 침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어서 공주는 처음으로 울었다.


기사가 칼을 겨누었을 때에도, 말을 타고 혼자 정신없이 도망칠 때에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공주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 돌아가라는 부모의 말을 듣고 태연자약한 기사의 얼굴을 보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공주가 울었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여자가 처음 임신을 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수도 있다고, 아마 갑자기 도망을 친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지금 울면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은 연이은 임신과 유산의 충격 때문이니 주위 사람들이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어의(御醫)가 진지하게 말하자 모두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공주는 그 모습을 보니 속이 터져서 죽을 지경이라 그치려던 울음이 도로 나와 버렸다.


공주의 말을 믿어준 유일한 사람은 얼굴이 더 쪼글쪼글해지고 잠이 더 많아진 유모였다. 공주가 펑펑 울면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는 것을 유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까지 다 들었다.


“유모도 내 말 안 믿죠?”


공주가 여전히 흐느끼면서 물었다.


“유모도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하죠?”


유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필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또 잠이 든 건가, 하지만 안 믿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는 게 낫다고 공주가 생각하는데 유모가 갑자기 말했다.


“여자는 자기 몸을 지킬 줄 알아야 하는 법이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주가 울음을 조금 그치고 물었다. 여전히 뺨으로는 남은 눈물이 한두 방울씩 굴러 떨어졌다.


유모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잠이 든 게 틀림없다고 공주가 생각한 순간 유모가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정말로 급할 때만 쓰게유.”


그리고 유모가 공주에게 가르쳐준 것이 붉은 용을 부르는 소환술이었다.




V.


마녀라 불리는 시어머니와 물정 모르는 어린 남편이 기다리는 시집을 향해 다시 떠나던 날에 공주는 침대에 누운 채로 마차에 실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가 출발했다. 흔들흔들하면서 이틀 밤 이틀 낮을 실려가다가 말의 시체와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 시체가 여전히 어딘가에 누워 있을 국경 근처의 숲에 도착했을 때 공주의 명으로 마차가 멈추었다. 시종이 기사에게 좀 와 달라는 공주의 명을 전달했다. 기사가 말머리를 돌려 마차 창문 곁으로 다가왔다. 마차 안에 힘없이 누운 채로 공주는 창 밖에서 무심히 들여다보는 기사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사가 정중하지만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공주가 다시 말했다.


“무슨 말씀이긴, 몰라서 물어?”


기사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머리를 돌려 행렬의 앞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공주가 목소리를 높여서 불쑥 물었다.


“어째서 날 죽이려는 거야?”


기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는 시종들을 손짓으로 물리쳤다. 그리고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역시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녀를 처단하라는 내 왕비님의 명을 받았다.”


그리고 기사는 입꼬리를 조금 움직여 씨익 웃었다.


공주가 몸을 일으켜 유모에게 배운 붉은 용의 소환 비법을 써 버린 것은 그 미소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왕비가 아니라 ‘내 왕비님’이라고 말했을 때 기사의 눈빛 때문이었다.




VI.


그리하여 이야기는 다시 붉은 용이 지키는 높은 탑으로 돌아왔다. 기사는 여전히 공주의 발치에 똑바로 누워 있고, 공주는 여전히 칼끝을 기사의 목에 겨누고 있다. 그리고 창밖에서는 여전히 붉은 용이 보라색 눈동자를 창가에 대고 이 모든 정경을 지켜보고 있다. 붉은 용이 공주를 향해, 보라색 눈동자를 덮는 새빨간 눈꺼풀을 격려하듯이 천천히 한 번 깜빡인다.


그러자 공주는 결심한 듯 칼을 조금 치켜든다. 흔히 상상하듯이 멋을 부려서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드는 게 아니고, 실내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천장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아서 칼 끝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효율성을 고려하여 기사의 목을 치는 데 필요할 정도로만 살짝 치켜든다. 그리고 내리친다.


공주가 검을 내리쳤을 때 기사는 칼날을 피해 몸을 굴린다. 칼의 반대쪽으로 피하는 게 아니고 칼이 오는 쪽, 그러니까 공주의 발치를 향해 몸을 굴린다. 칼날은 기사의 어깨에 부딪친다. 기사는 공주의 발목에 부딪친다. 공주는 중심을 잃고 뒤쪽으로 비틀거린다. 그러다가 칼을 놓친다. 기사의 등 뒤로 넘어간 칼을 한 팔로 뿌리치며 기사가 일어선다. 공주와 한덩어리가 되어 뒤에 있던 침대 위로 쓰러진다. 공주는 기사에게 밀려 침대로 쓰러져 허우적거리다가 베개 위에 내던져 두었던 단검을 잡는다. 기사는 공주가 팔을 뻗어 단검을 잡은 손을 잡는다. 아까 공주의 칼에 맞아서 다쳤던 팔이다. 갑자기 힘주어 움직이는 바람에 상처가 다시 터져서 피가 또 흐른다. 그러나 지금 기사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기사의 신경은 온통 공주의 칼에 가 있다.


한편 공주가 잡은 것은 단검의 손잡이가 아니라 칼날이다. 아까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내던진 걸 자기도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쓰러지면서 아무렇게나 잡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기사가 단검의 손잡이를 잡는다. 공주가 얼른 칼날을 움켜쥔다. 날이 공주의 손바닥으로 파고든다. 공주의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된다. 그 피가 기사의 왼손에 닿는다. 아까 다친 팔뚝에서 흘러내려온 피가 공주의 오른손에서 흘러나온 피와 닿으며 기사의 왼손 위에서 섞인다.


그리고 기사는 문득 단검의 손잡이를 잡은 손을 놓았다.


“… 공주님?”


여전히 침대 위에 기묘한 자세로 공주를 깔고 엎드린 채 기사가 방금 꿈에서 깬 것 같은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그런다고 공주가 다정하게 대답해줄 리는 없다. 대답 대신 공주는 몸을 꿈틀거리며 팔을 좀 더 뻗어서 단검을 더 꽉 움켜쥔다. 베개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다.


공주가 꿈틀거리자 기사는 당황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킨다. 침대에서 한 발 물러선다. 주위를 둘러본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한참이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기사가 마침내 묻는다.


공주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다친 오른손으로 단검을 집어 왼손으로 옮겨 잡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 저 기사, 마법이 풀린 모양인데?


창 밖에서 용이 말한다. 그 목소리와 함께 달걀 썩는 냄새와 끓는 냄비에서 나오는 듯한 뜨거운 기운이 창문을 통해 더 강하게 끼쳐온다. 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팔로 얼굴을 가린다. 공주는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공주가 여전히 왼손에 단검을 꽉 쥔 채 기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한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 혼자 마법 풀리면 다야?”


기사가 팔로 가렸던 얼굴을 간신히 공주 쪽으로 돌리고 다시 묻는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왜….”


말하다 말고 기사의 표정이 변한다. 공주를 멍하니 쳐다보는 기사의 눈이 점점 커진다.


“그러니까…. 제가…? 제가, 정말로…?”


기사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공주가 다시 용에게 말한다.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닌가 보네?”


- 감정만 변하니까. 기억하고는 상관 없거든.


창 밖에서 용이 대답한다. 다시 뜨거운 기운과 유황 냄새가 훅 끼쳐 온다. 기사는 견디지 못하고 아까처럼 팔로 막으면서 고개를 돌린다. 공주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그럴 수도 있나? 기억이 그대론데?”


- 그런 마법이야.


창 밖에서 용이 간단하게 대답한다. 유황 냄새와 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가 공주에게 묻는다.


-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죽일 거야?


말하면서,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즐겁다는 듯이 조금 가늘어진다.


- 어차피 죽일 거면, 내가 먹어도 돼?


“글쎄.”


공주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기사가 다시 팔을 조금 내리고 유황 냄새와 열기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든다.


“공주님.”


기사가 유황 연기 때문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말한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고개를 깊이 숙인다.


“비록 마법에 걸려 정신을 잃었다고는 하나, 공주님을 수호하는 본분을 어기고 책임을 다 하지 못한 죄, 크고도 무겁습니다… 공주님의 처분대로 하겠습니다.”


“놀고 있네.”


공주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내뱉는다.


- 나 줘.


창 밖에서 용이 조른다.


- 내가 먹을게.


“됐어.”


공주가 쏘아붙인다.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가 섭섭하다는 듯 한 번 깜빡인다.


그리고 공주는 기사에게 다가간다. 기사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인다.


공주는 들고 있던 단검으로 기사의 어깨를 툭툭 친다. 칼날이 갑옷에 부딪쳐 딱, , 하는 소리가 난다.


“일어나.”


공주가 귀찮다는 듯이 말한다.


“가라.”


기사가 고개를 든다.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공주가 문 쪽으로 턱짓을 하면서 다시 말한다.


“가라고. 가서 네 왕비랑 잘 먹고 잘 살아.”


그리고 덧붙인다.


“부탁인데,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라.”


기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공주를 쳐다본다. 공주가 짜증을 낸다.


“가라는 말 안 들리냐? 용한테 먹으라고 할까?”


그제서야 기사는 허겁지겁 일어난다.


그러나 방문을 나서려다가 기사는 돌아선다. 머뭇거린다.


“공주님….”


“아, 거 진짜 말 안 듣네.”


기사가 뭐라고 더 말을 잇기 전에 공주가 투덜거린다. 그리고 들고 있던 단검을 던진다. 칼은 쉭, 소리를 내며 방안을 가로질러 날아가서 기사의 얼굴 바로 옆을 지나 벽에 박힌다.


기사는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방에서 나가지는 않는다. 대신 더 애절한 표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연다.


“공주님, 전….”


“너도 네 사정이 있었다는 건 나도 알아. 나도 그건 알고….”


공주가 기사의 말을 막는다. 시선은 똑바로 기사의 얼굴을 향한 채 바닥에 뒹구는 장검 쪽을 향해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면서 공주가 말한다.


“다 이해하려고 했어. 이해하려고 했는데….”


기사는 그대로 선 채 공주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공주가 여전히 시선은 기사의 얼굴에 박은 채 몸을 조금씩 숙여 장검을 집어들어 손잡이를 쥐고 칼끝을 바닥에 박아 검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삐뚜름하게 서서 속삭이듯이 낮게 중얼거렸다.


“한 번은 그럴 수 있다 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너 나 잡으러 쫓아왔잖아.”


“그건….”


기사가 고개를 들고 뭔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공주가 다시 말을 막았다.


“쫓아와서 내 부모님, 내 사람들 앞에서 날 정신병자로 만들었잖아. 너 때문에 말도 죽고, 아이도 죽고, 나도 죽을 뻔했는데….”


그리고 공주는 조금 웃었다.


“이상하지? 아이가 죽은 건 별로 안 슬픈데, 그 말이 죽은 건 아직도 가끔 생각나서 가슴이 아파. 왜 그럴까?”


공주는 왼손으로 장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고 영차, 소리를 내며 힘주어 바닥에서 뽑아 들었다. 왼손으로 장검을 들었다가, 무거운 듯 다친 오른손으로 받쳐 들고 칼날을 들여다보았다.


“… 죽이실 겁니까?”


기사가 대답 대신 물었다.


창 밖에서 용이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황 냄새와 열기가 훅 끼쳐 오고, 기대에 찬 보라색 눈동자가 새빨간 눈꺼풀을 깜빡였다.


공주는 다시 조금 웃었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칼끝을 기사의 목을 향해 똑바로 겨누었다.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이 모습, 확실히 기억해 두라고.”


공주는 칼끝을 겨눈 채로 기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옛날에 좋아했든, 마법에 걸렸다 풀렸든, 뭐가 어찌 됐든 간에, 난 이제 누가 뭐래도 너 못 믿는다.”


공주는 기사를 향해 다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니까, 내 앞에 다시 나타나면, 죽인다.”


공주가 또 한 걸음 다가섰다. 칼끝이 기사의 견갑에 닿았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메마른 소리가 낮게 울렸다.


“가.”


공주가 짧게 말했다.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작별의 인사 뒤에 기사는 조용히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방문이 닫혔다.


계단을 내려가며 갑옷의 부분부분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텅, 텅하고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공주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칼을 내렸다.




VII.


기사가 가 버린 뒤에도 공주는 장검과 단검을 옆에 놓고 다친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고 침대에 앉아 오랫동안 창 밖의 용과 이야기했다.


- 아깝다. 나 주지.


용이 투덜거렸다.


“미안해.”


공주가 달랬다.


- 다시 나타날 거야. 그 땐 나 줘.


용이 말했다.


“설마 다시 오겠어? 자기도 염치나 체면이라는 게 있을 텐데.”


공주가 반박했다.


-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시 네 앞에 나타날 거야.


용이 대답했다. 공주는 짜증을 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너랑 이어졌거든.


용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어지다니?”


공주가 되물었다. 그리고 물은 순간 생각났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 실….”


창 밖에서 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 안쪽에서 보면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가 내려갔다 올라갔다 했다.


- 그 때, 완전히 안 묶고 그냥 버렸지? 그래서 꼬인 거야.


“풀 방법은 없어?”


공주가 물었다.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가 대답했다.


- 있지.


“뭔데?”


공주가 조급하게 되물었다.


- 내가 먹으면 되지.


거대한 보라색 눈동자의 동공이 즐겁다는 듯 가늘어졌다.


“그런 거 말고.”


대답하면서 공주도 피식 웃었다.


처음 붉은 용의 탑에 왔을 때도 용은 공주와 이런 식으로 수다를 떨었다. 공주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었다.


용이 말할 때 풍기는 유황 냄새나 열기에 공주는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방안이 언제나 뜨거운 것이 오히려 공주의 약해졌던 몸에는 좋은 영향을 끼쳤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공주는 탑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다녔다. 그러다가 용을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잡아먹힌 기사들이 남긴 창과 칼을 발견했다.


- 다 나았으면, 이제 네가 왔던 세계로 돌아가야지.


공주가 커다란 장검을 집어 치켜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용이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공주가 간신히 치켜든 칼을 지탱하려고 끙끙거리며 대답했다.


“여자는 자기 몸 지키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유모가 그랬어…. 엄마야….”


칼이 땅에 텅, 하고 떨어지자 공주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다시 칼을 집어 안간힘을 쓰며 치켜들었다.


“좀 곤란해질 때마다, 매번 널 부를 수는 없잖아….”


이제는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칼을 침대 위에 놓고 그 옆에 웅크리고 앉은 공주에게, 용은 이전과 같은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 이젠, 네가 왔던 세계로 돌아가야지.


공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치지 않은 왼손을 뻗어 장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중얼거렸다.


“나,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


- 왜애, 그래도 남편은 널 기다리지 않겠어?


용이 새빨간 눈꺼풀을 부드럽게 깜빡이며 물었다.


“글쎄….”


공주는 장검의 손잡이를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용이 먹이를 찾으러 가 버린 후에도 공주는 그래도 침대에 웅크리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 세상이 무너진 후로, 문에서 침대까지 걸어서 사방 열 걸음이 채 되지 않는 좁고 둥근 방안이 그녀에게 남은 세계의 전부였다.


“말도 죽고, 아이도 죽고….”


그녀는 다시 왼손을 뻗어 장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 그런데 나는 왜 안 죽었을까?”


장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 밖으로 해가 저물었다. 어둠이 내릴 동안 공주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달빛이 부드럽게 비쳐들기 시작했을 때에야 공주는 여전히 왼손으로 다친 오른손을 감싸 잡은 채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창가로 갔다. 창턱에 앉아 창문을 열고 진한 쪽빛으로 흘러가는 이른 밤의 하늘을 내다보았다. 수줍은 별빛이 부드럽게 반짝이고, 어린 반달이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내려다보며 짙은 남빛 속을 한들한들 떠 갔다. 언젠가, 좋았던 시절에, 유모의 등 뒤로 저런 달을 보았던 것 같다고 공주는 생각했다.


그리고 공주는 창턱에 앉은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탑은 무척 높았고, 밤의 어둠에 가려져아래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말도 죽고, 아이도 죽고….”


공주는 중얼거렸다. 다시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엉켜 버렸지만, 이어진 건 풀 수도 없고….”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 유모가 보고 싶어.”


공주가 달을 향해 속삭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잠시만 더 이대로 머무르자고 공주는 결심했다. 탑의 아래쪽은 언젠가 국경 지방의 숲 속처럼 너무 깊고 깜깜했다. 그러나 이 탑을 나간다고 해도 ‘자신이 왔던 세계’의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공주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어진 것은 죽지 않는 한 풀 수 없고, 그리고 유모가 보고 싶었기 때문에, 공주는 조금만 더 머무르기로 했다. 잠시만 더, 이대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 누구와도 이어지지 않은 채, 지금처럼 이 높은 탑의 창턱에 상처 입은 손을 감싸 쥔 채 혼자 앉아서, 잠시만 더 - 마음이 다시 한 번 어딘가를, 누군가를 원할 때까지. 다시 삶을 살고 싶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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